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언·성윤문이 적과의 전투 상황과 후퇴 사실을 알리다
충청도 절도사 이시언(李時言)과 경상좌도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지난달 23일 중국군을 따라 울산의 적 소굴에서 싸운 형세와 27일 두 번째 싸운 내용은 이미 도원수 권율에게 치보(馳報)하였습니다. 이달 2일 서생포(西生浦) 등처에 있던 적들이 마주 보이는 먼 봉우리로 다수 나와서 깃발을 많이 설치 하였습니다. 3일 먼 봉우리에 있던 적들이 점차 내려와 적의 보루 건너 편 교외까지 깃발을 날리며 달리기도 하고 혹 전탄의 남쪽 산에 줄지어 서기도 하였습니다. 또 정예병 50∼60명이 산 아래로 내려왔는데 중국군이 감히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하였고, 한 차례 서로 싸운 뒤에는 진을 풀고 물러났으며, 산위에 있는 적들은 깃발을 세우고 주둔하였습니다. 신들 역시 도원수의 분부에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전탄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그날밤 중국군이 성을 공격하고자 하여 큰 횃불을 만들어 사면을 포위하고 진격하였습니다. 자정(子正)에 시작하여 날이 밝을 때에 그쳤는데, 적의 탄환이 비오듯 하여 사상자가 매우 많았으며 한 사람도 성에 다가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4일 이른 아침에 먼 봉우리와 산속에 있던 적들이 제각기 오색(五色) 깃발을 짊어지고 산 꼭대기에 있던 적들과 합쳐 봉우리의 주위 10리에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리의 숫자는 2천∼3천 명을 넘지 않았고 산속에 있는 적들도 수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평지에서 서로 충돌하여 싸운다면 짓밟아 궤멸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후(午後)부터 전탄을 지키던 기마병이 점차 빠져나가고 적을 포위하고 있던 우협(右協)의 병사들도 점차 포위를 풀고 물러났습니다. 적선 수십 척이 나란히 강가에 정박하여 혹 육지에 오르는 자가 있어도 축출하지 않고 거의가 포위를 풀고 나왔으며 복병(伏兵)을 설치한 곳고 없었습니다.
사람을 시켜 중국 장수가 주둔한 곳을 바라보게 하였더니, 곳곳에 불이 피어오르는데 모두 화약을 태우는 냄새였으며, 진에 남아 있던 병자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중국 장수가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먼저 보병을 내보내고 스스로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뒤를 막으면서 후퇴한 것을 알았습니다. 전탄을 지키던 절강(浙江)의 보병(步兵) 기병(騎兵)도 장수가 이미 후퇴한 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당황하여 도망치자, 산위에 있던 적들이 줄을 지어 내려와 한꺼번에 시살(廝殺)하였는데 보병 중에 살아서 돌아온 자가 많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기마병으로서 죽음을 당한 자도 그 얼마인지 모르며 혹은 갑옷과 투구를 내버리고 맨몸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는데 아군의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당했던 대세(大勢)가 순식간에 꺾이고 다 죽어가던 적이 도리어 흉독(兇毒)한 기세를 멋대로 부렸으니 진실로 통곡할 일입니다.
신들은 도체찰사(都體察使)의 분부로 경주(慶州)에 웅거하면서 변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한 도 가운데서 한 모퉁이를 담당할 만한 것은 경주와 울산 등 고을의 병사들인데 이번 건초와 방패를 메고 화공하던 싸움에서 거의 다 전사하였으며 군량을 책출(責出)할 만한 곳은 안동(安東) 등 6∼7고을의 백성들인데 이번 군량 운송의 부역에 힘이 고갈되었습니다. 뒷날의 일을 다시 기대할 수 없는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365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교통(交通) / 재정-역(役)
○忠淸道節度使李時言、慶尙左道節度使成允文馳啓曰: "臣等將前月二十三日, 協隨天兵, 蔚山賊窟接戰形勢及二十七日再戰緣由, 已爲馳報於都元帥權慄矣。 當今月初二日, 西生浦等處之賊, 多數出來于相望遙峯, 多張旗幟, 而初三日遙峯之賊, 漸漸流來, 或飛揚於賊壘越郊, 或列立於箭灘之南山。 又以精兵五六十, 下山底, 而天兵不敢逼, 一度相戰, 均解而退, 山頂之賊, 建旗屯宿。 臣等亦以都元帥分付, 亦爲領兵, 遮截于箭灘, 其夜天兵, 且欲攻城, 造大炬, 四圍而進。 始自子夜, 天明乃罷, 而賊丸如雨, 死傷甚衆, 無一人抵城者。 初四日早朝, 遙峯及山內之賊, 各負五色之旗, 添於山頂之賊, 迤峯十里, 接肩而立, 然其衆多不過數三千, 山內之賊, 亦不過數萬。 假使衝突而相戰於平原, 則蹂躪可滅, 而自午後, 箭灘把守騎馬等, 稍稍流下, 圍賊右協之兵, 漸次解出。 賊船數十, 列泊於岸, 或有下陸者, 而亦不驅逐, 殆盡解出, 亦無伏兵之地。 令人望見, 則 天將所住, 處處起火, 皆是燒藥之氣, 而疲病之留陣者, 叫呼之聲動地, 然後始知天將之退兵, 先將步軍流出, 自領騎兵, 殿後而退。 箭灘把守浙江步兵及騎兵, 亦不知其將之已退, 終乃蒼黃顚倒而走, 山頂之賊, 魚貫而下, 一時廝殺, 步軍生還者無多, 而騎兵之被死者, 亦不知其幾, 或棄甲卸冑, 赤身而出, 我軍死傷者亦衆。 堂堂大勢, 頃刻摧折, 已死之賊, 反肆兇毒, 誠可痛哭。 臣等以都體察使分付, 據住慶州待變, 而一道之中, 可當一隅者, 慶、蔚數邑之兵, 而盡死於柴牌之戰, 責出軍糧者, 安東等六七邑之民, 而力竭於輸輓之役。 後日之事, 無復可望, 罔知所措事。"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365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교통(交通)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