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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1권, 총서 69번째기사

태조가 단주에 침입한 호발도를 격퇴하고 변방을 평안히 할 계책을 올리다

신우(辛禑) 9년(1383) 계해 8월, 호발도(胡拔都)가 또 와서 단주(端州)를 침구(侵寇)하니, 부만호(副萬戶)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외적(外敵)과 내응(內應)하여 재화(財貨)를 다 가지고 고의로 뒤에 있다가 짐짓 적에게 잡히었다. 상만호(上萬戶)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웠으나 모두 패전하였다. 이때 이두란(李豆蘭)이 모상(母喪)으로 인하여 청주(靑州)에 있었는데, 태조가 사람을 시켜 불러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상복(喪服)을 입고 집에 있을 수가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라오라."

하니, 두란이 이에 상복을 벗고 절하고 울면서 하늘에 고(告)하고 활과 화살을 차고 태조를 따라갔다. 호발도(胡拔都)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났는데, 두란이 선봉(先鋒)이 되어 먼저 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태조가 조금 후에 이르렀는데,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세 겹이나 입고 붉은 털옷[褐衣]을 껴입었으며, 흑색 암말[牝馬]을 타고 진(陣)을 가로막아 기다리면서 속으로 태조를 깔보아, 그 군사는 남겨 두고 칼을 빼어 앞장서서 달려나오니, 태조도 또한 단기(單騎)로 칼을 빼어 달려나가서 칼을 휘둘러 서로 쳤으나, 두 칼이 모두 번득이면서 지나쳐 능히 맞히지 못하였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타기 전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려 활을 당겨 그의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는지라, 곧 또 그의 말을 쏘아 꿰뚫으니,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호발도가 땅에 떨어졌다. 태조가 또 그를 쏘려고 하니, 그 휘하의 군사들이 많이 몰려와서 그를 구원하고, 우리 군사들도 또한 이르렀다.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적군을 쳐부수니, 호발도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 갔다. 태조가 이로 인하여 변방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올렸는데, 그 계책은 이러하였다.

"북계(北界)039)여진(女眞)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 그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양 저들과 무역[互市]하여 날로 서로 가까워져서 혼인까지 맺게 되었으나, 그 족속(族屬)이 저쪽에 있으므로 유인해 가기도 하고, 또는 향도(嚮導)가 되어 들어와 침구(侵寇)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唇亡齒寒]게 되므로, 동북면 한 방면의 근심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또 전쟁의 이기고 이기지 못한 것은 지리(地利)의 득실에 달려 있는데, 저들 군사의 점거한 바가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도 이를 버리고 도모하지 아니하니, 이에 중한 이익을 가지고 멀리 우리의 오읍초(吾邑草)·갑주(甲州)·해양(海陽)의 백성들에게 주어서 그들을 유인해 가기도 하고, 지금 단주(端州)·독로올(禿魯兀)의 땅에 뛰어들어와서 사람과 짐승을 노략질해 가니, 이로써 본다면 우리 요해지의 지리·형세는 저들도 진실로 이를 알고 있습니다. 신(臣)이 방면(方面)에 임무를 받고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삼가 변방의 계책을 계획하여 아뢰옵니다.

1. 외적(外敵)을 방어하는 방법은 군사를 훈련하여 일제히 적군을 공격하는 데 있는데, 지금은 교련(敎鍊)하지 않은 군사로써 먼 땅에 흩어져 있다가 도적이 이르러서야 창황(倉皇)히 불러 모으게 되므로, 군사가 이르렀을 때는 도적은 이미 노략질하고 물러가 버렸으니, 비록 뒤따라 가서 싸워도, 그들이 기[旌]와 북[鼓]을 익히지 않았으며 치고 찌르는 것도 연습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컨대, 지금부터는 군사를 훈련하는 데에 있어 약속(約束)을 엄하게 세우고 호령(號令)을 거듭 밝혀서, 변고를 기다려 군사를 일으켜 일의 기회[事機]를 잃지 마옵소서.

1. 군사[師旅]의 생명은 군량에 매여 있으니, 비록 백만의 군사라도 하루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하루의 군사가 되고, 한 달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한 달의 군사가 되니, 이는 하루라도 식량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도(道)040) 의 군사는 예전에는 경상도(慶尙道)·강릉도(江陵道)·교주도(交州道)의 곡식을 운반하여 공급하였으나, 지금은 도내(道內)의 지세(地稅)로써 이를 대체시켰는데, 근년에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로 인하여 공사(公私)가 모두 고갈되었고, 게다가 놀고 먹는 중[僧]과 무뢰인(無賴人)이 불사(佛事)를 핑계하고서 함부로 권세 있는 사람의 서장(書狀)을 받아서 주군(州郡)에 청탁하여, 백성들의 한 말[斗]의 쌀과 한 자[尺]의 베를 빌린다고 하고는, 섬[甔石]이나 심장(尋丈)041) 으로써 거둬들이면서 이를 반동(反同)이라 명칭하며 바치지 아니한 빚[逋債]처럼 징수하여, 백성이 배고프고 추위에 떨게 되었으며, 또 여러 아문(衙門)과 여러 원수(元帥)들의 보낸 사람이 떼를 지어 다니며 기식(寄食)하여 백성의 피부를 벗기고 골수를 쳐부수니, 백성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처소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십상팔구(十常八九)이니, 군량(軍糧)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원컨대, 모두 이를 금단(禁斷)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소서. 또 도내(道內)의 주군(州郡)은 산과 바다 사이에 끼여서 땅이 좁고도 척박한데, 지금 그 지세(地稅)를 징수하는 것이 경지(耕地)의 많고 적은 것은 묻지도 않고 다만 호(戶)의 크고 작은 것만 보게 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道內)에서도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모두 이민(吏民)의 지록(地祿)042) 인데도, 그 지세(地稅)는 관청에서 거둘 수가 없게 되어, 백성들에게 취하는 것이 균등하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이 넉넉하지 못하니, 금후(今後)로는 도내(道內)의 여러 주(州)와 화령(和寧)에 한결같이 경지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세(稅)를 부과하여 관청과 민간에 편리하게 하소서.

1. 군사와 백성이 통속(統屬)되는 곳이 없으면 위급한 경우에 서로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로써 선왕(先王)의 병신년의 교지(敎旨)에, 3가(家)로써 1호(戶)로 삼아 백호(百戶)로써 통솔하고, 통주(統主)를 수영(帥營)에 예속시켜, 사변이 없으면 3가(家)가 상번(上番)하고, 사변이 있으면 다 함께 나오고, 사변이 급하면 가정(家丁)을 모두 출동시키게 하였으니, 진실로 좋은 법이었습니다. 근래에는 법이 폐지되어 통속된 곳이 없으므로, 매양 군사를 징발할 적엔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으므로 불러모으기가 어려우며, 지금 또 가물어 흉년이 들어서 민심이 더욱 이산(離散)되었는데, 저들은 금전과 곡식으로써 미끼를 삼아 불러 들이고, 군사를 몰래 거느리고 와서 노략질하여 돌아가니, 한 지방의 곤궁한 백성이 이미 항심(恒心)도 없는데다가, 또 모두가 잡류(雜類)이므로, 저쪽과 이쪽을 관망하다가 다만 이익만을 따르게 되니, 실로 보전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원컨대, 병신년의 교지(敎旨)에 의거하여 다시 군호(軍戶)를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통속(統屬)이 있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단단히 매[固結]게 하소서.

1. 백성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매여 있고, 군사의 용감함과 겁내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는데, 지금의 군현(郡縣)을 다스리는 사람은 권세있는 가문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세력만 믿고 그 직무는 근신하지 아니하여, 군대는 그 물자(物資)가 모자라게 되고, 백성은 그 직업을 잃게 되어, 호구(戶口)가 소모되고 부고(府庫)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청렴하고 근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공정하게 선출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하여 홀아비와 홀어미를 사랑하고 어루만져 주게 하며, 또 능히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뽑아,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려서 국가를 방어하게 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9면
  • 【분류】
    인물(人物) / 정론(政論) / 왕실(王室) / 행정(行政) / 역사(歷史) / 외교(外交)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註 039]
    북계(北界) : 함길도.
  • [註 040]
    도(道) : 함길도.
  • [註 041]
    심장(尋丈) : 심(尋)은 8척 장(丈)은 10척.
  • [註 042]
    지록(地祿) : 땅에서 생산되는 녹미(祿米).

〔○〕辛禑九年癸亥八月, 胡拔都又來寇端州, 副萬戶金同不花內應, 盡以財貨故後, 陽爲被執。 上萬戶陸麗靑州上萬戶黃希碩等累戰皆敗。 時李豆蘭以母喪在靑州, 太祖使人召謂之曰: "國家事急, 子不可持服在家, 其脫衰從我。" 豆蘭乃脫衰服, 拜哭告天, 佩弓箭從行。 與胡拔都遇於吉州平, 豆蘭爲前鋒, 先與戰, 大敗而還。 太祖尋至, 胡拔都著厚鎧三重, 襲紅褐衣, 乘黑牝馬, 橫陣待之。 意輕太祖, 留其軍士, 拔劍挺身馳出, 太祖亦單騎, 拔劍馳進, 揮劍相擊, 兩皆閃過不能中。 胡拔都未及騎馬, 太祖急回騎, 引弓射其背, 鎧厚箭未深入, 卽又射其馬洞貫, 馬倒而墜。 太祖又欲射之, 其麾下大至, 共救之, 我軍亦至。 太祖縱兵破之, 胡拔都僅以身遁去。 太祖因獻安邊之策曰: "北界與女眞達達 之境相連, 實爲國家要害之地。 雖於無事之時, 必當儲糧養兵, 以備不虞。 今其居民, 每與彼俗互市, 日相親狎, 至結婚姻, 而其族屬在彼, 誘引而去, 又爲鄕導, 入寇不已。 唇亡齒寒, 非止東北一面之憂也。 且兵之勝否, 在於地利之得失。 彼兵所據, 近我西北, 舍而不圖, 乃以重利, 遠啗我吾邑草甲州海陽之民以誘致之, 今又突入端州禿魯兀之地, 驅掠人物。 以此觀之, 我之要害地利形勢, 彼固知之矣。 臣受任方面, 不可坐視, 謹籌邊策以聞。 一, 禦寇之方, 在於鍊兵齊擧。 今也以不敎之兵, 散處遠地, 及寇之至, 倉皇招集, 比其至也, 寇已擄掠而退。 雖及與戰, 其如不熟旌鼓, 不習擊刺何? 願自今鍊兵訓卒, 嚴立約束, 申明號令, 待變而作, 無失事機。 一, 師旅之命, 係於糧餉。 雖百萬之師, 有一日之糧, 方爲一日之師; 有一月之糧, 方爲一月之師。 是不可一日無食也。 此道之兵, 昔運慶尙江陵交州之穀以給之, 今以道內地稅代之。 比因水旱, 公私俱竭, 加以遊手之僧, 無賴之人, 托爲佛事, 冒受權勢書狀, 干謁州郡, 借民斗米尺布, 斂以甔石尋丈, 號曰反同, 徵如逋債, 民以飢寒。 又諸衙門、諸元帥所遣之人, 群行傳食, 剝膚搥髓, 民不忍苦, 失所流亡, 十常八九, 軍之糧餉, 無從而出。 乞皆禁斷, 以安百姓。 又道內州郡, 介於山海, 地狹且瘠, 今其收稅, 不問耕田多寡, 惟視戶之大小。 和寧於道內, 地廣以饒, 皆吏民地祿, 而其地稅, 官不得收, 取民不均, 餉軍不足。 今後道內諸州及和寧, 一以耕田多寡科稅, 以便公私。 一, 軍民非有統屬, 緩急難以相保。 是以先王丙申之敎, 以三家爲一戶, 統以百戶, 統主隷於帥營。 無事則三家番上, 有事則俱出, 事急則悉發家丁, 誠爲良法。 近來法廢, 無所維繫, 每至徵發, 散居之民, 逃竄山谷, 難以招集。 今又旱饑, 民心益離, 彼用錢穀, 餌以招納, 潛師以來, 擄掠而歸。 一界窮民, 旣無恒心, 又皆雜類, 彼此觀望, 惟利之從, 實爲難保。 乞依丙申之敎, 更定軍戶, 使有統屬, 固結其心。 一, 民之休戚, 係於守令; 軍之勇怯, 在於將帥。 今之爲郡縣者, 出於權幸之門, 恃其勢力, 不謹其職, 以致軍觖其須, 民失其業, 戶口消耗, 府庫虛竭。 乞自今公選廉勤正直者, 俾之臨民, 字撫鰥寡, 又擇堪爲將帥者, 俾之摠戎, 捍禦國家。"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9면
  • 【분류】
    인물(人物) / 정론(政論) / 왕실(王室) / 행정(行政) / 역사(歷史) / 외교(外交) / 군사(軍事)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