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대왕 묘지문[誌文]
묘지문(墓誌文)에 이르기를,
"아! 삼가 생각건대 우리 숙종 현의 광륜 예성 영렬 장문 헌무 경명 원효 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의 휘(諱)는 순(焞), 자(字)는 명보(明普)로,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001) 이고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손자이다. 모비(母妃)는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따님이다. 왕(王)의 소자(小字)는 용상(龍祥)이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꿈을 꾸시니 명성 왕후의 침실(寢室)에 어떤 물건이 이불로 덮여 있었는데, 열어보니 용(龍)이었다. 효묘께서 꿈에서 깨신 뒤 기뻐하여 말하기를, ‘장차 원손(元孫)을 얻을 길조(吉兆)로다.’ 하고, 이에 미리 소자(小字)를 지어 기다리게 하였다. 신축년002) 8월 15일 신유(辛酉)에 이르러 왕이 경덕궁(景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탄강(誕降)하시니, 실로 숭정(崇禎)003) 기원 14년이었다. 왕이 다섯 살 때 명성 왕후가 산병(産病)이 있어 진지를 드시지 못하자, 왕이 반드시 꿇어앉아 미음을 올렸고 근심하는 빛이 안색에 나타났다. 왕후가 말하기를, ‘네가 권하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며 억지로 죽을 드셨다. 왕이 일찍이 기르던 참새 새끼가 있었는데, 이 새가 죽자 버리지 말고 묻어주도록 하였다. 내국(內局)004) 에서 우락(牛酪)을 취하는데 그 송아지가 비명을 많이 지르자, 왕이 그 까닭을 묻고 나서는 우락을 먹지 않았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정성과 동물에게까지 미치는 인덕(仁德)이 어려서부터 이미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을사년005) 에 여러 대신(大臣)들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좌명(金佐明)·김수항(金壽恒) 등을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삼아 드나들며 강학(講學)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는데, 송준길이 처음 왕(王)을 뵙고 현묘(顯廟)께 고(告)하기를,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福)이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현묘께서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왕(王)을 불러 나오게 하니, 왕이 송준길을 향하여 재배(再拜)하였는데, 예모(禮貌)가 법도에 맞았다.
정미년006) 에 책봉(冊封)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기유년007) 에 어가(御駕)를 따라 태묘(太廟)를 배알(拜謁)하고 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다.
경술년008) 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신해년009) 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갑인년010) 에 현종이 승하[禮陟]하자, 왕(王)이 보위(寶位)를 계승하였는데, 슬픈 호곡(號哭)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니, 백관(百官)과 위사(衞士)들이 애처로와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왕은 왕위를 이은 이래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아 선왕(先王)의 뜻과 사업(事業)을 계승했으며, 대신(大臣)들에게는 일에 따라 계도(啓導)해 줄 것을 권면하였다. 왕이 한 마음으로 학문을 익히며 밤이 깊도록 독서를 쉬지 않으니, 명성 왕후 또한 그 지나치게 부지런한 데 걱정하였다. 신릉(新陵)의 석물(石物) 역사(役事)가 매우 거창하였는데, 왕이 자교(慈敎)를 받들어 영릉(寧陵)의 옛 석물을 옮겨다 쓰도록 명해 백성들의 힘을 크게 덜었다. 그 당시 팔로(八路)에 재황(災荒)이 들어 백성 중에 간혹 기곤(飢困)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을 매고 죽는 자가 있었다. 왕이 크게 놀라고 측은하게 여겨 빨리 여러 도(道)에 하유(下諭)하여 백성들이 구렁에 뒹굴거나 유산(流散)하는 것을 면하게 하였다. 신해년011) 이전에 묵은 포곡(逋穀)을 면제해 주고, 금년의 조부(租賦)는 지용(支用)할 만큼 계산해 그 수량을 경감해 주며, 기내(畿內)는 부역(賦役)이 빈번하므로 진상(進上)하는 호피(虎皮)를 특별히 감해 줄 것 등을 명했던 것이다. 또 첨정(簽丁)을 정지하고 상방(尙方)012) 과 태복(太僕)013) 에서는 우선 연시(燕市)의 무역(貿易)을 폐지하도록 하니, 시초(始初)의 덕화(德化)에 인심이 흡족해 하였다.
을묘년014) 에는 황금(黃金) 1백 60냥과 은(銀) 1만 6백여 냥을 지부(地部)015) 에 내하(內下)016) 하여 관북(關北)의 포곡(逋穀) 8만여 석(石)을 면제하도록 명하였다. 또 하교(下敎)하기를, ‘바야흐로 애구(哀疚)하는 가운데 있으니 방물(方物)이나 물선(物膳)을 잠시 진상하지 말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기도를 올리고 특별히 여수(慮囚)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홍수·가뭄과 기근(飢饉)에 대하여 우근(憂勤)·척려(惕慮)함이 이로부터 40여 년 동안 마치 하루와 같았다. 언제나 번신(藩臣)에게 하서(下書)하여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고 구제할 것을 당부하였고, 민간(民間)에 효유(曉諭)하여 향토(鄕土)를 떠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세시(歲時)에는 반드시 별도로 유시하여 모두 일찰(一札)017) 십행(十行)으로 지극한 뜻이 애연(藹然)하였다.
계해년018) 에 어사(御史)를 따로 파견하여 여러 도(道)에 선유(宣諭)하니, 부로(父老)로서 지팡이를 짚고 가 듣고서 감읍(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무릇 요역(徭役)를 경감하고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며, 묵은 포곡(逋穀)을 감면하고 새로운 공납을 정지한 것이 전후로 몇 억만(億萬)으로 셀 정도였다. 만일 경비가 바닥이 나면 군량(軍糧)의 저축을 옮겨 쓰고 내탕(內帑)의 재물까지 기울였으되, 또한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용(御用)하는 인삼(人蔘)은 경감하여 절반만 바치게 하였고, 세공(歲貢)019) ·삭선(朔膳)020) 은 여러번의 절감을 거친 나머지 지금까지 태관(太官)021) 의 공봉(貢奉)으로 복구되지 않은 것이 많이 있다.
기후(氣候)가 가물면 묘사(廟社)와 교단(郊壇)에 친히 기도를 올리는 일이 많았는데,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재실(齋室)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책축(冊祝)은 반드시 자신을 책망하도록 하였다.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죄수(罪囚)를 소석(䟽釋)했고, 혹은 길가에 연(輦)을 멈추고 붙잡혀 오는 죄수를 타일러 보내기도 하였으며, 또는 왕옥(王獄)에 거둥하여 친히 경중(輕重)을 처결하기도 하였다.
재해를 입은 지방은 반드시 어사(御史)를 보내 진휼(賑恤)을 감독하게 하였다. 탐라(耽羅)는 멀리 해외(海外)에 있는데, 몇 년 동안 연이어 기근(飢饉)이 들자, 또 근신(近臣)에게 명해 선박에 곡식을 실어 가져다 먹이도록 하였다. 진도(珍島)에서 10년 동안 곡식이 여물지 않자, 원기(寃氣)가 있는지 의심하여 방문(訪問)하도록 유시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왕의 깊은 인애(仁愛)와 지극한 은택으로 사람의 골수(骨髓)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왕은 재앙을 만나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박상(剝床)보다도 심하게 하였다. 큰 재앙 이외에 비록 성도(星度)를 침범하거나 햇무리가 해의 주위를 둘렀더라도 반드시 교지를 내려 자책(自責)하며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였고, 또 여러 신하들에게는 화합하는 자세와 공정한 마음을 가질 것을 당부하였는데, 하늘을 공경하고 극히 조심하는 정성이 저절로 언어의 겉에 드러났다. 만기(萬機)의 수응에 조금도 지체됨이 없었고, 간혹 아침밥을 저녁에 들며 새벽이 다가왔건만 그래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을유년022) 에 내선(內禪)023) 의 명이 있어 신(臣) 또한 여러 신하들을 따라 입대(入對)하였는데, 결국 반한(反汗)024) 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우러러 성교(聖敎)를 받들고 보니, 몸을 손상한 빌미는 대개 우근(憂勤)에 있었다. 성심(聖心)이 왕위를 벗어던지고 만년을 우유자적하게 보내려고 지극히 바랐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질병이 난 뒤 왕세자가 정사를 대신하였으나, 왕은 그래도 국사(國事)에 경경(耿耿)025) 하며 편히 쉬실 여가가 없었다. 신(臣)이 감히 심신(心神)을 편하게 수양해야 한다는 말로 한가로이 모시고 있을 때 간곡하게 말씀드리면 왕이 ‘나의 습성이 그러해서 변경할 수 없노라.’ 하였다.
왕이 병환을 앓은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경자년026) 6월 초8일 계묘(癸卯)에 경덕궁(慶德宮)의 융복전(隆福殿)에서 여러 신하들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시니, 재위(在位) 46년이고 수(壽)는 60이었다.
아! 슬프도다. 이날 온 서울의 백성들이 궐하(闕下)로 달려나왔고, 비록 대례(儓隷)·하천(下賤)일지라도 부모(父母)처럼 슬피 곡하며 모두 ‘우리 성주(聖主)께서 백성들 때문에 수를 줄이셨다.’고 하였다. 혜순 왕비 전하(惠順王妃殿下)께서 대신(大臣)에게 하교(下敎)하시기를, ‘성상의 평일의 성덕(盛德)을 조신(朝紳)들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래도 혹시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수응(酬應)이 몹시 넓고 많아 밤이나 낮이나 쉬지 못하셨고, 더러는 침선(寢膳)을 폐하기도 하셨다. 공경스럽게 상천(上天)을 섬기며 재앙을 만나면 두려워하셨고, 혹시 비와 눈이 제때를 어기거나 바람과 햇볕이 조화되지 않아 농사에 피해가 있으면 우려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흐리고 개인 날씨며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 것인가 하는 것 등을 혹시 스스로 살피기가 어려우면 반드시 시자(侍者)에게 물어보셨다. 나라일과 백성에 대한 걱정을 잠시나마 잊지 않으시며 항상 마치 미치지 못한 듯하시더니, 근로(勤勞)가 빌미가 되어 성수(聖壽)를 단축시키고 말았다. 상장(喪葬)의 제구(諸具)에 있어서는 경비(經費)를 진념(軫念)하시어 일찍이 조치(措置)가 있었으니, 제기(祭器)를 제조하는 은(銀)을 마땅히 상방(尙方)에 내릴 것이다. 또 앞으로 백성을 진휼(賑恤)할 것에 대비하여 은자(銀子) 3천 7백여 냥을 별도로 마련해 두었으니, 지금 국장(國葬)의 비용에 보태 쓴다면 민폐(民弊)를 덜 수 있을 것이다. 대내(大內)에 보관해 둔 의대(衣襨)027) 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니, 해조(該曹)에서는 다만 적어서 보이는 것만 기다렸다가 준비해 올려 평일에 비용을 줄이시던 뜻에 힘써 따르도록 하라.’ 하셨다. 또 하교하시기를, ‘성상께서 국사(國事)에 근로(勤勞)하신 이외에 서사(書史)를 매우 좋아하시어 제술(製述)이 아주 많았다. 조정(朝廷)에 보일 만한 것들을 일찍이 이미 깊이 보관해 두었노라.’ 하시고, 이에 동궁(東宮)에게 명하여 내다보이도록 하셨다. 아! 우리 성비(聖妃)께서 성덕(盛德)을 보고 느끼시어 유의(遺意)를 받들어 계승하시는 것은, 지인(至仁)을 선양(宣揚)하고 방본(邦本)을 영원히 굳건하게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신(臣)이 내하(內下)하신 어제(御製)를 엎드려 읽어보면 대부분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걱정한 저작이었으니, 무릇 우리 생명을 가진 무리들이 장차 어떻게 선왕(先王)의 은혜를 추보(追報)할 수 있으랴?
옛날에 주공(周公)이 문왕(文王)의 덕(德)을 칭송하기를,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밥 먹을 여가가 없었고 만민(萬民)을 다 화합(和合)하게 하시었다. 천명(天命)을 받으심은 중년이었는데, 그 나라를 다스린 지 50년이었다.’고 하였다.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셨는데도 도리어 문왕이 나라를 다스린 데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천리(天理)이겠는가? 그러나 안일함이 없으셨던 덕은 왕에게 있어서 오히려 그 작은 것일 뿐이다. 왕은 시선(視膳)028) 하는 때부터 양전(兩殿)을 받들어 섬겼으되, 기쁜 낯빛으로 공경하고 순종하였다. 그러다가 국휼(國恤)을 당하자 슬퍼함이 절도를 넘었고, 영여(靈輿)에 배사(拜辭)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명성 왕후께서 병이 많았는데, 왕은 항상 걱정하고 애를 태우며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장렬 대비(莊烈大妃)를 섬김에 있어서도 또한 조금도 차별이 없었다. 거처하는 만수전(萬壽殿)과는 서로 거리가 약간 멀었는데, 왕이 일찍이 대비(大妃)께서 급환이 나셨다는 말씀을 들으시면,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서 문안하였다. 일찍이 양전(兩殿)을 위해 진연(進宴)하려고 하였으나 재해를 만났으므로 중지하였고, 병인년029) 에야 비로소 풍정(豊呈)030) 을 올렸다.
계해년031) 에 명성 왕후께서 승하하시고, 무진년032) 에 장렬 대비께서 또 승하하시니, 왕의 애훼(哀毁)함이 예(禮)를 넘었는데, 한결같이 갑인년033) 과 같았다.
매년 태묘(大廟)에 친히 향사(享祀)하였고, 더러는 무시(無時)로 전알(展謁)하기도 하였다. 봄 가을로 반드시 능(陵)을 참배하여 여러 능을 두루 다 둘러보았는데, 간혹 두세 번에 걸쳐 참배하기도 하였다.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의리를 들어 태조(太祖)의 시호(諡號)를 추가로 올리고, 자수(字數)가 여러 묘(廟)에 비해 모자란다 하여 태종(太宗)의 시호를 추가로 올렸으며, 인조(仁祖)는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고 효종(孝宗)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다 하여 세실(世室)034) 로 정했다. 공정왕(恭靖王)은 예전에 묘호(廟號)가 없었는데 추가로 올려 정종(定宗)으로 했고,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太祖)의 어용(御容)을 모사(摹寫)하여 영희전(永禧殿)에 봉안(奉安)하였다. 무인년035) 에는 단종(端宗)의 대위(大位)를 추복(追復)하였다. 대개 정축년036) 에 선양(禪讓)이 있고 난 이후 인정(人情)이 원울(寃鬱)하게 여겼으나 수백 년 동안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이고, 열성(列聖)께서도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왕이 깊이 생각한 끝에 결단을 내리고 빨리 욕의(縟儀)037) 를 거행하니, 종묘(宗廟)의 의례는 질서가 있게 되었고 신(神)·인(人)이 함께 기뻐하였다. 아울러 그 육신(六臣)들까지 함께 제사지내 신하의 절개를 장려하였다. 중묘(中廟)의 신비(愼妃)는 예(禮)에 처리하기 곤란한 점이 있었으므로, 묘(廟)를 세워 제사하였다.
왕은 종친(宗親)을 대우함에 있어서 은혜가 깊었다. 고(姑)·매(妹)·공주(公主)가 질병이 있거나 상(喪)을 당했을 경우 반드시 모두 친림(親臨)하였다.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가 일찍이 죄(罪) 때문에 폐출(廢黜)되었는데, 왕이 그 원통함을 살피고 그 지위(地位)를 추복(追復)하였다. 그 손자인 이혼(李焜)과 이엽(李熀)이 흉인(凶人)의 무함을 받았으나, 온전할 수 있었으며, 총우(寵遇)가 여전하였다. 역적 종친(宗親)인 이정(李楨)과 이남(李柟)은 그 도당과 불궤(不軌)를 도모하고, 이항(李杭)은 국모(國母)를 해칠 것을 도모하여 모두 경전(磬甸)038) 하였는데, 염습(殮襲)과 장례(葬禮)를 법도대로 행하라고 명하고 은혜를 폐하지 않았다.
왕이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무진년039) 에 후궁(後宮) 장씨(張氏)가 비로소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를 탄생하니, 빨리 원자(元子)의 명호(名號)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기사년040) 에 인현 왕후(仁顯王后)는 사제(私第)로 물러나 살고 장씨를 올려서 왕비(王妃)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갑술년041) 에 하교하기를, ‘기사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진실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살피지 못한 채 잘못 양좌(良佐)042) 를 의심하였었다. 내가 일찍이 공평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따져보고 환히 깨닫게 되어 크게 회한(悔恨)을 느낀 나머지 몸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 윤음(綸音)을 내려서 다시 곤위(壼位)043) 를 바르게 하니, 이는 천리(天理)의 공변됨에서 나온 것이며, 종사(宗社)의 묵묵한 도움을 힘입은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태평한 데로 돌아와 중전이 복위되었으니, 백성에게 두 주인이 없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다. 장씨의 왕후(王后) 인수(印綬)를 회수하라.’ 하였다. 또 기사년에 목숨을 걸고 간(諫)했던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에게 관작(官爵)을 추증하고, 정려(旌閭)할 것과 그때 화(禍)를 즐기고 명의(名義)를 범한 자들을 처형하고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 뒤에 또 하교하기를, ‘지금부터 기록하여 방가(邦家)의 제도로 만들되, 빈어(嬪御)가 후비(后妃)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아!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 안연(顔淵)·민자건(閔子蹇)의 행실을 몸소 행하여 선조(先祖)를 받들며 효도를 생각하고, 종친(宗親)에게 돈독하여 풍속을 순후하게 하며 전열(前烈)에 광휘(光煇)를 더하고, 이륜(彝倫)을 바르게 펴지도록 한 것은 바로 전세(前世)의 현명한 군주들 가운데서도 드물게 듣는 바이다. 이것들은 모두 왕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서 국가에 가르침을 이룬 것으로서,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천하에는 대의(大義)란 것이 있고 이것은 만고(萬古)에 이르도록 없을 수 없는 것인데, 시간이 흐르고 일이 바뀜에 따라 장차 어두워져 사라지려고 하였다. 왕이 홀로 자신의 한 몸으로 이를 짊어지고, 이에 갑신년044) 봄 금원(禁苑)에다 단(壇)을 설치해 의종 황제(毅宗皇帝)를 멀리서 제사하였으니, 숭정(崇禎)의 운(運)이 끝난 날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장차 일을 거행하려는 날 왕이 감상(感傷)에 잠기고 슬퍼하여 천지(天地)가 무너지고 찢어지는 것을 참으로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하였다. 또 궁성(宮城) 북쪽의 정결한 곳에 단(壇)을 마련할 것을 명하여 ‘대보단(大報壇)’이라 이름하고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해마다 제사지냈으니, 임진년045) 에 재조(再造)한 은혜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왕은 일찍이 《대명집례(大明集禮)》를 간행할 것을 명하여 친히 서문(序文)을 지었다. 한인(漢人)으로 흘러 들어와서 우거하는 자에 대해서 그 자신에게는 늠료(廩料)를 주고 그 자손은 수용(收用)하였다. 신(臣)이 일찍이 괴원(槐院)의 고지(故紙) 가운데서 명조(明朝) 성화(成化) 무렵게 하사한 인적(印跡)을 얻어서 올렸는데, 즉시 모각(摹刻)해서 국보(國寶)로 만들라 명하고, 이 다음부터 사위(嗣位)할 때는 청(淸)나라 국보를 사용하지 말고 이 국보를 전(傳)하라고 유명(遺命)하였으니, 대개 장차 만세(萬世)의 자손(子孫)들로 하여금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 《춘추(春秋)》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유독 우리 동방이 대대로 백 년을 지켰으니, 뒷날 중국(中國)이 다시 맑아지면 길이 천하 후세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 점이 더욱 왕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나고 삼고(三古)046) 를 아울러 그 의리를 천지(天地)에 세울 수 있되,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왕은 학문을 좋아하고 문학을 숭상하며, 유학(儒學)을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겨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만년에도 오히려 강연(講筵)을 열어서 경전(經傳)과 서사(書史)를 강론(講論)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제자 백가(諸子百家)로부터 동방(東方)의 문집(文集)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번 열람(閱覽)한 것은 평생 동안 잊지 않았으며, 글을 보면 이치를 분석함이 분명하고 견해가 투철하셨다. 《심경(心經)》을 강론하며 마음의 동정(動靜)을 논하기를, ‘출몰(出沒)이 무상(無常)하고, 쉽게 발동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것으로 마음 같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동(動) 가운데 정(靜)이 있고 정(靜) 가운데 동(動)이 있다.」는 설이 있게 된 것이다.’ 하고, 《주역(周易)》의 납약(納約)047) 의 설을 논하기를, ‘이 경우 대신(大臣)이 어렵고 험난한 시기를 당했을 때 마지못해 이 방도를 쓸 수 있겠지만, 만일 치평(治平)한 세상에 사잇길을 통하여 임금에게 결탁한다면 옳지 않다.’ 하였으며, 진(秦)나라 부소(扶蘇)048) 의 일을 논하기를, ‘군신(君臣)·부자(父子)가 모두 간(諫)할 수 있는 도리가 있으니, 부소가 시서(詩書)를 불사르고 유생(儒生)을 파묻는 것을 보고 어찌 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행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화(禍)는 없었을 것이니, 어찌 부소의 허물이겠는가? 혹자가 그것을 부소의 허물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또 당(唐)나라 때의 일을 논하기를,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비록 나빴다고는 하지만, 태종(太宗)이 장수(將帥)에게 명해 정벌했다면 오히려 옳았을 것이며, 만일 친정(親征)을 하지 않았더라면 비록 공(功)이 없었더라도 또한 큰 실책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종(玄宗)이 세째 아들을 살해하고 며느리를 맞아들였으니, 이는 태종(太宗)의 규문(閨門)이 부정(不正)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왕은 경연(經筵)에 나가면 구이(口耳)의 학문을 취(取)하려 하지 않고 반드시 경전의 가르침을 직접 실천에 옮기려고 하였다. 일찍이 《예기(禮記)》를 강론하고 하교하기를, ‘증자문(曾子問) 한 편(篇)에서 「군훙(君薨)」 이하로부터는 길사(吉事)를 말한 것이 적다. 내가 이로 인하여 하순(下詢)하고자 함이 있으니, 또한 「어떻게 할까[如之何]」 하는 뜻이다.049) 《오례의(五禮儀)》의 흉례(凶禮) 가운데 오모(烏帽)와 흑대(黑帶)의 제도는 민순(閔純)의 의논으로 인해 이미 개정하였는데, 단령의(團領衣)와 포과모(布裹帽)는 변경하지 않았으니,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이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에 의거할 것을 청하였다. 답하기를, ‘이 일은 원래 주자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본디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과단성 있게 시행하라.’ 하였다. 대상(大喪)을 당하자, 백관(百官)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고례(古禮)대로 최복(衰服)을 입었고, 정사를 볼 때는 포모의(布帽衣)을 입었다. 아! 한 문제(漢文帝)가 단상(短喪)050) 한 이래로 신하가 임금을 복(服) 입는 예가 오랫동안 폐지되었고, 우리 나라도 포모포(布帽袍)로 성복(成服)을 했으므로 오히려 고례가 아니었으니, 진실로 성학(聖學)의 고명(高明)함이 아니었더라면 역대의 구습(舊習)을 따라 행하던 폐해를 어찌 능히 죄다 개혁하여 삼대(三代)의 고제(古制)를 회복할 수가 있었겠는가? 오늘날 비록 천하(天下)에 시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왕자(王者)가 일어난다면 반드시 와서 취하여 모범으로 삼을 것이다. 왕은 또 명조(明朝)의 전례(典禮)를 고증하여 왕비(王妃)와 세자빈(世子嬪)의 종묘(宗廟)를 알현하는 예(禮)를 정하여 시행하였다.
왕이 처음에 《주수도설(舟水圖說)》을 저술하여 대신(大臣)에게 내보이며 말하기를, ‘군주는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연후에 배가 안정되고 신하가 현명한 연후에 군주가 편안하다. 경(卿) 등은 마땅히 이 도(圖)의 뜻을 본받아 보필(輔弼)의 도리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비유가 정절(精切)하고 사리(辭理)가 창달(暢達)하였다. 매번 사륜(絲綸)이 나오면 환하기가 운한(雲漢)051) 과 같아서 사신(詞臣)이 감히 대신 초(草)하지 못하였고, 대내(大內)에 있는 정(亭)·각(閣)의 편제(扁題)·명기(銘記)는 잠경(箴儆)이나 우계(寓戒)의 말이 아닌 것이 없었다.
왕은 강연(講筵)에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이름을 휘(諱)하였다. 문묘(文廟)에 송(宋)의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이정(二程)·소강절(邵康節)·주자(朱子) 등 육현(六賢)을 정전(正殿)으로 올렸으며, 양무(兩廡)의 한(漢)나라 순황(荀況) 이하 열 사람을 내치고 송(宋)의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동(李侗)·황간(黃幹) 및 우리 나라의 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을 배향(配享)할 것을 명하였다. 어필(御筆)로 친히 송시열(宋時烈)의 화양 서원(華陽書院)과 송준길(宋浚吉)의 흥암 서원(興巖書院)의 편액(扁額)을 쓰니, 현덕(賢德)이 있는 이를 숭상하여 선비의 추향(趨向)을 통일하기 위함이었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여러 유생(儒生)들을 모아 놓고 학업(學業)을 면유(勉諭)하였으며, 명조(明朝)의 제도를 따라서 별도로 계성묘(啓聖廟)052) 를 세웠다. 또 하번(何蕃)·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의 사우(祠宇)를 세워 사기(士氣)를 격려할 것을 명하였다.
왕은 선조(先朝)의 빈사(賓師)·노신(老臣)에 대하여 공경과 예의를 다하였고, 현사(賢士)를 예(禮)로 대우하여 산림(山林)에서 정승에 임명된 이가 또한 몇 사람이었다. 또 문사(文士)를 삼선(三選)하고 호당(湖堂)053) 에 사가(賜暇)하여 문풍(文風)을 권면하였다. 왕은 또 무략(武略)이 강(强)하지 않은 점을 근심하여 매양 교외(郊外)에 거둥하는 기회가 있으면, 노중(路中)에서 조련(操鍊)을 시켰다. 때로 강상(江上)에서 열무(閱武)하거나 후원(後苑)에서 시재(試才)한 뒤 포상(褒賞)을 크게 내려 장신(將臣)을 후하게 대접하고 사졸(士卒)을 후하게 돌보았다. 일찍이 관수정(關壽亭)054) 의 묘(廟)에 거둥하여 영유(永柔)의 무후사(武侯祠)055) 에 악무목(岳武穆)056) 을 아울러 배향(配享)해 장사(將士)의 마음을 흥기(興起)시킬 것을 명하였다.
무술년057)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 숙위 장사(宿衞將士)를 소견(召見)하여 병으로 시열(試閱)하지 못하는 의사를 면유(面諭)하고 또 주육(酒肉)을 하사하니, 무사(武士)들이 모두 감읍(感泣)하며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왕이 척계광(戚繼光)의 진법(陣法)이 왜적을 방어하는 데는 편리하지만 호족(胡族)을 방어하는 데는 불리하다 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헤아리고 의논하여 변통시킬 것을 명하였다. 또 전란(戰亂)을 예비(豫備)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변고에 대응할 수 없다고 하여,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성(城)을 증축(增築)해 도민(都民)과 함께 입보(入保)하는 계획을 강정(講定)하도록 명하였다. 또 북한(北漢)과 백제(百濟)의 고성(古城)을 증축하였다. 이보다 먼저 효종(孝宗)·현종(顯宗) 양조(兩朝) 때 양호(兩湖)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는데, 왕이 계속 영남(嶺南)에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장차 백성의 부세(賦稅) 제도를 크게 변경시켜 양역(良役)의 편고(偏苦)를 덜어 주고, 팔도(八道)의 토지를 개량(改量)하여 경계(經界)를 바로잡으려 한 것이었다. 말년에 먼저 삼남(三南)의 토지를 개량할 것을 명하였는데, 아직 복명(復命)하지 않은 사신(使臣)이 있고, 양역의 의논은 미처 품재(稟裁)하지 못하여 결국 천고(千古)의 유한(遺恨)이 되고 말았으니, 신민(臣民)의 지극한 아픔이 더욱 여기에 있다.
왕의 영명(英明)함은 천성(天性)에서 타고난 것이었으며, 기모(氣貌)가 맑고 엄숙하여 의(義)를 보면 결단이 혁연(爀然)하였고 선(善)으로 옮기되 힘차기가 바람과 우레 같았다. 일찍이 왕위에 올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선치(善治)을 도모하여 나라의 예(禮)를 개정(改定)하였다. 뭇 소인들이 어진이를 해치고 적신(賊臣)이 난(亂)을 도모하여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왔는데, 왕이 이에 조용한 가운데서 일을 진행시켜 흉역(凶逆)을 쓸어 없애버리니, 종사(宗社)가 다시 안정되고 세도(世道)가 맑고 밝아졌다. 곤의(坤議)가 한 번 기울어지니 간흉(奸凶)이 뜻을 얻고 유언(流言)이 끝이 없어 일이 말로 하기 어려움이 있었는데, 왕이 이에 뜻을 돌이켜 회오(悔悟)하자 일월(日月)이 다시 새로워지고 중전이 다시 바로잡혀 궁중이 엄숙하고 맑아졌다. 이런 것은 다 왕의 밝은 예지(睿智)의 비추는 바에 의해 얼마 안 가서 정상으로 회복된 경우인데, 항상 인애(仁愛)의 마음을 간직한 관계로 대옥(大獄)에 억울하게 걸려든 자가 적었다.
왕은 항상 스스로 기질(氣質)의 조급하고 사나운 점을 경계하여 혹은 윤음(綸音)을 내리고 혹은 시(詩)를 지어보이며 항시 성찰(省察)의 공부를 더하였다. 질병이 있을 때는 심기(心氣)를 가장 가다듬기가 어려운 것인데, 10여 년 동안에는 일찍이 사기(辭氣)가 너무 지나친 적이 있지 않았으니, 만년의 조존(操存)의 유익함은 더욱 수명(壽命)을 연장시킬 수 있었다.
기해년058) 에는 태조(太祖)의 고사(故事)에 의해 기사(耆社)059) 에 이름을 올리고 노신(老臣)들에게 연회를 내렸다. 온 나라 안이 바로 북두(北斗)와 남산(南山)의 축수(祝壽)를 올렸는데, 하늘이 돌보지 않아서 끝내 수를 다 누리지 못하였으니, 아! 애통한 일이다. 어찌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은 일찍이 ‘경계 십잠(儆戒十箴)’과 ‘권학문(勸學文)’ 등의 글을 저술하여 동궁(東宮)에게 내렸다. 정유년060) 에 대리(代理)의 명이 있었으므로, 동궁이 잇따라 장주(章奏)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왕이 답하기를, ‘눈병이 또 극심하여 수응(酬應)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너에게 대리를 명하는 것은 바로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의한 것이니, 네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부탁하는 바의 일이 지극히 무겁고 너의 책임이 지극히 크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조심하여 감히 혹시라도 나태한 일이 없도록 하며, 시종 학문의 연구에 유념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답하기를, ‘어제 훈계(訓戒)한 말을 너는 공경히 받들라. 근일의 일은 처분(處分)이 바르고 시비(是非)가 분명하니 백세(百世)에 의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된 것이니, 생각건대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특별히 말하는 것이니, 너는 나의 뜻을 따라 혹시라도 동요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스승·문생[師生]에 관한 일이 한 시대의 쟁단(爭端)이 되었는데, 왕이 비로소 시비(是非)를 결정하였기 때문에 이런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아! 도심(道心)으로 서로 전(傳)하는 것은 바로 왕의 가법(家法)이고, 십잠(十箴)의 경계는 이미 정일(精一)한 뜻에 근본하였다. 학문에 힘쓰라는 당부와 사문(斯文)에 대한 부탁이 간절하게 반복되었으니, 이연(貽燕)061) 의 계책이 그 또한 지극하다 하겠다.
왕은 검소한 생활을 숭상하여 절약하였고,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물흐르듯 하였다. 곤의(袞衣) 이외에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침전(寢殿)은 자리가 떨어져도 갈지 않았으며, 위(幃)·장(帳)은 모두 청포(靑布)를 사용하고 아침 저녁의 수라상 반찬은 몇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근신(近臣)이 먼 지방의 진귀한 물건을 귀중히 여기지 말라고 말하자, 즉시 은서피(銀鼠皮)를 불살라버리도록 명하였다. 또 대내(大內)로 낙타를 끌고 들어온 것을 간(諫)하는 자가 있자, 밤중에 궁문(宮門)을 열고 내쫓아 보냈고, 간신(諫臣)이 금원(禁苑)에 지은 소각(小閣)이 대로(大路)에 임한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니, 즉시 그날로 헐어버릴 것을 명하였다.
왕의 겸손한 덕(德)은 또 천성(天性)에서 나와 일찍이 성지(聖智)를 스스로 과시하지 않았다. 계사년062) 에 여러 신하들이 성덕(聖德)에 아름다움을 돌려서, ‘현의 광륜 예성 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로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니, 왕이 엄중한 말씀으로 굳이 거절하다가 오랜 뒤에야 마지못해 따랐으나, 속마음으로는 즐거워하지 않았다.
신(臣)이 삼가 천지(天地)에 상고하고 왕고(往古)에 증험해 보건대, 왕의 성덕(盛德)·홍규(弘規)는 드높고 빛나며, 가언(嘉言)·미정(美政)은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어 삼대(三代) 이후로 견줄 만한 이가 없으니, 아마 이른바 ‘넓고 커서 백성이 능히 형용할 수가 없다.[蕩蕩乎 民無能名焉]’는 것이라 할 것이다. 아! 위대하도다.
영의정(領議政) 신(臣)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신(臣) 이건명(李健命) 등이 의논하여 존시(尊諡)를 ‘장문 헌무 경명 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 묘호(廟號)를 ‘숙종(肅宗)’, 전(殿)을 ‘효령(孝寧)’이라 올리고, 이 해 10월 21일 갑인(甲寅)에 명릉(明陵) 갑좌(甲坐)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처음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장사를 지낼 때 왕이 우측(右側)을 비워두는 제도로 하도록 명하고, 장릉(長陵)을 모방해 곡장(曲墻)을 치우치지 않도록 쌓고 정자각(丁字閣)도 또한 중간에 위치하도록 하였으니, 재차 백성을 수고롭게 할 것을 미리 근심한 것이었다.
왕의 원비(元妃)는 인경 왕비(仁敬王妃)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보사 공신(保社功臣)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인데, 경신년063) 에 훙(薨)하였다. 계비(繼妃)는 인현 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따님인데, 신사년064) 에 훙하였다. 혜순 왕비 전하(惠順王妃殿下)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따님이다. 숙빈(淑嬪) 최씨(崔氏)는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을 낳았고, 명빈(榠嬪) 박씨(朴氏)는 연령군(延齡君) 이헌(李昍)을 낳았는데, 일찍 서거(逝去)하였다. 사왕 전하(嗣王殿下)의 전비(前妃)는 단의 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로, 증(贈) 영의정(領議政)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따님이고, 중궁 전하(中宮殿下) 어씨(魚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따님이다. 연잉군은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연령군은 수찬(修撰) 김동필(金東弼)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신(臣)이 경악(經幄)의 구신(舊臣)으로서 근년에 오랫동안 의약(醫藥)의 시중을 들었다 하여 마침내 유궁(幽宮)의 지명(誌銘)을 신에게 분부하셨다. 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돌아보건대 신의 문사(文辭)와 견식(見識)으로는 진실로 천일(天日)의 모습을 그려낼 수가 없다. 하지만 임어(臨御)하신 지 이미 오래 되어 기록할 만한 것들이 많기에 삼가 그 공덕(功德)의 큰 것들만 적었다. 또한 감히 겉치레로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하여 길이 천지(天地)의 큰 은혜를 저버리지 못하는 바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짓고,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정신(李正臣)이 썼다.
-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07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註 001]적사(嫡嗣) : 적출(嫡出)의 사자(嗣子).
- [註 002]
신축년 : 1661 현종 2년.- [註 003]
숭정(崇禎) : 명(明)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 [註 004]
내국(內局) : 내의원(內醫院).- [註 005]
을사년 : 1665 현종 6년.- [註 006]
정미년 : 1667 현종 8년.- [註 007]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008]
경술년 : 1670 현종 11년.- [註 009]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010]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註 011]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012]
상방(尙方) : 상의원(尙衣院).- [註 013]
태복(太僕) : 사복시(司僕寺).- [註 014]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註 015]
지부(地部) : 호조(戶曹).- [註 016]
내하(內下) : 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비공식적으로 내려줌.- [註 017]
일찰(一札) : 글씨를 쓴 한 장의 종이.- [註 018]
계해년 : 1683 숙종 9년.- [註 019]
세공(歲貢) : 해마다 바치는 공물.- [註 020]
삭선(朔膳) : 매달 초하루에 각도(各道)에서 나는 산물(産物)로 음식을 차려서 임금께 올리던 밥상.- [註 021]
태관(太官) : 벼슬 이름. 궁중에서 음식 장만하는 일을 맡아 보았음.- [註 022]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註 023]
내선(內禪) : 임금이 살아 있으면서도 그 자제(子弟)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던 일.- [註 024]
반한(反汗) : 나온 땀을 다시 들어가게 함. 군주(君主)가 일단 발표한 명령을 취소하거나 고치는 일을 이름.- [註 025]
경경(耿耿) : 마음에 잊지 못하고 염려하는 모양.- [註 026]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註 027]
의대(衣襨) : 옷.- [註 028]
시선(視膳) : 왕세자(王世子)가 아침 저녁으로 임금이 드실 수라상을 몸소 돌보던 일.- [註 029]
병인년 : 1686 숙종 12년.- [註 030]
풍정(豊呈) : 임금 내외의 경사가 있어서 경하할 때 무엇을 바치는 일. 이때에 기생(妓生)·우인(優人)들을 시켜 가무 잡희(歌舞雜戲)를 하게 함.- [註 031]
계해년 : 1683 숙종 9년.- [註 032]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033]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註 034]
세실(世室) : 종묘(宗廟)의 신주(神主) 중 공덕(功德)이 많은 분의 신주를 체천(遞遷)하지 않고 영구히 모셔두는 별묘(別廟)의 신실(神室).- [註 035]
무인년 : 1698 숙종 24년.- [註 036]
정축년 : 1457 세조 3년.- [註 037]
욕의(縟儀) : 성대한 의식.- [註 038]
경전(磬甸) : 공족(公族)이 사죄(死罪)가 있을 경우 시조(市朝)에서 처형하지 않고 전인(甸人:교야(郊野)를 맡은 벼슬)을 시켜 목을 매어 죽이게 하는 것.- [註 039]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040]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041]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註 042]
양좌(良佐) : 좋은 배필.- [註 043]
곤위(壼位) : 중전의 자리.- [註 044]
갑신년 : 1704 숙종 30년.- [註 045]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註 046]
삼고(三古) : 상고(上古)·중고(中古)·하고(下古).- [註 047]
납약(納約) : 《주역(周易)》 감괘(坎卦) 육사효(六四爻)의 "납약자유(納約自牖)"를 말함. 험난한 시기에 신하가 부득이 정도(正道)를 이용하지 못하고 사잇길을 이용하여 명군(明君)에게 자통(自通)하는 것을 뜻함.- [註 048]
부소(扶蘇) : 진 시황(秦始皇)의 장자(長子). 진 시황이 유생(儒生)들을 구덩이를 파고 땅속에 묻자 부소(扶蘇)가 극력 간(諫)하다가 시황의 노여움을 사서 삭방(朔方)으로 보내졌음. 뒤에 진 시황이 죽자 조고(趙高)의 참소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음.- [註 049]
「어떻게 할까[如之何]」 하는 뜻이다. : 《논어(論語)》 위령공(衞靈公)의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하지 않는 자는 나도 어찌할 수 없다.[不曰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己矣]"에서 인용한 것으로, 무슨 일에 대해서 심사 숙고(深思熟考)한다는 뜻임.- [註 050]
단상(短喪) : 상복(喪服)의 기한을 단축시킨 일.- [註 051]
운한(雲漢) : 은하수.- [註 052]
계성묘(啓聖廟) : 서울 문묘(文廟) 안에 있는 사당. 공자(孔子)·안자(顔子)·자사(子思)·증자(曾子)·맹자(孟子)의 아버지를 제사지냄.- [註 053]
호당(湖堂) : 독서당(讀書堂).- [註 054]
관수정(關壽亭) : 관우(關羽).- [註 055]
무후사(武侯祠) : 제갈양(諸葛亮)의 사당.- [註 056]
악무목(岳武穆) : 악비(岳飛).- [註 057]
무술년 : 1718 숙종 44년.- [註 058]
기해년 : 1719 숙종 45년.- [註 059]
기사(耆社) : 기로소(耆老所).- [註 060]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註 061]
이연(貽燕) : 자손에게 안정(安定)을 끼쳐 주는 것.- [註 062]
○誌文曰:
於戲! 恭惟我肅宗 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諱焞, 字明普, 顯宗大王之適嗣, 孝宗大王之孫。 母妃明聖王后 金氏, 敦寧府事淸風府院君 佑明之女也。 王小字龍祥。 孝廟嘗夢, 明聖王后寢室, 有物覆以衾, 開視則龍也。 孝廟覺而喜曰: "將得元孫之吉兆。" 乃預命小字以待之。 至辛丑八月十五日辛酉, 王誕降于慶德宮之會祥殿, 實崇禎紀元之三十四年也。 王五歲時, 明聖王后有産病, 不能進食, 王必跪進粥飮, 憂形於色。 后曰: "汝勸何可不從?", 爲之强進。 王嘗有所養雀雛, 死則令毋棄而瘞之。 內局取牛酪, 其犢多悲鳴, 王問其故, 不進酪。 愛親之誠、及物之仁, 自幼已如此。 乙巳, 諸大臣請以宋時烈、宋浚吉、金佐明、金壽恒, 爲元子輔養官, 出入講學, 浚吉初見王, 告于顯廟曰: "宗社、臣民之福, 實在於此。" 顯廟命內侍, 召王出, 王向浚吉再拜, 禮貌中度。 丁未冊封爲王世子。 己酉隨駕謁太廟, 又行入學禮。 庚戌行冠禮, 辛亥行嘉禮。 甲寅, 顯廟禮陟, 王受寶踐位, 哀號動人, 百官、衛士, 悲不敢仰視。 王自嗣服以來, 夙夜祗懼, 一以敬天勤民, 爲第一義, 以承先王之志事, 勉大臣以隨事導迪。 王單心典學, 夜分讀書不休, 明聖王后, 亦憂其過勤。 新陵石役甚鉅, 王承慈敎, 命移用寧陵舊石, 大省民力。 時, 八路災荒, 民或有不勝飢困而自縊者。 王大驚惻, 亟下諭諸道, 俾免其轉壑流散。 命蠲辛亥以上積逋, 今年租賦, 計可支用, 量減其數, 畿內役煩, 特減進上虎皮。 又停簽丁, 尙方、太僕, 姑廢燕市貿易, 始初之化, 人心洽然矣。 乙卯, 內下黃金一百六十兩、銀一萬六百餘兩于地部, 命蠲關北逋穀八萬餘石。 又下敎曰: "方在哀疚中, 方物、物膳, 姑勿進。" 夏旱親禱社壇, 特命慮囚。 王於水旱、飢饉, 憂勤、惕慮, 自此四十餘年, 如一日。 然每下書藩臣, 勉其安集拯濟, 曉諭民間, 勸其勿離鄕土。 歲時必別諭勸農, 皆一札十行, 至意藹然。 癸亥別遣御史, 宣諭諸道, 父老之扶杖往聽者, 無不感泣。 凡蠲徭賜租, 減宿逋、停新納者, 前後幾億萬計。 若經費匱乏, 則移軍餉之儲, 傾內帑之財, 亦不惜也。 御用人參, 減納至半, 歲貢、朔膳, 屢經裁損, 至今太官之貢, 多未有復其舊者。 歲旱多親禱廟社、郊壇, 盛熱不入齋室, 冊祝必令責躬。 不得雨, 則疏釋罪囚, 或駐輦道傍, 進囚諭遣, 或駕幸王獄, 親決輕重。 被災地方, 必遣御史監賑。 耽羅邈在海外, 數年荐飢, 又命近臣, 船粟往哺, 珍島十年不登, 疑有冤氣, 諭令訪問。 此皆王深仁至澤, 浹人骨髓者也。 王遇災警懼, 甚於剝床。 大災之外, 雖星度凌犯, 日霓抱珥, 必下旨自責, 廣求直言, 又勉群下, 以和衷秉公, 對越臨履之誠, 自見于言語之外矣。 酬應萬機, 少無濡滯, 或朝膳夕進, 曉漏猶未寢。 乙酉有內禪之命, 臣亦隨諸臣入對, 終蒙反汗, 然仰承聖敎, 傷損之祟, 蓋在於憂勤, 聖心之極欲脫屣千乘, 優游晩暮者, 正爲此也, 而疾病之後, 貳極代政, 王猶耿耿於國事, 不暇寧逸。 臣敢以頣養之說, 懇叩於淸燕之侍, 則王曰: "予習性然也, 不可變矣。" 王寢疾十有餘年, 以庚子六月初八日癸卯, 大棄群臣于慶德宮之隆福殿, 在位四十有六年, 壽六十。 嗚呼痛哉! 是日, 傾都奔走闕下, 雖儓隷、下賤, 哀哭如父母, 莫不曰: "我聖主, 爲生民損遐算也。" 惠順王妃殿下, 下敎于大臣曰: "聖上平日盛德, 朝紳非不知也, 猶或有不能悉者。 酬應浩多, 晝夜不休, 寢膳或廢。 敬事上天, 遇災恐懼, 或雨雪愆期, 風日不和, 有害於農, 則慮不少弛。 陰晴之候, 風起何方, 或難自察, 則必問侍者。 國事民憂, 念念不忘, 常若不及, 勤勞爲崇, 致損聖壽。 至於喪葬諸具, 軫念經費, 曾有措置, 祭器所造之銀, 當下尙方。 又備前頭賑民, 別置銀子三千七百餘兩, 今補國葬之費, 可減民弊。 內藏衣襨, 似無不足, 該曹只待書示者, 備納, 務遵平日省約之意。" 又敎曰: "聖上勤勞國事之外, 甚嗜書史, 製述甚多。 可示朝廷者, 曾已深藏", 乃命東宮出示。 嗚呼! 我聖妃觀感聖德, 奉承遺意者, 可以宣揚至仁, 永固邦本, 而況臣伏讀內下御製, 多是敬天勤民之作, 凡我含生之屬, 將何以追報先王也? 昔周公頌文王之德曰: "日中不遑暇食, 用咸和萬民。 受命惟中身, 厥享國五十年。" 我先王沖年嗣位, 反不及於文王之享國, 此何天理也? 然無逸之德, 在王尙其細者耳。 王自在視膳之日, 承事兩殿, 怡愉敬順。 及宅恤, 哀戚踰節, 拜辭靈輿, 歸路猶號擗。 明聖王后多病, 王常澟澟焦憂, 竭誠調護, 事莊烈大妃, 亦無少間。 所御萬壽殿, 相去稍遠, 王嘗聞大妃有急疾, 不遑納履, 疾步往候。 嘗欲爲兩殿進宴, 遇災而止, 丙寅始進豐呈。
癸亥, 明聖上賓, 戊辰莊烈又上賓, 王哀毁踰禮, 一如甲寅。 每歲親享太廟, 或無時展謁。 春秋必拜陵, 遍盡諸陵, 而或再三焉。 以威化回軍之義, 加上太祖謚號, 以字數減於諸廟, 加上太宗謚號, 仁祖成中興之大業, 孝宗明《春秋》之大義, 定爲世室。 恭靖舊無廟號, 追上爲定宗, 摹寫慶基殿 太祖御容, 奉安于永禧殿。 戊寅, 追復端宗大位。 蓋丁丑禪代之後, 人情冤鬱, 數百年未敢言者, 列聖之所未遑, 王斷自淵衷, 亟擧縟儀, 宗廟之禮, 有秩, 神人胥悅。 竝及其六臣而俎豆之, 以礪臣節, 中廟 愼妃, 禮有難處, 則立廟祭之。 王待宗親, 甚有恩, 姑、妹、公主有疾有喪, 必皆親臨。 昭顯世子嬪姜氏, 嘗以罪廢, 王察其冤, 追復其位, 其孫焜、熀被凶人誣, 保全而寵遇如前。 逆宗楨、柟, 與其黨謀不軌, 杭圖害國母, 竝磬于甸, 而命殮葬法行, 而恩不廢也。 王久無嗣, 戊辰, 後宮張氏, 始誕生我嗣王殿下, 亟命定元子號。 己巳仁顯王后退處私第, 命陞張氏爲妃。 甲戌下敎曰: "追惟己巳之事, 不覺忸怩于中也。 莫察悃愊, 誤疑良佐。 予嘗平心徐究, 怳然覺悟, 大加悔恨, 寤寐輾轉, 積有年矣。 今玆渙發綸音, 重正壼位, 寔出於天理之公, 而賴宗社之默佑也。" 又敎曰: "邦運回泰, 中壼復位, 則民無二主, 古今通義。 其收張氏王后印綬。" 又命己巳死諫者吳斗寅、朴泰輔等, 贈官旌閭, 誅竄其時樂禍而干名義者。 其後又下敎曰: "自今著爲邦家制, 勿以嬪御登后妃。" 嗚呼! 以千乘之尊, 而躬顔、閔之行, 奉先而思孝, 敦宗而厚風, 增光前烈, 敍正彝倫, 卽前世明君之所罕聞。 此皆王正心修身, 成敎於家邦者, 其可以俟百世而不惑。 然蓋天下有大義, 亘萬古而不可無者。 時往事邁, 若將晦蝕, 王獨以一身擔荷, 乃於甲申春, 設壇于禁苑中, 遙祭毅宗皇帝, 以崇禎運訖之日重回也。 將事之日, 王感傷惻怛, 眞若眼看天地之崩裂。 又命設壇於宮城北凈處, 名以大報, 歲祀神宗皇帝, 以壬辰再造之恩, 不可忘也。 王嘗命刊行《大明集禮》, 親製序文。 漢人之流寓者, 廩其身而收用其子孫。 臣曾於槐院故紙中, 得皇朝成化年所賜印跡投進, 卽命摹刻作寶, 遺命此後嗣位時, 勿用淸國寶, 而傳此寶, 蓋將欲使萬世子孫, 不忘皇朝之恩也。 嗚呼! 《春秋》大一統之義, 獨我東世守百年, 異日中國澄淸, 永有辭於天下後世者, 不其在是歟? 此尤王之超百王竝三古, 而其義可以建天地而不悖者也。 王好學尙文, 崇儒重道, 居常手不釋卷, 暮年猶開講筵, 經傳書史, 無所不講, 自諸子百家, 以及東方文集, 無不涉獵。 凡一經覽, 平生不忘, 臨文析理明, 而見解透。 講《心經》諭心動靜曰: "出沒無常, 易發難製者, 莫如心, 故有動中有靜, 靜中有動之說。" 論《易》納約之說曰: "此則大臣當艱險之時, 不得已而可用此道, 若治平之世, 由間道結於君, 則不可。" 論秦 扶蘇事曰: "君臣、父子, 皆有可諫之道, 扶蘇見焚坑而何可不諫? 幸而用其言, 無此禍矣, 豈扶蘇之過也? 或以爲過者非矣。" 又論唐時事曰: "蓋蘇文雖惡, 太宗命將伐之, 猶可也, 若不親征, 則雖無功, 亦未爲大失也。 玄宗殺三子, 納子婦, 此由於太宗之閨門不正也。" 王臨筵, 不欲資口耳, 必欲服行經訓。 嘗講《禮》下敎曰: "曾子 問一篇, 自君薨以下, 言吉事鮮矣。 予因此有欲下詢, 亦如之何之意也。 《五禮儀》 《凶禮》中, 烏帽、黑帶之制, 因閔純之議, 旣已釐正, 而團領衣、布裹帽, 未有變改, 復古制可乎?" 大臣、儒臣請依朱子 《君臣服議》, 答曰: "玆事自有朱子定論, 本無可疑, 斷然行之。" 及至大喪, 百官承遺命, 乃受衰如古禮, 視事用布帽衣。 嗚呼! 漢 文短喪以來, 臣服君之禮久廢, 我朝以布帽袍成服, 猶非古禮, 苟非聖學之高明, 何能盡革歷代因循之弊, 以復三代之古也? 今日縱不能行之於天下, 有王者作, 必來取法矣。 王又考皇朝典禮, 定行王妃、世子嬪廟見之禮。 王於初, 元作《舟水圖說》, 出示大臣曰: "君猶舟, 臣猶水也。 水靜然後舟安, 臣賢然後君安。 卿等宜體此圖之意, 以盡輔弼之道。" 取比精切, 辭理暢達。 絲綸每出, 昭若雲漢, 詞臣不敢代草。 大內亭閣, 遍題銘記, 無非箴儆寓戒之言。 王於講筵, 諱程、朱之名。 文廟陞宋 周、張、二程、邵、朱六賢於正殿, 黜兩廡漢 荀况以下十人, 命以宋 楊時、羅從彦、李侗、黃幹及我朝李珥、成渾、金長生配享。
御筆親題宋時烈 華陽、宋浚吉 興巖書院扁額, 尊尙賢德, 以一士趨也。 嘗幸太學, 會諸生勉諭學業, 從皇朝之制, 別立啓聖廟。 又命立何蕃、陳東、歐陽澈之祠, 以激士氣。 王於先朝賓師、老臣, 致敬盡禮, 禮羅賢士, 由山林拜相者亦數人。 又三選文士, 賜暇湖堂, 以勸文風。 王亦以武略之不競爲憂, 每有郊外幸行, 路中操鍊。 時於江上閱武, 後苑試才, 大行褒賞, 厚待將臣, 優恤士卒。 嘗臨幸關壽亭廟, 命竝亨岳武穆於永柔 武侯祠, 以興起將士之心。 戊戌寢疾時, 召見宿衛將士, 面諭疾未試閱之意, 又賜酒肉, 武士皆感泣欲死。 王以戚繼光陣法, 便於禦倭, 不利於防胡, 命諸將確議變通。 又以陰雨不備, 不可應卒, 命增築江都、南漢城砦, 講定與都民入保之計, 又築北漢 百濟古城。 先是, 孝、顯兩朝, 行兩湖大同之法。 王命繼行於嶺南, 將欲大變賦民之制, 以紓良役之偏苦, 改量八路之田, 以正經界。 末年命先量三南田, 使臣尙有未復命者。 良役之議, 不及稟裁, 遂成千古之遺恨。 臣民之至痛, 尤在於此也。 王英明出天, 氣貌淸肅, 見義則乾斷爀然, 遷善而奮若風雷。 旣早登天位, 銳意圖治, 而邦禮改定。 群壬戕賢, 賊臣謀亂, 國命綴旒, 王乃沈幾默運, 掃除凶逆, 宗社再安, 世道淸明。 坤議一傾, 奸兇得意, 流言罔極, 事有難言, 王乃翻然悔悟, 日月更新, 長秋復正, 肅淸宮闈。 此皆王明睿所照, 不遠而復者也, 而常存欽哉之仁, 大獄鮮有枉罹者。 王常自戒以氣質之躁暴, 或出綸音, 或示言志, 恒加省察之工。 疾病之際, 心氣最難攝, 而十餘年間, 未嘗有辭氣之太過者, 晩年操存之益, 尤可以養壽命矣。 己亥以太祖故事, 題名耆社, 錫宴老臣。 方域之內, 正獻北斗、南山之祝, 昊天不弔, 終靳必得之壽, 嗚呼痛哉! 安得不怨于天也? 王嘗著《儆戒十箴》、《勸學文》等篇, 賜東宮。 丁酉有代理之命, 東宮連章固辭, 王答曰: "眼患又劇, 酬應甚難。 命爾代理, 玆乃國朝故事, 汝何讓焉? 付託至重, 爾責至大, 夙夜寅畏, 無敢或怠, 念終始典于學。" 又答曰: "昨日訓戒之言, 爾其式克欽承。 近日事處分正而是非明, 可以不惑於百世。 事關斯文, 顧不重歟? 故特言之。 予志汝遵, 莫之或撓。" 蓋宋時烈、尹拯師生事, 爲一世爭端, 而王始定是非, 故有是敎。 嗚呼! 道心相傳, 卽王家法, 十箴之戒, 已本乎精一之旨, 而典學之勉, 斯文之托, 丁寧反復, 貽燕之謨, 其亦至矣。 王崇儉節約, 從諫如流。 袞衣之外, 不服錦段, 寢殿席弊不改, 幃帳皆用靑布, 朝夕膳羞, 不過數器。 近臣以不貴遠物爲言, 卽命焚銀鼠皮。 又有諫大內牽入橐駝者, 夜開宮門而出送, 諫臣以禁苑營小閣, 臨大路爲不可, 命卽日毁之。 王沖謙之德, 又出天性, 未嘗以聖智自廣。 癸巳, 群臣歸美聖德, 請上尊號, 以顯義光倫睿聖英烈, 王嚴辭固拒, 久而勉從, 中心不樂焉。 臣謹稽之天地, 驗之往古, 王之盛德、弘規, 巍乎煥乎, 嘉言、美政, 史不勝書, 三代以後, 無可比擬, 豈所謂蕩蕩乎民無能名焉者歟? 於戲偉哉! 領議政臣金昌集、右議政臣李健命等議上尊謚曰, 章文憲武敬明元孝, 廟號曰肅宗, 殿曰, 孝寧。 以是年十月二十一日甲寅, 葬于明陵甲坐庚向之原。 始仁顯王后之葬也, 王命虛右之制, 倣長陵曲墻, 築不偏, 丁字閣, 亦當中, 預憂再勞民也。 王元妃仁敬王妃 金氏, 領敦寧府事保社功臣光城府院君 萬基之女, 庚申薨。 繼妃仁顯王后 閔氏, 領敦寧府事驪陽府院君 維重之女, 辛巳薨。 惠順王妃殿下金氏, 領敦寧府事慶恩府院君 柱臣之女, 淑嬪 崔氏生延礽君 昑, 䄙嬪 朴氏生延齡君 昍, 己亥早卒。 嗣王殿下, 前妃端懿王后 沈氏, 贈領議政靑恩府院君 浩之女, 中宮殿下魚氏, 領敦寧府事咸原府院君 有龜之女。 延礽娶郡守徐宗悌女, 延齡娶修撰金東弼女。 我殿下以臣經幄舊臣, 近年久侍醫藥, 遂以幽宮之誌, 命臣。 臣固辭不敢當, 終不獲命。 顧臣文辭見識, 固不足以形摸天日, 而臨御旣久, 可紀者多, 謹書其功德之大者, 亦不敢華而不實. 永負天地之大恩云。 判中樞府事李頣命撰, 兵曹參判李正臣書。
-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07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註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