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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실록 1권, 헌종 대왕 묘지문[誌文]

헌종 대왕 묘지문[誌文]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아아! 생각하건대,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환(烉)이고 자는 문응(文應)이며 익종 효명 대왕(翼宗孝明大王)의 아드님이고 순종 성효 대왕(純宗成孝大王)의 손자이시다. 모비(母妃) 조씨(趙氏)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 충경공(忠敬公) 만영(萬永)의 따님이시다. 비(妃) 효현 왕후(孝顯王后) 김씨(金氏)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따님인데 계묘년055) 에 훙서(薨逝)하였다. 계비(繼妃) 홍씨(洪氏)익풍 부원군(益豐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따님이시다. 왕이 기유년056) 5월 13일에 병으로 편찮아 6월 6일 임신(壬申)에 창덕궁(昌德宮)의 정침(正寢)에서 예척(禮陟)057) 하시니, 수(壽)는 23세이다. 온 나라가 사람이 분주하며 눈물을 흘리고 아녀자 등 무지한 자도 부르짖고 가슴을 치며 애모(哀慕)하고 다들 ‘천운(天運)이다.’ 하며 뭇 인심이 동요하여 마치 하루도 보전하지 못할 듯하였다. 우리 대왕 대비 전하(大王大妃殿下)께서 종사(宗社)의 부탁이 지극히 중대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천명·인심이 돌아간 바를 따라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를 받들어 맞이하여 들어와 대통(大統)을 잇게 하고, 대소 신하들과 왕의 공덕을 의논하여 삼가 경문 위무 명인 철효(經文緯武明仁哲孝)라는 시호(諡號)와 헌종(憲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게 하셨다. 이해 10월 28일 임진(壬辰)에 건원릉(健元陵)의 서강(西岡) 묘향(卯向)인 언덕에 장사하니, 효현 왕후의 능(陵)과 동영이장(同塋異藏)058) 이다. 대왕 대비께서 왕의 평소의 뜻이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있었던 것을 몸받아 교모의금(絞冒衣衾)059) 을 다 궁중에서 내어 빈장(殯葬)에 드는 것으로 백성의 힘을 괴롭히지 않게 하셨다. 사왕 전하께서 신(臣) 윤정현(尹定鉉)이 일찍이 외람되게 유악(帷幄)에 입시(入侍)하였다 하여 신에게 명하여 유궁(幽宮)의 지문을 짓게 하시니, 명을 어길 수 없었다. 신이 저으기 생각하건대, 하늘이 덕이 있는 이에게 명하여 임금이 되어 백성을 가르치게 하면 반드시 복록(福祿)을 두텁게 하고 장수(長壽)를 내려 오래오래 양육하고 교화하여 백성을 화락(和樂)한 대도(大道)의 지경에 두니, 옛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이 임금이었을 때에 모두 틀림없이 그러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천도(天道)가 반드시 그러한 것이다.

우리 정종 대왕(正宗大王)께서는 성덕(聖德)·신공(神功)이 천지에 짝할 만큼 높고 넓고 밝게 빛나시므로 백성이 형용할 수 없고, 순종 대왕(純宗大王)께서는 도(道)를 오래 행하여 교화해서 양속(良俗)을 이루어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사람들의 피부와 골수에 미쳤으므로 세상이 다하도록 잊을 수 없었다. 익종 대왕(翼宗大王)께서는 교화를 돕고 경사를 도탑게 하며 천명(天命)에 근본하여 경계하고 삼가시었으므로 우리 후세 사람을 돕고 계도하신 것이 깊고도 원대하셨다. 우리 대행 대왕에 이르러서는 삼종(三宗)의 정통으로서 어린 나이에 업적을 잇되 공경하고 밝으며 깊고 지혜로운 자질을 지니고 태평을 거듭한 정치를 이어서 모훈(謨訓)과 공렬(功烈)을 나타나게 이어받고 공경하고 삼가서 무릇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방도를 다 닦지 않은 것이 없으셨다. 임어(臨御)하신 15년 동안에 조야(朝野)가 청명(淸明)하고 풍우(風雨)가 차서에 맞아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춥지 않았다. 이때에 춘추가 한창이시고 세월이 앞으로 많으므로 장차 만화(萬化)를 운전하여 오신(五辰)060) 을 순하게 하며 멀리 나아가 뭇 백성을 크게 성취시고 우리 조고(祖考)의 실(室)을 꾸며 크게 우리 그지없을 큰 역복(歷服)061) 을 편안하게 할 것은 임금께서 스스로 기약하시는 것이 그러하였으며 신민이 바라는 것이 그러하였으니, 대저 누가 큰 사업이 반도 이루어지지 못하여 중도에서 염세(厭世)하여 뭇 생명이 있는 무리가 부모를 잃은 듯하게 하실 줄 알았겠는가?

아아! 슬프다. 왕은 그 덕을 지니셨는데 그 수(壽)에 인색하셨으니, 전(傳)에 이른바 ‘덕이 있는 이는 반드시 수를 얻는다.’고 한 것이 그른가? 왕은 그 뜻을 지니셨는데 그 베푸는 것을 다하지 못하셨으니, 기(紀)에 이른바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룬다.’고 한 것이 그른가? 세 성조(聖朝)의 인덕(仁德)은 능히 그 후손을 창성시켜야 할 것인데 이제 또한 증험할 수 없으니, 천도(天道)라는 것은 그래서 알 수 없으나 어찌 또한 이 백성이 모두 복록(福祿)이 없어서 지극한 정치의 은택을 입을 만하지 못하겠는가? 아아! 슬프다. 처음에 왕대비(王大妃)께서 익종께서 옥수(玉樹)를 주시는 꿈을 꾸시고 왕이 정해년062) 7월 18일에 창경궁(昌慶宮)경춘전(景春殿)에서 탄강하셨는데, 그때에 학(鶴)이 떼 지어 전상(殿上)을 돌며 날다가 높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다 우러러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왕은 나면서 성질(聖質)이 있어 수세(數歲)에 주흥사(周興嗣)《천자문(千字文)》 중에서 1백여 자를 아셨는데, 익종께서 다른 글에서 꺼내어 시험하시면 곧 아는 자를 가리키시니, 익종께서 그 총명하고 영리하신 것을 매우 특별히 사랑하셨다. 병풍에 그려 있는 인물을 보고 좌우에게 ‘그림 가운데에 있는 아이를 누르지 말라. 아이가 아플까 염려된다.’ 하셨으니, 천성인 인애(仁愛)가 이미 어렸을 때에 나타나셨다. 경인년063) 5월에 익종께서 저위(儲位)에 계시다가 승하하셨는데, 왕이 이때에 4세이었으나 빈전(殯殿)의 곡성(哭聲)을 듣고는 곧 유희(遊嬉)를 그치고 부복하여 소리 내어 울며 ‘나도 고운 옷을 입고 싶지 않다.’ 하셨다. 이 해 9월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셨는데, 양전(兩殿)께서 대례(大禮)가 이루어진 것을 아름답게 여겨 과일을 내리셨으나 받고서 눈물을 흘리시니, 순종(純宗)께서 낯빛에 나타내어 슬퍼하셨다. 임진년(壬辰年)064) 에 빈객(賓客)과의 상견례(相見禮)를 행하고 비로소 강연(講筵)을 열었는데, 몇 번 읽으면 곧 외고 문의(文義)를 풀이하는 것이 환하여 익히 아시는 듯하였다. 갑오년065)순종(純宗)께서 빈천(賓天)066) 하시고서 승지(承旨)가 대보(大寶)를 받들어 전하니, 왕이 곡(哭)을 거두고 함(函)을 열어 살펴본 뒤에 공손히 받으셨다. 왕이 이때 8세이었으나 큰일에 임하여 밝고 삼가시는 것이 이미 이러하였다. 왕이 즉위하여 황고(皇考)를 익종으로 추존(追尊)하고 순종비(純宗妃) 김씨를 대왕 대비로 높이고 모비(母妃)를 왕대비로 높이셨다. 대왕 대비께서 수렴(垂簾)하고 정사를 같이 들으셨는데, 왕이 일마다 따르고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셨다. 청사(淸使)가 왕이 주선하시는 것이 예에 맞는 것을 보고 서로 돌아보며 놀라워하고 축하하였다. 3년 동안의 상중에 곡읍(哭泣)하는 슬픔이 성인(成人)과 같으셨다.

신축년067) 에 대왕 대비께서 철렴(撤簾)하실 때 왕에게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어진이를 가까이하며 선왕의 가법(家法)을 지킬 것을 권면(勸勉)하시니, 왕이 비로소 정사를 친히 보살피되 능히 그 뜻을 받아서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살펴 대신(大臣)·경재(卿宰)에게 명하여 청백리(淸白吏)와 청렴하고 현명한 문관(文官)·무관(武官)을 천거하게 하고 치적(治績)이 있는 자를 아뢰면 글을 내리고 벼슬을 올려서 포상(褒賞)하고 면려(勉勵)하셨다. 또, 제도(諸道)를 시켜 경학(經學)에 밝고 행검이 있으며 무기(武技)가 있는 자를 특별히 천거하고 초야의 인재를 거두어 천거하게 하여 소원(疏遠)한 자도 버려두지 않으셨다. 해민(海民)이 전복을 따는 것은 여름철이 더욱 어려우므로 6,7월의 진공(進供)을 멈추라고 명하셨다. 하교하기를, ‘검약(儉約)으로 나라를 다스리려면 자신이 먼저 해야 한다.’ 하시고 영남(嶺南)에서 공납(貢納)하는 인삼(人蔘)과 관서(關西)·관북(關北)에서 공납하는 녹용(鹿茸)과 내국(內局)068) ·상방(尙方)069) 에서 해마다 연경(燕京)에 가서 사오는 것을 줄이셨다. 을사년070) 에 청북(淸北)에 큰 물이 가서 백성의 전토(田土)와 집이 가라앉고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왕이 크게 놀라고 근심하여 어사(御史)를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안무(安撫)하게 하되 사지(辭旨)가 측달(惻怛)하셨고, 무릇 무너지고 해진 것을 보수하고 시체를 건지며 굶주림을 구제하는 방책을 상세하게 두루 갖추었다. 이어서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조세를 줄이며 내탕(內帑)의 재물을 내어 곡식을 옮겨 보내며 물가에서 제사하여 여귀(厲鬼)가 되지 않게 하며, 어루만져 편안히 살게 하는 것을 게을리한 수령(守令)을 빨리 내치시니, 백성이 드디어 예전처럼 안정하여 살고 그 재해를 잊을 수 있었다. 가뭄을 당하여서는 여러번 대신(大臣)을 불러들여 근심을 낯빛에 나타내고 밤에 법복(法服)을 입고 분향(焚香)하며 몸소 후원(後苑)에서 기도하셨다. 내사(內司)와 제궁방(諸宮房)의 어전(漁箭)·염전(鹽田)·둑·보가 있는 곳에서 마음대로 적호(籍戶)를 빼어 피해가 가난한 집에 미치는 것을 일체 금단하도록 법령으로 정하셨다.

관찰사·유수(留守)인 신하에게 명하여 각각 백성의 고통을 갖추어 조목조목 벌여 적어서 아뢰게 하고 묘당(廟堂)에서 그 편부(便否)를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셨다. 총위영(總衛營)을 처음 설치할 때에 군교(軍校)가 여리(閭里)에서 횡행할 염려가 있었으나, 법관(法官)에게 신칙(申飭)하여 죄에 걸리면 용서하지 말고 그 중에서 가장 불량한 자를 뽑아 뭇사람에게 조리돌리고 절도(絶島)에 유배(流配)하게 하여 그 나머지를 징계하였다. 환시(宦寺)를 멀리하여 추주(趨走)하며 심부름에 종사하게 할 뿐이고 낯빛이나 말씀을 너그럽게 보이신 적이 없었다. 더욱이 서옥(庶獄)을 삼가서 혹 죄가 없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세라 염려하고 나라에 사유(赦宥)가 있으면 친히 녹안(錄案)을 살피고 반드시 그 경중을 살펴서 소결(疏決)하되 오직 장리(贓吏)는 사유하시지 않았다. 관리로서 규간(規諫)하여 아뢰는 것이 없는 것을 책망하고 전선(銓選)에 관절(關節)이 통하지 않도록 경계하셨다. 과거(科擧)가 공정하지 않은 것을 늘 걱정하여 전후에 칙유(飭諭)하신 것이 매우 부지런하였고 기유년071) 봄에 엄한 분부를 내려 범한 자가 있으면 시관(試官)은 임금의 말을 불신(不信)한 율(律)을 시행하고 유생(儒生)은 그 부형을 죄주게 하셨다. 그래서 유사(有司)가 두려워하여 감히 사정(私情)에 따르지 못하니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과시(科試)를 한 번 겪을 때마다 문득 인심의 불평을 가져왔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겠지?’ 하셨다. 능히 인사(禋祀)를 공경히 하여 몸소 태묘(太廟)에서 제사하되 절하고 꿇어않고 오르내릴 때에 삼가고 조심하시는 것이 정성스럽고 전일(專一)하여 성심(誠心)이 뚜렷이 있어 어렴풋이 그 자리에 뵈는 듯한 뜻이 있었으므로, 모든 직위에 있는 자가 매우 분주하여 공경하여 예의에 어그러지는 것이 없었다. 능원(陵園)에서 시절(時節)에 따라 제사할 때에는 제사에 쓰고 남은 음식을 반드시 드디어 맛보셨다. 수릉(綏陵)의 풍수(風水)가 맞지 않는 것을 늘 근심하여 친히 택조(宅兆)072) 를 살펴 용마봉(龍馬峯) 아래에 길지(吉地)를 잡으시고 병오년073) 윤5월에 옮겨 모시는 예를 행하였는데, 장구(葬具)를 갖추고 광중(壙中)을 마련할 때에 몸소 감독하여 반드시 성신(誠信)을 다하고 계찬(啓欑)074) 하는 날부터 복토(復土)할 때까지 미음과 죽을 드시고 불안하여 어쩔 줄 모르며 곡(哭)하여 기가 막혀서 소리를 내지 못하시기에 이르니, 시종(侍從)한 신하들이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때 의조(儀曹)075) 에서는 계축년076) 의 고제(故制)에 따라 대왕 대비께서 천담복(淺淡服)을 입으셔야 한다 하였으나, 왕이 대왕 대비께서 이미 경인년에 장자(長子)를 위한 삼년복(三年服)을 입으셨으면 삼년복을 입어야 할 사람은 개장(改葬) 때에 시마복(緦麻服)을 입어야 하므로 이것은 계축년과 다르다 하여 다시 문의하게 하셨다. 그래서 대신(大臣)·유신(儒臣)이 《의례(儀禮)》의 개장에는 시마복을 입는다는 글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疏)를 인용하여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도 같다 하였으면 어머니도 아버지에 따르는 것을 알 만하다 하여, 드디어 시마복으로 고쳐 정하여 방례(邦禮)에 유감이 없었다.

순종·익종의 어용(御容)을 처음에는 경우궁(景祐宮)성일헌(誠一軒)에 모셨는데, 왕이 아침 저녁으로 우러러뵈어 가까이하기가 어렵다 하여 선원전(璿源殿)에 양실(兩室)를 더 증설(增設)하여 옮겨 모시고 삭망(朔望)과 탄신(誕辰)에는 반드시 일찍이 가서 전배(展拜)하되 큰 비나 눈이 내리지 않으면 그만두신 적이 없었다. 정종·순종·익종 삼조(三朝)의 보감(寶鑑)을 편찬하라고 명하여 판본(版本)이 완성되니, 친히 태묘에 올려 선지(先志)를 계술(繼述)하여 감법(監法)으로 삼으셨다. 신축년077) 에 대왕 대비께 존호(尊號)를 올려 7년 동안 수렴 청정(垂簾聽政)하신 교화를 밝히셨다. 무신년078) 에 대왕 대비께서 육순(六旬)이 되시고 왕대비께서 망오(望五)가 되시는 해이므로 순종·익종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고 대왕 대비·왕대비께 존호를 가상(加上)하셨다. 이때 왕대비께서 사제(私制)가 있으므로 이튿날에 대왕 대비께 찬선(饌膳)을 바치고 축하하셨다. 이듬해 회갑이 되신 날에도 잔을 올려 축수하셨다. 왕이 어린 나이에 친상(親喪)을 당하였으므로 늘 선왕의 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매우 마음 아프게 여겨 그때에 섬긴 신하에게 늘 물으셨는데, ‘진전(眞殿)에 모신 수용(睟容)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龍顔)에 미치지 못합니다.’고 대답한 사람이 있으므로, 왕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 늘 익종의 어제(御製)를 안상(案上)에 받들어 두고 늘 공손히 읽으시고 말이 경인년의 일에 미치면 문득 얼굴을 가리고 목메어 우셨다. 왕대비를 섬기는 데에는 더욱이 충양(忠養)을 다하시어, 계시는 전(殿)은 늘 서로 가깝게 하게 하고 번번이 파조(罷朝)하면 곧 들어가 모시고 앉아 차마 잠시도 옆을 떠나지 못하셨다. 찬선을 자전(慈殿)께서 친히 살피시면 매우 입에 맞으시고, 정섭(靜攝)하시면 반드시 자전께서 와서 보살피셔야 편안하시어, 지극한 정으로 깊이 사랑하는 것이 늘 어린아이와 같으셨으니, 왕의 큰 효성은 참으로 종신토록 사모하는 것이었다.

왕은 단엄(端嚴)하고 정직(正直)하셨다. 날이 밝기 전에 세수하였으며, 피로하고 권태로워도 몸을 기우듬이 기대지 않고 낮에는 누운 적이 없었다. 한가히 쉴 때에도 의관을 갖추지 않고서는 조정의 신하를 만나지 않으셨으며, 대점(大漸)079) 때까지 한결같았다. 뇌우(雷雨)를 당하면 반드시 경계하고 두렵게 여겨 주무시다가도 문득 일어나셨다. 정사를 청단(聽斷)의 여가에는 늘 책을 대하여 밤이 깊기에 이르고 평소에 실속을 힘쓰는 것을 스스로 힘쓰셨다. 늘 하간헌왕(河間獻王)080) 의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을 사랑하여 써서 좌우(座右)에 걸어 두어 경계하고 반성하는 뜻을 붙이셨다. 성품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곤의(袞衣)가 아니면 무늬가 있거나 수놓은 옷을 입지 않으시고 상복(常服)은 무명이나 모시 옷에 지나지 않았으며 상선(常膳)은 두세 그릇에 그쳤다. 자전께서 일찍이 그 박하고 간략한 것이 너무 심한 것을 말씀하시니, 대답하기를, ‘좋지 않은 옷은 덕을 기르는 방법이고 간소(簡素)한 음식은 수(壽)를 더하는 방법입니다.’ 하셨고, 늘 영묘(英廟)의 검소하신 덕을 탄복하여 그 아름다움을 따르려 생각하셨다. 궁실(宮室)에 단청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소박한 것을 좋아하니 아로새기거나 그림 그릴 필요가 없다.’ 하셨으며, 쓰시는 기구도 고아(古雅)한 것을 취하실 뿐이고 금옥(金玉)으로 꾸민 것이 없었다. 뭇 신하를 대하여는 사기(辭氣)가 온순(溫醇)하시니 총광(寵光)에 훈자(薰炙)된 자들은 유연(油然)히 따뜻한 봄날의 햇볕 가운데에 있는 듯하였다. 굳건하기를 스스로 힘쓰고 일에 임하여 과단하시어 무릇 해야할 일은 망설이지 않았고 작은 일에 이르러서도 백성에게 해로운 것을 알면 조금도 구습을 따르지 않으셨다. 신명(神明)한 것이 마음 안에 쌓여 있어 기미(幾微)에 밝으시므로 중외(中外)의 신하들의 현부(賢否)·득실(得失)을 분명하게 아시나, 만물을 포용하는 덕이 깊고 아름다워 산숲처럼 헤아릴 수 없었다. 무릇 한 번 듣고 한 번 보신 것은 10년 뒤에도 다 남김없이 기억하시어, 허다한 좌사(左史)의 기주(記注)같은 것도 일 때문에 근거를 대면 자기 말을 외듯하셨고, 큰 사전(祀典)·조련(操練)하는 법도의 지극히 번다하고 세밀하여 장고(掌故)들의 잘 알지 못하는 것도 불로 비추어 셈하듯이 하셨다.

무경(武經)의 《육도(六韜)》·《삼략(三略)》과 의방(醫方)의 《본초(本草)》와 상위(象緯)의 《선기옥형(璇璣玉衡)》 같은 것을 모두 정통하셨다. 평소에 서화(書畵)를 사랑하여 고금의 명가(名家)의 유필(遺筆)을 다 내부(內府)에 모아 두시고, 금석(金石)의 유문(遺文)을 고거(考據)하여 사전(史傳)에 누락된 것을 보정(補訂)하셨는데 전문하는 숙학(宿學)일지라도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시문(詩文)에는 신묘한 운치(韻致)가 고상(高尙)하여 옛것을 본받으셨는데 《원헌집(元軒集)》 네 권이 있으며,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있어서도 그 오묘한 데에 이르셨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드물게 하셨으나 쏘면 반드시 맞히셨다. 이것은 다 타고나신 뛰어난 자질의 여사(餘事)이어서 아는 것이 만물에 미쳐 무릇 어디에 응하던지 곡당(曲當)한 묘리를 더욱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경사(經史)를 읽으면 반드시 의리를 연구하고 시비를 분석하신, 명예(明睿)가 살피신 바는 본말(本末)을 관철하셨다. 일찍이 당 현종(唐玄宗)의 얼굴은 여위고 천하는 살쪘다는 것을 논하여 ‘현종은 실로 간언(諫言)을 싫어하는 임금이다. 간언을 싫어하여 여위게 된 것이니, 어찌 순(舜)이 천근(淺近)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고 우(禹)가 바른 말을 절하고 받아들인 것과 같겠는가?’ 하시고, 한문제(漢文帝)가 전곡(錢穀)·결옥(決獄)을 물은 일을 논하여 ‘진평(陳平)의 변언(辯言)을 기뻐할 만하나 주발(周勃)의 눌언(訥言)이 믿을 만한 것만 못하다.’ 하시고, 사마광(司馬光)을 논하여 ‘사람들은 혹 사마광은 진(晉)의 후예이고 진은 위(魏)의 정통을 이었으므로 위(魏)로서 제(帝)를 삼은 것이라고 말하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촉한(蜀漢)으로서 제(帝)를 삼더라도 진이 정통이 되는 것은 본디 변함이 없다. 《통감(通鑑)》이 잘못된 것은 다만 식견이 부족한 것이고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하셨다. 광무제(光武帝)가 명철한데도 도참(圖讖)에 속은 것을 애석히 여기고 환제(桓帝)가 선(善)을 알고도 채용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셨다.

치국(治國)을 말하면 기강을 근본으로 삼고 절용(節用)을 말하면 검소한 것을 숭상하는 일을 앞세우셨다. 또 말하기를 ‘학문은 치지(致知)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기는 하나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 하셨다. 육지(陸贄)의 주의(奏議)와 소식(蘇軾)의 문장을 가장 좋아하여 점검하여 구독(句讀)를 정하게 하였고 더욱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경세(經世)의 전적(典籍)으로 여기셨으므로, 편찮으실 때에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내 병이 조금 나으면 이 세 서적을 읽을 것이다.’ 하셨다. 옥음(玉音)이 아직 귀에 들리는 듯한데 말명(末命)이 문득 나타났으니 아아! 슬프다. 왕의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은 구구한 문자로서는 그 만분의 일도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천지의 도(道)도 한 마디 말로 다할 수 있는 것이고 보면, 자사(子思)가 이른바 ‘오직 천하의 지성(至聖)이라야 능히 총명예지(聰明睿知)하여 아래에 임할 만하고, 관유온유(寬裕溫柔)하여 뭇사람을 용납할 만하며, 발강강의(發强剛毅)하여 결단할 만하고, 제장중정(齊莊中正)하여 공경할 만하며, 문리밀찰(文理密察)하여 분별할 만하다.’한 것은 이 다섯 가지로 왕의 순일(純一)한 덕을 나타내면 혹 근사(近似)할 것이다. 아아! 경인년의 슬픔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으랴마는 의지하여 믿은 것은 왕의 그때에 약간척(若干尺)의 옷081) 을 입으셨기 때문이며, 갑오년의 대상(大喪) 때에 온 나라가 동요하였으나 유지하여 안정된 것은 또한 왕이 부모처럼 임하셨기 때문이다. 아아! 오늘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가라졌으니. 백성은 어찌하는가? 요(堯) 순(舜)같은 성인으로서 이 백성을 요순의 백성처럼 만들지 못하신 것은 또한 기수(氣數)가 그렇게 한 것인가? 생각하건대, 왕이 종사(宗社)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여 밤낮으로 한결같이 염려하신 것이 위로 하늘을 감동시켜 성인이 즉위하고 대명(大命)을 이어서 우리 나라의 억만년 큰 기업(基業)이 다시 태산(泰山)·반석(磐石)처럼 편안하게 된다면 실로 왕의 정성이 이를 열어 준 것이다. 아아! 거룩하시도다."

하였다. 【병조 판서 윤정현(尹定鉉)이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539면
  • 【분류】
    왕실(王室)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55]
    계묘년 : 1843 헌종 9년.
  • [註 056]
    기유년 : 1849 헌종 15년.
  • [註 057]
    예척(禮陟) : 승하.
  • [註 058]
    동영이장(同塋異藏) : 묘역(墓域)을 같이하고 무덤을 달리함.
  • [註 059]
    교모의금(絞冒衣衾) : 베로 만들어 주검을 묶고 싸고 입히고 덮는 것.
  • [註 060]
    오신(五辰) : 사시(四時)와 토용(土用). 토기(土氣)가 왕성할 때. 한 해에 네 번 있으나 특히 여름의 토용, 즉 소서(小署) 13일 뒤부터 입추(立秋)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
  • [註 061]
    역복(歷服) : 역수(歷數)와 오복(五服). 역수는 임금이 천명(天命)을 받아 즉위하는 운수. 오복은 왕기(王畿)로부터 밖으로 나가면서 다섯으로 구분한 지역, 즉 왕기 5백리 사방을 전복(甸服), 그 밖으로 나가면서 5백리 사방을 각각 후복(候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이라 한다. 복속한 전 국토를 말하는 것.
  • [註 062]
    정해년 : 1827 순조 27년.
  • [註 063]
    경인년 : 1830 순조 30년.
  • [註 064]
    임진년(壬辰年) : 1832 순조 32년.
  • [註 065]
    갑오년 : 1834 순조 34년.
  • [註 066]
    빈천(賓天) : 승하.
  • [註 067]
    신축년 : 1841 헌종 7년.
  • [註 068]
    내국(內局) : 내의원(內醫院).
  • [註 069]
    상방(尙方) : 상의원(尙依院).
  • [註 070]
    을사년 : 1845 헌종 11년.
  • [註 071]
    기유년 : 1849 헌종 15년.
  • [註 072]
    택조(宅兆) : 묘지.
  • [註 073]
    병오년 : 1846 헌종 12년.
  • [註 074]
    계찬(啓欑) : 발인하기 위하여 빈전(賓殿)을 엶.
  • [註 075]
    의조(儀曹) : 예조(禮曹).
  • [註 076]
    계축년 : 1673 현종 14년.
  • [註 077]
    신축년 : 1841 헌종 7년.
  • [註 078]
    무신년 : 1848 헌종 14년.
  • [註 079]
    대점(大漸) : 병이 위독하여 짐.
  • [註 080]
    하간헌왕(河間獻王) :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덕(德). 하간(夏間) 땅에 봉(封)해졌음으로 하간헌왕이라 한 것임. 학문을 좋아하여 선진(先秦)의 많은 책을 수장(收藏)하였음.
  • [註 081]
    약간척(若干尺)의 옷 :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의 "누가 천자(天子)의 나이를 물으면, 대답하기를, ‘들으니 비로소 옷 약간척을 입는다[始服衣若干尺矣]’고 한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여기서는 경종(景宗)의 나이가 어림을 표현한 것임.

○誌文:

於戲! 洪惟我大行大王姓李氏, 諱, 字文應, 翼宗孝明大王之子, 純宗成孝大王之孫。 母妃趙氏, 豐恩府院君 忠敬公 萬永女。 妃孝顯王后 金氏, 永興府院君 祖根女, 癸卯薨。 繼妃 洪氏益豐府院君 在龍女。 王, 以己酉五月十三日有疾不豫, 六月初六日壬申, 禮陟于昌德宮之正寢, 壽二十三。 擧國奔走雨泣, 婦孺無知, 叫擗哀慕, 皆曰 ‘天乎’ 衆心波沸, 若不保時日。 我大王大妃殿下, 念 宗社付托之至重, 從天命人心之所歸, 奉迎我嗣王殿下入紹大統, 與小大臣, 議王功德, 謹上諡曰, 經文緯武明仁哲孝, 廟號曰憲宗。 以是年十月二十八日壬辰, 葬王于健元陵西岡向卯之原, 與孝顯后陵同塋異藏。 大王大妃體王平日雅志, 在於節用愛民, 絞冒衣衾。 皆出諸宮中, 而殯葬之需, 不煩民力焉。 嗣王殿下, 以臣定鉉, 嘗叨侍帷幄。 命臣以幽宮之誌, 辭謝不獲命, 臣竊惟天命有德, 君師下民, 必厚其福祿, 降以遐壽, 使其積累悠久, 亭毓涵漬, 措斯民於雍熙大猷之域, 考古之爲君, 罔不是孚, 則天道之必然也。 肆我正宗大王聖德神功, 侔擬天地, 巍蕩煥爀, 民無能名焉, 純宗大王, 久道化成, 深仁厚澤, 浹人肌髓, 沒世不能忘焉。 翼宗大王, 贊化篤慶, 基命宥密, 所以啓佑我後人, 深且遠矣。 式至于我大行大王, 以三宗正體, 沖齡嗣服, 躬欽明濬哲之姿, 繼重熙累洽之治, 顯承謨烈, 嚴恭寅畏, 凡所以治人事天之方, 靡不畢擧。 臨御十有五年, 朝野淸明, 風雨順序, 歲比登稔, 民不飢寒。 時春秋鼎盛, 日月方長, 將運萬化而拊五辰, 長駕遠馭, 大造群生, 肯搆我祖考作室, 誕撫我無疆大曆服, 上之所自期然也, 臣民之所蘄望如此也, 夫孰知大業未半, 中途厭世, 遽使含生之倫, 如喪考妣也乎? 嗚呼! 慟哉。 有其德矣而嗇其壽, 傳所云德必得壽者非耶? 王有其志矣, 而末究其施, 紀所云 ‘有志竟成’ 者非耶? 三聖朝之仁之德, 宜其克昌厥後, 而今亦無得而徵焉, 所謂天道於是乎不可知矣, 而豈亦斯民者, 擧皆無祿, 不足蒙至治之澤也歟? 嗚呼! 慟哉。 始王大妃夢翼宗, 授以玉樹, 王以丁亥七月十八日, 誕降于昌慶宮景春殿, 時有群鶴, 盤旋飛繞於殿上, 高入雲霄, 人皆仰見而異之。 王, 生有聖質, 數歲通周興嗣 《千文》百餘字, 翼宗拈他書試之, 輒指所知字, 翼宗喜其聰悟, 大奇愛之。 見屛畫人物, 謂左右曰 ‘毋壓畫中兒, 恐兒疼矣,’ 天性仁愛, 已著於幼時。 庚寅五月翼宗在儲位昇遐, 王時四歲也, 聞殯殿哭聲, 輒止遊嬉, 俯伏號泣曰, ‘吾不欲着華服。’ 是年九月, 冊封爲王世孫, 兩殿嘉大禮之成, 賜以果受而下淚, 純宗爲之動容悲哀。 壬辰, 行賓客相見禮, 始開講筵, 讀數遍, 輒成誦, 演文義渙然若宿解。 甲午, 純宗賓天, 承旨奉傳大寶, 王, 撤哭啓凾, 審視而後敬受。 王時八歲也, 臨大事明愼已如此。 王卽位, 追尊皇考爲翼宗, 尊純宗妃 金氏爲大王大妃, 母妃爲王大妃。 大王大妃垂簾同聽政, 王事事承順, 必稟而後行。 淸使見王周旋中禮, 相顧聳賀。 三年諒闇, 哭泣之哀, 如成人焉。 辛丑, 大王大妃撤簾, 勉王以敬天愛民, 勤學親賢, 守先王家法, 王, 始親政事, 式克欽承監于祖宗成憲, 命大臣卿宰, 薦淸白吏及文、蔭、武官、廉明者, 而有治績登聞, 則賜書增秩而褒勉之。 又令諸道, 別薦經行武技, 收擧草萊人才, 不遺踈遠。 軫海民採鰒, 夏時尤艱, 命停六七月進供。 敎曰, ‘爲國以儉, 當以身先減,’ 嶺南貢蔘, 關西北貢鹿茸及內局尙方, 每歲燕貿。 乙巳淸北諸邑大水, 民田舍墊溺而渰死者甚衆, 王, 大驚憂, 遣御史慰諭安撫, 辭旨惻怛, 凡修頹補弊拯死賑飢之策, 纖悉周備。 繼以輕徭減稅, 發帑移粟, 設祭水濱, 俾勿爲厲, 亟黜守宰之怠於撫綏者, 民遂得奠居如故, 忘其爲菑。 遇旱, 屢召大臣, 憂形于色, 夜御法服, 焚香躬禱于後苑。 以內司及諸宮魚鹽堰、洑所在, 擅拔糴戶, 害及窮蔀, 一切禁斷。 著爲令命, 觀察居留之臣, 各具民隱, 條列以聞, 廟堂議其便否而施行之。 總衛營之始設, 慮有軍校橫於閭里, 飭法官麗於罪勿貸, 取其尤無良者, 徇於衆流之絶島, 以徵其餘。 屛遠宦寺, 趨走伏使而已, 未嘗假以色辭。 尤愼庶獄, 恐或有一夫之非辜, 國有赦則親閱錄案, 必審其輕重而疏決之, 惟贓吏不宥焉。 責官師之無所規陳, 戒銓選以勿通關節。 常患科擧之不公, 前後飭諭甚勤, 己酉春, 下嚴旨, 如有犯者, 試官施以不信王言之律, 儒生罪其父兄。 於是有司震讋, 莫敢徇私。 謂筵臣曰, ‘每一經科試, 輒致人心之不平, 今庶其不然乎?’ 克敬禋祀, 躬祼太廟, 拜跪登降, 齊邀洞屬, 誠心著存, 僾然有見乎其位之思, 凡百在位, 駿奔肅恭, 禮儀無愆。 陵園時節之享, 籩實之餕, 必進而嘗之。 常憂綏陵風水之未叶, 親相宅兆, 卜吉于龍馬峰下, 以丙午閏五月, 行遷奉之禮, 庀廞具治方中, 躬親董飭, 必誠必信, 自啓欑之日及復土之時, 惟進糜粥, 皇皇瞿瞿, 哭而結轖, 至不能成聲, 侍從諸臣, 感激掩涕, 莫能仰視。 時儀曹, 因癸丑故制, 大王大妃當服淺淡, 王, 以大王大妃, 旣於庚寅服長子三年, 則應服三年者, 改葬服緦, 此與癸丑有異, 更令詢議。 於是大臣儒臣, 俱援《儀禮》, 改葬緦賈公彦疏, 父爲長子亦同云, 則母統於父可知, 遂改定以緦服, 而邦禮無憾。 純宗翼宗御容, 初奉於景祐宮誠一軒, 王, 以朝夕瞻依之難, 增兩室於璿源殿而移奉之, 朔望與誕辰, 必早詣展拜, 非大雨雪, 未之或廢。 命纂正宗純宗翼宗三朝寶鑑, 剞劂告成, 親上于太廟, 以繼述先志而爲監法焉。 辛丑, 上號于大王大妃, 以闡七載簾幃之化。 戊申, 大王大妃六旬, 王大妃望五之年, 追上徽號於 純宗翼宗, 加上尊號於大王大妃、王大妃。 時王大妃有私制, 翌日進饌, 稱賀于大王大妃。 明年周甲之辰, 亦奉觴上壽。 王, 沖年違背, 常以不記先王御容, 爲至痛, 每問於逮事之臣, 有對曰, ‘眞殿所奉睟容, 猶未及殿下龍顔之克肖矣。’ 王, 對鏡泫然。 常奉翼宗御製於案上, 無時敬讀, 語及庚寅, 輒掩抑嗚咽。 事王大妃尤盡忠養, 所御殿, 常令相近, 每罷朝, 卽入而侍坐, 不忍須臾離側。 饌膳有慈殿親檢, 則甚適靜攝, 必慈殿臨視, 乃爲安, 至情深愛, 常如孺子, 王之大孝, 眞終身慕者矣。 王端嚴正直, 未明盥漱, 雖勞倦, 體無跛倚, 晝未常臥。 雖燕涓, 非衣冠不見廷臣, 至大漸, 如一日。 遇雷雨必警惕, 在寢輒起。 聽斷之暇, 常對方冊, 至于夜深, 平居以懋實自勉。 常愛河間獻王實事求是之語, 書揭座右, 以寓警省。 性不喜奢華, 非袞衣, 不御紋繡, 常服不逾棉苧, 常膳止於數三器。 慈殿嘗言其薄略已甚, 對曰 ‘菲衣, 所以養德, 淡食, 所以益壽。 常歎英廟儉德, 思趾其美。 爲宮室不施丹艧曰, ‘予喜樸素, 不須雕繪。’ 服御器用, 惟取古雅, 無金玉之飾。 對群臣辭氣溫醇, 薰炙寵光者, 油然如在陽春化日之中, 而乾健自疆, 臨事果決, 凡所當爲, 無所遲疑, 至微細也, 而知害於民, 則無或因循。 神明內蘊, 炳幾燭微, 中外臣僚賢否得失, 瞭然默識, 而含弘淵穆, 山藪莫量, 凡一聞而一見者, 雖十年之後, 輒皆記存無遺, 如左史記注之浩汗, 因事援據, 如誦已言, 大祀典、大朝會節文、儀制, 宿衛、陪扈、坐作、操練之度, 至繁至賾掌故之所不能詳者, 如燭照而數計。 武經《韜略》, 醫方《本草》, 象緯《璣衡》之類, 竝皆精通。 雅愛書畫, 古今名家, 畢集於內府, 考據金石遺文, 補訂史傳闕漏, 雖專門宿學, 莫能及焉。 爲詩文神解峻潔, 取法於古, 有《元軒集》四卷, 至於箋隷, 亦臻其奧。 罕御射而射必中, 此皆天縱之餘事。 而尤見其知周萬物泛應曲當之妙矣。 讀經史必硏窮義理, 剖析是非, 明睿所照, 貫徹本末。 嘗論 玄宗貌瘦天下肥曰, ‘玄宗, 實厭諫之主也。 厭諫而至於瘦, 豈若之好察邇言, 之拜昌言乎?’ 論 文帝錢穀決獄之問曰, ‘之辯, 雖可喜, 不如之訥, 爲可信也,’ 論司馬光曰, ‘人或言, 是之後, 而統, 故帝魏也, 此則不然。 雖帝蜀漢,之爲正統, 固自如也。 《通鑑》之誤, 只是識有不逮, 非出於私也。’ 惜光武之明, 而見欺於圖讖, 慨桓帝之知善, 而不能用。 語治國則以紀綱爲本, 語節用則以崇儉爲先。 又曰, ‘學雖貴於致知, 知而不行, 不如不知。’ 最好陸贄奏議, 蘇軾文章, 令點定句讀, 尤以《大學衍義》, 爲經世之典, 時値違豫, 敎筵臣曰, ‘吾病有間, 將讀此三書矣。’ 玉音在耳, 而末命遽揚, 嗚呼! 慟哉。 王之盛德至善, 非區區文字所能摹畫其萬一, 而天地之道, 亦可一言盡也。 則子思所謂 ‘惟天下至聖,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强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 以是五者, 狀王之德之純, 其或庶幾 乎。 嗚呼! 庚寅之慟, 尙忍言哉? 而所依恃者, 王時衣若干尺也, 甲午大喪, 率土震蕩, 而所維持而奠安者, 亦王父母臨之爾。 嗚呼! 今日天崩而地坼矣, 民其奈何? 以之聖, 不能使斯民爲之民者, 抑亦氣數之使然歟? 惟王, 爲宗社爲生民蚤夜一念, 上格穹蒼, 聖人龍飛, 迓續景命, 我邦家萬億年丕丕基, 復底于泰山磐石之安, 則實王之精誠, 有以啓之也。 嗚呼! 盛哉。 【兵曹判書尹定鉉製。】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539면
  • 【분류】
    왕실(王室)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