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경 왕비가 내린 행록(行錄)
명경 왕비(明敬王妃)가 써서 내린 행록(行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경술년001) 6월 18일 신시(申時)에 탄생하였다. 그때 궁인(宮人)들이 매번 꿈속에 오색 구름 속에서 비룡(飛龍)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이어 수빈(綏嬪)이 임신하였는데 눈빛이 평상시보다 더욱 맑았고 신채(神彩)가 기이하였다. 이런 까닭에 전궁(殿宮)께서는 미리 큰 경사가 있을 것을 점칠 수 있었다. 탄생하기에 이르러서는 의표(儀表)가 뛰어나서 참으로 하늘이 내린 성인(聖人)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두 살 되던 해 동짓날에 부왕(父王)께서 나이를 한살 더 먹은 것을 기쁘게 여겨 먼저 역서(曆書)를 내렸다. 그때 마침 보모(保母)가 안고 있었는데 서병(書屛)을 마주보고 역서를 펴보다가 서병의 글자 가운데 같은 글자를 비교하여 보고서 손으로 가리키니,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칭송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조금 커서는 효도를 다하는 가운데 부왕(父王)을 경외(敬畏)하여 법도에 어긋나는 놀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부왕이 한번이라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는 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거스른 적이 없었으니, 이는 곧 자전(慈殿)과 자궁(慈宮)께서 칭도하신 것이고, 또한 일찍이 궁인들에게서 들은 것이다. 전궁을 섬김에 있어 전혀 사이를 느끼게 하는 것이 없는 가운데 효의 왕후(孝懿王后)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 따라 모시는 것이 보통보다 특이하였으므로 부왕께서 매양 흡족해 하였음은 물론 효성이 천성에 근본한 것이라는 하교를 하시면서 칭찬하고 기뻐하였다.
내가 궁궐로 들어와서 30여 년 동안 봉시(奉侍)하였는데 성도(性度)가 침착하고도 깊어서 헤아릴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평소 앉거나 눕거나 할 적에 혹시라도 몸 자세를 바르지 않게 한 적이 없었으며 아무도 없이 혼자 계신 때에도 궤좌(跪坐)하여 하루 종일이라도 희언(戱言)을 하지 않았으며 접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적에는 엄위(嚴威)한 자세를 지켰으므로 우러르면 늠연(凛然)하였으나 위의(威儀)는 자연스러웠다. 자전과 자궁에 대한 정성(定省)을 혹 몸소 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아침 저녁으로 환시(宦侍)를 보내어 반드시 안부를 받들어 묻게 하였다. 평소 자궁께서 침선(寢膳)을 잊고 주야로 애쓰시면서 보호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자애(慈愛)스러웠으니, 이것에 대해서는 다시 기술할 것이 뭐 있겠는가?
임오년002) 초상(初喪) 때에는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극진히 하였다. 대행 대왕께서는 자궁께서 마음속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으면 봉승(奉承)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예컨대, 진어(進御)하는 일에 있어 비록 진어하기 싫어도 수삼차 잇따라 송진(送進)하면 매양 맛보고 진어하였으며 진어하지 않고 그냥 되돌려 내어가게 한 적은 없었으니, 자궁의 뜻을 봉순(奉順)하는 마음이 독실하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는 궁중의 상하가 모두 찬탄(讚歎)하는 일인 것이다. 신사년003) ·임오년004) 두 해에 돌보아 감싸주는 은혜를 잃게 되자 마음이 텅비어 의지할 데가 없는 것 같았으며, 성복(成服)한 뒤 날짜가 오래 되었어도 수라(水剌)를 전혀 드시지 않았는데 드시기를 권할 적마다 스스로 먹을 수 없다는 것으로 하교하였다. 자궁께서 임어하시던 곳은 편리하고 가까운 것을 취택하여 정하였으니, 곧 대조전(大造殿) 남쪽의 양심합(養心閤)이었다. 홀로 서서 그곳을 바라볼 적에는 옥색(玉色)이 척연(慽然)하여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밖으로 선연히 드러났었는데, 이때에 우러러 바라볼 적에는 더욱 비통해 하여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우애(友愛)가 돈독하고도 지극하여 숙선 옹주(淑善翁主)를 옥체(玉體)와 똑같이 대하였고 출합(出閤)한 뒤에야 비로소 헤어져 불과 3일이었는데도 그리움이 맺혀 슬퍼하는 것이 마치 멀리 아주 떠나는 것과 같이 여겼다. 지금에 이르도록 만일 입궐(入闕)할 기약이 있으면 미리 초조하게 기다렸고 서로 만나면 기쁨이 천안(天顔)에 흘러 넘쳤으므로 이를 우러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흠탄(欽歎)과 감동을 자아내게 하였다.
하늘을 공경하여 두려운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침실(寢室)에 누워 있을 적에도 문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을 경우에는 아무리 찌는 듯한 더위일지라도 하늘이 보인다고 하여 문을 닫게 하였으며, 바람 불고 천둥 치고 비 오고 눈 올 때에는 말을 반드시 존경스럽게 하였고 천둥 번개 칠 적에는 공구(恐懼)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마주 잡고 단정히 앉아서 시각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천둥 번개가 그친 후에야 자리에 누웠다. 남면(南面)하는 임금의 존귀함이 있음에도 시서(詩書)를 연구하면서 날을 보내는 것을 마치 포의(布衣)005) 처럼 하였으며, 수라상의 찬선(饌膳)은 이상한 별미를 취하지 않았으므로 혹여 음식물이 좋지 않아서 진어하지 않는다는 하교를 받든 적이 없었다. 밥알이 땅에 떨어지면 반드시 버리지 않고 주웠는데, 이는 농사짓는 어려움을 늘 생각하고 있는 데서 나온 자연스런 거조였다. 더할 수 없이 검약(儉約)하여 의대(衣襨)는 화려한 무늬 놓은 비단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곤룡포(袞龍袍) 이외에는 목면(木綿)과 명주·모시뿐이었다. 근간에 무늬 놓은 비단을 자주 볼 수 있기에 연전(年前)에 옥색(玉色)의 무늬 있는 비단으로 배자(背子)와 요대(腰帶) 하나를 지어서 올렸더니,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교하고서는 한 번 입고 다시는 더 입지 않으셨다. 금침(衾枕)은 천의(薦衣) 하나와 목침(木枕) 하나로 오늘날까지 이르렀고, 기완(器玩)과 습물(什物)을 혹시라도 마음속에 두어본 적이 없으셨다.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경비(經費)를 아껴 존절(撙節)히 하였으므로 대내(大內)에서 상사(賞賜)할 일이 있어도 지나친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고, 긴요한 일이 아닌 경우에는 무단히 낭비한 적이 없었다. 혹 이차(移次)할 적에 거처할 곳이 좁고 깨끗하지 않아도 이를 다듬거나 확장한 적이 없었으며, 공역(工役) 일으키는 것을 줄여 크고 작은 일에 대해 민폐(民弊)가 미치는 것이면 몸소 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그런 일을 아뢰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이는 기록하지 않더라도 거조(擧條)가 환히 드러나 있다. 이것이 어찌 백성을 보살피는 지극한 덕의(德意)가 아니겠는가? 성지(聖志)가 지극히 공평하여 사정(私情)이 없었고 그지없이 인자(仁慈)하여 안팎이 한결같은 것이 순수한 천성(天性) 그대로였다. 사람을 대하는 언사(言辭)는 조금도 차별이 없었고 아무리 미천(微賤)한 사람일지라도 노인은 귀히 여기고 어린이는 사랑하였으며 대죄(大罪)가 아니면 관대하게 포용(包容)하였으며 하루살이 벌레에 이르기까지 산 것은 상해(傷害)하지 않았다. 성덕(聖德)이 이와 같은 것은 실로 상천(上天)이 밝게 굽어보고 신기(神祇)가 곁에 있어 큰 복과 큰 수명을 누리기를 축원하고 바랐는데 하늘이 어찌하여 차마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경인년006) 의 참독(慘毒)스런 화(禍)를 당하게 하고 거듭 정리상 차마 못할 지경을 겪게 함으로써 한때의 병환을 연유하여 지금의 춘추(春秋)로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차마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으며 이것이 무슨 천리(天理)이며, 이것이 무슨 인사(人事)이겠는가? 천지가 무너져 내리고 터져 나가는 슬픔을 당하여 날아가 흩어졌던 정신을 불러 모아 평일 지극히 인애(仁愛)로웠던 성대한 덕을 대강 가까스로 써내었으나 만에 하나도 제대로 형용해 내지 못하였다. 단지 하늘에 사무치는 슬픔만 더할 뿐이어서 오장(五臟)이 갈가리 찢기는 아픔뿐이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19면
-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001]경술년 : 1790 정조 14년.
- [註 002]
임오년 : 1822 순조 22년.- [註 003]
신사년 : 1821 순조 21년.- [註 004]
○明敬王妃, 書下行錄。
嗚呼! 大行大王, 庚戌六月十八日申時誕生。 其時宮人, 每夢見五雲中飛龍升天。 綏嬪有身, 而眼光比常時益淸, 神彩奇異。 是以, 殿宮預卜有大慶也。 及誕生, 日表岐嶷, 儘天縱之聖, 自孩提時, 聰明絶人, 二歲之至日, 父王嘉悅一齡之添, 先賜曆書。 時適抱在保母, 而對書屛披覽曆書, 較視書屛之同字而指之, 左右稱奇。 天性至孝, 而及稍長, 致孝之中, 敬畏父王, 非但無不恒之遊嬉, 父王一有所不欲爲, 則不復爲焉, 未嘗有違拂, 卽殿宮之所稱道也, 亦嘗聞之於宮人矣。 事殿宮無所間隔之中, 於孝懿王后, 自幼親隨之, 異於常, 父王每怡然, 敎以孝根天性, 嘉悅之。 自予入宮, 奉侍三十餘年, 性度沈深, 未嘗有可以度量。 平居坐臥, 罔或不正, 雖在幽獨之時, 跪坐而終日無戲言, 不與之接談, 則嚴威而仰之澟然, 威儀自然。 殿宮定省, 或未躬行, 朝夕遣宦侍, 承安否而止。 平日慈宮, 忘寢膳晝夜勞瘁, 保護至慈至愛, 復何述焉? 壬午初喪, 親撰祭文盡之。 而大行大王, 凡有慈心之所欲爲, 則靡不奉承。 如進御之節, 雖厭進, 而數三次連爲送進, 則每每嘗進, 未嘗不御而空還, 此非慈意奉順之篤, 能如是乎? 此宮中上下讃歎之事。 辛壬兩年, 失顧復之恩, 廓然如無所依, 成服後, 日久, 而水剌全不進御, 每勸進, 而以自不能食爲敎。 慈宮所御之處, 嘗取其便近, 卽大造殿之南養心閤也。 每獨立瞻望, 玉色慼然, 哀慕著顯, 伊時仰瞻, 尤切悲慟, 心焉如割。 友愛篤至, 於淑善視同玉體, 出閤後, 始爲分離, 不過爲三日, 而戀結怊悵, 如作遠離。 至于今如有入闕之期, 預爲企待, 相見而喜溢天顔, 使仰瞻者, 欽歎感動。 敬天寅畏, 臥于寢室之時, 戶若少開, 雖暴暑, 以其見天而令閉之, 風雷雨雪, 語必尊敬, 雷電時恐懼拱手, 端正坐立, 更皷雖深, 止後乃臥。 有南面之貴, 而以詩書度日, 如布衣水剌饌膳, 不取邪味, 未或承饌物, 不美不進之敎。 飯粒墮地, 必收而不遺, 念念乎稼穡艱難者, 出於自然。 至儉至約, 衣襨不取華麗之紋緞, 但袞袍外, 木綿紬苧而已。 近間紋緞頻見, 故年前以玉色有紋, 製進背子及一腰帶矣, 敎以不好, 一御而更不御。 衾枕則一薦衣一木枕, 至于今日, 器玩什物, 未嘗或留聖意, 遠奢崇儉有如是矣。 愛惜經費而撙節之, 自內雖有賞賜之事, 不及於濫, 非緊事則未嘗無端空費。 或移次所御, 雖樸陋狹窄, 未嘗拓之崇之, 少興工役, 凡大小事民弊所及, 不惟躬所不爲, 奏事而無不聽納, 此雖不記, 擧條昭然。 此豈非恤民德意之至乎? 聖志至公無私, 至慈至仁, 表裏如一, 以純然天性, 待人言辭無間, 雖微賤之人, 貴老慈幼, 非大罪, 包容寬大, 至於蜉蝣, 不傷生物。 聖德如此, 實上天照臨, 神祗在傍, 冀祝遐福大壽, 天胡忍斯? 俾當庚寅慘毒之禍, 荐經情理所不忍之境, 因由一時之患, 以今春秋至於斯, 尙忍言哉? 尙忍言哉, 此何天理, 此何人事? 當天地崩坼之慟, 收召飛越之精神, 僅寫大綱平日至仁盛德, 不能形容萬一。 只益窮天之慟, 五內崩裂而已。
- 【태백산사고본】 35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19면
-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