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이 내린 행록(行錄)
혜경궁이 내린 행록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임신년001) 9월 22일 축시에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했는데, 신미년 10월 경모궁(景慕宮)002) 꿈에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실로 들어왔다. 꿈을 깨고 나서는 꿈의 징조가 이상하다 하여 틀림없이 성자를 낳을 조짐이라 생각하고 새하얀 비단에다 용을 그려 벽에다 걸어두었는데 급기야 탄생하자 그 울음 소리가 마치 큰 쇠북소리 같아서 궁중이 다 놀랐었다. 비록 강보에 있지마는 기상이 의젓하고 우뚝한 콧날 용같이 생긴 얼굴에 모든 생김이 특이하여 영종 대왕이 보시고는 기뻐 칭찬하면서 내게 하교하시기를,
"네가 이런 아들을 낳았으니 종묘 사직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하였다. 그리고는 그 이마와 뒤통수가 꼭 당신을 닮았다고 늘 말씀하셨다. 인원(仁元)003) ·정성(貞聖)004) 두 성모(聖母)도 처음 보시고는 표정을 바꾸면서 타고난 바탕이 특이하다고 하고는, 어디 이렇게 비범할 줄이야 생각이나 했느냐고 하였다.
백일 이전에 섰고 일년도 채 못 되어서 걷기 시작했으며 돌 때는 돌상으로 걸어가서 맨 먼저 붓과 먹을 만지고 책을 펴 읽는 시늉을 하였으며 몸놀림이 근엄하여 그 어린 나이에 바탕이 특이한 것을 본 사람들 모두가 아연 실색을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는데 이미 그때부터 성학(聖學)이 탁월할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계유년 섣달 존호(尊號)를 올릴 때 경모궁과 내가 예(禮)를 행하려 하자 그때 돌 지난 지가 겨우 몇 달밖에 안 되었지만 도포 입고 신 신고서 모시고 서 있는 품이 엄전하기가 성인 같았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였고 백일이 되기 전에도 글자 같은 것을 보면 좋아하는 빛이어서 경모궁이 직접 첩책(帖冊)을 써서 주었는데 놀 때면 꼭 그것을 가지고 놀았기 때문에 결국 종이가 다 해지고 말았다. 또 좋아하는 것이 효자도(孝子圖)·성적도(聖蹟圖) 등이었으며, 공자(孔子)가 조두(俎豆) 차리던 일 또는 옛날 효자(孝子)들이 했던 일들을 늘 흉내내면서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었는데 그것을 보면 도학(道學)이나 효성을 하늘에서 타고났음을 알 수 있었다. 글씨 쓰기를 또 좋아하여 두 살 때 이미 글자 모양을 만들었고, 서너너덧 살 때는 필획(筆劃)이 이루어져 날마다 그것으로 장난을 삼았다. 그리고 대여섯 살 때 쓴 글씨로는 그것으로 병풍을 만든 사람도 있었다. 언서(諺書)에 있어서는 너댓 살 때 이미 다 알아 편지를 어른처럼 써내려갔었다. 세 살 때 보양관(輔養官)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선뜻 글을 읽고 글 뜻도 이해했으며 너댓 살 이후로는 그야말로 일취 월장하여 거의 남에게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었다.
천성이 검박하여 어려서부터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입은 옷이 더러워지고 해져도 싫어하지 않았으며, 놀이를 할 때도 가지고 놀기 좋은 물건을 취하지 않고 오직 질박한 것을 좋아하여 버리지 않고 오래 가지고 놀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재촉하여 세수하고 머리 빗고는 독서를 시작했는데, 나로서는 어린 나이에 혹 손상이라도 받을까 싶어 일찍 일어나지 말라고 경계하면 그는 등잔 그림자를 가리고서 세수하고 빗질을 하곤 하였다. 효성 또한 대단해서 영종 대왕·경모궁 그리고 나를 섬기면서 상대의 얼굴빛을 살펴가며 미리 마음을 알아차려 뜻을 받들고 털끝만큼도 교훈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혹시 양궁(兩宮) 사이에 무슨 좀 난처한 일이라도 있을라치면 곧 그 사이에 들어서 빈틈없이 주선을 하여 잘 풀린 일도 많았는데 그런 일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정축년에 두 번이나 국상이 났을 때는 다른 방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빈전(殯殿)과 거리가 멀지 않아 곡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그는 때로 사람 없는 곳에다가 제물 같은 것을 차려두고 전(奠)을 올리는 모습을 하였는데 그때 나이 아직 예를 차릴 때가 못 되어서 제전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생각이 거기에 미친 것을 보면 타고난 효성의 한 단면을 볼 수가 있다.
두 성모를 추모하여 죽도록 변함이 없었고, 정축·무인 두 해 겨울 영종 대왕이 앓아누웠을 때는 나이 겨우 대여섯 살이었지만 속태울 줄 알고 반드시 지성으로 문후를 하고 띠도 풀지 않고 곁을 떠나지 않고 할 때 그 숙성함에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영종 대왕이 자주 곁에 앉혀두고 늘 글을 읽어보라고 하고 그 뜻을 물으시면 하나하나 분석하여 아뢴 것이 모두가 사리에 딱딱 맞았고, 어쩌다가는 밤중에 인견(引見) 때 불러내어 글을 외우라고 하고 시험삼아 뜻을 캐물어보면 비록 잠을 자다가 나왔어도 조금도 틀림이 없어 영종 대왕께서, 총명 영특하고 슬기롭기가 남다르다고 늘 칭찬하셨다. 기묘년 3월에 책봉례를 정하여 그달에 효소전(孝昭殿)·휘령전(徽寧殿)을 참배하고 이어 진전(眞殿)을 배알한 다음 윤6월(閏六月)에 명정전(明政殿)에서 책봉을 받았는데, 예절 따라 움직이는 모습과 나아가고 물러가는 행동거지가 모두 법도에 맞아 영종 대왕이 퍽 가상히 여기고는 종묘 사직 만년의 경사라고 하셨다. 신사년 3월에 입학(入學)을 하고 관례(冠禮)를 올렸으며, 임오년 2월에 가례(嘉禮)를 올렸는데 그해 화변(禍變)이 있은 이후로는 너무 슬프고 마음 아프고 그리워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지극한 정 이외에는 오직 망극하고 망극할 뿐이었다. 그때 나와는 따로따로 있었는데 새벽마다 글을 보내 내가 탈이 없다는 소식을 안 후에야 비로소 아침을 들었으며, 내가 늘 위태롭고 두려움을 느끼고 병을 잘 앓았기 때문에 내 곁을 떠나 있으며 못 보는 것을 한으로 여겨 친히 약을 지어 보내면서 병세가 좀 감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라를 들곤 하였는데 그때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타고난 효성이 그렇게 지극했던 것이다.
나와 떨어진 후로는 선희궁(宣禧宮) 처소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낮이면 영종을 모시고 밤이면 선희궁을 위로하면서 밥 한 그릇 먹고 잠 한숨 자는데도 마음을 늘 놓지 않았으며 갑신년에 선희궁 병환이 위독하자 아버지 대신 효도한다는 뜻으로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급기야 상을 당하자 슬퍼하기를 임오년과 다름이 없이 했다. 병술년에 영종 대왕 환후가 위중하자 밤낮으로 애간장을 태우며 3달 동안 침식을 잊었는데 성상 체후가 결국 건강을 되찾으신 것도 사실은 그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대왕 대비전에 대하여는 더욱더 효성을 바쳤고 대왕 대비전 역시 지극히 사랑하셔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위로 여쭙고 아래로 묻고 하여 사랑과 효도가 간격이 없게 하는 것이 전고에 드물 정도였다. 그야말로 대왕 대비전의 그 높은 덕과 대행 대왕의 지극한 효성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리 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밖에도 평소에 하늘을 공경하는 지극한 정성이라든지 선왕을 받드는 법도 있는 행실, 전궁(殿宮)을 받드는 티없는 효성,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치를 배격하던 훌륭한 절도, 아껴쓰고 백성을 사랑하던 큰 덕 등등 다 쓰려면 한이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남의 귀와 눈에 훤히 있기에 외정(外廷)의 신하들이 보고 들은 대로 써서 만분의 일이라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어렸을 때 했던 일 외에 남들이 미처 모르고 있는 것만 대강 들어 적어본 것이다. 정신이 혼미하고 빠뜨린 것이 많아 더욱 망극하고 망극할 따름이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89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역사(歷史)
- [註 001]임신년 : 1752 영조 28년.
- [註 002]
○惠慶宮書下行錄。 大行大王壬申九月二十二日丑時, 誕降于昌慶宮之景春殿, 辛未十月, 景慕宮夢神龍抱珠入寢室。 旣覺, 以夢兆異常, 必爲誕聖之禎祥, 遂畫龍于白綾, 揭之壁上, 及誕生, 其泣喤喤, 聲若洪鐘, 宮中皆驚。 雖在襁褓, 氣象岐嶷, 隆準龍顔, 體狀特異, 英宗大王見之嘉悅, 稱讃敎余曰: "汝得此兒, 宗社有何憂乎?" 每稱額上䐉後之酷肖也。 仁元、貞聖兩聖母, 始見動色, 稱其天質之卓異, 曰豈意若是其非凡也。 百日前能立, 未週歲而步, 及晬, 步詣晬盤, 先撫筆墨, 展書而讀之, 動止儼然, 人見其沖年異質, 無不失色驚歎, 聖學之卓越, 已兆于此矣。 癸酉臘月上尊號時, 景慕宮曁余將行禮, 是時過晬纔數朔, 而御袍靴侍立, 儼如成人。 自幼好書, 在百日前, 見文字則欣然有喜色, 景慕宮親寫帖冊以賜之, 每嬉游, 必携持焉, 至於紙敝。 又喜觀孝子圖、聖蹟圖, 常效孔子設俎豆之儀, 及古孝子行蹟, 以爲樂斯, 亦可知道學誠孝之出天也。 好寫書, 二歲能作字, 三四歲筆畫已成, 日以是爲戲。 五六歲所書, 有作屛者。 至於諺書, 自四五歲已通曉, 作書札如長者。 三歲接見輔養官, 能讀書, 會文義, 四五歲則日就月將, 殆無可以學於人者。 天性儉朴, 自幼不喜華美, 所御之衣, 至于汙敝而旡斁, 嬉遊不取玩好之物, 惟愛質樸, 而久猶不去焉。 自幼勤學, 未明而興, 催盥櫛而讀書, 余慮沖年之受損, 戒勿早起, 則每遮燈影而盥櫛焉。 誠孝懇篤, 事英宗大王、景慕宮及余, 承顔順志, 毫髮無違於敎訓。 或有兩宮間難處之事, 輒委曲周旋事, 多得解, 不可殫記也。 丁丑兩國恤, 移居他室, 去殯殿不遠, 哭聲相聞。 以時陳籩豆於無人之處, 爲奠獻之容, 年未及於行禮, 雖不得躬參祭奠, 而心志之及此, 可見天性至孝之一端。 追慕兩聖母, 終身不衰, 丁丑、戊寅兩年冬, 英宗大王寢疾時, 纔六七歲, 能知焦遑, 問候必以至誠, 不解帶不離側, 是時, 孰不歎服其夙成也。 英宗大王, 頻命侍坐, 每令讀書, 叩問文義, 則分析奏對, 靡不合理, 或於中夜引見之時, 召使之誦書, 試爲講問, 則雖在寢睡之餘, 少無差錯, 英宗大王屢稱其聰明英睿之絶異也。 己卯三月, 始定冊禮, 是月展拜于孝昭殿、徽寧殿, 繼謁眞殿, 閏六月受冊于明政殿, 禮節動容, 進退周旋, 咸中規矩, 英宗大王, 嘉之以爲宗社萬年之慶也。 辛巳三月入學行冠禮, 壬午二月行嘉禮, 是歲禍變之後, 哀毁痛慕, 天倫至情之外, 尤爲罔極罔極。 時余處各闕, 每曉送書, 知無恙之報, 然後方進早膳, 常以余澟綴善病, 離違未見爲恨, 親劑藥以送之, 聞有減勢, 始御水剌, 雖在沖年, 至孝之根天如此。 與余離違之後, 寢食於宣禧宮處所, 晝侍英廟, 夜則寬慰宣禧宮, 一飯一寢, 心常憧憧, 甲申, 宣禧宮病患沈篤, 以移孝之意, 竭誠救護, 及遭喪, 哀痛無異於壬午也。 丙戌, 英宗大王患候危重, 晝夜焦煎, 廢寢食者三月, 聖候之竟臻康復, 實由睿孝之格天。 於大王大妃殿, 尤篤誠孝, 大王大妃殿慈愛極至, 凡事大小, 上而稟議, 下而質問, 慈孝之無間, 往牒所罕。 苟非大王大妃殿盛德曁大行大王至孝, 則何以及此? 此外平日敬天之至誠, 奉先之懿行, 奉殿宮之純孝, 崇儉祛奢之盛節, 節用愛民之大德, 欲書則無窮。 而赫赫在人耳目, 外廷諸臣, 以所見聞, 庶幾贊揚萬一, 第略擧幼時行蹟之外, 人所未及知者, 而記述之。 神思昏迷, 多所遺漏, 尤爲罔極罔極。
- 【태백산사고본】 55책 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89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역사(歷史)
- [註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