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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62권, 성종 15년 1월 10일 무술 2번째기사 1484년 명 성화(成化) 20년

양성군 이승소의 졸기

양성군(陽城君) 이승소(李承召)가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이승소의 자(字)는 윤보(胤保)이고 본관은 양성(陽城)인데, 증(贈)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온(李蒕)의 아들이다. 나면서 영특하여 나이 열 세 살에 입학하였는데, 글을 읽을 적에 눈에 지난간 것은 문득 외었고, 모의 시험의 글을 짓는 데에 동류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정통(正統)084) 무오년085) 에 열 일곱 살로서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였고, 정묘년086) 봄에는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남성(南省)087) 과 전시(殿試)에 모두 1등으로 발해(發解)하였다.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제수(除授)되고 가을에는 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경태(景泰)088) 경오년089) 에 부교리(副校理)에 오르고, 신미년090) 에는 응교(應敎)에 올랐으며, 갑술년091) 에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다가, 세자 좌필선(世子左弼善)으로 옮겨서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세자 보덕(世子輔德)에 올랐다. 천순(天順)092) 정축년093) 에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라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고,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형조(刑曹) 등 4조(曹)의 참의(參議)를 거쳤다. 경진년094) 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라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겸 세자 부빈객(世子副賓客)에 제수되었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석도(釋道)095) 를 논하였는데, 이승소가 바른 의논을 하고 아첨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곧 겸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되었는데 모든 사무를 간이(簡易)하게 처리하니, 온 도(道)가 안연(晏然)096) 하였다. 성화(成化) 무자년097) 에 예조 참판(禮曹參判) 겸 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에 제수되고, 신묘년098) 에는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고 양성군(陽城君)에 봉(封)해졌으며, 자헌 대부(資憲大夫) 예조 판서에 올라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옮겼다. 신축년099) 에는 품계가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더해져서 이조(吏曹)·형조(刑曹) 두 조(曹)의 판서를 지내고, 임인년100) 에는 특별히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더해져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옮겼다가 이 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63세이다.

문간(文簡)이라고 시호(諡號)하니,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거처를 공경히 하고 행함을 간략하게 한 것을 간(簡)이라 한다. 사람됨이 천자(天資)가 온순(溫醇)하고 학문이 정심(精深)하여 무릇 음양(陰陽)·지리(地理)·의약(醫藥)의 글에 밝게 통하지 아니함이 없고, 문장이 전아 정순(典雅精純)하여 한 시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성품이 청렴 간소하며 공손하고 삼가하여 드러내기를 일삼지 아니하며, 금회(襟懷)101)쇠락(灑落)102) 하여 날마다 서사(書史)로써 스스로 즐김을 삼았다. 죽는 날에 집에 남은 재물이 없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승소풍자(風姿)103) 가 단아하고 조리(操履)104) 가 맑고 삼가서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며, 함부로 사귀어 놀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금옥 군자(金玉君子)라고 일컬었다. 성품이 겸손하고 양보하여 일찍이 능함으로써 남보다 먼저 하지 아니하였다. 문장이 서거정(徐居正)과 더불어 이름이 맞먹었는데 서거정은 홀로 문병(文柄)105) 을 마음대로 하고 이승소는 매양 미루어 사양하며 감히 항거하지 아니하였다. 오랫동안 경연(經筵)에 있으면서 강론(講論)하고 규풍(規諷)106) 하여 도운 바가 많았다. 그러나 정사(政事)의 재주가 없어서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주의(注擬)107) 를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전혀 가부를 말하지 아니하여 착오를 많이 이루었으니, 이것이 그 단점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162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560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註 084]
    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 [註 085]
    무오년 : 1438 세종 20년.
  • [註 086]
    정묘년 : 1447 세종 29년.
  • [註 087]
    남성(南省) : 국자감시(國子監試).
  • [註 088]
    경태(景泰) : 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 [註 089]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 [註 090]
    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 [註 091]
    갑술년 : 1454 단종 2년.
  • [註 092]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중조(重祚) 연호.
  • [註 093]
    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094]
    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095]
    석도(釋道) : 불교(佛敎).
  • [註 096]
    안연(晏然) : 평안하고 태평스러움.
  • [註 097]
    성화(成化)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098]
    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099]
    신축년 : 1481 성종 12년.
  • [註 100]
    임인년 : 1482 성종 13년.
  • [註 101]
    금회(襟懷) : 마음 속에 깊이 품고 있는 회포.
  • [註 102]
    쇠락(灑落) : 깔끔하여 마음에 거리낌이 없음.
  • [註 103]
    풍자(風姿) : 풍채와 모양.
  • [註 104]
    조리(操履) : 몸가짐과 마음가짐.
  • [註 105]
    문병(文柄) : 학문상의 세력.
  • [註 106]
    규풍(規諷) : 경계하고 풍간(諷諫)함.
  • [註 107]
    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陽城君 李承召卒輟朝, 弔祭、禮葬如例。 承召, 字胤保, 陽城人。 贈兵曹判書之子。 生而穎異, 年十三入學, 讀書過目輒誦, 擬試程文, 儕輩莫及。 正統戊午年, 十七中進士試。 丁卯春, 中文科, 發解南省殿試, 皆居第一人, 拜集賢殿副修撰, 秋又中重試。 景泰庚午陞副校理, 辛未陞應敎, 甲戌遷司憲府掌令, 轉世子左弼善, 陞集賢殿直提學、世子輔德。 天順丁丑, 陞授通政成均館大司成, 歷吏、戶、禮、刑四曹參議。 庚辰陞授嘉善藝文館提學兼世子副賓客。 世祖嘗論釋道, 承召正議不阿, 人皆稱之。 尋拜兼忠淸道觀察使, 每事務從簡易, 一道晏然。 成化戊子, 拜禮曹參判兼藝文館提學。 辛卯賜純誠佐理功臣之號, 封陽城君, 陞資憲禮曹判書, 轉議政府右參贊。 辛丑階加正憲, 歷吏、刑兩曹判書。 壬寅特加崇政, 移議政府左參贊。 至是卒, 年六十三。 諡文簡, 博文多見: ‘文;’ 居敬行簡: ‘簡。’ 爲人, 天資溫醇, 學問精深, 凡陰陽、地理、醫藥之書, 無不通曉, 爲文章, 典雅精(絶)〔純〕 , 爲一時冠。 性廉簡恭謹, 不事表襮, 襟懷灑落, 日以書史自娛。 死之日, 家無餘財。

【史臣曰: "承召, 風姿端雅, 操履淸愼, 不營産業, 不妄交遊, 人稱: ‘金玉君子。’ 性謙退, 未嘗以能先人。 文章與徐居正濟名, 而居正獨擅文柄, 承召每推重, 不敢抗。 久在經筵, 講論規諷, 多所裨益。 然無政事之才, 嘗判吏曹, 注擬悉委於下, 漫不可、否, 多致錯誤, 此其短也。"】


  • 【태백산사고본】 24책 162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560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