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68권, 영조 24년 윤7월 30일 임오 2번째기사 1748년 청 건륭(乾隆)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통신사 일행의 일본 강호에서의 견문

국역

사행(使行)이 바다를 건너 모두 세 번 육지에 오르고 수천 리를 가서야 비로소 강호(江戶)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곧 관백(關白)이 거처하는 곳으로 지리(地理)가 매우 험하였고 경유한 곳의 성호(城濠)는 견고하고 완벽하여 포석(砲石)으로 분쇄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호에는 모두 물이 가득 차 있었는데 깊이가 두어 길이나 되었으며, 성문에는 조교(弔橋)가 설치되어 있었다. 길가에는 전사(廛肆)가 벌려 있었고 여리(閭里)는 모두 조리 있게 구획되어 문란하지 않았다. 3보(步)가 1칸[間]이고 60간이 정(町)이 되는데, 정에는 중문(重門)을 설치하여 가는 데마다 모두 이와 같았다. 문호(門戶)에 자리를 깐 척도까지도 모두 같아서 조금도 일정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여염(閭閻)의 성대함은 중국(中國)보다 더 나았다. 대체로 모두 군법(軍法)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워 법도를 수명(修明)하였으므로 의복(衣服)과 포설(鋪設)에도 모두 법제가 있고 민졸(民卒)의 장물(章物)에도 아울러 표지(標識)가 있어서 향리(鄕里)의 문지기에게 묻지 않더라도 무슨 고을인지 알 수가 있게 되어 있었다. 사행이 도착하는 곳마다 시끄럽게 떠드는 일이 없었고 희궤(餼饋)를 빠뜨리는 일이 없어 우리 나라와 견주어 보면 규모와 법령이 정칙(整勅)되었을 뿐만이 아니었으며, 이 나라에는 과거(科擧)로 인재를 선발하는 일이 없고 모두 세습(世襲)하고 있었다.

나라에는 모두 70개의 주(州)가 있는데, 주에는 모두 태수(太守)가 있고 태수에게는 모두 부수(副守)가 있다. 태수의 가속(家屬)은 모두 강호에 유치(留置)되어 있는데, 각주(各州)의 태수들은 한 해에 반년은 강제로 강호에 머물게 하며 그 부수로 하여금 머물러서 주(州)의 일을 다스리게 하고 있다. 백성들은 사송(詞訟)이 없고 문학(文學)을 숭상하지 않는데, 대개 글을 쓸 데가 없기 때문이고 오직 승도(僧徒)들은 간간이 문자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사신(使臣)이 오면 반드시 국(局)을 설치하고 개인(開印)하는데, 대저 수창(酬唱)한 것은 빠짐없이 수집하여 화한수창록(和韓酬唱錄)이라고 호칭하였으니, 이는 왜인(倭人)이 스스로를 화림(和林)이라 일컫고 우리 나라는 삼한(三韓)이라는 호칭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수창록에 오르게 되면 그 영광이 등영(登瀛) 에 비견될 정도이다.

관백(關白)이 새로 서면 반드시 우리 나라에다 사신을 보내 줄 것을 청하는데, 사신이 그 나라에 도착하게 되면 제도(諸島)에 호령하는 패문(牌文)에 ‘조선(朝鮮)에서 조공을 바치러 들어온다.’고 하기에까지 이르러 국가의 수욕(羞辱)이 막심하였다. 그러나 사명을 받들고 간 사람은 매양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그대로 두고 못들은 체하기 일쑤였다. 홍계희 등이 강호에서 7일 동안 머물고 돌아왔는데, 왕복한 노정(路程)에 소요된 날수가 모두 5개월이었고 사폐(辭陛)한 때부터는 모두 9개월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기강이 해이한 탓으로 데리고 간 임역(任譯)들이 재화(財貨)를 탐하여 사생(死生)을 잊고 설치느라고 저들의 사정은 전혀 탐지하지 못한 채 우리 나라에 대한 말은 이미 여지없이 죄다 누설하였으니, 저들 가운데 만일 인물이 있었다면 반드시 우리 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사신은 말한다. 이적(夷狄)의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이 중화(中華)의 나라에 임금이 없는 경우만도 못하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제도(制度)는 번번이 중화를 본받고 있는데도 이제 정형(政刑)과 법령(法令)이 도리어 오랑캐만도 못하였다. 그리하여 신사(信使)가 가서 오랑캐들에게 위엄을 보이지 못한 것은 물론, 사적으로 뇌물을 받으면서도 사양할 줄을 몰랐으니, 수모를 받는 것이 그칠 기한이 없게 되었다. 저들 가운데 우리 나라의 사정을 엿보는 사람이 있다면 장차 어떻게 여겼겠는가? 임진년 에 귤강광(橘康廣)이 부기(府妓)가 향물(香物)을 움켜쥔 것을 보고서 ‘너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의 국세(國勢)를 임진년에 견주어 보면 그때에 어림도 없는 상황이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11장 A면
  • 【국편영인본】 43책 304면
  • 【분류】 외교(外交) / 역사(歷史)
원문

○使行越海, 凡三陸行數千里, 始至江戶, 卽關白所居也。 地理絶險, 所過城濠堅完, 非砲石之所可碎。 濠皆畜水, 水深數丈, 門設弔橋。 列路廛肆, 閭里皆有條不紊。 三步爲一間, 六十間爲町, 町設重門, 所至如一。 雖門戶鋪席, 尺度皆同, 無少參差, 閭閻之盛, 過於中國。 大體皆以軍法立國, 法度修明, 衣服、鋪設皆有法制, 民卒、章物幷有標識, 雖不問鄕里, 望而知其爲某邑。 使行所至無譁, 餼饋無闕, 較視我國, 規模法令不啻整勑, 國無科選, 皆以世襲。 國凡七十州, 州皆有太守, 守皆有副。 守之家累, 皆置江戶, 列州太守, 歲率强半留江戶, 使其副留治州事。 民無詞訟, 不尙文學, 蓋無所用文故也, 惟僧徒間有解文字者。 我使來則必設局開印, 凡所酬唱, 蒐集無遺, 號曰《和韓酬唱錄》, 蓋倭人自稱和林, 而我國有三韓之號也。 名在酬唱, 則榮比登瀛焉。 關白新立, 則必請我使, 我使至國, 則號令諸島牌文至稱朝鮮入貢, 辱國莫甚焉。 奉使之人每恐生事, 任之若不聞焉。 啓禧等留江戶七日, 復路往返凡五朔, 辭陛凡九朔。 紀綱解弛, 所帶任譯, 黷貨忘生, 彼之事情, 全不探識, 而國言之漏洩, 已無餘地, 彼若有人, 則必以我國爲無人矣。

【史臣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 吾東制度, 動法中華, 而今則政刑法令反不如蠻。 信使一往, 不能見憚於蠻夷, 受私賂而不知辭焉, 來侮無窮期矣。 彼若有覘國之人, 其將謂何? 壬辰之歲橘康廣見府妓之攫椒, 以爲爾國將亡, 今之國勢, 比壬辰不及遠矣。】


  •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11장 A면
  • 【국편영인본】 43책 304면
  • 【분류】 외교(外交)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