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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실록 1권, 헌종 대왕 행장(行狀)

헌종 대왕 행장(行狀)

행장(行狀)은 이르기를,

"왕의 성(姓)은 이(李)이고 휘(諱)는 환(烉)이요 자(字)는 문응(文應)이니 익종 효명 대왕(翼宗孝明大王)의 적사(嫡嗣)이고 순종 성효 대왕(純宗成孝大王)의 손자이시다. 어머니 효유 왕대비(孝裕王大妃) 풍양 조씨(豊壤趙氏)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풍은 부원군(豊恩府院君) 충경공(忠敬公) 조만영(趙萬永)의 따님인데, 정해년095) 7월 18일(신유)에 창경궁(昌慶宮)경춘전(景春殿)에서 왕을 낳으셨다. 이에 앞서 익종께서 옥을 아로새긴 나무를 담은 갑(匣)을 주시는 꿈을 꾸고 나서 잉태하셨고, 탄생하신 날에는 한 무리의 학(鶴)이 전상(殿上)에서 날아 오래 돌다가 갔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왕은 용청(龍睛)에 서각(犀角)이고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일어서셨다. 수세(數歲) 때에 주흥사(周興嗣)《천자문(千字文)》 중에서 1백여 자를 통하셨는데, 익종께서 눈에 익혀진 것이리라고 생각하여 다른 글에서 시험하시면 문득 그 전부터 알던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아무자입니다. 하시니, 익종께서 매우 기특히 여겨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앞으로 나보다 낫겠다.’ 하셨다. 일찍이 쓰시는 병풍에 그린 인물을 사람들에 경계하여 누르지 말게 하며 ‘그림 가운데의 아이가 아프겠다.’고 하셨으니 그 특달(特達)한 총명과 인애(仁愛)가 천성에서 나타난 것이 이미 이러하셨다. 익종께서 4년 동안 국정(國政)을 대리 청정(代理聽政)하시다가 경인년096) 5월 6일에 빈천(賓天)하셨다. 왕이 이때 4세인데, 사람들이 슬프고 황급한 빛이 있는 것을 보고 아모(阿母)의 품에서 울며 ‘나도 좋은 옷을 입고 싶지 않다.’ 하셨고, 빈전(賓殿)에서 호읍(號泣)하는 소리를 들으면 유희(遊嬉)를 빨리 그치고 자리를 당겨 부복하여 ‘나도 참반(參班)한다.’ 하셨으니, 슬픈 용모는 남을 감동시키는 것이 있었다. 이 해 9월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셨는데, 중희당(重熙堂)에서 수책(受冊)할 때에 질서 있는 예도(禮度)가 마치 성인(成人) 같으시므로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이 모두 기뻐하여 서로 경하하였다. 정사(正使)·부사(副使)가 의논하여 후사배(後四拜)를 그만두려 한 것은 대개 의절(義節)에 피로하실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인데, 왕이 따르지 않고 예가 끝난 뒤에야 대내(大內)로 돌아가셨다. 순종명경비(明敬妃)께서 매우 아름답게 여겨 과합(果盒)을 내리셨는데, 왕이 과합을 받고 문득 눈물을 흘리시니, 양전(兩殿)께서 슬피 상심하시고 좌우가 모두 서로 보며 슬퍼하였다. 임진년097) 9월에 빈객(賓客)과 상견례(相見禮)를 행하고 이어서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었는데, 업차(業次)에 법식이 있고 시각을 어기지 않으며 글 뜻을 들으면 이미 분명하고 몇 번 읽으면 문득 외우셨다. 빈객이 서도(書徒)를 바칠 때에 혹 통(通)이라 쓰면 ‘내가 잘못 읽은 자가 있는데 통은 무엇 때문인가?’ 하셨으니, 그 영예(英睿)하고 숙성하신 것이 또한 이러하였다.

갑오년098) 11월 13일에 순종께서 서내(西內)099)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셨다. 성복(成服)하고서 왕이 관례(冠禮)을 치르고 면복(冕服)을 갖춘 다음 빈전(賓殿)에서 대보(大寶)를 받아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고 도로 상복을 입으시니, 대신(大臣)이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대통을 이어 즉위하셨으니, 선세자(先世子)를 추숭(追崇)하는 것이 전례(典禮)입니다.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였다. 그래서 대행(大行)의 시호(諡號)를 문안 무정 헌경 성효(文安武靖憲敬成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순종이라 하였으며 황고(皇考)를 추존(追尊)하며 익종 대왕이라 하고 시호를 돈문 현무 인의 효명(敦文顯武仁懿孝明)이라 하였으며 묘호(廟號)를 수릉(綬陵)이라 하고 명경 왕비(明敬王妃) 김씨(金氏)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라 하고 모빈(母嬪)을 높여 왕대비(王大妃)라 하였다. 대왕 대비께서 수렴(垂簾)하고 청정(聽政)을 같이 하셨는데, 무릇 서무(庶務)를 재결하는 것이 모두 대왕대비의 뜻[慈旨]에서 나왔고 스스로 결단하시는 것이 있어도 여쭌 뒤에 시행하셨다. 을미년100) 봄에 순종을 높여 세실(世室)로 하고 4월 19일에 인릉(仁陵)에 장사하였다. 왕은 어린 나이에 우거(憂居)의 종주(宗主)가 되셨는데, 궤전(饋奠)은 반드시 친히 행하고 곡(哭)하면 상성(常聲)이 없어져 유모(孺慕)하여 견디지 못하시니, 온 나라 안이 그 효성에 감복하였다. 조사(詔使)가 와서 왕이 접견할 때에 의용(儀容)이 있는 것을 보고는 감탄하고 경하하였다. 대왕 대비께서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주상(主上)께서 어린 나이에 문득 영칙(迎勅)을 당하여 대례(大禮)를 어떻게 지낼는지 몰랐는데, 접견할 때에 동용(動容)·주선(周旋)이 모두 예에 맞았다는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기뻐서 형용하여 말할 수 없다.’ 하셨다. 왕은 타고나신 뛰어난 자질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어려서부터 낮에 누우신 적이 없고 밤에도 책을 놓지 않으시며 권강(勸講)·진강(進講)은 한결같이 구규(舊規)를 따라 행하시고 법연(法筵)을 조금도 늦추거나 그만 두시지 않았다. 맨 먼저 산림(山林)의 선비를 거용(擧用)하되 경연(經筵)의 벼슬을 제수하여 그 정초(旌招)를 갖추시고, 대신(大臣)·제신(諸臣) 중에서 성학(聖學)을 진명(陳勉)한 자에게는 반드시 온화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흉금을 비워 들으셨다. 유사(儒士)를 친림(親臨)하여 과시(課試)하는 일과 낭관(郞官)의 일차 윤대(日次輪對)는 정성스러워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세상이 다 도(道)가 있을 것을 기대하였다.

정유년101) 정월 6일에 순종·익종을 태묘(太廟)에 승부(陞祔)하고, 닷새 지난 10일에 국조(國朝)의 상전(常典)에 따라 대왕 대비께 문인(文仁)이라는 존호(尊號)를 더 올리고 왕대비께 효유(孝裕)라는 존호를 올리고서 백관(百官)의 진하(陳賀)를 받으셨다. 3월 20일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증(贈) 영의정(領議政)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따님이시니, 곧 효현 왕후(孝顯王后)이시다. 이듬해 무술년102) 에 대왕 대비의 보령(寶齡)이 오순(五旬)에 오르시므로 왕이 옥책(玉冊)을 바쳐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잔을 올려 헌수(獻壽)하려 하셨으나 자의(慈意)가 겸손을 고집하여 따르지 않으셨다.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이 번갈아 앞에 나아가 청하여도 허락받지 못하니, 왕이 이르기를,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는 양지(養志)보다 앞세울 것이 없다.’ 하여 정월 초하룻날에 인정전(仁政殿)에서 하례하고 행상(行賞)하며 반사(頒赦)하고 각공(各貢)의 유재(遺在)와 제도(諸道)의 구환(舊還)을 탕감하여 경사를 넓히셨다. 그 뒤 경자년103) 에 모림(母臨)하신 지 40년이 되므로 경하하고 고포(告布)한 것도 이와 같았으니, 무릇 경사가 있으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다 이에 의준(依遵)하였다. 여름에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올리고 말하기를, ‘오늘 부자(夫子)의 묘궁(廟宮)에 뵌 것은 선조(先祖) 계해년104) 에 이미 행하신 것이니, 예우(禮遇)하여 내리는 것을 나도 계해년의 예를 따라 행하겠다.’ 하고, 이어서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선비를 시취(試取)하셨다. 이것은 처음 시학(視學) 때에 선왕의 성덕(聖德)을 우러러 계술(繼述)하신 것이다. 기해년105) 봄에 수릉(綏陵)에 거둥하여 친제(親祭)하고 말하기를, ‘나 소자(小子)가 역복(歷服)을 이은 지 이제 5년이 되었는데 비로소 선침(仙寢)에 뵈었으니 어찌 감히 사모하는 마음을 대강 폈다 하겠는가? 또한 뜻을 붙이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고 능관(陵官)·제관(祭官)에게 모두 차등을 두어 승서(陞敍)하였다. 북원(北苑)에 나아가 망배(望拜)하고 참반응제(參班應製)를 행하셨다.

삼황(三皇)106) 의 기신(忌辰)을 당할 때마다 단원(壇苑)의 예(禮)와 사모하는 마음을 끝내 변하지 않으셨다. 천장(天將) 마귀(麻貴)의 후손 마하백(麻夏帛)이 무과(武科)에 급제하니, 하교하기를, ‘마제독(麻提督)의 후손에 비로소 과명(科名)이 있으니 국가에서 생각하는 것이 어찌 이제독(李提督)의 집과 차이가 있겠는가?’ 하고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을 제수하여 총애하셨다.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이라는 자가 사교(邪敎)에 빠져 그 추류(醜類)와 함께 속이고 현혹하는 짓을 방자히 하며 감히 서양 사람을 데려와서 교주(敎主)라 칭하고 비밀히 체결(締結)하여 간사하고 교활한 짓이 갈수록 심해지므로, 왕이 곧 명하여 잡아서 국문(鞫問)하여 모두 법으로 처치하고 중외(中外)에 윤음(綸音)을 선포하셨다. 그 뒤에 김대건(金大建)이라는 자가 도망하여 서양에 들어가 10년 동안 그 술법을 전습(傳習)하고 본국으로 돌아왔으므로 또 엄히 사핵(査覈)하여 효수(梟首)하니, 간사한 무리가 숨을 죽이고 백성의 뜻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여름에 서울에 큰 비가 내려 떠내려가고 무너진 오부(五部)의 민가가 1천여 호이었는데, 사교(四郊)에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순시하게 하고 급히 진청(賑廳)을 시켜 특별히 넉넉하게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시행하게 하셨다. 경자년107) 가뭄에는 왕이 문득 깊은 밤에 곤의(袞衣)를 입고 후원(後苑)에서 향을 사르고 친히 기도하셨으니 그 민사(民事)를 근심하시는 것이 어린 나이 때부터 그러하셨다. 12월 25일에 대왕 대비께서 철렴(撤簾)을 명하고 하교하기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어진이를 가까이하여 선왕의 가법(家法)을 지키는 것을 주상(主上)은 힘쓰시오.’ 하셨으니, 아! 거룩하다. 이것은 요(堯) 순(舜)이 진수(傳授)한 정일(精一)한 심법(心法)이다.

왕이 서정(庶政)을 친히 보살피시어 신축년108) 정월 10일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하였을 때에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충숙공(忠肅公) 이만성(李晩成)·충간공(忠簡公) 조성복(趙聖復)·충헌공(忠獻公) 이정소(李廷熽)의 사손(祀孫)을 녹용(錄用)하였으며, 윤지술(尹志述)에게 정경(下卿)을 가증(加贈)하고 시호(諡號)를 주라고 명하셨으니, 대개 이 해에 흥감(興感)이 있으시기 때문이었다. 대신(大臣)·경재(卿宰)에게 명하여 각각 청백리(淸白吏)를 천거하게 하고 궁방(宮房)·제사(諸司)의 차인(差人)이 외읍(外邑)에서 수세(收稅)하고 환포(還逋)를 인족(隣族)에게 침징(侵徵)하는 폐단을 일체 엄한 법으로 금단하게 하셨다. 좨주(祭酒) 송계간(宋啓榦)과 경연관(經筵官) 김인근(金仁根)·성근묵(成近默)·송내희(宋來熙)에게 별유(別諭)하여 올라오도록 도타이 신칙(申飭)하셨다. 2월 13일에 대왕 대비께 광성(光聖)이라는 존호를 더 올려 7년 동안 수렴(垂簾)하신 덕을 현양(顯殿)하셨다. 빈계(賓啓)109) ·정청(庭請)한 것도 여러 번이었으나 자전(慈殿)께서 뜻을 돌리신 것은 오직 왕의 효성이 감동시킨 것이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책보(冊寶)를 올리고 친총 만기(親總萬幾)·양륭 장락(養隆長樂)의 합경(合慶)으로 진하(陳賀)를 받으셨다. 무릇 진헌(進獻)하는 물건이 백성의 고통에 관계되는 것은 크게 은휼(隱恤)110) 하고 말하기를 ‘포민(浦民)의 해채(海採)를 위한 어려움은 실로 인명(人命)에 관계되고 여름철에 얼음에 채워 나르는 것은 더둑이 깊은 폐단이니, 이제부터는 6,7월에 날전복·익힌 전복을 약원(藥院)에 봉진(封進)하는 것은 모두 영구히 멈추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나라를 검약(儉約)으로 다스리는 것은 자신이 먼저 해야 하니, 영남(嶺南)의 공삼(貢蔘)과 관서(關西)·관북(關北)의 녹용(鹿茸)과 내국(內局)·상방(尙方)에서 해마다 연경(燕京)에서 사오는 것을 줄이라.’ 하셨다. 왕실(王室)에 충성을 다한 것이 훈공(勳功)과 다를 것이 없다 하여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에게 부조(不祧)를 특별히 베풀고, 왜적을 막은 것으로는 행주(幸州)에서 이긴 것이 가장 크다 하여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사당을 그 곳에 세우라고 명하고 편액(扁額)을 내리셨다. 올해는 영묘(英廟)께서 저위(儲位)에 오르신 지 재회갑(再回甲)되는 해라 하여 특별히 명하여 사충사(四忠祠)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에게 사제(賜祭)하셨으니, 정묘(正廟)의 성전(盛典)을 공경히 따르신 것이다. 임인년111)인릉(仁陵)에 거둥하셨을 때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묘소에 관원을 보내어 잔드리게 하셨으니 묘소가 거둥하는 길의 연변에 있었던 때문이다. 각읍(各邑)의 유무(儒武)를 시취(試取)하고, 양주(楊州)·고양(高陽)·파주(坡州)·교하(交河)의 백성이 폐해를 받은 것을 특별히 염려하여 그 해의 성향(城餉)을 모두 감면하셨다. 제도(諸道)에 수이(繡衣)를 나누어 보내어 안찰(按察)하게 하여 우수한 성적이 있는 자에게는 글과 표리(銓曹)를 내렸다. 금오(金吾)에서 의처(議處)하여 편배(編配)가 잇달고 있는데 전조(銓曹)에서 포상(褒賞)하는 것은 전례를 따르는 것일 뿐이니, 선행을 표창하고 악행을 징계하는 방도가 아니라 하여 혹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가장(嘉奬)하셨다.

이해에 또 가물었는데, 신(神)에 대한 기우제(祈雨祭)를 여러 번 거행하고 번번이 연석(筵席)에 나아가면 대신에게 농사를 물어 근심하는 말씀이 마치 목마를 때에 마시고 싶어하는 것과 같으셨다. 비를 얻게 되어서는 종묘(宗廟)에 보사(報謝)하는 일을 추성(秋成)을 기다리지 않고 곧 행하게 하고 말하기를 ‘어찌 기쁨을 고하는 일을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셨다. 제로(諸路)의 우택(雨澤)은 파발마로 치문(馳聞)하게 하셨으니, 그 일념으로 백성을 근심하시어 영응(靈應)하는 것이 빨랐다. 일찍이 말하기를 ‘유생(儒生)의 전강(殿講)은 수용(收用)을 배양하는 뜻인데 한 경서(經書)에 통할 뿐이다. 이제 만약 전경 문신(專經文臣)112) 이 윤강(輪講)하는 예를 본떠 올해에 일차강(日次講)에 응한 자는 내년에 다른 경서를 윤강하게 하고 후년에 또 이 예에 따르게 한다면, 3년이 지나지 않아서 삼경(三經)을 다 통할 것이다. 권과(勸課)하는 방도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시행하라.’ 하셨다. 그래서 인재를 만드는 가름침이 더욱 넓어졌다. 계묘년113) 봄에 건릉(健陵)에 거둥하셨다가 거가(車駕)가 노강(鷺江)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 머물렀을 때에 경연관(經筵官) 홍직필(洪直弼)의 집이 이 정자 아래에 있으므로 분부를 내려 나오게 하여 만나 보고 기뻐하여 학문의 절요(切要)를 설명하게 하여 도(道)를 듣기를 바라는 것이 부지런하고 은우(恩遇)가 정중하셨으니 이것은 유사(儒士)를 영접하는 처음있는 성대한 일이었다. 궐리사(闕里袧)114) 에 정경(正卿)을 보내어 잔드리게 하고 지나는 사원(袧院)에도 다 사제(賜祭)하셨다. 삼가 정묘(正廟)계축년115)영묘(英廟)의 시종(侍從)에게 추은(推恩)하신 옛일을 상고하여 무릇 정묘를 생시에 섬긴 법종(法從)을 초계(抄啓)하여 올리게 하여 모두 한 자급(資級)을 올리셨다. 여름에 비궁(悶宮)116) 의 향사(享祀)를 행하고 말하기를 ‘올해는 갑자년117) 에 가례(嘉禮)를 치르신 뒤로 만 1백년이 되는 해인데 이미 원침(園寢)에 배알(拜謁)하고 나서 처음 비궁의 향사를 행하였으니, 소자(小子) 이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하고 익정공(翼靖公) 홍봉한(洪鳳漢)에게 부조(不祧)의 전례(典禮)를 시행하라고 명하였으니, 정묘의 정사(情事)를 우러러 몸받아 계술(繼述)하는 성효(聖孝)를 붙이신 것이다.

8월 25일에 효현 왕후(孝顯王后)께서 흥서(薨逝)하셨는데, 능상(陵上)의 석의(石儀)는 모두 《보편(補編)》의 구제(舊制)를 따라 제도(諸道)의 복정(卜定)을 생약(省約)하도록 힘쓰라고 명하셨다. 양호(兩湖)와 해서(海西)에 전에는 경영(京額)의 군보(軍保)로서 거두는 쌀이 있었는데 지나치게 절도가 없어 보액(保額)의 절박한 고통이 되어온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조정에 순문(詢問)하여 보미(保米)는 결전(結錢)에서 획급(畫給)하여 쌀로 바꾸어 쓰게 하고 군보는 신전(身錢)으로 바꾸어 거두어 결전에 채우게 하여 크게 변통하는 정사를 행하시니, 이때부터 군민(軍民)이 편안하게 여겼다. 10월에 왕이 20여 일 동안 두후(痘候)를 앓다가 회복되시어 원직(院直)을 철수하였으므로 대정(大庭)에서 천세를 부르고 의조(儀曹)118) 에서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할 것을 아뢰어 증광(增廣)을 청하였으니 방례(邦例)이기 때문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 번에 두 자성(慈聖)께 근심을 끼친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무슨 일컬을 만한 경사가 있겠는가? 증광은 너무 확대한 데에 관계되니 정시(庭試)로 날을 가려 들이라.’ 하셨다가 그 뒤에 정승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비로소 윤허하셨다. 갑진년119) 10월 21일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익풍 부원군(益豐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따님을 비(妃)로 책봉하셨으니, 지금의 대비전(大妃殿)이시다. 을사년120) 정월에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하교하기를, ‘조참하는 뜻은 오로지 널리 묻는 데에서 나온 것인데 오늘 삼사(三司)에서 아뢴 것은 관례를 갖춘 형식에 지나지 않고 관사(官事)의 규례도 아울러 없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모두 견파(鑓罷)하며, 참배(參陪)한 구경(九卿)의 반열(班列)에서도 건백(建白)한 것이 없으니 월봉(越俸)121)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내가 사복(嗣服)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는데 백성과 나라의 일에 시행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내가 덕이 없기는 하나 어찌 모두들 내가 스스로 힘쓰지 못하였기 때문인 줄 모르겠는가? 아! 너희 방백(方伯)·거류(居留)인 신하는 백성과 나라의 폐해가 되는 꼬투리를 상세히 갖추어 조목조목 벌려 적어서 장문(狀聞)하여 내가 임문(臨門)하여 순방(詢訪)하는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셨는데 그 뒤에 각도에서 아뢴 것에 따라 채택하여 시행한 것이 많았다. 고(故) 도사(都事) 채지홍(蔡之洪)·고 부사(府使) 임성주(任聖周)·고 감역(監役) 박윤원(朴胤源)에게 특별히 도헌 겸 좨주(都憲兼祭酒)를 증직(贈職)하라고 명하셨으니 경술(經術)과 행의(行誼)가 유림(儒林)의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이 이 해에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므로 궤장(几杖)122) 을 내리라고 명하고 근시(近侍)를 보내어 선온(宣醞)123) 하고 연수(宴需)와 1등악(一等樂)을 내려 주게 하셨으니, 자전(慈殿)의 은혜를 몸받아 장수를 보전한 기쁨을 나타내신 것이다. 가을에 관서(關西)에 홍수(洪水)가 져서 청북(淸北)의 여러 고을에서 백성의 전토(田土)와 집이 물에 빠지고 빠져 죽은 자가 많았는데, 왕이 크게 놀라 위유사(慰諭使)를 차출하여 기일을 한정하여 보내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위유사의 행차는 이미 보냈더라도 청북의 열읍(列邑)은 바다가 상전(桑田)으로 변한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어찌 상례(常例) 때문에 얽매이겠는가? 도내(道內)의 상납전(上納錢) 3만 냥을 떼어 두어 무너지고 터진 것을 보수하는 밑천으로 삼으라.’ 하고, 재해를 입은 백성에게 유시(諭示)를 반포하였는데, 수백 자(字)의 말씀이 슬프고 절실하니, 듣는 자가 눈물을 흘렸다. 조세를 줄이고 요역을 가볍게 하여 살아 남은 자를 구제하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옮겨 굶주리는 자를 구휼하였으며, 물가에서 제사하여 여귀(厲鬼)가 되지 않게 하고, 회유하여 어루만지지 못한 수령(守令)을 곧 파직하여, 적당하게 처치하는 것이 세밀하고 두루 갖추어지니, 백성이 여전하게 안도하여 재해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왕이 수릉(綏陵)의 풍수(風水)에 대하여 형가(形家)의 숨은 의논이 많이 있기 때문에 오래 성심(聖心)에 불안하셨다. 병오년124) 봄에 능(陵)에 전알(展謁)하고 나서 상지(相地)하는 자들에게 명하여 어전에서 다 말하게 하셨는데, 모두 말하기를, ‘옮겨 모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니 널리 의논해야 한다.’ 하고 대신(大臣)과 재신(宰臣)들에게 물으셨는데 또한 다들 가하다 하므로, 드디어 양주(楊州)의 용마산(龍馬山) 아래에 땅을 가려 윤5월 20일에 면례(緬禮)125) 를 거행하였다. 왕이 일찍부터 지극한 슬픔을 품었다가 비로소 면례를 거행하게 되었으므로 슬프고 사모하여 어쩔 줄 모르시는 것이 단괄(袒括)126) 때와 같으셨다. 능침을 계폄(啓窆)한 날부터 날마다 미음과 죽을 들고 상선(常膳)을 들지 않으셨으며 장구(葬具)를 갖추고 광중(壙中)을 마련하는 등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살펴 처리하셨다. 그때 바야흐로 한 더위여서 거가(車駕)를 날마다 경계해야 되는데 곡읍(哭泣)하는 안색을 여러 신하들이 차마 우러러 볼 수가 없었다. 예관(禮官)이 장렬 왕후(莊烈王后)께서 계축년127) 에 이미 행하신 전례를 인용하여 대왕 대비의 복색을 천담(淺淡)으로 의논하여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대왕 대비께서 경인년128) 에 장자(長子)를 위한 삼년복(三年服)을 입으셨고 예(禮)로는 삼년복을 입어야 할 자는 개장(改葬) 때에 시마복(緦麻服)을 입는 것이니, 이번에는 계축년과 다르므로 인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고 다시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문의하게 하셨는데, 다들《의례(儀禮)》에 ‘개장 때에는 시마복을 입는다.’ 한 데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 것이니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 것도 같다.’ 한 말을 인용하였으므로, 드디어 시마복으로 고쳤으니, 왕이 일에 임하여 밝고 삼가하는 것은 뭇 신하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었다.

대례(大禮)가 잘 이루어지매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여, 양주의 성향(城餉)의 모곡(耗穀)을 감면하고 여사(轝士)로서 힘쓴 것은 시민(市民)만한 자가 없으므로 그 요역을 늦추고 유재(遺在)를 탕감하셨다. 처음에 순종(純宗)·익종(翼宗)의 어진(御眞)은 경우궁(景祐宮)성일헌(誠一軒)에 모셨는데, 왕이 대신에게 의논하고 선원전(璿源殿)에 땅을 개척하여 그 간살을 넓히라고 명하였다. 8월에 양조(兩朝)의 어진을 선원전에 공손히 모시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셨다.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고 의지하여 어렴풋이 방에 들어와 자리에 계신 것을 보시는 듯하였고 삭망(朔望)과 탄신(誕辰)에는 반드시 새벽에 가서 행사하시되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거나 춥거나 더워도 혹 그만두신 적이 없었다. 현륭원(顯隆園)을 매월 봉심(奉審)할 것을 계청(啓請)한 것은 대개 정묘(正廟)의 지극히 간절하신 효성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여러 능침(陵寢)에는 그런 규례가 없었고 국내(局內)의 건릉(健陵)에도 행하지 않으므로, 왕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장래에 행하기 어려운 일이니 단연 바로잡아야 한다.’ 하고 이제부터 그만두라고 명하셨다. 정미년129) 원일(元日)에 대왕 대비께 표리(表襄)·치사(致詞)·전문(箋文)을 바치셨는데, 자령(慈齡)이 사순(四旬)이 되셨기 때문이다. 겸양하시는 자덕(慈德)을 우러러 받들어 축하하는 의절(儀節)을 모두 무술년130) 과 같이 하셨다. 열조(列朝)의 보감(寶鑑)이 정묘(正廟) 이후는 아직 없어서 갖추지 못하였는데, 2월에 비궁(悶宮)의 재전(齋殿)에서 대신들을 소견(召見)하고 이어서 찬집(纂輯)할 뜻을 효유하여 하교하기를, ‘정묘(正廟)·순묘(純廟)·익묘(翼廟) 삼조(三朝)의 보감을 이어서 찬집하라.’ 하셨다. 이에 국(局)을 열고 일을 닦았는데, 원편(原編)에서 살펴 정하지 못하는 의례(義例)는 다 예재(睿裁)에서 정해졌다. 이듬해 겨울에 일이 끝나니,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 올리고 임인년131) 의 전례와 같이 고포(告布)를 행하셨다.

왕이 장리(長吏)를 가리고 인재를 모으는 것을 정치하는 큰 요체로 여겨 전후에 유교(諭敎)를 간절히 하여 마지않으셨다. 이때에 이르러 또 하교하기를, ‘연전에 유무(儒術)와 수령(守令)을 특별히 천거하게 하여 이따금 수용(收用)하였으나 끝내 실효(實効)가 없으니 인재를 찾아 모은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유술(儒術)을 숭장(崇奬)하는 것은 세교(世敎)의 오륭(汚隆)에 크게 관계되고 백성의 명맥은 오로지 수령의 치부(治否)에 관계되는데 전후에 각별히 신칙(申飭)한 것이 문득 형식(形式)이 되었으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대정(大政)이 한 달을 격했으니 선거(選擧)하는 방도는 상례(常例)를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 임하(林下)에서 글을 읽고 스스로 힘써 행실을 도탑게 하는 선비를 도백(道伯)·거류(居留)인 신하를 시켜 전함(前銜)과 유생(儒生)에 구애되지 말고 널리 찾아서 아뢰게 하고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 중에서 염명(廉明)하고 성적을 나타낸 자도 묘당(廟堂)에서 비국 당상(備局堂上)과 전임·현임인 번신(藩臣)들에게서 천거받아 전에 천거한 것과 아울러 합초(合抄)하여 가려 쓸 바탕으로 삼으라.’ 하고, 이어서 각도의 전최(殿最)를 신칙하셨다. 왕이 이르기를, ‘오늘날 고할 데 없는 백성도 다 우리 조종(祖宗)의 적자(赤子) 인데 가난한 집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탐오(貪汚)한 자를 제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여, 무릇 신칙하는 분부가 있을 때에는 부월(鈇鉞)132) 보다 두렵게 하며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혹 개수(改修)하게 하기도 하고 그 벼슬을 파면하기도 하셨다. 총위영(總衛營)을 창설할 때에 군교(軍校)의 횡포가 있을세라 염려하여 법사(法司)에 명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말고 죄가 있으면 뭇사람에게 조리돌리고 섬에 유배하여 징계하게 하시니, 다시는 감히 범하는 자가 없었다.

동지(冬至)에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禮曹堂上)들을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내년은 우리 대왕 대비전께서 육순(六旬)이 되시고 왕대비전께서 망오(望五)가 되시는 경사스러운 해이니, 나 소자(小子)가 기뻐하고 송축(頌視)하는 정성이 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옥첩(玉牒)에 성덕(聖德)을 살리고 요상(瑤觴)에 보령(寶齡)을 축수하는 것은 또한 우리 집에서 이미 행하여 온 것이니 바로 오늘날 원용(援用)하기에 합당하다. 더구나 우리 순종 대왕과 우리 익종 대왕의 성덕과 대업(大業)은 천지에 견줄 만큼 높고 두터워서 온 동토(東土)의 모든 백성이 백세 뒤에도 잊지 못할 것이 있는데, 아직 발휘(發揮)하고 천양(闡揚)한 일이 없었으니, 나 소자의 그지없이 사모하는 정이 더욱이 어떠하겠는가? 순종 대왕 추상 존호 도감(純宗大王追上尊號都監)과 대왕 대비전 가상 존호 도감(大王大妃殿加上尊號都監)과 익종 대왕 추상 존호 도감과 왕대비전 가상 존호 도감을 합설(合設)하여 거행하라.’ 하시고, 또 하교하기를, ‘존호를 올린 이튿날에 대왕 대비전에 찬선(饌膳)을 바치겠다.’ 하시고, 또 하교하기를 ‘삼가 정월 초하룻날에 두 자전(慈殿)께 표리(表襄)·치사(致詞)·전문(箋文)을 친히 올리겠다. 각도의 방물(方物)은 그만두라.’ 하셨다. 무신년133) 원일(元日)에 두 자전께 하례를 올렸다. 3월 15일에 순종께 체성 응명 흠광 석경(體聖凝命欽光錫慶)이라는 존호를, 익종체원 찬화 석극 정명(體元贊化錫極定命)이라는 존호를 추상(追上)하고 대왕 대비께 융희(隆禧)라는 존호를, 왕대비께 헌성(獻聖)이라는 존호를 가상(加上)하셨다. 17일(신묘)에 통명전(通明殿)에서 찬선을 바쳤다. 이때 왕대비께서는 사가의 복제(服宥)가 있으므로 대왕 대비께만 바쳤다. 왕은 서옥(庶獄)을 삼가하여 나라에 사유(赦宥)가 있을 때에는 녹안(錄案)을 친히 보고 경중을 살펴서 소결(疏決)하시되 반드시 흠휼(欽恤)의 뜻을 앞세우고 탐리(貧吏)만은 사유하지 아니하여 하교하기를, ‘일전의 사유 단자(赦宥單子)는 경사를 만나 널리 씻어 주는 뜻으로 모두 석방하게 할지라도 그 가운데에서 수의(繡衣)가 봉고(封庫)한 사람은 다른 죄와 차이가 있으니, 탐오를 징계하는 정사로서는 요행히 벗어나게 할 수 없다.’ 하고 본률(本律)에 의하여 배소(配所)로 보내게 하셨다.

이해는 영묘(英廟)께서 난(亂)을 평정하신 구갑(舊甲)이니, 표충사(表忠祠)·포충사(褒忠祠)와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 오명항(吳命恒)·고(故) 상신(相臣) 최규서(崔奎瑞)의 집에 모두 사제(賜祭)하고 그 사손(祀孫)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셨다. 반궁(泮宮)에 수선(修繕)하는 일이 있었는데 하교하기를, ‘반궁을 수선하는 비용은 묘당(廟堂)에서 조치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많은 선비가 학업을 닦는 곳이므로 특별히 우대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으니, 내탕(內帑)의 돈 3천 냥(兩)을 특별히 내려서 일을 돕게 하라.’ 하였다. 상신(相臣)이 각궁(各宮)의 어염선세(魚鹽船稅)와 둑을 쌓고 환곡(還穀)을 방납(防納)하여 폐단이 되는 것을 금할 것을 말하니, 왕이 ‘이 일은 늘 한 번 하교하려 하였다. 정종(正宗) 때에 일찍이 이 때문에 신칙하신 하교가 매우 엄하시어 만약 주사(籌司)134) 에서 알린 것이 아닌데도 혹 외읍(外邑)에 내사(內司)와 여러 궁방(宮房)들의 도장 찍고 서명한 문서가 있으면 그 도신(道臣)이 곧 장문(狀聞)하라는 뜻으로 법금(法禁)을 만들었으니, 오늘날에 더욱이 성헌(成憲)을 준수해야 한다.’ 하시고 곧 각도와 내사. 여러 궁방들에 엄히 신칙하라고 명하셨다. 기유년135) 원일(元日)에 대왕 대비의 보령(寶齡)이 회갑이 되셨기 때문에 지난해처럼 전문(箋文)을 바쳐 축하를 올리고, 특별히 은혜를 노인에게 미치게 하는 뜻으로 문신(文臣)으로서 시종(侍從)인 자와 무신(武臣)으로서 곤수(閫帥)인 자와 음관(蔭官)으로서 준직(準職)인 자로 모두 3품(三品) 이상이고 나이가 61세인 사람에게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여 주셨다. 왕이 과거(科擧)의 폐단이 점점 커져서 바로잡기 어려운 것을 늘 걱정하여 과거가 있을 때마다 신칙하셨다. 봄에 장차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의 복시(覆試)가 있을 것이므로 또 칙유(飭諭)를 내려 말하기를 ‘조금이라도 사의(私意)에 관계되었다는 말이 들리는 자가 있으면 과장(科場)에서 농간한 것으로 다스리는 외에 왕언(王言)을 불신(不信)한 죄를 더 주겠다. 사자(士子)로 말하더라도 다들 공경(公卿)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는 사람인데 발신(發身)하는 처음에 이미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면 뒷날 임금을 섬길 때에 어떻게 그 손을 빌겠는가? 나타나는 대로 단연코 갑절 더한 율(律)로서 그 가장(家長)을 죄주어야 한다.’ 하시니, 유사(有司)가 두려워하여 감히 불공(不公)한 짓을 하지 못하였다.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과시(科試)를 한 번 겪을 때마다 인심(人心)의 불평을 가져왔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겠지?’ 하셨다.

왕이 봄부터 병환이 들어 점점 시일이 갈수록 피곤함을 보이셨으나 오히려 만기(萬機)를 수작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태묘(太廟)에 전성(展機)하는 일과 기예(技藝)를 시험하고 선비를 시험하는 일같은 데에 이르러서도 편찮다 하여 행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대개 절제하여 고요히 조섭하시는 방도를 또한 잃은 바가 많았다. 5월에 대왕 대비의 탄신의 하의(賀儀)를 여러 신하들이 힘껏 간청함에 따라 대내(大內)에서 행례(行禮)하시고, 관물헌(觀物軒)에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들을 소견(召見)하고 말하기를, ‘오늘 경(卿)들을 불러 만나는 것은 경사를 같이하려는 것이다.’ 하셨다. 성심(聖心)이 기쁘고 용색(容色)이 화창하신 것을 뵈니 병환이 나으시는 경사가 있을 것을 바랐는데, 6월 6일(임신)에 병환이 더욱 위독하여 마침내 오시(午時)에 창덕궁(昌德宮)중희당(重熙堂)에서 뭇 신하를 버리시니, 춘추는 23세이고 재위는 15년이다. 경대부(卿大夫)·진신(搢紳)이 통곡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저 하늘이여 삼종(三宗) 대성(大聖)의 뒤가 여기에 이르렀는가? 우리 임금은 지극히 인자하신데 인자(仁者)도 수(壽)하지 못하는가? 종사(宗社)를 어찌하는가?’ 하고, 도인(都人)·사녀(士女)가 분주하며 울부짖어 온 성안이 들끓는 듯하여 장차 아침 저녁 사이에 보전하지 못할 듯하였다. 대왕 대비께서 대신에게 명하여 사왕 전하(嗣王殿下)를 맞이하여 대통을 잇고 들어와 상사(喪事)를 주장하게 하셨으며,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왕의 공덕을 의논하여 경문 위무 명인 철효(經文緯武明仁哲孝)라는 시호(諡號)와 헌종(憲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고, 이해 10월 28일(임진)에 건원릉(健元陵)의 서강(西岡) 유좌(酉坐)인 언덕에 장사하니, 효현 왕후(孝顯王后)와 영역(塋域)을 같이하고 봉분을 달리하였다. 모든 교금복첩(絞紟複褶)136) 등속은 다 궁중에서 나왔고 대왕 대비께서 대내의 돈 10만 냥(兩)을 내려 빈장(殯葬)에 쓰게 하셨으니, 대개 왕이 평소에 백성의 힘을 아끼신 뜻을 몸받으신 것이다. 왕은 기우(氣宇)가 단정하고 화목하여 성품이 총예(聰睿)하고 연각(淵懿)137) 하며 위엄이 있으나 포용이 있고 명철하나 잗달게 살피지 않으며 인효(仁孝)는 나면서 지극하여 수양에 의지할 것이 없으셨다. 순종과 대왕 대비·왕대비를 섬기되 하루에 세번 문안하여 기쁨을 받들어 충애(忠愛)에 막힘이 없었고, 즉위하여서는 뜻과 몸을 봉양하고 숭보(崇報)하는 예(禮)에 그 정성을 극진히 하기를 힘쓰셨다.

어려서 부왕을 잃어 천안(天顔)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매우 슬퍼하셨는데, 연신(筵臣)이 진전(眞殿)에 모신 칠분(七分)의 모사(摹寫)는 오히려 전하의 모습이 잘 닮으신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니, 왕이 거울을 대하면 문득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 전우(殿宇)은 반드시 왕대비의 처소에 가깝게 하여 한가한 때에는 늘 모시고 않자 잠시도 옆을 떠나지 않으셨다. 옷과 음식을 자전께서 침히 살피신 것은 뜻에 맞고, 병환 때에 자전께서 와서 보시면 편안하게 여기셨다. 대왕 대비께서 편찮으신 일이 있으면 낯빛에 근심을 보이고 의관(醫官)이 진맥할 때에는 반드시 손수 받들어 살피고 탕제(湯劑)는 반드시 살펴서 바치며 찬선(饌膳)을 회복하신 뒤에야 또한 평상으로 돌아가셨다. 조상을 제사하는 데에 독실하시어, 묘궁(廟宮)의 제사에는 사고가 있지 않으면 친히 강신(降神)하시되 정성스런 마음을 간직하고 거동을 반드시 삼가시니, 모든 직위에 있는 자가 모두 공경하여 종사하였으며, 삼가지 못하는 자는 죄주셨다. 능원(陵圍)에 철에 따라 제사에 쓰고 남은 음식을 맛보셨고, 제기에 담은 조과(造果)·전과(煎果)의 정결하지 못한 것을 태상(太常)138) 에 의논하여 바로잡으셨다. 하늘을 섬기는 것이 한결같이 경외(敬畏)하고 감히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뇌우(雷雨)가 심한 때에는 주무시다가도 반드시 일어나 않아서 그치기를 기다리시고, 어그러져 제때가 아닌 때에 일어나면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선(饌膳)을 줄이며 자신을 책망하여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일을 강구하셨다. 타고난 재주가 빼어나시고 학문에 부지런하시어 경사(經史)를 강독(講讀)하는 여가에 제가(諸家)를 널리 섭렵하시고 국조(國朝)의 전고(典故)를 기재한 글까지도 보고 들은 것은 자기 말을 외우듯 하셨다. 기무(機務)에 여가가 있으면 한 방에 고요히 계시며 도서(圖書)를 가까이하여 손에서 펴 보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고 때로는 새벽까지 글을 읽는 소리가 문밖에 들리므로 듣는 자가 소스라쳐 감탄하였다. 평소에 육지(陸贄)의 주의(奏議)와 소식(蘇軾)의 글을 좋아하여 구두(句讀)를 점검하게 하시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경세(經世)의 글로 여기셨으니 바야흐로 조섭 중에 계실 때에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병이 조금 나으면 이 세 책을 읽겠다.’ 하셨는데, 마침내 이룩하지 못하셨다.

아! 천승(千乘)으로서 증자(曾子)·민자(閔子)139) 가 행한 것을 실천하고, 지존(至尊)으로서 포위(布韋)의 절약을 실천하시며, 인애(仁愛)가 깊어서 베푸는 것이 넓으며 지키는 것이 요령을 얻어서 공이 넓었으니, 이것이 왕의 정치하는 큰 근본이었다. 성덕(盛德)의 빛나는 것이 정사에 보이고 절목(節目)에 나타난 것으로 말하면, 선왕이 어진이를 가까히 하고 백성의 이로움을 즐겁게 여기시어 이를 감탄하고 길이 잊을 수 없는 것을 아! 신(臣)이 비록 편협하고 비루하여 형용할 수 없으나, 자신이 친히 본 것을 스스로 다행하게 여긴 것이 또한 오래 되었다. 왕은 아랫사람을 대범하게 거느리고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시니, 바라보면 돈중(敦重)하고 침묵(沈默)하며 나아가면 애연(藹然)히 상서롭고 화평한 것을 받을 수 있었다. 신하를 불러 만나실 때마다 부드럽고 즐겁게 하시어, 아래에서는 성심을 다하고 위에서는 진심을 보이시니, 말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진정을 다하지 않는 말이 없었다. 가부를 토론하는 것이 투철하여 숨기는 것이 없고 명철하게 청단(聽斷)하여 모르면 버려두지 않으셨으므로, 도리에 어그러지는 청촉(請囑)이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설명이 통달하여 곡진하게 도리에 맞으면 처음에는 뜻에 거슬렸더라도 곧 돌리셨으니, 이것이 명철한 임금은 도리로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 전에 늘 영을 받들고 분부를 받았는데 이르기를, ‘대신(大臣)은 임금의 심복(心腹)이니 나라의 일에 대하여 한결같이 대신에게 묻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하시어 크고 작은 일을 물론하고 다 물어서 대신이 가하다고 한 뒤에야 행하셨다. 조상을 받드는 데에 관계되는 것은 더욱이 삼가서 혹 잘못될세라 염려하듯이 여러 번 묻기를 꺼리지 않고 지극히 마땅하게 되도록 힘쓰고야 마셨다. 인기(人器)가 날로 낮아 가는 것을 늘 개탄하시어, 숭장(崇奬)하는 일에는 유례 없는 느낌을 격동하는 것이 많았고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한탄을 조정에 임하셨을 때에 여러 번 나타내셨다. 자나깨나 현능(賢能)을 생각하여 널리 찾으셨으므로, 작은 학문이나 한 가지 기예가 있더라도 왕의 세상에서는 버려진 사람이 없었다. 왕이 대왕 대비의 교화가 행해진 지 6,7년 동안에 보고 익혀 백성과 나라에 이롭고 해로운 것을 마음에 갖춰 아셨으므로 정령(政令)을 내고 인해(仁惠)를 베푸는 데에 있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 이르기를 ‘사목(司牧)140) 은 백성의 고락이 관계되니 마땅한 사람을 얻고서야 편안하게 할 수 있다.’ 하여 마치 병들었을 때에 의약을 찾듯이 널리 재능이 있고 어진 자를 구하셨으며, 또 이르기를, ‘탐오(貪汚)는 백성을 해치는 것인데 나라에 상형(常刑)이 있어도 법을 맡은 자가 가감하면 무엇에 징계되어 두려워하겠는가?’ 하여 실지로 살펴 죄주도록 신칙(申飭)하셨다.

연석(筵席)의 신하가 여리(閭里)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말하면 반드시 용색(容色)을 고쳐 듣되 움츠려서 마치 자신이 아픈 듯하시고, 비록 작은 일까지도 백성에게 해로우면 빨리 제거하고 백성에게 이로운 것은 빨리 시행하여 망설이는 것이 없고 극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셨다. 홍수·가뭄의 기근을 고하면 재앙을 근심하고 궁핍을 염려하여 용색(容色)을 변하고 밤낮으로 우근(憂勤)하며 대신(大臣)·유사(有司)를 인견(引見)하고 진구(賑救)할 방책을 자세히 강구하여 곡식을 실어 나르고 내탕(內帑)의 재물을 덜어내며 환곡(還穀)을 받아들이는 일을 멈추고 공납(貢納)을 경감하되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서두르셨다. 불타거나 물에 빠진 재해를 돌볼 때에는 반드시 정해진 법보다 더하시고, 추위를 하소연하는 위사(衛士)에게는 해마다 옷을 내리셨다. 새해의 하교에 농시(農時)를 빼앗지 말도록 경계하여 농사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셨다. 여러 도(道)에는 어사(御史)를 보내어 염탐하고 공시(貢市)에서는 연(輦)을 멈추고 물으시며 민정(民情)을 아뢰면 모두 묘당(廟堂)에 붙여 그 폐단을 제거하여 그 생업에 안정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백성이 수척(瘦瘠)한 자가 없었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곤궁한 자가 은혜를 입어 보전하는 은택이 사람들에게 입혀진 것이 매우 깊었다. 당시에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 풍속이 날로 심해져서 항간의 민가에서도 다 좋은 옷과 좋은 음식으로서 서로 뽐냈으나, 왕이 무명 옷을 입는다는 말을 듣고 경계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검약을 좋아하시는데 우리들이 명주 옷을 입을 수 없다.’ 하였다. 신이 전석(前席)에서 마침 사치를 버리고 검약을 숭상하는 방도를 논하고 감히 이로써 여쭈니,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본디 그럴 것이다. 나는 본래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곤포(袞袍)가 아니면 비단을 입지 않으며 겨울에는 무명을 입고 여름에는 모시를 입으니 이것이 내 상복(常服)이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것은 사치가 바로 그것인데, 근래 이 풍속을 서로 따라서 마치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이 재물이 날로 다하고 백성이 날로 곤궁하여 가니, 만약 통렬히 금지하지 않으면 나라를 어찌하겠는가? 내가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본성이 그러할 뿐이 아니라 또한 백성을 위하여 솔선하려는 것이다.’ 하셨다.

아! 《서경(書經)》에 ‘능히 나라의 일에 부지런하고 능히 집에서 검약한다.’고 한 것은 왕을 두고 말한 것이다. 왕은 만물을 기르되 정리(政理)에 종합하고 광대한 것을 다하되 정미(精微)에 돌이켜 성실하고 심원한 마음가짐이 깊은 곳에 간직되셨으며 침착하고 과단성이 있어 성색(聲色)을 끊으셨으니, 사람들이 그 끝을 엿볼 수 없었다. 조신(朝臣)의 현우(賢愚)·득실(得失)이 예감(睿鑑)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나 선악을 포용하시는 것이 산숲보다 넓으시므로 사람들은 무고(無辜)히 죄에 걸리는 일이 없었고 조정에는 법에 어그러지는 형벌이 없었다. 말은 반드시 공경하고 태만함이 용색에 보이지 않았으며 편찮으실 때일지라도 평복으로 신하를 대하신 적이 없었다. 위독하시기 전에 입진(入診)한 자리에서도 세수하고 의관을 갖추고서 보셨으므로, 신이 조섭하시는 데에 손상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의절(儀節)을 생략하시기를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신기(神氣)가 어둡고 막히는데 내가 습관되어 그러한 것이다.’ 하셨다. 침전(寢殿)에서 삼가 모실 때 중연(中涓)141) 등속을 보지 못하였으니, 한가히 계시는 곳에서도 환시(宦寺)·궁첩을 가까이하는 때가 아주 적었으리라는 것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왕은 시문(詩文)에 대하여도 신운(神韻)이 고상(高尙)하였으며, 《원헌집(元軒集)》 다섯 권이 있었다. 평소에 예서(隷書)를 좋아하여 또한 오묘한 데에 이르렀으나 겸손하여 스스로 잘한다고 하시지 않았으므로, 그 오묘한 데에 이른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아! 왕은 문명(文明)하고 준철(濬哲)한 자질과 인효(仁孝)하고 공검(恭儉)한 덕을 지니시고 어린 나이에 어렵고 큰 사업을 이어 통한(慟恨)이 마음에 서렸는데 가정을 잇는 사업에 조심하고 민사(民事)에 부지런한 정치에 힘쓰셨다. 15년 동안 뜻을 기울여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셨으므로 장차 인의(仁義)가 정숙(精熟)하고 공적이 날로 높아져서 전대(前代)의 큰 공렬(功烈)을 빛내고 백세(百世)의 훌륭한 공업(功業)을 여실 것을 보리라고 기대하였는데, 이 백성이 복이 없고 하늘이 그 수(壽)에 인색하여 바라는 정치를 다하시지 못하였는데 문득 상망(喪亡)하는 슬픔을 안게 되었다. 아! 원통하고, 아! 통탄하도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권돈인(權敦仁)이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541면
  • 【분류】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095]
    정해년 : 1827 순조 27년.
  • [註 096]
    경인년 : 1830 순조 30년.
  • [註 097]
    임진년 : 1832 순조 32년.
  • [註 098]
    갑오년 : 1834 순조 34년.
  • [註 099]
    서내(西內) : 경희궁(慶熙宮)을 가리킴.
  • [註 100]
    을미년 : 1835 헌종 원년.
  • [註 101]
    정유년 : 1837 헌종 3년.
  • [註 102]
    무술년 : 1838 헌종 4년.
  • [註 103]
    경자년 : 1840 헌종 6년.
  • [註 104]
    계해년 : 1803 순조 3년.
  • [註 105]
    기해년 : 1839 헌종 5년.
  • [註 106]
    삼황(三皇) : 명(明)을 개창(開創)한 태조(太祖), 임진 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도운 신종(神宗),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말함.
  • [註 107]
    경자년 : 1840 헌종 6년.
  • [註 108]
    신축년 : 1841 헌종 7년.
  • [註 109]
    빈계(賓啓) : 빈청(賓廳)의 계청(啓請).
  • [註 110]
    은휼(隱恤) : 가엾이 여겨 은혜를 베풂.
  • [註 111]
    임인년 : 1842 헌종 8년.
  • [註 112]
    전경 문신(專經文臣) : 조선조 성종(成宗) 때 경학(經學)의 쇠퇴함을 막기 위해 문신(文臣) 가운데 경서(經書)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이를 ‘전경 문신’이라 하여 가끔 어전(御前)에서 경서를 시험하였는데, 이것이 전강(專講)의 시초였음.
  • [註 113]
    계묘년 : 1843 헌종 9년.
  • [註 114]
    궐리사(闕里袧) : 공자(孔子)를 모신 사당으로서 정조(正祖) 16년(1792)에 세웠으며 수원(水原)에 있었음.
  • [註 115]
    계축년 : 1793 정조 17년.
  • [註 116]
    비궁(悶宮) : 경모궁(景慕宮)을 가리킴.
  • [註 117]
    갑자년 : 1744 영조 20년.
  • [註 118]
    의조(儀曹) : 예조(禮曹).
  • [註 119]
    갑진년 : 1844 헌종 10년.
  • [註 120]
    을사년 : 1845 헌종 11년.
  • [註 121]
    월봉(越俸) : 감봉(減俸).
  • [註 122]
    궤장(几杖) : 임금이 나라에 공로가 있는 70세 이상이 된 2품 이상의 대신(大臣)들에게 내려 주던 안석(案席:几)과 검은 지팡이[烏杖].
  • [註 123]
    선온(宣醞) : 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내려 줌, 또는 그 술. 사온서(司醞署)에서 만들었음.
  • [註 124]
    병오년 : 1846 헌종 12년.
  • [註 125]
    면례(緬禮) : 무덤을 옮겨 장사지냄.
  • [註 126]
    단괄(袒括) : 초상 때에 왼 옷소매를 벗고 풀은 머리를 베로 묶는 것.
  • [註 127]
    계축년 : 1673 현종 14년.
  • [註 128]
    경인년 : 1830 순조 30년.
  • [註 129]
    정미년 : 1847 헌종 13년.
  • [註 130]
    무술년 : 1778 정조 2년.
  • [註 131]
    임인년 : 1782 정조 6년.
  • [註 132]
    부월(鈇鉞) : 작은 도끼와 큰 도끼. 모두 형구(刑具).
  • [註 133]
    무신년 : 1848 헌종 14년.
  • [註 134]
    주사(籌司) : 비변사(備邊司).
  • [註 135]
    기유년 : 1849 헌종 15년.
  • [註 136]
    교금복첩(絞紟複褶) : 시신을 수렴(收斂)하는 피복류.
  • [註 137]
    연각(淵懿) : 생각이 깊고 조용하며 성실함.
  • [註 138]
    태상(太常) : 봉상시(奉常寺).
  • [註 139]
    민자(閔子) : 민자건(閔子騫).
  • [註 140]
    사목(司牧) : 수령(守令).
  • [註 141]
    중연(中涓) : 궁중에서 청소에 종사하는 내시 따위.

○行狀:

王姓, 諱, 字文應, 翼宗孝明大王適嗣, 純宗成孝大王之孫。 母孝裕王大妃 豐壤趙氏贈領議政豐恩府院君 忠敬公 萬永女, 丁亥七月辛酉, 生王于昌慶宮景春殿。 先是, 薨翼宗, 以雕玉樹匣而授之, 已而有身, 誕彌之辰, 有鶴一群, 翔于殿上盤旋, 久之乃去, 宮中人異之。 王, 龍睛犀角, 日表秀朗, 覃訏之音, 若發金石, 未百日而能起立。 數歲通周興嗣 《千字文》百餘字, 翼宗, 意其目習也, 試之他書, 輒指其宿所知曰, 是某字, 翼宗, 大奇之曰, ‘好學其將勝予乎。’ 嘗所御屛畫人物, 戒人勿令壓之曰, ‘畫中兒疼矣,’ 其聰明仁愛特達之著於天賦者, 已如此。 翼宗代聽國政四年, 以庚寅五月壬戌賓天, 王時四歲也, 見人有悲 遑之色, 在阿母抱哭曰, ‘吾不欲華服,’ 聞殯殿號泣之聲, 則亟止嬉遊, 引席俯伏曰, ‘吾亦參班, 戚容有動人者。 是歲九月, 冊封爲王世孫, 受冊于重熙堂, 循循禮度, 儼如成人, 侍衛之臣, 無不驩焉相慶。 正副使議欲除後四拜, 蓋慮其勞於儀節也, 王不從, 禮畢爲後還內。 純宗明敬妃大嘉之賜以果盒, 王奉盒, 忽涕下, 兩殿, 怛然傷感, 左右莫不相視而悲。 壬辰九月, 行賓客相見禮, 仍日開書筵, 業次有程, 時刻無舛, 聽說文義, 已瞭如, 讀數遍, 輒成誦, 賓客之進書徒也, 或以通書則曰 ‘吾有誤讀之字, 通何爲也?’ 其英睿夙就, 又此類也。 甲午十一月甲戌, 純宗登遐于西內會祥殿。 服成, 王, 乃冠具冕服, 受大寶于殯殿, 卽位於崇政門, 反喪服, 大臣進曰, ‘殿下承統踐阼, 先世子追崇, 典禮也請降成命。’ 於是諡大行曰文安武靖憲敬成孝, 廟曰, 追尊皇考曰翼宗大王, 諡曰敦文顯武仁懿孝明, 墓曰綏陵, 明敬王妃 金氏, 尊爲大王大妃, 母嬪尊爲王大妃。 大王大妃垂簾同聽政, 凡裁決庶務, 一出慈旨, 其有自斷者, 亦稟而後行。 乙未春, 尊純宗爲世室, 四月戊申, 葬于仁陵。 王沖年恤宅宗, 饋奠必親將, 哭無常聲, 孺慕不勝, 國中服其孝。 詔使至, 見王相接有儀, 則擧歎嗟爲之賀。 大王大妃諭大臣曰, ‘主上沖年, 遽當迎勑, 未知大禮之如何過行, 及聞接見之際, 動容周旋, 靡不中禮, 予心嘉悅, 無以形諭也。’ 王, 以天縱之姿, 好學不厭。 自幼晝未嘗臥, 夜不釋卷, 勸講進講, 一循舊規行之, 而法筵亦未或弛閣。 首擧林樊之士, 授經筵銜, 備其旌招, 大臣諸臣之以聖學陳勉者, 必賜溫批, 虛襟而聽之。 儒士之親臨課試, 郞官之日次輪對, 慥慥不少懈, 世皆想望其有道焉。 丁酉正月甲申, 躋祔純宗翼宗于太廟, 越五日戊子, 遵國朝彝典, 加上大王大妃尊號曰文仁, 上王大妃尊號曰孝裕, 受百官賀。 三月丁酉, 行嘉禮, 王妃, 安東金氏贈領議政永興府院君 祖根女, 寔孝顯王后也。 翌年戊戌, 大王大妃寶齡光躋五旬, 王, 欲進冊揚徽, 稱觴而壽, 慈意執謙抑不從。 大臣禮堂, 迭請于前, 不能得, 王以爲 ‘事親, 莫先於養志,’ (月正)〔正月〕元日, 稱賀于仁政殿, 行賞頒赦, 蕩各貢遺在, 諸首舊還, 以廣慶焉。 後庚子, 以母臨四十年, 稱慶告布, 亦如之, 凡有慶會, 恩施皆視此。 夏, 酌獻于文廟曰, ‘今日瞻謁夫子廟宮, 卽先朝癸亥已行之禮賚, 予亦依癸亥行之,’ 因御春塘臺試士, 此初元視學, 仰述先王聖德也。 己亥春, 幸綏陵親祭曰, ‘予小子嗣有歷服, 五載于今, 始克祗謁仙寢, 曷敢曰粗伸痛慕, 亦不可無寓意之擧,’ 陵官祭官, 幷進敍有差。 詣北苑望拜, 行參班應製, 每遇三皇忌辰, 壇苑之禮, 風泉之慕, 終始靡替。 天將麻貴之孫夏帛, 登武科, 敎曰, ‘麻提督之後孫, 始有科名, 在朝家軫念, 豈與李提督家有異?’ 特授宣傳官以寵之。 有象譯劉進吉者, 淫溺邪敎, 與其醜類, 肆其詿惑, 敢引西洋人東來, 稱爲敎主, 糾結詭秘, 宄猾愈甚, 王, 卽命捕獲鞫之, 竝置之法, 誕敷綸音于中外。 後有金大建者, 逃入西洋, 傳習其術, 十年而乃返國, 又嚴覈而梟之, 奸徒屛息, 民志始定。

夏, 京師大雨, 五部民戶漂壓者千餘, 分遣宣傳官, 行視于四郊, 亟令賑廳, 別施優恤之典。 庚子旱, 王, 輒於深夜, 御袞衣, 焚香親禱于後苑, 其憧憧於民事, 自沖歲卽然。 十二月辛巳, 大王大妃, 命撤簾, 敎曰, ‘敬天愛民, 勤學親賢, 守先王家法, 主上其勉之。’ 於乎! 盛哉。 是傳授之精一心法也。 王, 乃親庶政, 辛丑元月丙申, 行朝參於仁政門, 命忠愍公 李健命, 忠肅公 李晩成, 忠簡公 趙聖復, 忠獻公 李廷熽, 祀孫錄用, 尹志述加贈正卿, 因施節惠, 蓋有興感於是歲也。 命大臣卿宰, 各薦淸白吏, 宮房諸司差人收稅外邑, 還逋隣族侵徵之弊, 一切嚴法禁斷。 別諭于祭酒宋啓榦, 經筵官金仁根成近默宋來熙, 敦飭其上來。 二月戊辰, 加上大王大妃尊號曰光聖, 以顯揚七載簾帷之德, 賓啓庭請者屢, 而慈衷之勉回, 卽惟王誠孝之感也。 御仁政殿, 上冊寶, 以親總萬幾, 養隆長樂合慶受賀。 凡進獻之物, 關民疾苦者, 大加隱恤曰, ‘浦民海採之艱, 實關人命, 而暑月氷輸, 尤爲痼弊, 自今六七兩朔生熟鰒封進於藥院者, 竝永爲停減。’ 又曰 ‘爲國以儉, 當以身先, 減嶺南貢蔘, 關西北鹿茸, 內局尙方, 每年燕留。’ 以効忠王室, 無異勳庸, 文忠公 金壽恒, 特施不祧, 以禦倭之捷幸州爲最, 命建都元帥權慄祠于其地宣額焉。 以今年, 卽英廟陞儲之再回甲也, 特命賜祭于四忠祠慶恩府院君, 敬遵正廟盛典也。 壬寅春, 駕幸仁陵, 遣官侑于文成公 李珥, 文簡公 成渾墓, 墓在駕路之沿也。 試各邑儒武, 特軫民邑受弊, 竝減當年城餉。 分遣繡衣于諸道按察之, 其有優績者, 賜書及表裏。 以金吾議處, 編配相續, 銓曹褒賞, 只是按例, 非所以彰癉也, 或加特資以嘉奬之。 是年又旱, 圭璧屢擧, 每臨筵, 問穡事於大臣, 憂勞之辭, 如渴思飮。 及得雨, 宗廟報謝, 不待秋成, 卽令行之曰, ‘豈可無告喜之擧?’ 諸路雨澤, 令撥馬馳聞, 其一念憂民, 靈應是速也。 嘗曰, ‘儒生殿講, 卽培養需用之義, 而不過通一經耳。 今若倣專經文臣輪講之例, 使今年, 應日次講者, 明年輪講他經, 再明年又用是例, 則不出三年, 盡通三經。 其於勸課之方, 不爲無助, 議大臣行之。’ 於是作成之敎益廣矣。 癸卯春, 幸健陵, 駕次鷺江龍驤鳳翥亭, 經筵官洪直弼家, 在亭底, 宣旨使進款以相見之, 喜俾述學問切要, 望道勤勤, 恩遇鄭重, 此延接儒士之一初盛擧也。 遣正卿, 奠酌于闕里祠, 所過祠院, 皆賜祭。 謹稽正廟癸丑推恩於英廟侍從故事, 凡逮事正廟之法從, 抄啓以上, 幷加一資。 夏, 行閟宮之享曰, ‘今年, 卽甲子嘉禮後恰滿百歲, 旣謁園寢, 肇行閟享, 小子愴慕, 當復如何?’ 命施翼靖公 洪鳳漢不祧之典, 仰體正廟情事, 以寓繼述之聖孝也。 八月乙丑, 孝顯王后薨, 命陵上石儀, 一遵《補編》舊制, 諸道卜定, 務從省約。 兩湖海西舊有京營軍保收米, 冗濫無節, 爲保額切骨之瘼, 且有年詢于朝, 保米就畫結錢作米, 取需軍保, 作身錢, 收充于結錢, 大行通變之政, 自是, 軍民以爲安。 十月, 王, 患痘候, 卄有餘日而乃復撤院, 直嵩呼于大庭, 儀曹設科之啓, 以增廣請, 邦例也。 王曰, ‘予於今番, 不過貽憂於兩慈聖而已, 有何可稱之慶? 增廣太涉張大, 以庭試擇入,’ 後因相箚而始許之。 甲辰十月甲寅, 冊領敦寧府事益豐府院君 洪在龍女爲妃。 今大妃殿也。 乙巳正月, 御崇政門朝參, 敎曰, ‘朝參之意, 專出博詢, 而今日三司所陳, 不過備例文具, 幷與官司之規而無之, 良可寒心。 幷譴罷, 參陪九列, 亦以無所建白, 越其俸。’ 又敎曰, ‘予之嗣服, 已過十載, 民國之事, 無一可施, 予雖寡昧, 豈不知皆由予不能自强乎? 咨爾方伯居留之臣, 悉具民國爲弊之端, 條列狀聞, 毋孤予寡人臨門詢訪之至意,’ 後因各道登啓, 多所採施焉。 命故都事蔡之洪, 故府使任聖周, 故監役朴胤源, 特贈都憲兼祭酒, 經術行誼之爲儒林標準也。 豐恩府院君, 以是年入耆社, 命賜几杖, 遣近侍宣醞, 給宴需, 及一等樂, 體慈恩而識難老之喜也。 秋, 關西大水, 淸北諸邑民田舍墊溺而渰死者衆, 王, 大震驚, 命差慰諭使, 刻日遣之, 敎曰, ‘慰諭之行, 雖已發送, 淸北列邑, 無異滄桑, 此豈以常例拘哉? 道內上納錢三萬兩折留, 以爲修頹補決之資。’ 頒諭于菑黎, 屢百有餘言, 惻怛剴切, 聞者涕泣。 減稅輕徭, 以救孑遺, 發倉轉粟, 濟其飢乏, 設祭水濱, 俾勿爲厲, 守宰之不能懷撫者, 使之卽行罷遣, 安排擘畫, 纖密周備, 民奠堵如故, 不知其爲菑。

王以綏陵風水, 多有形家竊議, 積不寧于聖心。 丙午春展陵訖, 命諸相地者, 竭論于前, 咸曰 ‘遷奉可,’ 王曰, ‘事體至重, 當博議之,’ 詢于大臣諸宰, 亦僉曰可, 遂擇地於楊州龍馬山下, 以閏五月甲辰, 擧緬。 王, 夙抱至哀, 始親終事, 慟慕皇皇, 一如袒括。 自啓陵之日, 日進糜粥, 不御常膳, 庀廞具治方中, 事大小無不檢理。 時方大熱, 車駕日戒, 顔色哭泣, 諸臣不忍仰視。 禮官引莊烈王后癸丑已例, 大王大妃服色, 以淺淡議進, 王曰, ‘大王大妃, 於庚寅服長子三年, 禮應服三年者, 改葬服緦, 今與癸丑異, 不當引。’ 更令詢議大臣儒臣, 俱援儀禮, 改葬緦, 賈公彦疏, ‘父爲長子, 母爲子亦同’ 之論, 遂改以緦服。 王之臨事明愼, 群下所不能及也。 大禮克襄, 軫及民隱, 減楊州城餉之耗, 轝士効力, 無如市民, 寬其徭蕩其遺在。 初, 純宗翼宗御眞, 妥奉於景祐宮之誠一軒, 王, 議于大臣, 命璿源殿拓其地, 展其間架。 八月, 敬安兩朝御眞于殿, 行酌獻禮曰, ‘此天理人情之所不容已。’ 朝夕瞻依, 僾然如入室見位, 朔望及誕辰, 必晨詣行事, 風雨寒暑, 未之或廢。 顯隆園, 有每月奉審之啓, 蓋出於正廟至切之孝思, 而諸陵寢, 無其例, 局內健陵, 亦未之行, 王, 語筵臣曰, ‘此是將來難行之事, 斷可釐正,’ 命自今已之。 丁未元日, 進表裏、致詞、箋文于王大妃, 慈齡四旬也。 仰承撝謙之慈德, 只稱賀之節, 一如戊戌。 列朝寶鑑, 自正廟以後, 尙闕而未備, 二月, 召見諸大臣于閟宮齋殿, 諭以續纂之意, 敎曰, ‘正廟純廟翼廟三朝寶鑑, 繼爲纂輯。’ 於是, 開局蕆事, 義例之不能照定於原編者, 皆出於睿裁。 翌年冬, 役告竣, 王, 親上于太廟, 行告布如壬寅舊例。 王以選長吏蒐人才, 爲出治之大要, 前後諭敎, 惓惓不已。 至是, 又敎曰, ‘年前儒武與守令別薦, 間或收用, 竟無實效, 蒐羅人才之本意, 果安在哉? 況崇奬儒術, 大關世敎之汚隆, 小民命脈, 專係守令之治否, 而前後另飭, 便歸文具, 可勝歎哉? 大政隔月, 選擧之方, 不宜蹈循常例。 林下讀書, 劬躬篤行之士, 令道伯居留之臣, 勿拘前銜與儒生, 博採以聞, 文蔭武廉明著績, 亦自廟堂, 收薦於諸備堂及曾經時任藩臣, 幷與前薦合抄, 以爲擇用之地。’ 仍飭各道殿最。 王, 以爲 ‘今日無告之民, 皆我祖宗赤子, 窮蔀受困, 在於貪墨之未祛。’ 凡有飭旨, 威於鈇鉞, 有不稱旨, 或令改修, 或罷其職。 總衛營之創, 慮有軍校之橫, 命法司無或容貸, 有罪巡於衆流之島而懲之, 更無敢犯者。 冬至, 召見諸大臣及禮堂, 敎曰, ‘明年, 卽我大王大妃殿恰躋六旬, 王大妃殿望五之慶年也。 予小子歡欣頌禱之忱, 容有極哉? 摸聖德於玉牒, 祝寶齡於瑤觴, 卽亦我家之已行, 政合援用於今日。 而況我純宗大王曁我翼宗大王聖德大業, 比如天地高厚, 環東土億萬蒼生, 至百世有不能忘者, 而尙未有發揮闡揚之擧, 予小子攀慕靡極之情, 尤當如何? 純宗大王追上尊號都監, 大王大妃殿加上尊號都監, 翼宗大王追上尊號都監, 王大妃殿加上尊號都監, 合設擧行。’ 又敎曰, ‘上號翌日, 當進饌于大王大妃殿矣’, 又敎曰, ‘謹當於月正元日, 親上表裏致詞箋文于兩慈殿, 各道方物置之。’ 戊申元日, 稱賀于兩慈殿。 三月己丑, 追上純宗尊號曰體聖凝命欽光鍚慶, 翼宗尊號曰體元賛化錫極定命, 加上大王大妃尊號曰隆禧, 王大妃尊號曰獻聖。 辛卯, 進饌于通明殿。 時王大妃, 持私制, 故只進于大王大妃焉。 王, 克愼庶獄, 國有赦, 親閱錄案, 審輕重而疏決之, 必先以欽恤之義, 惟貪吏不宥, 敎曰, ‘日前赦單, 雖以遇慶曠蕩之意, 幷令放釋, 而其中繡衣封庫人, 與他罪有異, 其在懲貪之政, 不可幸逭,’ 令依本律發配焉。 是歲, 卽英廟戡亂之舊甲也, 表忠褒忠兩祠及海恩府院君 吳命恒, 故相臣崔奎瑞家, 幷賜祭, 命錄其祀孫。 泮宮有修繕之役, 敎曰, ‘泮宮修繕之費, 雖有廟堂措劃, 多士藏修之所, 宜有優異之擧, 特下帑錢三千緡, 以補工役。’ 相臣言各宮魚鹽船稅築堰防還之爲弊者, 禁之。 王曰, ‘此事每欲一番下敎矣。 正宗朝, 嘗以此飭敎截嚴, 如非籌司和委, 而或有內司諸宮房圖署文蹟於外邑, 則該道臣, 卽爲狀聞之意, 著爲法禁, 在今日尤當遵守成憲,’ 仍命嚴飭諸道及內司諸宮房。 己酉元日以大王大妃寶甲載回, 進箋稱賀, 如去年特推及老之義, 文臣侍從武臣梱帥, 蔭官準職幷三品以上年六十一歲人, 各加一資。 王常患科弊之滋大難捄, 有科輒有飭。

春, 將行生進覆試, 又下飭諭, 有曰, ‘有毫末涉私之入聞者, 律以作奸科場之外, 加施不信王言之罪, 雖以士子言之, 皆是公卿自期之人, 發身之初, 已犯罔上之科, 他日事君, 將何以藉手乎? 隨其現發, 斷當以加倍之律, 罪其家長,’ 有司震讋, 罔敢不公。 語筵臣曰, ‘每一經科試, 輒至人心之不平, 今庶其不然乎?。 王, 自春感疾, 駸駸然日月示憊, 猶酬酢萬幾, 無或倦勤。 至如太廟展省, 與夫試藝試士, 不以違豫而不行, 蓋節宣靜攝之方, 亦多失矣。 五月, 大王大妃誕辰賀儀, 因諸臣之力懇, 自內行禮, 召見時原任大臣于觀物軒曰, ‘今日召接卿等, 欲同慶也。’ 竊覵聖心悅豫, 容色敷暢, 庶幾有翼瘳之慶, 六月壬申, 疾益㞃, 竟以午時, 大棄群臣于昌德宮重熙堂, 春秋二十三, 在位十有五年。 卿大夫搢紳, 攀擗叩胸曰, ‘天乎, 三宗大聖之後, 至於斯乎? 吾王, 至仁也, 仁者亦不壽乎? 如宗社何都人士女, 奔走號叫, 滿城如沸, 若將朝夕不保。 大王大妃命大臣, 迎嗣王殿下, 承大統, 入主喪事, 與諸臣議王功德, 上諡曰經文緯武明仁哲孝, 廟號憲宗, 以是年十月壬辰, 葬于健元陵西岡坐酉之原, 與孝顯王后同塋而異封。 凡絞紟複褶之屬, 皆出諸宮中, 大王大妃內下錢十萬緡, 以需殯葬, 蓋體王平日惜民力之志也。 王, 氣宇端穆, 性聰睿淵慤, 威而有容, 明而不察, 仁孝天至, 不假修爲。 事純宗曁大王大妃王大妃, 三朝承歡, 忠愛無間, 及卽位, 志物之養, 崇報之禮, 務極其誠, 以幼而失怙, 未記天顔, 爲至慟, 筵臣有言眞殿七分之摹, 猶未及殿下典刑之克肖, 王, 對鏡輒泫然。 殿宇必令依近王大妃處所, 燕閑則日常侍坐, 不暫違側。 衣章膳羞, 慈殿之親檢者乃適, 疾患, 慈殿臨視則以爲安。 大王大妃有不安節, 洞洞色憂, 醫官之診, 必手自奉而按之, 湯劑必審進之, 復膳然後亦復初。 篤於饗先廟宮之祀, 非有故則親祼, 誠心著存, 容節必飭, 凡百有位, 莫不靖共以承事, 不能致謹者罪之。 陵園時節之餕, 進而嘗之, 以籩實造煎, 未盡蠲潔, 議于太常而釐之。 事天一於敬畏, 不敢怠豫, 有雷雨作, 雖寢必興坐而待止, 其發於乖盭非時, 則避殿減膳, 責躬而講修省。 天才英茂, 勤於學, 殖經史講讀之餘, 汎濫諸家, 以至國朝記載掌故之文, 目涉而耳閱者, 如誦已言。 機務有暇則靜居一室, 左右圖書, 手不停披, 時或更漏已殘, 誦讀之聲, 出於戶外, 聞者竦然嗟異。 雅喜陸贄奏議及蘇軾文, 令點勘句讀, 以《大學衍義》, 爲經世之文, 時方有攝, 敎筵臣曰, ‘疾間將讀此三書,’ 竟未就。 嗚呼! 以千乘而躬之行, 以至尊而履布韋之節, 仁深而施博, 守約而功廣, 此其王之制治大本也。 至若盛德光輝之見於政事, 著於節目, 親賢樂利, 於乎不可忘者, 臣雖弇陋, 未足形容, 竊自幸於身親見者, 亦久矣。 王御下以簡, 接人以寬, 望之敦重沈默, 卽之藹然祥和可襲。 每召接臣隣, 雍容燕怡, 下以誠輸, 上以衷披, 人無不盡言, 言無不盡情, 可否揚確, 洞徹無隱, 而聽斷以明, 不知不措, 故非理之干, 無敢入焉。

苟其開敷條暢, 曲當於理, 則始雖逆志, 頃刻轉環, 此其謂明主之可理奪也歟。 臣昔常奉令而承敎矣, 曰 ‘大臣, 人主之心膂也, 國事不一聽於大臣, 則誰與爲國,’ 事無巨細, 皆詢焉, 大臣可之然後行。 其關於奉先者, 尤粥粥如恐或失, 不憚屢詢, 務歸至當而後已。 常慨然於人器之日趨卑下, 崇奬之擧, 多激曠感, 才難之歎, 屢發臨朝, 寤寐賢能, 搜訪遍之, 故雖曲學偏藝, 王之世, 無棄人焉。 王, 仰成簾化六七年, 民國利病, 已具淵衷, 發政施仁, 安民爲先, 謂 ‘司牧, 民之休戚也, 得人然後可安,’ 博求才良, 如病之醫, 謂 ‘貪墨民之賊也, 國有常刑, 掌法者低昻, 何所懲畏?’ 飭以實勘, 筵席之臣, 有言閭里疾苦艱難, 則必改容而聽, 蹙蹙如恫已, 雖至微細也, 害於民則亟去之, 利於民者亦亟施之, 無所遲疑, 靡不用極。 以水旱饑饉, 告則憂菑慮乏, 動形宵旰, 引見大臣有司, 備講賙賑之策, 船粟發帑, 停糴蠲貢, 汲汲如不及, 燒渰之恤, 必加於恒典, 衛士之呼寒者, 歲衣之。 歲首之綸, 戒勿奪時, 示重農也。 諸路行持斧之廉, 貢市有止輦之詢, 達民情也, 幷付廟堂, 剔其弊而安其業。 故民無捐瘠, 歲比登稔, 惠鮮懷保之澤, 入人者已深矣。 時俗習尙, 侈華日甚, 委巷編戶, 亦皆以美衣食相高, 聞王衣木綿戒之曰, ‘吾君之好儉也, 我輩不可衣紬衣。’ 臣於前席, 適論去奢崇儉之道, 敢以是仰質焉, 王笑曰, ‘固有之。 予本不喜奢麗, 故非袞袍不服緞紗, 冬緜夏苧, 是予之常服也。’ 仍曰, ‘喪身而亡國者, 奢侈是也, 邇來此風靡靡, 如水益下, 財日匱竭, 民日困窮, 若不痛禁, 國其奈何? 予之不近奢麗, 非但素性然爾, 亦欲爲民先也。’ 嗚呼! 《經》曰 ‘克勤于邦, 克儉于家,’ 王之謂也。 王囿物品而綜政理, 極溥博而反精微, 塞淵之秉, 蘊於城府, 故沈機果斷, 泯其聲色, 人不得以窺其涘。 朝臣之賢愚得失, 莫逃於衡鑑, 而含弘藏疾, 恢於山藪, 故人無不辜之罹, 朝無非法之刑。 言語必敬恭, 惰慢不設於容, 雖寢疾, 未嘗以褻衣臨下。 大漸前入診之筵, 輒盥洗衣服冠而見臣, 慮其有將攝之損, 請以簡儀, 王曰: ‘不如是神氣昏闒, 予所習慣然也。’ 寢殿伏侍, 未見中涓之屬, 其燕處接宦妾時之絶少, 亦可推知。 王爲詩文, 神解雅潔, 有《元軒集》五卷。 素好漢隷, 亦臻其妙, 退然不以自命, 故人之知其閫奧者鮮矣。 嗚呼! 王以文明濬哲之姿, 仁孝恭儉之德, 沖齡艱大, 慟恨在心, 兢惕於紹庭之業, 刻厲於勤民之政。 十五年來銳意圖治, 將見仁精義熟, 功化日隆, 光前代之鴻烈, 啓百世之令緖, 斯民無祿, 天嗇其壽, 未究從欲之治, 遽抱如喪之悲。 嗚呼! 冤矣。 嗚呼! 痛哉。 【判中樞府事權敦仁製。】

憲宗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實錄附錄 〔終〕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541면
  • 【분류】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