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실록 1권, 총서 1번째기사

태조 이성계 선대의 가계.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의주를 거쳐 알동에 정착하다

국역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단(旦)이요,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그전의 휘(諱)는 성계(成桂)요,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전주(全州)의 대성(大姓)이다. 사공(司空) 휘(諱) 한(翰)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 의 10대(代) 손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휘(諱) 자연(自延)을 낳았다. 시중이 복야(僕射) 휘(諱) 천상(天祥)을 낳고, 복야가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를 낳고, 아간이 사도(司徒) 삼중 대광(三重大匡) 휘(諱) 입전(立全)을 낳고, 사도가 휘(諱) 긍휴(兢休)를 낳고, 이긍휴가 휘(諱) 염순(廉順)을 낳고, 이염순이 휘(諱) 승삭(承朔)을 낳고, 이승삭이 휘(諱) 충경(充慶)을 낳고, 이충경이 휘(諱) 경영(景英)을 낳고, 이경영이 휘(諱) 충민(忠敏)을 낳고, 이충민이 휘(諱) 화(華)를 낳고, 이화가 휘(諱) 진유(珍有)를 낳고, 이진유가 휘(諱) 궁진(宮進)을 낳고, 이궁진이 대장군(大將軍) 휘(諱)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 집주(內侍執奏) 휘(諱) 인(隣)을 낳고, 집주가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고, 장군이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諱) 안사(安社)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穆祖)이다.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사방(四方)을 경략할 뜻이 있었다. 처음에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그 때 나이 20여 세로서,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객관(客館)에 들어왔을 때 관기(官妓)의 사건으로 인하여 주관(州官)과 틈이 생겼다. 주관(州官)이 안렴사(按廉使) 와 함께 의논하여 위에 알리고 군사를 내어 도모하려 하므로, 목조(穆祖)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백 70여 가(家)나 되었다. 일찍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倭寇)를 방비했는데, 조금 후에 원(元)나라 야굴대왕(也窟大王) 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고을을 침략하니, 목조두타 산성(頭陀山城)을 지켜서 난리를 피하였다. 때마침 전일의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 【곧 덕원(德原)이다.】 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백 70여 호(戶)가 또한 따라갔고, 동북(東北)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고려(高麗)에서는 목조를 의주 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 고원(高原)을 지켜 원(元)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 쌍성(雙城) 이북 【쌍성은 곧 영흥(永興)이다.】 지방이 개원로(開元路) 에 소속되었고, 원(元)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 이 와서 쌍성(雙城)에 둔(屯)치고 있으면서 철령(鐵嶺) 이북 지방을 취(取)하려고 하여,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元)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金甫奴) 등 1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양(平壤)의 백성들이 목조의 위세(威勢)와 명망(名望)을 듣고 붙좇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함께 따라오니, 산길(散吉)이 크게 기뻐하여 예절을 갖추어 대우함이 매우 후하였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즐거이 술을 마시었다. 연회가 끝나려 할 적에 산길이 친히 옥배(玉杯)를 목조의 품속에 넣어 주면서 말하기를,

"공(公)의 가인(家人)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의 서로 친하는 지극한 정리를 알겠습니까? 부족하나마 옥배(玉杯)로써 나의 정을 표시할 뿐입니다."

하고, 이내 서로 함께 맹세하기를,

"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

하였다. 목조는 이에 동종(同宗)의 딸을 산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목조는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지나서 시리(時利) 【곧 이성(利城)이다.】 에 이르렀는데, 그 천호(千戶)가 군사로써 막으므로, 목조가 귀순(歸順)한다는 뜻을 말하니, 천호가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목조도 또한 소와 말로써 그에게 보답하고, 마침내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알동(斡東)에 이르러 거주하였다. 이때가 송(宋)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1254)이요, 원(元)나라 헌종(憲宗) 4년이요, 고려 고종(高宗) 41년 갑인이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
  • 【국편영인본】 1책 1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외교-원(元)
원문

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姓李氏, 諱, 字君晋, 古諱成桂, 號松軒, 全州大姓也。 有司空諱新羅, 娶太宗王十世孫軍尹金殷義之女, 生侍中諱自延。 侍中生僕射諱天祥, 僕射生阿干諱光禧, 阿干生司徒三重大匡諱立全。 司徒生諱兢休, 兢休生諱廉順, 廉順生諱承朔, 承朔生諱充慶, 充慶生諱景英, 景英生諱忠敏, 忠敏生諱, 生諱珍有, 珍有生諱宮進, 宮進生大將軍諱勇夫, 大將軍生內侍執奏諱。 執奏娶侍中文公克謙之女, 生將軍諱陽茂, 將軍娶上將軍李公康濟之女, 生諱安社, 是爲穆祖, 性豪放, 有志四方。 初在全州, 時年二十餘, 勇略過人。 山城別監入館, 因官妓事, 與州官有隙, 州官與按廉議上聞, 發兵圖之。 穆祖聞之, 遂徙居江陵道 三陟縣, 民願從而徙者, 百七十餘家。 嘗造船十五隻以備。 旣, 也窟大王兵侵諸郡, 穆祖頭陀山城以避亂。 適前日山城別監, 新除按廉使, 又將至。 穆祖恐禍及, 挈家浮海, 至東北面宜州 【卽(德原)〔德源〕。】 止焉。 民一百七十餘戶亦從之, 東北之民, 多歸心焉。 於是, 高麗穆祖宜州兵馬使, 鎭高原以禦兵。 時雙城以北, 【雙城卽永興。】 屬于開元路 散吉大王來屯雙城, 謀取鐵嶺以北, 再遣人請穆祖, 穆祖不得已率金甫奴等一千餘戶降。 前此, 平壤民聞穆祖威望, 多有附者。 至是與從之, 散吉大喜, 禮待甚厚, 置盛宴歡飮。 將罷, 散吉親以玉杯, 納諸穆祖懷中曰: "公之家人, 安知吾二人相與之至情! 聊以玉杯表吾情耳。" 因相與誓曰: "自後無相忘也。" 穆祖乃以族女妻散吉穆祖由水陸路至時利, 【卽利城。】 其千戶以兵阻之。 穆祖語以歸順之意, 千戶宴慰甚厚, 穆祖亦以牛馬報之。 遂至開元路 南京斡東居焉。 寔 理宗 寶祐二年, 憲宗四年, 高麗 高宗四十一年甲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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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편영인본】 1책 1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외교-원(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