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184권, 성종 16년 10월 7일 갑신 4번째기사 1485년 명 성화(成化) 1485년 명 성화(成化) 21년

사인 원숙의 서간을 보고 후추의 종자를 구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도록 전교하다

국역

예조 정랑(禮曹正郞) 정광세(鄭光世)대내전(大內殿)의 사인(使人) 중[僧] 원숙(元肅)의 서간(書簡) 수폭(數幅)을 가지고 와서 아뢰었는데, 그 1에 이르기를,

"온조 백제국왕(溫祚百濟國王) 여장(餘璋)의 세째 아들이 일본국에 내조(來朝)하였음이 수(隋)나라의 대업(大業) 7년 신미년 이니, 이로부터 9백여 년이 되도록 지금까지 면면(綿綿)히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임성(琳聖)의 아버지는 여장(餘璋)이라 하고, 장(璋)의 아버지는 여창(餘琩)이라 하고, 창(琩)의 아버지는 여경(餘慶)이라 하는데 이로부터 이상은 왕대(王代) 명호(名號)를 기억하여 알지 못합니다. 그 몸은 일본국에 있으나 계통을 밝히고자 하므로 백제국의 옛일을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온조의 사업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정하신 국사(國史)가 있을 만하니, 여경(餘慶) 이상의 왕대의 명호를 명하여 베껴서 내려 주소서. 중 원숙(元肅)이 삼가 말씀드립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어제 상경(上京)하는 도중에 지나다 보니 나라의 고을에 너무 가무는 재앙이 있어 백성과 우마(牛馬)가 제일 괴롭게 노역하니, 우신(愚臣)은 감상(感傷)하는 정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듣건대, 내일 궐하(闕下)에서 하직을 하는데 반드시 선호사(宣護使)와 호송관(護送官)을 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말이 더욱 갑절의 노역을 해야 하는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만 왜어(倭語)를 통하는 사람 1인으로써 넉넉합니다. 변변치 못한 뜻이 이와 같사오니 우러러 임금님 명만을 헤아릴 뿐입니다. 중 원숙(元肅) 등이 삼가 말씀드립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옷을 내려 주신 은혜를 사례하옵니다.

선호사(宣護使)가 대궐에서 나와 옷을 전해주고

다시 이몸에게 상을 내려 주셨네.

달마 대사(達摩大師)가 전한 굴순(屈眴) 과도 다르지 않으며,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중에게 시주한 것도 이와 같은 것이네.

대단한 은총은 일본에 불일(佛日) 이 돌아오게 하였고,

빛나는 덕은 중국에 알려져 인후(仁厚)한 풍습을 본받게 하였네.

더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오.

주문을 외고 향을 태우며 순(舜)임금처럼 훌륭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내전(大內殿) 사인(使人) 중 원숙(元肅)은 예조 대인(禮曹大人) 족하(足下)에게 받듭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삼가 예조 3대인 족하(足下)에게 말합니다. 어제 칙명(勅命) 의 뜻을 삼가 절하고 진심으로 받았습니다. 이제 우연히 제가 내조(來朝)하러 타고 온 배가 길을 안내할 수 있으니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금년에는 백성들이 너무 가무는 근심이 있으니 배를 보내면 고을과 나라의 비용이 있어야 하고 백성의 노역을 써야 하니, 다만 4, 5명의 인원을 차견사(差遣使)로 삼아 제 배에 부쳐서 보내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진실로 호위하여 일본국에 돌아가서 성지(聖旨)로써 신(臣) 정홍(政弘)을 효유하여 후추[胡椒]의 종자(種子)를 갖고 있는 나라를 찾아가서 명년에 궐하(闕下)에 내조하겠습니다. 정통(正統) 4년 에 이예(李藝)가 표류(飄流)하여 우리 나라에 올 때에 배와 돛대를 수선하여 송환하였고, 동(同) 5년 에 선군(船軍) 김연(金延)장주(長州) 적간관(赤間關)에 머물게 하였다가 동년에 고득종(高得宗)이 왔을 때에 부치어 돌려보냈으며, 동(同) 8년 에 허후(許詡)를 보내어 신의 조부(祖父) 지세래(持世來)를 제사 하였고, 천순(天順) 4년 에 칙명(勅命)을 받고 수우(水牛) 암수[牝牡] 한 쌍을 바치었습니다. 이후부터는 칙명으로 구함이 없음을 따라 다만 경박(輕薄)한 물건만을 바치고 비길 바 없이 큰 은혜를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신이 지난해에 전하의 사선(使船)을 기다렸는데, 이제 돌아가는 편에 모(某) 등을 신사(信使)로 보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대내전(大內殿) 사인(使人) 중 원숙(元肅)은 받듭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사서(四書)》·《육경(六經)》《한묵전서(翰墨全書)》·《사림광기(事林廣記)》·《운회벽암(韻曾碧菴)》 등의 책을 사려고 하면 없습니다. 청컨대 국가(國家)에서 찾아 주소서…"

하였다. 전교하기를,

"백제의 온조의 뒤의 세계(世系)는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간략하게 써서 주게 하고, 호송관(護送官)은 보내지 말며, 단지 서책만을 주라.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후추의 종자를 구하는 일은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 의논하게 하라."

하니, 정창손(鄭昌孫)은 의논하기를,

"비록 사람을 보내어 구하더라도 다른 보물(寶物)에 비할 바가 아니니 무방할 것같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후추는 군국(軍國)의 쓸 바가 아니니, 사람을 보내어 청구함은 대체(大體)에 편하지 못합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이제 보빙(報聘) 하는 일이 없는데 후추 종자를 위하여 사람을 일본국(日本國)에 보내면 교린(交隣)하는 대체가 아닙니다. 다만 사자(使者)에게 말하기를, ‘만약 후추의 종자를 얻어서 바치면 반드시 많은 상을 내리겠다.’고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신이 정동(鄭同)의 관반(館怑) 이 되어 후추가 중국에서 생산되는지의 여부를 물었더니, 정동이 말하기를, ‘남만(南蠻)에서 생산되고 중국에는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옮겨 심을 수 있었다면 중국이 반드시 먼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없는 것은 어찌 풍토(風土)의 마땅함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왜인에게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후추는 상선(商船)으로 인하여 이르는 것이지 본국(本國)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마 저들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얻을 수 있다면 어찌 반드시 우리측의 사람이 동행하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받들어 올리겠습니까? 이제 온 원숙(元肅) 등이 우리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 소원을 이루지 못함이 없으니, 헛되이 대답하기에 어려운 까닭으로 당장에 편한 것만을 취하는 계책을 삼아 어물어물하는 말입니다. 후추[胡椒]는 군국(軍國)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있고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반드시 이를 위하여 사람을 아주 먼 나라[絶國]에까지 보내겠습니까?"

하고, 윤호(尹壕)·이파(李坡)·정괄(鄭佸)·김겸광(金謙光)·유지(柳輊)·유순(柳洵)·권중린(權仲麟)은 의논하기를,

"지난 번에 대내전(大內殿)이 통신(通信)을 청한 것이 여러 번 있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만 후추 종자를 위하여 사자(使者)를 보냄은 대체에 해로움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제 경상도는 흉년이 너무 심하니 사자를 보내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184권 3장 B면
  • 【국편영인본】 11책 58면
  • 【분류】 외교-왜(倭) / 무역(貿易) / 역사-전사(前史)
원문

○禮曹正郞鄭光世大內殿使僧元肅書簡數幅來啓。 其一曰:

(溫祖) 百濟國王餘璋第三子, 日本國來朝, 大業七年辛未歲也。 自來九百餘年矣, 于今綿綿不絶焉。 琳聖父曰餘璋, 父曰餘琩, 父曰餘慶, 自此以上王代名號不記知。 以其身在日本國, 而契繼圖於百濟國之昔年之故, 不可不知其溫祖之事業。 殿下定可有國史, 餘慶以上王代之名號, 命寫賜之。 僧元肅謹言。

又曰:

昨歷覽上京道中, 國郡有太旱之災, 人民牛馬最苦勞役, 愚不勝感傷之情。 大凡蓋聞, 明辭闕下, 必有宣護使、護送官。 然則人馬尙可倍勞役之憂, 但通語者一人以足矣。 微志如斯, 偁仰上命而已。 僧元肅等謹言。

又曰:

賜衣謝恩。 宣使傳衣出紫宮, 更加賞賜忝斯躬。 達摩屈眴曾非異, 武帝施僧今是同。 光寵扶桑回佛日, 德輝中國體仁風。 無玆恩大何以報? 誦呪焚香祝聖瞳。 大內殿使僧元肅奉禮曹大人足下。

又曰:

謹言禮曹三大人足下。 昨蒙勑命之旨, 拜納信受焉。 今偶有予來朝之船, 爲之南針, 遣信使則幸也。 而今歲民間必可有太旱之憂, 遣船則可有郡國之費、用人民之勞役。 但以員名四五人爲差遣使, 付達予船者最可也。 然則予輩固護之, 歸到日本國, 以聖旨諭臣政弘, 尋覓胡椒種子於所有之邦, 明年來朝闕下。 正統四年李藝飄流吾邦來時, 修舟楫送還; 同五年船軍金延逗留長州 赤間關, 同年高得宗來時付之還。 同八年遣許詡祭臣祖父持世來天順四年蒙勑命獻水牛牝牡, 自爾以來, 依無勑命之求, 但獻輕薄之物, 蒙莫大之恩賜而已。 臣往年待殿下使船, 今付回使某等遣信使, 則以爲幸。 大內殿使僧元肅奉。

又曰: "《四書》《六經》《翰墨全書》《事林廣記》《韻會》《碧菴》等冊, 欲買之則無有, 請國家覓給。" 云云。 傳曰: "百濟 溫祚之後世系, 令弘文館略書賜之, 勿差護送官, 只給書冊。 差人求椒種事, 議于領敦寧以上及議政府、六曹。" 鄭昌孫議: "雖遣人求之, 非他寶物之比, 似無妨。" 韓明澮沈澮議: "胡椒非軍國所用, 遣人求請, 大體未便。" 尹弼商洪應李克培議: "今無報聘之事, 而爲胡椒種遣人於日本國, 非交隣大體也。 但語使者曰: ‘若得椒種以獻, 則必加重賞。’ 何如?" (虛思愼) 議: "臣爲鄭同館伴, 問胡椒産於中國與否, 曰: ‘産於南蠻, 中國無有也。’ 若可以移種, 則中國必先之矣, 然至今無有, 則豈非風土異宜而然乎? 且問於倭人, 皆言胡椒因商舶而至, 非本國所産也。 然則恐彼無由得也。 彼若可得, 豈必待我人同行而後奉進哉? 今來元肅等, 蒙我國重賜, 所願無不遂, 難於虛答, 故爲此姑息之計, 依違之言耳。 胡椒非軍國所關, 有無不足䘏, 何必爲此遣人絶國哉?" 尹壕李坡鄭佸金謙光柳輊柳洵權仲麟議: "往者大內殿請通信者屢矣, 而國家不從; 今只爲胡椒種遣使, 有妨大體。 況今慶尙道饑荒太甚, 遣使有弊。"


  • 【태백산사고본】 28책 184권 3장 B면
  • 【국편영인본】 11책 58면
  • 【분류】 외교-왜(倭) / 무역(貿易)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