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1권, 순조 즉위년 7월 4일 갑신 1번째기사 1800년 청 가경(嘉慶) 5년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다
정종 대왕 24년 【청(淸)나라 가경(嘉慶) 5년이다.】 여름 6월 기묘일(己卯日)에 정종이 훙서(薨逝)하였다. 6일이 지난 가을 7월 갑신일(甲申日)에 【초4일이다.】 왕이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왕은 정종 14년 【경술년이다.】 여름 6월 정묘일(丁卯日)에 【18일 신시(申時)이다.】 창경궁(昌慶宮) 집복헌(集福軒)에서 탄강(誕降)하였다. 처음 정종이 재위(在位)할 때 오랫동안 저사(儲嗣)를 두지 못하자 중외(中外)에서 걱정하였었는데, 기유년001) 에 궁인(宮人)이 용(龍)이 나르는 상서로운 꿈을 꾸자 수빈 박씨(綏嬪朴氏)가 임신하였고, 왕이 탄강할 때에 이르러서는 오색 무지개가 묘정(廟井)에서 뻗혔고 신비로운 광채가 궁림(宮林)을 감쌌다. 정종이 와서 보고 나서 말하기를, ‘이 아이의 복록(福祿)은 내가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고, 효의후 김씨가 취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아 원자(元子)로 호칭을 정하였다. 왕은 어릴 때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고 지극한 효성(孝誠)을 타고났으므로 부왕(父王)을 섬김에 있어서는 그지없이 경근(敬謹)하여 감히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으며 전궁(殿宮)을 섬김에 있어서도 하나도 지적할 만한 것이 없었음은 물론 효의후에 대해서는 경애(敬愛)가 더욱 현저하였다. 금년 봄에 왕세자(王世子)에 책봉(冊封)되고 관례(冠禮)를 행하였는데 보령(寶齡)이 곧 11세였다. 정종이 훙서하자 대신(大臣)이 유교(遺敎)에 따라 도승지로 하여금 대보(大寶)를 받들어 전하게 하였으나, 왕이 받지 않고 울부짖으며 통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대신(大臣)·예관(禮官)·삼사(三司)가 또 누차 사위(嗣位)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면서 복합(伏閤)하니, 비로서 윤허하여 따랐다. 이날 성복(成服)한 뒤에 【묘시(卯時)이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받고 나와서 인정문(仁政門)으로 나아가 즉위한 다음 반교(頒敎)하였다. 그리고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기를 예(禮)와 같이 하였으며 왕대비를 높여 대왕 대비로 삼고 왕비를 왕대비로 삼았다. 그리고 다시 대왕 대비를 모시고 수렴 청정(垂廉聽政)의 예를 희정당(熙政堂)에서 행하였는데,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송조(宋朝)의 선인 태후(宣仁太后)002) 와 국조(國朝)의 정희 성모(貞熹聖母)003) 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대왕 대비가 수렴하고 함께 청정(聽政)할 것을 청하였는데, 복합하여 일곱 번 청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지못하여 허락하였다. 대왕 대비가 적의(翟衣)004) 를 갖추고 희정당으로 나아와서 동쪽 가까이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고 전영(前楹)에 수렴하니, 임금이 전정(殿庭)에 나아가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례(賀禮)를 올린 다음 전상(殿上)으로 올라가 발을 드리운 바깥쪽에 서쪽 가까이에서 남쪽을 향하고 앉았다. 대신(大臣)과 각신(閣臣) 2품 이상이 따라 올라와서 문후(問候)를 마치자 임금이 도로 상복(喪服) 차림을 하고 대내(大內)로 돌아갔다.
【예조(禮曹)의 수렴 청정 절목. 이번 대왕 대비 전하(大王大妃殿下)께서 수렴하고 청정하게 된 것은 이 방가(邦家)에 관계된 것이 더없이 중대한 예(禮)인지라 삼가 송조(宋朝) 선인 태후(宣仁太后)의 고사(故事)와 국조(國朝) 정희 성모(貞熹聖母)의 휘규(徽規)를 상고하여 마련해서 거행하는 것이다. 1. 수렴하는 처소(處所)는 편전(便殿)으로 하고 임시(臨時)하여 정원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게 한다. 1. 수렴할 때 대왕 대비 전하는 발의 안쪽에서 동쪽으로 가깝게 하여 남쪽을 향해 전좌(殿坐)하고 전하(殿下)는 발의 바깥쪽에서 서쪽으로 가깝게 하여 남쪽을 향해 시좌(侍坐)하게 했는데 그 뒤에 중앙에서 남쪽을 향하는 것으로 개서(改書)하여 봉입(捧入)하였다. 조하(朝賀)할 때에는 선인 태후의 고사에 의거하여 문무관(文武官)이 먼저 대왕 대비 전하에게 사배(四拜)를 행하고 나서 반열(班列)을 조금 서쪽으로 옮겨 전하에게 사배를 행한다. 1. 수렴할 때 송조(宋朝)에서는 발의 앞쪽에서 통어(通語)하는 내시(內侍)가 전선(傳宣)하였는데, 아조(我朝)에서는 대신(大臣)이 하고 대비 전하가 직접 서무(庶務)를 결재하는 것도 가(可)하다. 깊은 궁중(宮中)에 있을 때에는 불가한 일이라 하여 내관(內官)을 시켜 명(命)을 전하여 영(令)을 청하고 주사관(奏事官)이 문자(文字)를 해석해서 아뢰면 특별히 친청(親聽)을 허락하였는데, 이번에는 대왕 대비전과 대전(大殿)이 함께 청정(聽政)하는지라 주사관이 먼저 전하에게 아뢰면 전하가 혹은 직접 결재하기도 하고 혹은 자지(慈旨)를 앙품(仰稟)하기도 하며, 대왕 대비 전하께서는 혹 직접 자교(慈敎)를 내리기도 하고 여러 신하들이 혹은 직접 발의 앞쪽에서 아뢰게 함으로써 일당(一堂)에서 상하(上下)가 보익(輔翼)하고 참찬(參贊)하는 방도로 삼는다. 1. 한 달에 여섯 번 청대(請對)하게 하고 조참(朝參)·상참(常參)은 준례에 따라 품지(稟旨)하게 한다. 함께 청정하는 것은 송조(宋朝)에서 일참(日參)005) ·육참(六參)006) 으로 한 예(例)에 의거하며 대정령(大政令)·대전례(大典禮)와 시급한 변보(邊報)에 관해서는 수시로 청대할 것을 허락한다. 혹 선소(宣召)하거나 사전(祀典)을 내리거나 병관(兵官) 등의 직무에 관한 중요한 업무는 모두 곧바로 전하에게 아뢰어 자지(慈旨)에 품(稟)하여 재결(裁決)한다. 1. 자교(慈敎)는 대왕 대비 전왈(大王大妃傳曰)이라고 칭하고 상교(上敎)는 전왈(傳曰)이라고 칭하며, 대왕 대비 전하의 교령(敎令)은 송조(宋朝)에서 나[予]라고 칭한 예(例)를 적용한다. 내외(內外) 자물쇠의 개폐(開閉)와 군병(軍兵)의 해엄(解嚴)에 대해서는 대전(大殿)에게 아뢰면 대전은 이를 자지(慈旨)에 앙품한 뒤에 표신(標信)·신전(信箭)을 사용하여 거행한다. 1. 여러 신하들의 소장(疏章)은 정희 성모 때의 고사에 의거하여 전하에게 올리며 대계(臺啓)와 각사(各司)의 계사(啓辭), 제도(諸道)의 장문(狀聞)도 또한 전하에게 아뢰어 혹 직접 재결하기도 하고 자전에게 품지한 뒤에 비답(批答)을 내리기도 한다. 1. 정조(正朝)·동지(冬至)·탄일(誕日)의 삼명일(三名日)에 각도(各道)에서 대왕 대비전에 진전(進箋)하는 것은 한결같이 대전에 진전하는 예(例)에 의거하고 방물(方物)과 물선(物膳)도 대전 예에 의거하여 거행한다. 1. 전하가 경연(經筵)에 나아갈 때는 대왕 대비전께서 발 안쪽에 수시로 친림(親臨)하여 강(講)하는 것을 듣는다. 1. 전하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조(卽祚)한 뒤 그대로 면복(冕服)을 갖추고 대왕 대비 전하가 나아가 있는 편전(便殿)으로 나아가 백관(百官)을 데리고 전정(殿庭)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한다. 끝난 다음 전하가 전상(殿上)으로 올라가 시좌(侍坐)하면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이 차례로 따라 올라가서 대왕 대비전과 전하에게 문후(問候)하고 나서 전하는 도로 복위(復位)한다. 대왕 대비 전하가 대내(大內)로 돌아가면 전하는 면복을 벗고 도로 상복(喪服)을 입은 다음 대내로 돌아가며, 여러 신하들은 물러간다. 1. 수렴하고 함께 청정하는 전례(典禮)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정희 성모 때의 일을 모방하여 특별히 중외(中外)로 돌아간 뒤에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들이 베[布]로 된 공복(公服)을 갖추고 권정례(權停例)로 거행한다. 이번 초4일 수렴할 때 대왕 대비전은 적의를 갖추고 전좌(殿座)하며 상시(常時)에는 평상시 입는 옷을 입는다. 수렴할 때 전좌의 배설에 관한 제반 일은 액정서(掖庭署)와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진배(進拜)하게 한다. 1. 수렴에 대한 고유(告由)는 사직(社稷)·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경모궁(景慕宮)에 지내되 길일(吉日)을 가려서 거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