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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01권, 선조 31년 6월 20일 癸酉 3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이덕형이 양 경리를 비방하는 문서에 대해 아뢰다

이덕형양 경리(楊經理)를 만나 말하기를,

"전일 노야께서 정 찬획(丁贊畫)의 본고(本稿)를 보내주셨는데, 그 내용에 수많은 헛소리가 적혀 있었습니다만 노야의 큰 도량에는 일소에 부칠 거리도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병이 일제히 도착하고 군량도 한바탕 마련되어서 대사를 거의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시니, 소인은 괴로와서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니, 경리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세상 만사가 다 운수인 것입니다. 좋게 되는 것도 귀국의 운수요 좋지 못하게 되는 것도 귀국의 운수이니, 국왕께서는 주문(奏文)을 올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또 국왕을 시켰다고 말할까 걱정됩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다릅니다. 우리 나라 사직(社稷)의 존망이 달려 있는데 노야께서 어떻게 그만두실 수 있겠습니까. 노야가 일을 주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두 해이해질까 걱정입니다. 노야께서는 떠도는 잡소리로 인하여 공사(公事)를 구관(句管)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제부터 다시는 사람들과 만나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공사를 구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소방의 존망은 말할 것도 없고 천하의 안위가 달려 있는 큰 사기(事機)가 노야의 한 몸에 달려 있습니다. 노야께서는 어찌 대계(大計)를 생각하지 않고 경솔히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일을 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나는 본디 성품이 솔직하여 털끝만큼도 속이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을 정직하게 행하고 은혜와 원망을 피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지 않는 소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평양(平壤) 이후로 자신이 동사(東事)를 위해 올린 본고(本稿) 및 마 제독(麻提督)의 당보(塘報)와 형 군문(邢軍門)이 본국에 보내온 게초(揭抄)를 꺼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김응서(金應瑞)에 대해서는 군대의 기밀을 누설하였으므로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으로써 논하여 죄를 청했을 뿐이었고, 이원익(李元翼)권율(權慄) 등에 대해서는 왜적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달아났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내가 어찌 왜적에게 투항하고 왜적에게 순응했다고 하였겠습니까."

하고, 또 형 군문의 주고(奏稿)와 마 제독의 당보 중에 기록된 ‘세자(世子)가 청정(淸正)과 서로 통하였다. 각신(閣臣) 유성룡(柳成龍)은 분명히 왜적에게 투항한 이원익 등을 시켜서 청정과 왕래하며 서로 통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보이지 않아서 헤아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등의 말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마진수(麻鎭守)가 이미 이와 같이 잡소리를 하였고, 또 도산(島山)의 싸움에 대해 ‘양 경리는 반 마디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이런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천하의 대사(大事)가 끝내 어찌될 지 모르겠습니다. 조 각로(趙閣老)는 원래 봉사(封事)를 주간하던 자로 참핵(參劾)을 받아 7개월 동안 병을 핑계하고 집에 있다가 지금 갑자기 나와서 일을 보고 있습니다. 정응태(丁應泰)는 조 각로와 서로 친분이 두터운 사람으로 지금 장 각로(張閣老)를 죄에 얽어넣기 위하여 또 일번(一番)의 어지러운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받는 무함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대간(李大諫)은 본래 심유경(沈惟敬)의 중군(中軍)으로 종전에도 일을 그르친 것이 많았었는데, 지금 또 군문의 차위(差委)가 됨을 인하여 사체는 생각하지 않고 한결같이 심유경만을 구출하려 하고 있습니다. 전일 군문의 감군(監軍)이 모두 서공(敍功)해 주어야 한다고 했었는데, 내가 그 정상(情狀)을 미워하여 삭제하고 기록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나에게 죄를 받은 자들이 모두 똑같은 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응태가 또 무뢰배의 모사꾼이 되어 위로는 조 각로와 석 상서 등을 위하고 아래로는 강화를 주장하는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조석으로 계략을 꾸미고 있으며, 또 남쪽 지방에서 나 때문에 제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 자를 빌어서 나에게 원수를 갚으려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부터 남에게 시기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이어 조 각로·석 상서·소 안찰(蕭按察) 등 여러 사람들이 보내온 사서(私書)를 꺼내어 보여주었는데, 조 각로의 편지에는 ‘심유경이 피체(被逮)된 사람들의 말도 많았으니, 대하(臺下)가 조화(調和)시켜 한바탕의 큰일을 완결지어 달라.’ 하였고, 석 상서의 편지에는 ‘불초한 내가 국사를 그르쳐 늙은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장향(瘴鄕)의 귀신이 되게 되었다. 열 살의 어린아이가 왜사(倭事)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 아래에 또 ‘대하가 서공하실 적에도, 행장(行長)이 약속을 지켜 병사를 억제하여 출동하지 않고 있다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봉사(封事)가 이익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일 황상(皇上)께서 처자(妻子)를 불쌍히 여기시어 전리(田里)로 방면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하겠다. 나는 늙고 쇠약하여 머지 않아 땅속에 들어갈 것이니 다시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이대간형 제부(邢制府)의 지시를 받고 행장을 선유(宣諭)하니 행장왜교(倭橋)로 물러나 그 명령을 따랐다. 행장청정(淸正)과 다르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심유경은 지금 대죄(大罪)에 해당되나 그 사이에 용서해 줄 만한 것도 많이 있다. 송 경략(宋經略)손 경략(孫經略)의 생각 또한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세평(世評)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고 큰일을 완성하여 달라. 감옥에서 눈물을 뿌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경리가 말하기를,

"석 노야가 시종 심유경에게 기만당하였습니다. 하늘이 심유경을 내어 허다한 일을 그르치게 하고 또 허다한 사람들도 그르치게 하였습니다. 그대가 보면 알 것입니다만 지금 이후로 반드시 ‘싸움으로는 일이 끝나지 않을 것이니, 기미책(羈糜策)이 제일이다.’라는 의논이 어지러이 일어나서 군정(軍情)이 소란해질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양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고, 웃으며 말하기를,

"행장은 매우 재주가 있어서 천조(天朝)의 대관(大官)들이 모두 그에게 속고 있으니, 그의 재주는 참으로 남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남원(南原)을 공략하여 천병 3천 명을 죽인 것이 행장이 아니고 누구였습니까. 이런데도 행장이 약속을 지킨다고 말들을 하고 있으니, 그는 매우 솜씨가 있습니다."

하였다. 또 형 군문의 수찰(手札)을 꺼내었는데, 그 수찰에 ‘이대간이 충심을 다하여 노력하였으니, 공로가 서훈(敍勳)을 후하게 해야 합당하다.’ 하였다. 경리가 말하기를,

"조 각로가 편지를 보냈는데 내가 들어주지 않았고, 석 상서가 간절히 호소했는데도 나는 국사(國事)라서 따르지 못했으며, 형 노야가 이대간을 서공해 주려고 했었는데 내가 삭제하고 기록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당사자들이 모두 나를 은혜롭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또 문지기를 시켜 변본(辨本)의 초고를 가져오게 하여 보여주면서 정응태의 본고에서 거론한 일에 대하여 조목마다 변명하였다. 이덕형도 그 당시 눈으로 본 일들을 가지고 일일이 그것이 사실 무근한 거짓이라는 것을 변론하였다. 그랬더니 경리가 말하기를,

"정응태압록강(鴨綠江) 가에 있으면서도 도산(島山)의 싸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의 진영(陣營)에 있었는데도 듣지 못하였습니까."

하고는, 크게 웃었다.


  • 【태백산사고본】 64책 10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45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사법(司法) / 군사(軍事)

李德馨楊經理言曰: "前日老爺寄看丁賛畫本稿, 其中有千萬虛說, 老爺大度, 固不滿一笑。 但今大兵齊到, 糧餉亦已發, 一場大事幾完, 而被人弄毁如此, 小的愁苦欲死。 經理笑而答曰: "萬事自有數。 好亦貴國造化, 不好亦貴國造化, 國王不須上本。 恐有人又說我敎他也。" 臣答稱: "這時比那時不同。 小邦社稷存亡所關, 老爺亦烏得闌止? 老爺不幹事, 則只怕衆人俱解。 望老爺勿以流言胡說, 不爲句管事爲也。" 經理曰: "自今以後, 再不爲會客, 再不爲句管公事。" 德馨曰: "小邦存亡, 不須言, 天下安危大事機, 都在老爺身上。 老爺豈不念大計, 而輕易爲此哉? 經理曰: "自古做事難。 我則素性坦率, 毫無隱情。 凡事任直而行, 不避恩怨, 細人多不悅矣。" 因出平壤以後, 自家爲東事所上本稿, 及麻提督塘報、軍門本國揭抄、而指示之曰: "金應瑞則只透漏軍情, 論以賣國請罪, 李元翼權慄等, 則我只以跳趨於所不到之地爲言。 我豈說投乎?" 又指示邢軍門奏稿、麻提督塘報中, 寫稱世子與淸正相通, 閣臣柳成龍明以投 李元翼等, 與淸正往來交通, 今忽不見所在, 事狀叵測等語曰: "我豈爲此語哉? 麻鎭守旣胡說如此, 島山之役, 又說我不得開半句話, 誠可笑也。 此則不須言。 天下大事, 不知終竟何如也。 閣老, 元來主封事之人, 七箇月被參告病在家, 今忽出而(示)〔視〕 事。 丁應泰, 乃閣老之相厚人, 今欲構陷閣老, 又生出一番胡說。 我之被誣, 何足言也? 李大諫, 本沈惟敬中軍, 從前誤事亦多, 而今亦因軍門差委, 不計事體, 一心只欲救出惟敬。 前日軍門監軍, 俱說該應敍功, 而我惡其情狀, 削而不錄。 今於我被罪者, 俱倡起一種論議。 丁應泰又爲無賴輩謀主, 上則欲爲閣老、石尙書等地, 下則與主和諸人, 朝夕計議, 南方群不逞之人, 又托此人, 爲報怨於我。 我自前取嫉於人者, 非一二矣。" 因出閣老、石尙書(肅按察)〔蕭按察〕 諸人私書示之。 之書簡則說: "沈惟敬被逮之後, 人言亦多, 望臺下調和, 以完一場大事"; 石尙書書曰: "不肖誤國事, 老妻童穉, 將作瘴鄕之鬼。 十歲兒子, 何干事?" 云云, 其下又云: "臺下敍功時, 語及行長守約, 按兵不動, 此可見封事不爲無益。 倘皇上見憐妻子, 得放田里, 此爲至幸。 老生年衰, 不遠入地, 更有何望? 李大諫邢制府之敎, 宣諭行長, 行長退在倭橋, 肯從其令。 行長之異於淸正, 此亦驗也。 沈惟敬今當大罪, 其間亦多可恕。 兩經略, 不要多言, 其意亦可知也。 幸勿過持外議, 以全大事。 圜扉淚灑, 不知所云。" 經理說稱: "此老終始爲沈惟敬所瞞。 天生沈惟敬, 誤了許多事, 誤了許多人。 爾看今後, 必有攻戰不了事, 羈縻爲上策之論, 紛然而起, 軍情動搖。 爾看怎麿樣。" 因笑曰: "行長極有才。 使天朝大官, 俱爲渠所惑, 其才眞過人矣。 打破南原, 殺天兵三千者, 非行長而誰歟? 如是而都說行長守約, 此極有本事云云。" 又出邢軍門手札, 說稱: "李大諫赤心效勞, 其功合應優敍云云。" 經理說道: "閣老有書, 而我不聽; 石尙書哀告, 而我爲國事不得從; 老爺欲敍李大諫之功, 而我爭之不錄。 此等事, 人皆以爲恩乎?" 又令門子, 拿辨本草稿示之, 本所言事, 逐件而辨明之。 德馨亦以其時眼見之事, 一一辨其虛誑, 則經理說道: "丁應泰鴨綠江上, 細知島山事, 而爾在陣上, 反不聞耶?" 遂大笑。


  • 【태백산사고본】 64책 10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45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사법(司法)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