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대왕 행장(行狀)
효종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대왕 행장
국왕의 휘(諱)는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으로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둘째 아들이고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손자이다. 모비(母妃) 인열 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인데, 향교동(鄕校洞)의 잠저(潛邸)에서 기미년001) 5월 22일 해시(亥時)에 왕을 낳았다. 이날 저녁 흰 운기(雲氣) 세 가닥이 침실(寢室)로 날아 들어와 서쪽 편 창 사이에 엉겨 있었는데 연기 같으면서도 연기가 아니었다. 한참 있다가 흩어졌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왕은 태어난 지 4, 5세에 성품과 도량이 활달하여 우뚝하게 거인(巨人)의 뜻을 지녔다. 놀이를 할 때에도 범상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걸음걸이도 반드시 법도가 있었다. 철따라 나는 과일을 처음 보면 먼저 반드시 양전(兩殿)께 바친 뒤에야 맛보았으므로 양전이 항상
"우리 집의 효자(孝子)이다."
하였다. 매일 새벽이면 번번이 먼저 일어나 양전에 문안하고 이어 좌우에서 모셨다. 양전이 복용(服用)하는 모든 물품을 시어(侍御)하는 사람이 장배(藏排)함에 있어 정제(整齊)되지 않은 경우가 있으면 왕이 반드시 직접 정제하였다. 아무리 미세한 일일지라도 바르지 않은 것을 싫어함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양전과 인헌 왕후(仁獻王后)가 함께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돌보아 중하게 여기는 것이 특별히 융숭하였다.
5세가 되자 글을 배웠는데 권면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하였으며, 다른 아이들이 글읽기를 싫어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권면하여 부지런히 배우게 하였다. 항상 전사(前史)를 읽다가 인륜상 잔인한 부분에 이르면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8세 되던 병인년002) 에 봉림 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고 신미년003) 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王妃)는 고(故) 우의정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대족(大族)이요 법가(法家)였다. 을해년004) 12월에 인열 왕후가 승하하자 왕이 사제(私第)에 있으면서 중문(中門) 밖의 악실(堊室)005) 에 거처하였으며, 상례(喪禮)를 법제대로 극진히 집행하여 과일을 먹지 않았고 시어하는 사람은 복례(僕隷) 두어 사람뿐이었다. 슬퍼하는 것이 절도에 맞고 예를 행하는 것이 독실하였으므로 차탄하면서 열복(悅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병자년006) 상기(祥朞)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큰 난리를 만났다. 인조(仁祖)가 왕에게 명하여 인평 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먼저 강도(江都)로 가게 했는데, 가다가 중로(中路)에 이르러 사세가 더욱 위급해져 대가(大駕)가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왕이 밤에 두서너 명의 노복과 함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그러나 중도에서 어찰(御札)을 받고 이어 강도로 들어갔다. 밤에 천상(天象)을 살펴보면서 시사(時事)를 점쳤으며 주야로 동쪽을 바라보고 연모(戀慕)했는데, 침식(寢食)할 때를 당할 적마다 행재소의 제반 사정이 서글픔을 생각하여 눈물을 흘렸다. 행궁(行宮)의 소식을 탐문하기 위해 지니고 있던 금백(金帛)을 내어 무사(武士)를 모집하여 누차 파견했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 가운데 단지 2인만이 도달하였다. 그중 하나는 궁노(宮奴)였는데 어찰(御札)을 받들고 돌아왔으므로 모두들 지성(至誠)이 감응된 소치라고 하였다.
정축년007) 정월 강도가 함몰당하였고 2월에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인질(人質)로 심양(瀋陽)에 갔다. 북행(北行)을 떠나면서부터 대궐(大闕)을 연모하는 회포가 더욱 간절했는데 인조 대왕에게 편안하지 못한 체후(體候)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고 기거(起居)에 대한 의절(儀節)에 말이 미치면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으므로 곁의 사람들도 감동하였다. 소현 세자와 같은 관사(館舍)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형제 사이의 정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므로 간간이 난처한 일이 있었어도 정성을 다하여 주선하여 기미가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없었으며 화기 애애하여 사람들이 이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청(淸)나라 사람들이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소현 세자와 함께 동행하려고 하자 왕이 아문(衙門)에 극력 말하여 자신이 대신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도 간절하고 측은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들도 감동하여 중지하였다. 그 뒤에도 번번이 자신이 가기를 청하였는데 소현 세자와 함께 간 경우도 두 번이나 되었다. 갑신년008) 봄 청나라가 북경(北京)으로 들어갔고 을유년 봄에 소현 세자가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안 있어 병을 앓다가 죽었다. 왕이 계속하여 본국으로 나오니, 인조가 나라에 장군(長君)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는 것으로 이에 대신과 여러 경재(卿宰)들에게 순문(詢問)하여 드디어 책정(策定)하여 세자로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왕이 처음에 명을 듣고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장(疏章)을 올려 간절히 사양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네가 총명하고 효우(孝友)스럽기 때문에 특별히 형이 사망하면 아우에게 미친다는 예법을 쓴 것이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연마하여 형의 자식을 너의 자식처럼 여기라."
하였다. 다시 사양하니 또 답하기를,
"나의 뜻이 먼저 결정되었고 순모(詢謀)가 모두 같았으니, 너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도심(道心)을 지켜라."
하였다.
왕이 심양에 있을 적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왕을 보고서는 은밀히 서로 말하기를,
"참으로 임금 노릇할 사람이다."
했었다.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하루는 피곤하여 누워 있노라니 갑자기 오색(五色) 운기가 침실에 가득 서리면서 벽 사이로 거북 한 마리가 머리를 내어 놓고 있었는데 몸체가 매우 컸다. 왕은 꿈인가 의심하여 자세히 보니 꿈이 아니었다. 이때에 이르러 관상보는 사람의 말이 사실임이 증험된 것이고 거북 또한 앎이 있었던 것인 듯하다.
9월 27일이 연길(涓吉)이었으므로 유사가 궁의(宮儀)와 장위(仗衛)를 갖추어 잠저(潛邸)에서 맞이하여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책례(冊禮)를 거행하였으며 빈궁(嬪宮)은 내정(內庭)에서 책보(冊寶)를 받았다. 다음 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하였는데,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고 박사(博士)의 자리로 나아가 《대학(大學)》을 강하면서 한참 동안 토론하니, 빙 둘러서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열복하였다. 이에 하령(下令)하여 심양에서 온 우양(牛羊)을 모두 관서(關西)에 주어 공용에 보태게 하였다.
왕은 본디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외부(外傅)에 나아가면서부터 학업이 더욱 증진되어 일찍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북행(北行)의 곤경을 겪으면서도 학문에 뜻을 두지 않은 적이 없어 새벽녘까지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에서 글을 읽는 것을 폐하지 않았는데 그 책은 곧 《서전(書傳)》이었다. 글 읽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흠탄(欽歎)하여 마지않았다. 연경에 들어가기에 이르러서는 청나라가 자기들이 노획한 금옥(金玉)과 금수(錦繡)를 나누어 보내주었으나 왕은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그 대신 우리 나라의 포로를 돌려달라."
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의롭게 여겨 따랐다. 오직 경적(經籍)과 고금의 서사(書史)에만 유념할 뿐 그 이외의 특이한 보배와 진기한 재화는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올 때의 행리(行李)가 유독 깨끗하였다.
춘위(春闈)에서 덕을 배양하면서는 날마다 빈료(賓僚)들을 가까이하여 삼조(三朝)009) 의 여가에는 부지런히 학문을 강마하였다. 그리하여 궁관(宮官)으로 하여금 《서전》의 무일편(無逸篇), 《시전》의 칠월장(七月章), 옛 잠명(箴銘) 등의 글을 가져다가 병풍에 쓰게 하여 펼쳐 놓고 항상 보았다.
기축년010) 5월 초에 인조(仁祖)가 매우 위독하자 왕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서 올렸고 승하함에 이르러서는 맨땅에 거처하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수장(水漿)을 입에 대지 않았다. 예관(禮官)이 사위(嗣位)에 관한 예절을 아뢰니 왕은 차마 못하겠다는 것으로 거절하였다. 대신과 근신이 다시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삼사가 잇따라 아뢰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행례(行禮)하는 날은 아침 늦도록 나오지 않다가 예관이 다시 청한 뒤에야 나왔는데 눈물을 비처럼 쏟았다. 시신(侍臣)과 백관들도 모두 오열하면서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선정전(宣政殿)의 동쪽 협문(夾門)을 걸어서 나아갔는데, 통례(通禮)가 소여(小輿)를 탈 것을 청하였으나 물리쳤다. 인정문(仁政門) 어좌(御座) 앞에 이르러서는 오래도록 서 있으면서 올라가지 않자 대신이 예조 판서에게 뒤따라 나아가 오르기를 청하게 한 연후에야 올라갔다. 예(禮)를 파하고 나서는 걸어서 인정전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통곡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간원이 계청(啓請)하기를,
"졸곡(卒哭) 전에 시조(視朝)하는 것을 한결같이 옛 규례에 의거하여 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례(情禮)에 있어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누차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저궁(儲宮)께서 졸곡 전에 서연(書筵)에서 입는 복색에 대해 의논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도(經道)는 만세의 상법(常法)이기 때문에 한때의 일 때문에 문득 권도(權道)를 쓸 수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효제(孝悌)의 도리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나는 말세(末世)에서 순전히 권도만 쓰는 것을 증오한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9월에 발인한 뒤 정원이 능에 행행하는 것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어제 교외(郊外)에서 영여(靈輿)를 바라보면서 안력(眼力)이 다할 때까지 그러고 있으니 조금쯤 시간이 가는 아픔이 풀렸었는데, 멀리 가버려 가리워지니 다시는 바라볼 데가 없었다. 돌아옴에 전우(殿宇)가 적요하여 믿고 의지할 데가 없으니, 조금이나마 이런 회포를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단지 다시 산릉에 나아가 망극한 슬픔을 극진히 하는 것뿐이다. 이제 이 계사를 보건대 어찌 오늘날만 슬프기 때문일 뿐이겠는가. 실은 천지와 함께 끝없는 슬픔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대신들이 극력 청하여 정지시켰다. 반우일(反虞日)에는 서교(西郊)에서 맞이하여 곡(哭)하였는데 미천한 하인들도 모두 통곡하였다.
영사전(永思殿)에서 삭망(朔望)과 절일(節日)에 행례(行禮)할 때는 반드시 몸소 행하였고 혹한기나 한더위에도 정지한 적이 없었다.
경인년011) 가을에 가서 장릉(長陵)을 살펴보고 나서 엎드려 슬픔이 다하도록 통곡하였는데 찬례(贊禮)가 중지하기를 청하여도 중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르내리는 즈음에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신묘년 6월 부묘(祔廟)한 뒤 진하하는 것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臺臣)과 뭇신하들이 옛 규례를 원용하여 매우 간절하게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태묘(太廟)를 개수하여 벽을 바르고 있었는데 유사가 잘 판비(辦備)하지 못한 탓으로 즉시 완공하지 못했으므로 열성(列聖)들의 신위(神位)를 이안소(移安所)에 오래도록 유치했었다. 왕은 영령을 편안히 모실 수 없는 것을 두렵게 여겨 감히 편안히 거처하지 못하고 전랑(殿廊)에 내려가 앉아 도로 봉안(奉安)할 때까지 기다리려 하였다. 정원이 도로 전상(殿上)으로 올라갈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
"태묘의 신령이 편안한 뒤에야 과궁(寡躬)도 편안할 수 있다. 지금 묘주(廟主)가 밖에 있는데 어떻게 감히 마음놓고 편안히 거처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묘주를 봉환(奉還)한 연후에 전상으로 올라갔다.
임진년012) 에 왕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인주(人主)가 혹 병고(病苦)가 있으면 모르지만 병고가 없으면 마땅히 국전(國典)에 의거하여 직접 사시(四時)에 올리는 제사를 행해야 되는 것이다."
하고 또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에게 이르기를,
"과거 조종조에는 매년 조종의 능침(陵寢)을 전알(展謁)했는데 정례(情禮)로 헤아려 보건대 이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이에 봄 2, 3월과 가을 7, 8월에 돌려가면서 전알하는 것을 영원히 항식(恒式)으로 정하게 하였다.
정유년013) 에 《시전》의 육아편(蓼莪篇)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시(詩)는 성정(性情)에 근본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감발(感發)하여 징창(懲創)하게 하는 것인데, 《시전》을 읽다가 여기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오열하게 되어 한 글귀를 읽을 적마다 목소리가 처연(悽然)하게 된다."
하였다. 사의(辭意)가 정성스럽고도 측은하였으므로 좌우의 신료들이 모두 부복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선조(先朝)를 받들어 깊이 사모하는 정성이 이러하였다.
왕의 효도와 우애는 하늘에서 타고난 것으로 전고에 월등히 뛰어났으므로 실로 필사(匹士)로는 증자(曾子)·민자(閔子)와 같고 제왕(帝王)으로는 순(舜)임금·문왕(文王)과 같았다. 대비(大妃) 조씨(趙氏)에게 숙환이 있었는데 임금의 봉양이 극진하고 위호(衛護)가 고루 갖추어졌던 탓으로 평안할 수가 있었다. 또 외진 곳에 거처하는 것은 겨울이나 여름에 마땅하지 않다는 것으로 새로 전우(殿宇)를 지어 만수(萬壽)라는 액자(額字)를 내리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여 모셨으며 뜻과 음식을 겸하여 극진히 봉양하였다. 국전(國典)에 대비에게 상수(上壽)할 때 베푸는 연회를 풍정(豊呈)이라고 하는데, 왕이 한 번 거행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어 백성이 지친데다가 천변(天變)이 겹쳤으므로 거행하려다가 도로 중지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정유년 겨울 대략 연의(宴儀)를 갖추어 진연(進宴)이라 이름하고 만수전에서 대비에게 상수하였는데, 의식은 간략했지만 예법을 잘 갖추었고 화기 애애했으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기뻐하였다.
이해 가을 왕이 효릉(孝陵)에 행행하여 전알하였는데 소현(昭顯)의 분묘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려 하다가 이윽고 하교하기를,
"지난번 꿈에 소현의 안색이 매우 기뻐하는 것이 평소와 같았으나 우연일 수 있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또 꿈에 나타나서 몸소 전제(奠祭)를 지낼 수 없다고 말을 했더니 나의 손을 잡고 슬픈 안색을 지었다. 꿈을 깨고 나서도 황연(怳然)한 것이 평상시와 같아서 슬픈 감회를 형상하기 어려웠다. 해가 짧기는 하지만 나의 회포를 풀고 싶다."
하고, 전알한 뒤 종관(從官)을 가려 데리고 가서 몸소 전제(奠祭)를 지냈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와는 어릴 때부터 잘 적에 반드시 이불을 같이 덮었고 하루도 차마 떨어져 지내지 못하였다. 장성하여서도 잠시 서로 떨어져 있게 되면 그때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금중(禁中)을 출입하는 것도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수시로 하게 하였다. 매양 조가(朝家)에 사신(使臣)이 모자랐기 때문에 진사(陳謝)하는 중한 일을 부득이 대군(大君)에게 수행하게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자주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대군이 떠날 때에는 안타깝게 손을 놓는 한스러움을 지녔고 돌아올 때에는 영접하는 사개(使介)를 멀리 압록강 밖에까지 보내어 법온(法醞)과 친찰(親札)로 위로하였다. 상봉(相逢)하면 배로 기뻐하여 희비(喜悲)가 겸하여 극진하였는데, 상체(常棣)014) 의 화락한 즐거움도 그 지극한 정을 견주기에는 부족하였다.
병신년015) 여름에 인평 대군이 마침 참판 오정일(吳挺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어떤 조사(朝士) 하나가 술에 취하여 무망(誣妄)스런 말을 했는데, 군수 서변(徐抃)이 전해진 이야기를 듣고 드디어 고하기를
"인평 대군이 소를 잡아 놓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데 일을 헤아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였다. 왕이 진노하여 직접 국문했는데 서변은 장하(杖下)에서 죽었고 그 말을 전한 사람은 찬출(竄黜)시키니, 유언(流言)이 종식되었다. 인평이 무술년016) 봄부터 병을 앓아 점점 고질이 되었는데 왕이 주야로 사람을 시켜 문안하고 의약(醫藥)을 보내는 것이 길에 잇달았었다. 하루는 임금이 직접 임어하여 보았는데, 가인(家人)의 예(禮)로 접견하니, 인평이 감동하여 침중한 병에서 갑자기 소생되는 것 같았다. 이로부터 조금 차도가 있는 것이 여러 날이었는데 5월 13일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급함을 알리니 왕이 소여(小輿)를 타고 창황하게 곧바로 나아갔고 근신(近臣)들은 걸어서 따라갔다. 왕이 임어하여 이름을 불렀으나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시신을 어루만지며 길게 호곡(號哭)하니 눈물이 샘물처럼 솟았다. 시위(侍衛)하는 신하들도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 무더위가 한창이었으나 곁에 앉아 잠시도 떠나지 않았고 죽도 먹지 않았으며, 비를 무릅쓰고 잇따라 임어하여 염습(斂襲)하는 자리에도 직접 임하였다. 성복(成服)과 입관(入棺)에서부터 빈소(殯所)·발인(發靷)은 물론 묘지에 장사지내는 데 이르기까지 모두 대내(大內)에서 마련하고 관(官)에서 준비하였다. 그 부인(夫人)이 잇따라 죽었는데 그때에도 처음 죽었을 때부터 하관(下棺)할 때까지 부의(賻儀)를 넉넉하게 주었으며 대군(大君) 때와 마찬가지로 중관(中官)을 보내어 보살피게 하였다.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은 인조 대왕의 후궁(後宮) 조씨(趙氏)의 소생인데, 그 어미가 악역(惡逆)을 저지르고 징이 또 거듭 역적의 공초(供招)에 거론됨을 인하여 조정의 의논이 매우 준열했으므로 절도(絶島)에 폐치되어 있었다. 왕이 억지로 공의(公議)를 거스를 수는 없었으나 그들이 오랫 동안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장기(瘴氣)에 손상당할까 염려하는 골육의 정을 생각하는 것을 끝내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신년 여름 서울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그들을 자주 대내(大內)에 출입하게 함으로써 친친(親親)의 은혜를 보였다. 숙(潚)은 관례(冠禮)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금중(禁中)에서 관례를 행하였고 또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훈계하여 가르쳐 글읽기를 권면하였으며 사여(賜與)하는 물품은 선조(先朝) 때에 견주어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작위를 회복시켜 주라고 명하니, 삼사가 달이 넘도록 집요하게 간쟁하고 대신들도 불가하다고 했기 때문에 드디어 정지하였으나 왕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기해년017) 봄 정월에 대신들을 나오게 하여 유시(諭示)하기를,
"인평 대군의 상(喪)을 당함으로부터 동기(同氣)가 끝내 적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니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입알(入謁)하는 사람은 모두 몸에 장복(章服)을 입었는데 징·숙만이 백의(白衣)로 나아와 알현하니, 마음이 매우 서글프다. 내가 그들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고 싶어서 경들과 의논하려는 것이다."
하고, 인하여 탄식하면서 눈물을 머금으니 뭇신하들도 서로 눈물을 닦으면서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봉작(封爵)할 것을 명하였다.
낙선군(樂善君)은 빙례(聘禮)를 치르지 않았으므로 예조에 명하여 배필(配匹)을 간택하게 하였다. 대신(大臣)이 본가(本家)로 하여금 듣고 본 것을 종부시(宗簿寺)에 보고하여 알리게 할 것을 청하니, 왕이 하교하기를,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거처하고 있는데 어디서 듣고 본 것이 있어 보고하여 알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결국 예조로 하여금 택정(擇定)하게 하여 행례(行禮)하였다. 그의 누이 동생은 옹주(翁主)로서 그 어미를 도와 흉한 짓을 하였으므로 백관과 삼사가 율에 의거하여 조처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차마 법을 가하지 못하고 사죄(死罪)를 용서하여 외방으로 옮겨 보냈는데 대우를 매우 후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또한 석방하여 돌아오게 한 다음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였으며 노비와 전토도 아울러 모두 도로 내주어 의식(衣食)의 욕구를 충족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진괴(珍餽)를 계속 내려서 은혜롭게 돌보는 것이 변함이 없었다.
역강(逆姜)은 소현 세자의 빈(嬪)으로 계속 악독한 짓을 자행하다가 스스로 하늘의 벌을 자초함으로써 선조(先朝)에 죄를 얻었으므로 그 자녀들을 해도(海島)에 옮겨 안치시켰었는데 왕이 딱하게 여겨 방환시켰다.
또 윤3월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징·숙 등에게는 이미 관작을 회복시켜 관대(冠帶)를 하고 출입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되는 것이 있는데, 소현 세자의 자녀들은 그 어미의 일 때문에 아직도 선적(璿籍)에 소속되지 못하고 있으나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내가 매우 슬프게 여긴다. 그들이 좌죄(坐罪)된 것도 본디 징·숙과 다를 것이 없는데, 더구나 선왕(先王)의 하교에 ‘형의 자식을 너의 자식처럼 여기라.’고 한 내용이 있는데이겠는가. 내가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이제 징·숙과 똑같이 은혜를 베풀어 고르지 않다는 탄식이 없게 함으로써 우리 선왕께서 내리신 분부를 저버리지 않고 싶은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군신들이 모두 지당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교하기를,
"작호(爵號)를 써서 내리도록 하겠다. 오늘 첨의(僉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매우 기쁘다. 내가 소현(昭顯)과 동시에 북행(北行)하여 험난한 이역 땅에서 어렵고 위험한 지경을 모두 겪었는데 늘 좌우에서 이끌어 주면서 주야로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동쪽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인사(人事)가 갑자기 덧없이 되어버리고 불량한 사람이 이어 변을 야기시켰다. 선조(先朝)의 성명(成命)을 경솔히 고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항상 아프게 여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영령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어찌 한스러움이 없었겠는가."
하고, 인하여 한참 동안 오열하였다. 그리하여 소현 세자의 자녀들이 모두 복작(復爵)되었다. 아들은 경안군(慶安君)에 봉하고 딸 둘은 군주(郡主)에 봉했는데, 때 맞추어 시집 장가 보냈고 제택(第宅)과 의복(衣服)을 갖추고 하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경안군과 군주들을 대내(大內)로 불러들여 가까이 두고 다독거려 사랑했으며 거처와 음식을 공주(公主)와 차이가 없게 하였다. 부위(副尉)는 인접하는 이외에 혹 금원(禁苑)으로 불러들이기도 하는 등 시우(視遇)가 또한 부마(駙馬)와 구별이 없었다.
친족에게도 돈독하고 화목하게 하여 은뢰(恩賚)가 널리 흡족하였다.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는 인조 대왕의 아우인데, 존경하여 우대하는 것이 특이하였으며, 그의 서자(庶子)인 영신정(靈愼正) 이형(李瀅)을 특별히 사옹원 부제조에 제배하였다. 이조가 자급(資級)이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숙부(叔父)의 나이가 많아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것이 달리 없다."
하고, 이에 가자(加資)하여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능원군의 부음(訃音)이 들리자 소복(素服)을 입고 애림(哀臨)하였으며 인정과 예문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정신 옹주(貞愼翁主)·정휘 옹주(貞徽翁主)가 죽었을 적에도 모두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였다. 정인 옹주(貞仁翁主)는 그의 아들 안산(安山)의 수령인 홍언(洪琂)을 따라가 있다가 군아(郡衙)에서 죽었는데, 그 집이 도성(都城)에 있기 때문에 발인(發靷)하여 돌아오자 그 집에다 빈소(殯所)를 차리게 하여 특이한 은수(恩數)를 고르게 내렸다. 이들은 모두 선조(宣祖)의 자녀이다.
학문에 대해서는 이미 대요(大要)를 습득하였는데 도심(道心)을 지키라는 전교(傳敎)를 받드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근신(謹愼)을 가하여 잠시도 감히 잊은 적이 없었다. 즉위한 이래 하루에 세 번 여는 경연을 부지런히 하여 추위나 더위를 이유로 폐한 적이 없었다. 기축년018) 10월에 처음 경연에 나아가 《중용(中庸)》 서문을 강하였는데 읽어 가다가 편말(篇末)에 이르러서는 주자(朱子)의 이름을 휘(諱)하면서 강관(講官)에게도 휘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정자(程子)·주자(周子)의 이름을 아울러 휘하였다.
경인년019) 이른 봄에 바야흐로 미령한 증후(症候)가 있어 연신(筵臣)이 우선 정강(停講)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연을 열고 학문을 논란하는 데에서 들을 만한 것이 많다. 그리고 심한 통증이 없는데 어떻게 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바로 6월을 당하여서도 하루에 세 번씩 경연에 임어하니 연신(筵臣)이 과로로 건강이 손상될까 우려하여 또 하루에 한 번씩 진강(進講)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내가 본디 병을 많이 앓아서 겨울철 혹독한 추위에는 사세가 자주 경연을 열기가 어렵겠기에 이런 때에 자주 경연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11월에 우선 경연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혹한기가 닥치면 내가 사세를 살펴 조처하겠다. 우선은 자주 품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일찍이 《시전》을 강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시전》을 정지하고 《서전》을 강하였으니, 택우(宅憂) 때문이었다. 아침과 낮에는 《서전》을 강하고 저녁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는데,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경연을 연 지 이미 오래인데도 아직 대신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군신이 서로 만남에 있어 어찌 정례(定例)가 있겠는가. 나는 대신(大臣)과 간신(諫臣)을 모두 경연에 입참하게 하고 싶다. 만나는 것이 드물면 정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하였다. 《대학연의》를 진강하면서 ‘이단(異端)을 공부하면’이라는 장(章)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이때에는 석불(釋佛)의 해가 양주(楊朱)·묵적(墨翟)보다 심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는 도교(道敎)는 행하지 않았는데 당(唐)나라의 임금은 연단(鍊丹)하다가 죽은 경우도 있다. 송 진종(宋眞宗)은 이미 그것이 그른 것인 줄 알았으면서도 미혹됨을 면치 못했으니, 이 점을 알 수가 없다."
하였다. 왕이 이단(異端)을 싫어하는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삭서(朔書)020) 를 써서 올린 내용에 불가(佛家)의 용어를 쓰는 것은 정원에 명하여 엄금하게 하였다. 왕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옛 사람의 말에 학문을 하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으니 학문의 공효가 어찌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걱정은 입지(立志)가 확고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인주(人主)의 일신은 공격받는 데가 많은 법이어서 더욱 유념해야 될 곳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대우(大禹)의 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제일 먼저 극근 극검(克勤克儉)을 일컬었으니, 제순(帝舜)이 후세에 전한 교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난리를 겪은 뒤로 상하가 모두 걱정하면서 경황이 없는 중인데 사치를 일삼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우공장(禹貢章)을 강할 때 유신(儒臣)에게 이르기를,
"우임금의 근로(勤勞)가 몸소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창업(創業)한 임금과 견주어 볼 때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임금이 근로한 것만 못합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몸소 수많은 전쟁을 겪은 임금 또한 근로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마음에는 그래도 자신을 위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임금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천하에 대해 사심(私心)을 품은 것이 없으니, 이 점이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한휴(韓休)가 정승이 되자 현종(玄宗)이 그의 외모가 수척한 것을 탄식했었으니 마음으로 싫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으며, 《대학연의》를 강할 때 왕이 이르기를,
"한 선제(漢宣帝)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임금인데도 어찌하여 환관(宦官)에게 추기(樞機)를 맡겼단 말인가. 원제(元帝)가 본디 소망지(蕭望之)를 소원하게 대하여 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마침내 석현(石顯)에게 속고 말았다. 소망지의 죽음을 듣고 밥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렸으면서도 석현 등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자 그들의 죄를 바루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일찍이 경연에 임어하여 개탄하기를,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으레 겁이 많다고 하였다. 정축년021) 토산(兎山)의 일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군졸들이 정예롭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좋은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듣건대 이광(李廣)은 군중(軍中)에서 밤에 조두(刁斗)를 치지 않고 척후병을 멀리 보내어 적정(敵情)을 탐지했다고 하였다. 병자 호란때 장수가 된 자들이 이 점을 전혀 몰랐던 탓으로 신경원(申景瑗)은 이미 잘 싸우지도 못하면서 잘 피하지도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장수들은 진실로 이웃 나라에 견주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리고 문관은 글을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무관은 무예를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으로 국가에서 취하는 것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문관으로서 무변(武弁) 같은 사람인 경우에는 으레 경시당하기 일쑤이지만 무관으로서 서생(書生) 같은 사람인 경우에는 바야흐로 용납받고 있다. 따라서 무관으로서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광패(狂悖)스럽다고 지목하니, 풍조가 괴이하기 그지없다. 양호(羊祜)나 두예(杜預)처럼 가벼운 갖옷에 느슨한 띠를 띤 사람을 다시 볼 수가 없으니, 지금 세상에 무관으로서 서생처럼 생긴 자가 어떻게 전진(戰陣) 사이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진년022) 11월 주강에 다사편(多士篇)을 강하였는데 왕이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오늘 주강에 임어해서야 더욱 재이(災異)의 경고를 크게 두려워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덕을 밝히고 제사를 삼갔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안으로 마음에 부끄러운 점이 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를 망치는 길이 하나뿐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말에 진실로 이치가 있다. 명(明)나라가 망한 것을 가지고 보더라도 숭정 황제(崇禎皇帝)의 일을 중국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모두들 ‘밖으로는 유전(遊畋)과 안으로는 원유(苑囿)의 오락이 없었다.’고 했으니, 나라를 망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결국 복망(覆亡)하기에 이른 것은 명찰(明察)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그 방법을 극진히 하지 못한 것에 연유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논하여 본다면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흥망이야 진실로 논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오늘날에 이르러 국사가 이러하니, 끝에 가서는 어떻게 될지 몰라 나의 마음이 타는 것만 같다."
하였다.
계사년023) 주강에 군진편(君陳篇)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군진(君陳)의 책임이 중대한데도 계고(戒告)한 내용은 단지 효우(孝友)만을 일컬었으니, 사람의 행실 가운데 어찌 이 두 글자에 더 보탤 것이 있겠는가."
하고, 고명편(顧命篇)을 강할 때는 명왕(明王)은 항상 위태롭고 두렵게 여기는 마음을 지녔다고 언급된 대목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임금은 작은 한몸으로 억조 창생의 위에 처하여 있으니 무사(無事)할 때를 당하여서도 어찌 어렵게 여기고 두렵게 여기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서전》에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고 했는데, 어찌 옳은 말이 아닌가."
하였다.
갑오년024) 봄 저녁에 《대학연의》를 강하였는데, 노기(盧杞)가 안진경(顔眞卿)을 살해하고 이규(李揆)를 찬출(竄黜)시킨 일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소인(小人)은 매우 간교하여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술수를 부린다. 노기가 덕종(德宗)을 어린 아이처럼 여겼는데도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가 혼암(昏暗)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서(史書)를 읽는 것은 장차 이를 거울로 삼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의 군신은 극력 힘써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을 보기를 당나라 때 노기가 덕종을 보듯이 하는 일이 없게 해야 된다."
하였다. 여름에 《시전》 패풍(邶風)의 북문(北門)으로 나아갔다는 장(章)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숨는다면 이는 진실로 임금의 수치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라가 위태롭다고 모두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린다면 이는 신하의 도리에 있어 또한 불가한 일인 것 같다. 이는 모두 군신이 마땅히 살펴야 될 곳이다."
하였다.
을미년025) 봄 주강에서 명나라의 일에 언급이 되자 왕이 이르기를,
"숭정 황제가 망할 적에 조정의 신하 가운데에는 사절(死節)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따라 죽은 사람은 내관(內官) 하나뿐이었으니, 진실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명나라의 법제를 살펴보건대 사람으로 하여금 무기를 잡고 시위하게 하고서 신하들이 일을 아뢰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박살하였고, 또 동·서창(東西廠)을 설치하여 환관들에게 주관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일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 소위를 추적하여 보면 나라가 망한 것이 너무 늦었다."
하였다. 진풍(秦風)의 황조장(黃鳥章)을 강하는 데 이르러서 왕이 이르기를,
"이 편(篇)을 살펴보면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은 자연히 가슴 속에서 발하여지는 것인데, 잔인하게 신하로 하여금 두려워하면서 광중(壙中)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인정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자기는 죽는 것을 싫어하면서 다른 사람은 기탄없이 죽이는 것이 수십 명이나 되었으니, 다른 것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보화(寶貨)를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 유익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그 때문에 참화(慘禍)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여후(呂后)의 무덤이 오욕을 당하고 진황(秦皇)의 무덤이 도굴당한 것이 모두 여기에 연유된 것이다. 한 문제(漢文帝)는 검약하게 했기 때문에 유독 이런 참화를 당하지 않았고 광무제(光武帝)의 수릉(壽陵) 제도는 겨우 빗물만 흐르게 했을 뿐이니, 어찌 후세에서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진풍(陳風)의 주림장(株林章)을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필부(匹夫)일지라도 패악(悖惡)스러운 것이 이러하면 목숨을 보전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임금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문왕(文王)의 교화가 강한(江漢) 지방에까지 파급되었었는데 쇠할 때에는 제후(諸侯)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름에 칠월편(七月篇)을 강하면서 도교(道敎)의 치성함에 대해 논급했는데,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좌교(左敎)가 없으니 진실로 흠탄(欽歎)할 만한 일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는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한 힘인 것이다. 내가 《송사(宋史)》를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이항(李沆)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입대(入對)할 적마다 우려스러운 재이(災異)의 일을 극언(極言)하면서 황제가 듣기 싫어해도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묻자 이항이 말하기를 ‘황제의 춘추가 한창 왕성하여 지기(志氣)가 방자해지기 쉬운데 만일 걱정스럽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날마다 아뢰어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하면 반드시 멋대로 방탕해지는 걱정이 있게 될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했는데, 참으로 훌륭한 말이다. 예로부터 임금은 국가가 평안하고 부유하며 해내(海內)에 걱정이 없게 되면 교만하고 방자하고 음란하게 되어 혹 좌도(左道)에 빠지기도 하고 혹 전공(戰功)을 힘쓰기도 하고 혹 일예(逸豫)에 젖기도 하여 몸도 죽고 나라도 잃은 경우가 비일 비재하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에 《시전》의 상체장(常棣章)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우애(友愛)의 정이 극진한 연후에야 군신 부자(君臣父子)가 모두 올바른 도리를 행할 수 있는 것이고 붕우(朋友)의 의리에 대해서도 신의를 돈독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大學)》에 이른바 ‘후하게 해야 될 데에다 박하게 하는 사람치고 박하게 해야 될 데에다 후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 않다.’고 한 것이 또한 이런 뜻인 것이다. 형제 사이에 박하게 하면서 남에게 후하게 할 사람은 있지 않은 것이다. 형제 사이에 잘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을 지성으로 계도(啓導)한다면 어찌 감동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무지하고 완악한 소민(小民)일지라도 본성을 인하여 계도한다면 절로 귀화(歸化)될 것이다. 형제 사이에 서로 쟁송(爭訟)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모두 국가의 교화가 행해지지 않은 까닭인 것이다. 이 어찌 심히 부끄러워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겨울 10월에 주강(晝講)을 할 때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한 애제(漢哀帝)가 초년(初年)에 위살(威殺)을 행한 것은 선제(宣帝)가 한 것을 본받아서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그런 경우 그와 똑같은 재능은 없으면서 그가 한 일을 본받아서 하면 애제(哀帝)의 꼴이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하였다. 연신이 또 장량(張良)이 홍구(鴻溝)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논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론(士論)은 곧 만세에 변치 않는 경상(經常)의 도리인데, 유자(儒者)의 기상(氣象)에 의거하여 장량에게 모든 것을 완벽히 갖추기를 책임지우려 하기 때문에 불의(不義)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장량의 뜻은 오직 원수를 갚는 데에만 있었으니 어느 겨를에 상도(常道)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의리가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줄 모른다."
하였다. 범증(范增)의 일을 논하는 데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항우(項羽)의 공을 도와 이루려 하였으니 의제(義帝)를 어떤 위치에 두려는 것이었는가? 마침내 강중(江中)의 추악한 이야기026) 를 남김으로써 흰 옷을 입고 조문(吊問)하는 군대를 일으키게 했으니, 이는 한왕(漢王)이 천하를 낚을 수 있는 미끼를 만들어 준 것이다. 따라서 범증은 그 결과를 생각할 줄 모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왕이 국을 나누어 달라고 한 이야기027) 같은 것은 차마 입으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어떻게 얼굴을 들고 천하에 군림(君臨)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론이 송(宋)나라에 언급되자 왕이 이르기를,
"만고에 가장 애석한 것으론 송 고종(宋高宗) 같은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악비(岳飛) 같은 장군이 있었는데도 기용하지 못했으니, 이것만도 이미 잘못이다. 그런데 또 어찌하여 기필코 살해하기에 이른 뒤에야 그만둔단 말인가."
했는데, 임금의 말은 너무도 통분스럽고 개탄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윤길보(尹吉甫)의 일을 논하자 왕이 이르기를,
"하늘이 한 세상에 인재를 내는 것은 한 세상의 일에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후세에 또한 한 세상에 쓰일 길보 같은 이가 혹 있게 될 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반드시 내정(內政)이 잘 닦여진 뒤에야 외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니, 지금의 급선무는 인심을 얻는 데 요점이 있다."
하였다.
병신년028) 정월에 《시전》의 백구장(白駒章)을 강하였는데, 왕이 그 주어(註語)를 읽으면서 이르기를,
"이 주가 참으로 타당하다. 예로부터 군신(君臣) 사이는 뜻이 잘 맞기가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한신(韓信)이 초(楚)나라 사자(使者)의 유세에 대해서도 한 고조(漢高祖)가 말하면 들어주고 계획을 세우면 따라준다는 등의 말로 거절하였다. 과연 말하면 들어주고 계획을 세우면 따라준다면 어진이가 어찌 떠나고 싶어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학명장(鶴鳴章)의 주에 부드럽고 윤기 있는 옥(玉)과 거칠고 껄끄러운 돌이라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이 말이 가장 절실하다. 중인(中人)의 성품은 환란을 당한 뒤에야 마음을 감동시켜 하고 싶은 기욕을 참아 내면서 자신이 잘하지 못한 점을 증익(增益)시키게 되는 것이다. 임금이 재이(災異)를 만나면 또한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만일 재이를 만나 삼가 두려워하기만 하고 하나의 일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른에게 꾸지람을 받고서 두려워 위축될 뿐인 것과 같으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반드시 하는 일이 있은 뒤에라야 꾸지람에 답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또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순서에 따라 점차로 행하여 가면서 유념하여 중지하지 않는다면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언자(言者)들은 혹 하루 아침에 갑자기 큰 사업을 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는 결코 성취될 리가 없다."
하였다. 조강·주강·석강 이외에 수시로 다시 야대(夜對)를 하였는데, 간혹 체후가 미령하여 정전(正殿)에 나아가지 못할 경우이거나 혹 입시한 관원이 고르지 못할 경우에는 또한 때때로 편전(便殿)에서 소대(召對)하였다.
3월에 소대하여 《대학연의》를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옛날의 소인(小人)은 혼암한 임금을 만나면 은폐와 기만을 멋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명(英明)한 임금의 경우에도 혹 참언(讒言)에 미혹되었으니, 참언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이는 이른바 서서히 스며드는 참소와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호소인 것이다. 그렇지만 임금은 매사에 반드시 광명 정대하게 해야 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좌우를 물리치고 말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참언이 들어오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진(晋)나라의 제왕(齊王) 유(攸)는 바로 아우인데, 혜제(惠帝)의 혼암하고 용렬함이 만고에 견줄 데가 없을 정도였고 보면, 무제(武帝)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아우에게 물려주었어도 실로 종사(宗社)의 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언을 믿고 도리어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내어 끝내는 골육 상잔의 비극을 연출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나라가 스스로 망하기를 재촉한 것이다."
하였다.
정유년029) 10월 《심경(心經)》을 진강했는데, 왕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본원이 맑아져 인욕(人欲)이 다소곳해지면 도심(道心)이 자연히 배양될 것이다. 만일 이욕(利慾)에 얽매인다면 어떻게 이 마음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재(主宰)이고 경(敬)은 또 일심(一心)의 주재인 것이다. 만약 함양하는 공부가 없다면 어떻게 만선(萬善)의 주재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의(敬義)를 내외(內外)로 늘 간직하면 이 마음을 잠시 놓아두려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정일(精一)에 대한 이야기가 요(堯) 순(舜)에게서 나왔지만 요 순 이전에 이미 이런 의리가 있었던 것이고, 경의(敬義)에 대한 이야기가 공자(孔子)에게서 나왔으나 공자 이전에 이미 이런 도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무술년030) 봄 왕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근래 《송사(宋史)》를 살펴보건대 영종(寧宗)·광종(光宗) 두 임금의 일은 참으로 통분스러웠다. 부자(父子) 사이의 천륜을 멸절(滅絶)시킨 것이 저와 같았으니, 송나라가 망한 것은 여기에서 그 기초가 조성된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당시의 국사는 다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는데 위학(僞學)이라는 두 글자가 선류(善類)들을 일망 타진하는 법문이 되었으니, 말하기도 참혹하다."
하고 연신에게 이르기를,
"소인은 진실로 슬기로운 자가 없다. 그러나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자신도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간사한 짓을 멋대로 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결국 나라가 망함에 따라 자신도 죽게 되는 것인데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송(宋)나라의 가사도(賈似道)·한탁주(韓侂胄) 같은 자들은 흉계를 멋대로 부리다가 악이 차게 되어 국사를 그르쳤는데 나라가 망하기도 전에 친족이 먼저 주멸되었으니, 그들의 계교가 교묘한 것 같지만 실은 매우 졸렬한 것이다. 송나라 때에 또 주자(朱子)를 참(斬)할 것을 청한 자가 있었는데, 예로부터 소인이 기필코 어진이를 해치려는 마음을 먹으면 못할 짓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아, 또한 참혹한 일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송나라에서 도학(道學)을 금한 것이 사죄율(死罪律)과 다름이 없었으니 통분스럽고 개탄스러워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원(元)나라는 비록 이적(夷狄)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도학을 숭상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포로들 가운데 유사(儒士)의 부류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석방하여 존대하였다. 그리하여 대성 문선왕(大聖文宣王)이라는 호칭을 공성(孔聖)에게 가하기에 이르렀으니 성인을 존숭하는 마음이 지극했다고 이를 만하다. 송나라는 중국(中國)이면서도 도학을 금한 것이 저와 같았고 원나라는 이적(夷狄)이면서도 도학을 숭상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남송(南宋)의 일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고종(高宗)이 악비(岳飛)·한세충(韓世忠)이 생존해 있을 적에 본토를 회복하지 못했으니, 그들이 죽은 뒤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효종(孝宗) 이후로는 일시적인 평안함만 추구한 지가 오래되어 상하가 태연스럽게 지냈으니 어떻게 분발하여 흥복(興復)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주강(晝講)을 마치고 송준길(宋浚吉)이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 천변(天變)이 없는 때가 없는데 매년 이러하니 성심(聖心)의 계구(戒懼)가 아마도 한결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니 왕이 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으니 실로 찬선(贊善)의 말과 같다. 간혹 심상히 여겨 방과(放過)한 때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명나라의 일에 언급되자 왕이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숭정 황제가 망한 것은 실로 환관에 연유된 것이다. 그들을 주군(州郡)으로 나누어 파견한 것은 지방관의 선악(善惡)을 살피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그들의 사헌(私獻)을 이롭게 여겨서였던 것이다. 외방의 일을 은밀히 염탐하는 것이 실은 정도(正道)가 아닌 것인데 더구나 잡류(雜流)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준길이 이어 백성의 고통을 구출하고 경연을 자주 열어야 된다는 내용으로 진달하니, 왕이 모두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정월에 경연에 임어하여 찬선 송준길에게 이르기를,
"나의 기질은 편협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날마다 《심경》을 강하여도 마음의 병통을 쾌히 제거할 수가 없어 거조에 있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 반드시 법가(法家)와 필사(拂士)가 좌우에서 보필해 준 뒤에야 허물이 적어지기를 기대할 수 있겠다. 내가 기필코 찬선을 오래 머무르게 하려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4월에 《심경》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가만히 있을 적에 항상 공경하고 말하지 않을 적에 항상 조심하면 언동(言動)을 기다릴 것도 없이 믿을 수 있게 된다고 하는 이 말이야말로 가장 음미하여 깊이 생각해야 될 곳이다. 그러나 그 요점은 힘써 행하는 데 있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그 또한 거짓인 것이다."
하였다. 5월에 소대(召對)할 때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송 고종(宋高宗)은 경구(驚懼)하는 생각을 많이 품고 있었기 때문에 성취한 것이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그 당시 금릉(金陵)에 머물기를 권하기도 하고 변경(汴京)에 머물기를 권하기도 했는데 변경은 그래도 두려워할 수 있는 곳이지만 금릉에도 끝내 한 걸음도 나아가 보지 못했다. 그의 경구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종택(宗澤)·이강(李綱)·악비(岳飛)·한세충(韓世忠) 같은 이가 있었는데도 기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만일 효종(孝宗)이 이때의 세상에 태어나서 이 사람들을 기용했다면 하북(河北)을 회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듯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진회(秦檜)의 마음을 가장 알 수 없다. 정승이 된 뒤에 어찌하여 금(金)나라를 배반하지 않고서 전적으로 남방(南方)에만 뜻을 두었단 말인가. 한세충이 나귀를 타고 서호(西湖)에 노닌 일031) 과 악비에 대해 막수유(莫須有)032) 라고 한 말에 대해서는 송 고종(宋高宗)을 위하여 개탄스러움을 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11월의 소대(召對)에서 왕이 이판(吏判) 송시열(宋時烈)에게 이르기를,
"송 신종(宋神宗)이 명도(明道)를 대하여 인재가 없음을 탄식하니, 명도가 말하기를 ‘지금이라고 또한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하였으나 신종은 결국 명도가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명도가 삼대(三代) 때의 일을 가지고 진달하니, 신종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 하자, 명도가 추연(湫然)히 ‘이는 사직(社稷)의 복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명도의 마음은 이렇게 컸는데 신종의 뜻은 저렇게 작았으니, 맡길 만한 인물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맡길 수 있었겠습니까."
하자 왕이 이르기를,
"옛날의 일에 대해 지금 사람이 추후 개탄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일에 대해 뒷사람이 다시 개탄한다면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12월의 소대(召對)에서 송시열이 왕의 성품이 편협함을 논하면서 화평스럽게 하는 방도를 극진히 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이 어찌 나의 병통을 모르겠는가. 나의 병통은 기질이 편협한 탓으로 바야흐로 노여워할 때에는 일의 시비를 모르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에 중도(中道)에 맞지 않는 것이 있게 된다. 그래서 근일 이래로 노여워할 일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참음으로써 그 병통을 다스리고 있는데 밤중에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노여움이 점차 풀렸다."
하였다.
기해년033) 2월의 소대에서 경(敬) 자에 대해 논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사람은 반드시 움직여야 할 때는 움직이고 고요히 있어야 할 때는 고요히 있은 뒤에야 공부가 바야흐로 전일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고요한 데에만 빠진다면 어떻게 그것을 경(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의 소대에서 왕이 이르기를,
"옛날의 임금은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재물을 축적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한 영제(漢靈帝)는 돈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짐이 사제(私第)에 있을 적부터 너를 사랑한 지 오래되었다.’ 하고는 벼슬을 팔아 돈을 거두어들임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렇게 사리에 어긋나게 들어온 돈이 사리에 어긋나게 나가는 것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일반 금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용(龍)은 사령(四靈)의 장(長)인데도 가끔 미끼를 탐하다가 죽는데 이는 욕심에 연유된 것이다."
하였다. 《심경》을 강할 때부터는 송준길이 자주 시강(時講)하였는데, 무술년 겨울부터는 송시열도 교대로 나아가 시강하였다. 그리고 기타 유술(儒術)로 나온 사람들도 아울러 윤번으로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따라서 마음 공부에 진보되고 유익한 점이 많게 되었다. 왕은 성품이 편협하여 극복하기 어렵고 노여워할 때가 가장 극심하다고 스스로 생각해서 항상 깊이 반성해서 결국에는 수습하여 안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일찍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이 착공(着工)에 절실한 것이니 의당 병풍을 만들어 좌우(座隅)에 두어야 한다고 여기고 옥당의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베껴써서 들여오게 하였다. 그리고 당우(堂宇)의 문달(門闥)에다 경계하는 내용의 말을 게시했으며, 큰 글씨로 ‘마땅히 분음을 아껴 상제를 대한 듯이 해야 한다.[當惜分陰對越上帝]’는 여덟 글자를 써서 벽에다 붙였다. 재(齋)는 경의(敬義)라고 명명하고 합(閤)은 양심(養心)이라고 명명했는데 모두 스스로 경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왕에게는 적사(嫡嗣) 한 분이 계셨는데 곧 우리 전하이시다. 인효(仁孝)가 일찍부터 드러났으므로 인조조(仁祖朝) 기축년034) 봄에 세손으로 봉하였다. 그러다가 왕이 즉위한 3년 뒤인 신묘년035) 가을에 세자로 봉하였는데, 왕이 매우 애지 중지하였으나 가르침은 엄절하여 궁료(宮僚)를 간택하여 날마다 경사(經史)를 강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찬선(贊善)·진선(進善) 등의 관직을 유현(儒賢)에게 제수하여 돌려가면서 권면하고 계도하게 하였으므로 점차 고명한 경지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궁관(宮官)들에게 하교하기를,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반복하여 진설(陳設)하되 고금의 득실(得失)과 여염의 이병(利病)에 대해서도 모두 인유(引喩)하여 깨닫게 하라. 제왕가(帝王家)의 자제들은 깊은 궁중에서 낳아 자라기 때문에 민간의 고통과 괴로움을 모르기 일쑤이니, 후원(後苑)에 벼를 심고 경운(耕耘)할 때 세자로 하여금 가서 보게 함으로써 백성의 일을 알게 하라."
하고 또 찬선 송준길에게 이르기를,
"동궁(東宮)이 바로 학문을 할 때가 되었으니 찬선 같은 사람이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을 다하여 보도(輔導)한다면 그 다행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왕이 신료(臣僚)들에게 보도하여 주기를 기대한 것이 매우 간절하였는데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치의(緇衣)036) 정도뿐만이 아니어서 존경하고 예우하여 초치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았다.
즉위 초에 전 참의 김집(金集),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 전 자의(諮議) 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전 현감 최온(崔薀) 등이 제일 먼저 소명(召命)을 받고 나아왔는데 그들의 여식(旅食)의 어려움을 염려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포인(庖人)과 늠인(廩人)을 시켜 고기와 양식을 계속 보내게 하였다. 시열과 유태의 어미가 늙고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미찬(米饌)과 약물(藥物)을 보내주게 하였다. 또 김집을 예조 참판에 특배했는데, 이조에서, 예관은 반드시 문관을 쓰는 것이 법이라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옛것을 상고하면서 글을 읽은 사람을 불러서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상규(常規)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집을 한 해 안에 이조 판서에까지 뛰어올렸는데 뒤에는 너무 늙었다는 것으로 판중추로 올렸다. 임금이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유림(儒林) 영수(領袖)의 상사(喪事)를 애도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시열에게도 특별히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는데, 준길과 함께 아경(亞卿)을 거쳐 서로 앞뒤로 이판과 병판이 되었다. 징벽(徵辟)에 부지런하여 가교(駕轎)를 타라고 명하였고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초구(貂裘)를 벗어주기에 이르렀으니, 지우(知遇)의 융숭함이 옛 시대에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권시는 진선·집의를 거쳐 동부승지에 진배(進拜)되었고 곧이어 찬선이 되었다. 최온은 누차 대부(臺府)를 거쳐 승지로 뛰어 올려 제수하였다.
심광수(沈光洙)가 외간(外艱)을 당하자, 왕은 예전에 선생이었다고 하여 존문(存問)하고 약료(藥料)와 식물(食物)을 지급하였으며 상기(喪期)가 끝나자 헌직(憲職)을 거쳐 발탁하여 은대(銀臺)에 두었다. 허목(許穆) 또한 임하(林下)에서 일어나 지평·장령에 제수되었다. 조극선(趙克善)이 병들었을 적에는 털옷을 하사하여 덮어주고 내의를 보내어 구료했으며 그가 죽었을 때에는 호조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상사를 다스리게 하는 한편 날마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보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의금(衣衾)·관염(棺斂)을 예(禮)를 갖추어 극진히 하였으며 관곽과 분묘에 드는 비용도 모두 관(官)에서 갖추어 주게 하였다.
유명(儒名)이 있는 사람은 모두 수소문하여 기용하였다. 이들을 돌보는 마음이 매우 우악(優渥)하여 유현을 숭상하는 성대함이 시종 한결같았다. 이는 삼대(三代) 이후에 있지 않았던 일이다.
선조(先朝)의 기로(耆老)인 훈구 대신에게는 예경(禮敬)이 융숭하고도 특이하였으며 은수(恩數)도 높고 중하였다. 나이 많은 달존으로 걸음을 잘 못 걷는 김상헌(金尙憲) 같은 경우에는 대궐에 들어올 적에도 견여(肩輿)를 타도록 명하였고 전상에 올라올 적에는 내관(內官)이 부축하게 하였다. 선조(先朝)에서 견벌을 받았더라도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하고 재식이 쓸 만한 것이 이경여(李敬輿) 같은 경우에는 기용하여 의지하면서 수상에 제배하기도 하였다. 먼 변방에 유배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본조(本朝)에서 죄를 진 것이 아닌 경우에는 수찰(手札)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문안과 괴유(餽遺)가 잇따랐으며 대군(大君)을 보내어 면려하여 결국은 사지(死地)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구마(廐馬)와 문표(文豹)를 내려주기도 하고 좋은 술과 맛난 음식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철따라 나는 산물과 제철 과실 등 특이하게 맛있는 것을 하사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분묘(墳墓)를 성알(省謁)하겠다고 고하면 전의(奠儀)를 갖추 지급해 주었으므로 은택이 천양(泉壤)에까지 두루 미쳤으며, 휴가 받아 지방으로 나가면 방백(方伯)에게 하유하여 특별한 향유(餉遺)가 있게 하였다. 그리고 가끔 편전(便殿)으로 불러들여 술을 하사하여 권하기도 하였으며, 병이 들면 반드시 어의(御醫)를 보내고 내약(內藥)이 뒤따랐으며, 소회를 진달하면 흔연히 받아들여 시행하였고 또 반드시 선소(宣召)하여 마음을 열어 면유(面諭)하였으며,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모두 자문(諮問)한 뒤에 행하였다.
신서(臣庶)들에게 조림(照臨)함에 있어서는 작은 것이라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었고, 이역 땅에서 죽음을 당한 경우에는 특별히 그 집을 구휼하였고, 다른 나라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는 경우에는 그 처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부모의 봉양을 위해 걸군(乞郡)하는 경우에는 그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었고, 어버이에게 병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구료하여 낫게 하였고, 자신의 병이 중한 경우에는 품계가 낮다고 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재신(宰臣)으로서 시골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경우에는 매달 녹봉을 지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음을 측은히 여기고 추증(追贈)하는 은전이 널리 서관(庶官)에게 가하여졌다. 관리가 되어 치적이 으뜸인 사람은 오래도록 기억하였고 죽은 뒤에도 잊지 않았으며, 편관(編管)된 사람이 부모의 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놓아주어 분곡(奔哭)하게 하였으며, 국사를 위하여 죽었는데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사유(赦宥)가 그의 조카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
해마다 흉년이 들어 탁지(度支)에서 국고가 고갈되었음을 고하자 비국(備局)이 백관들의 녹봉을 감할 것을 청하고 정원도 이를 계속하여 아뢰고 대신(大臣)들도 거듭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첫째는 충신(忠信)으로 대하고 녹봉을 중하게 주라는 것은 성인(聖人)의 훈계인데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해에는 더욱 깊이 유념해야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공(御供)을 줄이지 않은 것이 아직 많으니 다 줄인 다음 다시 의논해야 할 것인데 부비(浮費)는 모두 절감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조종조 때에는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매우 돈독했는데 지금에 와서 너무 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녹봉을 감하지 않았는데도 경비가 또한 지탱되었다. 이는 뭇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는 극진한 뜻에서 나온 조처인 것이다.
제일 먼저 언로(言路)를 열어 말을 하도록 계도(啓導)하였으며 소장을 올려 폐단을 말하거나 잠언(箴言)을 올려 규풍(規諷)하는 사람이 있으면 호피(虎皮)나 표피(豹皮)를 하사하기도 하고 마장(馬裝)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홍문관의 학사(學士)는 홍문록에 기록된 사람을 쓰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의 말이 정직한 것을 가상하게 여긴 경우에는 죄를 사면시키고 곧바로 수찬에 제배하였으며, 과감하게 간쟁하는 사람은 삼사의 관원으로 자주 발탁 기용하기도 하는 한편 돌려가면서 교대로 인견하여 잘못을 규핵하는 책임으로 면려시켰다.
사람을 기용할 적에는 항상 양전(兩銓)을 단속하였는데 대간과 수령은 더욱 신중히 가리게 하였다. 명현(名賢)·양상(良相)과 충신·효자·청백리의 자손은 모두 녹용(錄用)하게 하였으며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여 아름답게 여김으로써 퇴폐 풍속을 면려시켰다. 고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자손이 미미한 탓으로 묘도(墓道)에 묘표(墓表)조차 없다는 말을 왕이 듣고서는 본도의 방백으로 하여금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은 예로부터 충신으로는 조헌(趙憲) 같은 이가 없다고 여기고 그 자손들을 먼저 서용하라고 특명하였다. 고 우상 김상헌(金尙憲)을 영의정으로, 고 참판 정온(鄭蘊)을 판서로 추증(追贈)하였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간행(刊行)하였고 또 《경민편(警民編)》을 간행하여, 보고 감동을 느끼게 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각도의 감사·병사·수사와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배사(拜辭)할 적에는 조용히 사대(賜對)하여, 관원을 출척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져 사랑하는 방도에 대해 자상하게 일러 주었다. 어사(御史)를 나누어 파견하여 여러 고을과 변진(邊鎭)을 염찰(廉察)하게 하고 선악의 정상을 알게 되면 그에 따라 상벌을 가하였다. 그리고 먼 변방의 병민(兵民)들은 왕화(王化)에 젖지 못했다는 것으로 함경 남북도와 평안도의 병사 및 양계(兩界)의 변방 수령은 간간이 문관(文官)으로 차견하였다. 백관들이 나태할 것을 염려하여 하교하기를,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재주이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지 못한 것은 뜻이다. 재주는 본래 얻기가 어렵겠지만 뜻 또한 부지런하지 않다면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했는데, 모든 관사 가운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벌을 내렸다. 또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먼저 기강을 확립하여 백집사(百執事)가 모두 자기의 직무에 부지런하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백사(百司)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있다. 좌기(坐起) 같은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일체 폐기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우려스럽게 여긴다. 전곡(錢穀)의 직임은 더욱 자주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바꾸고 있다. 우리 나라는 집리(執吏)가 없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는 매달 삭말(朔末)에 육조와 한성부·장례원은 각기 해사(該司)의 좌기한 일수(日數)를 써서 들여 오게 하라. 이에 의거하여 그 근만(勤慢)을 조사하겠다."
하였다. 이로부터 각사에서 좌기했는지 안 했는지를 매달 써서 아뢰게 되었다. 그 뒤 헌부에서 한 번만 좌기하자 하교하기를,
"법관이 이렇게 하면 어떻게 백사(百司)를 규정(糾正)할 수 있겠는가."
하고, 전 대사헌 이하를 아울러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붕비(朋比)하는 습관을 매우 증오하여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신하들이 붕당(朋黨)을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록(爵祿)에 대한 계교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임금에게 중히 여김을 받는다면 부귀는 저절로 오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영구(營救)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그 정적(情迹)이 탄로가 나서 결국 죄려(罪戾)를 면하지 못하게 되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나는 기필코 사문(私門)을 타파시키고 국사가 수거(修擧)되게 하고 싶다."
하고 또 이르기를,
"붕우(朋友)란 그 덕을 벗하는 것이다. 따라서 술자리에서도 의당 서로 선한 일을 하도록 책하는 도리로써 면려해야 되는 것인데, 지금은 모두 잡되게 친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다. 그리하여 조신(朝紳) 사이에도 각기 붕당을 만들어 잘못을 덮어줌으로써 함께 붕당이 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하였다. 인견할 때 뭇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길이다. 명(明)나라와 우리 나라의 혼조(昏朝) 때의 일이 멀지 않은 귀감이 된다. 지금 명공(名公)·대부(大夫)들에게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대신과 공경들은 다시 더욱 풍속을 면려하고 청백함을 숭상하도록 힘쓰라. 재능이 없더라도 청백한 사람이면 발탁해 기용하여 일세(一世)를 인도하게 해야 한다."
하였는데, 신하들을 계칙(戒飭)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윤대(輪對)를 할 적에는 각사의 폐단을 하문하였고 전강(殿講)을 할 적에는 문신과 사자(士子)들을 권면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어제(御題)를 내어 옥당(玉堂)·은대(銀臺)·춘방(春坊) 등에서 입직한 관원들에게 제술 시험을 보여 우수한 사람은 상을 주었다. 또 특별히 사신(詞臣)을 선발하여 사가 독서하게 하였는데 글을 읽기도 하고 짓기도 하게 했다. 간간이 춘당대에 나아가 직접 문무(文武)의 재능을 시험하였는데, 간혹 당일 방방(放榜)하기도 하고 면대하여 상물(賞物)을 지급하기도 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을 용동(聳動)시켰다. 대사성을 잘 가리고 또 좨주(祭酒)를 설치하되 유현(儒賢)에게 이를 겸대하게 하여 《소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을미년037) 칠석(七夕)에 제생(諸生)들을 모아놓고 제술 시험을 보였는데 곧이어 새로 만든 은배(銀杯)를 태학에 하사하였고 인하여 관중(館中)의 많은 관원들과 입격(入格)된 제생들에게 술을 내려주었다. 또 임금의 서한을 내리기를,
"구전(舊典)을 계속하기 위해 은배(銀杯) 2부(部)를 특별히 본관(本館)에 하사한다. 그것이 사치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 보존되기 바라서이고 술을 마시기 위한 때문이 아니라 화협하기를 바라서이다. 그대 사생(師生)들은 이 뜻을 밝게 드러내어 삼가 공경하여 어긋남이 없게 하기 바란다."
했는데, 이는 일세(一世)를 흥기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미담(美談)이 되고 있다.
노인을 우대하는 의리는 상례를 뛰어넘어 위로 조신(朝臣)에서부터 아래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壽)한 것으로 벼슬에 오른 사람이 전후 매우 많았다. 나이가 많아 80세에 이른 사람은 남녀 귀천을 막론하고 해마다 존문(存問)하고 쌀과 술 등의 물품을 넉넉하게 지급했으며 90세와 1백 세가 된 경우에는 자급을 뛰어넘어 제수하고 명주와 솜을 더 주고 호역(戶役)을 면제시켰다. 이는 여생이 많지 않으므로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1백 세가 넘은 서인(庶人)이 있으면 액정서(掖庭暑)의 사람을 시켜 업어다가 전상(殿上)에 초치시키고 진수 성찬을 먹였으며 철따라 생산되는 물건도 끊이지 않게 보내주었다. 만수연(萬壽宴)이 있은 뒤 하교하기를,
"사경(四境) 안에 있는 나의 백성들의 부모로서 나이가 늙었는데도 잘 봉양받지 못하는 경우가 어찌 한둘이겠는가. 이는 나의 책임이다. 중외로 하여금 쌀·반찬·술을 하사하여 나의 추기급인(推己及人)하려는 뜻을 몸받게 하라."
하였다. 측은하게 여기는 전지(傳旨)에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활달한데다가 매우 명석하고 신중하였기 때문에 옥사(獄事)의 판결에 의혹이 없게 하였다.
신묘년038) 겨울 역적 김자점(金自點)의 옥사가 있을 때 왕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직접 국문했는데 역적의 아들 김식(金鉽)이 승복하면서 곧바로 함께 모의한 무장(武將)을 끌어들였고 계속해서 사대부를 고발하는 등 널리 파급되었다. 왕이 문사 낭관(問事郞官)을 시켜 다시는 동당(同黨)에 대해 묻지 말게 하니, 이에 의구심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김식이 말하기를,
"일찍이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모사(謀事)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 운운했는데, 이때 형장이 연경(燕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국청에서 이를 비밀에 부친 채 발설하지 않았다. 다음해 3월에 형장이 의주(義州)에 도착했는데, 대신이 은밀히 청하여 급히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니, 온 조정이 그로 인하여 화란이 초래될까 우려하였다. 이는 적역(賊譯)이 정역(鄭譯)과 서로 표리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엄히 국문하여 거열형(車裂刑)에 처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처음에 김자점의 적소(謫所)인 광양(光陽)으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서를 수색하여 오게 했으므로 조사(朝士)들의 간찰(簡札)과 곤수(閫帥)·수령 들의 서신이 모두 금중(禁中)으로 들어왔다. 그 내용에는 원망하는 말과 흉악스런 자취가 또한 환히 드러난 자도 있었지만 모두 안에 머물려 두고 내리지 않았다. 뒤에 연신(筵臣)이 이에 대해 아뢰니 왕이 답하기를,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미 불태워 버렸다."
하였다. 이는 옥사가 번질까 저어해서였다. 대역(大逆)을 주참(誅斬)하고 나면 으레 하의(賀儀)가 있는 법인데, 왕이 이르기를,
"원훈(元勳)이 반역(反逆)을 하였으니, 부끄러울 뿐 축하해야 할 의의가 없다."
하고, 드디어 받지 않았다.
서옥(庶獄)에 대해서도 삼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서전》의 전형(典刑)을 게시한다는 대문(大文)을 읽으면서 이르기를,
"‘어찌하여 후세에는 법망이 이리도 조밀하단 말인가.’라고 한 것은 송 태왕(宋太王)의 말이 아닌가."
하고, 여형편(呂刑篇)을 읽으면서는 또한 경신(敬愼)해야 한다는 뜻으로 형관(刑官)에게 면유(面諭)하고, 또 하교하기를,
"형벌은 정치를 보조하는 도구이다. 성인(聖人)도 부득이 쓰기는 했지만, 반드시 지공 무사(至公無私)하여 한결같이 공평한 마음에 의하여 하였다. 그런 뒤에야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형을 받는 사람이 많은데도 실정을 자백하는 사람은 없으니, 정치를 보조한다는 의의가 너무도 없다. 간혹 1차의 형신을 받고 잇따라 치사(致死)되는 경우가 있으니 형벌을 가함에 있어 흠휼(欽恤)한다는 도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이리하여 형조의 당상들이 아울러 추고받고 감죄(勘罪)되었다.
매양 혹한기와 혹서기가 되면 승지를 보내어 전옥(典獄)을 점검하게 하여 먼저 죄가 가벼운 죄수는 방면시키게 하고 금부와 형조로 하여금 즉각 소결(疎決)하게 하였다. 세시(歲時)에 임하여서도 이렇게 하였다. 외방의 감사가 혹 형벌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게 한 경우가 있으면 이미 지난 일이라는 것으로 다스리지 않은 적이 없이 반드시 나문(拿問)한 뒤에 죄주었다.
임진년039) 겨울 교형(絞刑)에 처해야 될 죄인은 으레 몽둥이로 때려 죽인다는 말을 듣고 이에 하교하기를,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자못 율명(律名)의 본의가 못 된다. 내가 매우 참혹하게 여기고 있으니 형관으로 하여금 살펴서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이로부터 응당 교형에 처할 사람은 목매어 죽였다. 형조가 이미 삼복(三覆)을 거치고 난 다음 죄인들을 율(律)에 의거해 처단하려 할 때,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따뜻한 기운이 봄 같고 장맛비가 그치지 않고 있으며 짙은 안개가 사방에 꽉 끼어 있으니, 나의 마음이 송구스럽다. 사수(死囚) 10여 명을 모두 오늘 복법(伏法)시키려고 하는데, 삼복(三覆)의 의언(議讞)을 거쳤어도 미진한 점이 있는가 우려스러워 다시 경들에게 묻고 싶다."
하니, 신하들이 모두 찬성하였으므로 다시 의언하였다. 그리하여 특별히 두 명에게 사형을 감해주었다.
갑오년040) 12월에 사관(史官)이 명을 받들고 전옥을 살핀 다음 서계하기를,
"죄수 가운데 8명은 의상(衣裳)이 홑옷이고 얇은 것이 더욱 극심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렇게 추운 계절에 나의 백성이 법금에 저촉되어 추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밥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옷도 몸을 가리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불쌍하고 딱하게 여겨 회포를 가눌 수가 없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유의(襦衣)를 지어 주게 하고 또 땔감과 숯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또 모든 도에 유시하여 각 고을의 죄수들에게 땔감과 숯을 두루 지급하여 얼어 죽는 걱정을 면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승지에게 이르기를,
"누차 형벌에 신중을 기하라는 하교를 내렸는데도 중외의 신료(臣僚)들이 잘 봉행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곤수와 수령 등이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사죄(死罪)가 아닌데도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으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한 것이기 때문에 사죄를 범했더라도 오히려 재복(再覆)·삼복(三覆)을 거쳐 의논하면서 차마 갑자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한때의 노여움 때문에 지나치게 써서는 안 될 형장을 가하여 사람을 죽게 만드니, 국법으로 볼 때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의당 팔도의 곤수 이하 여러 장령(將領)들과 수령들에게 하유를 전하여 멋대로 형장을 쓰지 말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흠휼(欽恤)하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정유년041) 겨울 당진(唐津) 사람 이정(李珽)의 무고(誣告)가 있었을 적에 설한(雪寒)이 바야흐로 혹독했었는데 호우(湖右)의 사민(士民)으로서 체포된 사람 가운데 춥고 배고픈 백성들이 많았었다. 왕은 공사(供辭)를 한번 보고는 곡직을 환히 분변하여 고발한 자를 주참하고 무고당한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게 하였으며 유사로 하여금 추위에 떠는 사람은 옷을 입혀 주게 하고 사람마다 모두 가면서 먹을 양식을 지급해 주게 하니,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며 감축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다. 전후의 무옥(誣獄)을 모두 즉시 통쾌하게 결단하여 연루되어 억울함을 당하는 걱정이 없게 하였다.
누차 변란을 겪어 사율(師律)이 실추되어 문란해졌으므로 인조조(仁祖朝)에 영장(營將)을 설립했었으나 곧 파하고 행하지 않았었다. 왕은 선조(先朝)의 옛 제도를 다시 설치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이에 양호(兩湖)의 오영(五營)과 영남 좌우도의 모든 진(鎭)에 각각 영장을 설치하여 관할 내의 군졸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일이 있기 전에 대비하는 것을 전일하게 하였다.
훈국(訓局)의 무장(武將)과 포병(砲兵)도 전에 비해 액수를 증가시켰고, 어영(御營)의 군졸도 부오(部伍)를 나누어 교대로 상번하게 하여 각기 조리가 있게 되었으며, 삼남(三南)의 편오(編伍)에게도 복호(復戶)해 주게 하였다.
각시 노비(各寺奴婢)에 대해 추쇄(推刷)를 행하지 않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도망하거나 물고(物故)된 허실을 전연 분별할 수 없어 그저 빈 장부만 걸어두고 있을 뿐이어서 누락되어 빠진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은 고헐(苦歇)이 고르지 않으면 법령을 의거할 데가 없게 된다는 이유로 을미년042) 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추쇄하였다. 그리고 어사(御史)를 보내어 조사했는데, 양민(良民)이 되어 있는 경우는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세월이 오래되었으면 탕척시켜 주었으며, 원통한 사람이 진소(陳訴)하면 상세히 살펴서 억울함을 풀어 주었으며, 한 호(戶)에 정(丁)이 많은 경우에는 헤아려 감하여 주고 쌀이나 베 등 그곳의 토의(土宜)에 따라 받아들이게 하였다. 남중(南中)은 받아서 각주에 유치하여 두고 군수에 지급하여 쓰게 하였으며, 서로(西路)는 받아서 경용(經用)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의 급선무는 근본을 힘쓰는 것이므로 늘 하교하기를,
"과거에 연경(燕京)과 심양(瀋陽)으로 가는 길에 농사짓는 일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관개(灌漑)에 쓰이는 것으로는 수차(水車)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전연 이 제도를 모르고 있다. 그 제도를 이제 조당(朝堂)에 내리니 편리 여부를 살펴 외방에 전포(傳布)시킴으로써 농사를 권면하는 데 일조가 되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한인(漢人)의 제도였다. 공주 목사 신속(申洬)이 농서를 편찬하여 판각한 다음 인쇄하여 진상하니, 가상히 여겨 포장(褒奬)하고 상을 주었다. 그리고는 해조에 명하여 많이 인쇄하여 널리 유포시키게 하였다.
민폐의 제거에 힘썼고 매양 능(陵)을 살필 때가 되면 더욱 부지런히 돌보아 유념하였다. 경인년043) 가을 장릉(長陵)에 행행하려 하면서 하교하기를,
"산릉에 배알하지 못한 지 2년이 되어가고 있어 상로(霜露)의 감회를 가눌 수가 없다. 따라서 이번의 행행이 있게 되었으나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피로한 상황인데, 더구나 삼사(三使)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가 하면 또 중국 사신이 나온다는 선성(先聲)이 있다. 내가 걸어서 갔다 올 수는 없겠지만, 민력을 수고롭게 하고 민재를 허비해 가면서 도로와 교량을 닦고 만들게 할 수 있겠는가. 해읍의 수령은 대가(大駕)를 인도(引導)하지 말고 감사는 거느리는 사람을 간략하게 하여 양식을 싸가지고 가게 하라. 이를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법으로 제재를 가하겠다."
하고, 이어 대신 이하에게도 스스로 마른 양식을 가지고 가 여러 고을에 폐단을 끼치지 못하게 하였다. 대가가 신원(新院)에 이르렀을 때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종신들이 머물러 있는 곳을 살펴보게 했는데, 각 고을의 인리(人吏)를 부리고 공궤(供饋)를 받는 사람도 있었고, 시위하는 군병들이 전지를 밟고 다녀 곡식을 손상시킨 경우도 있었다. 가까운 능에 행행할 때에는 대주정(大晝停)·소주정(小晝停)을 진설하지 말고 한 곳에만 진설하도록 명하였다.
백성들의 굶주림과 전염병을 구휼할 적에는 타는 불을 끄는 것같이 하였다. 기축년044) 북도(北道)에서 전염병을 앓아 사망하는 사람이 서로 잇따랐다고 치계(馳啓)하니, 납제(臘劑)·청소(淸蘇) 및 각종 좋은 약재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온 도내에 흉년이 들었는데 육진(六鎭)이 더욱 극심하다고 아뢰니, 이에 영동(嶺東)의 곡식을 옮겨 가게 하라고 명하였으므로 배로 운송하는 역사(役事)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부역을 크게 줄였고 내수사에 공납하는 물품도 모두 견감시켰으므로 굶주려 죽은 백성이 없었다. 경인년에 여항(閭巷)에 전염병이 크게 치성하자 동서의 활인서에 엄히 계칙하여 마음을 다하여 치료하게 하였으며, 관에서 미곡을 지급하여 먹이는 한편 의사(醫司)로 하여금 이성구고환(二聖救苦丸)을 많이 제조하여 요절하는 것을 구제하게 하였다.
양서(兩西)와 기전(畿甸)에 참역(站役)이 편중되었기 때문에 창고의 곡식을 풀어서 삼로(三路)의 참 가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진구하게 하고 관에서 요미(料米)를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내수사의 미포(米布)·피물(皮物)과 그에 소속된 염분을 민조(民曹)에 내주어 백성의 세금을 가볍게 해 주었다. 내국(內局)의 부용향(赴蓉香)은 국휼(國恤)이 있을 때까지 쓰지 말게 하였으며, 또 내공(內供)하는 술을 감하여 5일에 한 병씩만 바치게 하고 구급에만 쓰게 하였다. 이때 우황(牛黃)의 값이 날개 돋힌 듯이 치솟았으므로 이를 공납하는 고을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의 제조의 계달을 인하여 우황·웅담은 아울러 그 숫자를 헤아려 감하게 하였다. 인삼도 임시로 감하게 하였는데, 상·중·하 3품을 정하여 상품은 따로 한 상자를 담아서 어약(御藥)으로 공급하게 하고 중품은 사여(賜與)하는 데 쓰게 하고 하품은 원중(院中)에서 구급을 요할 때 쓰게 하였기 때문에, 도로 물리는 경우가 아주 적어 외방에서 크게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방물(方物)의 진헌도 2년까지 받지 않게 하였다.
신묘년045) 세자의 가례(嘉禮)를 행할 적에는 회례연(會禮宴)을 중지하게 하였으며, 드디어 내명부(內命婦)·외명부(外命婦)의 상(床)에 진설하는 꽃송이 1백여 가지를 감하게 했으며, 다른 것도 비용을 감한 것이 매우 많았다.
임진년046) 호남(湖南)에 기근이 들자 매달 새로 생산되는 찬선(饌膳)을 올리게 되어 있는 것을 가을 추수 때까지 바치는 것을 정지하게 하였으며 공상지(供上紙)와 백면지(白綿紙)도 감하게 하였다. 뒤에 본도에 전염병이 돌아 폐농되었다는 말을 듣고 방백에게 하유하여 진구하여 살릴 수 있는 방도를 극진히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족(隣族)으로 하여금 묵은 전지(田地)를 가꾸게 하였다.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에 흉년이 들었을 적에 더욱 심한 고을은 세금을 완전히 면제시켰으며, 북도(北道)와 양서(兩西)에는 등급을 나누어 사조(賜租)하였으며, 임금에게 올리는 선어(鮮魚)도 임시로 감하게 하였다. 겨울에 사옹원이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또 계속해서 두어 해 동안 감할 것을 명하였다. 사옹원이 받아들이는 생어물(生魚物)과 건어물(乾魚物) 가운데 퇴짜놓는 폐단이 많자 척량(尺量)의 한계를 감하도록 명하고 교활한 짓을 하는 것을 통렬히 금하였다.
계사년047) 에 육진(六鎭)과 삼수·갑산이 극심한 재해를 입자 1년 동안의 조세(租稅)를 감면시켰다. 내자시(內資寺)의 공물을 이미 감면시켰기 때문에 3월 3일의 병식(餠食)은 대비전에만 올리게 명하였는데도 내자시에서 대전에도 아울러 올리니, 이에 그 관원을 파직시켰다. 예조가 각도의 삭선(朔膳)을 다시 설치하게 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삼남(三南)에 여역이 아직도 치성하여 놀랍고 두려움이 실로 절실한데 무슨 마음으로 삭선의 진상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고, 내년의 탄일(誕日)에 있을 방물도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전남 감사가 추함(推緘)에 대해 올린 함답(緘答) 내용에,
"납향(臘享)에 진공(進供)하는 노루를 각 고을에서 산 채로 잡아 감영(監營)에 보내고 있습니다."
한 것이 있었는데 왕이 하교하기를,
"그 폐단이 작지 않아 내 마음이 불안하니, 납향을 지내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
하고, 해도(該道)로 하여금 그 뒤로는 생포하여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
을미년048)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강계(江界) 등 25개 고을이 재해를 입자 조정에서 세금의 삼분의 일을 감면시켰는데, 감사가 다시 더 감해 줄 것을 청하니 호조에서 어렵게 여겼다. 그러자 특별히 다 감면시켜 주도록 명하였다. 하삼도(下三道)와 동북 양도(兩道)에서 무술년과 기해년에 공납할 세폐(歲幣)의 차목(次木)이 모두 9백 40여 동(同)이고 기해년 삼남(三南)에서 공납할 상폐목(上幣木)이 88동이었는데 이를 모두 감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숫자는 새로 추쇄한 노비들의 공목(貢木)으로 충당시켰다.
북쪽 변방에서 곤궁한 나머지 자식을 낳아도 기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랍고 불쌍하게 여겨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잘 타일러 엄금하게 한 다음 각 고을의 자식을 낳은 사람에게 쌀과 장(醬)을 지급하도록 계칙하고 이를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였다.
호서(湖西)가 임진 왜란 때에 병화(兵禍)를 당하지 않은 탓으로 대신 타도(他道)의 부역(賦役)을 감당했었으므로 본디 편중되었다고 일컬어졌었다. 신묘년에 상신 김육(金堉)의 의논을 써서 대동법을 행하게 되면서 1결에 10두씩을 거두어 들여 경외(京外)의 비용에 이바지하게 하고 다른 요역(徭役)은 없게 하자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하늘이 견고(譴告)를 보이는 변이 발생하면 계구(戒懼)가 간절하고도 지극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자문함으로써 재이를 없앨 방도를 강구하였고 자기 한 몸을 죄책함으로써 사방에 구언(求言)하였다. 피전(避殿)하고 감선(減膳)했을 뿐만이 아니라 또 반드시 억울한 것을 풀어주고 잘못된 것을 고쳐 주었다. 그리하여 왕옥(王獄)의 중한 죄수도 사형을 용서받는 경우가 있었다.
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는 그 고통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여겨 비를 비는 데 쓰는 희생(犧牲)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매양 제물을 깨끗이 준비하여 몸소 사사(祀事)를 행하였는데 아무리 타는 듯이 뜨거운 무더위라 해도 관을 벗거나 허리띠를 푼 적이 없이 밤까지 계속하였으므로 그 지성에 감동되어 단비가 금방 내리기도 하였다.
무술년049) 6월에 병을 앓기 시작하여 점점 심하여졌다. 7월에 대신(大臣)들을 연견(延見)하였는데, 왕이 전남의 바닷가 백성들에게 부역이 치우쳐서 고통스럽게 가해지고 있다고 하여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대동법을 호서에서처럼 설행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기해년050) 봄에 또 가뭄이 들어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었으나 우근(憂勤)으로 피로가 겹친 상태에서도 자주 신료(臣僚)들을 접견하여 빠진 계책이 없이 강구하여 곡식을 옮기고 부세를 견감시키는 등 마음을 극진하게 쓰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진휼하는 즈음에는 우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부터 하였으며 경외(京外)에서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였다. 또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마을 사이를 출몰하면서 그 근만(勤慢)을 살피게 하였으며 겸하여 고질적인 폐단을 묻게 하였다. 간절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하교가 계속하여 내려지고 신칙시키는 명령이 잇따라 하달되었으므로 대소 관리들이 뛰어다니면서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보리가 날 때까지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없었다.
군병들의 원통함을 순문(詢問)하니, 백골(白骨)에게 베를 징수하기도 하고 어린 아이를 군정(軍丁)에 충정(充定)시키기도 하고 늙었는데도 면제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어 억울한 고통이 더욱 극심하였다. 왕은 흉년이 들어 부역을 감면시키는 때에 이들에게만 유독 그대로 징수하는 것은 차별없이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의의가 아니라고 하여 이에 비국으로 하여금 먼저 제도(諸道)의 감영에 저축된 포목(布木)의 숫자를 묻게 하고 바야흐로 마땅한 바를 헤아려 은혜를 베풀려고 하였는데 미처 완료하지 못하였다. 4월 20일 뒤에 병에 감염되었는데도 기우제를 설행하도록 명하였으나 미령하여 직접 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감히 스스로 마음에 편안할 수가 없어 드디어 외각(外閣)에서 재숙(齋宿)하였고 손상을 받아 병이 더하는 것을 돌보지 않은 채 한데 서서 하늘에 빌었으며 하루가 가고 밤이 새도록 관건을 벗지 않았다. 5월 4일 병세가 매우 위독해져 창덕궁(昌德宮)의 정침(正寢)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춘추는 41세였고 재위 기간은 11년이었다.
도성(都城)의 사녀(士女)들이 눈물을 비처럼 흘리고 우레처럼 통곡하였으며 한산(閑散)한 부류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태학(太學)·사학(四學)의 생도들과 교기(郊畿)에 거처하는 사대부로서 달려와서 아침 저녁 궐문 밖에서 슬피우는 사람들이 이루 다 셀 수 없었는데 성복(成服)한 뒤에야 비로소 물러갔다. 진구받았던 기민(飢民)들도 서로 이끌고 달려와 통곡했는데, 외방에서 온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궁벽한 시골 마을의 어리석은 백성들도 관정에 달려와 모여 부모가 돌아간 것처럼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염습(斂襲)할 때 대신·예관·정원·삼사가 입시했는데, 예(禮)이다.
왕은 영명(英明)하고 특달(特達)하고 강의(剛毅)하고 관후(寬厚)하였으며, 엄하고도 인자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으며, 불세출(不世出)의 자질로 큰 일을 할 뜻을 품었다.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모유(謨猷)는 개연(愷然)히 옛 도를 사모하였고 입술이 타고 혀가 마르도록 밤중에 일어나 탄식하였다. 유전(遊畋)과 성색(聲色)의 즐거움을 하나도 마음에 둔 적이 없었으며 위로 하늘의 경계를 근신(謹愼)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곤궁함을 딱하게 여겨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뜻이 독실하였다.
홍문관으로 하여금 《대학연의》의 숭경외(崇敬畏) 상하 권을 빼내어 합쳐서 한 책으로 만들고 빈풍장(豳風章)과 무일편(無逸篇)을 아울러 병풍을 만들어 거기에 써서 들여오게 하였다. 《주례(周禮)》의 십이황정(十二荒政)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있는 육정 육사(六正六邪)와 《한서(漢書)》의 자사 육조(刺史六條)도 베껴 써 오게 하여 한가할 때 열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겼으며 어진이는 목마른 듯이 구하고 재능이 있는 이는 재빨리 발탁하였으며 어진이들이 띠풀처럼 무리지어 나아왔으므로 재야에는 빠진 인재가 없었으며 선행과 절개를 표창하여 드러내어 명성을 심었다. 심지(心志)에 보존되어 있는 것은 곧 국력을 부지하여 기르고 백성을 변화시키는 공이었고, 시조(施措)에 발현된 것은 모두 근본을 공고하게 하고 국운을 영원하게 하는 방법이었으며, 아랫사람을 인접하여 수작(酬酢)함에 있어서는 표리(表裏)가 환히 드러나게 하였고, 연석(筵席)에 임어하여 문답함에 있어서는 깊고 은미한 곳까지 세밀히 분석하였으므로 비록 홍유(鴻儒)라 할지라도 따라갈 수 있는 의견이 없었다. 문장(文章)에 이르러서는 말을 하면 그대로 아름다운 글을 이루어 저절로 전칙(典則)이 완성되었으며 진초(眞草)의 서법(書法)은 새가 날듯 기묘함을 이루었으나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고 말하는 사이에도 결코 언급한 적이 없었다.
평일 담론한 것은 오직 전모(典謨)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성현의 글과 고금의 흥망에 대한 근원 및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제하는 방책에 관한 것뿐이었다. 용잠(龍潛)으로 있을 때는 술을 한없이 마셨으나 저위(儲位)에 오르면서부터는 결코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항상 아랫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크게는 천하와 국가를 잃고 작게는 필부의 일신을 망치는 것이 술에서 생기는 일이 많은데, 관직에 임한 사람의 경우는 본래 말할 것도 없다. 술로 인해 말을 실수하는 데에서도 화를 자초하기에 이르기 일쑤이니, 이보다 더 심한 해로움이 어디 있겠는가. 근래 사대부들 사이에 명류(名流)라고 호칭되는 사람들이 술 마시는 것을 가지고 서로 훌륭하게 여기면서 마치 진(晋)나라의 풍속에서 예의를 지키지 않고 방임하는 것으로 명망을 얻었던 것처럼 하고 있다. 선부(選部)를 맡은 사람은 주의(注擬)할 즈음에 이러한 무리들은 다른 사람에 우선하여 기용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작년에 병이 위독하여져 수저를 들지 않았으므로 외방의 특이한 별미(別味)를 올려 권하였으나 드시려 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내 구복(口腹)을 충족시키기 위해 백성들을 동요시켜 지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송(迎送)의 폐단을 염려하여 진상(進上)을 삼가지 않는 수령들에 대해서도 파출(罷黜)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약을 먹으면서 병을 치료하는 상황이었지만 한결같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
무술년051) 겨울 병이 조금 낫자 예관과 대신들이 누차 진하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악정자(樂正子)가 발을 삐었을 적에 다 나은 후에도 수개 월 동안 나오지 않으면서 자신의 불찰이었다고 걱정하는 안색을 지었던 것처럼 하면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굶주림을 걱정하여 옥체(玉體)가 병들었다는 것도 잊었는데, 거의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오히려 마른 곡식이 소생토록 비를 내려줄 것을 빌었으니, 이는 실로 지극한 성품이 하늘이 심어준 데 뿌리하고 있는 것으로 억지로 힘쓴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신민들이 더욱 깊이 슬퍼하는 것은, 11년 동안 정신을 가다듬고 수성(修省)하느라고 편안히 쉴 겨를이 없었던 탓으로 한 해도 향공(享供)을 받은 때가 없었고 단 열흘이라도 근심하여 괴로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바야흐로 훌륭한 통치를 도모하여 미처 풍동(風動)시키기도 전에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어진이라면 반드시 얻어야 할 수명(壽命)을 끝내 하늘이 아낌으로써 답답한 한을 품은 채 지닌 웅지를 펼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바로 그 점이었다. 이는 그야말로 우리 동방의 끝없는 통한인 것이다.
아름다운 행실과 위대한 규범은 사서에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고 광대한 규모와 아름다운 법제는 영갑(令甲)에 환히 드러나 있다. 하늘에서 타고난 대효와 어진이를 예우하는 지성은 곧 상(商)·주(周) 때보다 뛰어났고 인성(仁聲)과 덕택(德澤)이 사람에게 깊이 박힌 것은 천만 세를 흘러 전하여가도 쇠하지 않기에 충분하다. 옛날의 사실을 상고하여 보아도 들어보기가 드문 업적이었다. 아, 성대하고도 통한스럽기 그지없다.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영돈녕부사 신(臣) 이경석(李景奭)이 전교를 받들어 지어 올렸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94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註 001]기미년 : 1619 광해 11년.
- [註 002]
병인년 : 1626 인조 4년.- [註 003]
신미년 : 1631 인조 9년.- [註 004]
을해년 : 1635 인조 13년.- [註 005]
악실(堊室) : 거상자가 거처하는 방.- [註 006]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007]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註 008]
갑신년 : 1644 인조 22년.- [註 009]
삼조(三朝) : 세 번 부모에게 문안함.- [註 010]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011]
경인년 : 1650 효종 원년.- [註 012]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013]
정유년 : 1657 효종 8년.- [註 014]
상체(常棣) :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어떠한 역경에 처하여서도 형제 사이에 화락(和樂)한 우애(友愛)를 지닌 것을 노래한 내용임.- [註 015]
병신년 : 1656 효종 7년.- [註 016]
무술년 : 1658 효종 9년.- [註 017]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18]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019]
경인년 : 1650 효종 원년.- [註 020]
삭서(朔書) : 매달 시험하는 글씨 시험으로, 승문원으로 하여금 40세 이하의 당하(堂下) 문신(文臣)을 초록(抄錄)하게 하여 해서(楷書)와 전서(篆書)를 시험하는 것.- [註 021]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註 022]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023]
계사년 : 1653 효종 4년.- [註 024]
갑오년 : 1654 효종 5년.- [註 025]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026]
강중(江中)의 추악한 이야기 : 항우(項羽)가 은밀히 형산왕(衡山王)과 임강왕(臨江王)을 시켜 의제(義帝)를 강 가운데서 살해한 것을 말함. 《사기(史記)》 항우 본기(項羽本紀).- [註 027]
국을 나누어 달라고 한 이야기 : 한 고조(漢高祖)의 아버지 태공(太公)과 아내 여후(呂后)가 항우(項羽)에게 포로가 되어 있었는데, 항우가 광무(廣武)라는 곳에서 유방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큰 도마 위에 태공을 올려놓고 ‘항복하지 않으면 태공을 삶겠다.’고 위협하니, 유방이 ‘국을 끓이거든 나에게도 한 그릇 나누어 보내라.’고 했던 일을 가리킨 말임. 《사기(史記)》 항우 본기(項羽本紀).- [註 028]
병신년 : 1656 효종 7년.- [註 029]
정유년 : 1657 효종 8년.- [註 030]
무술년 : 1658 효종 9년.- [註 031]
한세충이 나귀를 타고 서호(西湖)에 노닌 일 : 한세충(韓世忠)이 간신(姦臣) 진회(秦檜)에게 배척당하여 웅지를 펴보지 못한 채 고향에 있는 서호를 나귀타고 술병차고 유람하면서 유유 자적하게 만년을 보낸 일을 말함.《송사(宋史)》 권364 한세충전(韓世忠傳).- [註 032]
막수유(莫須有) : 분명하지 않은 일로 남을 무함하는 것을 말함. 송나라의 진회가 악비를 무함하여 옥사(獄事)를 일으켰을 적에, 한세충이 진회에게 범죄 사실을 따지자 진회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답한 데에서 온 말임. 《송사(宋史)》 권365 악비전(岳飛傳).- [註 033]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34]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035]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036]
치의(緇衣) : 《시경(詩經)》 정풍(鄭風)의 편명(篇名)인데 치의는 경대부(卿大夫)들이 사조(私朝)에서 입는 옷으로, 천자가 신하를 사랑하여 옷을 지어준 것을 노래한 내용임.- [註 037]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038]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039]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040]
갑오년 : 1654 효종 5년.- [註 041]
정유년 : 1657 효종 8년.- [註 042]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043]
경인년 : 1650 효종 원년.- [註 044]
기축년 : 1649 효종 즉위년.- [註 045]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046]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047]
계사년 : 1653 효종 4년.- [註 048]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049]
○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行狀:
國王諱淏, 字靜淵, 仁祖大王之第二子, 元宗大王之孫。 母妃仁烈王后 韓氏, 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 浚謙之女, 生王于鄕校洞潛邸, 己未五月二十二日亥時也。 是夕白氣三條, 飛入寢室, 凝着西偏窓櫳間, 似烟非烟。 久而乃散, 見者異之而已。 王生四五歲, 性度豁達, 屹然有巨人之志。 遊戲之際, 事多不凡, 行步必有法度。 初見節果, 先必獻兩殿, 然後嘗之, 兩殿常謂吾家孝子。 每日未明, 輒先起問安于 兩殿, 仍侍左右。 凡兩殿服用之物, 侍御者, 藏排或未齊整, 則王必親自正之。 雖微細之事, 惡其不正, 類如是, 故兩殿及仁獻王后, 俱奇愛之, 眷重特隆焉。 甫五歲受書, 不勸而勤, 如見他兒之厭讀, 必勸令勤學。 常讀前史, 至人倫殘忍處, 未嘗不掩卷而傷歎。 蓋自幼沖, 天性然也。 八歲丙寅, 封鳳林大君, 辛未行嘉禮, 王妃, 故右議政新豐府院君 張維之女, 大族法家也。 乙亥十二月仁烈王后上仙, 王處私第, 居堊于中門之外, 執喪盡制, 不食爪菓, 所侍者, 只僕隷數三輩。 哀戚之節, 服禮之篤, 人莫不咨嗟悅服。 丙子纔過祥朞, 猝遌大難。 仁祖命王與麟坪大君, 先往江都, 行至中路, 勢益危急, 聞大駕入南漢, 王夜獨與數三奴僕, 馳赴行在。 途逢御札, 仍入江都。 夜觀天象, 以占時事, 日夜東望戀慕, 每當寢食, 輒思行在涼薄, 爲之泣下。 欲探行宮消息, 捐出橐中金帛, 募士屢遣, 而道阻未入, 只二人得達。 其一乃宮奴也, 得奉御札以歸, 皆謂之至誠所感。 丁丑正月, 江都見陷, 二月偕昭顯世子, 入質瀋陽。 自從北行, 益切戀闕之懷, 聞仁祖大王有不安節之候, 則憂形于色, 語及起居之儀, 涕淚先下, 傍人亦感動。 與昭顯世子, 同處一館, 兄弟之間, 誠愛備至, 其間雖有難處之事, 周旋盡誠, 無幾微見於外, 和氣譪然, 人無間焉。 且淸人攻山海關之時, 欲與昭顯世子同行, 王極力言之於衙門, 請以身代行, 辭語懇惻, 淸人感而止。 後亦輒請自行, 與昭顯同往者再。 甲申春, 淸國入北京, 乙酉春, 昭顯世子大歸, 未幾疾作殂逝。 王繼而出還, 仁祖以國有長君, 社稷之福, 乃詢諸大臣列卿, 遂定策立爲世子, 國人皆欣然相慶。 王始聞命, 涕泣上章懇辭, 仁祖答曰: "以爾聰明孝友, 故特用兄亡弟及之禮, 爾其勿讓, 益修孝悌之道, 視兄子猶己出。" 再辭也, 又答曰, "予志先定, 詢謀僉同, 爾毋固辭, 敬守道心。" 王在瀋時, 相人者見王, 竊相語曰, "眞王者" 云。 及入燕, 一日困臥, 忽有五色之氣, 凝滿寢室, 壁間有一龜出頭, 而體甚巨。 王疑夢諦視之, 非夢也。 至是, 相者之言驗焉, 龜亦有知也歟。 涓吉以九月二十七日, 有司備宮儀具仗衛, 迎于潛邸, 行冊禮於仁政殿庭, 嬪宮受冊於內庭。 翼月謁先聖, 行入學禮, 冠儒冠、服儒服, 就博士席, 講《大學》, 討論良久, 圜觀者莫不悅服。 廼下令瀋來牛羊, 盡與關西, 俾補公用。 王素好學, 自就外傅, 業益進, 早通經史。 雖在泥露之中, 未嘗不典于學, 曉窓寒燈, 吾伊不輟, 其書卽《書傳》也。 聞者爲之欽歎。 及入燕京, 淸國以其所獲金玉錦繡分遺, 而王辭不受, "願以我國俘擄代之", 淸人義而從之。 惟留意經籍, 古今書史之外, 凡殊環珍貨, 絶不近之。 歸時, 行李獨淡如也。 育德春闈, 日親賓僚, 三朝之餘, 講劘孜孜。 乃令宮官, 取《書》之無逸, 《詩》之七月及古箴銘等書, 書屛以張, 而常目之。 己丑五月初, 仁祖大漸, 王割手指, 出血以進, 逮不諱, 處地哭擗, 水奬不進。 禮官以嗣位禮節聞, 王拒之以不忍。 大臣近臣, 更請不許。 三司連啓, 大臣率百官庭請始許。 而行禮之日, 日晩不出, 禮官申請乃出, 淚下如雨。 侍臣百官, 皆嗚咽不敢仰視。 步出宣政殿東夾門, 通禮請御小輿而却之。 至仁政門御座前, 久立不陞, 大臣令禮曹判書趨而進請陞, 然後乃陞。 禮罷, 步入仁政殿, 纔入門而痛哭, 聲徹于外。 諫院啓請: "卒哭前視朝, 一依舊例行之", 答以 "情禮之所不忍爲。" 屢請不從。 禮曹啓: "議儲宮卒哭前書筵服色", 王曰: "經者, 萬世之常, 不可以一時之故, 便用權道, 而況孝悌之道乎。 予惡夫末世之純用權道也。" 遂不許。 九月發引後, 政院請寢陵幸, 答曰: "昨於郊外, 瞻望靈輿, 擬盡眼力, 少紓晷刻之痛, 行帷奄隔, 無處更望。 歸來則殿宇閴寂, 無所依恃, 少慰此懷者, 只有復詣山陵, 以盡罔極之痛耳。 今見此啓, 豈特今日之痛。 實是與天地無窮之痛也。" 諸大臣力請而停之。 反虞日, 迎哭于西郊, 輿臺下賤, 亦皆痛哭。 永思殿朔望節日, 行禮必躬, 隆寒盛熱, 亦罔或寢。 庚寅秋, 往省長陵, 伏而哭盡哀, 贊禮請止, 不止。 登降之際, 哭聲不絶。 辛卯六月, 命停祔廟後陳賀, 臺臣及群臣, 援古請行甚懇, 終讓不許。 時太廟修改塗壁, 有司不能辦, 未卽告完, 列聖神位, 久於移安之所。 王懼無以妥靈, 不敢寧處, 下坐殿廊, 以竢還安。
政院啓請還御殿上, 答曰: "太廟神靈安而後, 寡躬亦得以安。 今廟主露處, 安敢放心安居乎。" 廟主奉還, 然後陞殿。 壬辰王謂筵臣曰: "人主或有病故則已, 若無故, 則當依國典, 親行四時祭可也。" 又謂禮曹判書李厚源曰: "在昔祖宗朝, 每年展謁祖宗陵寢, 揆以情禮, 在所不已。 廼以春之二三月、秋之七八月, 輪回展謁, 永爲恒式。 丁酉講《詩傳》蓼莪篇, 王曰: "詩本性情, 故能令人感發懲創, 而讀《詩》至此, 不覺嗚咽, 每讀一句, 聲音悽惋。" 辭意懇惻, 左右臣隣, 皆伏而流涕。 其奉先永慕之誠如此。 王孝友天至, 夐超前古, 實匹士之曾、閔, 帝王之舜、文。 大妃趙氏有宿疾, 王奉養隆郅, 衛護備悉, 得以平安。 又以燕處僻隘, 不宜冬夏, 爲營新殿, 額以萬壽, 朝夕省侍, 志物兼盡。 國典上壽于大妃, 稱以豐呈, 王欲一設行, 而歲敝民罷, 且以天變, 將擧旋止者屢矣。 丁酉冬, 略具宴儀, 名曰進宴。 壽大妃于萬壽殿, 儀略而禮備, 和氣融融, 中外皆爲之欣悅。 是年秋, 王行展孝陵, 昭顯之墓不遠, 將遣官致祭, 已而下敎曰: "向夢昭顯, 色甚喜如平昔, 謂或偶然。 今又夢見, 而語及未能躬奠, 則執余手有悵然之色。 覺來怳若平生, 悲懷難狀。 日晷雖短, 欲紓此懷。" 展謁之後, 乃簡其從官而親奠焉。 與麟坪大君 㴭, 自幼時宿必同衾, 不忍一日相離。 及長, 暫相阻, 則輒戀戀不置, 出入禁中, 無朝無暮。 每因朝家乏使, 陳謝事重, 不得已使大君奉命, 未免頻仍。 去時依依有解手之恨, 來時專价遠逆于鴨江之外, 慰之以法醞親札。 逢輒倍歡, 悲喜兼至, 蓋常棣之湛樂, 未足以喩其至情也。 丙申夏麟坪適到參判吳挺一家, 有一朝士乘醉, 語言謬妄, 郡守徐抃, 聞其傳說, 遂告云: "麟坪攀牛會客, 事將不測。" 王震怒親鞫, 抃斃於杖下, 竄黜其傳說者, 流言息焉。 麟坪自戊戌春, 遘疾沈痼, 王日夜伻問, 醫藥交道。 一日親自臨視, 以家人禮相接, 麟坪感幸, 若沈痾之忽蘇。 自是少差有日, 五月十三日, 病革報急, 王乘小輿, 蒼黃徑出, 近臣步而從, 臨呼已絶矣。 撫而長號, 淚如泉逬。 侍衛之臣, 無不哽咽。 時暑熱方熾, 而坐不暫離, 粥亦不御, 冒雨連臨, 親莅襲斂。 自附身附棺, 以至殯而靷而塴于墓, 皆從內辦, 而官它焉。 其夫人繼而歿, 自始卒比窆, 賻檖優厚, 遣中官監護, 亦如大君時。 崇善君 澂、樂善君 潚, 仁祖大王後宮趙出也, 因其母之惡逆, 澂又重出逆招, 朝議甚峻, 廢置絶島。 王雖不得强拂公議, 念其久在海中, 恐致霧露之傷, 骨肉之情, 終不能自已。 丙申夏, 放還京第, 使之頻頻出入大內, 以示親親之恩。 潚未冠故, 行冠禮於禁中, 又使內官, 訓斅勸讀, 賜與之物, 比先朝無間焉。 命復其爵, 而三司爭執逾月, 大臣亦以爲不可, 遂寢焉, 王以爲歉恨。 己亥春正月, 進諸大臣而諭之曰: "自遭麟坪大君之喪, 言念同氣之終鮮, 益切悲感。 入謁之人, 皆有身章, 而澂、潚獨以白衣進見, 心甚慼慼。 予欲復其爵, 議諸卿等。" 因嚱唏飮泣, 群臣相與拭淚, 無敢異辭, 遂命復封爵。 樂善君未聘, 命禮曹擇配。 大臣請令本家聞見, 報知宗簿寺, 王下敎曰: "兄弟二人, 相依以處, 何從而聞見報知乎。" 竟令禮曹, 擇定行禮。 其妹以翁主, 助其母逞兇, 百官三司請按律, 而王不忍加法, 貸死遷外, 待之甚厚。 至是, 亦令放還, 築室以處之, 奴婢田土, 竝皆還給, 以盡其衣食之所欲。 珍餽續降, 恩顧無替。 逆姜以昭顯嬪, 稔積惡毒, 自速天誅, 得罪先朝, 其子女遷置海島, 王憐而放回。 又於閏三月, 上謂群臣曰: "澂、潚等, 旣復官爵, 得以冠帶出入, 予甚喜悅。 而因有所思, 昭顯世子子女, 以其母之故, 尙未屬籍, 稚兒何知。 予甚悲之。 其所坐累, 本與澂、潚無異, 而況先王之敎, 有曰 "視兄子猶己出。" 予常佩服。 今欲與澂、潚, 一體推恩, 俾無不均之歎, 無負我先王盛敎, 諸卿之意如何?" 群臣皆以爲當。 上垂淚下敎曰: "爵號當書下矣。 今日僉議無異, 予甚喜悅。 予與昭顯, 同時北行, 崎嶇異域, 備嘗艱險, 左右提挈, 晝夜不離。 東還未幾, 人事奄忽, 不良之人, 仍以生變。 先朝成命, 不得輕改, 而心常隱痛, 以至于今。 冥冥之中, 豈無憾恨。" 因嗚咽良久。 於是昭顯子女, 竝復爵號。 子封慶安君, 二女封郡主, 以時婚嫁, 第宅衣服, 無不備賜。 慶安曁諸郡主, 引入大內, 密邇撫愛, 居處飮食, 與公主無間。 副尉引接之外, 至或招入禁苑, 視遇亦與駙馬無別。 惇睦親族, 恩賚普霑。
綾原大君 俌, 仁祖大王之弟也, 尊敬優異, 其庶子靈愼正 瀅, 特拜司饔副提調。 吏曹以未準資級啓, 王曰: "叔父年高, 無以慰悅。" 乃命加資以授之。 綾原訃聞, 素服哀臨, 情文備至。 仁興君 瑛、貞愼翁主、貞徽翁主之卒, 皆給祿以終三年。 貞仁翁主, 從其子安山倅洪琂, 卒于郡衙, 家在城中, 發引而歸也, 使之入殯于其第, 異數均加。 俱是宣祖之子女也。 其於學問, 已領大要, 及承道心之敎, 益加謹愼, 造次之際, 未嘗敢忘。 卽阼以來, 禮勤三接, 不以寒暑而廢。 己丑十月, 始御經筵, 講《中庸》序, 讀至篇末, 諱《朱子》名, 亦令講官諱之, 自此顔、曾、思、孟、程、周, 竝諱其名。 庚寅早春, 方有未寧之候, 筵臣請姑停講, 王曰: "開筵論難, 多有可聞。 且無疾痛, 安得不爲。" 正當六月, 日三臨筵, 筵臣恐致勞傷, 又請日一進講, 王曰, "予素多病, 冬日嚴凝, 則勢難頻講, 欲於此時, 頻數開筵。" 又於十一月, 請姑停筵, 王不許曰: "若極寒, 則予當觀勢處之。 姑勿煩稟。" 王嘗講《詩傳》, 而至是停《詩》講《書》, 以宅憂也。 朝晝講《書傳》, 夕講《大學衍義》, 御宣政殿晝講時, 王曰: "開筵已久, 而尙未見大臣。 君臣相見, 豈有定例。 予欲令大臣、諫臣, 皆入參經筵矣。 見之若疎, 情安從生。" 進講《衍義》, 至攻乎異端章, 王曰: "此時釋佛之害, 甚於楊、墨也。 且我國, 道敎則不行, 而唐之人君, 有鍊丹而崩者。 宋之眞宗, 旣知其非, 而猶未免惑焉, 是未可知也。" 王惡異端如此, 故朔書書進中, ? 廠鍼論莎跔 命政院嚴禁之。 王謂筵臣曰: "古人言, 學問則可以變化氣質, 學問之功, 豈曰少哉。 人之患, 在於立志不固。 人主一身, 攻之者衆, 尤爲着念處也。"
〔○〕又曰: "大禹之德非一, 而首稱克勤克儉, 帝舜之垂訓後世者可見矣。 我國亂後, 上下皆在憂遑之中, 而事奢侈何也。" 講《禹貢》, 謂儒臣曰: "《禹》之勤勞, 與身經百戰, 創業之主何如?" 對曰: "不如禹之勤也。" 王曰: "身經百戰之君, 亦非不勤, 而其心猶有所爲者。 至於禹, 少無私天下之心, 此爲難也"。 嘗言: "韓休爲相, 玄宗有貌瘦之歎, 其心之厭惡可知矣"。 講《衍義》時, 王曰: "漢 宣帝不易得之君, 而何以宦官典樞機乎。 元帝非本欲疎斥蕭望之, 而竟爲石顯所欺。 只却食涕泣, 叩頭謝罪, 而不能正其罪何也"。 嘗臨筵慨歎曰: "人有恒言, 我國之人, 例多恇㤼。 以丁丑兔山事見之, 則非軍卒之不精也, 實緣無良將也。 嘗聞李廣, 軍中夜不擊刁斗, 遠斥候以探敵情。 丙子之亂, 爲將者全昧於此, 申景瑗則旣不能戰, 又不能走, 我國將帥輩, 良可愧於隣國矣。 且文官, 則莫如尙文, 武官則莫如尙武, 國家所取, 不出乎此。 而今則不然, 文官之如武弁者, 固已見輕, 武弁之如書生者, 方能見容。 若使武弁, 而好馳馬, 則人必以狂悖目之, 習尙可怪。 羊祜、杜預之輕裘緩帶者, 旣不可復見, 則今世武弁之如書生者, 安能得力於戰陣間也"。 壬辰十一月, 晝講《多士篇》, 王謂講官曰: "今日臨講, 益知災異之警, 大可懼也。 至於明德恤祀之言, 尤有所內愧於心也"。 又曰: "古人所云亡國非一道者, 此言誠有理矣。 以大明之亡觀之, 崇禎皇帝之事, 聞諸華人則皆曰: 外無遊畋之娛, 內無苑囿之樂, 凡可以亡國之事, 一無有之。 而終至於覆亡, 蓋由明察二字之不能盡其道也。 以此論之, 誠可懼也。 他國興亡, 固不足論, 而至於今日, 國事如此, 未知末終如何, 予心如燬也"。 癸巳晝講《君陳篇》, 王曰: "君陳之任重矣, 而戒告之辭, 只稱其孝友, 人之爲行, 豈有加於斯二者哉"。 至講《顧命》, 語及明王恒存危懼之心, 王曰: "人君以藐然之身, 處乎億兆之上, 雖當無事之時, 豈無艱畏之心也"。 《書》亦曰: "不畏入畏, 豈不然乎?" 甲午春, 夕講《衍義》, 至盧杞殺顔眞卿黜李揆之事, 王曰, "小人甚巧, 必量度人主而逞其術焉。 杞之視德宗如嬰兒, 而終不能覺, 其昏暗可知。 且讀史者, 將以監戒也。 今日君臣, 勉旃勉旃, 毋使後人, 視此時, 如此時之視德宗也。" 夏講《詩》之《邶風》, 出自北門章, 王曰: "賢人隱藏, 則固爲君人之恥。 而若以危邦, 皆望望而去, 則爲臣之道, 亦似不可。 此皆君臣之所當審處也"。 乙未春, 晝講, 言及大明事, 王曰: "崇禎之亡也, 朝臣無一人死節, 從死者只一內官, 良可羞也。 予觀大明之制, 使人執兵而侍, 群臣奏事, 不合於意則撲殺之, 且設東西廠, 以宦官主之, 天下事皆由此出, 跡其所爲, 亡國已晩矣"。 至講《秦風》 《黃鳥章》, 王曰: "觀此篇, 則可知無不忍人之政矣。 夫所謂不忍人之心, 自然由中而發, 忍使臣子, 惴惴而入於壙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且以人情推之, 自己則惡死, 而他人則殺之無忌, 至於數十人之多, 其他何足云乎。 貨寶埋藏, 無益於死, 反受慘禍。 如呂后之被汚, 秦皇之見掘, 皆由於此。 文帝儉約, 故獨無此禍, 光武 壽陵之制, 纔令流水而已, 豈非後世之可法者哉"。 講《陳風》 《株林章》, 王曰: "雖在匹夫, 悖惡如此, 則得保軀命難矣, 況人君乎。 文王之化, 及於江 漢, 而其衰也, 諸侯至於如此, 可不懼哉?" 夏講《七月篇》, 論及道敎之盛, 筵臣說: "稱我朝無左敎, 誠可欽歎"。 王曰: "此蓋革罷昭格署之力也。 予嘗觀《宋史》, 李沆爲相, 每入對, 極言災異可憂之事, 上雖厭聞而不恤。 人有問之者, 沆曰: "上春秋方盛, 志氣易肆, 若不以憂畏之言, 日聞於耳, 以動其心, 則必有流蕩之憂, 故不得不爾, 善哉言也。 自古人君, 國家安富, 海內無虞, 則驕肆淫泆, 或陷於左道, 或騖於邊功, 或流於逸豫, 亡身喪國者滔滔, 可不懼哉?" 六月, 講《詩》之《常棣》, 王曰: "友愛之情盡, 然後君臣父子, 皆得其道, 朋友之義, 亦能敦信。 《大學》所謂所厚者薄, 所薄者厚, 未之有也者, 亦此義也。 未有薄於兄弟, 而厚於人者也。 兄弟之不能和睦者, 若以至誠導之, 則豈有不感動之理。 雖冥頑小民, 因其本性而導迪, 則自可歸化矣。 兄弟或有相訟者, 此無非國家敎化不行之致。 豈非可恥之甚乎"。
冬十月晝講時, 筵臣言: "漢 哀帝初年威殺, 蓋欲效宣帝之爲, 而爲也"。 王曰: "自古如彼者, 多無其才, 而效其事, 鮮不爲哀帝者也"。 筵臣又論張良背鴻溝之約, 王曰: "士論乃萬世經常之理也, 以儒者氣象, 責備於良, 故以爲不義耳。 當其時, 良之意, 惟在復仇, 何暇念及常道。 世人不知義理在其中矣。" 至於論范增之事, 王曰: "天無二日, 助成項羽之功, 而欲置義帝於何地乎? 卒遺江中之醜說, 致縞素之師, 以爲漢王釣天下之餌。 增可謂不思其終者也。 如漢王分羹之說, 所不忍出於口者也。 抗何顔面, 君臨天下乎"。 論及於宋, 王曰: "萬古最可惜者, 孰如宋 高宗哉? 有將如岳飛而不用, 此已非矣。 又何至於必殺而後已"。 蓋王言出於痛慨之至也。 又論尹吉甫事, 王曰: "天生一世才, 足了一世事。 安知其後世, 亦或有一世之吉甫也"。 又曰: "必內修而後外攘, 方今急務, 要在得人心也"。 丙申正月, 講《詩》之《白駒》, 王誦其註語而謂曰: "此註誠爲切當。 自古君臣之間, 契合爲難。 故韓信對楚之使, 亦以言聽計從等語拒之。 果能言聽計從, 則賢者寧有欲去之理乎?" 《鶴嗚章》註, 有玉之溫潤石之麤厲等語, 王曰: "此言最切。 蓋中人之性, 遇患難, 然後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人君遇災異, 則亦當如是"。 又曰: "若遇災恐懼, 不做一事, 則如被長者之訶責, 而畏怖退縮而已, 何益之有。 必有所爲之事, 然後可以答譴。 若今日行一事, 明日又行一事, 循序漸行, 念念不已, 則事可就緖。 而今之言者, 或望其一朝遽做大事業, 此則決無可成之理矣"。 朝晝夕講之外, 時復夜對, 或不寧而未御正殿, 或入侍之官不齊, 則亦時時召對於便殿。 三月, 召對講《衍義》, 王曰: "古之小人, 遭昏暗之主, 得肆欺蔽。 而至於英明之主,亦或疑惑於讒言, 讒言可懼也。 此所謂浸潤之讒, 膚受之愬也。 雖然人主每事, 必須光明正大可也。 何可許其屛左右而言也。 此讒說所以入也。" 又曰: "晋 齊王 攸, 是介弟也, 惠帝之昏庸, 萬古無比, 則爲武帝者, 雖以國與弟, 實是宗社之福也。 而信聽讒言, 反生疑忌之心, 終至於骨肉相殘, 此晋國之所以促亡也"。 丁酉十月, 進講《心經》, 王謂筵臣曰: "本源澄淸, 人欲退聽, 則道心自可養也。 若利欲紛挐, 則何能保有此心也"。 又曰: "心者一身之主宰, 而敬又一心之主宰也。 若無涵養之功, 何能爲萬善之主也?"。 又曰: "敬義夾持於內外, 則雖欲放下於須臾之間, 不可得也"。 又曰, 精一之說, 雖出於堯、舜, 而堯、舜之前, 已有此義, 敬義之說, 雖出於孔子, 而孔子之前, 已有此道"。 戊戌春, 王謂筵臣曰: "近觀《宋史》, 寧宗、光宗二君之事, 誠可痛也。 父子天倫之滅絶如彼, 宋之亡, 基於此矣"。 又曰, "當時國事, 無復可爲, 而僞學二字, 爲網打善類之法, 文言之慘矣"。 謂筵臣曰: "小人, 固無智者也。 然豈不知其國危, 則其身亦危耶? 逞奸誤國, 國亡而身亡, 有何益哉? 如宋之賈似道、韓侂冑, 肆兇稔惡, 誤其國事, 而國未及亡, 先赤其族, 其爲計似巧, 而實甚拙矣。 宋時又有請斬朱子者, 自古小人, 必欲害賢之心, 無所不至若此, 吁亦慘矣"。 又曰: "宋之道學之禁, 無異死罪之律, 其爲痛慨, 不可言也。 元則雖曰夷狄, 猶知道學之可崇, 俘虜之人, 如有儒士之流, 則必放釋而尊待之。 至以大聖文宣王之號, 加於孔聖, 尊聖之心, 可謂至矣。 宋以中國, 禁道學如彼, 元以夷狄, 而崇道學如是, 良可怪也"。 論南宋之事曰: "高宗當岳飛、韓世忠在時, 未能恢復, 及其已死之後, 則無可爲矣。 孝宗以後則偸安已久, 上下恬然, 何能奮發興復乎"。 晝講畢, 宋浚吉進曰: "近來天變, 無日無之, 每年如此, 聖心戒懼, 恐不如一矣"。 王答曰: "人心不一, 實如贊善之言。 或尋常放過者, 豈無其時也"。 講訖, 語及大明事, 王歎曰: "崇禎之亡, 實由於宦官。 分遣於州郡者, 欲察其善惡, 而亦利其私獻也。 密探外事, 實非正道, 況雜流而可信乎"。 浚吉仍陳恤民隱、數開筵之意, 王皆嘉納。 正月臨筵, 謂贊善宋浚吉曰: "予之氣質, 未免偏駁。 雖日講《心經》, 而心之病處, 未能快祛, 擧措之間, 多有過失。 必有法家拂士於左右, 然後庶或少過。 予之必欲久留贊善者此也。"
四月, 講《心經》, 王曰: "靜而常敬, 默而常愼, 不待言動而後能信, 此最玩索處也。 然其要在於力行, 不然則亦僞耳。" 五月召對時, 王謂侍臣曰: "宋 高宗多懷驚懼之慮, 故其所成就, 無足可觀。 其時或勸住金陵, 或勸住汴京, 汴京則猶可畏也, 金陵終不得進一步。 惟是驚懼之心如此, 故有若宗澤、李綱、岳飛、韓世忠, 而不能用。 若使孝宗, 生此世、用此人, 則復河北似不難矣。" 又曰: "秦檜之心, 最不可知。 旣得相之後, 何不背金, 而專意南方耶。 韓世忠騎驢西湖之事, 岳飛莫須有之語, 爲宋 高宗未嘗不發一慨也"。 十一月召對, 王謂吏判宋時烈曰: "宋 神宗對明道, 而歎無人才, 明道曰: 「今亦豈無其人乎。」 神宗竟不知明道之可任, 甚可慨也"。 時烈曰: "明道以三代之事陳之, 則神宗曰: 「予何敢當焉。」 明道愀然曰: 「此非社稷之福也。」 明道之心, 如此其大, 而神宗之志, 如彼其小, 雖知其可任, 而豈能任之乎"。 王曰: "古昔之事, 今人追慨, 而今日之事, 若復爲後人所慨, 則豈不大可畏哉"。 十二月召對, 宋時烈論及王性偏, 請盡其和平之道, 王曰: "卿豈不知予之病哉。 予之病痛, 有氣質之偏, 方其怒也, 不知事之是非, 故有不中者矣。 自近日以來, 如有怒事, 則忍而治之, 中夜思之, 則怒漸弛矣"。 己亥二月, 召對論敬字, 王曰: "人須動時動、靜時靜, 然後工夫方可專一矣。 若只泥於靜, 則何足謂敬也"。 四月召對, 王曰: "古之人君, 雖富有天下, 而猶思畜積, 豈非可笑耶。 漢 靈帝撫錢而言曰: 朕在私第時, 愛爾久矣, 賣爵聚斂, 無所不至。 若是悖入, 而能免悖出乎? 禽獸固不足言, 而龍爲四靈之長, 往往耽餌而死, 由其有欲也"。 蓋自講《心經》, 宋浚吉頻頻侍講, 戊戌冬後, 宋時烈亦迭進以侍。 其他以儒術進者, 竝命輪入。 心上工夫, 多有進益。 王自念性偏難克, 惟怒最甚, 常加猛省, 卒至打疊。 嘗謂《夙興夜寐箴》, 切於着工, 宜作屛置諸座? 妱 乃令玉堂詞臣, 繕寫以進。 堂宇門闥, 揭以戒語, 大書當惜分陰、對越上帝八字。 粘之壁上, 齋曰敬義, 閤曰養心者, 皆所以自警也。
〔○〕王有一適嗣, 卽我殿下也。 仁孝夙彰, 仁祖朝己丑春, 封爲世孫。 及王卽位越三年辛卯秋, 封爲世子, 王愛重之甚, 而訓誨嚴切, 爲擇宮僚, 日講經史。 贊善、進善等官, 以授儒賢, 更相勸導, 漸就高明之域。 且敎宮官曰: "勿拘常規, 反覆陳說, 古今得失, 閭閻利病, 亦皆引喩, 得令曉解可也。 帝王家子弟, 生長深宮, 不識民間疾苦, 後苑有種禾處, 耕耘時使世子往見, 而知民事爾。’ 又謂贊善宋浚吉曰: "東宮正當學問之時, 如贊善之人留在, 盡心輔導, 則其幸如何"。 其望輔於臣僚者甚切, 好賢之誠, 不翅緇衣尊而禮之, 不致則不止。 嗣服之初, 前參議金集、前持平宋浚吉、宋時烈、前諮議權諰、李惟泰、前縣監崔薀等, 首被召命而來, 念其旅食之艱, 賜以米肉, 有庖人廩人之繼。 聞時烈、惟泰之母, 老且有疾, 令道臣餽米饌及藥物。 特拜金集爲禮曹參判, 吏曹以爲: ‘禮官之必用文官法也’, 王曰: "稽古讀書之人, 召將何用。 不可拘於常規也"。 集一歲中, 超至吏曹判書, 後以大耋陞判中樞。 王聞其卒, 悼儒林領袖之喪, 使之禮葬, 遣近臣致祭。 時烈亦特授禮曹參判, 與浚吉俱由亞卿, 相先後爲吏兵判。 徵辟之勤, 則命乘駕轎, 欲其暖寒, 則至解貂裘, 知遇之隆, 古亦稀覯。 權諰歷進善執義, 進拜同副, 尋爲贊善。 崔薀屢經臺府, 超授承旨。 沈光洙遭外艱, 王以爲舊時甘盤, 存問而給藥料食物, 旣沒喪, 由憲職, 擢置銀臺。 許穆亦自林下, 起爲持平掌令。 趙克善之病也, 賜毛衣覆之, 遣內醫救之, 其歿也, 令戶曹郞官涖其喪, 又日遺中使監護。 衣衾棺斂, 極其備禮, 護櫬營墓, 悉令官庀。 凡有儒名者, 靡不搜訪而用之。 眷顧甚渥, 崇儒之盛, 終始如一。 蓋三代以下所未有也。 先朝耆老勳舊大臣, 禮敬隆異, 恩數崇重。 高年達尊, 行步不良, 有若金尙憲, 則入闕而命乘肩輿, 上殿則內官扶掖。 被譴先朝, 而情在可恕, 才識宜用, 有若李敬輿, 則起廢倚毗, 爰作首揆。 栫棘絶塞, 而非得罪於本朝, 則手札慰諭, 問餽相繼, 勉遣大君, 終脫之於死地。 或錫之廐馬文豹, 或賜之上尊珍膳, 節物時果異味之頒絲絡。 告省松楸, 則備給奠儀, 澤洽泉壤, 休浴出外, 則下諭方伯, 別有餉遺。 往往引入便殿, 宣勸宮醞, 有疾則必遣御醫, 內藥隨之, 陳達所懷, 則翕受敷施, 又必宣召, 開心面諭, 事無大小, 咨而後行。 照臨臣庶, 無微不察, 被戮異域者, 特恤其家, 奉使殊邦者, 恩被妻孥, 爲養乞郡者, 悉遂其願, 有親癠則求濟之, 身病重則不以秩卑, 而忽之。 宰臣之老於鄕者, 月給之廩, 隱卒贈死之典, 廣加於庶官。 爲吏而治最者, 久而猶記, 歿亦不忘, 編管丁憂, 則放使奔哭, 死事無子, 則宥及其姪。 比年凶歉, 度支告匱, 備局請減百官祿俸, 政院繼之, 大臣申之而不許。 一則曰: "忠信重祿, 聖人所訓, 凶年饑歲, 尤宜惕念", 再則曰: "御供未減者尙多, 俟其盡減, 更議可也, 惟浮費, 悉令節減", 三則曰: "祖宗朝待下之道, 極其豐厚, 今不可太薄。 終不減祿, 經用亦支。 蓋體群臣出於至意。 首開言路, 導之使言, 有能陳疏說弊, 獻箴規諷, 賜以虎豹皮, 或賜馬裝。 弘文館學士, 例用見錄者, 而嘉其言直, 則赦罪而直拜修撰, 敢諫者, 往往擢用, 三司之官, 更引迭見, 勉之以繩糾之責。 用人之際, 常飭兩銓, 臺諫守令, 尤使愼簡。 名賢良相及忠臣孝子淸白子孫, 竝令錄用, 褒嘉節義, 風勵頹俗。 故東萊府使宋象賢, 子孫殘微, 墓道無表, 王聞之, 令本道方伯建碑。 王以爲自古忠臣, 無如趙憲, 其子孫特命先用。 贈故右相金尙憲爲領議政, 故參判鄭蘊爲判書。 刊行《三綱行實》, 又命梓《警民編》, 以爲觀感之地。 諸道監兵水使與列邑守宰之拜辭也, 賜對從容, 黜陟撫字之道, 諄諄戒諭。 分遣御史, 廉察列邑及邊鎭, 得其善惡之狀, 而賞罰之。 且以荒塞兵民, 不霑王化, 咸鏡南北道、平安兵使及兩界邊倅, 間以文官差遣。 念百隷之怠惰, 下敎曰: "能不能, 才也, 勤不勤, 志也。 才固難得, 而志亦不勤, 則將何以爲國"。 諸司之慢不擧職者, 輒罰之。 又敎曰: "朝廷先立紀綱, 百執事皆勤厥職, 則何事不濟。 而目今百司, 悠泛度日。 如坐起不難之事, 而專然廢閣, 予甚慮焉。 錢穀之任, 尤不可數易, 而朝差夕改。 我國若無執吏, 則無可爲矣。 自今每朔朔末, 六曹及漢城府, 掌隷院, 各以其司坐起日數書入。 憑考其(勸)〔勤〕慢"。
自是各司, 月書坐不坐以啓後。 憲府只一坐, 敎曰: "法官如此, 則其何能糾正百司乎"。 前大司憲以下, 竝命推考。 深惡朋比之習, 謂筵臣曰: "臣之爲黨者非他, 不過爲爵祿計也。 果能盡心國事, 爲人主所重, 則富貴自來, 何用奔走營爲乎。 若其情迹敗露, 終未免於罪戾, 則獨不愧於心乎。 予則必欲打破私門, 修擧國事矣"。 又曰: "朋友, 友其德也。 雖盃酒之間, 宜相勉有責善之道, 而今也皆以褻狎爲事。 朝紳之間, 各自爲朋, 相與掩非, 同歸於黨, 良可寒心"。 引見時謂群臣曰: "賄賂公行, 亡國之道。 大明及昏朝時事, 其鑑不遠。 卽今名公大夫, 寧有是事。 大臣公卿, 更加砥礪風俗。 敦尙淸白, 雖無才之人, 淸白則擢用, 以導一世可也"。 其戒飭臣工如此。 爲之輪對, 以問各司之弊, 爲之殿講, 以勸文臣及士子。 時出御題, 試製玉堂銀臺春坊等入直之官, 以賞其優者。 又別選詞臣, 賜書堂之暇, 且讀且作。 間御春塘臺, 親試文武之才, 或卽日放榜, 或面給賞物, 以聳觀聽。 爲擇大司成, 且設祭酒, 以儒賢兼帶, 敎以《小學》。 乙未七夕, 聚諸生試製, 尋賜新銀杯於太學, 仍宣醞於館中多官及入格諸生。 且降宸翰曰: "庸續舊典, 特賜銀杯二部於本館。 非以侈矣, 欲其久也; 非以酒矣, 欲其和也。 惟爾師生, 用彰厥義, 式敬勿替"。 蓋出於作興一世, 以爲美談。 優老之義, 跨越常例, 上自朝臣, 下至編甿, 以壽陞爵者, 前後甚多。 高年大耋, 無貴賤男女, 歲輒存問, 而優其米酒等物, 九十與百歲, 則超授資級, 加以紬絮, 免其戶役。 蓋以餘日無多, 矜念益深也。 都下有百餘歲庶人, 使掖庭人, 負而致之殿上, 餽之以珍羞, 節産之物, 餉亦不絶。 萬壽宴後, 乃下敎曰: "四境之內, 吾民之父母, 年老而不能養者何限。 是予之責也。 其令中外, 各賜米饌酒, 以體予推及之意"。 惻怛之旨, 人人感泣。 王性旣寬豁, 又甚明愼, 故蔽獄無所疑惑。 辛卯冬, 逆竪金自點之獄, 王御仁政門親鞫, 賊子鉽承服, 直引同謀武將, 繼告士夫, 延及滋蔓。 王敎問事郞, 毋更問同黨, 於是, 人之疑懼者始定。 鉽言 "曾使譯官李馨長謀事" 云云, 而時馨長赴燕未還, 鞫廳秘而不泄。 翌年三月, 馨長還到灣上, 大臣密請急遣金吾郞拿來, 擧朝憂其招禍。 蓋賊譯與鄭譯相表裏也。 王不少撓, 嚴鞫而轘之, 國人咸快之。 初遣中使於光陽 自點之謫所, 搜其文書而來, 朝士簡札及閫帥守令書信, 皆入於禁中。 怨語凶迹, 亦有彰露者, 而竝留中不下。 後筵臣以爲言, 王答以 "無可觀焉已焚之矣"。 蓋恐獄之濫也。 大逆旣誅, 例有賀儀, 而王以爲: "元勳反逆, 可愧無可賀", 遂不受。 於庶獄, 無所不愼。 嘗讀《書》之象以典刑曰: "何後世法網之密也, 此非宋 太王之言乎"。 及讀《呂刑》, 亦以敬愼之意, 面諭於刑官, 又敎曰: "刑者輔治之具。 聖人不得已而用之, 必至公無私, 一於平心, 而後民得以措手足矣。 今有受刑多, 而不輸情者, 殊無輔治之意。 或有一受刑, 而相繼致斃者, 欽恤之道安在"。 於是, 刑曹堂上竝被推勘。 每當嚴寒盛暑, 遣承旨按閱典獄, 先放輕囚, 令禁府刑曹, 劃卽疏決。 臨歲時亦如是。 外方監司, 有或濫刑, 致殞人命者, 則不以已往而不治, 必拿問而罪之。 壬辰冬, 聞處絞罪人, 例爲椎殺, 乃下敎曰: "死雖一也, 殊非律名之本意。 予甚慘然, 其令刑官審處"。 自是應絞者, 縊而殺之。 刑曹旣過三覆, 罪人等將按律處斷, 王謂諸臣曰: "暖氣如春, 淫雨不止, 沈霧四塞, 予心悚慄。 十餘死囚, 皆將伏法於今日, 三覆議讞, 猶慮其未盡, 復欲問諸卿等", 諸臣皆贊之而更讞, 特減二囚死。 甲午十二月, 史官承命察典獄書啓, "囚中八人, 衣裳尤甚單薄"。 敎曰, "當此寒冱之節, 吾民觸禁抵法, 繫縲凍獄, 食不充腹, 衣不掩體, 予用矜惻, 無以爲懷。 其令該曹, 造給襦衣, 且給薪炭"。 又命諭諸道, 各邑庶囚, 遍給薪炭, 俾免凍死之患。 謂承旨曰: "屢下恤刑之敎, 而中外臣僚, 不克奉行。 閫帥守令等, 濫用刑杖, 非罪殞命者有之, 不勝驚駭。 人命至重, 雖犯大辟, 猶且再三覆議, 不忍遽斷。 況以一時之怒, 過用不當用之刑, 致人於死, 則其在國法, 豈不寒心。 宜傳諭于八方閫帥以下諸將領及守令等, 毋令咨意用刑, 知朝家欽恤之意"。
〔○〕丁酉冬唐津人李珽之誣告也, 雪寒方酷, 湖右士民被逮者, 多是凍餒之甿。 王一見供辭, 洞辨曲直, 命誅告者, 盡釋誣枉, 令有司衣其寒者, 人給行糧, 皆感祝拜叩, 涕泣而歸。 前後誣獄, 皆卽快斷, 無株累抱冤之患。 屢經變亂, 師律墮紊, 仁祖朝設立營將, 旋罷不行。 王以先朝舊制, 復設爲可, 乃於兩湖五營、嶺南左右道諸鎭, 各置將領, 以統所管之卒, 俾專桑土之備。 訓局之武騎砲兵, 視前加額, 御營之軍, 分部遞上, 各有條理, 三南編伍, 亦令給復。 各寺奴婢, 不行推刷已久, 逃故虛實, 了不可辨, 徒掛空簿, 漏逸甚衆。 王以苦歇不均, 法令無據, 乙未設都監以刷之。 遣御史以覈之, 良者雖僞, 而歲久則蕩滌之, 冤者陳訴, 則審察而伸雪之, 一戶多丁, 則量減之, 或米或布, 隨其土宜。 南中則捧置各處, 用給軍需, 西路則取供經用。 愛民之政, 先務力本, 常敎曰: "昔行燕 瀋之路, 諦觀稼穡之事, 灌漑之用, 莫如水車。 而我國全昧此制。 其制度, 今下于朝堂, 審其便否, 傳布外方, 以爲勸農之一助。 蓋漢人之制也。 公州牧使申洬, 編得農書, 鋟板印進, 嘉奬而賞之。 爰命該曹, 多印廣布。 務除民弊, 每當省陵, 尤勤顧念。 庚寅秋, 將幸長陵, 敎曰: "不得拜謁山陵, 將及再朞, 不任霜露之感。 縱有此行, 此何時耶。 歲飢民勞, 況値三使未返, 又有先聲。 予雖不得徒步往返, 其可勞民力、費民財, 而治道路橋梁乎。 該邑守令, 勿爲導駕, 監司簡其所率, 齎糧而去。 若有犯者, 以法裁之"。 乃令大臣以下, 自持餱糧, 而勿侵列邑。 駕次新院, 分遣宣傳官, 察從臣所住處, 或有使喚各官人吏及受供饋者, 侍衛軍兵, 踐田傷穀者。 近陵行幸時, 則命毋設大小晝停, 只設一處。 恤民飢疫, 如救焚然。 己丑, 北道馳啓, 民患染疾, 死囚相繼, 命送臘劑淸蘇及各種良材以救之。 又啓, 一道飢荒, 六鎭尤甚, 乃命移嶺東之粟, 有泛舟之役。 大省徭賦, 內需貢納之物, 盡行蠲減, 民無飢死。 庚寅, 閭巷間癘疫大熾, 嚴飭東西活人署, 盡心救療, 官餽之米穀, 又令醫司, 多劑二聖救苦丸, 以濟其夭札。 以兩西畿甸, 站役偏重, 命發倉粟, 分賑三路站上之飢者, 官給其料。 內司米布皮物及所屬鹽盆, 出付民曹, 用寬甿征。 內局芙蓉香, 限國恤勿用, 又減內供之酒, 五日只供一甁, 以爲救急之用。 時牛黃價直翔貴, 供納之邑, 弊不可言。 因內醫提調啓達, 牛黃熊膽, 竝命量減其數。 或權減人蔘, 亦定上中下三品, 上品則別盛一櫃, 以供御藥, 中爲賜與, 下爲院中救急, 退送者絶少, 外方大以爲幸。 進獻方物, 限二年不受。 辛卯世子嘉禮時, 命停會禮宴, 遂成內外命婦床排花朶一百餘枝, 其他省費甚多。 壬辰湖南告飢, 每朔新産之膳, 限秋成停進, 減供上紙及白綿紙。 後聞本道又病癘廢農, 下諭方伯, 俾盡賑活之方。 且令族隣, 耘厥荒疇。 湖西、嶺南失稔尤甚之邑, 全免其稅, 北道兩西, 分等賜租, 御供鮮魚, 亦嘗權減。 及冬, 司饔院請復膳, 則又命仍減數歲。 饔院所捧生乾魚物, 多有黜退之弊, 命減尺量之限, 痛禁其刁蹬。 癸巳, 六鎭三甲被災甚, 賜一年租。 內資寺貢物旣減, 故三月三日餠食, 只命進于大妃殿, 而內資竝進於大殿, 乃罷其官。 禮曹請復設各道朔膳, 敎曰: "三南癘疫尙熾, 驚懼實切。 何心受此逐朔之享乎"。 明年誕日方物, 亦命停罷。 全南監司推緘之對有云: "臘享所供之獐, 各官生致于監營"。 王敎以 "其弊不貲, 予心不安, 不如不享之爲愈"。 令該道後勿生致。 乙未淸北江界等二十五邑被災, 朝廷減稅三分之一。 監司請更減, 戶曹難之。 特令盡減。 下三道及東北兩道, 戊戌己亥所納歲幣次木總九百四十餘同, 己亥三南所納上幣木八十八同, 命全減之, 其數以新刷奴婢貢木充之。 聞北邊窮困, 生子不擧, 深用驚惻, 令道臣開諭嚴禁, 勅列邑生子者, 給米與醬, 永以爲式。 湖西當壬辰倭變之時, 未及中兵, 替受他道之役, 素稱偏重。 辛卯, 用相臣金堉之議, 行大同法, 一結收十斗, 以供京外之用, 無他徭役, 民甚便之。 讁見變生, 則戒懼切至, 咨群臣而究消弭之方, 罪一己而求四方之言。 不惟避殿而減膳, 又必理冤而伸枉。 王獄重囚, 亦有貸死之時。 雲漢之憂, 若痛在躬, 禱雨之犧, 欲以身代。 每齊明澡潔, 親行祀事, 雖炎天烈日, 未嘗脫冠解帶, 繼之以夜, 至誠攸感, 甘澍立應。 戊戌六月, 有疾沈綿。 秋七月, 延見諸大臣, 王以全南沿海, 賦役偏苦, 命從民願, 設大同, 如湖西。 己亥春又旱, 至夏不雨。 少間之餘, 憂勤勞悴, 數接臣僚, 講無遺策, 移粟蠲賦, 靡極不用。 賑恤之際, 先及惸獨, 設粥京外, 以食飢者。 又遣御史, 出沒村間, 察其勤慢, 兼咨弊瘼。 懇惻之敎, 相繼而下; 申飭之令, 陸續而馳, 大小官吏, 奔走率職, 及麥而野無餓莩。 詢及軍兵之怨, 或白骨徵布, 或黃口充丁, 老而未除者亦多, 冤苦益甚。 王以當凶歲蠲役之時, 此獨仍徵, 則非同仁之意, 乃令備局, 先問諸道營儲布木之數, 方且量宜推恩, 而未及完了。
四月念後感疾, 命設祈雨祭, 而違豫不能親行。 不敢自安於心, 遂齊宿于外閤, 不恤添傷, 露禱于天, 終日達夜, 不脫冠巾。 五月初四日大漸, 薨于昌德宮之正寢, 春秋四十有一, 在位十一年。 都人士女, 雨泣雷號, 閑散之類, 塡噎街巷。 太學四學生及郊畿士夫奔赴者, 朝夕哀臨於闕門外, 不可盡數, 成服後始退。 飢民之仰哺者, 亦相率而趨哭, 自外來者傳言, 窮村僻鄕愚下之氓, 莫不奔聚官庭, 悲之如父母云。 襲斂之時, 大臣禮官政院三司入侍禮也。 王英明特達剛毅寬厚, 嚴而克仁, 威而不猛, 以不世出之資, 抱大有爲之志。 聖圖神謨, 慨然慕古, 焦唇乾舌, 中夜興歎。 遊畋聲色之娛, 無一掛意, 上謹天戒, 下哀民窮, 寅畏之心切, 懷保之意篤。 令弘文館抄出《大學衍義》 《崇敬畏》上下卷, 合爲一冊, 《豳風》 《無逸》, 幷作屛書進。 《周禮》十二荒政及劉向 《說苑》 《六正六邪》、《漢書》 《刺史六條》, 亦令繕寫, 以備燕閒之覽。 崇儒重道, 渴賢急能, 拔茅連茹, 野無遺逸, 彰善褒節, 樹之風聲。 存諸心志者, 卽持養變化之功, 發於施措者, 皆固本永命之道, 接下酬酢, 表裏洞徹, 臨筵問答, 剖析淵微, 雖以鴻儒, 有非意見所可企及。 至於文章, 吐辭摛藻, 自成典則, 眞草書法, 飛動奇妙, 而未嘗宣露於外, 辭說之間, 亦絶不及焉。 平日所談論, 惟典謨聖賢之書, 古今興喪之源, 與夫經國濟世之策也。 龍潛時, 惟酒無量, 而自登儲位, 絶不近口, 常戒群下曰: "大而天下國家、小而匹夫一身喪亡, 多出於酒, 當官莅職者, 固不可言。 言語之失, 亦至招禍, 害孰甚焉。 近來士夫間, 號稱名流者, 以飮相高, 如晋俗之亂頭養望。 任選部者, 注擬之際, 如此之輩, 勿先於人可也"。 昨年彌留, 匕箸未御, 勸進外方異味, 而不肯曰: "豈爲口腹, 而擾疲甿哉"。 念迎送之弊, 守令之不謹進上者, 亦不許罷黜。 雖在藥餌之中, 一以仁民爲意。 戊戌冬小愈, 禮官大臣, 屢請陳賀, 而王有樂正子數月之憂色, 終不允兪。 軫蒼生之飢, 而忘玉體之病, 殆將弗興, 而尙祈蘇枯, 此實至性根於天植, 非免强而爲之也。 臣民之尤所深悲者, 十一年間, 勵精修省, 不遑寧息, 無一歲受享供之時, 無一旬不憂勞之日, 方圖至治, 未及風動, 皇天不弔, 終靳必得之壽, 抱恨鬱伊, 齎志莫伸, 斯乃我東方無窮之痛也。 惟其懿行偉範, 史不勝紀, 宏規美制, 著在甲令。 出天之大孝, 禮賢之至誠, 直可跨軼於商、周, 仁聲德澤入人之深者, 足以流傳千萬世而不衰。 稽諸古昔所罕聞焉。 嗚呼盛哉, 嗚呼痛哉。 【大臣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臣李景奭奉敎撰進。】
- 【태백산사고본】 22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94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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