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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71권, 선조 37년 2월 26일 丁未 2번째기사 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의정부 영의정 이덕형이 자신의 녹훈 삭제를 요청하다

의정부 영의정 이덕형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녹훈(錄勳)에 참여될 수 없다는 것은 지난해 여러번 차자를 올려 이미 죄다 아뢰었으니 감히 다시 번거롭게 아뢸 수 없습니다마는, 매우 민망한 것이 있습니다. 대간(臺諫)이 공론에 의거하여 아뢰어 윤허를 받았으면, 신은 실로 삭제할 대상에 들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울에서부터 호종(扈從)한 것도 아니고 왜적을 정벌한 것도 아니며 특명으로 수록(收錄)된 사람도 아니니 세 가지 중에 의거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이유로 대간이 삭제를 청한 뒤에 다시 수록한단 말입니까. 사세가 이러하니, 무릅쓰고 참여할 수 없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제 자기가 마련하였는데 남은 삭제되고 자기만 참여되었으니, 아무리 염치가 없다 해도 어떻게 스스로 편할 수 있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외간의 논의는 다들 ‘의병을 일으키고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을 반드시 먼저 수록해야 한다.’ 합니다. 당(唐)나라의 왕실이 회복되었을 때에 곽자의(郭子儀)·이광필(李光弼)이 의병을 모았었으나 장순(張巡)·허원(許遠)·남제운(南齊雲) 등이 1등이 되었습니다. 국조(國朝)에서도 차운혁(車云革)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절개를 지키다 죽었는데 별로 성적이 없는데도 적개 공신(敵愾功臣)의 반열에 수록되었습니다. 이는 대개 난리에 임하여 갑작스러운 사태에 절의를 권장하기에 급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의병을 일으키고 절개를 지키다가 죽어서 여론에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다만 당초 우연히 빠진 까닭으로 끝내 수록되지 못한 것입니다. 저들도 빠졌는데 신이 무슨 마음으로 참여될 수 있겠습니까. 남들이 장차 ‘자신은 삭제돼야 할 공훈인데 무릅쓰고 수록하고서 남은 반드시 수록해야 할 공훈을 도리어 빠뜨렸다.’ 할 것이니, 대간의 논의가 다시 제기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에 탑전(榻前)에서 면대하여 지당하게 마련하라는 분부를 받들었으니, 조금이라도 미진하게 한다면 성교(聖敎)를 크게 저버리는 것입니다. 공신에 참록(參錄)되는 사람이 1백 10여 인인데 왕사(王事)에 힘쓰다가 절개에 죽은 사람은 하나도 수록되지 않았으므로 동료의 의논도 이것을 온당하지 못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다만 이미 감정(勘定)하였으므로 다시 의논하기 어렵지만 참으로 공론이 이러하니 어찌 이미 정하였다 하여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더욱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신이 말씀드린 것은 관례에 따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리시고 특별히 명하여 다른 대신에게 하문하여 신의 이름을 삭제시키소서. 그리고 타당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다시 충분히 합당하도록 하여 중대한 일이 뒷날 비난을 면하게 해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낙상(落傷)이 매우 중하여 이제야 비로소 무릅쓰고 아뢰니, 몹시 두렵고 민망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처분을 바랍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를 보았다. 녹공하는 일은 이미 재삼 밝혀 바로잡아 상세하고 극진하게 마련하였으니 경이 사양할 수 없다. 사양한다면 의리상 미안한 점이 있다. 경은 양찰하여 사양하지 말기 바란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덕형의 이 차자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데에 밝은 것이라 하겠다. 대저 녹공은 국가의 막대한 일이라 윗사람도 사정(私情)에 따라 부당하게 수록할 수 없는 것이고 아랫사람도 공로가 없는데 거짓되이 수록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거짓이 용납될 수 있겠는가. 이덕형은 자신이 재상 반열에 있으면서 국가가 변란을 당하였을 때 서울에서부터 호종하여 임금의 파천에 함께하지 못하였고 또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불공대천의 원수를 없애지도 못하였으니, 의거할 만한 공로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데도 수록된다면 사정에 따라 부당하게 수록되고 공로가 없는데 거짓되이 수록되는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한때의 시비는 혹 정해지지 않을지라도 천하 후세의 공론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이덕형이 말하지 않으려 하여도 그럴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97책 171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574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議政府領議政李德馨箚子曰:

    伏以, 臣之不可參勳, 上年累箚, 已盡之矣。 不敢更爲煩瀆, 第有所大悶者, 臺諫據公論陳啓, 而旣爲得請, 則臣固在應削之中矣。 非自京扈從, 又非征, 又非特命收錄之人。 三者無一可據, 則以何狀, 而更收於臺諫請削之後哉? 事勢如此, 其不可冒參也決矣。 今乃自己磨鍊, 而他人見削, 已獨參焉, 雖無廉恥,何以自安? 非但此也, 外論俱以爲: ‘起義死節之人, 必須先爲收錄。 室之恢復, 郭子儀李光弼爲(聚)〔最〕 , 而張巡許遠南霽雲等, 爲一等。’ 國朝車云革, 死節於李施愛之亂,別無成績, 而見錄於敵愾之列。 蓋以臨亂倉卒, 勸奬節義爲急故耳。 今者但倡義死節, 爲輿論所稱道者, 亦有其人,特以當初偶爾見遺之故, 終不見收錄。 彼尙見漏, 臣以何心得參? 人將曰: "在己則冒收應削之勳, 在他人, 則反遺必可錄之功。" 臺論雖不更發, 獨不愧於心乎? 曾於榻前, 面承至當磨鍊之敎。 若毫髮未盡, 則其爲負聖敎大矣。 參功者百有十餘人, 而勤王死節, 無一收錄。 僚議亦或以此爲未穩, 特以已經勘定, 難於再議。 苟公論如此, 豈可以已定, 而莫爲之陳達乎? 臣益切慙恧, 不知所處。 伏乞體諒臣之所辭, 非出於循例, 特命詢之他大臣, 減削臣名, 如有未妥者, 更求十分恰當, 使重大之擧, 免爲後議, 不勝至幸。臣落傷甚重, 今始冒昧陳達, 不勝惶恐悚憫之至。 取進止。

    答曰: "省箚。 錄功事, 旣已再三證正, 詳盡磨鍊。 卿不可辭之。 辭之, 義有所未安。 幸卿體諒勿辭。"

    【史臣曰: "德馨此箚, 可謂自知之明矣。 夫錄功, 國家莫大之擧也。 爲上者, 不可循私而冒收; 爲下者, 不可無功而僞錄。豈容毫髮之謬哉? 德馨, 身居宰班, 當國變亂, 旣不能自京扈從, 同君父之播越; 又不能躬冒矢石, 滅不共之讎賊。 是一無可據之功矣。 以此而見錄, 則其冒收於循私, 僞錄於無功者審矣。 一時是非, 雖或靡定, 天下後世, 公議難逃。德馨雖欲無言, 庸可得乎!"】


    • 【태백산사고본】 97책 171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574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