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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0월 17일 甲戌 1번째기사 1721년 청 강희(康熙) 60년

영의정 김창집·영중추부사 이이명 등이 대리 절목에 관한 차자를 올리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대리(代理) 절목(節目)을 진달하였는데, 그 차자에 이르기를,

"근일에 갑자기 비상(非常)한 조처가 있으므로, 합문(閤門)에서 나흘을 부복(俯伏)하였으나 윤유(允兪)를 내리지 않으셨고, 6, 7차례에 걸쳐서 청대(請對)하였으나, 굳이 거절하시기를 더욱 심하게 하여 끝내 한 번도 청광(淸光)을 뵐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니, 다만 성의(誠意)가 천박하여 능히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므로, 신 등의 죄는 만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하겠습니다. 지난밤에 내리신 비지(批旨)는 더욱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받들어 읽기를 절반도 되기 전에 심담(心膽)이 모두 떨어져서 경황(驚惶)·진계(震悸)한 나머지 앙대(仰對)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당초 비망기(備忘記) 중의 ‘대소(大小) 국사(國事)를 모두 세제(世弟)에게 재단(裁斷)하도록 하라.’는 교지(敎旨)는 실로 국조(國朝) 이래로 있지 않았던 일이니, 신 등이 비록 만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하더라도 결단코 감히 봉승(奉承)할 수 없습니다. 정유년의 일에 이르러서는 바로 선조(先朝)에서 재정(裁定)한 것이며, 또 절목(節目)의 구별(區別)도 있으니, 그것이 ‘모두 세제(世弟)에게 재단(裁斷)하도록 하라.’는 분부와 비교해 볼때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 성상의 하교는 지성(至誠) 측달(惻怛)한 데서 나왔으니, 전하의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 또한 어찌 감히 경솔하고 성급한 것에 구애를 받아 모조리 어기고 거절하여 우리 전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조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다만 정유년의 절목(節目)에 따라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고, 차자가 들어간 뒤 정청을 드디어 중지하였다. 이날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이 약방(藥房) 문안(問安) 때문에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기를,

"지난밤에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고 여러 대신(大臣)들이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를 청하여 모여 앉혀 놓고 묻기에, 신이 ‘이 일은 비록 한 해가 지나고 세월이 바뀐다 하더라도 절대로 승순(承順)할 이치가 없다.’며 누누이 쟁집(爭執)하였더니, 여러 대신들이 ‘우선 진차(陳箚)하여 대죄(待罪)하고 이어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진달(陳達)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대신의 차자 내용을 삼가 들으니, 정유년의 절목에 따라 시행할 것을 청했다 합니다. 아! 한밤중에 갑자기 소견(所見)을 변경하여 의논하지 않은 채 국사를 같이 처리할 신하들이 이와 같은 종전에 없던 해괴한 일을 하게 되었으니, 신은 진실로 그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전후에 걸친 성상의 하교는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비답에 지나지 않는데, 몸이 대신(大臣)의 지위에 있으면서 힘을 다해 광구(匡救)할 의리는 생각지 않고 조급히 서둘러 봉행(奉行)하기를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 듯이 하였으니, 그 마음의 있는 바는 길 가는 사람들도 알 수가 있습니다. 임금을 망각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이루 다 처벌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쾌히 성명(成命)을 거두시어 신인(神人)의 희망을 위로하소서."

하니, 승지(承旨) 홍계적(洪啓迪)이 상소를 물리치고 임금에게 올리려 하지 않았다. 이광좌(李光佐)·이태좌(李台佐)·이조(李肇)·김연(金演) 등이 조방(朝房)에 있으면서 청대(請對)하여 다시 간쟁할 것을 함께 의논하였다. 우의정 조태구(趙泰耉)선인문(宣仁門)으로부터 사약방(司鑰房)에 들어가 앉아서 사람을 승정원(承政院)에 보내 청대하고, 이광좌 등은 금호문(金虎門)을 통해서 들어가 또한 각각 청대하였다. 승지 홍계적(洪啓迪) 등이, ‘조태구가 바야흐로 대간(臺諫)의 논핵을 당하였는데, 어찌 감히 청대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물리치고 임금에게 아뢰지 않고 왕복(往復)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양사(兩司)의 관원이 막 대각(臺閣)에 나왔다가 조태구가 대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우선 그를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다. 계사(啓辭)가 미처 임금에게 올라가지 않았는데, 사알(司謁)이 합문(閤門)으로부터 승정원으로 허둥지둥 달려나와 조태구를 인견(引見)한다는 것을 전교(傳敎)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전(殿)에 나와 계십니다."

하니, 승지 등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합문 밖으로 나아갔다. 이때 대궐의 안팎이 물끓듯 진동(震動)하였다. 김창집 등은 이미 차자(箚子)를 올렸고 조태채는 질병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다. 김창집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 등과 비변사(備邊司)에 있으면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조태구가 장차 입대(入對)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 허둥지둥 지름길로 빠른 걸음으로 합문으로 나아갔는데, 조금 후에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뒤좇아 당도하여 모두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영부사(領府事) 이이명(李頤命)·좌의정 이건명(李健命)·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인견(引見)하였으며,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 판돈녕(判敦寧) 송상기(宋相琦), 행 좌참찬(行左參贊) 최석항(崔錫恒), 공조 판서(工曺判書) 이관명(李觀命),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의현(李宜顯), 행 사직(行司直) 이광좌(李光佐), 청은군(淸恩君) 한배하(韓配夏),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조(李肇),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연(金演),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집(李㙫),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태좌(李台佐),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재로(金在魯),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병상(李秉常), 행 사직(行司直) 이정신(李正臣), 승지(承旨) 홍계적(洪啓迪)·한중희(韓重熙)·안중필(安重弼)·유숭(兪崇)·조영복(趙榮福)·사간(司諫) 어유룡(魚有龍), 응교(應敎) 신절(申晢),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 교리(校理) 이중협(李重協),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 정언(正言) 신무일(愼無逸)·황재(黃梓)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천만 뜻밖에도 갑자기 비상(非常)한 하교(下敎)를 받고서 신 등은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정쟁(庭爭)하였으나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어제 밤에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받고 보니 한결같이 억지로 떠들어댄다는 것 또한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아침에 차자를 올려 앙품(仰稟)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우상(右相)의 입대(入對)로 인하여 같이 들어와 뵙게 되니, 신 등의 극력 간쟁하지 못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오늘 천안(天顔)을 뵙게 된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신은 비망기가 갑자기 내려져 중외(中外)가 경황(驚惶)한다는 것을 듣고 감히 스스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은 입장에 있다고 해서 물러나 향려(鄕廬)에 있을 수만은 없기에, 성(城) 밖에 와서 엎드려 있으면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며 진달하였으나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갑자기 대신(大臣)이 이미 정청(庭請)을 정지시켰다는 것을 듣고서 신은 가슴이 무너지는 절박함과 놀라움을 견딜 수 없기에 사생결단하고 반드시 간쟁하고자 감히 와서 청대(請對)하여 전하의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니, 이것은 신(臣)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바로 나라 사람들의 말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화열(火熱)이 오르내리는 것으로 인해 기무(機務)를 그만두려고 하시지만, 화열이 올라올 때에는 잠시 재결(裁決)을 중지하셨다가, 화열이 내리기를 기다려 마음이 안정되고 뜻이 편안해지면 저절로 화기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안개처럼 흩어져 지려(志慮)가 청명(淸明)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을 때 사물이 닥쳐와서 거기 순응(順應)하게 된다면 사무(事務)가 지체됨이 없을 것이니, 질병을 다스리는 일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병행되어 어그러짐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국가(國家)는 전하의 국가가 아니고 바로 조종(祖宗)의 국가입니다. 영고(寧考)께서 전하께 부탁한 것이 어떠하였으며, 신인(神人)이 전하께 의귀(依歸)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대보(大寶)의 위(位)는 군주가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지난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군주(君主)가 한갓 자기 한 사람의 사정(私情)을 따라서 마음내키는 대로 곧장 실행하는 것이 전하께서 오늘날 하는 바처럼 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백수(白首)의 노신(老臣)이 선대왕(先大王)께서 승하하신 날 죽지 못하고 차마 오늘의 이러한 일을 보게 되었으니, 신이 이 일에 있어 능히 광구(匡救)하지 못한다면, 비단 전하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또한 선왕(先王)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신이 산들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일 반한(反汗)의 명을 얻지 못한다면 죽음이 있을 뿐이니, 청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감히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이어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시었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차례대로 되풀이하면서 진청(陳請)하였고, 이광좌·유복명이 더욱 극력 간쟁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어제의 비지(批旨)에는 더욱 차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었습니다. 밤이 깊은 뒤라 문자(文字)로 다시 진달하기가 어려웠고, 또 절차(節次)가 점차 증가하여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까 두려웠기 때문에 감히 절목(節目)을 거행하자는 뜻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었던 것이니, 실로 마지못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내리신 분부를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니, 반드시 환수하게 하려는 뜻이야 신 또한 어찌 여러 신하들과 다르겠습니까? 이제 만일 일전에 내리신 비지를 도로 거두신다면, 신이 비록 만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사피(辭避)하겠습니까?"

하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날마다 청대(請對)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소견을 아뢴 계사(啓辭)는 아침에 들어갔는데 저녁에야 비답(批答)이 내려왔으니, 이와 같은데 어찌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어젯밤에 내리신 전교(傳敎)는 전고(前古)에 듣지 못하던 일이라 바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2품 이상의 관원을 불러모아 의견을 물었더니, 말하는 바가 각자 같지 않았습니다. 신 등은 거듭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계책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들으니, 을유년169) 선대왕(先大王)께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셨을 때 고(故)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이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서신(書信)을 보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쟁하더라도 만일 혹시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우선 승순(承順)하여 사무(事務)에 참결(參決)하기를 청하는 것이 이득(利得)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여러 대신들과 서로 의논하여 차자(箚子)로써 진달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의 청을 굽어 따르시어 조속히 성명(成命)을 회수 할 것을 명하신다면, 어찌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최석항이 부연하여 말하기를,

"선왕조(先王朝) 을유년의 전선(傳禪)하려 한 일 또한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쟁하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움으로 인해서 곧바로 도로 중지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계술(繼述)의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김창집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바로 대리(代理)하는 것인데, 최석항이 부연하여 이에 을유년의 일에 비교하니, 인심(人心)이 어찌 더욱 놀라고 의혹스러워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비망기를 환수하기를 청할 마음이야 어찌 여러 사람들보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시 서로 잇따라 극력 간쟁하여 수작(酬酢)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답하지 않았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억지로 떠들어댄 것이 몹시 황공스러운 일인 줄 알지만, 신이 극력 간쟁하지 못한 죄를 먼저 다스린 후에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이이명은 말하기를,

"신 등이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누차 청대(請對)하였으나 한 번도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이것은 모두 신 등이 성의가 천박한 죄입니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전후의 비망기를 쾌히 환수할 것을 허락한 후에야 온 나라의 파탕(波蕩)된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사관(史官)을 보내 전후의 비망기를 가지고 들어와 성상 앞에 올려놓도록 하소서."

하고, 조태구가 말하기를,

"이제 대신(大臣)의 말로 인하여 이러한 환수하라는 분부가 있게 되었으니, 인심이 이제 진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물러나 구학(丘壑)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창집·이이명·조태구가 잇따라 ‘자주 의관(醫官)의 입진(入診)을 허락하여 증상에 따라 약(藥)을 의논할 것’을 청하고, 민진원 또한 ‘자주 신료(臣憭)를 접견하여 가부(可否)를 상제(相濟)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간 뒤에 승지(承旨)와 삼사(三司)에서는 남아서 일을 아뢰었다. 홍계적 등이 나와 말하기를,

"본원(本院)에서 바야흐로 우상(右相)이 함부로 들어와 청대(請對)한 잘못을 배척하여 계품(啓稟)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인견(引見)하신다는 분부를 갑자기 내렸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디로부터 우상이 들어왔다는 것을 들으셨는지요? 군주의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어찌 내외(內外)로 하여금 방비가 없도록 하고 곁으로 사경(私逕)을 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입고(入告)한 사람을 명백하게 적발하여 후일의 폐단을 영구히 막아서 군정(群情)의 의혹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어유룡·박치원·신무일·황재 등이 아뢰기를,

"조태구는 대각(臺閣)에서 죄를 성토하는 시기에 당하여 이에 감히 궐문(闕門)으로 함부로 들어와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나라의 기강이 비록 여지(餘地)가 없다 하지만 하루라도 나라가 있는 이상 그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우선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태구선인문(宣仁門)을 통해서 들어와 청대(請對)하였으나, 승정원에서는 대계(臺啓)가 바야흐로 진행 중에 있기 때문에 품달(稟達)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사알(司謁)이 입시(入侍)하라는 일을 전교(傳敎)하였습니다. 대저 신린(臣隣)을 접견함에 있어서 후사(喉司)를 경유하는 것은 바로 3백 년 동안 시행해 온 정규(定規)입니다. 이제 대신(大臣)이 어떤 사경(私徑)을 통해서 미품(微稟)하여 들어왔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으니, 이런 길이 한 번 열린다면 비록 북문(北門)의 변(變)170) 이 있다 하더라도 방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승전색(承傳色)과 사알을 잡아다 문책하여 엄중하게 다스리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박치원이 아뢰기를,

"최석항이 연중(筵中)에서 진달(陳達)하면서 곧바로 오늘날 대리(代理)의 명(命)을 을유년 전선(傳禪)의 일로 지적하여 인심을 놀라게 하고 의혹스럽게 만들려는 계획을 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당초 비망기가 깊은 밤중에 내려졌을 때 최석항은 혹시나 다른 사람이 같이 들어갈까 염려하였는데, 대신이 막 나아가자 곧바로 스스로 독대(獨對)하여 여려 신하들이 극력 간쟁할 수 있는 길을 미리 막았고, 자기 혼자서 처리하려는 자취를 자랑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정태(情態)는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바가 있으니, 청컨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병을 숨길 수 있는가? 성인(聖人)도 또한 질병이 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의 고명편(顧命篇)에 이르기를, ‘이제 하늘이 나에게 질병을 내려 장차 일어나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성왕(成王)이 그 병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임금이 질병이 있으면 신하가 숨길 수 있겠는가? 늘 있는 병은 실덕(失德)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경》의 금등편(金縢篇)에 이르기를, ‘너희 원손(元孫) 모(某)가 나쁜 병을 만났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주공(周公)무왕(武王)의 병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대저 임금에게 불행히 병이 있는데, 좌우(左右)에서 나라의 주권을 도둑질하여 사직(社稷)이 장차 망하게 되었다면, 비록 즉위(卽位)한 원년(元年)일지라도 저사(儲嗣)를 세울 수가 있는 것이고, 저사를 이미 세웠다면 어찌 국정(國政)을 섭정(攝政)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군주가 병이 있는데도 동궁(東宮)이 섭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난신(亂臣)이고, 군주가 병이 없는데도 동궁이 섭정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난신이다. 아! 임금께서 병이 있는가, 병이 없는가? 최석항이 전상(殿上)에서 모시고 있는데 임금이 그를 국문하라 명하시고 신치운(申致雲)이 전상에서 모시고 있는데 임금이 그를 가두라고 명하신 후에야 저들의 무리가 비로소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성상의 질병을 끝내 숨길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사대신(四大臣)이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린 것이 어찌 신하의 절개가 없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대신들은 나라가 반드시 멸망할 것을 보고도 오히려 일조(一朝)의 화(禍)를 고려하여 능히 왕세제(王世弟)를 높여서 떠받들어 국정(國政)을 섭정하기를 청하지 못하였다면, 그들의 불충(不忠)한 죄가 저들의 무리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조태구 등이 승정원을 경유하지 않고 들어옴에 미쳐서 위기(危機)가 위로 동궁(東宮)에게 닥쳐서 실로 말하기 어려운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김창집 등이 이에 창황히 따라 들어가 같은 목소리로 환수(還收)를 청하였으니, 또한 그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그들이 멋대로 장살(狀殺)을 행함에 있어서 오로지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죄안(罪案)으로 삼았고, 을사년171) 이후에 이르고 나서는 스스로 연명 차자에 위배한 자가 도리어 그들의 역안(逆案)이 될 줄을 알았기 때문에 드디어 삼변(三變)의 설을 만들어내어 처벌하였다. 삼변은 바로 정청(庭請)·연차(聯箚)·수환(收還)이다. 이른바 ‘삼변’이란 것은 그것이 변한 것이 아니고 단지 충성을 하는 데 한결같았던 것을 볼 수 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54면
  • 【분류】
    정론(政論)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역사(歷史)

  • [註 169]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 [註 170]
    북문(北門)의 변(變) : 중종(中宗) 14년(1519)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을 모함하여 사사(賜死) 또는 유배(流配)하게 된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말한 것. 북문은 경복궁(景福宮)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 [註 171]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甲戌/領議政金昌集、領中樞府事李頣命、判中樞府事趙泰采、左議政李健命, 上箚陳代理節目。 其箚曰:

近日忽有非常之擧, 伏閤四日, 不賜允兪, 請對六七, 牢拒愈甚, 終未得一瞻淸光, 只恨誠意淺薄, 不能感回天心。 臣等之罪, 萬死猶輕。 去夜所下批旨, 尤非臣子所忍聞, 奉讀未半, 心膽俱墜, 驚惶、震悸, 莫知所以仰對。 第伏念當初備忘中, 大小國事, 竝令裁斷之敎, 實國朝以來所未有之事, 臣等雖萬被誅戮, 決不敢奉承。 至於丁酉事, 自是先朝之裁定, 且有節目之區別, 其視竝令裁斷之命, 不啻有間。 況此聖敎, 出於至誠惻怛, 爲殿下臣子者, 亦安敢以輕遽爲拘, 一倂違拒, 以傷我殿下之心哉? 伏乞聖明, 亟命有司, 只依丁酉節目, 稟旨擧行。

箚入, 庭請遂輟矣。 是日, 左參贊崔錫恒, 以藥房問安, 詣闕上疏言:

去夜伏承聖批, 諸大臣請二品以上、三司, 會坐詢問。 臣以此事, 雖經年閱歲, 萬無承順之理, 縷縷爭執, 諸大臣以姑爲陳箚待罪, 仍請入對陳達爲言。 卽伏聞大臣箚語, 請依丁酉節目施行。 噫嘻! 半夜之間, 猝變所見, 不謀同事之臣, 爲此無前之駭擧, 臣誠莫曉其故。 前後聖敎, 不過拒諫之批, 而身爲大臣, 不思竭力匡救之義, 汲汲奉行, 如恐不及, 其心所在, 路人所知。 忘君負國之罪, 可勝誅哉? 臣竊痛之。 伏乞快收成命, 以慰神人之望。

承旨洪啓迪却不肯徹, 李光佐李台佐李肇金演等, 在朝房共議, 請對復爭。 右議政趙泰耉, 自宣仁門入坐司鑰房, 送人政院請對, 李光佐等, 由金虎門入, 亦各請對。 承旨洪啓迪等, 以泰耉方被臺論, 安敢請對, 却不上聞, 往復不已。 兩司官方詣臺, 聞泰耉入闕, 請爲先遠竄。 啓未及徹, 司謁自閤門, 疾趨政院, 傳敎引見泰耉, 且言: "上已御殿。" 承旨等惶駭詣閤外。 是時, 闕內外震動如沸。 昌集等旣上箚, 泰采以疾歸第。 昌集頣命健命, 在備局, 講定節目, 夜過半, 忽聞泰耉將入對, 大驚惶, 從徑路疾趨上閤。 俄而, 二品以上、三司諸臣, 皆踵到, 幷請入對。 上御進修堂, 引見領議政金昌集、領府事李頣命、左議政李健命、右議政趙泰耉, 行戶曹判書閔鎭遠、判敦寧宋相琦、行左參贊崔錫恒、工曹判書李觀命、吏曹判書權尙游、兵曹判書李晩成、禮曹判書李宜顯、行司直李光佐淸恩君 韓配夏、刑曹參判李肇江原監司金演、禮曹參判李㙫江華留守李台佐、兵曹參判金在魯、吏曹參判李秉常、行司直李正臣、承旨洪啓迪韓重熙安重弼兪崇趙榮福、司諫魚有龍、應敎申晳、掌令朴致遠、校理李重協、持平柳復明、正言愼無逸黃梓等入侍。 昌集言: "千萬意外, 忽承非常之下敎, 臣等率百官庭爭, 不能感回天聽。 昨夜又承不忍聞之敎, 一向强聒, 亦有不敢, 朝者陳箚, 有所仰稟。 今因右相入對, 得以同入, 臣等不能力爭之罪, 萬死無惜。" 泰耉曰: "今日得瞻天顔, 死亦無恨。 臣聞備忘忽下, 中外驚惶, 不敢以身遭臺劾, 退處鄕廬, 來伏城外, 屢疏陳籲, 未蒙兪音。 今日遽聞大臣, 已停庭請, 臣不勝崩迫震駭, 欲以死生必爭, 敢來請對, 以冀回天。 此非臣一人之言, 乃國人之言也。 殿下, 雖以火熱升降, 欲謝機務, 火升之時, 姑停裁決, 以俟火降, 心定意平, 則自可烟消霧散, 志慮淸明。 如此之時, 物來順應, 事務無滯, 治病治國, 兩行不悖。 殿下何不念及於此也? 國家非殿下之國家, 乃祖宗之國家。 寧考之付托於殿下者, 何如也, 神人之依歸於殿下者, 何如也? 大寶之位, 非人君自私之地。 歷攷前史, 未有人主徒循一己之私, 率意徑行, 如殿下今日之爲者也。 白首老臣, 不死於遺弓之日, 忍見今日此擧, 臣於此, 不能匡救, 則不特負殿下也, 亦所以負先王也。 臣生亦何爲? 如不得反汗之命, 有死而已, 不得請則不敢退。" 仍泣下沾襟。 諸臣各以次反覆陳請, 光佐復明爭之尤力。 昌集又言: "昨日批旨, 尤有不忍聞者。 夜深後難以文字更達, 且恐節次層加, 以至難言之境, 敢以節目擧行之意, 箚稟, 不得已也。 今諸臣以收還爲請, 必欲收還之意, 臣亦何異於諸臣哉? 今若收還前旨, 臣雖萬被誅戮, 何敢辭乎?" 健命曰: "連日請對, 終未蒙許, 所懷之啓, 朝而入者, 夕而始下。 如此而何望感回天心? 昨夜傳敎, 前古所未聞之事, 直欲鑽地以入而不可得。 會問二品以上, 所言各自不同。 臣等反覆思惟, 不知所以爲計, 而曾聞乙酉先大王之下備忘也, 故相臣尹趾完, 移書諸大臣, 以爲群下力爭, 而若或至於難處之境, 則不若姑爲承順, 請以參決事務之爲得, 故臣與諸大臣, 相議陳箚, 而今若自上俯循群下之請, 亟命收回成命, 豈不大幸?" 錫恒言: "先王朝乙酉傳禪, 亦以諸臣力爭之難咈, 旋卽還寢。 殿下何不思繼述之道乎?" 昌集曰: "今日事, 乃代理, 而錫恒, 乃比於乙酉時事, 人心尤豈不驚惑乎? 臣雖無狀, 請還備忘之心, 豈下於諸人乎?" 諸臣復相繼力爭, 請賜酬酢, 上終不答。 昌集曰: "强聒極知惶恐, 而先治臣不能力爭之罪, 然後還收成命宜矣。" 頣命曰: "臣等烏得無罪? 屢請對而一不許, 此皆臣等誠意淺薄之罪也。" 昌集又曰: "前後備忘, 快許收還, 然後擧國波蕩之心, 可以鎭定矣。" 上曰: "唯。" 昌集白: "遣史官持入前後備忘, 納置上前。" 泰耉言: "今因大臣之言, 有此還收, 人心自此可定。 臣雖退死丘壑, 有何餘憾?" 昌集頣命泰耉繼請頻許醫官入診, 對症議藥, 鎭遠亦請頻接臣僚, 可否相濟, 上竝不答。 諸臣退, 而承旨、三司留奏事。 洪啓迪等進曰: "本院, 方斥右相冒入請對之失, 不許啓稟, 而引見之命遽下。 殿下從何得聞右相之入來乎? 人君爲國之道, 豈可使內外無防, 私逕旁開乎? 其入告之人, 不可不明白摘發, 永杜後弊, 以破群情之疑惑。" 有龍致遠無逸等啓曰: "趙泰耉當臺閣討罪之日, 乃敢擅入闕門, 略無顧忌。 今日國綱, 雖無餘地, 一日有國, 則不可一任其恣睢。 請爲先遠竄。" 上不允。 又啓曰: "趙泰耉宣仁門入來請對, 政院以臺啓方張, 不許稟達, 而司謁以入侍事傳敎。 夫臣隣晉接, 關由喉司, 乃三百年定規。 今未知大臣, 自何私逕, 微稟入來之由? 此路一開, 雖有北門之變, 無以隄防。 請承傳色、司謁, 拿問嚴覈。" 上允之。 致遠啓曰: "崔錫恒筵中陳達, 輒以今日代理之命, 指爲乙酉傳禪之事, 以爲驚惑人心之計, 其心所在, 誠不可測。 且當初備忘, 下於深更, 錫恒或恐他人之同入, 大臣方進, 而徑自獨對, 逆杜諸臣力爭之路, 要衒自家獨辦之迹。 其爲情態, 有不忍正視, 請削奪官爵, 門外黜送。" 上不允。

【史臣曰: "疾可諱歟? 曰聖人亦有疾也。 故《顧命》曰: "今天降疾, 殆弗興弗悟。" 是成王不諱其疾也。 君有疾, 臣可諱歟? 曰常疾非失德也。 故《金縢》曰: "惟爾元孫某, 遘厲虐疾。" 是周公不諱武王之疾也。 夫人君, 不幸有疾, 而左右竊國之柄, 社稷將亡, 雖元年可以建儲也, 儲旣建矣, 烏可以不攝國政乎? 故人君有疾, 謂東宮不可攝之者, 亂臣也, 人君無疾, 謂東宮可以攝之者, 亦亂臣也。 嗚呼! 上有疾歟? 無疾歟? 崔錫恒侍於殿上, 而上命鞫之, 申致雲侍於殿上, 而上命囚之, 然後彼輩始出語人曰: "上之疾, 終不可掩也。" 苟如是, 則四大臣之所以聯箚者, 何以詆其無臣節也? 四大臣者, 見國之必亡, 而猶顧慮一朝之禍, 不能宗戴王世弟, 請攝國政, 則其不忠之罪, 與彼輩, 將何以異哉? 及泰耉等之不由政院而入也, 危機上逼于東宮, 實有難言之慮, 故昌集等, 乃倉皇隨入, 同聲收還, 亦其勢不得不然也。 方其肆行戕殺也, 專以聯箚爲案, 及至乙巳以後, 則自知貳於聯箚者, 反爲渠輩逆案, 故遂做出三變之說, 以罪之, 卽庭請也, 聯箚也, 收還也。 所謂三變者, 非變也, 秪見其一於爲忠也。"】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54면
  • 【분류】
    정론(政論)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