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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 1권, 현종 대왕 숭릉지(崇陵誌)

현종 대왕 숭릉지(崇陵誌)

현종 순문 숙무 경인 창효 대왕 숭릉지

아, 우리 현종 순문 숙무 경인 창효 대왕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원(棩)이며 자(子)는 경직(景直)으로 효종 현인 대왕(孝宗顯仁大王)의 적자이고 인조 명숙 대왕(仁祖明肅大王)의 손자이시다. 모비(母妃)는 효숙 경렬 명헌 인선 왕후(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 장씨(張氏)로 우의정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유(維)의 따님이다.

전에 효종이 왕자로 계실 적에 청나라에 볼모로 갔었는데,명나라 숭정(崇禎)14년 신사046) 2월 4일에 심양(瀋陽)의 관저(館邸)에서 왕을 낳았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질이 특이하였고 용모가 장대하였다.

갑신년047)효종이 심양에서 연경(燕京)으로 들어갈 적에 왕을 보내 먼저 귀국하게 하였다. 왕은 이때 나이 4세로 인조께 뵈었는데, 묻는 바가 있으면 대답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요순과 에 대해 묻자 왕이 이미 성군(聖君)과 폭군을 구별하며 말마다 고사(古史)로 입증하였다.

한번은, 변방에서 표피(豹皮)를 진상한 자가 있었는데, 털이 성글고 나빠서 되돌려보내려고 하였다. 왕이 곧 인조께 아뢰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자면 백성을 많이 다칠 것입니다."

하니, 인조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되돌려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한번은 우연히 합문(閤門)을 나오다가 얼굴이 야위고 시커먼 한 군사를 보고 내수(內竪)048) 에게 물으니, 내수가 대답하기를,

"이는 얼고 굶주려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그를 불쌍히 여겨 옷을 주게 하고, 또 음식도 계속 먹여주게 하였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지혜가 넓고 인애(仁愛)가 천성이었다.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죽자, 효종이 둘째 아들로 세자의 자리에 올랐고, 왕 역시 원손(元孫)으로 불리웠다. 기축년049) 에 왕을 책봉하여 왕세손(王世孫)으로 삼고 강서원(講書院)이 설치되었다. 이해 여름에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도 이어 왕세자(王世子)가 되었다.

신묘년050) 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이어서 왕세자 책봉례(冊封禮)를 거행하였으며, 겨울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임진년051) 에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한 다음 춘방(春坊)의 요속(僚屬)을 더 증원시키고 노숙(老宿)한 유신(儒臣)을 모두 맞이하여 보필과 지도를 다하게 하였다. 효종이 일찍이 문묘(文廟)에 재차 제사지내면서 왕에게 수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문사(文事)를 숭상하라고 가르친 것이고, 남쪽 강나루에서 군대를 대대적으로 사열할 적에 다시 왕에게 수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무사(武事)를 잊지 말 것을 가르친 것이며, 때로 농전(弄田)052) 에서 농사짓는 것을 관람시켰는데, 이는 백성의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었다.

기해년053) 5월에 효종이 승하하자, 왕이 새보(璽寶)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이미 돌아와서는 여차(廬次)054) 에서 수질과 요질을 띠고 애곡(哀哭)을 그치지 않았으며 죽도 들지 않고 전올리는 일도 대신시키지 않았다. 이때에 매우 더웠었는데, 비좁은 데에 거처하면서 자리를 옮기지 않으니, 좌우의 신하와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모두 왕의 독실한 효성에 감탄하였다.

왕이 처음 정치를 할 적에 오직 효종이 가르쳐준 바를 먼저 시행하여 남긴 뜻과 사업을 따라 할 뿐이었다. 자신을 낮추고 학문을 숭상하였으며, 위에서 검소하게 하고 아랫사람들을 부유하게 하였으며, 두텁고 신중히 하기에 힘써 적당한 데로 돌아가게 하였다.

맨 먼저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의 말을 채용하여, 고명한 선비에게 예를 다해 대우하되 이미 서울에 도착한 사람은 머물러 있도록 권하고 오지 않은 사람은 유시(諭示)하여 불렀다. 이때 좌찬성 송시열 같은 사람은 이미 효종 때부터 총애를 가장 깊이 받았고 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 등도 모두 서울에 와 있었다. 송시열 등이 물러가기를 간절히 원하자 왕은 손수 쓴 비답을 자주 내려 위로하고 만류하기를 지극히 하였다.

명을 내려 제도(諸道)의 공물 중에서 향사(享祀)에 관계되는 것 이외에는 모두 줄이고 면제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새로운 교화에 고무되었다. 경자년055)관동·관북 지방에 재난이 있자, 단천(端川)에서 포흠진 은(銀)을 모두 면해주고, 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공물로 바치는 표피(豹皮)를 감해주고, 영동(嶺東)은 포세(布稅)를, 영서(嶺西)는 미세(米稅)를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신축년056) 에 삼남(三南) 지방에 또 한재가 들자, 다시 제도(諸道)의 공물을 감해주고 궁중의 주방(酒房)과 어구의 말[馬]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옛날부터 인수사(仁壽寺)·자수사(慈壽寺)라고 하는 두 이원(尼院)이 도성 북쪽에 있었는데, 왕이 명하여 이를 철거해 학교를 짓고 절에 있던 여승들을 보내서 모두 환속(還俗)시켰다. 가을에 왕이 친히 성균관에서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임인년057) 봄에 예조에 명하여, 고려조의 모든 능을 수리하게 하고 또 3년에 한 번씩 봉심(奉審)하도록 영을 만들었다. 특별히 어사 남구만(南九萬)·이숙(李翊) 등을 보내어 호남영남의 잡부(雜賦)를 감면해 주었으며 또 진휼하고 곡물을 대여해 주게 하였다. 또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임진 왜란과 병자호란의 옛날 전쟁터에 여제 【여귀에게 지내는 제사.】 를 지내게 하였다. 가을에 친히 노량(露梁)에 거둥하여 무사(武事)를 강습하였다.

계묘년058) 에 균전사(均田使) 민정중(閔鼎重)·김시진(金始振)에게 명하여 경기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게 하였고 여러 궁가(宮家)의 해세(海稅) 및 시장(柴場)을 널리 점유하여 백성을 침해하는 것을 줄이게 하였다.

갑진년059) 에 경기 지방이 해마다 가뭄이 들고, 가을에 호남에 수재가 있었으므로 강도(江都)·삼사(三司)로 하여금 모두 인재를 천거하여 등용하게 하였다. 좌참찬 김수항(金壽恒)함경도로, 어사 윤심(尹沈)을 제주(濟州)로 보내어 변방의 백성과 해외 사람들의 고통을 탐문하게 하고, 또 문사(文士)와 무사를 다같이 시험을 보여 뽑게 하였다.

왕이 항상 눈병을 앓았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을사년060)호서(湖西)061) 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자 비로소 효험이 있었다. 행궁(行宮)에 도착한 날 곧바로 도로에서 호위하며 수행했던 향병(鄕兵)을 파하여 각각 본진(本鎭)으로 돌려보내었다. 병조에 명하여 장사(將士)들을 단속하여 백성을 괴롭히거나 곡식을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였다. 예조에 명하여 작고한 훈신(勳臣) 및 덕망이 있는 사람이 이웃 고을에 있을 경우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고, 문·무과의 시험을 시행하여 선비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호조에 명하여, 요역과 부세(賦稅)를 차등있게 감하여 백성을 위로하게 하였다.

병오년062) 봄에 왕이 인선 태비(仁宣太妃)를 모시고 다시 온천에 거둥하여, 도내의 나이 많은 노인 및 효행으로 소문난 사람에게 쌀과 고기를 두루 주었다. 이조에 명하여, 나이 80 이상인 자에게는 사족이나 서민을 논하지 말고 모두 자급(資級)을 주게 하였다. 온천에서 돌아와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명을 내려 호구 장적법(戶口帳籍法)을 자세히 밝히고 누락된 자는 벌로 변방에 이주하게 하였다.

정미년063) 봄에 왕이 친히 법전(法殿)에 나아가 원자 휘 돈(焞)을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았다. 여름에 다시 온천에 거둥하여, 거듭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원통하게 정체된 백성들의 옥사를 너그럽게 처결하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효종이 일찍이 명하여 호남호서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곤궁함을 풀어주도록 하였는데, 오직 호남의 산간 고을에만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왕이 선왕을 계승하여 일을 시행하려 하였는데, 조정의 신하 중에 불편한 점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 시행하기도 하고 중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에 또 모두 편리하다고 말해서 단행하니 호남 백성들이 소생되었다.

무신년064) 에 관동에 또 기근이 들자, 명하여 경자년065) 처럼 백성들의 부세를 감면해 주게 하였다. 진휼청을 설치하고 중신 중에 재능이 있고 성실한 사람을 가려 관장하게 하였다. 각사(各司) 노비들의 공포(貢布)를 감해 주었다

기유년066) 봄에 다시 온천에 거둥하였다. 겨울에 처음으로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태묘(太廟)에 합부(合駙)하고 정릉(貞陵)의 침원(寢園)을 복원하는 등 한동안 빠졌던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대륜(大倫)을 밝혔다.

경술년067)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고 가을에 홍수가 졌다. 제도(諸道)에서 모두 재난을 보고해 왔다. 왕이 또 명하여, 강도·남한 산성의 쌀 3만 석을 방출하고 관서의 쌀 2만 석을 옮겨다가 도성과 외방에 나누어 주어 진휼하게 하였다.

신해년068) 봄에 또 보리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큰 기근을 치르고 있었는데 돌림병마저 극성을 부려 죽는 자가 잇따르니 왕이 밤낮으로 근심하고 애태웠다. 서울에는 세 곳에다 진휼청을 설치하고, 제도의 각 고을에 신칙하여 성의를 다해 구제케 하였으며 산 사람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고 죽은 사람에게는 널을 주어 묻게 하였다.

임자년069) 왕이 자신을 책하는 교서를 내렸는데, 말 뜻이 애닯았다. 국내에 유시하여 포흠된 부세를 모두 면제하고,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결하고, 폐고(廢錮)된 자들을 풀어주는 많은 은택이 내려지니 백성들이 마침내 재난을 당한 줄을 몰랐다. 또 재신(宰臣)과 삼사(三司)에 명하여 학행과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는 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또 어사 이하(李夏)제주에 보내어 곡식 종자와 식량 및 포목을 실어다가 구제하도록 하고, 갑진년070) 의 예처럼 또 선비를 시험보이게 하였다.

계축년071) 에 종친 영림 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가 상소하여, 영릉(寧陵)의 봉분(封墳) 석물(石物)에 틈이 생겼다고 말하자, 왕이 크게 놀라고 근심하여 능을 옮기기로 의논을 결정하였다. 이해 10월에 마침내 효종의 능을 여릉(驪陵)으로 옮겼는데 예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왕이 위로 자의 대비(慈懿大妃)인선 대비(仁宣大妃)를 받들어 모시면서 마음을 다고 음식물을 두루 구비하여 융숭히 봉양하였다. 효종 때에 건립된 만수전(萬壽殿)자의 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서쪽에 있고 왕이 또 특별히 전(殿) 한 채를 지어 집상전(集祥殿)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인선 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동쪽에 있었다. 이는 한(漢)나라 장락궁(長樂宮)·장신궁(長信宮)의 제도와 같게 한 것이다. 모비(母妃)에게 평소 질병이 있었는데, 왕이 항상 곁에서 모시고 간호하면서, 화하고 부드럽게 하여 뜻에 맞게 하였다. 또 여러 자매(姉妹)들을 자주 불러 친애의 정을 펴면서 틈이 없이 화락하게 지냈다. 모비도 일찍이 말하기를,

"왕이 옆에 있으면 병이 몸에서 나가는 것 같다."

하였다.

갑인년072) 봄에 모비(母妃)의 병환이 점차 위독해지자, 왕이 급히 명하여 기제(祈祭)를 두루 거행하게 하고 또 억울한 죄수들을 평의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모비의 상을 당하자, 왕은 예제(禮制)에 지나칠 정도로 너무 슬퍼하였고, 제사를 더욱 정결히 하여 제수(祭需)를 익히고 씻는 일에서부터 신칙하고 간검하지 않음이 없었다.

처음, 효종의 상이 났을 적에 대신이 여러 유신(儒臣)들과 자의 대비(慈懿大妃)가 입어야 할 복제(服制)에 대해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본조(本朝)의 오복(五服) 제도에는 자식에게는 기년복만 입게 되어 있다."

하고, 드디어 기년복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기년복은 예가 아니고 예로 볼때 삼년복을 입어야 합당하다." 고 말한 자가 있었으므로 왕이 이에 여러 대신과 유신(儒臣)들에게 묻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러 유신들이 "고례(古禮)로 볼 때 역시 기년복을 입어야 할듯하다." 하였고, 대신이 또 전의 의견을 주장하여 "국제(國制)에는 오직 기년복으로 되어 있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왕이 대신의 말을 따라 그대로 기년복으로 결정하고 고치지 않았던 것인데, 이때 이르러 예관(禮官)이 다시 자의대비의 복을 대공복(大功服)으로 줄여 정하자 왕이 다시 공경(公卿)·삼사(三司)에게 묻고 또 예경(禮經)을 친히 고증하여 그 잘못된 점을 다 분별하여 말하기를,

"대체로 적자(嫡子)가 어찌 서자(庶子)가 되겠으며 장자(長子)가 어찌 중자(衆子)가 된단 말인가. 선왕(先王)073) 이 대비(大妃)에게는 가공언(賈公彦)의 주소(注疏)에 말한 ‘적처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워도 또한 장자라고 부른다.[取嫡第二長子赤名長子]’한 것 바로 그 입장인 것이다. 하고, 예관을 중죄로 다스리라.

하고, 대공(大功)을 고쳐 기년으로 정하게 하고 또 수상이 예(禮)의 분명한 조문을 따르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말을 따른 것을 꾸짖었다. 그리하여 복제가 정해지고 명분이 바르게 되니 국가의 예가 더욱 유감이 없게 되었다.

왕은 행실이 순수하고 천성 또한 남달리 총명하여 정사를 처결하고 난 여가에 항상 경사(經史)를 탐독하고 도리(道理)를 깊이 사색하였으며 그것을 일에다 반영하면서도 반드시 되풀이해서 참작한 다음 타당성이 있어야만 시행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정법을 잘 익히고 기강을 바로세워, 바야흐로 근래 군민(軍民)의 폐단을 크게 규명해서 모두 변통해 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왕이 이미 피로가 쌓이고 모비의 상에 과도하게 슬퍼하여 병이 날로 심해져 갔다. 8월 7일 아침에 대신을 빈청(賓廳)에 모이게 한 다음 불러서 일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병환이 더욱 위독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다. 급히 승지를 충주에 보내어 영의정 허적을 불러오게 하고, 또 좌의정 김수항을 불러 침전(寢殿) 앞에 오게 하여 도타이 일렀다. 임종 직전의 밤에도 경사전(敬思殿)의 선수(膳羞)가 정결한지 자주 물었다. 또 문밖의 바람소리를 듣고 어느쪽에서 불어오는가를 물었다. 동풍이라고 대답하자 왕이 놀라며 이르기를,

"곡식을 몹시 손상하겠구나. 백성이 장차 죽어가겠구나. 내가 어찌하여 또 이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하고, 여전히 슬퍼하고 탄식해 마지 않았다.

왕세자가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종묘 사직과 산천에 왕의 회복을 빌도록 하였으나, 왕은 마침내 이달 18일에 창덕궁(昌德宮)의 여차에서 승하하였다. 왕은 재위한 지 15년이었고 춘추는 34세였다. 덕이 있으면 장수한다는 말도 소용이 없고 신도(神道)의 이치도 틀린 것이다. 아, 슬프도다.

영의정 허적, 좌의정 김수항, 우의정 정지화 등이 왕의 공덕(功德)을 의논하여 ‘순문 숙무 경인 창효’란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현종(顯宗)으로 정하였다. 김수항이 능에 관한 일을 총괄하여, 건원릉(健元陵)의 서남쪽 다른 산줄기인 태좌묘향(兌坐卯向)074) 의 자리에 묘지를 정하고 이해 12월 13일 임인(壬寅)에 숭릉(崇陵)에 장사지냈다.

처음 염(殮)을 할 적에 모든 교금(絞衿)075) ·복습(複褶)076) 등의 물품을 모두 궁중에서 마련하였고, 유사(有司)들에게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다. 빈소(殯所)를 차리고 장사를 지낼 때에도 모든 일을 검소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였다. 이는 대개 우리 왕비와 우리 사왕(嗣王)이 평일 소박한 것을 숭상한 대왕의 유지를 몸받아 행한 것이라고 한다.

왕비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嶺敦寧府事)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우명(佑明)의 따님인데,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곧 우리 사왕(嗣王) 전하이고 큰 딸은 명선 공주(明善公主), 다음은 명혜 공주(明惠公主)인데 모두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고 막내는 명안 공주(明安公主)인데 아직 어리다. 중궁(中宮) 김씨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따님이다. 신해년077) 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지금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아, 무릇 하늘을 본 사람은 높은 것을 알고 해와 달을 본 사람은 밝게 빛나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비록 신(臣)이 매우 어둡고 비루하지만 우리 대행 대왕을 섬겨 교명(敎命)을 받든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선왕의 순수한 행의(行誼)와 아름다운 덕망이 옛날 성군에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왕이 본디 공손하고 검소하며 공경하고 조심하여, 노래나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고 놀이나 안일에 젖은 적도 없으며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시면서 깊은 못이나 골짜기에 임하는 듯한 경계심을 가지고 계셨는데, 15년 동안을 하루와 같이 하셨다. 매양 비오기를 빌 때면 혹 궁중에서 재계하고 한데 서서 밤을 새우기도 하고, 혹은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기도 하고 법주(法廚)078) 를 줄이기도 하였다. 비록 몸에 질병이 있어서 한때나마 편안한 적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감히 자신만을 돌보지 않았다.

특히 궁금(宮禁)을 엄히 단속하여 청탁의 길을 끊어버리고 조정을 경계하여 당파를 제거하게 하였다. 또 간하는 사람에게 자주 상을 주어 언로(言路)를 넓혔다.

지난 병오년079) 겨울 무렵에 신이 여러 강관(講官)의 뒤를 따라 선정전(宣政殿)에 들어가 왕을 모시었다. 이때 요망한 혜성(慧星)이 겨우 사라지자마자 또 천둥의 이변이 있었으므로 왕이 더욱 척연히 놀라고 두려워하여 재변의 구제책을 묻고 직언을 구하였는데, 일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신이 매양 이 일을 칭송하며 감히 잊지 못하고 있다.

신이 또 일찍이 유신(儒臣) 송준길과 내합(內閤)에서 함께 진대(進對)하였다가 이어서 본조의 신하 성삼문(成三問)의 일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성삼문을 허여하며 "명나라 방효유(方孝孺) 등과 같은 사람이다."하였으니, 여기에서 충의를 포상하는 왕의 성대한 뜻을 볼 수 있다. 또 지난해 해서(海西) 지방에서 변란을 고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한 번 물어보고 그것이 무고(誣告)임을 알고는 70여 명을 석방하면서 같은 날에 양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었으니, 여기에서도 왕이 재위하던 세상에서는 형벌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아, 어찌 훌륭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신이 또 일찍이 감히 논하였거니와, 이 몇 가지 일이 범상한 군주에 있어서는 진실로 훌륭한 일이 되겠지만, 선왕에게는 조그마한 일일 뿐이다. 오직 천승(千乘)의 지귀(至貴)함과 군주의 지존(至尊)함으로서 증자(曾子)민자(閔子)의 덕행을080) 실천하고 검소한 절조(節操)를 지켰다. 그리고 또 우리 온 동방 수천리 사이가 비록 홍수와 가뭄이 들어도 재난의 걱정이 없게 하고 도랑과 골짜기에 뒹굴던 사람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여 넓은 인애(仁愛)와 큰 은택의 안에서 삶을 누리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질박을 숭상한 요(堯) 순(舜)081) 자책하면서 큰 가뭄에 비를 빈 탕왕(湯王)082) 의 성세(盛世)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게 특히 왕의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으로서 영구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아, 지극하고 지극하도다.

가선 대부 이조 참판 겸 동지경연성균관사 신 김석주(金錫胄)는 지어 올림.


  • 【태백산사고본】 29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04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46]
    신사 : 1641 인조 19년.
  • [註 047]
    갑신년 : 1644 인조 22년.
  • [註 048]
    내수(內竪) : 궁중에서 부리는 어린 내시.
  • [註 049]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 [註 050]
    신묘년 : 1651 효종 2년.
  • [註 051]
    임진년 : 1652 효종 3년.
  • [註 052]
    농전(弄田) : 심심소일로 가꾸기위해 장만한 전지.
  • [註 053]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 [註 054]
    여차(廬次) : 상제가 거처하는 곳.
  • [註 055]
    경자년 : 1660 현종 1년.
  • [註 056]
    신축년 : 1661 현종 2년.
  • [註 057]
    임인년 : 1662 현종 3년.
  • [註 058]
    계묘년 : 1663 현종 4년.
  • [註 059]
    갑진년 : 1664 현종 5년.
  • [註 060]
    을사년 : 1665 현종 6년.
  • [註 061]
    호서(湖西) : 온양(溫陽).
  • [註 062]
    병오년 : 1666 현종 7년.
  • [註 063]
    정미년 : 1667 현종 8년.
  • [註 064]
    무신년 : 1668 현종 9년.
  • [註 065]
    경자년 : 1660 현종 1년.
  • [註 066]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 [註 067]
    경술년 : 1670 현종 11년.
  • [註 068]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 [註 069]
    임자년 : 1672 현종 13년.
  • [註 070]
    갑진년 : 1664 현종 5년.
  • [註 071]
    계축년 : 1673 현종 14년.
  • [註 072]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 [註 073]
    선왕(先王) : 효종.
  • [註 074]
    태좌묘향(兌坐卯向) : 서방을 등지고동쪽을 향한 자리.
  • [註 075]
    교금(絞衿) : 시신을 묶을 때쓰는 소대(小帶).
  • [註 076]
    복습(複褶) : 시신을 싸는 옷.
  • [註 077]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 [註 078]
    법주(法廚) : 임금 수라를 만드는 주방.
  • [註 079]
    병오년 : 1666 현종 7년.
  • [註 080]
    증자(曾子)와 민자(閔子)의 덕행을 : 이 두 사람은 모두 공자(孔子)의 고제(高弟)로 덕행이 뛰어나고, 효행(孝行)이 특출하였다. 증자는 증삼(曾參), 민자(閔子)는 민손(閔損).
  • [註 081]
    질박을 숭상한 요(堯)순(舜)과 : 요임금과 순임금은 질박을 숭상하여 산에서 벌채해 온 서까래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고, 띠풀로 지붕을 덮고 자르지 아니했다 한다. 《사기(史記)》 진 시황 본기(秦始皇本紀).
  • [註 082]
    큰 가뭄에 비를 빈 탕왕(湯王) : 은(殷)나라 때에 큰 가뭄이 들자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비를 빌면서 여섯 가지 일로 자책하였는데, 첫째, 정치가 절도가 없는가? 둘째, 백성을 고통스럽게 부렸는가? 셋째, 궁실이 사치한가? 넷째, 여알(女謁)이 성한가? 다섯째, 뇌물이 행해지는가? 여섯째, 참소가 일었는가? 등이다. 《공양전(公羊傳)》 항공오(恒公五) 대우주(大雩注), 사략(史略).

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崇陵誌。

於戲! 洪惟我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李氏, 諱, 字景直孝宗顯仁大王之適嗣, 仁祖明肅大王之孫。 母妃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 張氏, 右議政新豐府院君 之女也。 始, 孝廟邸, 爲質北隣, 以皇 崇禎十四年辛巳二月己酉, 誕王于館。 王生有異質, 覃訏魁碩。 甲申, 孝廟將由, 乃遣王先還, 王方四歲。 上謁于仁祖, 有所問, 應對如成人。 問 , 王已能別其聖暴, 言皆證古史。 嘗有外藩進豹皮者, 毛踈惡將却, 王卽白于仁祖曰: "捉一虎, 傷民猶必多矣。" 仁祖聞而大奇之, 命勿却。 嘗偶出閤門, 見一卒形羸黑, 問內竪, 對曰: "此病凍餒者也。" 王爲惻然, 輒命賜之衣, 且續食。 其自幼少饒神智, 仁愛之出天性如此。 昭顯旣卒, 孝廟以次嫡陟儲副, 王亦進號元孫。 己丑, 冊王爲王世孫, 設講書院。 是夏, 孝廟嗣寶位, 王亦進號王世子。 辛卯, 行冠禮, 仍行冊王世子禮, 冬行嘉禮。 壬辰, 行入學禮, 益廣置春坊僚屬, 詳延宿儒, 以盡其輔導。 孝廟嘗再祀文廟, 輒命王從, 敎右文也; 大閱于南津, 復命王從, 敎不忘武事也; 時觀稼弄田, 敎重民食也。 己亥五月, 孝廟賓天, 王受寶踐阼。 旣反, 苴絰于廬次, 哀哭不節, 飮歠不饘, 饋奠不攝。 時盛熱, 處偪隘不遷, 左右臣庶及遠邇聞者, 皆莫不感王之篤孝。 王初眂政, 惟先孝廟之所敎詔, 遺志、遺事之是遵。 謙己而尙學, 儉上而裕下, 務敦大周愼, 以歸于中正。 首用大司憲臣浚吉言, 加禮髦士, 勉留已至, 諭召未徠。 時若左贊成宋時烈, 已自孝廟朝受眷遇最深, 而尹宣擧李惟泰諸人, 亦咸至京。 及時烈等求退甚懇, 王頻賜手批, 慰挽備至。 命諸道供獻, 係祀享外, 悉省除之, 民已皷舞新化矣。 庚子, 關東北菑, 命盡蠲端川逋銀, 減三甲貢貂, 嶺以東減布, 以西減米。 辛丑, 三南又旱, 命復減諸道貢獻, 減酒房, 減廐馬。 舊有兩尼院名仁壽慈壽者, 在王城北內, 王命撤之, 搆黌舍, 遣院尼悉歸俗。 秋, 王親舍菜于頖宮。 壬寅春, 命禮部, 修朝諸陵, 且著令三歲一審。 特遣御史南九萬李䎘等, 蠲湖嶺雜賦, 且行賑貸。 又遣近臣, 祭厲于壬丙古戰地。 秋, 王親幸露梁, 講武事。 癸卯, 命均田使閔鼎重金始振, 改量畿田, 命減諸宮家海稅及柴場之廣占撓民者。 甲辰, 畿內比歲旱, 秋, 湖南又水, 發江都、南漢穀以哺之。 命宰臣、三司, 竝登薦才雋。 遣左參贊金壽恒, 往咸鏡道, 御史尹深耽羅, 問邊氓及海外人疾苦, 又俱試文、武士。 王常患眼痾, 久不瘳, 至乙巳, 乃南幸湖西, 試沐于溫泉, 始有效。 至行宮之日, 卽罷鄕兵之扈於道者歸鎭, 命兵部, 飭將士, 毋擾民, 毋得損禾稼。 命禮部, 分祀故勳德之在旁郡者, 設文武科以慰士。 命戶部, 減徭賦有差以慰民。 丙午春, 王奉仁宣大妃, 復幸溫泉, 遍賜一道耆老曁以孝行聞者米肉。 命吏部, 凡年八十以上者, 毋論士庶, 竝加資級。 旣還, 大赦。 命申明戶口帳籍法, 漏者罪徙邊。 丁未春, 王親御法殿, 冊元子諱爲王世子。 夏復幸溫泉, 益命道臣, 寬民決冤滯。 先是, 孝廟嘗命行兩湖大同, 以紓民困, 唯湖南山郡未及行。 王旣述事, 朝臣有胥言不便者, 且行且寢, 後又皆言便, 乃決意行之, 湖民以蘇。 戊申, 關東又饑, 命蠲民如庚子。 設賑恤廳, 命重臣有才誠者幹理之。 減各司奴婢貢布。 己酉春, 復幸溫泉。 冬, 始以神德王后 康氏躋祔于太廟, 復貞陵寢園, 擧曠典以章大倫。 庚戌春夏大旱, 秋大水, 諸路皆告菑, 王又命發江都、南漢米三萬、運關西米二萬, 分賑內外。

辛亥春, 又無麥, 民大饑, 疫癘滋熾, 死亡相藉。 王日夜焦憂, 設京賑三所, 勑諸路諸邑, 盡誠賙救, 生者饘糜, 死者槥櫝。 壬子, 下罪己敎, 辭旨惻怛, 布諭國內, 悉蕩除逋賦, 決罪囚、開廢錮, 惠澤霈然, 民遂忘其菑矣。 又命宰臣、三司, 薦有學行、文武才能者。 又遣御史李夏耽羅, 載種食及布以餽, 復試士如甲辰。 癸丑, 宗人靈林副令 翼秀上疏言寧陵封石有釁, 王大驚憂, 決改兆之議, 用是冬十月, 遂遷孝廟衣冠于陵, 禮也。 時, 王上奉慈懿仁宣二太妃, 極志盡物以致隆養。 孝廟時所建萬壽殿者, 慈懿太妃之所御也, 在西。 王又別搆一殿, 名曰集祥, 仁宣太妃之所御也, 在東。 蓋猶 長樂長信之制焉。 母妃素有疾, 王恒左右侍護, 以愉婉順適。 且頻召諸姊妹, 歡然展親, 和樂無間。 母妃亦嘗曰: "王每在旁, 病若去體。" 至甲寅春, 母妃疾寢谻, 王亟命遍擧珪璧, 且議釋冤囚。 迨遭大戚, 王摧毁踰制, 而益致潔祀享, 自饎爨濯, 槪靡所不飭。 始, 孝廟之喪, 大臣與儒臣等, 議慈懿太妃所宜服以爲: "本朝五服之制, 惟爲子朞而已。" 遂定爲朞。 其後有言朞非禮, 禮當三年者, 王命詢諸大臣儒臣。 諸儒等因訟言, 古禮疑亦爲朞, 大臣又持前見, 以國制唯朞爲對, 王乃從大臣言, 仍朞不改。 至是, 禮官復遽殺慈懿太妃服爲大功, 王旣更詢于公卿、三司, 且親考禮經, 盡別其違非曰: "夫嫡, 胡庶也? 長, 胡衆也? 先王之於太妃, 唯疏所稱: ‘取嫡第二長子, 亦名長子。’ 者, 乃是也。" 亟罪禮官, 命改功爲朞。 又謫責首相不從禮明文, 而從人說者。 制旣定, 名旣正, 而邦禮益無憾矣。 王旣行純茂, 性又聰睿特達, 聽斷之餘, 惟常耽經史, 沈潛理道, 而其發而措諸事者, 要必參伍反覆, 得其當而後乃行。 晩益明習政法, 挈綱總紀, 方欲大究, 輓近軍民之弊, 以盡其通變, 而王已積瘁過毁, 病以日臻。 八月初七日朝, 命大僚會賓廳, 將召與議事, 忽感疾益苦不果。 亟馳遣承旨, 召領議政許積忠州, 又召左議政金壽恒, 使至前勉諭。 大漸之夕猶頻問敬思殿膳羞潔否, 又聞戶外有風聲, 問此何自, 曰東風, 王驚曰: "損稼酷矣, 民將殄矣。 予何爲又聞此聲乎?" 猶嗟嘆未已。 王世子令諸臣, 齋禱于廟社山川。 王竟以是月十八日己酉, 大棄群臣于昌德宮之廬次。 王在位十有五年, 春秋止三十有四。 德壽無徵, 神理繆鍇。 嗚呼, 痛哉! 領議政臣、左議政臣壽恒、右議政臣知和等, 議王功德, 上謚曰純文肅武敬仁彰孝, 廟號曰顯宗。 臣壽恒摠陵工, 卜兆于健元陵之西南別岡負兌之原, 以是年十二月十三日壬寅, 葬王于崇陵。 當始斂也, 凡絞紟複褶之屬, 皆出諸宮中, 毋煩有司。 及殯而葬也, 事皆從儉約, 毋傷民, 蓋惟我王妃曁惟我嗣王, 克體王平日尙樸敦素之遺旨云。 王妃金氏, 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 佑明女也。 誕一男三女, 男卽我嗣王殿下, 女長明善公主, 次明惠公主, 皆未字而夭, 季明安公主幼。 中宮金氏, 領敦寧府事光城府院君 萬基之女, 辛亥春, 受冊爲嬪, 今進位坤極。 嗚呼! 夫觀天者識巍然, 覩日月者識輝光。 雖以臣甚矇陋, 猶事我大行大王, 得奉敎承命者, 亦已久矣。 竊伏以, 識我先王之純行懿德, 卓然匹諸古昔明聖而無愧。 王素恭儉寅畏, 無聲色嗜好, 無盤遊逸豫, 常兢兢懍懍而有淵谷之戒, 蓋十五年如一日。 每當禱雨, 或致齋, 宮中露立達曉, 或避正殿, 損法廚, 雖疢疾在躬, 曾無時月康豫, 而亦不敢自恤。 尤嚴宮禁, 以杜絶蹊徑。 戒朝著以破除朋黨, 亦屢賞諫者, 以廓言路。 昔在丙午冬間, 臣嘗從諸講官後, 入侍王于宣政殿。 時, 妖彗纔息, 又有雷異, 王益惕然警懼, 詢災乞言, 一出於至誠, 臣每頌此事, 不敢忘。 臣又嘗與儒臣宋浚吉, 俱進對內閤, 仍論及本朝臣成三問事, 王許三問以爲: "皇 方孝孺諸人者流也。" 此皆可以見王褒忠、尙義之盛意矣。 且往歲, 海西嘗有上變者, 王一問知其誣, 放七十餘人, 同日賜糧歸鄕, 此又足以知王之世, 無一枉死於桁楊之下者矣。 嗚呼, 豈不盛哉! 然臣又嘗敢論之玆數事者, 在凡主固爲盛於先王, 則尙其細者耳。 惟其以千乘至貴, 君主至尊, 而躬曾閔之行, 執布素之節, 且使我環東土數千里之間, 雖洚旱罔災, 溝壑復廬, 盡囿於鴻仁厖澤之中者, 實庶幾茅茨桑林之盛焉。 此尤王之所以爲盛德至善, 沒世而不可忘者也。 嗚呼! 其至矣。 嗚呼! 其至矣。

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成均館事臣金錫冑撰進。


  • 【태백산사고본】 29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04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