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의정 조재호가 군덕과 시무를 권면하고 균역의 폐단 등을 아뢰다
우의정 조재호(趙載浩)가 숙명(肅命)하니, 임금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조재호가 엉금엉금 기면서 걷지 못하니, 임금이 내시에게 명하여 부축하게 하였다. 조재호가 먼저 발을 다쳐서 사명(謝命)하지 못한 죄를 말하고, 그 다음에 그의 할아버지가 고 상신 박세채(朴世采)의 문(門)에 조유(從遊)하여 탕평(蕩平)의 연원을 사수(師受)한 것을 아뢰고, 이어서 그 아버지가 입조(立朝)한 본말(本末)에 언급하여 누누이 수백 마디 말을 하였다. 임금이 이종성(李宗城)이 전일 상소한 일을 물으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이종성은 젊어서 성망(聲望)이 있었는데, 급제한 뒤에 신들과 돌아가는 데를 같이하지 않은 것은 이광좌(李光佐)의 가행(家行)과 위의(威儀)·동작이 남을 감동시킬 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젊을 때부터 좋아하여 따랐는데 차마 죽은 뒤에 저버릴 수 없으므로 이러한 상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종성이 도헌(都憲)으로서 죄를 받았을 때 신이 서로(西路)에 왕래하다가 들러서 보고 말하기를, ‘신세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가? 가정의 전부터 내려오는 연원을 버리고 구촌숙(九寸叔)을 따라가는 것은 긴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였더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사세에 몰려 자연히 그렇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는 일찍이 이광좌에 대해 희망을 가졌는데, 대개 이광좌가 소론(少論)의 영수(領袖)이고 그 당류가 평소에 믿고 복종하였으므로, 생각을 고쳐 착한 것을 좇으면 준론(峻論)을 하는 소론의 당은 꼭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한편의 세도(世道)의 근심을 덜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아비가 무신년157) 이후에 이광좌에게 전일의 죄를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할 것을 권하였더니, 이광좌가 감사해 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 서로 사랑하는 뜻을 알 수 있으니, 감히 그대의 말대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그 뒤에 이광좌가 그 말을 실천하지 않고, 옛버릇을 고치지 않은 채 반드시 공론과 혈전(血戰)하고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모함하여 해치려 하였습니다. 그 당이 이 때문에 더욱 횡포하여 크게 세도의 해독이 되었으므로, 신의 아비가 그의 무상(無狀)함을 늘 말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좌는 죄가 있지만, 오히려 조태구(趙泰耉)가 화(禍)를 만들기 사작한 것과 같지는 않다."
하였다. 조재호가 말하기를,
"시작한 자는 조태구이고 맺은 자는 이광좌입니다. 이광좌가 아니면 반드시 무신년의 변에 이르지 않았을 것인데, 이광좌는 탈이 없고 조태구만 유독 죄를 받았으니, 죽은 자가 아는 것이 있다면 그가 반드시 원통하다고 하소연할 것입니다. 성상께서 헤아려 처분하신 후에야 고르지 못하다는 한탄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비록 옳지만, 일전에 꿈꾼 것을 이야기한 뒤인데, 일이 신축년158) ·임인년159) 에 관계되는 것을 내가 어찌 다시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재호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러하니, 신이 감히 다시 말할 수 없습니다마는, 대신이 되어 처음으로 연석(筵席)에 나왔으니, 어찌 말없이 가만히 있고 말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어서 군덕(君德)과 시무(時務)를 권면하여 아뢰었는데, 첫째 위노(威怒)를 삼가서 함양하는 공부를 더욱 극진히 하는 것이고, 둘째는 유현을 예우하여 초래(招來)하는 정성을 더욱 두텁게 하는 것이고, 셋째 학문을 숭장(崇奬)하여 사습(士習)을 격려하는 것이고, 넷째 과거를 드물게 설행(設行)하여 요행을 바라는 길을 막는 것이고, 다섯째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서 대신 이하가 늘 대각(臺閣)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또 정휘량(鄭翬良)은 전직(銓職)에 있을 만하고, 구선행(具善行)은 장임(將任)에 제수할 만하고, 김상석(金相奭)은 온화하고 조용한 행실을 지킨다고 힘껏 천거하고, 마지막으로 균역(均役)의 폐단과 여염집에 관한 금령(禁令)을 논하기를,
"신이 홍계희(洪啓禧)와 함께 일찍이 균역을 논하느라 사흘 밤낮을 보냈습니다마는, 신은 끝내 그 폐단이 반드시 균역하기 전보다 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험삼아 근일의 일로 말하여 보더라도 연해의 수령이 날마다 죄망(罪網)에 걸리니,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의 기상이겠습니까?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간 것에 이르러서는 전후에 성교가 지극히 엄하고도 긴급하므로, 비록 불쌍히 여길 만한 자가 있더라도 과감히 말할 사람이 없었는데, 한미(寒微)한 사족(士族)과 잔약(孱弱)한 서얼(庶孽)로서 매우 가난하여 작은 집에 세든 자와 먼 지방의 문사(文士)·무사(武士)로서 벼슬을 구하여 와서 여염집을 산 자가 한꺼번에 쫓겨나서 길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어찌 매우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고 특별히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간 것 가운데에서 백문(白文)으로 팔고 사서 귀양간 자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경은 어찌하여 이익보(李益輔)의 일을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 또한 특별히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조재호가 이날 해돋이 때에 들어와 신시(申時) 이후에야 물러갔으므로, 임금도 오히려 수라를 들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9책 82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40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주생활(住生活)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註 157]
○右議政趙載浩肅命, 上引見于熙政堂。 載浩匍匐不能行, 上命黃門扶腋。 載浩先言傷足未謝命之罪, 次陳其祖從遊故相朴世采之門, 而師受蕩平之淵源, 仍及其父立朝本末, 縷縷數百言。 上問李宗城向日疏事, 載浩曰: "李宗城少有聲望, 登第後不與臣等同歸者, 李光佐之家行與威儀、動作, 足以動人。 故自少悅服, 不忍於身後相背, 至有此疏矣。 宗城以都憲被罪時, 臣於西路往來, 歷見而言之曰, ‘身世何爲而至此? 捨家庭所從來之淵源, 從往九寸叔不緊云爾,’ 則宗城曰, ‘事勢所湊泊, 自然如此’ 云矣。 臣父則嘗有望於光佐, 蓋光佐爲少論領袖, 其黨素信服, 若改圖從善, 則峻少之黨, 不期絶而自絶, 可除一邊世道之憂。 故臣父戊申後, 勸光佐以前日之罪, 陳章自引, 則光佐感謝曰, ‘君言良是。 可見相愛之意, 敢不如君言乎?’ 其後光佐不踐其言, 而不悛舊習, 必欲血戰公議, 陷害異己。 其黨因此益橫, 大爲世道之害, 臣父每稱其無狀矣。" 上曰: "光佐雖有罪, 猶不如趙泰耉之始禍也。" 載浩曰: "始者爲泰耉, 結者爲光佐。 若非光佐, 則必不至戊申之變, 而光佐則無恙, 泰耉獨被罪, 死者有知, 渠必稱冤。 自上商量處分, 然後可無不均之歎。" 上曰: "卿言雖是, 日前說夢之後, 事關辛、壬者, 予何可復言乎? 載浩曰: "聖敎如此, 臣不敢復言, 而待罪大臣, 初登筵席, 何可默然而已乎?" 仍以君德、時務勉進, 一曰愼威怒, 益盡涵養之工, 二曰禮儒賢, 益篤招來之誠, 三曰崇奬文學, 以勵士習, 四曰罕設科擧, 以杜倖門, 五曰洞闢言路, 使大臣以下, 常有畏臺閣之心。 又力薦鄭翬良之可處銓職, 具善行之可授將任, 金相奭之恬靜自守, 尾論均役之弊、閭家之禁曰: "臣與洪啓禧嘗論均役, 達三晝夜, 而臣則終以爲其弊必甚於未均役之前也。 試以近日事言之, 沿海守令日罹罪網, 此豈聖世之氣象乎? 至若閭家奪入, 前後聖敎至嚴且急, 故雖有可矜者, 人莫敢言, 寒士、孱孽之貧甚, 而僦小屋者, 遐方文武之求仕而買閭家者, 一時逬出, 彷徨道路, 豈非矜惻之甚乎?" 上竝嘉納, 特放閭家奪入中以白文賣買被謫者。 又敎曰: "卿何不言李益輔事乎?" 亦命特放。 載浩於是日日出而入, 申後乃退, 上尙未進水剌也。
- 【태백산사고본】 59책 82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40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주생활(住生活)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