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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권, 대왕 대비전이 내린 행록(行錄)

대왕 대비전이 내린 행록(行錄)

대왕 대비전이 내린 행록(行錄)

선왕(先王)이 여덟 살 때 내가 처음으로 만나보았는데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 행동거지라든지 풍기는 기상이 의젓하고 덕기가 있었으며, 지극한 효성 또한 벌써 겉으로 나타나보였고, 잠자리와 찬선 등을 살피는 범절도 예도에 어긋남이 조금도 없었다. 을유년에 큰 병에 걸려 달이 넘게 위태로운 고비에 처해 있을 때 영묘(英廟)께서 걱정에 싸여 속을 태우시다가 병술년 봄에는 영묘 자신이 환후가 있어 여러 달을 두고 점점 심해지더니 삼월에 들어서자 매우 위독하게 되었는데, 이때 선왕은 큰 병을 막 앓고 난 후라서 기운이 제대로 회복 안 된 상태였지만 다급하고 어쩔 줄을 몰라 밤낮없이 곁을 지키고 앉아서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였고 영묘께서 몸을 움직이실 때면 직접 부축을 하여 그야말로 그 진실하고 조심성 있는 태도가 곁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결국 하늘과 신명이 감응하여 환후는 회춘을 보셨지만 궁중에서는 모두들 선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된 소치라고 하였던 것이다.

영묘께서는 10여 년을 두고 병환이 늘 떠나지 않았는데 언제나 증세가 좀 위중할 때면 금방 눈물을 흘리면서 직접 소변을 맛보기도 하며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면서 10년이나 시탕(侍湯)을 하였지만 애태우고 어쩔 줄 몰라하는 지성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리고 병신년에 상을 당하고서는 울부짖고 뛰고 예(禮)에 넘도록 너무도 슬퍼하면서도 영묘의 환후가 을유년에 큰 병을 앓을 때 너무 애타게 걱정하셨던 것이 원인이 됐다 하여 그것을 더욱 가슴에 맺힌 한으로 삼았다. 그래서 어제 진향문(御製進香文)에도 그 애통한 내용을 담았던 것이다.

어좌에 오른 이후로도 영묘가 남기신 뜻이면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었고, 진전(眞殿)과 육상궁(毓祥宮)에 대한 추모의 성의도 지극하여 크건 작건 사향(祀享) 절차를 조금도 고침이 없이 전일에 하던 규모 그대로 따라 하였다. 20여 년을 재위하였지만 진전의 초하루와 보름의 봉심(奉審)에 있어서는 비록 소소한 병이 걸렸거나 아니면 추운 겨울, 무더운 여름 또한 찬바람·눈·비 할 것 없이 한 번도 그 때문에 그 예를 폐한 일이 없이 꼭 새벽 파루를 친 후에야 행례를 하였다. 나는 늘 혹시라도 건강을 해칠까 염려되어 어쩌다가 직접 행례하는 일을 잠시 멈추도록 권고라도 할라치면 눈물이 글썽해 가지고 얼굴을 가리고 이르기를,

"큰 병이 들지 않았을 바에야 성의를 표하는 길이 오직 이 길밖에 없으므로 차마 한 번도 예를 빠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종묘 사직의 제향에 있어서도 지성을 다해 살피고 단속하여, 재거(齋居)하면서는 밤을 꼬박 새워가며 그 준여(餕餘)를 반드시 직접 맛보곤 하였다. 경모궁(景慕宮)에 대하여는 너무나 슬픈 어버이에 대한 생각이 천지에 사무쳐 높이 받드는 의식이라든지 향사하는 절차를 정성껏 하고 예에 맞게 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유감됨이 없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는 했으나, 지극한 원통이 늘 마음에 있어 20여 년을 보내면서 자신이 임금이지만 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마치 갈 곳 없는 궁한 사람처럼 여기었다. 평상시에도 말로는 차마 그 표현을 못했고, 해마다 재일(齋日)이면 너무나 한스럽고 슬픈 마음을 억누르려고 애쓰는 기색이 표정으로 나타나 해가 갈수록 더해갔는데 나 역시도 마음이 상하여 그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지극한 효심을 가지고도 감히 영묘의 뜻을 어기려고는 하지 않아, 뿌리가 둘일 수 없는 왕실의 의리를 금석같이 끝까지 지켰으니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인(仁)이요 더할 수 없는 의(義)로서 백왕(百王)을 능가하는 훌륭한 덕인 것이다. 그것을 어찌 종이와 붓으로 다 형용할 수 있으랴.

나에 대하여도 효성을 바치는 정성이 대단하여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부터 서로 의지하고 기대하고 했었는데, 병신년 이후 내가 외로이 슬픔 속에 파묻혀 있자 더 많은 우려를 하면서 나를 보호하기에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고, 거처나 기타 범절에 있어 일호라도 혹시 소루한 점이 있을까 염려하여 아무리 미세한 일이라도 모두 꼭 직접 점검하여 나를 편리하게 하려고만 힘쓰고 자신의 노고는 돌보지 않았으므로 내 언제나 마음이 불안하고 한편 걱정도 되었다. 음식이나 탕약 같은 것도 혹시 때를 좀 어기기라도 하면 마치 미처 못할 것 같이 서둘러 올리게 하고는 친히 와서 살펴보고 또 지성으로 권하였다. 이 모진 목숨이 지금까지 붙어있는 것도 모두가 그의 돈독한 효성의 덕 때문이니 내 침실 안에 진열되어 있는 편리한 일상 도구들을 보면 어느 것 하나 그의 효성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내가 즐기는 것이면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자기가 먼저 갖는 법이 없이 반드시 손수 들고 와 갖도록 권했다. 그리고 모든 물건에 있어 많고 적고를 막론하고 보이는 것만 있으면 가지고 와 내게 주었으며, 내가 무엇을 들라고 권하면 그것이 비록 구미에 맞지 않아도 평소 즐기는 것처럼 즐겨 상대의 마음을 편케 해주는 그 효성이 해가 갈수록 더해갔었다. 또 궁궐 내부에서 무슨 마음 돌리기 어려운 일이라도 있을 경우 내가 지성으로 타이르고 권유하고 하면 내가 한 일이 혹 지나칠 때가 있어도 조금도 안 좋아하는 빛을 얼굴에 보이거나 말로 나타내는 일 없이 차분한 기색과 따뜻한 말씨로 마치 몸둘 바를 모르듯이 했었다. 지난 기록들을 다 들추어봐도 그렇게 훌륭한 덕과 지극한 효성을 가지고 있었던 이는 다시 없을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도 밤낮없이 전심전력하여 손에는 언제나 책이 들려져 있다가 파루가 끝나야 겨우 잠시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래도 피곤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끝에 가서 도덕(道德)이 성취된 것도 그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다. 게다가 또 검소한 것을 좋아했으며 중년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하여 겨울이면 곤룡포 이외에는 늘 입는 것이 굵은 무명베 옷이라서 자주 다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워서 입기까지 하였다. 여름철 옷은 자주 빨기 때문에 해진 것도 그냥 입었고, 반찬 역시 보통 때는 세 가지를 넘지 않았으며 평상시 좋아하는 노리갯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그 자봉(自奉)하는 것이 마치 한미한 선비 같아 수십 년을 하루처럼 보냈었다.

금상(今上)이 어려서 클 때도 화사한 의복이나 기름진 음식은 입과 몸에 가까이 못했고, 모든 일을 반드시 옳은 방향으로 지도하니 궁궐 안이 엄숙하고 질서정연하면서도 일면 화기가 넘쳐흘러 각기 자기 도리를 다해갔는데 궁궐 내부의 위아래 할 것 없이 누구 하나 그의 교화에 열복하지 않았겠는가. 선왕은 또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과 귀신을 섬겼으며, 백성 보살피는 생각도 정성스럽고 진지하여 마치 갓난애를 돌보듯이 하였고, 구름 한번 끼고 햇빛 한번 나는 것까지도 관심을 안 갖는 것이 없어 하늘을 곁에서 대하듯이 한 정성이 하루도 소홀함이 없었다. 해마다 비가 혹 철을 거르기라도 하면 침식을 다 잊고 마음이 타서 밤낮으로 안절부절하였기 때문에 내가 늘, 마음을 그렇게 쓰다가는 틀림없이 성체(聖體)에 손상이 올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단비가 내리려 하면 좌우가 감동할 정도로 기뻐하는 빛을 보이면서 그래도 부족할까봐 뜰에다가 측우기를 놔두고 우량이 어느 정도인가를 자주 물었으며 비가 흡족하게 내리고 난 뒤라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었다. 아, 선왕의 그 훌륭한 덕과 지극한 선을 다 기록하려고 들면 약간의 문자로는 도저히 표출할 수가 없는 일인데 더군다나 나 같은 얕은 견문으로야 어떻게 그 만분의 일이나마 엇비슷하게 형용할 것인가. 슬퍼 울부짖고 망극한 상황에서 겨우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대략 몇몇 조항을 이렇게 적어보는 바이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8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大王大妃殿書下行錄。 先王八歲, 予初覿焉, 雖沖年, 擧止氣象, 儼然成德, 譪然誠孝, 著於辭色, 問寢視膳之節, 少不違於禮度。 乙酉遘大疾, 閱月危澟, 英廟憂遑焦煎, 自丙戌春, 英廟患候, 屢朔彌留, 至三月極重, 先王纔經大疾餘, 氣未復之中, 遑遑焦煎, 日夜不離側, 至廢寢食, 坐臥起居, 親自扶護, 洞洞屬屬之至誠, 感動傍人。 竟荷天神之感應, 患候回春, 宮中咸稱至孝所感。 英廟患候十餘年沈痼, 每添㞃之時, 垂涕而親嘗小便, 焚灼心肝, 十年侍湯, 焦遑之至誠如一。 丙申大喪後, 攀號擗踊, 哀毁踰禮, 以英廟患候, 祟於乙酉大疾之焦憂, 尤爲結轖之至恨。 哀痛之辭, 亦陳於御製進香文。 自臨御以後, 英廟遺意, 未嘗一毫違越, 追慕眞殿、毓祥宮之誠意, 大小祀享之節, 一遵前日規模而無改。 二十餘年在位, 眞殿朔望奉審, 雖値小小疾恙, 及隆冬盛暑, 寒風雨雪, 一不廢焉, 必待曉漏而行禮。 予每慮有損節, 或以權停親行懇勸, 則含淚掩抑曰: "非有大病, 則表誠之道, 惟此而已, 不忍一番闕禮也。" 廟社祀享, 盡誠察飭, 齋居徹夜, 餕餘必親嘗焉。 於景慕宮, 至誠惻怛之孝思, 達于天地, 尊奉之儀文, 享祀之節度, 以誠以禮, 至矣盡矣, 無毫分餘憾, 而至痛在心, 二十餘年, 無樂爲君, 如窮人無所歸。 居恒不忍以言語提道, 年年齋日, 至恨至痛之掩抑不勝者, 著於辭色, 歲以冞增, 予心亦感傷, 有不忍覩。 以如是之至誠至孝, 不敢違越於英廟遺意, 不貳本之義理, 終始守如金石, 是則仁之至, 義之盡也, 度越百王之盛德。 豈紙筆所可形容哉? 於予致孝之誠篤至, 自在世孫之時, 依仰甚切, 丙申後則以予煢然在哀疚中, 憂慮尤深, 保護之道, 靡不用極, 居處凡節, 慮或有一毫踈漏, 至於微細事, 必皆躬檢, 務欲便予, 自忘勞苦, 每悚然警懼。 於飮食湯劑之或違其時, 所以備進, 如恐不及, 親自來省, 至誠懇勸。 至今頑命之保全, 專賴篤孝之德, 寢室中鋪列便身之具, 無處非誠孝之攸及, 予之所嗜, 物雖微細, 未嘗先御, 必手自勸進。 常於百物, 無論多少, 有所見則無不進於予, 予所勸進, 雖不合於口味, 如素嗜焉, 養志之孝, 歲歲冞篤。 雖宮闈間, 難於回心之事, 予以至誠開導勸喩, 或至有過擧, 而辭色之間, 少無不怡之幾微, 下氣溫言, 身若無所容。 稽之往牒, 豈復有如此盛德至孝也哉。 專心學問, 日夜孜孜, 萬幾之暇, 手不釋方冊, 撤漏之後, 始暫就寢, 不以爲疲, 道德之畢竟成就者此也。 崇尙儉德, 中年以後, 尤致力焉, 冬則袞袍外, 常御綿布之麤者, 而屢經改爲, 至於補綴。 夏衣屢澣, 雖敝而亦御, 常膳不輸三器, 平居無一玩好之具, 自奉如寒士, 數十年如一日。 今上之幼養也, 華盛之服, 膏腴之味, 勿近口體, 凡事必敎以義方, 宮闈之間, 嚴肅整齊, 而和氣瀜洽, 各盡其道, 一宮上下, 孰不悅服於敎化也? 先王事天敬事神敬, 恤民懇摯, 如保赤子, 一陰一暘, 不弛聖念, 瞻天對越之誠, 靡日少忽。 每歲雨或愆期, 則寢食俱闕, 聖心焦灼, 日夜憧憧, 予每以若是用慮, 必損聖體爲憂。 得甘霈則悅豫之色, 感動左右, 猶慮其不足, 庭置測器, 頻問得雨之尺寸, 旣洽之後, 聖心始紓。 嗚呼! 欲記先王之盛德至善, 非若干文字所可悉, 況以予淺見, 何由髣髴形容其萬一乎? 哀號罔極之中, 僅收精神, 略書數條焉。


  • 【태백산사고본】 55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8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