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길·송시열의 사람 됨됨이를 아뢰다
살펴보건대, 송준길·송시열 등은 평소부터 존주(尊周)의 의리를 지닌 까닭에 모든 소장(疏章)에 청국(淸國)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았고, 전후로 벼슬에 제수하는 교지(敎旨)에도 조정이 연호를 쓰지 말도록 허락을 하였다. 그러나 송준길은 그 고대(高大)하여 행하기 어려운 설(說)에 【토복(討復)의 일을 가리킴.】 대해서는 또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승지와 사관만을 남게 한 뒤 함께 대계(大計)를 의논하였으나, 사관더러 의논한 내용을 쓰지 말라고 명하신 까닭에 그 내용이 끝내 전하지 않는다.
또 경연 석상에서 소매 속에 차자를 넣어 가져가 올리면서 제주(濟州)로부터 사신 한 명을 보내 천조(天朝)068) 에 통문(通問)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주씨(朱氏)의 일맥(一脈)이 아직은 남쪽 끝에 남아 있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이외 궁궐에 관계된 일로 아무나 말하기가 어려운 것들에 대해서도 모두 차자를 품속에 지니고 들어가 비밀히 아뢰면서 꺼리는 바가 없었는데, 상께서 또한 흔쾌히 가납(嘉納)하시고 양궁(兩宮)이 더욱 화기애애하여 끝까지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으니, 군신간의 뜻이 들어맞는 정도가 이러하였다.
그가 이정(李楨)·남(枏)069) 을 논한 일은 특히 후세의 귀감이 되므로, 여기에 함께 추록(追錄)한다.
그의 정유년 【8월.】 차자에 말하기를
"신이 《고려사》를 보니, 당나라 명황(明皇)이 촉(蜀)으로 피난했을 때 고려가 사신을 보내 육해(陸海) 수만 리 밖을 갖은 고생 끝에 가서 안부를 물으니, 명황이 몹시 반기면서 시를 지어 보냈고, 송나라가 고려 쪽으로 남도(南渡)하여 금(金)에게 눌리고 있을 때에도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물어 오랑캐의 정세를 통지하였습니다. 이 일이 오늘날까지 사가(史家)들의 미담이 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정이 3백 년 동안 명나라를 섬겨 온 그 정리와 의리에 대해서야 말할 필요가 없더라도 신종 황제가 우리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만큼은 천지개벽 이래로도 서적에 유례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선조 대왕께서 말씀하신 ‘의리로는 군신(君臣)이지만 은혜는 부자(父子)나 마찬가지이다.’는 것이야말로 진정 통절한 얘기입니다.
아, 하늘이 벌을 내리어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이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어찌 차마 말을 하겠습니까.
저으기 듣건대, 제실(帝室)의 주자(胄子)가 아직 광동(廣東)·복건(福建)의 사이에 살아 남아 있다고 하니, 천하의 대통(大統)이 송두리째 위적(魏賊)에게 도둑질 당하지는 않은 셈인데, 우리 나라는 까맣게 모른 채 서로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는 지가 지금까지 여러 해입니다. 비록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기는 하나, 고려 조정이 당(唐)과 송(宋)에 안부를 물은 것과 비교할 때 어찌 크게 부끄러운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는 실로 충신·의사들이 자나깨나 애를 태우며 성명께 깊이 바라고 있는 것이고, 우러러 생각건대, 성상께서도 어찌 하루라도 이 마음을 잊으셨겠습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선대왕(先大王)께서 늘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문안을 보낼 방도를 모색하시곤 하였으며 또한 일찍이 누차 시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따라 이어 공을 도모하는 일에 분발하여 밤낮으로 천하에 일이 있게 될 날을 기다리시고, 저들의 형세도 이미 하늘에게 싫증을 받았으니만큼 실로 오래가기 어려운 조짐이 있으니, 비록 이해(利害)로써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도리로서는 어찌 조기에 중원(中原)의 사정을 알아내어 미리 손을 쓰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저으기 들으니, 중국 조정의 백성과 선비로서 우리 나라 사람을 만나는 자는 반드시 눈물을 떨구면서 말하기를 ‘대명(大明)의 멸망은 전적으로 금주(錦州)의 함락 때문이고 금주의 함락은 오로지 너희 나라의 정예포(精銳砲) 때문이었다.’고 한다 합니다. 신이 늘 이에 생각이 미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초(楚)가 비록 세 집밖에 남지 아니해도 진(秦)를 멸망시키는 것은 틀림없이 초(楚)일 것이다.070) ’ 하였는데, 이는 원통함이 심하여 앙갚음을 반드시 하리라는 말입니다. 아, 이것은 무엇보다도 두려운 일입니다.
신이 들으니, 제주(濟州) 한 도(島)는 남쪽 바다 가운데 외부와 차단되어 있어서, 무릇 행상(行商)하는 중국 선박으로 해외(海外) 제국에 왕래하는 자들이 대부분 제주를 지나서 가다가 해풍을 만나 해안에 정박한 채 며칠씩 발이 묶이는 경우가 흔한데 그곳을 지키는 신하가 그 난처함을 염려하여 그때마다 돌아가도록 내보낸다고 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를 인하여 수를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제주는 또 지역이 멀고 바다가 격해 있으니 일과 기틀에 비밀이 유지될 수 있어 소문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쪼록 우선 재주와 성의를 겸비하고 충성과 신의가 믿을 만한 시종신(侍從臣) 한 사람을 선택하여 제임(濟任)을 제수하고 그로 하여금 요모조모로 계획을 세워, 시간을 한정하지 말고 기필코 그 수로(水路)를 통하게 한 다음 조정에서 뒤이어 사신을 보내면, 우리 조정 군신 상하의 수십 년 쌓인 통절하고 억울한 성의를 혹시 하루 아침에 천조에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우선 수로를 뚫으라는 것이 만약 혹시라도 불리하여 청인(淸人)의 지역에 표박(漂泊)하게 되면, 반드시 의심과 힐난이 벌어져 무사하던 중에 화를 돋울 것이니, 어찌 무겁고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점은 아무래도 제주 목사가 어떻게 조화(造化)를 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별도로 기계(奇計)를 쓸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단지 행자(行資)만 마련하여 배에 실어 떠나 보내면서 조촐하게 공문(公文)을 만들어 마치 양호(兩湖)에 관용품(官用品)을 판무(販貿)하는 자처럼 꾸며 일행(一行)이 믿게 만들고, 중국 조정에 통문(通文)하는 글의 경우에도 제주 목사의 문자(文字)를 쓰되 다만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우선 통로(通路)를 만든다.’는 뜻만을 언급하여, 눈에 띄지 않도록 단단히 싸매고 꼭꼭 숨겨 지니게 함으로써, 설혹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누설함이 없게 하면, 성사가 비록 되지 않더라도 그냥 바다를 표류한 행상과 다름이 없으므로 틀림없이 다른 걱정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밖에 행인(行人)을 고르는 일과 저곳에 도착하여 임기응변하면서 중국의 사정을 탐지하는 등의 일은, 모두 제주 목사가 잘 생각하여 적절하게 처치하는 데에 달려 있을 따름이지, 일일이 먼데서 헤아리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요새 듣건대, 제주 목사의 임기 만료가 가깝다고 하니, 이번에 가려뽑는 명을 인하여 은밀히 지휘를 내리신다면 더욱더 자취가 없을 듯합니다. 성명께서는 심사숙고하시어 재처(裁處)하소서."
하였다.
그의 기해년 【7월.】 소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자(慈)’이고 자식이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효(孝)’인데, 자효(慈孝)의 도리는 천성(天性)에 뿌리박히고 본심에서 우러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힘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어야 될 법하나, 세도가 떨어지고 풍속이 변질되어 더러 효도에 결함이 있거나 자애 또한 무너지게 되는데, 이것을 보통 사람이야 본디 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제왕가(帝王家)에 이 우환이 유난히 많은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정세(情勢)가 쉽게 막히고 참소와 이간질이 쉽게 기회를 타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제궁(諸宮) 사이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알랑거리며 일을 하는 자는 모두가 환시(宦寺)와 부인(婦人)들인데, 이 자들의 성품이 대부분 음험하고 사특하며 교활하고 약삭빨라, 간사한 심보로 제몸만을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좋아하며 재앙을 내심 즐거워하면서, 효도와 자애가 무엇인지와 예의와 의리가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오직 저것은 저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힘을 나누어 각립(角立)하여, 많고 적음을 다투고 겨루려는 생각만 가집니다. 그리하여 은혜와 원망이 그들의 가리키고 돌아보는 데에서 생겨나고, 이익과 해로움이 그들의 향배(向背)에 따라 결정되며,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여, 귀신이나 물여우처럼 수만 가지 정상으로 혹은 격동시켜 원망하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으름장을 놓아 두렵게 만들기도 하니, 자칫 혹시라도 귀를 기울이어 듣고 믿는 날이면, 스스로 불효에 떨어지고 어버이를 부자(不慈)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역시 군덕(君德)이 어떤가를 볼 따름입니다. 임금이 진정 자기 몸을 올바르게 하고서 상대를 거느린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위로 두 자전을 모시면서 정성과 예의를 빠짐없이 다하여 자·효(慈孝)에 이간(離間)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어버이를 모시는 것이 이미 지극하다.’고 여기신다면, 이는 효자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고, 대왕 대비전에 있어서 그야말로 이른바 의(義)를 인하여 은혜를 융숭하게 한다는 것이, 실은 소인과 여자들이 손쉽게 틈을 엿보아 말썽을 자아내는 곳이 됩니다.
신이 삼가 전대(前代)의 일을 살펴보건대, 위로 자친(慈親)이 계시고 아래로 효사(孝嗣)가 있는데도 못된 환관이나 참소하는 궁첩이 꾸며낸 말에 홀려 그 효도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이는 비록 성명에게 염려되는 바야 절대로 아니기는 해도 내심 우려를 갖다보니 또한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역(大易) 가인(家人)의 뜻을 거울삼고 《소학(小學)》 명륜(明倫)의 가르침071) 을 본받아,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엄격하고 집안을 바루는 일에 근신하는 한편, 더욱더 성의와 사랑을 이르게 하고 더욱더 효도와 공경을 독실히 함으로써, 좌우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양궁(兩宮)의 자애와 효심에 이간이 없으니 우리들의 참소와 이간질이 그 사이에 행해질 수가 없다.’는 점을 환히 모두 알게 하고, 아울러 그 효도와 자애를 성취시키는 자는 안전함을 얻고 둘 사이에 틈을 만드는 자는 죄를 얻는다는 것을 보이신다면, 자연히 음험·사특한 자가 이간하여 어지럽히는 걱정이 없게 되어 효도에 부족함이 없고 인의(仁義)가 극진하며 사전(四殿)에 화기가 넘치어 만복(萬福)이 모두 이를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구족(九族)을 친목(親睦)하는 것이 보통 사람에 있어서야 두말할 필요없이 아름다운 일이지만, 제왕가에 있어서는 더욱더 성덕(盛德)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인께서 ‘윤리(倫理)를 바루고 은애(恩愛)를 돈독히 하라.’ 하신 가르침에 윤리를 바루는 일이 은애를 돈독히 하는 것보다 앞에 있으니, 그 깊은 뜻을 떠올릴 수 있으며, 윤리를 바로잡지 못하고서도 은애를 돈독하게 해낸 경우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말세에 있어서는 사변이 다단하니, 모든 언행을 더욱더 심장하게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만일 단지 친애(親愛) 만을 위주로 하고 다시 예의(禮儀)로써 마름질을 아니하여 그대로 무한히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그 친애한다는 것이 그저 화(禍)를 기른 셈이 될 뿐입니다.
신이 장로(長老)에게 듣건대, 우리 세종 대왕께서 광평 대군(廣平大君)이 일찍 요절한 것을 슬프게 여기어 그의 아들을 궁중에 머물려두고 양육하였는데, 문묘(文廟)072) 께서 왕위에 오르신 뒤 즉시 밖에 내보내라고 명하셨고, 선조 대왕께서는 여러 왕자나 왕손이 계자(啓字)073) 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니, 그 깊고 원대하신 계산이야말로 후세에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궁금에 관한 일은 진정 바깥 사람이 감히 알 바 아니기는 하나, 근일 이래 바깥 의논이 쑥덕공론을 하면서 모두들 ‘두 왕자 및 그의 부인들이 대왕 대비전에 밑도끝도없이 드나들며 여러 날을 유숙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로 인해 양전(兩殿) 사이에 잡스런 얘기가 오가게 만들었으며, 뿐만 아니라 인평 대군의 두 아이가 선왕조 때부터 궁중에 남아 자랐는데 그 형이 지금 흉복(凶服) 중에 있는데도 거침없이 출입을 하니, 궁중 밖의 말이 궁중 안에 들어가고 궁중 안의 말이 궁중 밖에 새나가는 것이 혹시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을 하니, 신은 가슴이 미어지고 억장이 무너짐을 누를 수 없습니다. 일찍이 탑전에서 그 단서를 슬쩍 말씀드리기는 하였으나, 또한 감히 그 소회를 모두 털어놓지는 못했습니다.
대체로 형제를 나와 한몸으로 여기고 형제의 아들을 나의 아들처럼 여기는 일이 선왕(先王)에게 있어서 진정 성대한 덕이자 지극한 행실로, 삼대(三代)074) 이 후 역사에서 찾아보더라도 그만한 경우가 실로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하의 경우는 이미 형제도 없고 또 아직은 세자도 없어 형세가 외롭고 위태하니, 안팎에서 걱정하고 두렵게 여기는 점이 그 친척 사이에 친분 관계는 멀어지고 혐핍(嫌逼)의 정도가 깊어지며, 선왕조 때와 비교할 때 또 똑같지 않은 면이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궁중에 머물려두고 양육한 사람이 이미 장성한 나이가 되었다니, 전하의 궁중에 어찌 타인(他人)을 더이상 붙여두어 화기(禍機)를 빚어냄으로써 충신·의사로 하여금 감히 말은 못해도 감히 걱정을 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맑은 아침이나 조용한 밤중에 한번 깊이 생각을 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말세에 사고(事故)가 다단했음을 떠올리고 세종(世宗)과 선묘(宣廟)의 깊은 계산을 몸받되, 그 중에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점은 또한 임시방편으로 선처하여 점차 올바르게 귀결시킬 방도를 생각하시고, 그 중에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점은 어서 부디 자전께 여쭈어 차근차근 상량하고 의리로써 절제하시는 한편, 보잘것없는 소인(小仁)에 구애하지 않음으로써 시종일관 친애하는 방도를 꾀하소서.
또한 신이 삼가 듣건대, 조종조 때에 여러 왕자나 왕손이 나이가 장성하면, 그 족속 가운데 남을 가르칠 만한 자를 별도로 명하여 교도(敎導)를 위탁함으로써 그 효과를 책임지웠고, 또 종학(宗學) 제도를 밝히어 종부시의 관원을 극선(極選)하고 그로 하여금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워 수시로 강학하고 토론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친들 중에 학문이 성취되고 행실이 높아 세인의 칭찬을 받은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조종의 고사에 따라, 나이가 장성한 왕자는 밖에 있는 사부(師傅)에게 나아가 배우도록 하고, 아울러 종학의 법제를 거듭 밝혀 겉치레가 되지 않고 착실하도록 힘쓰게 함이 진정 사의(事宜)에 맞을 것입니다.
신의 이 말은 진정 국가의 막중 막대한 일이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따끔히 깨달으시어 다시금 도모하시고 혹시라도 시일을 지체하므로써 후회를 남기지 마소서. 그렇게 되면 종묘 사직의 더없는 다행이자 신민(臣民)의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전후 아뢴 바를 모두 친필로 써서 올렸는데, 이는 밖에 누설되게 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30면
- 【분류】사상-유학(儒學) / 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
- [註 068]천조(天朝) : 명나라.
- [註 069]
이정(李楨)·남(枏) : 모두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아들로 정(楨)은 복창군(福昌君), 이남(李枏)은 복선군(福善君)이다. 둘이 함께 여러번 청(淸)나라에 사행(使行)을 하였고, 1680년(숙종6) 경신 대출척(庚申大黜陟) 때 복선군이 남인(南人) 허견(許堅)등의 추대를 받아 역모를 한다는 서인(西人) 측의 무고에 의해 아우 복평군(福平君) 이인(李禋)과 함께 유배·사사(賜死)되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註 070]
‘초(楚)가 비록 세 집밖에 남지 아니해도 진(秦)를 멸망시키는 것은 틀림없이 초(楚)일 것이다. : 전국(戰國) 시대 말기에 초 회왕(楚懷王)이 진(秦)나라의 꾀임에 빠져 진나라에 갔다가 그 곳에서 죽자 초나라 사람들이 그 일을 오래도록 불쌍히 여겼다. 그 무렵 초나라의 도사(道士) 초 남공(楚南公)이 "초(楚)가… 것이다."고 예언하였다. 《사기(史記)》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 [註 071]
대역(大易) 가인(家人)의 뜻을 거울삼고 《소학(小學)》 명륜(明倫)의 가르침 : 대역(大易)은 《주역(周易)》을 가리킨다. 《주역》의 가인괘(家人卦)에서는 가내(家內)의 도리를 밝혀 일가(一家)를 바로잡는 일을 설명하였고, 《소학(小學)》의 명륜(明倫)편은 오륜(五倫)의 덕목을 밝히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註 072]
문묘(文廟) : 문종(文宗).- [註 073]
계자(啓字) : 계(啓)라는 글자를 새긴 나무 도장으로 임금의 재가(裁可)를 맡은 문서에 찍는다.- [註 074]
삼대(三代) : 하·은·주(夏殷周).○按宋浚吉、時烈等, 素秉尊周之義, 故凡於疏章, 不書淸國年號, 前後除職敎旨, 朝家亦許以勿書。 然浚吉則其於高大難行之說, 亦不爲之。 【指討復事也。】 孝廟嘗於筵中, 只留承旨、史官, 共議大計, 而命史官勿書, 故其說終不傳。 又於筵中, 袖箚以進, 請從濟州送一使价, 通問天朝。 蓋意朱氏一脈, 尙在南裔也。 外此, 如宮闈間人所難言者, 亦皆懷箚密奏, 無所忌諱, 上亦欣然嘉納。 兩宮益和豫, 終絶間言, 其密勿契合, 有如是者。 其論楨、柟事, 尤爲後來之龜鑑, 故竝追錄於此。 其丁酉 【八月】 箚曰:
臣伏見《麗史》, 唐 明皇幸蜀, 高麗遣使貢問, 辛勤於陸海數萬里之外。 明皇喜甚, 作詩以送。 宋之南渡, 麗方伏制於金, 而亦遣使貢問, 以通虜情, 至今爲史家美譚。 恭惟, 我朝三百年來, 服事大明, 其情其義, 固不暇言。 而神宗皇帝再造之恩, 自開闢以來, 亦未聞於載籍者。 宣祖大王所謂義則君臣, 恩猶父子, 實是眞誠痛切語也。 嗚呼! 昊天降割, 致有今日, 思之腸割, 豈忍言, 豈忍言? 竊聞帝室之冑, 尙有偏安於廣、福之間, 天下大統, 不全爲魏賊所竊。 而我國漠然不得相聞, 于今幾年。 雖緣形勢之使然, 而其視麗朝之貢問唐宋, 豈不大有所愧? 此實忠臣義士之日夕腐心, 深有望於聖明者。 仰惟聖上, 亦豈一日而忘此心哉? 臣伏聞先大王每與諸臣, 謀所以遣問者, 亦嘗累有所試云。 今殿下聿追先志, 奮發圖功, 日夜俟天下之有事, 而彼之形勢, 亦已爲天所厭, 實有難久之兆, 則雖以利害言之, 我國之道, 豈可不早知中原之事情, 而豫爲之所乎? 臣竊聞, 中朝民士, 逢我國之人者, 必流涕而言曰: "大明之覆亡, 專由於錦州之淪陷。 錦州之淪陷, 專由於爾國之精砲。" 云。 臣每念至此, 心膽墮地。 古語云: "楚雖三戶, 亡秦必楚。" 蓋言其痛冤之甚, 報應之必然也。 嗚呼, 尤可懼哉, 尤可懼哉! 臣竊聞之, 濟州一島, 遮據南海之中, 凡漢船行商, 往來海外諸國者, 率多過濟而去, 遇風泊岸, 淹遲數日者, 比比有之。 爲守臣者, 慮其難處, 輒縱之使還云。 以是觀之, 似可因此有便, 而濟又地遠海隔, 可以秘事密機, 不煩瞻聽。 今須先擇一從臣才誠兼至、忠信可仗者, 授以濟任, 俾令周旋營幹, 不限遲速, 要得通其水路, 然後朝廷繼以使价, 則我朝君臣上下, 數十年痛迫冤鬱之誠意, 或可一朝而達于天朝矣。 然所謂先通水路者, 若或不利, 漂泊於淸人地方, 則必致疑詰, 挑禍於無事之中, 豈不重且愼歟? 此亦在濟牧之造化如何, 恐不須別用奇計, 只可具辦行資, 載船發送, 略爲公文, 如販貿官用於兩湖者然, 以爲一行之信。 至如通文中朝之書, 亦用濟牧文字, 而但及奉遵朝令, 先爲通路之意, 密莊堅持, 設有不幸, 必無漏洩, 則事雖不成, 便與漂海行商無異, 保無他虞矣。 其他揀得行人, 與其到彼應變, 探知中國事情等事, 皆在於濟牧潛思默量, 處置得宜而已, 有不可一一遙度者。 今聞濟牧瓜滿在近, 因此擇命, 密賜指揮, 尤似無迹。 惟聖明熟量而裁處焉。
其己亥 【七月】 疏曰:
臣聞, 父母之愛其子爲慈, 子之善事親爲孝。 慈孝之道, 根於天性, 出於本心, 宜無有不盡者, 而世降俗末, 或至於孝道有缺, 慈天亦虧, 恒人固有不免, 而在帝王家, 此患尤多。 其故何哉? 情勢易阻, 而讒間易乘故也。 蓋諸宮之間, 昵侍左右, 便嬖給事者, 無非宦寺與婦人也。 此輩之性, 例多陰邪狡獪, 挾姦而懷私, 喜亂而樂禍, 不知孝慈之爲何物, 禮義之爲何事, 惟以一彼一此, 分勢角立, 爭多較少。 爲意恩怨生於指顧; 利害卜於向背, 以無爲有, 以是爲非, 情狀萬端, 如鬼如蜮, 或激而致怒, 或誑而令懼, 一或傾耳而聽信, 則自陷於不孝, 而陷親於不慈必矣。 雖然, 亦視其君德之如何耳。 人君苟能正己而率物, 何患之有哉? 今殿下上奉兩慈殿, 誠禮備盡, 慈孝無間。 然若謂吾之事親已至, 則卽非孝子之心, 而於大王大妃殿, 則正所謂因義而隆恩者, 此實小人女子之易伺隙而造釁處也。 臣伏覩前代之事, 上有慈親, 下有孝嗣, 而爲賊宦讒妾所交構, 不終厥孝者何限? 此雖萬萬非所慮於聖明, 而私憂過慮, 亦無所不至。 伏願殿下, 監《大易》 《家人》之義, 法《小學》 《明倫》之訓, 嚴於自治而謹於正家, 益致誠愛, 益篤孝敬, 使左右近習之人, 洞然皆知兩宮慈孝無間, 吾輩讒構, 無以得行於其間, 亦見其成孝慈者獲安, 生兩隙者得罪, 則自然無陰邪間亂之患, 而孝道無闕, 仁至義盡, 而四殿驩洽, 萬福畢臻矣。 臣聞親睦九族, 在常人固是美行, 而在帝王家, 尤爲盛德。 然聖人以正倫理、篤恩愛爲訓, 正倫理在篤恩愛之先, 則其深意, 亦可想也, 未有倫理不正, 而恩愛能篤者也。 況在末世, 事變多端, 凡百云爲, 尤不可不深長思也。 如但以親愛爲主, 而不復以禮義裁之, 馴致有無限不好事, 則其所以親愛之者, 適所以餉其禍也。 臣聞諸長老, 我世宗大王悼念廣平大君之早夭, 留養其子於宮中, 而逮文廟卽阼, 卽命出外。 宣祖大王切不許諸王子王孫撫玩啓字, 其深謨遠筭, 實非後世所可及也。 宮禁之事, 固非外人所敢知, 而然近日以來, 外議喧藉皆以爲, 兩王子及其夫人出入於大王大妃殿, 無有限節, 至或累日留宿, 仍致兩殿之間往來雜語。 且麟坪大君兩兒, 自先王朝留養於宮中, 其兄方在凶服之中, 而亦出入無間, 外言之入, 內言之出, 或未必不由於是, 臣不勝心摧腸腐。 蓋嘗微發其端於榻前, 而亦不敢畢其所懷, 蓋視兄弟猶吾一體, 視兄弟之子猶吾子, 在先王固爲聖德至行, 求之三代以下, 實鮮其倫。 然及今殿下之身, 旣無兄弟, 又姑無儲嗣, 形勢孤危, 中外憂懼, 其在親戚之間, 屬籍漸遠, 嫌逼轉甚, 視先王朝, 又有所不同者。 而伏聞, 留養之人年已長大, 殿下宮中, 豈宜更着他人, 以醞釀禍機, 使忠臣義士, 不敢言而敢憂也? 臣願殿下, 試於淸朝、靜夜深思熟量。 念季世事故之多端, 體世宗、宣廟之深慮, 其不得自由處, 亦思所以方便善處, 積漸烝乂之道; 其得自由豦, 亟須稟議慈殿, 從容商量, 節以義理, 毋拘於區區小仁, 以圖始終親愛之道。 且臣伏聞, 祖宗朝諸王子王孫年長, 則別命其族屬中可以訓誨者, 委托敎導, 以責成效。 又明宗學之制, 極選宗簿之官, 使之嚴立課程, 月日講討, 故諸宗親多有學成行尊, 爲世所稱者。 今亦遵依祖宗故事, 年長王子, 使之出就外傅, 且申明宗學之法, 毋爲文具, 務令着實, 允合事宜。 臣之此言, 實是國家莫重莫大之事, 不容少忽。 願聖明惕念改圖, 毋或淹延時日, 以貽後悔, 宗社幸甚, 臣民幸甚。
前後所陳, 皆以親筆書寫以進, 蓋不欲宣泄也。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30면
- 【분류】사상-유학(儒學) / 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
- [註 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