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대왕 행장(行狀)
왕의 성은 이씨(李氏), 휘(諱)는 원(棩), 자(字)는 경직(景直)이다. 효종 대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선 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인데, 우의정 문충공(文忠公) 유(維)의 딸이었다. 효종이 대군(大君) 시절 심관(瀋館)에 볼모로 있으면서 신사년001) 2월 기유일에 대왕을 낳았는데, 남다른 데가 있었고 두 세 살 적부터 언어 행동이 법도가 있었다.
갑신년에 효종이 심양에서 연경(燕京)을 가게 되어 왕을 본국으로 보냈는데, 돌아와 인조 대왕을 뵈었을 때 응대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었다. 인조가 요(堯) 순(舜)·걸(桀) 주(紂)에 대하여 물었는데 그때 왕은 증선지(曾先之)가 쓴 《사략(史略)》을 읽고 있을 때였다. 그리하여 그 책 속의 문구들을 낱낱이 들어가면서 성군이 되고 폭군이 된 이유를 입증하였으므로 인조가 그 대답을 듣고는 유별나게 사랑하였다. 표범 가죽을 공진(貢進)한 자가 있었는데 품질이 나빠 물리치려 하자, 왕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틀림없이 많은 사람이 다칠 것입니다."
하여, 인조는 그뜻을 가상히 여기고 물리치지 말도록 명하였다. 효종이 본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왕은 해가 뜰 때마다 축원하기를,
"부모님이 어서 돌아와 내가 뵐 수 있도록 해주소서."
하였고, 언제나 새로운 맛을 대하면 그 지방002) 생산이 아닌 경우 바로 보내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맛을 보았으며, 부모를 모시고 있을 때는 옷가지나 기물들에 있어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반드시 조심성 있게 다루고 감히 장소를 바꿔놓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 곁에 있지 않을 때라도 반드시 부모님 뜻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상상하여 부모가 평소 좋아하지 않았던 일이면 감히 하지 않았다.
언젠가 여염집에 나가 있을 때 그 이웃에 목소리 높은 자가 있어 시자(侍者)가 그리 못하도록 꾸짖자, 왕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떻게 소리를 안 낼 것인가.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어야지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언젠가 합문(閤門) 밖에 나갔다가 얼굴이 새까만 수졸(守卒)을 보고는 그의 춥고 배고픈 것을 불쌍히 여겨 그에게 옷을 주게 하고 또 날마다 남은 밥을 주게 하여 그의 복무기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인조가 효종을 후사로 삼고 기축년 2월에 친히 인정전(仁政殿)에 납시어 왕을 세손(世孫)으로 책봉하였는데, 자태가 의젓하고 일거일동이 차분하고 우아하였으므로 백관들이 서로 하례하였으며, 강서원(講書院)을 개설하여 강관(講官)을 두고 학문을 익히었다. 그해 5월에 인조대왕이 승하하고 효종 대왕이 왕위를 잇자, 왕이 세자 자리에 올랐는데, 보도(輔導)도 더욱 짜임새가 있었거니와 반면 슬기로운 덕이 날로 성취되어갔다. 효종은 왕으로 하여금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하여 농부를 들어오게 하여 후원(後苑)을 갈도록 하였던 바 그것을 본 왕은 말하기를,
"소가 사람에게 공로가 있고, 사람도 노력 끝에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바로 저렇구나."
하고, 자기가 먹을 것을 대신 밭 가는 농부에게 주기도 하였다.
왕은 기억력이 남달리 뛰어나 한번 보고 들은 것이면 잊지 않았다. 《맹자(孟子)》를 읽을 때인데, 효종이 외우어보라고 하자, 7편을 다 외우도록 글자 하나 틀리지 않았으므로 효종은 놀랍도록 기뻐하였다.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책읽을 시간 말고는 부모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부모가 혹 편찮기라도 하면 밤낮으로 곁에서 시중들면서 비록 물러가 쉬라고 하여도 물러가질 않았다.
신묘년003) 에 가례(嘉禮)를 치루었는데, 왕비는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었다. 임진년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고 선성(先聖)을 배알한 후 이어 박사(博士)에게 학업을 청했는데, 예의를 갖춘 모습이 장중하고 독서하는 음성이 카랑카랑하여, 뜰을 에워싸고 구경하던 자들이 모두가 기뻐하고 감탄하였다.
기해년004) 5월 4일 효종이 승하하여 왕은 상차(喪次)를 지켰는데, 예(禮)에서 정한 이상으로 몸이 야위도록 슬퍼하였고, 그로부터 5일 후인 기사일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왕위에 오를 때도 너무나 슬퍼하는 모습에 뭇 신하들이 차마 얼굴을 들고 보지 못할 정도였었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효종의 행장을 지어 올리니, 왕이 서찰을 내리기를,
"요 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뿐이다. 따라서 요순의 정치를 하려면 당연히 요순의 도를 다해야 하는데, 선왕께서는 그것을 자신을 닦고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으로 삼으셨으며, 또 세상사를 개탄한 나머지 준수하고 어진 이들을 초치하여 심복의 자리에다 두시고는 서로 도덕과 의리를 강마하여 기어코 이 세상을 삼대(三代) 시절로 끌어올리고, 대의를 만천하에 펴려고 했던 것이 사실 선왕의 뜻이었으며 평일에 세워오신 웅대한 규모였는데, 지금 이 행장 내에는 그러한 것들이 그다지 거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들을 분명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여, 그 서찰이 나오자, 그를 본 사람들이 선왕의 업적을 천양하고 그 뜻을 이어 사업을 계속하려는 왕의 태도에 대하여 감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때는 더위가 한창인 데다 여차도 비좁았기 때문에 가을까지만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근신(近臣)들이 청하였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거처를 가린단 말인가. 거처를 골라서 지내면 몸이야 편안하겠지만 마음이 불안한 것이다."
하였다. 10월 병진일에 효종 대왕을 영릉(寧陵)에 장사지내고 초하루·보름의 제전에 있어 심한 병이 아니면 대행을 허락치 않았으며 능침(陵寢) 참배 때는 좌우가 감동하도록 슬퍼하여 주위 모두가 따라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그해에 드디어 노인을 우대하고, 의지할 곳 없는 자를 돌보고, 충효를 표창하고, 절의를 격려하고, 청백리를 장려하고, 전망자를 녹훈(錄勳)하는 은전을 거행하였으며, 형을 남용하는 관리는 금고에 처하고, 아약(兒弱)으로서 군적(軍籍)에 실려 군포를 징수하는 자는 그것을 일체 견면하였다. 그리고 수재로 인하여 호남·경기·호서의 세액을 면제했으며, 세미를 견감하고 북관(北關)의 공부(貢賦)도 그 수를 덜어주었고, 관서(關西)에 와 떠돌이 생활을 하는 백성들에게는 관향곡(管餉穀)을 풀어 가구 수대로 대주었으며, 내탕(內帑)에서 무명베 1천 필을 내리고 상평청(常平廳)의 백금 몇 천 냥과 각도의 감영·병영의 무명베 여러 만 필을 풀어서 견감으로 인한 부족분을 충당하였는데, 이게 바로 왕이 처음 즉위하고 나서 정사를 베풀어 사랑을 구현하기 시작한 일이었다.
즉위 1년인 경자년에 기근으로 하여, 단천(端川)의 공은(貢銀), 영동·영서의 대동미(大同米), 각도의 전세(田稅)와 노비들 공포(貢布)를 견감했으며, 떠돌이로 나선 북민(北民)들을 어사를 보내 위로하고 안집시켰다. 그리고 호구(戶口)의 법을 엄하게 하여 백성들이 감히 누락자가 없이 모두 판적(版籍)에 등재되게 하였으며, 강원도에는 여정포(餘丁布)를 내려 재앙을 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중외의 노인들에게는 쌀과 베, 명주, 솜 등을 내려주었으며, 여러 궁가(宮家)의 원당(願堂)을 혁파하고, 관북 또는 영동·영서로부터 성중으로 떠들어온 백성들은 상평청으로 하여금 쌀과 소금 등을 대주도록 명하였다.
7월에 큰 가뭄으로 인하여 기우제를 행하였다. 가을 이후에는 기우제가 없는 것이 국가 제도였지만 이때 특별히 행하였던 것이다. 각 아문이 백성을 상대로 물건을 팔거나 빌려주고 이식을 취하는 일을 금하였고, 영릉(寧陵) 성알길에 시위하는 장사(將士)들을 단속하여 길가 곡식들을 밟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팔도에 두루 유시를 내려 유민들을 안집시키게 하도록 하교하고, 어공(御供)의 정미(精米)·향온미(香醞米)를 제감하였으며, 각도에 명하여 각기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다. 해서(海西) 사람으로 상변(上變)한 자가 있었는데, 왕은 일차 심문에서 그것이 무고임을 알고는 그를 목 베고 연루되어 체포된 자 70여 명은 모두 석방하면서 식량을 주어 돌아가게 하고 이졸들에게 재산을 빼앗긴 자는 그것을 모두 찾아 되돌려주도록 하였다.
겨울에 사형수를 복심해야 했는데 도심지에 마마가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대신이 외신(外臣)들을 인접하기가 곤란하다 하여 정지할 것을 청하자, 왕이 서찰을 내리기를,
"아, 천성(天性)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애초의 천성을 되찾지 못해서 악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인데, 그를 즉시 처리하지 않고서 계속 가두어만 둔다면 그의 죄로 보아서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정상으로서는 불쌍한 것이다. 생각이 여기 미치니 나도 모르게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금년에 그 때문에 처리를 하지 않고 내년에도 또 그 때문에 처리를 못한다면 그 죄인은 모두 다 감옥 속의 귀신이 되고야 말 것이니 그는 나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신축 2년에 도성 안에 있는 두 이원(尼院)을 철거하였다. 왕이 처음에는 중들이 교화를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여 모두 없애려고 하였던 것인데, 불시에 다 그리 하기는 어렵다는 대신과 옥당의 건의에 따라 우선 자수(慈壽)·인수(仁壽) 두 원을 철거하도록 명하고, 나이 젊은 중은 각기 제 갈 곳으로 가게 하고 늙은이는 성밖으로 내쫓았으며, 그 원의 목재로는 학궁(學宮)과 무관(武館)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외에서 행하는 부당한 제사는 그를 모두 금하였다. 가뭄이 심하여 친히 기우제를 행하려고 했는데, 연신(筵臣)들이 성상 체후가 편치 않음을 들어 말하자, 왕이 이르기를,
"내 어찌 내 한 몸을 아껴 만성의 생명을 돌보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그리고 강도(江都)·남한(南漢)의 쌀을 옮겨 삼남(三南)을 진구하였다.
7월에 왕이 태묘(太廟)에 이르러 효종의 부제(袝祭)를 행하고, 진하(陳賀)·반교(頒敎)·음복연(飮福宴)을 정지하였다. 종전에는 수시로 도성 안의 양가(良家) 딸을 선발하여 시녀로 삼는 예가 있었는데, 이때 와서 그를 특별 혁파하고 일정한 법으로 삼았다. 삼남과 경기·해서의 조적(糶糴)을 일체 면제하고 이어 봄에 징수하는 미곡을 감해주게 했으며, 태복시의 말먹이 곡식 1천여 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을 먹이게 하였다.
임인 3년 봄에 진휼 어사(賑恤御史)를 양남에 보내 편리한 대로 일을 보도록 하였으며, 절행이 있는 영남 사람에게 차등을 두어 미곡을 하사하고, 서북면의 감사들에게 명하여 인재를 발굴하여 알리게 하였다. 그리고 경기도에 전지 측량을 실시하고 호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계묘 4년에 가뭄으로 하여 자신을 책하는 분부를 내리고 대소 신료들에게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명했으며, 여러 궁가의 면세 전결(免稅田結)을 정하면서 그 수를 차등을 두었고 시장(柴塲)도 한 곳만 남겨두고 많이 점유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어장(魚塲)·망장(網塲)은 선조조(宣祖朝)에서 하사받은 것 만을 인정하되 그나마 하사받은 당사자에 한해서만 인정하도록 하였다.
갑진 5년에 내수사 노비의 신공(身貢)에 있어 이미 죽은 자에게도 추징하던 것을 무술년 이후부터는 그를 탕감하였다. 성변(星變)으로 인하여 대소 뭇 신하에게 명하여 정사의 득실에 대해 갖추 아뢰게 하고, 내사옥(內司獄)의 죄수를 석방했으며 상의원의 비단짜는 일도 정지시켰다.
을사 6년 4월에 온양의 온천에 거둥하였다. 그보다 앞서 왕이 안질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낫지 않아 의원이 아뢰기를 온천 목욕이 좋다고 하여 한 달 남짓 목욕 끝에 완쾌를 보았다. 그 도내에 명하여, 기로(耆老)를 예우하고 효제(孝悌)를 천거하며 충현(忠賢)에 제를 올리고 전조(田租)를 감면하고 과거(科擧)를 보이도록 하고 돌아와서도 기로 우대의 은전을 연로(沿路)에까지 베풀었으며 그후 누차 거둥을 하였지만 그때마다 모두 그렇게 하였다.
10월에는 풍뢰(風雷)의 이변이 있었다. 왕은 재야의 유신(儒臣)들에게 실봉(實封)을 갖추어 아뢰도록 명하고, 백성의 전결이 몰래 궁가의 면세 전결에 등록되는 것을 일체 금지하였다.
병오 7년에도 흉년 때문에 자신을 죄주는 분부를 내렸고, 영남 곡식은 영동·영서로 해서 곡식은 북관으로 옮겨 굶주린 백성을 먹였으며, 목화가 품귀하다 하여 포보(砲保)가 바치는 포목 및 각 관아 노비의 신공을 차등을 두어 견감하였다. 그리고 함경도 9개 읍의 전세 및 우황(牛黃)·표피(豹皮) 등 공물도 그를 면제하였다.
정미 8년에 한재로 인하여 자신을 책하는 분부를 내리고, 각사 노비의 신공 절반을 감했으며, 저화(楮貨) 값을 특감하였다. 국가 제도에 노비들 신공 이외에 저화 값이라는 것이 또 있었는데, 그 후 저화가 없어졌는데도 그 값을 환산하여 베를 징수하여 오던 것을 지금 와서 특감하고 그를 영(令)으로 삼았다.
7월에 친히 사직에 제사하여 비를 빌고 옥중 죄수들을 재심했으며, 바른말을 널리 구하고 경기 지방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두 견감하였으며, 각사의 경비도 모두 절반씩 감하게 하고, 호조의 염세도 감하고 양서(兩西)의 징수할 쌀을 견감했으며, 북로 조적의 포흠분을 탕척하였다. 그리고 경기 관내에서 번을 드는 기병(騎兵) 및 각진의 수군(水軍)이 매월 번드는 조로 납입하는 군포도 그것을 절반으로 줄였으며, 각도 노비의 신공 중 아직 거두지 못한 것도 모두 탕척하였다.
무신 9년에 성변으로 인하여 자신을 책하는 분부를 내리고 뭇 신하를 경계하여, 경건한 자세로 봉직하고 인재 발굴에 힘쓰며 모든 옥사를 유체없이 제때제때 처리하도록 하였으며, 강도의 쌀 일만 석과 남한 산성의 쌀 오천 석을 풀어 경기 관내의 기민을 먹이게 하였다. 예조가 성변이 이미 사라졌으니 평상의 수라를 다시 들도록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이 아파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데 무슨 마음으로 평상 수라를 들겠는가. 가을걷이 후에나 할 일이다."
하였다.
기유 10년에 영남 지방의 기근으로 하여 각사 노비 중에 을사년 이후로 신공을 징수할 수 없는 자를 조사하여 그 신공을 견감해주도록 명하고, 여러 궁가가 떼어받은 곳을 조사하여 주인이 있는 백성의 전지 및 떼어받기 이전에 백성들이 일구어 경작했던 땅이 있으면 모두 그들에게로 되돌려주게 하였다. 세시 때 송엽(松葉) 바치는 일에 대하여, 대신이 청하기를, 그것은 기도에 가까운 일로 정도가 아니니 없앴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은 그 청을 받아들여 도장(桃杖)·도지(桃枝)·인승(人勝)·채화(綵畵)까지도 모두 함께 없애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성씨가 같으면 관향이 다르더라도 서로 혼인을 못하게 하였다. 종전의 나라 풍속은 성씨가 비록 같더라도 관향만 서로 틀리면 으레 혼인을 해왔었는데 이때 와서 금한 것이다.
10월에 처음으로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태묘에 합부하고 의식에 맞추어 휘호를 올리고 능침도 복원하였다. 왕후는 태조가 개국 때 여러 해 동안 중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태조가 승하하자 신하들이 잘못하여 합부의 예를 거행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이나 신도나 오래도록 억울하게 여기던 일이었고 그에 대한 조정 논의가 가끔 발발하기도 하였지만 열성조에서 미처 못했던 일이었는데 지금 와서야 비로소 그동안 빠져 있던 전례를 거행한 것이다. 능침을 봉하고 제를 올리던 날 소나기가 정릉(貞陵) 일대에 갑자기 쏟아져 백성들은 그 비를 일러 세원우(洗冤雨)라고 하였다. 천둥·우박의 재이로 하여 중외의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결하고 대동미 징수도 그 수를 감하였다.
경술 11년에 흉년 때문에 각 전(殿)의 향온미를 감량하고 강화도 쌀 3만 석을 실어다가 서울에서 발매했으며, 호조의 염철포(鹽鐵布)를 전라도에다 끊어주어 기민 구제에 충당하게 하고, 어영군(御營軍)에 번드는 일을 정지하여 그 보미(保米)를 각기 자기 도에 유치하였다가 진구에 쓰게 하였다. 그리고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어 호남 및 통영(統營) 곡식을 옮겨다가 진구하게 하고 본주의 노비들 신공은 모두 제감했으며, 호조와 진휼청에 명하여 춥고 굶주린 사람에게 곡식과 옷가지를 차등을 두어 주급하게 하고, 각도에도 포공(布貢)의 수를 감하였다.
신해 12년 봄에 큰 기근이 들어 왕이 하교하기를,
"이렇게 큰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을 독려하여 조세를 징수할 수는 없는 일이니 삼남과 원양·황해·경기의 전세를 모두 본도에 유치하였다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라."
하고, 도심 안에는 세 곳에 진청(賑廳)을 두어 재신(宰臣)이 그 일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각도에는 읍과 촌락의 원근을 헤아려 기민 먹이는 곳을 군데군데 설치하고 미음을 쑤어 굶주리고 부황 난 자를 먹이게 하였다. 그리고 건량(乾粮)을 대주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고, 진청에서는 조곡의 값을 내려 뛰는 값을 막도록 명하였다.
여름에는 또 보리 농사가 크게 흉작이어서 굶어죽은 자가 길에 즐비하였으므로 중외에 명하여 창고의 것을 모두 털어내어 기민 먹이는 일을 계속하게 하고 병든 자에게는 의약을 대주고 죽은 자는 장례를 치뤄주었으며 버려진 아이는 그를 수양하여 자식으로 삼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울 밖에 사는 백성들도 모두 관청을 찾아 먹여주기를 바랐으며 그렇게 했기 때문에 비록 의지할 곳 없이 금방 죽어가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저들끼리 모여 사람을 죽이거나 한 일이 없어 죽은 자가 유한없이 죽어갔으며 살아남은 자도 자기 고장으로 다시 갈 수가 있었다.
가을에는 각도에 풍년이 들어 그다지 가꾸지 않고서 수확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동서 교외에다 단을 만들어 굶주려 죽고 마마에 죽은 사람들을 제사 지내도록 명하고, 각도의 진상품은 두 자전(慈殿)에 올리는 것만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다 정파하였으며, 어사를 제주에 보내 세 읍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무명베 4천 필, 보리 종자 2천 석, 쌀 2천 석을 수송하여 도와주게 하였고, 정상적으로 바치던 토산품도 그 모두를 견면하였다. 그리고 각도에도 토산품 바치는 것을 명년부터 계축년까지 그 수를 감하도록 하였다.
임자 13년에 재신 및 육조의 참의들에게 인재를 추천하도록 명하고, 중외의 죄수들 중 사형수 이하를 관대히 처리하며 병오년 이전의 조적 포흠분을 모두 물시하고 각 아문에서 받을 조세도 모두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계축 14년에 애통한 심사와 함께 농사에 힘쓰라는 하교를 팔도에 내리고 한재로 인하여 억울한 죄인이 있는가를 살폈으며, 정전을 피하고, 수라상 음식수를 줄이고, 술을 금하였다. 단오첩(端午帖)을 지어올리자, 왕이 이르기를,
"가뭄이 이렇게 심할 때는 이와 같이 실속없는 글월은 짓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다. 신해년 이전의 군병과 노비 중 도망갔거나 죽은 자 및 임자년에 상납못한 것 또는 계축년에 바쳐야 할 군포들을 일체 물시하도록 명하였고, 영릉(寧陵)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9월에 구릉(舊陵)을 열어보았으나 탈이 없었다. 10월 계묘일에 여주(驪州) 홍제동(弘濟洞)으로 옮겨 모셨는데, 영구가 지나간 5개 읍에 대하여 대동미 징수를 면제하고 경기에는 봄에 징수할 쌀을 차등을 두어 감해주었으며 경기·황해·전라·원양 4개 도의 경술년 전세 미수분을 탕감하였다.
갑인 15년 2월에 인선 왕대비(仁宣王大妃)가 승하하여 6월 정유일에 영릉에 부장하였다. 처음 효종 상사 때, 대신이 여러 유신(儒臣)들과 논의하여 자의 대비(慈懿大妃)가 입어야 할 복을 기년으로 정했었는데 그후 허목(許穆)이 상소하면서 《의례(儀禮)》 주소의 설을 인용하고, 차장자의 복으로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왕은 대신·유신에게 다시 물어보도록 명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대답하기를,
"주소에 그 설이 있음은 물론 알지마는 그 주소 내용에 차자는 기년이라는 뜻도 있어, 하나만을 고집하고 하나는 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스러운 주소의 설을 경솔하게 채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까이 명(明)나라 제도 또는 국가 전례를 따르는 것이 오히려 허물이 적을 것입니다."
하였고, 대신들도 종전 소견을 고집하여 국가 전례를 들어 대답했기 때문에 다시 고치지 않고 기년복을 그대로 했던 것이다. 윤선도(尹善道)가 앞장서서, 송시열 등이 효종을 깎아내린 것이라고 주창하자, 그의 말에 호응하는 자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므로 왕이 이르기를,
"기해년 복제 강정은 사실 시왕의 칙령(勅令)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송시열 등 여러 사람들도 당초 수의 때 대신의 논의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급기야 경자년 이후 여러 상소들이 오로지 시열 만을 책망하고 나온 이후에야 시열 등 여러 사람이 비로소 고례(古禮)를 인용 쟁변하기 시작하여 싸우는 한 마당이 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원래 국가가 채택하여 쓰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그것은 시열 등이 비록 차자 중자 등의 논의를 하기는 하였으나 국가에서 이미 그들 말을 채택하여 쓴 적이 없고 허목도 삼년이라는 말을 하기는 하였지만 역시 국가에서는 그의 말도 채택한 적이 없이 다만 10여 년을 두고 피차 싸움질로만 끝난 하나의 공담(空談)에 불과했던 것인데, 그래도 시열 등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 자들이 번번이 예를 논한답시고 들고 나왔기 때문에 왕은 그들 속을 훤히 꿰뚫어보고서 이 하교를 내렸던 것이며 또, 말은 동쪽에 있어도 뜻은 서쪽에 있는 것이라고 물리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때 와서 모비(母妃) 상사에 예관이 전번 상사 때 국조 전례를 그대로 따랐던 근본 뜻을 까맣게 모르고서 먼저 여쭈어보지도 않고 자의 대비 복제를 대뜸 대공으로 정하였던 것인데, 7월에 와서 왕이 공경과 삼사(三司)를 빈청에 모이게 하고, 자의 대비가 인선 왕비 상에 어느 복을 입어야 옳은가를 물었던 것이다. 공경 이하가 왕의 뜻에 맞지 않게 대답을 잘못하자, 왕은 이르기를,
"기해년 상사 때는 아들을 위하여 기년을 입는 국조 전례를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국조 전례에 의하면 비록 장자·중자의 구별 없이 그냥 기년이지만 자의 대비로서는 선왕에 대하여 의당 장자를 위한 기년인 것으로 하였을 것이니 이번 상사에도 당연히 장부(長婦)를 위한 기년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하고, 대공을 고쳐 기년으로 하도록 특명하고, 먼저 여쭈어보지 않았다 하여 예관에게 죄를 내리고, 대답이 묻는 뜻과 배치되었다 하여 수상을 꾸짖었던 것이다.
왕은 봄부터 거상하면서 몸을 너무 돌보지 않아 피로가 쌓여갔다. 8월 7일에 재신을 불러 들어오게 하여 일을 논의하려다가 갑자기 병이 발발하여 그리 못했는데 그달 18일 기유에 창덕궁 재려(齋廬)에서 뭇 신하들을 다 버리고 영원히 떠나갔다. 그때 춘추가 겨우 34세였기에 도성 안의 사서(士庶)는 물론 산골 막바지 우매한 백성들까지도 슬퍼 울부짖으며 지극한 덕을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 슬픈 일이었다. 신하들이 왕의 공덕을 논의한 끝에 시호를 ‘순문 숙무 경인 창효(純文肅武敬仁彰孝)’라 올리고, 묘호는 ‘현종(顯宗)’이라 하였으며 그 해 12월 13일 임인에 숭능(崇陵)에다 장례를 모셨다.
왕은 타고난 바탕이 성스러웠고 어려서부터 슬기로운 덕이 있어 문안(問安)·시선(視膳)을 할 때 이미 주 문왕(周文王) 같은 행실이 있었다. 급기야 왕위에 올라 왕의 예를 행하면서는 그 효자로서의 굵직굵직한 덕목들이야 모든 신민들이 다 보고 들어 아는 사실이지만 그 밖의 두 대비(大妃)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정성과 예가 빈틈이 없었고 부드러운 얼굴 기쁜 마음으로 화기가 항상 넘쳐흘렀다. 대왕 대비가 완산부 부인(完山府夫人)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다가 병이 더치자 왕은 뜰에 늘 앉아서 의원을 불러 약문의를 하고 약물은 반드시 손수 가져다가 올렸으므로 그를 듣는 자 모두 감동하였다.
왕대비가 처음에는 통명전(通明殿)에서 기거하였는데 왕의 거소와 조금 사이가 뜨다 하여 새로 집상전(集祥殿)을 지어 옮겨모시고 밤낮 시봉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며, 대비에게 숙환이 있었는데 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마음에 위안을 주었으므로 대비가 항상 이르기를,
"왕이 언제나 곁에 있어 주어 병이 몸에서 다 떠난 것 같다."
하였다. 일찍이 대비를 모시고 온천 행차를 하였다가 효험을 보고는 그 도내에다 은혜를 베풀고 노인들에게는 벼슬을 내렸으며, 환궁해서도 종척(宗戚)들 또는 조신(朝臣)으로서 나이 많은 자 및 부모가 있는 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풀고 이어 중외의 사민(士民)들에게까지 미쳤다.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효자였는데 자기 어머니보다 먼저 죽자, 특명으로 그의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늠록을 내리게 하는 등, 자기 마음을 미루어 다른 효자들에게 미치는 덕이 그러했기에 백성들이 감화를 받아 모두 효도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었다.
왕에게는 다섯 자매가 있었는데 매우 서로 사랑하고 은우(恩遇)도 골고루 내렸다.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나눠먹고 병이 있다고 들으면 놀라고 걱정되어 소식을 묻고 약물을 보내는 일이 끊기지 않았으며, 누가 죽기라도 하면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소현 세자의 딸이 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에게 시집갔었는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이르기를,
"선왕조에서 여러 부마(駙馬)들 못지 않게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것을 생각할 때 지금 내 심정이 어떻겠는가. 특별히 후하게 돌보아 선왕께서 가까이 대하시던 뜻에 손상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종족(宗族) 사이에도 돈목하여 은혜가 고루고루 미쳐갔고, 사이의 친소(親疎)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보살핌을 가했으며, 귀척(貴戚)에 있어서 대우는 비록 융숭히 할지라도 역시 사사 일로 하여 공(公)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궁가의 노복들도 조금이라도 잘못을 범하면 반드시 담당자를 시켜 법으로 엄히 다스리게 하였다.
유신 송시열·송준길 등이 효종 시절부터 서로 의기 상합하여 효종이 두 신으로 하여금 춘궁(春宮)에서 왕을 모시게 하였는데, 정상적인 도의와 예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깨우치고 권유하기도 하였으며 왕은 그때마다 마음을 기울여 받아들여 날이 갈수록 진보가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을 두고 그 일을 전임하기는 시열보다 준길이 더하였었다. 왕이 즉위하여서는 그 때문에도 두 신에 대한 예우가 더욱 융숭했고 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을 구하였으며, 그 밖에 당시 학문의 선비로 윤선거(尹宣擧) 같은 몇몇 사람도 역시 초빙하여, 모두 다 남다른 예우를 하였던 것이다.
기해년 겨울 시열이 비방을 당하고 그 때문에 물러갈 것을 청했을 때 왕은 그를 만류하다 못해,
"내가 차라리 가서 보리라."
하는 하교를 하였고, 뒤 이어 준길마저 물러가자, 왕은 그 두 신이 생각나 계속 불렀으며, 혹은 사관 혹은 승지를 보내 한장 서찰이 열 줄이나 되도록 그 내용이 지성스러웠다. 혹 세시 때면 잊지 않고 물어주기도 하고, 혹은 흉년에 돌보기도 하며, 초야에 있어도 사람을 시켜 좋은 찬수를 내리기도 하고, 도성에 들어오면 반드시 식량과 육류를 대었다. 그리고 시열이 예를 논했다가 남에게 배척을 당하자, 왕은 상하의 사이를 헐뜯고 이간질한다 하여 그 사람을 내쫓고 시열은 결국 재상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준길이 세상을 뜨자 하교하기를,
"선왕조 시절에 천고에 없는 사랑과 예우를 하였고, 과인의 몸에 있어서는 교훈의 공로가 감반(甘盤)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와서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고 슬퍼지는 것이다."
하고, 영의정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왕은 학문에 정신을 쓰고 의리를 강구하였다. 일찍이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선유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써 들여오게 하여 그 이치를 살피고 완색하였으며, 참찬 송준길이 태극(太極) 음양(陰陽)에 관한 것을 그림으로 올리고 이어 차자를 올려, 양이 다하면 반드시 다시 오는[陽復] 이치를 아뢰자 왕은 그것을 가상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병이 아니면 반드시 경연에 나왔고 또 역사 강독을 좋아하여 임금이 덕을 잘 닦고 못 닦았던 일 또는 정치의 득실, 민생의 휴척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여 그를 거울로 삼았는데 견해가 고명하여 항상 강관보다 한 수 위였었다. 《서경(書經)》을 강하다가, "그대의 자리를 삼가라.[愼乃在位]" 한 그 대목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임금이 자리를 지키는 방법이 ‘신(愼)’ 이 한 글자보다 더 중한 것이 없겠다. ‘기(幾)’니 ‘강(康)’이니 한 것들은 ‘신’을 하는 데 있어 가장 긴요한 부분을 말한 것으로서 ‘기’란 무슨 생각이 싹틀 때를 말하고, ‘강’이란 무사태평한 때를 말한 것으로서 더욱 삼가야만 할 때인 것이다."
하였고, 당 고조(唐高祖)의 세자 건성(建成)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명 태종(明太宗) 때 인종(仁宗)이 태자였는데, 한왕(漢王)인 고후(高煦)의 사람됨이 선량하지 못하였으나, 인종이 그를 은혜와 사랑으로 대했기 때문에 인종의 세대가 끝나도록 그가 감히 딴 마음을 먹지 못했었다. 건성도 태종(太宗)을 그렇게 대했더라면 무슨 피를 흘리는 변고005) 가 있었겠는가."
하였으며, 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006) 을 논하면서는 강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권모술수에 가깝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아무려면 어떤가. 그게 바로 사람을 즐겁게 해주면서 부리는 방법인 것이야."
하였다. 진종(眞宗)이 천서(天書)를 태묘(太廟)에 고한 일007) 을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자신을 속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어떻게 하늘에 계신 조종 열성의 영령을 속인다는 것인가. 진종의 초기 정사는 볼 만한 것들이 있었으나 간사한 소인배들 때문에 끝마무리가 잘 되지 못 했었다. 깊이 경계할 일이로다."
하였고, 또 언젠가 본조의 성삼문(成三問) 일을 논했는데, 왕이 이르기를,
"성삼문 등은 옛사람에다 비유하자면 명(明)나라 방효유(方孝孺)008) 등 몇몇 사람의 부류인 것이다."
하였다. 성삼문 일에 있어, 여러 조정을 거치는 동안 주상 앞에서 혹 그 사실을 아뢴 자도 있었지만 그를 포상하는 뜻으로 하교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왕이 경연에 나와 강설할 때면 이와 비슷한 일들이 매우 많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정강(停講)하는 날이면 유신들로 하여금 역사와 전기를 열람하여 고사(故事)를 써서 올리게 하여 깨우침을 받고 사실을 알려고도 하였으며, 밤이면 자주 근신(近臣)을 불러 경사(經史)에 대해 진지한 강론을 하고 때로는 백성들의 일까지 물으면서 겉다르고 속다른 것 없이 마치 가정집의 부자간 사이처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개진하곤 하였다.
눈병이 늘 있었기에 촛불을 대하여 책 보는 일을 두고, 눈이 더 상할까 염려스럽다고 말하는 신료가 있으면 왕이 이르기를,
"겨울밤이 길고 또 잠이 없어 책을 볼 수 밖에 없다."
하였다. 그후 눈병이 심해지자, 옥당으로 하여금 사서(四書)·오경(五經)의 글자를 크게 써 들여오게 하여 보기에 편리하도록 하는 등 비록 병환 속에 있으면서도 그 정도로 학문하는 데 전일하였다.
대신이라면 믿고 맡겨 체통을 존중히 하고, 말을 하면 종합하여 받아들여 그를 정사에 반영하였으며, 병이 들면 의원을 보내고 약도 보내고 죽으면 3년 동안은 그대로 녹을 주고, 덕이 있고 연로한 자에게는 특별히 궤장(几杖)을 내려 우대하고 존경하였으며, 뭇 신하를 대하는 데도 너그럽고 인후하였다. 항상 이르는 말이,
"임금으로서 시기와 의심으로 아래를 대하면 아래서는 틀림없이 불안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오직 정성껏 대해야만 할 일이다."
하였다.
언로(言路)를 열기에 힘써, 신료들 중에 비록 남의 사사로운 일만 들추어 내고 성질이 과격한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너그럽게 포용하여 혹은 포장을 내리기도 하고 혹은 장려하기도 하며, 비록 초야에 있는 미천한 자의 말이라도 반드시 그도 채택하여 혹 벼슬을 내리거나 혹은 상을 내렸다. 흉년이 들에 대신이 백관들 녹봉을 감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선왕조에서도 흉년이 들었을 때 뭇 신하들이 녹봉 감할 것을 청한 일이 있었지만 선왕은 그를 허락 않고 어공(御供) 만을 재감하도록 하였었다. 지금도 비록 모자란 상태지만 백관들 녹봉을 감해서는 안 되고 어공 중에 아직도 재감해야 할 것들이 많으니 다시 뽑아내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고, 신하들이 죽었을 때 그가 혹 나라 위해 남다른 노고를 하였거나 옳은 일을 하고 청렴 근신으로 들먹여진 자이면 예부(例賻) 이외에 별도로 관재(棺材)·역정(役丁)을 내리고 아울러 처자(妻子)의 생활까지 돌보았으며, 방백 수령이 하직 인사를 올릴 때면 질병이 아닌 한 곧 인견하고 백성 다스리는 도리를 묻기도 하고 사랑으로 이끄는 방법을 거듭 당부하기도 하였다.
인재 수용에 있어서도 멀고 궁벽한 곳이라 하여 제외되지 않았다. 서북(西北) 두 도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곳 인사들이 벼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기 때문에 두 도에 다 중신(重臣)을 보내 과거를 보여 문사·무사를 취하게 하고, 제주도는 멀리 바다 가운데 있어 왕화(王化)의 혜택을 보지 못한다 하여 두 번이나 근신(近臣)을 보내 인재를 취하도록 하였으므로 그 고장 사람들 모두가 고무되었다.
충신(忠臣)·현사(賢士)와 공렬(功烈)이나 덕의(德義)가 특수한 자는 옛분이거나 근세 사람이거나 관계 없이 사우를 건립하고 관작을 추증하기도 하고, 혹은 비를 세우고 분묘를 표하기도 하며, 혹은 그 후손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고, 혹은 조세 부역 등을 면제하기도 하여 거의 누락자가 없었으며, 효자(孝子)·정부(貞婦)라면 곧 정표(旌表)를 가하여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 미천한 백성일지라도 역시 들추어 알리게 하여 혜택이 두루 미쳤다.
고려(高麗) 시대의 원침(園寢)이 오래도록 묵어있는 것을 예관을 보내 새로 손을 보게 하고 또 3년마다 한 차례씩 봉심하도록 규정을 두었다. 중종 대왕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신주가 그의 친가편 외손 집에 붙여 있는데, 너무 가난하여 제사를 차리지 못할 처지였다. 이를 들은 왕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 신주를 신씨들 본종(本宗)이 맞게 하고, 총호관(塚戶官)을 두었으며 제수(祭需)를 대주었다.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위해 부지런하였으며, 기우제를 올릴 때면 비록 친히 제사지내는 것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궁중에서 시행에 앞서 재계하고 밤새도록 노천에서 묵도(默禱)하다가 제사가 끝날 때쯤에 비로소 스스로 안정하였다.
만약 천재지변이나 흉년을 만나면 신료들을 접견하고 진구책(賑救策)을 강구하는 외에 위의 것을 덜어 백성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면 모든 방법을 다 썼다. 언젠가 옥당의 차자로 인하여 답하기를,
"내가 덕이 부족하여 신명에게 죄를 얻고 수재·한재·풍재·상재가 없는 해가 없이 우리 적자들로 하여금 이렇게 망극한 재앙을 당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밤중에라도 놀라 일어나, 저 하늘이 내게 직접 화를 내리지 않고 창생들이 대신 그 화를 받게 하고 있는 것을 슬프게 여긴다. 차라리 당장이라도 죽여 조금이나마 민생의 고달픔에 답이 되었으며 좋겠다."
하였고, 또 언젠가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차라리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단 일분이라도 백성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무슨 물건을 내가 아끼겠는가."
하기도 하였다. 신하들이 혹 기민 구제에 있어, 건량(乾粮)을 주면 되지 꼭 죽을 쑤어줄 것은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왕이 이르기를,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 장구한 방법으로 말한다면 건량으로 주는 것이 물론 좋지만 그러나 저 떠돌이 백성들을 어떻게 서서 보고만 있고 구제를 않을 것인가."
하였다. 그리고 진정(賑政)이 끝나면 반드시 어사를 내보내 수재(守宰)들이 잘했는가 못했는가를 탐문하여 승진 파출을 결정하게 하였다.
신해년에 와서 팔도 전역에 기근이 들고 이어 마마가 크게 유행하자, 왕은 정성과 생각을 다 짜내고 밤낮으로 노심초사하여 무슨 어려운 방법으로든지 뭇 백성들 입에 곡식알을 넣어줄 수 있는 길이면 온갖 방법을 다 썼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 유시를 내려 해묵은 포흠은 일체 탕감하고 가벼운 죄수를 풀어주며 버려져 있던 인재를 다시 서용하게 하였으므로 시골 아낙들이 그 유시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서로 외우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죽음이 있는 것도 다 잊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재가 유행한 것이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라를 튼튼하게 해주었고, 백성이 죽고 물건이 모자랐던 것이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덕으로 변했으니, 그 위태로운 상황을 오히려 안정으로 바꿔놓은 공로야말로 사실 중흥(中興) 재조(再造)와 같다고 할 것이며 만약 그 난이(難易)를 따지기로 하면 아마 중흥 재조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온천 행차를 위하여 길을 닦으라고 하면서도, 너무 넓게 하여 백성들 전지에 피해를 주지 말고 가마(駕馬)가 겨우 갈 정도로만 하게 했으며, 행차를 마치고는 곡식 손상 여부를 묻고 휘장을 친 근처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은 곳이 있으면 즉시 댓가를 넉넉히 쳐주도록 하였다. 우리 나라는 원래 호구(戶口)에 대한 부세가 없이 군병(軍兵)의 납포(納布)만으로 경상비를 충당해왔기 때문에 백성들이 오랜 기간 그에 시달려 왔었는데, 왕은 그 폐단의 원인이 어디 있다는 것을 알고 일대 변통을 꾀하여 영원히 갈 수 있는 일정한 제도를 만들려고 했다가 미처 못하였고, 각사 노비의 공포(貢布)가 일방적으로 과중하여 오랜 고질적 폐단이었는데, 왕은 내노(內奴)의 공포를 감하여 받도록 특별 명령을 하면서 다른 공포까지 아울러 똑같이 감하도록 하여 그때문에 탁지부(度支部)및 내수사(內需司) 재원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왕은 개의하지 않았다.
진휼청(賑恤廳)을 별도 설치하여 재능과 식견 있는 재신을 골라 그 일을 맡게 하면서 진구하고 나머지를 항상 비축하였다가 백성들 역사가 있을 때 그를 돕게 하였고, 선왕조 시절에 부세의 균등과 백성들 편의를 위하여 양호(兩湖)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호남의 산군(山郡)에는 미처 시행을 못했었는데, 왕은 그 제도가 잘 시행되고 있는 뒤를 이어 더욱 더 세분화하고 빠진 곳 없이 시행되도록 하였다.
왕은 집안 법도도 매우 근엄하여 궁중이 숙연하고 안의 말이 밖으로 나오거나 밖의 말이 안에까지 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간관(諫官)이 언젠가 척속(戚屬) 궁금(宮禁)에 관한 말을 하면서 그 말이 사실과는 달랐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내가 참으로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뜻이 없다면 남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실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노력하는 것이지, 비록 사실 아닌 말을 했다 하더라도 혐의로울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고, 또 언젠가는 장번 내관(長番內官)이 휴가를 받아 고향에 내려가면서 지나가는 길에서 횡포를 부렸다 하여 그 내관을 꾸짖어 내쫓고,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하여 감사까지 추고하였다.
왕은 천성이 독실하고 명예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궁중에 있으면서 하는 일들에 좋은 점이 많았지만 남이 듣고 아는 것이 싫어서 밖으로 말을 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외인들이 못 들은 것들이 많았고, 더욱 검약을 좋아하여 겉옷을 제외하고는 비단을 입지 않았다. 질환이 있어 신료들을 대내에서 접견한 적이 있었는데, 깔고 있는 자리가 많이 해졌는데도 그대로 깔고 있어 신료들이 물러나와 감탄한 일도 있었다.
왕은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정(軍政)을 늘 보살피고 장신(將臣)들을 인접하여 지칠 줄 모르고 의견교환을 하였으며, 혹 후원에 나가 열무(閱武)도 하고, 혹은 행차 시기를 이용하여 관병(觀兵)도 하였다. 그리하여 행진(行陣)하는 법 또는 병갑(兵甲) 제도에 있어 모든 것을 다 강론하고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중국에서 간행한 《기효신서(紀効新書)》 및 《연병실기(鍊兵實紀)》 등의 서적을 올리자, 왕은 즉시 그를 반포하고 그대로 익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정초군(精抄軍)을 두어 병조 판서로 하여금 대장을 겸임하게 하였는데, 그는 정용한 군대를 육성하고 군량·군기 등을 비축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특별히 어사를 내보내 해방(海防)을 순찰하고 주사(舟師)를 정비하게 하려고 했다가 미처 못했는데, 왕이 그렇게 무략(武略)을 숭상하고 군대에 관심이 깊었던 것은 숙위(宿衛)를 엄히 하고 국경지대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변천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았다가 어떤 기회가 오면 무엇인가 결행하여 선왕이 못 이룬 뜻을 이어보자는 것이었다.
대각이 언젠가, 쓸모없는 병력을 파해버리지 않는다고 간하자, 왕이 이르기를,
"나도 군대가 좋아서 그러는 것 아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내 뜻을 알 것이다. 나도 국가를 위망의 지경에다 놓아두고 군대만을 일삼는 사람은 아니다."
하였다. 또 언젠가는 시신(侍臣)들과 사대(事大) 교린(交隣)에 관하여 논했는데, 상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왕은 탄식하며 이르기를,
"사대와 교린이 같은 것이 아니다. 내 비록 나이 적고 덕이 부족하나 조종 백세의 치욕을 어떻게 잊을 것인가."
하였다. 북녘 지대의 목수(牧守)들이 무관 출신이 많아 탐욕스럽고 방종하자, 다시 병마 평사(兵馬評事)를 두고 반드시 이조의 낭관 또는 홍문관 관원을 차출하여 보내 그들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막게 하였다.
형옥(刑獄)에 있어서는 더욱 더 세밀하고 신중을 기하여 수재·한재·풍재 등의 천재를 당하면 곧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고 죄적(罪籍)을 친히 열람하여 죄질의 경중 및 과실·고의 등을 낱낱이 밝혀낸 다음 죄질이 경한 자는 모두 관대한 처분을 하였다. 그리고 죄수에 있어 한번 문안(文案)은 오래되어도 잊어버리지 않고, 뒤에 심리할 때 형관은 잊어버리고 있는 것도 왕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 신하들이 놀라고 탄복할 정도였으며, 또 오래 갇혀 있는 죄수에 대해 그 주리고 추운 것을 염려하여 먹을 것과 옷가지를 주도록 하였다.
왕에게는 지병이 있었는데, 정사 처리에 부지런하여 병이 조금 차도가 있으면 곧 승지로 하여금 공문서를 들고 와내(臥內)로 입시하도록 하였다.
왕은 부왕을 일찍 여읜 것을 항상 애통히 여겨왔는데, 급기야 모비(母妃)마저 승하하자 오래 봉양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삼아 거의 자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고 야위었다.
대비가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었다가 이때 창경궁(昌慶宮)으로 반우(返虞)를 하였는데, 왕도 옛 거소로 다시 돌아와 눈에 보이는 것마다 옛일을 생각나게 하였으므로 마치 무엇인가 찾고 있는 사람처럼 온종일 말 한 마디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도 슬픔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곁에서 모시고 있는 시어들도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혼전(魂殿)에 제물을 올릴 때면 반드시 친히 살펴보고 올렸으며, 승하하시기 하루 전까지도 친히 살피지는 못하였지만 제수가 정결한지의 여부를 물었고, 이튿날 아침에도 계속 그렇게 물었다.
병이 위독했을 때 창 밖의 바람소리를 듣고는 이르기를,
"저게 곡식 해치는 바람인데 내가 어쩌다가 저 소리를 또 듣는가!"
하여,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백성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못할 단계에까지 와서도 그 정도였었다. 유갑(襦匣)·의복 등 염습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궁내에서 마련하고 단 한 자 한 치도 호조로 하여금 시민에게서 징수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도 궁중에서 왕의 평일 백성을 걱정하던 지극한 뜻을 따라 취한 조처였던 것이다.
왕비 김씨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바로 우리 사왕(嗣王) 전하이고 딸은 맏이 명선 공주(明善公主), 둘째가 명혜 공주(明惠公主), 막내가 명안 공주(明安公主)이다. 사왕은 전비가 김씨(金氏)였는데 영돈녕부사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따님이고, 계비 민씨(閔氏)는 영돈녕부사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의 따님이다. 명선·명혜는 다 출가전에 죽고 명안은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했다.
왕은 총명하고 슬기로운 바탕에 너그럽고 온유한 덕이 있었으며, 마음이 깊고 독실하고 성품이 후하고 규모가 컸다. 선왕으로부터 정일(精一)을 이어받고 사부에게서 절차(切磋)의 도움을 받아 높기가 임금이었으면서 행실은 증자(曾子)·민자건(閔子騫)보다 고고하였고, 부자로는 나라를 소유하였으면서 절제하기가 포의 한사와 같았다. 궁금을 엄히 하여 사사롭고 그릇된 길을 막았으며, 조정을 바로세워 되도록 화평을 주장하였다. 나라 법을 굳게 지켰으나 폐단이 있으면 반드시 고쳤으며, 신하들을 예로 대우했으나 죄가 있으면 반드시 징계하였다. 몸에 비록 지병이 있어 한철 한달도 평온할 때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단 하루도 쉬며 안일을 취하지 않았으며, 비록 만 가지 일이 답지하여도 일 처리에 있어 조용하고 신밀하게 이리 살피고 저리 살펴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없었다. 관직 제배에 있어 한 관직도 사사로이 제배하지 않았으며, 형옥(刑獄)에 있어서도 죄 없이 죽은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안에서 성색(聲色)을 즐기는 일도 없었고 밖에서 유전(游田)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며, 사사로이 있을 때도 관대(冠帶)를 반드시 갖추고 병이 아무리 심해도 의관을 않고는 신료들을 접견하지 않았다. 그것은 임종 직전까지도 그러했었다. 걱정하고 근면하고 두려워했던 정성이 위로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족했으며, 불쌍히 여기고 슬피 여기는 마음은 아래로 뭇 백성들을 결속시키기에 족했다. 조심조심 깊은 못 가에 있는듯이 하기 15년을 하루같이 하였는데 이것들이야말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마음에 생각하고 입으로 외우고 있는 것들이며 따라서 천지신명에게 질정하더라도 될 일들인 것이다.
비록 만난 것이 어려운 시기였고 하늘이 수명에 대하여 인색했으나 그 동안 사람들 마음에 스며든, 인자한 마음 인자하다는 소문 만으로도 이미 국가 억만년 기반을 공고히 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신이 보건대 전대의 순미했던 임금들로서 은(殷)의 중종(中宗)·고종(高宗)·조갑(祖甲)은 덕이 훌륭했다고 할 수 있고, 한(漢)의 문제(文帝)와 송(宋)의 인종(仁宗)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찬사라는 것이 고작, 근엄하고 공순하고 하늘을 무서워했다는 것, 감히 황령(荒寧)하지 않았다는 것, 감히 환과(鰥寡)를 업신여기지 않았다는 것, 공순하고 검소했다는 것, 형(刑)을 없애고 조(租)를 내려주었다는 것, 남이 덕택을 입었다는 것, 사직이 영원토록 그의 힘을 입을 것이라는 것 등등에 불과하였다. 아, 우리 현종 대왕도 백세를 두고 잊지 못할 일들이 아마 이상에 열거된 것과 같은 것들이리라. 아마 꼭 그러하리라.
자헌 대부 병조 판서 겸 동지경연사 신(臣) 남구만(南九萬)이 지어 올림.
- 【태백산사고본】 29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99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註 001]신사년 : 1641 인조 19년.
- [註 002]
지방 : 심양.- [註 003]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004]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05]
무슨 피를 흘리는 변고 : 당 태종(唐太宗)이 자기 형인 건성(建成)을 살해한 변고. 건성이 태자 시절에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으면서 공로가 많고 명망이 높자, 그를 시기한 건성이 원길(元吉)과 짜고 참소를 꾸며 그를 죽이려고 했다가 도리어 태종에게 사살당하였음. 《통감절요(通鑑節要)》 당기(唐紀) 태종(太宗) 상(上).- [註 006]
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 : 한 잔의 술로 상대의 마음을 감화시켜 그로 하여금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귀화하게 한 일. 남한(南韓)의 유장(劉鋹)이 자기 나라에 있을 적에 걸핏하면 짐주(酖酒)로 신하를 독살하였다. 유장이 내조(來朝)하였을 때 태조가 술을 따라 주었더니, 유장은 그 술에 독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고 울면서 하소연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짐은 짐의 충심을 상대방의 뱃속에다 전하려는 사람이다"하였다. 그리고 그 술을 자신이 마시고 다른 잔에 술을 따라 유장에게 주었다.《송사(宋史)》 권3(卷三) 태조본기(太祖本紀).- [註 007]
진종(眞宗)이 천서(天書)를 태묘(太廟)에 고한 일 : 천서(天書)란 하늘이 내려준 글이라는 뜻. 글안(契丹)의 풍속이 하늘을 크게 숭배하였으므로 송(宋)의 군신(君臣)들이 우선 글안이 넘보는 것을 간접적으로 제어하기 위하여 천서(天書)가 내렸다고 중외에 과시했던 것인데, 진종은 그 천서라는 것이 거짓임을 알면서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에 그것을 조원전(朝元殿)에 바치고 옥청소응궁(玉淸昭應宮) 및 태묘(太廟)에 고하였다.《송사(宋史)》 권7∼8 진송본기(眞宋本紀).- [註 008]
방효유(方孝孺) : 명(明)의 태조(太祖)부터 혜제(惠帝) 때까지의 명신. 건문(建文) 시절 시강 학사(侍講學士)였는데, 뒤에 성조(成祖)가 된 연왕(燕王)의 군대가 들어와 혜제를 몰아내고 방효유를 불러 조서(詔書)를 초하게 하였다. 이때 효유는 상복을 입고 궁전이 떠들썩하게 곡을 하면서 들어왔다. 연왕이 자리에서 내려와 위로하면서, 선생이 아니면 쓸 사람이 없으니 조서를 초하라고 하고 좌우를 시켜 붓과 종이를 가져와 권했으나, 붓을 땅에다 던져버리고는 죽으면 그냥 죽지 조서는 못 쓰겠다고 하여 결국 책형(磔刑)을 당하였다. 《명사(明史)》 방고유전(方考孺傳).○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行狀:
王姓李氏, 諱棩, 字景直, 孝宗大王之子。 母仁宣王后 張氏, 右議政文忠公 維之女。 孝宗以大君, 質瀋館, 以辛巳二月己酉生王, 有異質, 自二三歲, 言動有度。 甲申, 孝廟將由瀋入燕, 遣王東還, 謁仁祖, 應對如成人, 問堯、舜、桀 紂時, 王方讀《曾先之史略》, 歷擧其文以證其所以爲聖暴, 仁祖得其對, 奇愛之。 有貢進豹皮者, 品下將却之, 時, 王在傍曰: "一豹之捕, 傷人必多。" 仁祖嘉其意, 命勿却。 孝廟之未返國, 王每見日初出, 輒祝曰: "願令父母遄返, 令我得見。" 每遇新味, 非彼地産, 輒送獻, 然後始嘗。 侍父母, 服御器用, 雖微物, 必致祗敬, 不敢遷移。 其不在側, 亦必思量父母之意, 其所嘗不欲者, 不敢行。 嘗出寓閭閻, 隣有高聲者, 侍者呵禁, 王止之曰: "人在其家, 安得無聲? 宜使之安, 不可使苦也。" 嘗出閤門外, 見守卒黧黑, 憫其凍餓, 命賜之衣。 又日賜餘飯, 終其踐更。 仁祖旣命孝宗爲嗣, 以己丑二月, 親臨仁政殿, 冊王爲世孫, 姿表岐嶷, 儀度閑雅, 百僚相賀, 設講書院, 置講官課學。 是歲五月, 仁祖大王薨, 孝宗大王嗣位, 王進陞儲貳, 輔導益備, 睿德日就。 孝宗欲王知稼穡艱難, 使農夫入耕後苑。 王曰: "牛之有功於人, 人之勤苦而得食, 乃如是夫!" 輟食以賜耕者。 王記性絶類, 凡有一見聞, 輒不忘。 嘗讀《孟子》, 孝宗命誦盡七篇, 無一字錯, 孝宗大驚喜。 王自幼及長, 非讀書, 未嘗離父母之側, 有不安節, 日夜扶侍, 雖命退休, 不敢退。 辛卯行嘉禮, 王妃金氏, 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 佑明女也。 壬辰行入學禮, 奠謁先聖, 仍就博士請業, 禮容莊重, 講音洪亮, 環庭而觀聽者, 莫不咨嗟欣悅。 己亥五月乙丑, 孝宗禮陟, 王恤宅宗, 毁擗哭踊, 有出於禮者。 越五日己巳, 王嗣位于仁政門, 顔色之戚, 群下不忍仰視。 領中樞府事李景奭, 撰進孝宗行狀, 王下札曰: "堯、舜之道, 孝悌而已。 欲致堯、舜之治, 當盡堯、舜之道。 先王以此爲修身致化之本。 且痛慨世事, 禮羅俊賢, 托置心腹, 交修道義, 期挽斯世於三代, 伸大義於天下者, 實先王之志, 平日樹立之宏規大範, 而今此狀中, 不甚擧論, 不可不明白寫出, 傳諸來世。" 札出, 見者無不服王闡揚之思, 繼述之志焉。 時, 盛熱, 廬次偪隘, 近臣請限秋涼移御他所, 王曰: "此何時, 可擇居? 擇居而處, 身雖安, 而心不安矣。" 十月丙辰, 葬孝宗大王于寧陵。 朔望祭奠, 非甚病不許攝, 省謁陵寢, 哀動左右, 皆掩涕失聲。 是歲, 遂行優老、恤孤、褒忠孝、勵節義、奬淸白、錄戰亡之典。 禁錮濫刑官吏, 悉蠲兒弱之隷軍籍收布者。 以水災免湖南、京畿、湖西災稅, 減收米, 省北關貢賦。 其流丐於關西者, 以管餉米穀計口周給之。 下內帑木綿千匹, 發常平廳白金累千兩, 諸道監兵營木綿累萬匹, 以充蠲減不給之用, 此乃王初卽位, 發政施仁之端也。 元年庚子以歲饑, 減端川貢銀, 嶺東西大同米, 諸道田稅、奴婢貢布。 北民之流出者, 遣御史撫恤安集之。 申嚴戶口之法, 使民悉登版, 無敢漏者, 下餘丁布於江原道, 分給遇災之民, 給中外老人米布紬絮, 罷諸宮家願堂。 關北、嶺東西飢民之流入城中者, 命常平廳, 周給米鹽。 七月以大旱, 行雩祭。 國制, 秋後無祈雨, 至是特行之。 禁各衙門貿販生息。 謁寧陵, 勑侍衛將士, 毋得踐傷道傍禾穀, 下敎遍諭八方, 使之安集流民。 減御供精米香醞米, 命諸道各薦人才。 海西人有上變者, 王一問知其誣, 誅其人, 放其逮者七十餘人, 賜糧歸之。 家財之見攘於吏卒者, 悉推還之。 冬月當覆死囚, 大臣以都中痘疫方熾, 有妨引接外臣請停, 王下札曰: "嗚呼! 天性人皆有之, 而不復其初, 以至爲惡。 不卽處斷, 又從而嚴囚之。 罪雖當誅, 其情則戚矣。 言念及此, 不覺慘然。 今歲以此不行, 明年又以此不行, 則彼罪人皆爲囹圄之魂而後已, 玆非爲國之道也。" 不許。 二年辛丑, 撤都中兩尼院。 初, 王惡僧尼亂敎, 欲竝沙汰, 大臣、玉堂議以爲難猝行, 乃先命撤去慈壽、仁壽兩院, 使年少者各有歸, 黜老者于城外, 以院材修學宮及武館, 禁中外淫祀。 以旱甚, 將親行祈雨祭, 筵臣以聖候未寧爲言, 王曰: "予何愛一身, 不顧萬姓之命哉? 移江都、南漢米, 賑三南。" 七月, 王格于太廟, 行孝廟祔禮, 停陳賀頒敎飮福宴。 前時, 時選都中良家子爲侍女, 至是特罷, 定爲式。 命三南、京畿、海西糶糴一切免之, 仍減春收米, 出太僕喂馬穀千餘石, 以賑饑民。
三年壬寅春, 遣賑恤御史于兩南, 令以便宜從事, 賜嶺南行誼人等米穀有差。 命西北監司, 採訪人才以聞。 行京畿量田, 定湖南大同法。 四年癸卯, 以旱災下敎責躬, 命大小臣僚, 同寅協恭, 以答天譴。 定諸宮家免稅田結數有差, 柴場量留一處, 毋使廣占魚場網場, 唯存宣廟朝賜給, 而只限其身。 五年甲辰, 蕩滌戊戌後, 內需司奴婢身貢之追徵已死者。 以星變, 命大小群工, 具陳得失, 放內司獄囚, 停尙方織錦。 六年乙巳四月, 幸溫陽溫泉。 先是, 王有眼病, 久不愈。 醫者曰: "當浴溫泉。" 王浴月餘, 體蘇快, 遂命道內禮耆老、擧孝悌、祠忠賢、減田租、設科擧。 旣還, 又推優老之典於沿路。 厥後比屢幸, 皆如之。 十月有風雷之變, 王命在野儒臣, 具實封以聞, 民結之暗錄於宮家免稅者, 一切禁之。 七年丙午, 以歲凶下敎罪己, 移嶺南穀於嶺東西, 海西穀於北關, 以賑飢民。 以木花之貴, 減砲保價布及各司奴婢身貢有差。 除咸鏡道九邑田稅及牛黃、豹皮之貢。 八年丁未, 以旱災下敎責己, 半減各司奴婢身貢, 特減楮貨價。 國典, 奴婢身貢之外, 又有楮貨, 厥後楮貨廢, 而計價徵布, 至是特減, 著爲令。 七月, 親祀于社稷祈雨, 再審獄囚, 廣求直言, 悉蠲京畿田稅大同, 各司經費, 悉令減半。 減戶曹鹽稅, 蠲兩西收米, 蕩滌北路逋欠糶糴。 命畿內上番騎兵及各鎭水軍減朔立番納布者減半, 蕩滌各道奴婢未收身貢。 九年戊申, 以星變下敎責己, 戒群臣恪虔奉職, 甄拔人才, 疏決庶獄。 發江都米一萬石、南漢米五千石, 賑畿內飢民。 禮曹以星變旣消, 請復常膳, 王曰: "每聞飢饉顚連, 心常惻怛, 食不下咽, 其何心復常膳? 姑待秋成可也。" 十年己酉, 以嶺南飢荒, 命査各司奴婢乙巳後指徵無處者, 蠲其貢, 覈諸宮家折受處, 有主民田及未折受時民人起耕者, 盡還給之。 有大臣言, 歲時進排松葉, 涉於祈厭不經, 請罷, 王納其言, 凡桃杖、桃枝、人勝、綵畫, 悉命罷之。 禁同姓異貫者婚娶。 在前國俗, 姓字雖同, 而鄕貫若別, 則例通婚嫁, 至是禁之。 十月, 初祔神德王后 康氏于太廟, 上徽號, 復陵寢如儀。 后當太祖開國, 正位中壼有年, 而太祖昇遐, 群臣失議, 闕竝祔之禮, 人神久鬱, 廷論雖間發, 列聖猶未遑, 至是, 始擧曠典, 封陵設祭之日, 驟雨滿於貞陵一洞, 民以爲洗冤之雨。 以雷雹之災, 疏決中外獄囚, 減大同收米。 十一年庚戌, 以年凶, 量減各殿香醞米, 運江都米三萬石, 發賣于京中。 以戶曹鹽鐵布, 劃給全羅道, 充賑民之資。 停御營軍上番, 留其保米于諸道以賑之。 以濟州飢荒, 運湖南穀及統營米租賑之, 本州奴婢身貢盡減之。 命戶曹賑恤廳, 給凍餒人米穀、襦衣有差, 減各道布貢。 十二年辛亥春, 大飢, 王下敎曰: "當此大侵, 不可督民收稅。 竝留三南、原襄、黃海、京畿田稅于本道, 以賑飢民。 都中分設三賑廳, 使宰臣領其事, 諸道量邑居村落之遠近, 棊置賑所, 作糜粥以饋飢腫, 給乾糧以濟農作。 命賑廳減價糶穀, 以平其踊。 是夏, 又大無麥, 餓莩載道, 命中外, 竭府庫以繼賑, 病者爲之醫藥, 死者爲之掩葬, 收養遺棄兒者, 命子之。 以此, 京外之民皆仰哺於官府, 雖顚連困急, 至於濱死, 未嘗有相聚而禦人者, 死者無所憾恨, 生者得復田廬。 是秋諸路大熟, 有不芸而穫者。 命設壇于東西郊, 祭國中之飢疫死者, 停各道進上而只存兩慈殿所獻。 遣御史于濟州, 慰諭三邑人民, 輸綿布四千匹、麥種二千石、米二千石以給之。 悉蠲土宜常貢, 減諸道方物。 自明年至癸丑十三年壬子, 命宰臣及六曹參議薦人才, 疏釋中外死罪以下。 丙午前糶糴逋欠悉除之, 各衙門征稅之課, 悉命蕩滌。 十四年癸丑, 下哀痛務農之敎于八道。 以旱災, 理冤獄, 避殿、減膳、禁酒。 以端午帖製進, 王曰: "旱災此酷, 如此虛文, 勿爲之可也。" 命除辛亥以上軍兵奴婢逃故者, 壬子未上納及癸丑應納之布。 以寧陵石物生隙, 慮有雨水滲漏之虞, 九月啓舊陵見和。 十月癸卯, 奉遷于驪州 弘濟洞。 命除廞衛所過五邑大同收米, 減畿邑春收米有差。 蕩滌京畿、黃海、全羅、原襄等四道庚戌田稅之未收者。
十五年甲寅二月, 仁宣王大妃薨, 六月丁酉, 祔葬于寧陵。 始, 孝廟之喪, 大臣與諸儒臣等, 議慈懿大妃所宜服, 定爲朞制。 其後許穆上疏, 引《儀禮》疏說, 宜用次長三年之服。 王命更詢于大臣、儒臣, 宋時烈、宋浚吉等對曰: "固知有此疏說, 而於其疏說, 亦有次子朞之義, 不可執一而廢一。 與其輕用可疑之疏說, 無寧近從明制、國典, 猶爲寡過。" 大臣亦執前見, 以國典爲對, 遂仍朞服不改。 尹善道倡言, 時烈等貶降孝宗, 和其說者相繼而起。 王曰: "己亥之講定服制, 實從時王勑令, 故宋時烈諸人當初收議, 亦從大臣之論。 及庚子後諸疏, 專責時烈之後, 時烈諸人, 始引古禮爭辨, 爲一訟場, 而此則元非朝家之所採用也。" 蓋時烈等, 雖有次衆之議, 而朝家旣未嘗用其說, 許穆雖有三年之論, 而朝家亦未嘗採其言, 只爲十餘年間, 彼此聚訟之空談而已。 然其欲傾陷時烈等者, 每托於論禮, 故王洞燭其情狀, 而發此敎, 且以言在東, 意在西斥之矣。 及是母妃之喪, 禮官昧前喪遵用國典之本意, 不先稟旨, 遽以大功, 定爲慈懿大妃服制。 秋七月, 王命公卿、三司, 會于賓廳, 問慈懿大妃之於仁宣王妃之喪, 當從何服, 公卿以下失對, 不稱旨。 王以爲: "己亥之喪, 從國典爲子朞而已。 國典朞雖無長衆之別, 慈懿大妃之於先王, 自當從長子朞。 今玆之喪, 亦宜從長婦朞。" 特命改功爲朞, 以不先稟, 罪禮官; 以所對非所問, 適首相。 王自春在疚, 過毁積瘁。 八月七日召宰臣, 將欲引入議事, 忽感疾未果。 以是月十八日己酉, 大棄群臣于昌德宮之齋廬, 春秋止三十有四。 自都中士庶, 以至窮谷愚氓, 莫不奔走悲號, 思慕至德。 嗚呼, 痛哉! 群臣議王功德, 上謚曰純文肅武敬仁彰孝, 廟號曰顯宗。 以是年十二月十三日壬寅, 葬于崇陵。 王聖質自天, 懿德幼成, 其在問安視膳之日, 已有姬文之行。 及其踐位行禮, 其達孝之大者, 固已布在臣民之耳目。 至若內事兩大妃, 誠禮無間, 惋愉怡悅, 和氣常藹然。 大王大妃遭完山府夫人喪, 過哀疾劇, 王露坐庭中, 招醫問藥, 藥物必手持而入進之, 聞者感動。 王大妃始御通明殿, 與王御所稍間闊, 王爲構集祥殿移奉之, 以便日夕之侍。 大妃有宿疾, 王夙夜殫誠, 慰安其心。 大妃常曰: "王每在傍, 病若去體。" 嘗奉大妃, 幸溫泉有效。 王旣加惠于道內, 徧賜老人爵, 還宮又施恩宗戚, 朝臣年老及有父母者, 以及於中外士民。 判書朴長遠孝於母而先歿, 特命廩其母終身, 其錫類 之德如此。 臣民感化, 皆興於孝。 王有五姊妹, 極其親愛, 均其恩遇, 遇異味必分。 聞有病, 驚憂不已, 問遺交道, 有喪亡哀慟不自勝。 昭顯世子之女, 適黃昌副尉 邊光輔, 聞其死, 爲之慘然曰: "先朝恩眷, 無下於諸駙馬。 追念及此, 當作何如懷耶?" 特令厚加庇恤, 以終先王親待之義。 惇睦宗族, 曲有恩意, 量其親踈, 眷顧無替於貴戚, 待之雖隆, 亦未嘗以私撓公。 諸宮家僕隷, 一有犯科, 必付有司, 痛繩以法。
〔○〕儒臣宋時烈、宋浚吉等, 自在孝廟時, 契合甚盛。 孝廟使二臣, 侍王於春宮, 納誨獻規, 諷誦開勸, 王傾心聽受, 日有進益, 而若其專且久, 則浚吉有焉。 王旣卽阼, 所以禮遇二臣者益隆, 國有事必問焉。 一時藏修之士, 如尹宣擧諸人, 亦被旁招, 竝以異禮待之。 己亥冬, 時烈以謗言乞退, 王留之不得, 有予寧往見之敎。 浚吉亦繼退, 王思想二臣, 宣召不置, 或遣史官、或遣承旨, 一札十行, 辭旨懃懇。 或於歲時存問, 或於饑歲周急, 在野亦伻賜珍膳, 入都必繼給米肉。 時烈嘗因論禮, 被人所斥, 王以詆讒上下之間, 放逐其人, 時烈終膺大拜。 浚吉卒, 下敎曰: "先朝恩禮, 夐出千古, 至于寡躬, 訓誨之功, 不啻若甘盤。 到今追思, 感傷不能自已。" 命贈領議政。 王留神問學, 講究理義。 嘗令講官, 書入先儒人心道心說, 以備省玩。 參贊宋浚吉進《太極陰陽圖子》, 因箚陳陽復之義, 王嘉納焉。 非有疾病, 必御經筵。 又喜講前史, 其於君德修否、政治得失、民生休戚, 亹亹討論, 以爲鑑戒, 見解高明, 常出講官意表。 講《書》至愼乃在位, 王曰: "人君在位之道, 莫大於愼之一字。 惟幾惟康, 蓋言其用功喫緊處, 幾者念慮之初, 康者愉逸之際, 尤當致愼也。" 論唐 建成曰: "大明 太宗朝, 仁宗爲太子, 漢王 高煦爲人不良, 而以恩愛待之, 終仁宗之世, 不敢有異心。 使建成待太宗如此, 安有蹀血之變乎?" 論宋 太祖杯酒釋兵權, 講官曰: "此則近於權謀也。" 王曰: "何傷乎? 是乃悅以使人之道也。" 論眞宗以天書告太廟曰: "自欺猶不可, 其可欺祖宗在天之靈乎? 眞宗初政, 亦足可觀, 而爲憸小所誤, 不能善其終, 甚可戒也。" 又嘗論及本朝成三問事, 王曰: "成三問等, 比之古人, 皇明方孝孺諸人者流也。" 蓋三問事, 累朝以來, 雖或有陳啓於前席者, 褒尙之敎, 今始發焉。 王臨筵講說, 類此者甚多, 而不能殫記。 停講之日, 又令儒臣, 考閱史傳, 書進故事, 以寓諷曉之意。 數招近臣夜對, 講劘經史, 詢及民事, 開懷見意, 表裏無間, 有若家人父子。 常有眼患, 而對燭看書, 臣僚有言其添傷, 王曰: "冬夜甚長, 予且無寢, 不得不看書耳。" 後眼患甚, 令玉堂寫進四書五經, 大其字樣, 以便覽閱。 雖在疢疾之中, 其單心典學如此。 倚任大臣, 尊其體統, 有言則翕受敷施, 有病則遣醫遺藥, 旣歿則不收祿三年。 德厚而年老者, 則特賜几杖, 以優禮而尊敬之。 待群臣寬厚, 常曰: "爲君之道, 以猜疑臨下, 下必有不安之心, 唯當推誠待之耳。" 務開言路, 臣僚雖有訐直矯激者, 必開納而優容, 或褒賜之、或奬勵之。 雖草野微賤之言, 亦必採用, 或官之、或賞之。 歲飢, 大臣請減百官祿俸, 王曰: "先朝歲飢, 群臣曾請減祿, 先王不許, 只命裁減御供。 今雖匱之, 不可減百官之祿, 御供中未減者尙多, 更抄以啓可也。" 群臣之歿也, 有賢勞行誼, 或以廉謹著稱者, 則例賻之外, 別賜棺材役丁, 竝濟其妻子飢寒。 方伯、守宰之辭朝, 非有疾, 輒引見, 問之以治理之道, 申之以撫字之方。 收用人才, 不遺避僻, 以西北兩道地逴遠, 人士斷望仕宦, 竝遣重臣設科, 取文武士。 以濟州邈在海中, 不霑王化, 再遣近臣取士, 遠人咸鼓舞焉。 忠臣、賢士、功烈、德義之卓殊者, 毋論久近, 或建祠贈爵、或樹碑表墓、或官其裔、或復其戶, 褒崇之典, 殆無闕遺。 孝子貞婦, 輒加旌表, 雖遐方氓隷, 亦令採聞而遍及焉。 麗代園寢久廢, 遣禮官修其頹毁, 且著令三歲一審。 中宗大王廢妃愼氏神主, 托在其私親外裔, 貧甚廢祀, 王聞之惻然, 歸神主於愼氏本宗, 爲置塚戶官, 給祭需。 敬天勤民, 出於至誠, 每當祈雨, 雖非親祭, 必宿齋於宮中, 終夜露立默禱, 到祭罷時分, 始乃自安。 若遇災荒, 引接臣僚, 講究賑救之策、損上之政, 靡所不擧。 嘗因玉堂陳箚, 答曰: "予以涼德, 獲戾于神明, 水旱風霜之災, 無歲無之, 使我赤子, 罹此罔極之災。 言念及此, 中夜驚起, 痛悼蒼穹之不降禍於予躬, 而使蒼生替受其禍, 寧不如遄死, 少答民生之困瘁也。" 嘗謂侍臣曰: "每念民飢, 寧欲無生。 苟有一分可以活民者, 有何可惜之物乎?" 群臣或言賑濟飢民, 宜給乾糧, 不必設粥, 王曰: "若論久遠安民之道, 給乾糧固可, 然彼流丐之民, 亦何可立視不救也?" 旣罷賑, 必送御史, 廉問守宰之能否, 而黜陟之。 至于辛亥, 八路皆飢, 仍之以大疫, 王殫誠極慮, 日夜焦勞, 其所以奏艱食粒烝民者, 旣無不用其極, 而又宣諭國內, 積年逋欠, 悉行蕩減。 開釋囚繫, 收敍廢棄, 鄕閭婦孺, 諺飜其書, 傳誦感涕, 咸忘其死。 以此, 天災之流行, 不足以病國, 而反足以固國, 民物之喪亡, 不足以爲怨, 而反足以爲德。
其轉危爲安, 實與中興再造者比, 而論其難易, 抑且有不在彼, 而在此者矣。 其將幸溫泉, 命治道, 僅容駕馬, 毋或太廣, 損害民田。 旣幸, 問禾稼傷否, 近鋪帳處, 有些損害, 卽命優給其直。 我國素無戶口之賦, 只以軍兵納布爲經用, 民久病之。 王知弊源有在, 將欲大變通, 立定制以圖永遠, 而事未及就焉。 各司奴婢貢布偏重, 久爲痼弊, 王特令減捧內奴之貢, 竝令均減。 因此度支及內司財用頓匱, 而王不恤焉。 別設賑恤廳, 擇宰臣之有才識者, 管其事。 賑貸之餘, 常存儲蓄, 以助民役。 先朝行兩湖大同, 以均賦便民, 而湖南山郡未及行。 王就其功緖, 益加區畫而遍行之。 王家法甚嚴, 宮梱肅如, 外內言不出入。 諫官嘗言戚屬宮禁事有失實, 王曰: "予苟無一毫私意, 人言必不至, 此有則改之, 無則加勉。 言雖失實, 有何所嫌乎?" 嘗以長番內官, 請暇下鄕, 橫於過路, 譴罷內官, 以不上聞, 推考監司。 王性篤實, 不喜近名, 在宮中行事而善甚, 不欲使人聞知, 禁不得宣言, 故外人多無聞焉。 尤好儉約, 非表衣, 不服錦綺。 嘗有疾, 晉接臣僚于大內, 所鋪茵席, 弊甚不改, 臣僚退而感歎焉。 王戒存不虞, 修飭軍政, 引接將臣, 論說忘倦。 或臨苑囿而閱武, 或因行幸而觀兵, 行陣之法、兵甲之制, 靡所不講。 兵曹判書金佐明投進中朝《紀効新書》及《鍊兵實紀》等諸書, 王卽令頒布而習行之。 設精抄軍, 令本兵兼行大將事, 蓋欲團束精勇, 儲峙糧械, 以爲緩急之備。 又欲特送御史, 巡審海防, 整理舟師而未及焉。 其所以崇武略、詰戎兵者, 蓋不惟嚴宿衛、固邊封而已, 亦將默觀天下之變, 而乘機運策, 克紹先志焉爾。 臺臣嘗諫冗兵不罷, 王曰: "非予好兵而然也。 若或深思, 則可知予意。 非置國家危亡之域, 而徒以兵爲事者也。" 又嘗與侍臣, 論事大交隣事, 有不曉上意而爲言者, 王歎曰: "交隣事大, 勢有不同爾。 予雖年少否德, 祖宗百世之恥, 何可忘也? 北鄙牧守, 多武官貪縱, 復設兵馬評事, 必以天曹郞及玉堂官差送以彈壓之。 於刑獄, 尤加詳愼, 每遇水旱風雷之災, 輒審理冤獄, 親閱罪籍, 悉覈其輕重過故, 疏決無遺焉。 於罪囚, 一閱文案, 久而不忘, 後當讞議, 刑官所遺忘者, 王輒記之, 群臣驚服。 又念久囚寒凍, 命給口糧襦衣。 王有宿恙, 而勤於聽政, 疾少間, 則輒令承旨, 持公事入侍臥內。 王常痛早孤, 及母妃昇遐, 又以不得久養爲至恨, 摧毁殞絶, 殆不自將。 大妃嘗移御慶德宮, 至是返虞於昌慶宮, 王亦還舊御, 觸目追感, 如有所求, 終日不語言, 蓋不能頃刻而忘哀也。 旁側侍御, 莫不感泣。 魂殿饋奠之奉, 必親監進奉。 諱前一日, 不得親視, 猶問精否如何, 翌朝又連問不已。 疾甚, 聞窓外風聲曰: "此害穀之風, 吾何以又聞此聲也?" 其孝親、憂民之篤, 臨不興猶如此。 襦匣衣衿, 皆自內備, 不令度支, 徵尺寸於市民, 蓋宮中體王平日恤民之至意也。 王妃金氏誕一男三女, 男卽我嗣王殿下, 女長明善公主, 次明惠公主, 季明安公主。 嗣王前妃金氏, 領敦寧府事光城府院君 萬基之女, 繼妃閔氏, 領敦寧府事驪陽府院君 維重之女。 明善、明惠皆未家而夭。 明安降海昌尉 吳泰周。 王以聰明睿智之資, 有寬裕溫恭之德, 淵深而篤實, 博厚而敦大。 承先王精一之傳, 受師傅切磋之益, 尊爲人主而行高曾、閔; 富有一國而節比布素, 嚴宮禁而杜絶私枉; 正朝廷而務歸和平。 固守憲章而有弊, 則必革; 禮待臣隣, 而有罪則必懲。 雖疾病在躬, 曾無時月平寧, 而未嘗一日暇逸。 雖萬幾沓至, 而所以應之者, 從容縝密, 反復諦審, 事無大小, 無或放過。 除拜之際, 無一官私恩; 刑獄之下, 無一人枉死。 內無聲色之娛, 外無游佃之樂, 燕居冠帶必勑, 疾雖病, 不冠不見臣僚, 在大漸尙然。 憂勤惕慮, 足以上格乎穹蒼; 惻怛哀痛, 足以下結乎烝黎。 兢兢業業, 若臨淵谷者, 蓋十五年如一日。 此實擧國臣民心惟口誦, 可以質之于神明者也。 雖運値屯艱, 天嗇壽祺其仁心仁聞之入於人者, 已足以基國家億萬斯年之休矣。 臣竊觀前代懿辟, 若殷之三宗, 德可謂盛矣。 漢、宋之文仁, 政可謂善矣。 然其所以贊之者, 不過曰嚴恭寅畏而已, 不敢荒寧而已, 不敢侮鱞寡而已, 恭儉而已, 除刑賜租而已, 德澤在人而已。 社稷長遠, 終必賴之而已。 於戲! 我顯考之百世而不可忘者, 其在斯歟! 其在斯歟!
資憲大夫兵曹判書兼同知經筵事臣南九萬製進。
- 【태백산사고본】 29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99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註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