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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1권, 총서 117번째기사

사직을 청하는 태조의 전문과 윤허치 않는 비답이 오가다

3월, 태조가 전문(箋文)을 올려 사직(辭職)하고자 하였다.

"신(臣)은 용렬한 사람으로서 특별히 별다르게 대우하는 은혜를 입어 직위는 항상 장상(將相)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털끝만한 도움도 없으니, 마땅히 현인(賢人)을 등용하는 길을 피하여 임금의 밝은 정치를 열어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얕은 정성을 다하여 다시 천총(天聰)을 모독하였으나 매양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니, 조심하고 두려워함이 더욱 심합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는 크고 작은 것이 있고 일은 옛날과 지금이 다르지만, 그 임금과 신하의 서로 만나기가 어려운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漢)나라고조(高祖)는 창업(創業)한 군주로서 사람을 알아서 잘 임용(任用)하였지마는, 공신(功臣)을 대우하는 데 이르러서는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은 그 결점에 불만이 있었으며, 광무제(光武帝)는 중흥(中興)한 군주로서 호걸(豪傑)을 망라(網羅)하여 한왕조(漢王朝)를 광복(匡復)하고, 또 공신(功臣)을 잘 대우하여 그 종말을 보전하였으니, 뒷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잘함(好)을 칭찬하였습니다. 그 공신은 한신(韓信)주발(周勃)도 마침내 장양(張良)의 〈그 종말을〉 보전한 것만 같지 못하고, 구순(寇恂)123)등우(鄧禹)124) 도 오히려 엄자릉(嚴子陵)125) 의 고절(高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신이 비록 배우지 못했지마는 장양(張良)엄자릉(嚴子陵)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광무제(光武帝)와 같이 하기를 원합니다.

신이 병신년 6월에 선부(先父)인 신(臣) 이자춘(李子春)을 모시고 현릉(玄陵)에게서 명령을 받아 쌍성(雙城)을 평정하고 옛 강토를 수복하고는, 남은 힘을 빙자하여 땅을 넓혀 청주(靑州)까지 이르러 번진(藩鎭)으로 삼고 동쪽을 돌아다볼 근심이 없게 하였으니, 현릉께서 그 공(功)을 가상(嘉尙)히 여겨 신의 아버지를 영록 대부 판장작감사(榮祿大夫判將作監事)로 삼고 그대로 삭방도 만호(朔方道萬戶)로 삼았으며, 또 신을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 승진시켜 나이 30이 되기 전에 직위가 재보(宰輔)에 이르렀지마는, 아무런 보좌한 것이 없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무진년에 이르러 가성(假姓)126) 이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니, 사람들이 감히 간(諫)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장차 사직(社稷)이 전복될 지경이었습니다. 신이 맨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킨 일이 있어서 다시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했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군사를 마음대로 부렸다고 하며, 다시 기사년에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위성(僞姓)127) 을 멸망시키고 진성(眞姓)128) 을 회복시켜 능히 종사(宗社)를 바로잡았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국가의 실권(實權)을 잡았다고 하며, 지금은 통제군사(統諸軍事)가 되어 군사를 기르[養兵]고 가만히 지키고 있으면서 간웅(奸雄)을 진압 굴복시키고 외구(外寇)를 몰래 소멸시켰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군자(軍資)를 소모시켰다 하여 물의(物議)가 분분(紛紛)하니, 변명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신은 세 가지의 불행한 일이 있으니, 공(功)은 작은데 상(賞)은 커서 남에게 꺼린 바가 된 것이 그 한 가지 불행한 일이요, 사직(社稷)을 보전하고 정통(正統)을 회복하고 도적을 금지시킨 등의 일에 조그마한 도움이 없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은총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이 그 두 가지 불행한 일이요, 예로부터 공과(功過)는 서로 가리워질 수가 없는데, 고집이 세고 명민(明敏)하지 못하여 용기 있게 물러가지 못한 것이 그 세 가지 불행한 일입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게 되매 진실로 황공합니다. 이윤(伊尹)은 말하기를, ‘신하는 은총과 이익을 성공이라고 여기지 말라.’고 하였으며, 채택(蔡澤)은 말하기를, ‘사시(四時)의 질서는 공을 이룬 자는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곧 자연의 이치입니다. 신은 마땅히 오랫동안 현인의 등용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될 것이므로, 바라옵건대, 전리(田里)에 돌아가서 여생(餘生)을 보전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공신(功臣)을 보전시켜 준 덕으로 유독 광무제(光武帝)에게만 혼자 칭찬 듣게 하지 마옵소서."

왕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였다.

"대신(大臣)의 한 몸은 국가의 흥함과 쇠함에 관계되고, 백성의 기쁨과 근심이 매여 있는 바, 직임(職任)이 이처럼 무거우니 거취(去就)를 가벼이 할 수가 없소. 이로써 소공(召公)이 돌아갈 것을 고(告)하려는 마음이 있고, 주공(周公)은 임금을 후하게 보좌하는 의리가 있었소. 경(卿)은 산천(山川)의 기운을 타고난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요, 사직의 원훈(元勳)이 되는 신하이오. 국사를 위하여 사사(私事)를 잊으니 충성이 해를 꿰뚫고, 대의(大義)에 의지하여 신의(信義)에 편안하니 공업(功業)은 하늘을 떠받들었소. 이에 선왕(先王)의 때부터 과인(寡人)의 때에 이르기까지 그대의 힘을 내어 우리 나라를 안녕하게 하였소. 무진년의 중국을 침범하는 군사를 저지시키고 기사년의 난리를 평정하는 계책을 정했으니, 국운(國運)이 이로써 다시 이어졌으며, 백성이 이로 말미암아 다시 소생되었소. 또 그 군병(軍兵)을 훈련 양성하여 국가를 방위했으니, 일이 모두 천리에 합하는데, 마음이 어찌 남의 말을 돌보겠는가? 은총의 지위에 있기를 놀란 것과 같이 하니, 경의 자기 처신은 잘하지마는, 모의를 합하고 정사를 같이 하는데 나의 맡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아아! 엄자릉(嚴子陵)의 고절(高節)은 광무제(光武帝)가 일로써 맡기지 않았으며, 유후(留侯)129) 의 가버림에 한(漢)나라가 그 편안함을 이루었으나, 옛일로써 지금의 일을 비교하건대 형세가 다르고 일이 다르니, 마땅히 그 직위에 안정하여 나의 마음에 부합(副合)하게 하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6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고사(故事)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註 123]
    구순(寇恂)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신(名臣).
  • [註 124]
    등우(鄧禹)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신(名臣).
  • [註 125]
    엄자릉(嚴子陵) : 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의 자(字). 어릴 때 광무제(光武帝)의 친구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변성명(變姓名)하고 숨어 사는 것을, 광무제가 찾아 간의 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隱居)하였음.
  • [註 126]
    가성(假姓) : 신우(辛禑).
  • [註 127]
    위성(僞姓) : 신씨(辛氏).
  • [註 128]
    진성(眞姓) : 왕씨(王氏).
  • [註 129]
    유후(留侯) : 장양(張良).

○三月, 太祖上箋辭職曰:

臣以庸劣, 特蒙殊遇之恩, 位極將相, 尙無絲毫之補, 宜避用賢之路, 以開聖明之治。 肆竭卑悰, 再瀆天聰, 每被不允, 戰兢尤深。 竊以國有大小, 事殊古今, 其君臣相遇之難則不異。 高祖以創業之主, 知人善任, 至於待功臣, 則識者有憾其缺; 光武以中興之主, 網羅豪傑, 匡復室, 且善處功臣, 以保其終, 後人咸稱其美。 其功臣則韓信周勃, 終不如張良之保; 寇恂鄧禹猶不及子陵之高。 臣雖不學, 願効張良子陵, 伏惟殿下, 願如光武。 臣於丙申六月, 陪先父臣 【桓祖諱。】 , 受命玄陵, 平雙城復舊疆, 憑藉餘力, 拓土至靑州, 以爲藩鎭, 使無東顧之憂。 玄陵是嘉其功, 拜臣父以榮祿大夫判將作監事, 仍爲朔方道萬戶。 又擢臣以不次, 年未三十, 位至宰輔, 然無所補, 夙夜憂懼。 至戊辰年間, 假姓發兵猾, 人無敢諫, 將覆社稷。 臣首倡大義, 有回軍之擧, 再安宗社, 是則人以爲擅兵; 復於己巳, 欽奉聖旨, 滅僞姓復眞, 克正宗祀, 是則人以爲執權; 今爲諸軍事, 養兵守靜, 鎭服奸雄, 潛消外寇, 是則人以爲耗軍資, 物議紛紜, 難以辨明。 臣有三不幸, 功微賞鉅, 爲人所忌, 一不幸也; 保社稷、復正統、弭盜賊等事, 未嘗無涓埃之助, 因以居寵, 二不幸也; 自古功過不能相掩, 執迷不能勇退, 三不幸也。 念至於此, 誠惶誠恐。 伊尹曰: "臣罔以寵利居成功。" 蔡澤云: "四時之序, 成功者去。" 是乃自然之理, 臣不宜久阻賢路。 乞歸田里, 以保餘齡, 臣之願也。 伏望上慈, 俾保全功臣之德, 不獨專美於光武

王不允批答曰: "大臣一身, 關國家之興衰, 係生民之休戚。 職任如此其重, 去就未可以輕。 是以召公有告歸之心, 周公有篤棐之義。 卿山川間氣, 社稷元臣。 徇公忘私, 忠誠貫日; 仗義安信, 功業柱天。 爰自先王之時, 以至寡人之日。 勉出乃力, 輯寧我邦。 遏戊辰猾夏之師, 定己巳撥亂之策。 國祚以之而復續, 生民由是而再蘇。 且鍊養其戎兵, 以捍禦于王室。 事皆合於天理, 心何恤乎人言! 居寵若驚, 卿之自處則善; 協謀共政, 予所任者爲誰? 於戲! 子陵之高, 光武不任以事; 留侯之去, 室以致其安。 以古視今, 勢殊事異。 宜安厥位, 以副予心。"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6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고사(故事)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