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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97권, 선조 31년 2월 16일 辛未 2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경리가 황조에 올린 제본

경리가 황조(皇朝)에 제본(題本)을 올리기를,

"경리 조선 순무(經理朝鮮巡撫) 양호(楊鎬)는 일본의 적추(賊酋)를 거의 사로잡게 되었는데 그들의 외원병(外援兵)이 갑자기 들이닥쳤으므로 삼가 환사(還師)하게 된 편의에 대해 진달합니다. 아울러 신의 심정을 피력하니, 신을 파척(罷斥)하고 재능있는 인물을 특별히 간발(簡拔)하여 황상(皇上)의 신무(神武)를 드날리게 할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신은 만력(萬曆) 25년 12월 4일 독신(督臣)과 회동(會同)한 끝에 군사를 출동시켜 울산(蔚山)에서 서생포(西生浦)까지 연락해서 동해(東海)를 등지고 진격하여 경상도를 곧바로 점령하기로 게시했었습니다. 그런데 좌계(左界)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소굴로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들이 서생포와 기장(機張)의 병력을 이곳에 크게 집결시키고 금년 7월 안강(安康)·영일(迎日) 등처를 침범해 들어와 점차적으로 강원도와 합경도로 진격함으로써 왕경(王京)을 포괄하여 소유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세력으로 하여금 기세를 떨치게 만든다면 우리의 전후 좌우는 모두 서로 호응하여 구제가 어렵게 될 것이니 비록 백만 대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쓸 곳이 없게 됩니다.

청정은 위인이 호걸스럽고 사나와 스스로 잘난 체하는 자인데다 또 관백(關白)의 신임이 더없이 중합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 등 적추(賊酋)들이 그가 있는 곳을 바라만 보고서도 달려가 떠받드는 사람으로서 바다를 건너온 지 수년이래 직산(稷山)에서의 전투와 청산(靑山)에서의 추격에 조금 좌절되었을 뿐이니, 행장평양(平壤)에서 힘없이 무너져 천병(天兵)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안 것과는 다릅니다. 이들을 한번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먼저 황상의 위령(威靈)을 과시하여 그들의 흉봉(凶鋒)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장사(壯士)들이 용맹을 떨쳐 곧바로 적의 진루(陣壘)를 공격하여 40여 리를 박살(撲殺)시킴으로써 견성(堅城)과 대책(大柵) 여러 곳을 격파하였습니다. 그때 불에 타 죽고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은 그 숫자를 셀 수가 없고, 사로잡고 참수된 장교(將校)들도 1천 3백여 명이 넘었습니다. 평소 저축했던 것과 여러 해 동안 준비했던 것을 하루 아침에 완전히 쓸어버렸습니다. 청정은 간신히 빠져 나가 도산(島山)의 소굴로 달아났는데 아군이 다시 공격하면 총탄에 상할까 두려워 긴 성책을 구축하여 지키고 있는 지가 이미 열흘이 넘었습니다.

적이 더욱 군색하고 다급하게 되었다는 것은 항복한 자와 사로잡힌 자들의 말을 근거하여 보면 알 수 있는떼, 그들은 모두 ‘성을 지키는 군사가 3천 명도 안 되는데 중국군의 대포와 화살에 맞아 죽은 자와 기갈에 지쳐 죽은 자들의 시체가 널려 있다. 조총수(鳥銃手)는 겨우 2백 명이 있는데 하루에 생쌀 1홉씩을 먹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대책없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청정이 또 자주 통사(通事)를 불러 품첩(稟帖)을 보내 행장(行長)의 사례에 따라 돌려보내준다면 힘써 여러섬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를 모두 철수하겠다는 뜻을 알리면서 매우 간절히 애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서한을 화살에 매어 성 안에 쏘자 내란이 일어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2∼3일이 못 되어 생포하여 궐하(闕下)에 바치게 될 것은 물론, 부산(釜山) 이서는 힘들이지 않고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수륙(水陸)으로 구원병 수만 명이 일제히 들이닥친 데다가 아군은 군사와 전마가 지쳐 다시 그들과 한번 결전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래 지체하면 불리할까 두려워 마침내 부득이 군사를 풀고 철병하여 회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왜적이 다행히 참수될 시기가 좀 늦추어져서 혼백(魂魄)이 겨우 안정되기는 했지만, 심담(心膽)은 이미 저상되었으므로 머리를 감싸고 서생포(西生浦)로 도주하였습니다.

신이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만전책(萬全策)을 익히 의논하였으나 군사와 말이 오랫동안 노숙(露宿)했기 때문에 관사(館舍)에 머물러 밥을 먹이고 꼴을 먹인다 해도 그들의 기력을 휴양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경주(慶州)의 북쪽 2백여 리에 안동부(安東府)라는 곳이 있는데 저장된 곡식이 많고 또 왜적들이 침을 흘리고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본토 백성들이 우리가 철병하는 것을 보고는 서로 놀라 무너져 흩어지고 있으니, 한 부대의 군사를 머물러 두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을 묶어 진정시킬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노득공(盧得功)·노계충(盧繼忠)·이화룡(李化龍)의 군사를 잠시 그곳에 머물러 두어 조발(調發)에 따르도록 하고 나머지 군영(軍營)의 기병과 보병은 그대로 왕경(王京)으로 돌아가게 하면 동쪽이나 서쪽이나 편리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졸승(卒乘)을 수집하고 기계(器機)를 수리하는 데에는 왕경 이 아니면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이어 여순(旅順)에 있는 주사(舟師)를 오게 하고 남북의 육군을 계속 집결하여 재차 한산(閑山)부산(釜山)을 엿보는 것이 바로 목전에 해야 할 일입니다.

신이 적의 소굴을 다녀보면서 적의 세력을 체탐해 본 결과, 만일 청정이 먼저 기장(機張)을 근거지로 하여 재차 진격한 뒤에 서생포(西生浦)에 웅거하고 또 재차 진격하여 울산에 웅거하여 진격할 적마다 반드시 견고한 성을 만들고 성마다 반드시 산과 바다를 의거하여 만듦으로써 진퇴에 편리하게 하고 군량에 대한 걱정이 없게 한다면, 이는 1년의 공역(功役)으로 격파할 수 없게 됩니다. 행장이 서쪽으로 전라도를 침범할 적에 반드시 해도(海島)를 끼고서 침범해 오는 것은, 대체로 그 의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 해가 못되어 조선의 양 옆구리가 모두 피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속수무책으로 자패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천리 폐허의 땅에 출사해 왔으므로 지구전을 하기가 곤란하니 어떻게 쉽게 일을 끝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승첩(勝捷)하고 돌아간다 해도 아마 얻는 것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督臣)과 신(臣)이 둔전책(屯田策)을 강구해 보았습니다. 전라도의 세곳에 성을 쌓고 각각 기병과 보병의 숫자를 늘려 둔병(屯兵)들을 호위하게 하고 동해(東海)연일(延日) 등처로 울산(蔚山)에서 가까운 곳에도 역시 하나의 성을 쌓아 서방의 왜적을 막는 것과 걸맞게 하여 각각 양수(糧艘)와 전함(戰艦)을 붙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둔전을 경작하는 여가에 때때로 날쌘 기병을 선발하여 왜적의 소굴을 핍박하며 그들의 부락을 소요시키기도 하고 단약한 적을 초멸하기도 하면서 갑자기 사라지고 갑자기 나타나기를 북로(北虜)가 우리 변경을 시끄럽게 하듯이 해야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왜적이 작은 규모로 침범해 오면 서로 연락하여 구원하고 큰 규모로 침범해 오면 뒤에서 대병(大兵)을 내어 공격한다면 좌우가 함께 튼튼하고 전후가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저곳 적들이 이미 노략할 수도 없고 편히 쉬지도 못한다면 또한 해마다 항해(航海)하여 스스로 군량을 실어오면서 빈 산에 앉아 있으려 하겠습니까. 이는 스스로도 편안하고 실제로도 장원한 계책이 되는 것으로, 빠른 시일 안에 왜적을 평정하려면 또한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이 비로소 후속조처를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조선 사람들이 또 극력 성을 쌓을 수 없다고만 핑계될 뿐, 청정도산(島山)에 쌓은 성이 작년 섣달에 시작해서 쌓은 것이지만 견고하고 험악하여 지킬 만한 것으로는 조선 팔도 안에 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점이 염려됩니다. 모름지기 해방도(海防道)와 감군도(監軍道)가 오면 전라도경상도에 분배하여 수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너무도 용렬하고 유약한 자입니다만 요즘 휴명(休命)을 천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주야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며 진격할 적에는 감히 뒤떨어지지 않고 물러갈 때는 감히 앞장서지 않고 있습니다. 제 마음속의 괴로운 심정을 남북의 장사(將士)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꾀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아 마침내 학철(涸轍)에 들어 있던 물고기를 다시 서강(西江)의 물에 놓아주어 활발히 살아나게 하고 말았습니다. 신의 힘으로는 진실로 미칠 수가 없어서 화공(火攻)의 기구를 갖추고 거사하려 하였지만 갑자기 구름이 일더니 비가 이틀 밤낮 동안을 내려 가련한 장사들이 진흙 속에서 쩔쩔매고 있었고, 신은 울면서 기도하였으나 아무 호응이 없었습니다. 또 3일 후에는 서북풍이 미친듯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른 섶을 성곽의 모퉁이에 쌓아 놓고 화공을 기도했으나 채 불을 붙이기도 전에 바람이 또 갑자기 그쳤습니다. 저 비를 내리고 바람을 되돌린 자는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

신은 이 때문에 울분이 터져 피를 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피로가 쌓여 생기는 것이라곤 병뿐으로 죽고만 싶은 심정인데 살이 빠지고 뼈가 녹는 증세는 아직도 낫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는 전장에 나갈 수 없는 실정임을 종정(從征)한 사람들이 실로 함께 보고 있는 바입니다. 신은 스스로 뜻은 있으나 재능이 없어 몸만을 망쳤을 뿐 나라에는 아무 이익이 없는 것에 상심하고 있는 형편인데 어떻게 폐하를 위하여 이 동방의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경략과 총독이 가까운 지역에서 규제하고 있고 감군 어사(監軍御史)는 군중(軍中)을 감찰하고 있으며 새로 온 사도(司道)와 찬획(贊劃)하는 여러 사람이 계책을 내고 있으니, 지력(智力)의 폭주가 전번 인재가 없을 때와는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신은 마땅히 파직되어 돌아가야 하니 위임(委任)받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다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생을 고향에 돌아가 늙어 죽게 함으로써 이역 땅에서 죽어 끝내 어버이에게 시위(尸位)를 안겨 드리는 한이 없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재능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보내 정토(征討)의 일을 전담시키면 군오(軍伍)의 기색(氣色)이 다시 새롭게 되어 바다를 건너온 왜적의 흉포를 깨끗이 탕척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황공히 명을 기다리는 지극한 심정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성지(聖旨)를 받드니,

"동정(東征)에 대한 보고를 누차 받건대, 오로지 그대가 용맹을 발휘하여 앞을 다투면서 몸소 시석을 무릅쓴 데 힘입어 참획이 수없이 많았다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이런 주문(奏文)을 올리고 전혀 난을 평정할 계획을 하지 않는가? 왜적은 속셈이 매우 교활하다. 총독(總督) 등 관리와 함께 힘을 다해 계획을 세워 물리칠 만한 계책을 세우는 데 힘쓰라. 준허하지 않는다. 해부(該部)는 알고 있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9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84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재정-군자(軍資) / 교통-수운(水運)

    ○經理題本於皇朝有曰:

    經理朝鮮巡撫楊鎬, 日本賊酋幾擒, 外援猝至, 謹陳還師便宜, 竝瀝心情, 懇乞罪斥, 另簡才能, 以揚神武事。 臣以萬歷二十五年十二月初四日, 會同督臣發兵, 揭蔚山聯絡西生浦, 負東海直呑慶尙。 左界爲淸正巢穴, 聞其大集西生浦機張兵甲于玆, 的以今歲七月, 入犯安康迎日等處, 欲漸進江原咸鏡道, 包括王京有之。 使其勢得逞, 我之前後左右, 皆難救應, 雖百萬兵, 無所施矣。 淸正豪悍自多, 又關白托重恃力, 行長等酋, 望走所在之人, 渡海以來, 今旣數年, 僅挫於稷山之堵截, 靑山之追逐, 非若行長之委頓平壤, 明見天兵之不可敵。 不一先迫之, 其何以先示威靈, 折其凶銳? 所幸將士奮勇, 徑壓其壘, 撲殺四十餘里, 破滅堅城、大柵數處。 除焚溺死者, 不可勝計, 俘斬其將校, 已一千三百有奇。 其累日所蓄積, 累歲所置, 一朝蕩然若掃, 淸正僅以身免, 奔之島山之窟。 我兵一再仰攻, 惕于彈傷, 設長圍守之, 旣浹旬矣。 賊益窘急, 據示降者, 與我被報者, 同稱: "城守不滿三千, 爲我砲矢所殲, 竝飢渴死者, 橫屍成堆。 僅鳥銃手二百名, 日食生米一合, 餘皆奄奄待斃。" 淸正又屢招通事, 投稟帖, 欲照行長事例放歸, 力能盡撤諸島之兵, 極其乞憐, 臣不之許, 射書城中, 內變欲作。 臣妄意不三兩日, 可生縛而生獻之闕下, 釜山以西, 便不勞力擧矣。 乃水陸救至, 數萬齊來, 我之士馬疲倦, 難復與之決。 一朝久之, 恐其不利也, 遂不得不撤兵回圍, 整旅而還。 此賊雖幸遲其授首之期, 此時魂魄應甫完, 心膽具已喪, 且奉首而竄西生浦矣。 臣與提督麻貴, 熟計萬全, 士馬暴露良久, 就芻糧、依館舍, 不足休養其氣力。 慶州北二百餘里, 有安東府者, 頗儲糧, 又所垂涎之地。 本土人民見撤兵, 轉相驚潰, 非留兵一枝, 無以繫屬鎭定其心, 則以盧得功盧繼忠李化龍兵, 暫住于此, 聽調發, 其餘營馬步, 仍還王京, 庶可東可西, 而卒乘應蒐簡者, 器械應善補者, 又非王京不衛也。 嗣是而旅順之舟師來會, 南北之陸兵續集, 再規閑山釜山, 此在目下正著。 而以臣履歷賊巢, 體體賊勢, 如淸正先據機張矣, 再進而后, 據西生浦, 又再進而據蔚山, 每進必爲堅城, 每城必依山海, 取便於進退, 無憂乎兵食, 此非一年之功, 而行長之西侵全羅, 必傍海島者, 蓋亦正用此著。 不兩年, 朝鮮兩脅, 俱被害, 若人處囊中, 束手自蹙耳。 而我出師于千里丘墟之地, 難以持久, 豈宜易完? 如今克捷以歸, 恐不多得。 督臣與臣, 講屯田之策。 全羅道宜竝築三城, 各加馬、步, 以衛屯卒, 而東海延日等處近蔚山者, 亦築一城, 以擬西賊, 仍各附以糧艘、戰艦。 屯種之餘, 時時以輕騎, 逼巢, 或撓其聚落, 或勦其奇零, 倐去倐來, 若北虜之擾我邊地然, 如小犯, 則聯絡援救, 如大犯, 自后出大兵擊之, 胸肩俱壯, 腹背無憂。 在彼旣無所虜掠, 不得寧息, 則亦何樂於年年航海, 自輸糧以坐空山哉? 此自寬著, 實自長策。 卽朝夕平, 亦計必出此始, 足善其後。 但恐朝鮮人又以力不能築城爲辭, 而不知淸正 島山之城, 亦昨歲臘月始築之, 其堅嶮足守, 則朝鮮八道所未有者。 亦須海防道與監軍道至日, 分而理之矣。 臣最庸懦, 頃以不能對揚休命是懼, 晝夜親冒矢石, 進不敢後, 退不敢先。 一腔苦情, 南北將士所知。 惟是知小不可以謀大, 遂令涸轍之魚, 復圉圉洋洋於西江之水。 臣之力量, 固自不逮, 乃火攻之具已備, 將擧事, 天忽作雲下雨, 窮兩日夜, 可憐將士, 跼蹐水淖中, 臣泣而禱之無應。 再隔日, 西北之風狂發。 復積薪城隅, 未及燎, 風又頓息。 彼止日反風者, 獨何人哉? 臣爲此憤恚嘔血, 積勞所發, 徒病欲死, 肉損骨銷, 猶不止。 不復堪驅馳, 從征諸人實共覩之。 臣自傷有志無才, 秪殃其身, 無益于國, 豈能爲(階)〔陛〕 下, 了此東事? 而況有經略、總督, 綱維于近地, 監軍御史, 擧察于軍中, 新來司道、贊畫諸人, 宣猷展采, 當智力輻輳, 絶非曩者乏才之時。 臣宜罷歸, 仍願治臣委任不稱之罪。 但乞餘生, 返衰絰于隴畝, 無致塡壑於異域, 終抱尸位遺親之恨。 另簡才能者前來, 專征討之事, 庶軍伍之氣色更新, 海氛之淸蕩無難矣。 臣不勝惶恐待命之至。 奉聖旨, 屢報東征全籍, 奮勇爭先, 親冒矢石, 斬獲數多, 何遽遂有此奏, 專無靖難之計? 情甚狡。 遂與總督等官, 竭力籌畫, 務爲萬全退之計。 不準。 該部知道。


    • 【태백산사고본】 62책 9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84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재정-군자(軍資) / 교통-수운(水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