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당상·예조 당상을 소견하고 효소전을 부태묘할 때 부알의 예에 대해 논의하다
임금이 편집 당상(編輯堂上)과 예조 당상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효소전(孝昭殿)을 부태묘(祔太廟)할 때에 마땅히 부알(祔謁)의 예(禮)가 있어야 하는데, 경묘(景廟)의 신위(神位)를 본실(本室)에 그냥 모셔 두는 것은 신리(神理)에 있어서 미안(未安)하다. 여러 사람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신도(神道)는 인사(人事)와 다르니, 부알할 때에 경묘의 실(室)을 닫아 놓고 열지 말게 하여 불안한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움직여 옮기는 것은 결코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성천주(成天柱)는 말하기를,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여 부묘(祔廟)할 때에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의 의논이 《숙묘보감(肅廟寶鑑)》에 실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의 의논은 말이 엄격하고 의리가 곧았지마는 세조(世祖) 이하의 신위를 모두 받들어서 하정(下庭)시키려 하였으니 일이 너무 중대하였으므로 이것이 선조(先朝) 때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고 다만 폐문(閉門)하는 예를 행하였는데, 비록 묘문(廟門)을 닫는다고 하지마는 거존(居尊)하는 혐의는 한 가지이다. 장렬 대비(莊烈大妃)를 부묘할 때에도 지금과 같이 하였는데, 그 당시 만일 다른 장소로 권봉(權奉)하자는 의논이 있었다면 선왕(先王)께서 반드시 따르지 않았을런지 어찌 알겠는가? 지난번 단경 왕후(端敬王后)를 추부(追祔)할 때에도 단지 단종을 부묘할 때의 예(例)를 따랐는데 지금 생각하여 보아도 끝내 불안함을 느낀다. 효소전의 신위를 묘정(廟庭)에 부알하게 할 때에 황형(皇兄)께서 전상(殿上)에 그대로 계신다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나는 마땅히 황형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여기어 지금 동쪽 익각(翼閣)에 잠시 옮겨 봉안하였다가 예(禮)가 끝난 뒤에 도로 봉안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널리 순문(詢問)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신(大臣)들에게 문의(問議)하라고 명하였으나 모두 헌의(獻議)하지 않았는데, 유독 영부사(領府事)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일찍이 이 예(禮)에 대하여 의논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오직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부묘할 때에는 단지 태조의 실(室)과 문을 열어 월대(月臺)에서 행례하고는 승좌(陞座)하였습니다. 기묘년300) 단정 대왕 부알시에 하위(下位)의 각실(各室)은 모두 문을 열지 않았었고, 기미년301) 단경 왕후 부알 때에도 또한 이 예를 썼으니, 정리와 예절을 참작하여 보건대, 남김없이 곡진하였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대개 신도(神道)는 비록 생존한 때를 형상한다고 하지마는 승강(陞降)하고 회피(回避)하는 절차를 생시(生時)와 같이 하기는 어려운 형세입니다. 비록 사가(私家)의 예를 들어 말하더라도 자손이 먼저 죽게 되면 전(奠)을 드리고 제사를 설행함에 있어 부조(父祖)가 비록 주관을 하더라도 망자(亡者)의 신주는 의탁(倚卓)에 그대로 있고 천강(遷降)함이 없으니, 옛부터 예(禮)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이것 때문에 의문을 일으켜 논란한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한결같이 기묘년과 기미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감실(龕室)도 열지 말고 문도 열지 않는다면, 마치 딴집[隔屋]과 같으니, 진실로 온당할 것 같습니다. 임시로 옮겨 안치시키는 데 이르러서는 그 처소(處所)가 부알하는 신위에도 역시 섬돌의 상하(上下) 구별이 었어야 하는데, 또 장래에 뜰 아래로 이봉(移奉)하자는 의논이 있을 것입니다.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근래의 예(例)를 따라서 과오를 적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이 진실로 다름이 없는 것 같으나, 예(禮)에 이른바 ‘생시(生時)의 일이 끝나고 귀신의 일이 시작된다.’는 것은 존몰(存沒)과 유명(幽明)을 구분한 것이니, 신을 섬기는 의식에 순전히 생존한 때를 형상하는 예를 쓸 수는 없습니다. 기묘년과 기미년의 시행한 전례에 감실을 열지 않고 문을 열지 않은 데에 그치고 말았는데 갑자기 옮겨 모시는 의논을 하는 것은 아마도 정(靜)을 숭상하는 의도에 어긋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부사가 이른바 이안(移安)하는 처소가 섬돌의 상하의 구별이 있다고 한 것은 과연 이러한 혐의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이 혹시 존자(尊者)를 모시고 섰는데, 또 다른 존자가 와서 뵈려고 한다면, 감히 그 자리에 서서 내려다 보지 못하고 옆으로 서서 피하는 것도 역시 한 방법일 것이다. 동쪽 익각이 비록 섬돌 위에 있으나 이미 서향(西向)으로 하였으니, 남면(南面)하여 내려다 보는 것과는 현격히 다르다."
하고, 드디어 전교를 내리기를,
"조조(朝祖)와 부알할 때의 의절(儀節)을 문의한 뒤에 《숙묘보감》을 봉람(奉覽)하니, 고 상신의 헌의에 이미 내가 유시(諭示)하려다가 유시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상세히 논하였다. 그러나 신도(神道)와 인사(人事)는 차이가 있으니, 모시고 뜰을 내려가게 하는 것은 나도 역시 어렵다고 말한 것이지마는, 무릇 수개(修改)를 할 때에도 역시 임시로 봉안하는 경우가 있는데, 막중한 조조나 부알을 하는 데에 어찌 임시로 봉안하는 예(禮)가 없고 다만 외문(外門)만을 닫을 뿐이겠는가? 아! 유명(幽明)이 비록 다르나 정리(情理)는 다를 것이 없다. 효소전에 부알할 때에 우리 황형의 마음이 그 어떠하겠는가? 남의 자제(子弟)가 된 자는 마땅히 부형(父兄)의 마음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야 할 것이니, 지금부터 제도(制度)를 정하여 조조·부알의 의주(儀註) 가운데 좌실(左室) 이하는 익각에 임시 봉안하는 뜻으로써 고유문(告由文)에 첨입(添入)하고, 정시(正時) 전 2각(刻)에 동쪽 익각에 임시 봉안하였다가 예가 끝난 뒤에 도로 봉안할 것을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편집 당상(編輯堂上)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근래 《보편》의 일로 인하여 전후(前後) 세자빈(世子嬪)의 장례(葬禮)를 상고하여 보니, 공회빈(恭懷嬪)에 대한 일이 있어서 감히 아룁니다. 공회빈 윤씨(尹氏)는 바로 순회 세자(順懷世子)302) 의 빈(嬪)인데, 임진년303) 3월에 서거하였습니다. 장례를 치르기 못하고 4월에 왜란(倭亂)을 만났으므로 후원(後苑)에 구덩이를 팠으나 미처 영구(靈柩)를 옮기지 못하고 전내(殿內)에 실화(失火)하여 불길에 번져서 타버렸는데, 궁인(宮人)들이 모두 이르기를, ‘빈(嬪)이 생시에 늘 염불(念佛)을 하였는데 문득 다비(茶毗)304) 를 이루었으니 마침 그의 소원에 부합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천광(穿壙)하였던 자리를 보니, 아직까지 회(灰)로 쌓았던 자취가 있어서 풀도 나지 않았다. 《실록(實錄)》이 분명하지 못한 것 같다."
하매, 홍계희가 말하기를,
"《선묘실록(宣廟實錄)》은 고(故) 판서 이식(李植)이 편수(編修)한 것인데, 이식은 바로 윤씨의 외손(外孫)이니, 반드시 자세히 알고 썼을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70면
- 【분류】왕실(王室) / 출판(出版) / 역사(歷史)
- [註 300]기묘년 : 1699 숙종 25년.
- [註 301]
기미년 : 1739 영조 15년.- [註 302]
○甲子/上召見編輯堂上、禮堂。 上曰: "孝昭殿祔太廟時, 當有祔謁之禮, 景廟神位, 仍奉本室, 在神理未安。 諸議以爲如何?" 洪啓禧曰: "神道異於人事, 祔謁時, 景廟室閉而不開, 以示不安之意恐宜矣。 遷動則決不可也。" 成天柱曰: "端宗復位祔廟時, 有故相南九萬議, 載《肅廟寶鑑》矣。" 上曰: "故相之議, 辭嚴義正, 而但欲幷奉世祖以下神位下庭, 則事極重大, 此先朝所以不能從, 而只行閉門之禮也, 雖閉廟門, 居尊之嫌則一也。 莊烈大妃祔廟, 與今同矣, 其時若有權奉他所之議, 則安知先王之必不從也? 向於端敬王后追祔時, 只依端宗祔廟時例, 而至今思之, 終覺不安。 孝昭殿神位祔謁於廟庭, 而皇兄仍居殿上, 則於心安乎? 予當以皇兄之心爲心, 今欲於東翼閣暫時移安, 待禮畢還安何如?" 諸臣請廣詢。 於是命問議大臣, 多不獻議, 獨領府事金在魯言: "祖宗朝未嘗議及此禮。 惟神德王后祔廟時, 只開太祖室與門, 行禮於月臺而陞座。 己卯端宗大王祔謁時, 下位各室則竝不開門, 己未端敬王后祔謁時, 亦用此禮, 斟量情禮, 可謂曲盡無餘矣。 蓋神道雖云象生, 陞降回避之節, 勢難一如生時。 雖以私家言之, 子孫先亡, 則致奠設祭, 父祖雖主之, 而亡者之主在倚卓無遷降, 從古好禮之家, 未聞有以此起疑而論難者。 臣意則一依己卯、己未例, 不開龕不開門, 則便同隔屋, 允爲穩當。 至於權奉移安, 則處所於祔謁位, 亦有階上下之別, 又將有移奉階下之議乎。 事體重大, 不如遵依近例之爲寡過。" 判府事李宗城言: "神理、人情固若無間, 而禮所謂 ‘生事畢而鬼事始’ 者, 卽存沒幽明之所分也, 事神之儀, 不可純用象生之禮。 己卯、己未已行之例, 止於不開龕不開門而已, 則遽議移奉, 恐有乖於尙靜之意。" 上曰: "領府事所謂移安之所, 亦有階上階下之別云者, 果似有此嫌。 然人或有侍立於尊者, 而又有尊者來謁, 則不敢臨視, 側立以避者, 亦一道也。 東翼閣雖在階上, 旣是西向, 則與南面以臨者顯殊矣。" 遂下傳敎曰: "以朝祖、祔謁時儀節問議之後, 奉覽《寶鑑》, 故相獻議, 已詳予所欲諭不諭者。 然神道與人事有間, 奉而降階, 予亦曰難矣, 而凡於修改亦有權安, 則莫重朝祖、祔謁, 豈無權安之禮, 而只闔外門而已乎? 噫! 幽明雖殊, 情理無異。 孝昭殿祔謁時, 我皇兄之心其將若何? 爲人子弟者, 當以父兄之心爲己心, 自今定制, 朝祖、祔謁儀註中, 左室以下, 則以權安翼閣之意, 添入於告文, 正時前二刻, 權安於東翼閣, 禮畢後還安事, 載於《補編》。" 編輯堂上洪啓禧曰: "近因《補編》事, 考見前後世子嬪葬禮, 則有恭懷嬪事, 敢奏矣。 恭懷嬪 尹氏, 卽順懷世子嬪, 而壬辰三月薨。 未葬而四月遭倭亂, 故穿坎於後苑, 未及奉柩, 殿內失火, 未免延燒, 宮人皆曰, ‘嬪於生時常念佛, 故便成茶毗, 適符所願’ 云。" 上曰: "予見穿壙處, 尙有築灰之跡, 而草不生焉。 實錄似不爽矣。" 啓禧曰: "《宣廟實錄》卽故判書李植所修, 植是尹氏外孫, 必詳知而備書矣。"
-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70면
- 【분류】왕실(王室) / 출판(出版) / 역사(歷史)
- [註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