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구·최석항이 김창집·이이명을 사사시킬 것을 청하다
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이 차자(箚子)를 올려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에게 사사(賜死)를 명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의 자(字)는 여성(汝成)인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은 숙종(肅宗)을 보좌하여 영의정이 되었었는데,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참소(讒訴)를 받고 죽었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김창집은 침착하고 굳세어 대절(大節)이 있었다. 젊어서 을과(乙科)로 급제(及第)하여 숙종 말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경종(景宗) 원년에 대신(大臣)들이 저사(儲嗣)를 세우려고 의논할 적에 김창집을 시민당(時敏堂)에서 불러 보았는데, 그 자리에서 대비(大妃)에게 아뢰어 국본(國本)을 정할 것을 청하니, 경종(景宗)이 허락하였다. 김창집이 물러나와 합문(閤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임금이 다시 김창집을 불러 안탁(案卓) 위에 놓여져 있는 봉서(封書)를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대비(大妃)의 휘지(徽旨)이다."
하고, 어필(御筆)로 연잉군(延礽君) 이라고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는데, 김창집이 눈물을 흘리면서 드디어 정책(定策)하고 연잉군을 세워 세제(世弟)로 삼으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김창집이 이에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 등과 차자(箚子)를 올려 왕세제(王世弟)에게 명하여 국정(國政)을 대리(代理)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조태구(趙泰耉)가 은밀히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하여 몰래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가 대리시키게 하는 것을 극력 저지하였다. 12월에 박상검이 용사(用事)하여 김창집을 거제부(巨濟府)에 안치시켰다. 다음해 3월에는 무옥(誣獄)이 일어났는데, 김창집이 체포되어 성주(星州)에 이르자 사사(賜死)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다. 김창집이 종자(從子)인 김신겸(金信謙)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세제(世弟)의 안위(安危)를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 한이 될 뿐이다."
하고, 뜰 아래로 내려가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그리고 나서 전지(傳旨)를 들은 뒤 또 네 번 절하고 드디어 사명(死命)을 받았는데, 이때의 나이가 75세였다. 영종(英宗) 원년에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충헌(忠獻)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강가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사지냈다. 금상(今上)057) 3년에 특별히 영종(英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김창집(金昌集)의 대절(大節)은 옛날의 명신(名臣)이라 할지라도 따를 수 없다. 세상에서는 모두 영종(英宗)이 저위(儲位)에 오른 것을 김창집의 공로라 하고 있다. 그러나 신은 정유년(丁酉年)058) 독대(獨對)가 있은 뒤 인심이 의구(疑懼)스러운 때를 당하여 김창집이 입대(入對)해서 동궁(東宮)에게 대리시켜야 한다는 의논을 진달하였기 때문에 김창집이 경종(景宗)을 보우(保佑)한 그 공은 더욱 크다고 여긴다. 《실록(實錄)》의 구본(舊本)에는 ‘이이명·김창집이 패몰된 뒤에 성궁(聖躬)이 편안해졌다.’ 했으니, 또한 거짓이 아니겠는가?
이이명(李頤命)의 자(字)는 양숙(養叔)인데, 문정공(文貞公)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장중(壯重)하고 기도(器度)가 남보다 뛰어났다. 숙종(肅宗) 6년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선발되어 임명되었다. 숙종 9년에 차자(箚子)를 올려 예(禮)를 후하게 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부를 것을 청하였고, 송시열이 도착한 뒤에는 날마다 함께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였으며, 송시열이 떠나자 차자를 올려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다. 송시열이 사사(賜死)된 다음 이이명은 영해부(寧海府)에 안치(安置)되었다가 남해(南海)로 옮겼으며, 숙종 20년에 이이명이 석방되어 돌아왔다. 숙종 31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경종이 즉위하여서는 영종(英宗)을 왕세제(王世弟)로 삼기로 정책(定策)하고 이이명이 이에 삼대신(三大臣)과 함께 차자를 올려 왕세제에게 국정을 대리시키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조태구(趙泰耉)가 몰래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가 극력 저지시키고 환관(宦官)이 용사(用事)한 탓으로 이이명을 남해현(南海縣)에 안치(安置)시켰고, 다음해 4월에는 이이명이 체포되어 드디어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65세였다. 이이명이 죽고 나서 경종(景宗)이 하문하기를,
"수염이 흰 상공(相公)이 어디에 있는가?"
하니, 좌우(左右)에서 대답하기를,
"이미 졸(卒)했습니다."
하자, 경종은 슬픈 안색으로 이르기를,
"그가 일찍이 나를 사랑하였는데……."
하였으니, 이는 경종이 이이명의 살해당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종(英宗) 원년에 이이명의 관작을 추후 회복시켰고 충문(忠文)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강가에 사당(祠堂)을 세웠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이명이 영종을 보호하여 김창집·조태채 등과 함께 영종에게 국정(國政)을 청리(聽理)하게 하자고 하였는데, 그 자신은 불행하게도 적신(賊臣)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종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53년 간 왕위에 있게 되었고, 국가가 편안하게 되었으니, 《서경(書經)》에 이른바,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신하가 왕가(王家)를 보호하여 다스린다.’ 한 것이 이이명과 같은 경우와 근사하다고 하겠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68면
-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인물(人物)
○趙泰耉、崔錫恒上箚請賜金昌集、李頤命死, 上從之。 昌集字汝成, 安東人。 父壽恒佐肅宗, 爲領議政, 與文正公 宋時烈, 被讒而死。 諡文忠。 昌集沈毅有大節。 少擧乙科, 肅宗末, 拜領議政。 上之元年, 諸大臣議建儲嗣, 昌集召見時敏堂, 請白大妃, 定國本, 景宗許之。 昌集退俟閤門外, 上復召昌集, 指案上所置封書曰: "此大妃徽旨也。" 以御筆書延礽君, 示諸臣, 昌集涕泣, 遂定策, 立延礽君爲世弟, 國人大悅。 昌集乃與忠文公 李頤命、忠翼公 趙泰采、忠愍公 李健命等上箚, 請命王世弟代理國政。 趙泰耉陰結宦官朴尙儉, 潛入宣仁門, 力沮代理。 十二月, 尙儉用事, 安置昌集 巨濟府。 明年三月, 誣獄起, 昌集被逮, 至星州有命賜死。 昌集顧謂從子信謙曰: "吾不知世弟安危, 此爲恨耳。" 就庭下北向四拜, 聽旨然後, 又四拜, 遂受命, 時年七十五。 英宗元年, 復官爵, 賜諡忠獻, 立祠江上以祀之。 今上三年, 特命配享英宗廟庭。 臣謹按昌集大節, 雖古名臣, 不能及也。 世皆以英宗升儲, 爲昌集功。 然臣以爲當丁酉獨對以後, 人心疑懼, 昌集入對陳東宮代理之議, 故昌集保佑景宗, 其功尤大。 實錄舊本云: "頤、集敗而上躬安", 不亦誣乎? 頤命字養叔, 文貞公 敬輿孫也。 幼莊重器度過人。 肅宗六年, 擧乙科, 選拜弘文館正字。 九年, 上箚請敦禮召文正公 宋時烈, 旣至, 日與之侍講經筵, 旣去, 上箚請留之。 時烈賜死, 頤命安置寧海府, 移南海, 二十年, 頤命釋還。 三十一年, 拜右議政, 遷左議政。 景宗卽位, 策英宗爲王世弟, 頤命乃與三大臣上箚, 請令王世弟代理國政。 趙泰耉潛入宣仁門, 力沮之, 宦官用事, 安置頤命 南海縣, 明年四月, 頤命被逮, 遂賜死, 時年六十五。 頤命旣死, 景宗問髯白相公安在? 左右對曰: "已卒。" 景宗戚然不樂曰: "是嘗愛予。" 蓋景宗不知頤命見殺也。 英宗元年, 命追復頤命官爵, 諡曰忠文, 立祠江上。 臣謹按頤命保護英宗, 與金昌集、趙泰采等, 請使英宗聽國政, 而其身不幸, 爲賊臣所殺。 然英宗旣承大統, 享國五十三年, 國家乂安。 《書》曰: "弗二心之臣, 保乂王家。" 若頤命者, 庶乎其近之矣。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68면
-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