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대왕 묘지문[誌文]
지문(誌文)
아! 우리 희륜 정극 수덕 순성 대왕(熙倫正極粹德純聖大王)께서는 14년 동안 재위(在位)하셨는데, 전장(典章)이 분명하게 잘 정돈되고 대유(大猷)가 때로는 떠올랐으며, 풍우(風雨)가 순조롭고 온갖 아름다움이 빛나게 완성되었으므로, 막 경명(景命)을 맞이하여 생령(生靈)을 공고(鞏固)히 해서 온 세상을 장구히 잘 다스려진 태평스런 지경으로 끌어올리려 도모했었습니다. 그런데 계해년080) 12월 7일 병환이 있어 체후가 편안하지 못했었는데, 그 다음날 경진일(庚辰日)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昇遐)하셨으니, 춘추(春秋)는 33세였습니다. 우리 전하(殿下)081) 께서는 태모(太母)082) 의 명에 의거해 즉위(卽位)하시고 익실(翼室)083) 에 들어와서 상주(喪主)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소(大小) 신공(臣工)들과 함께 공을 상고하고 행적을 형상하기 위해 삼가 존시(尊諡)를 문현 무성 헌인 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라고 올리고, 묘호(廟號)는 철종(哲宗)이라고 올렸습니다. 다음해 갑자년084) 4월 7일 정축(丁丑)에 예릉(睿陵)에 대장(大葬)하였는데, 실은 희릉(禧陵)의 오른쪽 산등성이입니다. 전하께서는 신(臣) 김병학(金炳學)이 헌지(軒墀)에서 모신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선왕의 덕을 가장 자세히 안다는 이유로써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사사(辭謝)하였으나 승락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이 일은 마지막 섬기는 일인데 모른 체하고 참으면서 욕의(蓐蟻)085) 는 못되었을 망정 붓대를 잡는 기예(技藝)에 가탁하여 천일(天日)086) 의 덕을 그려 내기 위해 감히 양려(揚厲)를 선포(宣布)하는 즈음에 아첨하는 말로 지나치게 칭찬하는 짓을 함으로써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징거할 데가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간략하게 할지라도 외람됨이 없고 사실대로 기록하고 화려하게 꾸밈이 없게 하여 평일의 겸양하는 빛난 지덕(至德)을 천명하는 것이 곧 우악(優渥)했던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기를 도모하는 방법이 되겠습니다. 삼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손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려 기록합니다.
왕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변(昪)이고, 자(字)는 도승(道升)이니, 순조 대왕(純祖大王)의 아드님이요 정종 대왕(正宗大王)의 손자이십니다. 정종 대왕의 아우님이 은언군(恩彦君)이고, 은언군의 아드님이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인데, 임금께서는 전계 대원군의 제3자(第三子)로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하였습니다. 모비(母妃)는 순원 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인데, 영의정에 추증(追贈)된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입니다. 본생모(本生母)인 염씨(廉氏)는 용성 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인데 영의정에 추증된 염성화(廉成化)의 따님입니다. 임금께서는 순조(純祖)신묘년087) 6월 17일 정유 경행방(慶幸坊)의 사제(私第)에서 탄강(誕降)하셨습니다. 이때 순원 왕후의 꿈에 영안(永安) 국구(國舅)께서 한 어린아이를 봉헌(奉獻)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시오.’ 하였는데, 왕후가 꿈에서 깨고 나서도 이상하게 여겨 그 사실을 기록하여 책궤에 저장하여 두었었습니다. 임금께서 즉위하심에 이르러 보니, 용안(龍顔)과 의표(儀表)가 완연히 꿈속에서 본 것과 똑같았습니다.
기유년088) 6월 임신일(壬申日)에 헌종 대왕(憲宗大王)께서 승하하시고 후사(後嗣)가 없자 순원 왕후께서 이르기를,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혈맥(血脈)은 오직 헌종(憲宗)과 임금뿐이다.’ 하시고, 드디어 대책(大策)을 정하고 강화(江華)의 잠저(潛邸)에서 봉영(奉迎)하여 왔습니다. 처음에 덕완군(德完君)에 봉하였다가 그달 초 9일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빈전(殯殿)에서 대보(大寶)를 전수받은 다음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으며, 중궁전(中宮殿)을 높여 대비(大妃)로 삼았습니다. 대왕 대비(大王大妃)와 왕대비(王大妃)께서는 이미 갑오년089) 에 존칭(尊稱)을 받으셨습니다. 대왕 대비께서는 국조(國朝)의 구전(舊典)에 따라 수렴(垂簾)하고 함께 청정(聽政)하였는데, 모든 대소(大小)의 기무(機務)를 임금이 모두 품(稟)하여 재결하였습니다. 대왕 대비께서 임금에게 하교하시기를, ‘이런 망극(罔極)한 지경을 당하여 이제 다행스럽게도 5백 년 이어온 종사(宗社)를 부탁할 사람이 있게 되었다. 주상(主上)은 곧 영종(英宗)의 혈손(血孫)이다. 지나간 일이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오랫동안 향외(鄕外)에서 거처하였던 것인데, 그러나 옛날의 제왕(帝王)들도 민간(民間)에서 생장(生長)한 분이 있어 백성들의 고통을 모르는 것이 없었으므로, 정령(政令)을 시행할 즈음에 매양 애민(愛民)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현명한 군주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 주상도 응당 민간의 일을 익히 알았을 것이니, 애민(愛民)하는 방법은 절검(節儉)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비록 한 알의 밥과 한 자의 베[布]일지라도 이것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니, 만약 절검하지 않는다면 그 폐해가 반드시 백성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백성이 잘 살아가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일념(一念)으로 조심하여 모쪼록 ‘백성을 사랑한다[愛民]’는 두 글자를 잊지 말기를 바란다. 비록 기왕의 공부(工夫)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사람이 글을 읽지 않으면 고사(古事)에 어둡게 되고 고사에 어두우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법이다. 비록 슬퍼서 경황이 없는 중일지라도 또한 마땅히 항상 유신(儒臣)을 접견하여 경사(經史)를 토론해야만 할 것이다. 성현(聖賢)들의 심법(心法)과 제왕(帝王)의 치모(治謨)를 점차 학습한 연후에야 일을 처리하는 것을 사의(事宜)에 맞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위로는 종사(宗社)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민생(民生)의 고달픔을 돌아보아, 공경하고 신중하게 하며 부지런히 하고 검소하게 하여 많은 백성이 간절히 바라는 뜻에 부합되게 하여야 한다. 임금이 비록 지극히 존엄하다고 하지만 원래 조신(朝臣)을 경시(輕視)하는 법이 없는 것이며, 대신(大臣)은 더욱 나라를 몸처럼 여겨 돕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예절로써 대우해야만 된다. 비록 그들이 일을 주달하는 사이에도 반드시 옳지 않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니, 부지런히 청종(聽從)하여 가슴에 새기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14일에 성복(成服)하였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경문 위무 명인 철효(經文緯武明仁哲孝)라고 하였고, 묘호(廟號)는 헌종(憲宗)이라고 하였습니다. 10월 28일 임진(壬辰)에 헌종 대왕을 경릉(景陵)에 장사지냈는데, 효현 왕후(孝顯王后)와 같은 언덕이었습니다.
임금께서는 어버이를 섬기고 선왕(先王)을 받듦에 있어 정성과 공경심을 극진히 갖추었는데, 전궁(殿宮) 사이에 상서로운 화기가 넘쳐흘렀으며 종묘(宗廟) 안에서는 의용(儀容)이 엄숙하였습니다.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들의 탄강(誕降)한 해, 승하(昇遐)한 시기, 즉위(卽位)한 해, 친영(親迎)한 해를 만나면, 혹은 직접 선릉(先陵)에 나아가 정성을 펴기도 하고, 혹은 대신(大臣)을 대신 보내어 제향(祭享)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선원전(璿源殿)을 증수(增修)하여 헌종(憲宗)의 수용(睟容)을 봉안(奉安)하였고, 정신(廷臣)이 상소(上疏)한 것으로 인하여 순종(純宗)의 묘호(廟號)를 고쳐 조(祖)로 만들었으며, 헌종을 높여 세실(世室)로 들여놓았고, 순조의 수용을 남전(南殿)에 봉안(奉安)하였습니다. 예관(禮官)이 진종(眞宗)의 조묘(祧廟)에 대한 헌의(獻議)를 진달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직 친속(親屬)의 정리(情理)가 다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질천(迭遷)에 대해 의논하는 것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있어 크게 미안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제왕가(帝王家)는 통서(統序)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고금의 통의(通誼)인 것이다. 헌종 대왕께서 15년 동안 군림(君臨)하시었고 정조(正祖)·순조(純祖)·익종(翼宗)의 적자(嫡子)와 적자로 계승하여 온 대통(大統)을 찬승(纘承)하였는데, 지금 이소(二昭)·이목(二穆) 이외의 위차(位次)에 봉부(奉祔)한다면, 그것이 천리와 인정에 있어 더욱 어떠하겠는가? 그렇다면 진종(眞宗)을 조천(祧遷)하는 것은 본디 예법에 있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영녕전(永寧殿)에 조천(祧遷)하였습니다. 그리고 은언군(恩彦君)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익평군(益平君) 이희(李曦)로 하여금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영평군(永平君) 이욱(李昱)으로 하여금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풍계군(豐溪君)을 은전군(恩全君)에게 입계(入繼)시켜 그 후사(後嗣)로 세우고 면세전(免稅田) 3백 결(結)을 제급(題給)하여 제사에 이바지하게 하였습니다.
인릉(仁陵)·수릉(綏陵)·휘경원(徽慶園)이 풍수(風水)에 잘 맞지 않는 것을 우려하여, 친히 택조(宅兆)를 간심(看審)하여 편안하게 천봉(遷奉)하였습니다. 대원군(大院君)의 분묘(墳墓)를 천장(遷葬)하고 사신(使臣)을 청국(淸國)에 보내어 진주(陳奏)하여, 은언군(恩彦君)의 신유년090) 의 무안(誣案)을 변해(辨解)하였으며, 신해년091) 에는 대왕 대비의 존호(尊號)를 더 올려 정렬(正烈)이라 하였고, 왕대비(王大妃)의 존호(尊號)는 선경(宣敬)이라 하였으며, 효현 왕후(孝顯王后)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여 경혜 정순(敬惠靖順)이라고 하였고, 대비(大妃)에게 존호를 올려 명헌(明憲)이라고 하였습니다. 임자년092) 에는 대왕 대비의 존호를 더 올려 선휘(宣徽)라고 하였고, 계축년093) 에는 순조 대왕(純祖大王)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계천 배극 융원 돈휴(繼天配極隆元敦休)라고 하였고, 대왕 대비의 존호를 더 올려 영덕(英德)이라 하였습니다.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성헌 영철 예성 연경(聖憲英哲睿誠淵敬)이라 하였고 왕대비의 존호를 더 올려 정인(正仁)이라 하였으며, 헌종 대왕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체건 계극 중정 광대(體健繼極中正光大)라고 하고, 효현 왕후(孝顯王后)의 존호는 단성(端聖)이라고 하였고 대비(大妃)의 존호를 더 올려 숙경(淑敬)이라고 하였습니다. 을묘년094) 에 장헌 세자(莊獻世子)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찬원 헌성 계상 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라고 하고, 혜빈(惠嬪)의 존호는 유정(裕靖)이라고 올렸습니다. 정사년095) 에 대왕 대비께서 승하(昇遐)하시자 휘호(徽號)를 올리기를 예성 홍정(睿成弘定)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순원(純元)이라 하였으며, 순조 대왕(純祖大王)의 존호를 추상(追上)하기를 의행 소륜 희화 준열(懿行昭倫熙化峻烈)이라고 하고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존호는 자헌(慈獻)이라고 하였으며, 왕대비(王大妃)의 호칭을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올렸고 대비(大妃)의 호칭을 왕대비(王大妃)로 올렸습니다. 무오년096) 에 순조 대왕의 존호를 추상(追上)하기를 대중 지정 홍훈 철모(大中至正洪勳哲謨)라고 하고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존호는 현륜(顯倫)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미년097) 에 대왕 대비의 존호를 더 올리기를 자혜(慈惠)라 하고 왕대비의 존호는 예인(睿仁)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유년098) 에 순조 대왕의 존호를 추상(追上)하기를 건시 태형 창운 홍기(乾始泰亨昌運弘基)라고 하고 순원 왕후의 존호는 홍화(洪化)라고 하였습니다. 임술년099) 에 순조 대왕의 존호를 추상(追上)하기를 고명 박후 강건 수정(高明博厚剛健粹精)이라고 하고 순원 왕후의 존호는 신운(神運)이라고 하였습니다.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손(祀孫)을 동반(東班)의 음직(蔭職)에 녹용(錄用)하라고 명했는데, 이는 이륜(彝倫)을 돈독히 하는 덕을 미루어 기로(耆老)를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베푼 것입니다.
경술년100) 은 순조(純祖)께서 탄강(誕降)하신 지 주갑(周甲)이 되는 해인데, 경조윤(京兆尹)101) 에게 61세 되는 사람을 문(文)·음(蔭)·무(武) 가운데서 초계(抄啓)하게 하여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으며, 사서인(士庶人)에게는 식물(食物)과 미포(米布)를 하사하였습니다. 갑인년102) 5월은 순원 왕후의 탄신(誕辰)인데 영종조(英宗朝) 때 기로(耆老)들에게 정시(庭試)를 보인 전례에 의거하여 기로과(耆老科)를 설행하였으며, 정사년103) 에는 순원 왕후가 장차 칠순(七旬)에 오른다는 것을 이유로 사서인(士庶人) 가운데 69세 되는 사람들을 초계(抄啓)하게 하여 쌀과 솜을 반사(頒賜)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신(大臣)·기구(耆舊)들의 경수연(慶壽宴)에는 혹은 옷감과 음식물을 하사하기도 하고 혹은 내온(內醞)과 법악(法樂)을 하사하기도 하며 혹은 신장(宸章)104) 을 하사하기도 하고 혹은 궤장(几杖)을 내리기도 하여, 국로(國老)에게 은혜를 베풀어 무양(撫養)함으로써 태평한 세상에 수역(壽域)을 누리는 교화를 아름답게 나타내었습니다. 임금께서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으로 상천(上天)을 대하였으므로, 혜성(彗星)이 요사스런 조짐을 보이면 경건한 마음으로 기상(氣象)을 살폈고, 천둥 번개가 경계를 고하면 두 손을 마주잡는 자세로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였습니다. 계축년105) 의 큰 가뭄에는 정전(正殿)을 피하여 찬선(饌膳)을 감하고 음악(音樂)을 연주하지 말 것을 명하고서 하교하기를, ‘돌아보건대 나는 부덕(否德)한 몸으로 외람되이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았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걱정과 두려움에 젖어 감히 편안한 겨를이 없었다. 지금 이 큰 가뭄의 재해(災害)는 어찌하여 이렇게 발생한 것인가? 기우제(祈雨祭)를 누차 거행했는데도 하늘의 응답이 아직도 아득하기만 하니, 민정(民情)을 생각함에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가 있겠는가? 재해(災害)는 헛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민생(民生)이 고생에 시달려도 잘 구제(救濟)하지 못하고 법령(法令)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도 잘 쇄신(刷新)시키지 못하며 재곡(財穀)이 떨어져 없는데도 잘 절검(節儉)하지 못하고 탐욕이 많은 관리가 횡행하는데도 잘 징치(懲治)하지 못한 것이 첫째도 과매(寡昧)한 나의 죄요 둘째도 역시 과매한 나의 죄이다.’ 하였습니다.
무오년106) 10월 7일에 천둥하고 4일이 지나 또 천둥을 하였으므로, 잇따라 직언(直言)을 구하는 교서(敎書)를 보내고 3일 동안 찬선(饌膳)을 감하였습니다. 기미년107) 겨울에 천둥하자, 자신을 꾸짖으면서 직언(直言)을 구하고 작년(昨年)의 정령(政令)을 다시 살펴 한결같이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 ‘안민(安民)’이라는 두 글자를 큰 글씨로 써서 궁전(宮殿)의 벽에다 액자로 만들어 걸어 두었습니다. 모든 방백(方伯)과 수령(守令)들이 사폐(辭陛)할 적에는 반드시 면대하여 계칙(戒飭)시켰으며,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어 장부(臧否)108) 를 규찰(糾察)하게 하였고 숨겨진 일을 채방(採訪)하였습니다. 버려져 떠도는 사람들에게는 항료(恒料)를 넉넉히 지급하였고,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우악(優渥)한 휼전(恤典)을 베풀었습니다. 신해년109) 에는 관서(關西)·해서(海西)에서 수재(水災)를 입었고, 임자년110) 에는 관북(關北)에서 화재(火災)를 입었고, 갑인년111) 에는 호남(湖南)에서 수재를 입었고, 병진년112) 에는 기읍(畿邑)에서는 화재를, 영남(嶺南)·해서(海西)에서는 수재를 입었고, 정사년113) 에는 호서(湖西)에서 수재를 입었고, 경신년114) ·신유년115) 에는 관북(關北)에서 잇따라 수재를 당했는데, 모두 도내(道內)의 품계가 높은 수령을 파견하기도 하고 혹은 근시(近侍)를 보내기도 하여, 재민(災民)들을 위유(慰諭)시켜 각기 편안히 지내게 하였습니다.
임술년116) 에는 삼남(三南)과 관북(關北)에서 민요(民擾)가 발생하자 안핵사(按覈使)와 선무사(宣撫使)를 보내어 사실을 규핵하게 하고 편안하게 안무(按撫)시켰습니다. 신해년에는 해서(海西)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본도(本道)의 곡식 1만 석(石)과 경사(京司)에 상납할 돈 1만 냥을 획급(劃給)하게 하였으며, 임자년에 관서(關西)에 흉년이 들었을 적에는 선혜청(宣惠廳)의 돈 5만 냥과 사역원(司譯院)의 삼포세(蔘包稅) 6만 냥을 대여(貸與)하여 주도록 명하였습니다. 임술년에는 삼정(三政)117) 을 이정(釐正)하는 것 때문에 내탕전(內帑錢) 5만 냥을 하사하여 견감(蠲減) 급대(給代)하는 수요(需要)에 보태게 하였습니다. ‘민생의 휴척(休戚)118) 은 장리(長吏)에게 달려 있고 지방 목민관(牧民官)들의 청렴과 탐독(貪黷)은 초사(初仕)에 연유된다’고 하면서 비당(備堂)119) 과 이판(吏判)·병판(兵判)을 역임한 사람에게 각기 수령(守令)으로서 이미 드러난 치적이 있는 사람 2인씩을 천거(薦擧)하도록 명하였고, 또 구경(九卿)과 유사 당상(有司堂上)에게도 각기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서 재행(才行)이 있는 사람 2인을 천거하게 하여 수용(需用)에 대비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며, 또 하교하기를, ‘성심으로 널리 구하면 어찌 인재(人才)가 없겠는가? 특별히 각도(各道)의 방백(方伯)에게 신칙하여 듣는 대로 초천(抄薦)하게 함으로써 뜻이 있는 선비들로 하여금 헛되이 늙는다는 탄식이 없게 하라. 그리고 전조(銓曹)에서 먼저 장용(奬用)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유술(儒術)을 숭장(崇奬)하였으므로 유일(遺逸)들을 망라하여 모았으며 초정(招旌)하는 예(禮)가 거의 없는 해가 없었는데, 이렇게 상석(上席)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마음이 성심(誠心)에서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진이를 드러내고 충신을 포장(褒奬)하는 전례(典禮)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국조(國朝)의 명유(名儒)들 가운데 신신(藎臣)120) 으로서 정량(貞亮)121) 하고 절의(節義)가 있는 이에 대해서는 벼슬과 시호를 추증(追贈)하기도 하고 혹은 사손(祀孫)을 녹용(錄用)하기도 하며 혹은 집이나 분묘에 사제(賜祭)하기도 하고 그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祠堂)에 모시고 제사지내게 하였습니다. 학문을 강론하여 사도(斯道)를 호위(護衛)하는 것으로써 사림(士林)에 정다운 은혜를 내렸고, 의(義)를 취택하여 인(仁)을 이루어 왕실(王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였으니, 우뚝하게 수립(樹立)한 것이 정이(鼎彝)122) 와 기상(旂常)123) 에 기록한 공훈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과장(科場)이 분잡스러우면 과시(科試)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유사(有司)에게 동칙(董飭)하여 정일(精一)하고 명백(明白)하게 대양(對揚)124) 하였으며, 늘 하교하기를, ‘옛날의 좌주(座主)125) 는 인재를 발탁하여 벼슬에 앉혀 국가의 수용(需用)이 되게 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단지 관절(關節)126) 한다는 것만 들릴 뿐이요 분경(奔競)127) 만 알 뿐이다. 그리고 거실(巨室)128) 의 자제(子弟)들은 한 글자의 글을 읽지 않았는데도 그 부형(父兄)들이 자제의 두각(頭角)을 안타깝게 여겨 극력 도모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인재를 수습(收拾)하는 방도이겠는가? 이렇게 교칙(敎飭)한 뒤에도 만일 사정(私情)을 썼다는 보고가 입계(入啓)된다면, 다만 마땅히 과율(科律)을 시행하겠다.’ 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형벌을 밝히고 법을 신칙하여 흠휼(欽恤)하고 애경(哀敬)하는 자세를 지녔으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생각으로써 차라리 실형(失刑)했다는 의리를 나타냈고, 죄수를 심문함에 있어서는 항상 신중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지녔으므로, 소결(疏決)할 때 완전히 석방시키는 일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나라의 법을 진작시키는 데 이르러서는 이것이 화기(和氣)에 관계가 되기 때문에 조금도 동요되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 임금께서 하늘을 섬기고 사람을 다스리며 정령을 제정하고 다스려짐을 도모한 성절(盛節)입니다.
계해년129) 봄 중국 사람 정원경(鄭元慶)이 저술한 《이십일사약편(二十一史約編)》이 연경(燕京)에서 우리 나라로 나왔는데, 우리 나라의 종계(宗系)와 개국(開國)할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 너무도 잘못되어 있었으므로, 임금이 크게 놀라 사신(使臣)을 보내어 변무(辨誣)하여 진달한 결과 마침내 소설(昭雪)시켜 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군신(群臣)들이 선조(宣祖) 때의 고사(故事)를 원용(援用)하여 존호(尊號)를 올려 희륜 정극 수덕 순성(熙倫精極粹德純聖)이라 하고 중궁전(中宮殿)에는 존호를 올려 명순(明純)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영종(英宗)께서 존호를 받을 때 인원 왕후(仁元王后)에게 존호를 올린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드디어 대왕 대비(大王大妃)에게 존호를 올려 홍덕(弘德)이라 하고, 왕대비(王大妃)에게 존호를 올려 정목(正穆)이라고 하였습니다. 책보(冊寶)를 완성하여 놓고 미처 올리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변을 당하였으니, 아! 애통합니다.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영의정에 추증된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 충순공(忠純公) 김문근(金汶根)의 따님인데, 원자(元子)를 탄생하셨으나 돌도 못되어 졸(卒)하였으며, 어린 따님이 하나 있는데 궁인(宮人) 범씨(范氏)의 소생입니다.
임금께서는 가정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여 오래도록 외방에서 노고를 겪으셨습니다. 갑진년130) 에 교동(喬桐)에서 강화(江華)로 이사(移徙)할 적에 큰 바다에 이르자 바람이 일어 물결이 사나왔으므로 배가 매우 위태로웠는데도 임금께서는 태연히 두려움이 없이 가인(家人)들을 위무(慰撫)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바람이 자고 물결이 잔잔해지자 배에 탄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기를, ‘이곳은 본디 위험한 나루인데다 또 사나운 바람까지 만났으니 사리로 보아 반드시 요행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마침내 잘 건너게 되었으니, 생각건대 배에 탄 사람들 가운데 하늘이 돕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강화(江華)에 계실 적에 어떤 수신(守臣)이 조절(操切)131) 이 너무 가혹하여 집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여겼었는데 보위(寶位)에 오르게 되자 그 수신(守臣)이 승선(承宣)132) 으로 입시(入侍)했었습니다. 연석(筵席)에서 물러나간 뒤 임금이 측근 신하에게 이르기를, ‘그 사람이 시강(侍講)에서 주대(奏對)한 것을 살펴보면 결코 고의로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날의 일은 국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하고, 마침내 대우하기를 여러 신하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잠저(潛邸) 때에는 남산(南山)에 항상 광기(光氣)가 하늘에 환히 뻗혀 있었는데 봉영(奉迎)하기 하루 전날에야 비로소 소멸되었으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제야 용흥(龍興)의 조짐임을 알았습니다. 봉영하여 양화진(楊花津)에 도착하니 길가에 많은 양(羊)들이 떼를 나누어 꿇어앉았으므로,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임금께서 상(喪)을 당하여 양음(亮陰)133) 하면서는 상례(喪禮)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였으며, 전정(殿庭)의 과일을 빈전(殯殿)에 천신(薦新)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진실로 선왕(先王)께서 일찍이 완상(玩賞)하시던 것이다.’ 하였으며, 원내(苑內)에 있는 모든 과일이 새로 익으면 또한 반드시 천신(薦新)하였습니다. 빈전(殯殿)의 궁인(宮人)이 일찍이 임금에게 쓰는 은기(銀器)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임금은 죄루(罪累)가 여러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새로 만들어 대신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약방(藥房)에서 으레 공상(供上)하는 낙죽(酪粥)을 정지시키고 이르기를, ‘소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 못하면 가축이 번성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심지어 미물인 새짐승과 벌레까지도 상해(傷害)하지 못하게 경계하였습니다. 내주(內廚)의 상선(常膳)에 진수(珍羞)와 이미(異味)가 있으면 그때마다 물리치고 드시지 않았으며, 또 일찍이 육미(肉味)를 즐기지 않는다면서 이르기를, ‘내가 만일 고기를 많이 먹는다면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이를 다투어 본받게 될 것이므로 육축(六畜)이 반드시 많이 손상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법장(法章) 이외의 옷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일상 입는 옷은 주면(紬綿)에 지나지 않았었습니다. 궁실(宮室)을 수리할 경우 서까래 하나 기둥 하나라도 전의 규제보다 사치스럽게 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은 또 임금께서 검덕(儉德)을 힘써 밝히고 몸소 솔선하여 풍속을 인도(引導)한 것입니다. 순원 성모(純元聖母)를 모심에 있어서는 거처(居處)를 반드시 같은 궁전(宮殿)으로 하였고 음식도 반드시 같은 주방(廚房)에서 하도록 하였으며, 경연(經筵)이나 시사(視事)가 있는 이외에는 잠시도 그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순원 성모의 체후(體候)가 편안하지 못할 때가 있으면 부축하거나 주물러 드리거나 긁어드릴 때에는 말하기 전에 먼저 해드렸으며, 주야로 성실하고 전일(專一)한 자세로서 의대(衣帶)를 풀지 않았는데, 9년 동안을 하루처럼 하였습니다.
정사년134) 에 성모(聖母)께서 승하(昇遐)하시자 5개월 동안 여막(廬幕)에 거처하였는데, 궤전(饋奠)을 반드시 직접 올렸으며, 슬퍼하는 용의(容儀)와 통곡하는 예수(禮數)가 지성에서 나왔으므로, 행동이 예경(禮經)에 합치되었습니다. 인산(因山)135) 때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따라가려고 했었으나 군신(群臣)들이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진다는 이유로써 정청(庭請)하여 호소하였으므로 중지하였습니다만, 그래도 풍한(風寒)을 무릅쓰고 복토(復土)136) 의 예(禮)에는 나가서 보았습니다. 일찍이 찬선(饌膳)을 올릴 적마다 이르기를, ‘성모(聖母)를 모시고 먹을 때에는 성모께서 밥을 드시면 나도 밥을 먹었는데, 지금은 어찌 차마 혼자서 먹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측근의 신하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차마 우러러보지를 못하였습니다. 봄 가을로 능묘(陵墓)에 참배하여 상로(霜露)를 밟고 처창(悽愴)한 감회를 폈는데, 1년에 3, 4번씩을 표준으로 하였으며, 침원(寢園)을 천봉(遷奉)할 때에는 반드시 몸소 그 터를 간심(看審)하여 성심(聖心)에 흡족한 후에야 능소(陵所)로 정하였습니다. 자주 경연(經筵)을 열어서 부지런히 학문을 강론하였고 대신(大臣)의 아룀으로 인하여 명(明)나라에서 일강(日講)하였던 전례에 따라 하였는데, 자익(資益)됨이 매우 컸습니다. 일찍이 이르기를, ‘공부는 실로 나 자신의 입지(立志)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고, 자신을 경계하는 열 개의 조항을 병풍에 써놓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쓰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 임금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운 성지(聖智)로써 광명(光明)이 거듭되고 은덕(恩德)이 널리 퍼지는 성운(盛運)을 계승하셨습니다. 밭 갈고 농사지으며 질그릇 굽고 고기잡은 것은 순제(舜帝)의 현묘(玄妙)한 덕이 위에 들리게 된 것이고, 〈전에 겪은 노고를 미루어〉 백성들에게 은택이 미치게 한 것은 은(殷) 고종(高宗)이 서민을 보호하여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선왕(先王)의 보위(寶位)에 올라 선왕의 예법을 행하였으며 자신의 덕을 닦고 행실을 삼가서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 선왕의 일을 조술(祖述)하였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孝子)의 행실이 다 끊어지지 않으니, 하늘이 영원토록 그 자손(子孫)들을 내려 줄 것이다.’ 했는데, 임금이 실로 그와 같았습니다. 엄숙하고도 화락한 몸가짐으로 신명(神明)을 받드는 제사를 잘 지내어 안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극진히 하고 밖으로는 도리를 따라서 정명(精明)한 덕을 이루었습니다. 《예경(禮經)》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은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그 복을 받는다.’ 했는데, 임금이 실로 그와 같았습니다. 경전(經典)을 탐구하여 도의(道義)에 흠씬 젖었으므로 가정을 다스리고 세상에 모범을 보임에 있어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한 것을 미루어서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생각을 시종(始終) 학문에다 두면 자신의 덕이 닦여지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게 된다.’ 했는데, 임금이 실로 그와 같았습니다. 완호물(玩好物)을 물리치고 영건(營建)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대본(大本)137) 에 힘써 항산(恒産)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지력(地力)이 만물을 생성(生成)시킴에는 최대한의 정수(定數)가 있는 것이고 인력(人力)이 만민을 잘 살게 함에는 최대한의 한계(限界)가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한 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제도(制度)로써 절제하여 재화(財貨)를 손상시키지 않으며,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 했는데, 임금이 실로 그와 같이 했습니다. 형헌(刑憲)은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이고 또한 국가의 운명도 달려 있는 것이므로, 좋은 화기(和氣)를 유도하여 맞이하고 하늘에 국운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다만 여기에 그 관건이 달려 있는 것이므로, 모든 옥송(獄訟)과 모든 금계(禁戒)에 질서가 있고 요령이 있었습니다.
《주례(周禮)》에 이르기를, ‘태평한 나라의 형벌은 중도(中道)에 맞는 법을 적용한다.’ 했는데, 임금이 실로 그러했습니다. 깊고도 두터운 인택(仁澤)이 팔도(八道)에 널리 입혀졌고, 굉대(宏大)한 강령과 조목이 영원히 만세(萬世)에 전해갈 것인데, 이는 모두 《주역(周易)》에 이른바 ‘많이 소유한 것을 대업(大業)이라고 하고 날로 새롭게 하는 것을 성덕(盛德)이라고 한다.’ 한 데에 근본한 것입니다. 마땅히 길이 천수(天壽)를 누리면서 장구한 치도(治道)의 교화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도 끝내 백세토록 오래 사는 수명을 아꼈으니, 천리(天理)가 어찌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대덕(大德)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고 반드시 그 복록을 얻고 반드시 장수하게 되고 반드시 명예를 얻게 된다.’ 했는데, 우리 임금의 덕으로써 본다면 증험되는 것도 있고 증험되지 않는 것도 있으니, 신(臣)은 감히 하늘은 반드시 기필할 수 있다고 해야 할지, 또는 하늘은 반드시 기필할 수 없다고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늘이여! 통한스럽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군자(君子)는 움직이면 세상의 도(道)가 되고 행하면 세상의 법(法)이 되고 말하면 세상의 준칙이 되어 〈후왕(後王)에게〉 친히 여기고 훌륭히 여기게 되고 〈후민(後民)에게〉 즐겁게 여기고 이롭게 여기게 되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게 된 것은, 이야말로 임금이 성대하게 이룬 공훈과 덕화가 자신에 근본하여 서민(庶民)에게 징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 아름답습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학(金炳學)이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666면
-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080]계해년 : 1863 철종 14년.
- [註 081]
전하(殿下) : 고종(高宗).- [註 082]
태모(太母) : 대왕 대비.- [註 083]
익실(翼室) : 정침(正寢) 옆의 좌우에 있는 방(房).- [註 084]
갑자년 : 1864 고종 원년.- [註 085]
욕의(蓐蟻) : 잠자리를 만들고 땅강아지·개미를 쫓음. 죽은 임금을 따라 죽어 황천에서 봉사한다는 뜻. 전국(戰國) 때 초 공왕(楚共王)에게 안릉군(安陵君)이 "대왕께서 승하하신 뒤에 이 몸이 황천에 따라가서 잠자리를 만들고 땅강아지·개미를 쫓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註 086]
천일(天日) : 임금을 가리킴.- [註 087]
신묘년 : 1831 순조 31년.- [註 088]
기유년 : 1849 헌종 15년.- [註 089]
갑오년 : 1834 헌종 즉위년.- [註 090]
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註 091]
신해년 : 1851 철종 2년.- [註 092]
임자년 : 1852 철종 3년.- [註 093]
계축년 : 1853 철종 4년.- [註 094]
을묘년 : 1855 철종 6년.- [註 095]
정사년 : 1857 철종 8년.- [註 096]
무오년 : 1858 철종 9년.- [註 097]
기미년 : 1859 철종 10년.- [註 098]
신유년 : 1861 철종 12년.- [註 099]
임술년 : 1862 철종 13년.- [註 100]
경술년 : 1850 철종 원년.- [註 101]
경조윤(京兆尹) : 한성판윤.- [註 102]
갑인년 : 1854 철종 5년.- [註 103]
정사년 : 1857 철종 8년.- [註 104]
신장(宸章) : 임금의 글.- [註 105]
계축년 : 1853 철종 4년.- [註 106]
무오년 : 1858 철종 9년.- [註 107]
기미년 : 1859 철종 10년.- [註 108]
장부(臧否) : 잘하고 못함.- [註 109]
신해년 : 1851 철종 2년.- [註 110]
임자년 : 1852 철종 3년.- [註 111]
갑인년 : 1854 철종 5년.- [註 112]
병진년 : 1856 철종 7년.- [註 113]
정사년 : 1857 철종 8년.- [註 114]
경신년 : 1860 철종 11년.- [註 115]
신유년 : 1861 철종 12년.- [註 116]
임술년 : 1862 철종 13년.- [註 117]
삼정(三政) :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註 118]
휴척(休戚) : 기쁨과 근심.- [註 119]
비당(備堂) : 비변사의 당상관.- [註 120]
신신(藎臣) : 충신(忠臣).- [註 121]
정량(貞亮) : 충직하고 진실함.- [註 122]
정이(鼎彝) : 공적이 있는 사람의 사적을새긴 종묘의 기구(器具).- [註 123]
기상(旂常) : 해와 달을 그린 기.- [註 124]
대양(對揚) : 임금의 명에 답하여 그뜻을 천하에 나타냄.- [註 125]
좌주(座主) : 시관(試官).- [註 126]
관절(關節) : 세력이 있는 당로자(當路者)에게 붙음.- [註 127]
분경(奔競) : 엽관 운동(獵官運動).- [註 128]
거실(巨室) : 세도가 있는 집안.- [註 129]
계해년 : 1863 철종 14년.- [註 130]
갑진년 : 1844 헌종 10년.- [註 131]
조절(操切) : 법령을 엄하게 지킴.- [註 132]
승선(承宣) : 승지(承旨).- [註 133]
양음(亮陰) : 임금이 거상(居喪)함.- [註 134]
정사년 : 1857 철종 8년.- [註 135]
○誌文:
嗚呼! 惟我熙倫正極粹德純聖大王, 在宥十四年, 典章修明, 大猷時升, 風雨順序, 百嘉鬯遂, 方迓景命, 鞏靈圖躋一世於長治久安之域。 乃以癸亥十二月七日有疾弗豫, 若翌日庚辰, 禮陟于昌德宮之大造殿, 春秋三十三。 我殿下以太母命, 嗣服恤宅, 宗于翼室。 與小大臣工, 考功象行, 謹上尊諡曰, 文顯武成獻仁英孝廟號曰哲宗。 將以越明年甲子四月七日丁丑, 大葬于睿陵, 實禧陵右岡也。 殿下以臣炳學, 侍軒墀日久, 覿德最詳, 命之以幽宮之志, 辭謝不獲。 命臣竊自惟念, 是役終事也, 冥然忍不蓐蟻, 托諸觚墨之技, 而欲摹畫天日, 其敢諛辭溢美於揚厲布濩之際, 俾來許, 靡所徵哉? 寧約毋濫, 惟實匪華, 闡明平日謙光之至德, 卽所以圖酬隆渥之萬一也。 謹泣血拜手稽首以書曰。 王姓李氏, 諱昪字道升, 純祖大王之子, 正宗大王之孫也。 正宗大王之弟恩彦君, 恩彦君之子全溪大院君, 王以全溪大院君第三子, 入承大統。 母妃純元王后 金氏, 贈領議政永安府院君 忠文公 祖淳女也。 本生母廉氏, 龍城府大夫人贈領議政成化女也。 以純祖辛卯六月十七日丁酉, 誕降于慶幸坊私第。 是時, 純元王后夢, 永安國舅, 奉獻一小兒曰, ‘善養此兒’, 后覺而異之, 記其事, 藏于篋笥。 及王御極, 龍顔日表, 宛若夢中所見。 己酉六月壬申, 憲宗大王昇遐, 無嗣, 純元王后以爲, ‘英宗血脈, 惟憲宗與王’, 遂定大策, 奉迎于江華潛邸, 初卦德完君, 是月九日, 行冠禮, 受大寶于殯殿, 卽位于仁政門, 尊中宮殿爲大妃。 大王大妃王大妃, 己於甲午受尊稱大王大妃。 用國朝舊典, 垂簾同聽政, 凡大小機務, 王皆稟決焉。 大王大妃, 敎于王曰, ‘當此罔極之中, 今幸五百年宗社, 付托有人。 主上卽英宗血孫也。 往事多艱難, 久居鄕外, 古昔帝王, 有生長民間, 疾苦無不知之, 政令之際, 每以愛民爲主, 遂爲明主。 今主上, 亦應習知民間之事, 愛民之道, 莫如節儉。 雖一粒飯一尺布, 皆出於民, 若不節儉, 其害必歸於民。 民不聊生, 國不爲國, 必須一念慥慥, 不忘愛民二字。 雖不知旣往工夫之如何, 而人不讀書, 則昧於古事, 昧於古事, 則不能治國。 雖悲遑之中, 亦宜常接儒臣, 討論經史。 聖賢心法, 帝王治謨, 漸次學習, 然後可以處事得當。 上以念宗社之重, 下以顧民生之困, 克敬克愼, 克勤克儉, 以副萬姓蘄顒之意。 人君雖曰極尊, 元無輕視朝臣之法, 大臣尤爲體國之相, 所當禮待。 雖於奏事之間, 必無不是之言, 孜孜聽從而銘肺焉。’ 十四日成服, 上大行大王謚曰, 經文緯武明仁哲孝, 廟號曰憲宗。 十月二十八日壬辰, 葬憲宗大王于景陵, 孝顯王后同原也。 王, 事親奉先, 誠敬備至, 殿宮之間, 祥和融洩, 宗廟之中, 儀容齊遬。 遇先王先后誕降之甲, 登遐之期, 御極之年, 舟梁之歲, 或親詣先陵而展誠, 或替遣大臣而攝享。 增拓璿源殿, 奉憲宗睟容, 因廷臣陳疏, 改純宗廟號爲祖, 尊憲宗入世室, 奉純祖睟容於南殿。 禮官進眞宗祧廟獻議, 批曰, ‘親未盡而遽議迭遷, 其於天理人情, 大涉未安。 而帝王家, 以統序爲重, 古今之通誼也。 憲宗大王, 君臨十五載, 纉承正、純、翼嫡嫡相承之大統, 今若奉祔二昭二穆以外之位, 則其於天理人情, 尤當如何也? 然則眞廟之祧遷, 自是不得不然之禮’, 遂祧於永寧殿, 立恩彦君祠, 使益平君 曦, 主其祀, 立全溪大院君祠, 使永平君昱, 主其祀, 以豐溪君入繼于恩全君, 而立其後, 給免稅三百結, 以供祭祀。 慮仁陵、緩陵、徽慶園風水不叶, 親相宅兆而安厝焉。 遷大院君墓, 專价陳奏, 辨恩彦君辛酉誣案, 辛亥加上大王大妃尊號曰正烈, 王大妃尊號曰宣敬, 追上孝顯王后徽號曰敬惠靖順, 上大妃尊號曰明 憲, 壬子, 加上大王大妃尊號曰宣徽。 癸丑, 追上純祖大王尊號曰, 繼天配極隆元敦休, 加上大王大妃尊號曰, 英德, 追上翼宗大王尊號曰, 聖憲英哲睿誠淵敬, 加上王大妃尊號曰正仁, 追上憲宗大王尊號曰, 體健繼極中正光大孝顯王后尊號曰端聖, 加上大妃尊號曰淑敬, 乙卯追上莊獻世子尊號曰賛元憲誠啓祥顯熙, 惠嬪尊號曰裕靖。 丁巳, 大王大妃昇遐, 上徽號曰, 睿成弘定, 諡曰純元, 追上純祖大王尊號曰, 懿行昭倫熙化峻烈, 純元王后尊號曰, 慈獻, 王大妃進號大王大妃, 大妃進號王大妃。 戊午追上純祖大王尊號曰, 大中至正洪勲哲謨, 純元王后尊號曰, 顯倫。 己未, 加上大王大妃尊號曰, 慈惠, 王大妃尊號曰, 睿仁。 辛酉, 追上純祖大王尊號曰, 乾始泰亨昌運弘基, 純元王后尊號曰, 洪化, 壬戌, 追上純祖大王尊號曰, 高明博厚剛健粹精, 純元王后尊號曰, 神運。 命德興大院君祀孫, 錄用東班蔭職, 推於敦倫之德, 施以優老之典。 庚戌, 純廟誕辰周甲, 命京兆抄啓六十一歲人文蔭武加資, 士庶賜以食物米布。 甲寅五月, 純元王后誕辰, 依英廟朝耆老庭試例, 設耆老科。 丁巳, 以純元王后將躋七旬, 命抄啓士庶六十九歲人, 頒賜米綿。 大臣耆舊慶壽之晏, 或賜衣資食物, 或賜內醞法樂, 或宣宸章, 或授几杖, 用以惠養國老, 賁飭昭代, 壽域之化。 王, 嚴恭寅畏, 對越上天, 彗孛之示祲, 齊心測候, 轟燁之告警, 拱手修省。 癸丑亢旱, 命避正殿減膳撤樂, 敎曰, ‘顧予否德, 叨承丕基, 蚤夜憂懼, 莫敢邊寧。 今此亢旱之災, 奚爲而然也? 圭璧屢擧, 靈應尙邈, 言念民情, 曷以爲心? 災不虛生, 必有所以。 民生困瘁, 不能救濟, 法令壅遏, 不能振刷, 財穀罄竭, 不能節約, 貪墨橫行, 不能懲治, 一則寡昧之罪也, 二則寡昧之罪也。’ 戊午十月七日雷, 越四日, 又雷, 連下求言之敎, 減膳三日。 己未冬雷, 責己求言, 視昨年政令之間, 一以愛民保民爲心, 大書安民二字, 扁之殿壁。 凡方伯守令之辭陛也, 必加面飭, 分遣御史, 紏察臧否, 採訪幽隱。 遺棄流丐, 贍以恒料, 燒爛渰漂優有恤典。 辛亥, 關西海西被水災。 壬子, 關北被水災。 甲寅, 湖南被水災。 丙辰, 畿邑被火災, 嶺南海西被水災。 丁巳, 湖西被水災, 庚申辛酉, 關北連被水災, 竝遣道內秩高守令, 或遣近侍, 慰諭災民, 俾各安堵。 壬戌, 三南關北, 有民擾, 遣按覈使宣撫使, 究核而拊循之。 辛亥, 海西饑, 許劃本道穀一萬石, 京司上納錢一萬兩。 壬子, 關西饑, 命許貸宣惠廳錢五萬兩, 司譯院蔘包稅六萬兩。 壬戌, 以三政釐正, 內下錢五萬兩, 助蠲蕩給代之需, 以爲 ‘民生休戚, 係於長吏, 剌牧廉黷, 由於初仕’, 命備堂及曾經吏兵判, 各薦守令已著績者二人, 又命九卿及有司堂上, 各薦在京才行二人, 以爲需用之資, 又敎曰, ‘誠心旁求, 豈無人才乎? 另飭各道方伯, 隨聞抄薦, 使有志之士, 無虛老之歎。 自銓曹, 從先奬用。’ 王, 崇奬儒術, 蒐羅遺逸, 招旌之禮, 殆無虛歲, 側席之念, 發於誠心。 尤眷眷於象賢褒忠之典, 國朝名儒, 藎臣貞亮節義之人, 或貤贈爵諡, 或錄用祀孫, 或賜祭于家于墓, 又或不祧其主。 以講學衛道, 嘉惠士林, 取義成仁, 服勤王室, 其樹立之卓然者, 無異於鼎彝旂常之紀勳伐也。 以場屋紛競, 科試不公, 董飭有司, 使之精白對揚, 常敎曰, ‘古之座主, 擢置人才, 爲國家需用也, 今也不然, 只聞關節而已, 只知奔競而已。 且巨室子弟, 不讀一字書, 父兄憐其頭角而爲之力圖, 是豈收拾人才之道乎? 如是敎飭之後, 萬有一用情之入聞者, 只當以科律從事。’ 王, 明罰飭法, 欽恤哀敬, 以好生之念, 寓寧失之義, 錄囚恒存簡孚, 疏決或至全釋。 然至於紏王慝振邦憲, 關和不少撓, 此皆王事天治人立政圖理之盛節也。 癸亥春, 有中國人鄭元慶所著《廾一史約編》, 自燕東來, 書我國宗系及開國時事, 極其誣衊王, 大震驚, 馳价陳辨, 竟獲昭雪。 群臣援宣廟故事, 上尊號曰, 熙倫正極粹德純聖, 中宮殿尊號曰, 明純。 又引英廟受號時上號仁元王后故事, 遂議上大王大妃尊號曰, 弘德, 王大妃尊號曰, 正穆。 冊寶旣成, 未及上而遽遭崩坼之變, 嗚呼! 慟哉。 王妃ㆍ金氏贈領議政永恩府院君ㆍ忠純公ㆍ汶根之女, 誕元子, 未晬而卒, 一女幼, 宮人ㆍ范氏出。 王, 遭家多難, 舊勞于外。 甲辰, 自喬桐徙江華也, 到大洋, 風水相盪, 舟甚傾危, 王, 晏然無懾, 慰撫家人。 已而風定浪息, 舟人相賀曰, ‘此固險津, 且遇惡風, 理必無倖, 而竟獲利涉, 意舟中有天佑之人。’ 王之在江華, 有一守臣, 操切甚苛, 家人病之, 及御極, 守臣以承宣入侍。 筵退, 王謂左右曰, ‘觀其侍講奏對, 決非故欲困我者, 嚮日之事, 國法然矣。’ 遂待之與諸臣無異。 潛邸南山, 常有光氣燭天, 至奉迎前日始消, 居人始知爲龍興之兆。 奉迎到楊花津路傍, 群羊分隊而跪, 觀者咸異之。 王宅憂亮陰, 喪禮必誠必信, 命以殿庭果子, 薦之殯殿曰, ‘是固先王所嘗玩者’, 凡苑果新熟, 亦必薦之。 殯殿宮人, 嘗失所御銀器, 王慮累及衆人, 命別造而代之。 停藥房例供酪粥曰, ‘牛不字畜不蕃’, 至於禽鳥蟲豸之微, 戒勿令傷害。 內廚常膳, 有珍羞異味, 輒却而不御, 又嘗不喜肉味曰, ‘予若多食肉, 則至於士庶, 競相效之, 六畜必多傷損。’ 法章之外, 不御錦緞, 常服之衣, 無過紬綿。 宮室之可以修葺者, 一榱一楹, 無侈前規, 是又王懋昭儉德, 率躬而導俗者也。 侍純元聖母, 居處必同殿, 飮食必同廚, 經筵視事之外, 未嘗造次或離。 至有不安節, 扶持抑搔, 先意承志, 蚤夜洞屬, 衣帶不解, 九年如一日。 丁巳, 聖母昇遐, 五月居廬, 饋奠必親, 哀戚之容, 哭擗之數, 出於至誠, 動合禮經。 及因封時, 王欲隨引群臣, 以毁疾請庭籲, 乃止, 猶觸冒風寒, 以臨復土之禮。 嘗進饍, 輒曰, ‘侍食聖母, 聖母進飯, 予亦進飯, 今何忍獨食?’ 左右皆掩抑不忍仰視。 春秋拜陵, 以展霜露之感, 或歲三四爲率, 寢園灤遷, 必躬臨相基, 恔於聖心然後, 乃筮兆焉。 頻開經幄, 孜孜講學, 因大臣所奏, 遵皇明日講之例, 資益弘大。 嘗曰。 ‘工夫實在於予之立志’, 遂以自警十條, 書諸屛諭筵臣曰, ‘非書之爲難。 行之惟難? 嗚呼! 王以聰明睿知之聖, 承重熙累洽之運。 耕稼陶漁, 大舜所以玄德升聞也, 爰曁小人, 殷宗所以保惠庶民也。 踐先王之位, 行先王之禮, 修身愼行, 繼人志而述人事。 《詩》曰 ‘孝子不匱, 永錫爾類, 王實有焉。 齊莊肅雝, 昭事神明, 內盡於已而外順於道, 致其精明之德。 《禮》曰 ‘賢者, 祭必受其福’, 王實有焉。 探賾經典, 浸灌道義, 御家範世, 罔不推之於躬行心得之餘書曰: "念終始典于學厥德脩罔覺王實有焉。 屛玩好而絶營作, 懋大本而制恒産, 蓋由深念乎地力之生, 物有大數, 人力之成, 物有大限。 《易》曰 ‘節以制度, 不傷財不害民’, 王實有焉。 刑憲者, 民命之所繫, 亦國命之所繫, 導迎善氣, 祈天永命, 惟在於是, 庶獄庶愼, 有倫有要。 《周禮》曰 ‘刑平國用中典’, 王實有焉。 深仁厚澤, 普被八域, 宏綱大目, 永垂萬世, 是皆本之大易所謂 ‘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 宜其永享難老之錫, 用成久道之化, 而竟嗇期頣胡考之年者, 其理何在傳曰 ‘大德必得其位, 必得其祿, 必得其壽, 必得其名, 以吾王之德有驗有不驗, 臣不敢知謂天可必乎, 抑謂天不可必乎? 天乎! 痛哉。 雖然, 君子動而世爲道, 行而世爲法, 言而世爲則, 使親賢樂利沒世而不能忘者, 寔王之成功盛化, 本乎身而徵諸庶民。 嗚呼! 懿哉。 【判中樞府事金炳學製。】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666면
-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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