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실록7권, 세조 3년 3월 15일 무인 3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였는데, 상언은 이러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성덕 대공(盛德大功)으로써 보위(寶位)에 빛나게 앉아서 상제(上帝)에게 교사(郊祀)329) 하고 태조(太祖)를 배향(配享)했으며, 또 선성(先聖)330) 을 공손히 알현(謁見)하고는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았으니, 개국(開國)한 이래로 매우 성대한 행사(行事)입니다. 이는 꼭 신자(臣子)가 순수하고 결백한 한 마음으로 지치(至治)를 보좌해야 할 시기입니다. 신(臣)은 용렬한 자질로써 오랫동안 시종(侍從)의 직책에 외람히 있었으므로, 감히 좁은 소견을 가지고 예람(睿覽)에 우러러 모독(冒瀆)하오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감(聖鑑)으로 재택(裁擇)하소서.
1. 친히 적전(籍田)을 밭가는 조목입니다. 대개 옛날에 천자(天子)와 제후(諸侯)가 모두 친히 적전(籍田)을 갈면서 삼추(三推)331) ·구추(九推)332) 의 구별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성(粢盛)333) 을 공급하고 백성의 식생활(食生活)을 중시(重視)하여 경홀(輕忽)히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바로 지금 상제(上帝)에서 교사(郊祀)하여 이미 광고(曠古)의 성전(盛典)을 거행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몸소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친히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적전(籍田)을 밭가는 예(禮)를 행한다면 장차 상제(上帝)께서 굽어살펴서 마땅히 풍년이 드는 상서(祥瑞)가 있음을 볼 것이며, 사대부(士大夫)와 서인(庶仁)이 우러러보고서 또한 농사(農事)의 지중(至重)한 것을 알고는 농토(農土)에 즐거이 달려갈 것입니다. 임금의 발이 한 번 움직이면 삼한(三韓)334) 이 기뻐서 몸을 솟구쳐 춤추듯이 할 것이니, 그 일이 간책(簡策)을 빛나게 하여 은택(恩澤)이 생민(生民)에게 미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옛날의 성대한 예(禮)를 반드시 다 거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1. 사직(社稷)의 배위(配位)에 관한 조목입니다. 신(臣)이 《제사직장(諸司職掌)》을 상고해 보건대,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는 사직(社稷)에 제사지내면서 황고인조(皇考仁祖)를 배향(配享)하였으며, 조송(趙宋)335) 도 또한 희조(僖祖)를 불천지위(不遷之位)336) 로 삼았던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환조(桓祖)께서 우리 태조(太祖)를 탄생(誕生)하시어 이 백성을 구제하고 큰 왕업(王業)을 터전잡게 했으니, 쌍성(雙城)의 전역(戰役)은 실제로 내응(內應)이 되었습니다. 쌍성(雙城)이 수복(收復)됨으로써 함길도(咸吉道)의 구성(九城)의 지역(地域)이 수복(收復)되었으며, 구성(九城)이 수복됨으로써 정병 건졸(精兵健卒)이 모두 우리의 소용이 되었으니, 그 공덕(功德)의 성대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원컨대 옛 제도에 의거하여 환조(桓祖)를 국사(國社)337) 에 배향(配享)하도록 하소서. 또 명(明)나라도 태조(太祖) 때에 있어서 인조(仁祖)로써 배향(配享)을 삼았는데, 태조(太祖) 후에는 혹 태조(太祖)를 배향(配享)했는지는 또한 알 수가 없으니, 원컨대 중원(中原)에 들어가서 예관(禮官)에게 이를 물어서 배위(配位)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위의 조목은 의정부(議政府)에 내리겠다."
하였다.
"1. 존호(尊號)를 더 올리는 조목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중니(仲尼)338) 가 말하기를,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은 달효(達孝)339) 일 것이다.’ 하였으니, 두 성인(聖人)을 달효(達孝)라 일컫는 것은 무왕(武王)은 천명(天命)을 받았으며, 주공(周公)은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덕을 성취시켜 명당(明堂)340) 에 종사(宗祀)하여 하늘에 배향(配享)시키고, 또 태왕(太王)과 왕계(王季)를 추존(追尊)하여 왕(王)으로 삼았으므로, 이른바 모두가 달효(達孝)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 친히 상제(上帝)를 남교(南郊)에 제사지내고 태조(太祖)를 배향(配享)하였으니, 곧 무왕(武王)·주공(周公)의 달효(達孝)와 같습니다. 지금 번잡한 의식을 거행하여 성대히 존호(尊號)를 받았으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큰 경사(慶事)를 감내하지 못합니다. 원컨대 하향(夏享)에 친히 태묘(太廟)에 강신제(降神祭)를 지내고, 조성(祖聖)의 존시(尊諡)를 더 올려서 효도(孝道)의 도리를 넓히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거의 전대(前代) 성인(聖人)의 효도에 진실로 합할 것입니다. 신(臣)이 전조(前朝)341) 를 살펴보건대, 현종(顯宗)은 영명(英明)한 군주인데 역대(歷代)의 존시(尊諡)를 더 올리고 중외(中外) 산천(山川)의 신기(神祇)에게도 또한 미호(美號)를 가(加)했으니, 곧 이런 뜻입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위의 조목은 의정부(議政府)에 내리겠다."
하였다.
"1. 생신(生辰)을 절일(節日)로 일컫는 조목입니다. 신(臣)이 듣건대, 옛날의 제왕(帝王)들이 모두 〈생신(生辰)을〉 절일(節日)로 일컫는 것은 어버이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고 효도로써 세상을 다스림을 선포(宣布)하는 까닭입니다. 동방(東方)에서는 고려(高麗)의 성종(成宗)이 처음으로 생일을 천추절(千秋節)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후에는 역대(歷代)에서 모두 명칭(名稱)이 있었으니, 충렬왕(忠烈王) 때에 이르러서는 수원절(壽元節)이라 일컬었습니다. 전대(前代)의 역사를 상고해 본다면,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에서 사개(使价)를 보내어 와서 생신(生辰)을 하례(賀禮)하게 했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다만 탄일(誕日)이라 일컬어 예(禮)가 매우 간략(簡略)했으니, 본시 불가(不可)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臣)이 《당사(唐史)》를 살펴보건대, 발해(渤海)의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前麗]의 옛 장수인데 갑자기 일어났다가 망했으므로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동국(東國)의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의 융성(隆盛)한 것은 다만 발해(渤海)만 일컬었을 뿐이고 삼한(三韓)은 참여시키지 아니하였으니, 신(臣)은 가만히 이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요제(堯帝)와 더불어 같이 일어나서 토지(土地)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되고, 생치(生齒)342) 가 번성(煩盛)하고 군사와 마필(馬匹)이 강성하고 백관(百官) 제도가 성대한데, 비록 별도로 연호(年號)는 세우지 못하지마는 유독 고구려(高句麗)의 옛것을 계승하여 절일(節日)을 일컬을 수는 없겠습니까? 원컨대 대신(大臣)들로 하여금 서로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될 수가 없다."
하였다.
"1. 경연(經筵)에 나아가는 조목입니다. 신(臣)이 듣건대, 고금(古今)의 제왕(帝王)들은 비록 총명이 세상에 으뜸가는 자질이 있더라도 견문(見聞)이 넓은 학문은 반드시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서사(書史)를 강론(講論)하였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군주(君主)의 한 마음은 온갖 중요한 정사[萬機]를 재제(裁制)하고 있으므로 지극히 번거롭고 또 괴로우니, 하루 동안에도 모름지기 한 번 경서(經書)를 읽어서 성려(聖慮)를 깨끗이 해야만 마음이 욕심이 없고 밝아져서, 온갖 이치가 모두 갖추게 됨에 따라 인물의 현우(賢愚)를 식별(識別)함이 밝아져서 사람들이 이간(離間)할 수가 없게 되며, 일을 처리함이 적당해져서 정사(政事)가 한 일에만 편중(偏重)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선정(先正)343) 정초(鄭招)는 사송(詞訟)을 판결할 적에는 반드시 경서(經書)를 보았으니, 또한 이런 뜻이었습니다. 원컨대 경연(經筵)을 회복시켜 녹관(祿官)과 겸관(兼官)을 두기를 서연(書延)의 제도와 같이 하여, 날마다 윤번(輪番)으로 진강(進講)시켜 성학(聖學)을 더욱 부지런하게 한다면, 거의 고문(顧問)에 도움이 있을 것이고 사책(史冊)에 빛냄이 있을 것이며, 제도를 상고하고 전분(典墳)344) 을 지키는 데도 옳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또 경연(經筵)이 이미 폐지되어 갑자기 설치할 수가 없다면, 원컨대 중조(中朝)345) 의 춘방(春坊)으로써 한림(翰林)을 겸무(兼務)시키는 예(例)에 의거하여 서연관(書筵官)으로써 윤번(輪番)으로 진강(進講)하도록 하소서. 소신(小臣)은 경악(經幄)346) 에 떠나 있어도 그래도 서연(書筵)에는 모실 수 있는데, 또 서연(書筵)에 나오게 되면 점차로 임금의 성덕(盛德)을 친히 의지할 수가 없으니, 견마지성(犬馬之誠)347) 을 견딜 수가 없으므로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서 아룁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군주(君主)가 온갖 중요한 정사를 보고 난 여가에 경사(經史)에 마음을 두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다. 나는 운수(運數)가 평탄하지 못해서 여가가 미치지 못하고, 국가의 일이 많으니 〈이것이〉 한 가지이고, 세종(世宗) 때부터 수찬(修撰)의 일을 위촉받은 것이 많으니 〈이것이〉 두 가지이고, 지금 세자(世子)를 위해서 삼조 내록(三朝內錄)을 찬집(撰集)하고 있으며, 또 실록(實錄)·산서(産書)·육전(六典) 등의 일은 모두 내가 친히 보고 정할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이고, 또 내가 나이 이미 불혹(不惑)348) 이 되었으니 어찌 반드시 서생(書生)과 같겠는가? 〈이것이〉 네 가지이고, 또 진법(陣法)을 익히고 무예(武藝)를 연습하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인약(仁弱)에 실수할까 염려가 되니 〈이것이〉 다섯 가지이다."
하였다.
"1. 국가의 서적(書籍)을 간직하는 조목입니다. 대개 서적은 간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전조(前朝)349) 때에는 서적을 산 속에 있는 절에 간직하였는데, 본조(本朝)에 이르러 비로소 3개의 사고(史庫)를 충주(忠州)·성주(星州)·전주(全州) 등 고을에 설치했으니, 생각이 매우 주밀(周密)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臣)이 듣건대, 간직한 것이 반드시 모두가 비서(祕書)가 아니므로, 반드시 비서(祕書)가 모두 간직되지 아니하였으니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원컨대 3개의 사고(史庫) 안에 긴요하지 않은 잡서(雜書)는 모두 찾아내도록 하고, 선원록(璿源錄) 및 승정원(承政院)·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官)의 문서(文書)를 취(取)하여 책 3건(件)을 선택(選擇)하도록 하고, 또 동국(東國)에서 찬술(撰述)한 여러 서책(書冊)과 제자백가(諸子百家)·문집(文集)·주군(州郡)의 도적(圖籍)도 모두 구하여 사들이고, 또 1건(件)은 《송사(宋史)》·《원사(元史)》 등의 책과 같이 모두 전하여 베껴 써서 3개의 사고(史庫)에 간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이는 유사(有司)에게 독려(督勵)하겠다."
하였다.
"1. 풍속을 순후(淳厚)하게 하는 조목입니다. 대개 국가의 풍속은 삼강(三綱)을 유지(維持)하는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은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인륜(人倫)이 질서가 정연하여 문란하지 않지마는, 그러나 잠정적으로 일에 견주어 논한다면 수령(守令)이란 사람은 백성의 부모(父母)입니다. 전일에 유서(諭書)가 내릴 적에는 본디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원망을 호소하고 탐포(貪暴)한 관리를 징벌(懲罰)할 수 있게끔 했는데도, 긴요하지 않는 잡사(雜事)를 진소(陳訴)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어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없신여겨 고알(告訐)350) 하는 풍습(風習)이 크게 일어나서, 한 사람의 일에 한 동리가 이에 화(化)하게 되고, 한 동리의 일에 한 고을이 이에 화하게 되고, 한 고을의 일에 한 도(道)가 이에 화하게 되어 한 나라에까지 이르게 되니, 이런 풍습(風習)을 커지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풍습은 한번 이루어지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개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비록 자기의 일이라도 원통하고 억울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사헌부(司憲府)에서 소장(訴狀)을 받아서 처리하지 못하게 하고, 그 받아서 처리한 것도 무고(誣告)인 경우에는 반좌(反坐)351) 하도록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고알(告訐)이 그쳐지고 탐포(貪暴)도 또한 스스로 중지될 것입니다. 또 노비(奴婢)의 분수는 군신(君臣)과 같으니 사망(死亡)과 환난(患難)을 구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스스로 가법(家法)이 있지마는, 창졸의 변고가 전조(前朝)의 홍건적(紅巾賊)의 시기와 같이 발생된다면 그 해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금후에는 노비(奴婢)로서 본주인이 수재(水災)·화재(火災)·도적·질병(疾病)·사망(死亡)의 환난(患難)을 만난 것을 보고서 능히 부지(扶持)하고 구호(救護)하는 자는 관청에 알려서 노비(奴婢)를 놓아 양인(良人)으로 만들게 하고, 그 주인이 죽어서 3년 동안을 여묘(廬墓)한 자도 또한 그 역(役)을 면제해 주게 하소서. 또 본조(本朝)의 평민(平民)의 여자는 진실로 논할 것도 없지마는, 양가(良家)의 부녀(婦女)가 절개를 지키는 행실은 취(取)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찌 능히 집집마다 다 그렇겠으며, 백년을 하루와 같이 하겠습니까? 원컨대 금후에는 능히 그 남편을 수재(水災)·화재(火災)·도적(盜賊)·질병(疾病)·사망(死亡)에서 부지(扶持)한 사람과 나이 20세가 되어 과부(寡婦)가 되었으나 10년에 이르도록 절개를 지킨 사람은 그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고, 그 집의 정역(丁役)을 영구히 면제해 주소서."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고알(告訐)하는 풍습(風習)은 내가 바야흐로 마음을 써서 금지시키려고 하는 때이다. 무고(誣告)를 반좌(反坐)시키자는 의논은 매우 좋다. 노비(奴婢)를 놓아 양인(良人)으로 만들자는 설(說)은 의정부(議政府)에 내리도록 하겠다."
하였다.
"1. 의제(儀制)를 정하는 조목입니다. 대개 예절(禮節)은 3천 3백의 다른 것이 있는데, 그 조목은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家禮)의 다섯 가지뿐입니다. 길례(吉禮)란 것은 조정(朝廷)의 예절이고, 군례(軍禮)란 것은 병진(兵陣)의 예절이고, 빈례(賓禮)란 것은 교린 사대(交隣事大)의 예절이고, 가례(嘉禮)란 것은 혼인(婚姻)이고, 흉례(凶禮)란 것은 상장(喪葬)입니다. 원컨대 세종조(世宗朝)에서 새로 찬술(撰述)한 의주(儀注)를 가지고 참작하여 이를 고정(考定)하여서, 특별히 일대(一代)의 전례(典禮)를 이루어 조정의 의식과 병진(兵陣)의 법으로 하여금 질서가 정연하여 차례에 있어서 서로 문란하지 않도록 하고, 삼례(三禮)352) 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게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예조(禮曹)에 내리겠다."
하였다.
"1. 호적(戶籍)을 밝히는 조목입니다. 대개 《주례(周禮)》에, ‘무릇 백성은 금년에 난 아이로부터 그 이상은 모두 호적(戶籍)에 기록하고, 3년 만에 대비(大比)353) 하여 왕(王)에게 바치면 왕이 절하고 이를 받아서 천부(天府)354) 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지금 본조(本朝)는 호구(戶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평안도(平安道)에서는 대부분 1정(丁)을 1호(戶)로 삼고,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 및 함길도(咸吉道)의 육진(六鎭)에서는 혹은 수십 인(數十人)을 1호(戶)로 삼기도 하는데, 경기(京畿)와 충청도(忠淸道)에서는 그다지 지나친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의 산군(山郡)의 백성들은 유망(流亡) 하여 직업을 잃게 되므로, 1호(戶)로써 전일의 몇 호(戶)의 부역(賦役)을 제공하게 하니 날로 피폐(疲弊)해졌습니다.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의 연해(沿海)의 고을에는, 세력 있고 교활한 집에서는 밖에는 한 개의 문을 만들어 놓고 안에는 몇 집을 두고서는, 만약 혹시 찾아내려고 하면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가기도 하고, 종이 본주인을 구타하는 자까지 있기도 합니다. 평상시에는 부자(富者)는 부역을 면하고 빈자(貧者)는 항상 그 노고(勞苦)를 대신하고 있으며, 전쟁이 일어나면 본디부터 호적(戶籍)에 기재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반드시 모두 도망하여 숨어 버릴 것이니, 모두가 옳지 못합니다.
원컨대 금후에는 경도(京都)인 한성부(漢城府)와 외방(外方)인 팔도(八道)에 호구(戶口)의 법을 거듭 밝혀서, 존비(尊卑)와 노소(老少)와 남녀(男女)를 논할 것 없이 모두 호구(戶口)를 두어, 없는 사람을 과죄(科罪)하게 하고, 그 사족(士族)들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奴婢)와 평민(平民)이 그 부모(父母)와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사람 외에는 매 3정(丁)을 1호(戶)로 삼고, 3년 만에 한 번 이를 조사하여 1정(丁)을 누락(漏落)시킨 자는 오가(五家) 및 감고(監考)·관령(管領)을 모두 북쪽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1가(家)를 누락시킨 사람은 수령(守令) 및 병방(兵房)의 이속(吏屬)을 모두 죄주고, 이내 다른 사람에게 진고(陳告)하도록 하여, 범인(犯人)의 전지(田地)와 재산을 가지고 상(賞)에 충당하게 하소서. 또 입사(入仕)한 사람과 소원(訴冤)한 사람도 모두 호구(戶口)를 먼저 조사하도록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한 사람이라도 국민(國民)이면서 호적(戶籍)에 누락되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한 병졸이라도 단정(單丁)이면서 부역에 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므로, 양인(良人)이 다 나옴으로써 군액(軍額)355) 이 넉넉하게 되고, 포도(逋逃)356) 가 나옴으로써 도적이 그치게 되고, 공천(公賤)이 나옴으로써 관부(官府)가 넉넉하게 되고, 사천(私賤)이 나옴으로써 사대부(士大夫)가 넉넉하게 되고, 시정(市井)의 무리들까지도 모두 호적(戶籍)에 기록하여 석척군(石擲軍)357) 으로 삼아서 전진(戰陣)의 일을 연습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병조(兵曹)에 내리겠다."
하였다.
"1. 의창(義倉)358) 을 실(實)하게 하는 조목입니다. 대개 국가의 미곡(米穀) 수용(需用)은 공상(供上)과 녹봉(祿俸)과 군자(軍資)와 의창(義倉)입니다. 근년에 의창(義倉)에서 대부(貸付)한 것을 세 차례나 견감(蠲減)해 주었으므로 이로부터 백성들이 의창(義倉)의 곡식을 받고는 예전부터 내려온 관례(慣例)를 희망하면서 환납(還納)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져서 날로 더욱 모손(耗損)되어 가니, 진실로 한심(寒心)할 만한 일입니다. 신(臣)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어리석은 백성이 곡식을 얻으면 존절히 하여 조석(朝夕)에 공급하고, 저축(儲畜)하여 흉황(凶荒)에 대비(對備)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선왕(先王)이 비로소 의창(義倉)을 마련했으니, 의창은 곧 백성들의 부고(府庫)입니다. 연사(年事)가 비록 기년(饑年)에 이르지 않더라도 여름철의 식량과 종자는 오직 의창(義倉)에만 의뢰(依賴)하게 되는데, 지금 듣건대, 경상도(慶尙道) 한 도(道)의 굻주림을 진휼(賑恤)하려고 하여도 곡식이 없다고 하니, 반드시 장차 군자(軍資)를 빌려야 할 형편입니다. 군자(軍資)는 군려(軍旅)에 사용하게 되고, 의창(義倉)은 흉황(恟荒)에 사용하게 되니, 모두가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의창(義倉)이 다 없어져서 또 군자(軍資)를 가지고 모두 사용한다면, 국가의 축적(蓄積)이 많이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臣)이 지난 여름에 의창(義倉)을 보첨(補添)할 계책을 우러러 진술하여 유윤(兪允)을 얻게 되어, 즉시 해당 관사[該曹]로 하여금 조치(措置)하도록 하였지만, 그러나 그 후에는 해당 관사(官司)에서 설시(設施)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근일에 경상도(慶尙道)의 굶주림에 군자(軍資)를 가대(假貸)한다는 의논이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감히 이같이 다시 진술하게 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굽어살펴서 다시 해당 관사(官司)로 하여금 특별히 포치(布置)를 더하게 하소서."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해당 관사(官司)에 독촉하여 물어보겠다."
하였다.
"1. 쓸데없는 관원[冗官]을 도태(淘汰)시키는 조목입니다. 대개 쓸데없는 관원은 도태(淘汰)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법을 만들고 제도를 정할 적에는 마땅히 이익되는 일과 폐해되는 일은 세밀히 연구하여 장차 백년이 되어도 폐해가 없도록 해야만 하니, 한때에 바쁘게 이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속전(續典)》 이후의 조장(條章)을 먼저 취(取)하여 《신전(新典)》을 찬술(撰述)하고, 《신전(新典)》이 이미 이루어지면 《원전(元典)》·《속전(續典)》·《등록(謄錄)》·《신전(新典)》 등 4종(種)의 책을 합하여 이를 참고해서 육전(六典)을 만들어 대성(大成)시키고 이내 관제(官制)를 정하게 하는데, 관제(官制)를 정할 때에는 백관(百官)의 직사(職事) 중에서 어느 것은 도태(淘汰)시켜야 되고 어느 것은 도태시키지 않아야 됨을 참작하여 이를 증감(增減)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신전(新典)》이 이루어짐으로써 근년의 조장(條章)이 거취(去就)가 있을 것이고, 육전(六典)이 대성(大成)됨으로써 전후(前後)의 법도(法度)가 한 곳으로 귀착(歸着)됨이 있을 것이니, 관제(官制)가 정해짐으로써 백관(百官)의 준수(遵守)할 바가 있게 되고, 쓸데없는 관원들도 또한 도태(淘汰)될 것입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내가 이미 포치(布置)했는데, 꼭 내 마음에 부합한다."
하였다.
"1. 작은 현(縣)을 병합(倂合)하는 조목입니다. 대개 작은 현(縣)은 모두 합쳐야 되겠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중원(中原)과 동국(東國)에서 모두 주·부·군·현(州府郡縣)을 뒤섞어 설치했는데, 큰 것은 작은 것을 통솔하고, 작은 것은 큰 것을 받들고 있어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유지(維持)하는 뜻인 때문입니다. 체제(體制)와 형세(形勢)를 가지고 말한다면 군·현(郡縣)을 모두 작게 할 수는 없으며, 민사(民事)를 가지고, 말한다면 군·현을 모두 크게 할 수가 없으니, 모름지기 간혹 큰 주(州)를 설치하여 그 형세를 웅장하게 하고, 또 작은 읍(邑)을 설치하여 민사(民事)를 편리하게 한 뒤에야 가(可)할 것입니다. 오늘날엔 길가의 쇠잔(衰殘)한 고을은 그 너무 심한 것만 병합(倂合)시킨다면 가하겠습니다. 만약 예(例)대로 작은 현(縣)을 가지고 큰 주(州)에 합치고, 혹은 작은 현(縣)을 가지고 작은 현(縣)에 병합(倂合)하여 큰 주(州)로 삼는다면, 신(臣)은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 수가 없겠습니다. 옛날 사람이 산천(山川)의 요해(要害)와 도로(道路)의 원근(遠近)에 인하여 군·현(郡縣)을 벌여 설치했으니, 삼한(三韓)의 땅이 합계 3백여 주(州)인데, 이것을 정도에 지나치게 증감(增減)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물며 군(郡)이 크면 백성이 많고, 백성이 많으면 사무가 번다(煩多)하므로, 수령(守令)은 부서(簿書) 처리에 시달려서 한 고을의 민사(民事)를 이속(吏屬)에게 맡기게 되니, 이속의 손에 민사(民事)를 맡기게 되면 백성의 폐해를 받는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현(郡縣)이 지나치게 큰 것은 나누어 별읍(別邑)을 설치하고, 그 매우 작은 현(縣)은 큰 현(縣)에 병합(倂合)시킨다면 어찌 큰 고을을 물을 수가 없으며, 작은 고을을 예(例)에 따라 큰 고을에 합쳐야만 할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경성(京城)과 팔도(八道)의 지도(地圖)·지지(地誌)를 먼저 정하고, 지도(地圖)와 호적(戶籍)을 상고할 때는 그 산천(山川)의 요해(要害)와 도로(道路)의 원근(遠近)과 인물(人物)의 번다(煩多)함과 간략(簡略)함을 살펴서, 혹은 작은 고을을 가지고 큰 고을에 병합(倂合)시키기도 하고, 큰 고을을 가지고 나누어 두 고을을 만들기도 하면서, 그 너무 심한 것만 제거(除去)할 것이니, 다만 오늘날에 결의(決意)하여 행할 것은 두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지경을 넘어온 땅은 빠짐 없이 개정(改正)하고, 견아상입(犬牙相入)359) 한 것도 또한 대략 살펴서 정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군·현(郡縣)의 제도도 문란하지 않고, 백성들도 또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신(臣)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백성이 이미 많고 이미 부유(富裕)하면 또 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식량을 넉넉하게 하고 병졸(兵卒)을 넉넉하게 하면 백성이 믿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한 가지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신(臣)이 지금 진술한 것은 호적(戶籍)이 밝아지면 백성이 이미 많아져서 병졸(兵卒)이 넉넉해지는 것이고, 의창(義倉)이 실(實)하면 백성이 부유(富裕)해져서 식량이 넉넉해지는 것이며, 백성을 가르쳐서 백성이 믿는다면 풍속이 저절로 순후(淳厚)한 데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을 가르치는 근본은 또한 〈임금께서〉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날로 덕을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여하(如何)에 있을 뿐입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위의 조목을 나의 정사에 천천히 살펴보겠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