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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59권, 선조 28년 1월 10일 癸未 1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주강에 《주역》을 강하다. 정탁 등이 기축 옥사의 원왕을 풀 것 등을 청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강하여 《주역》의 건괘(乾卦)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이덕형(李德馨)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용렬하여 평시에 큰일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상인(喪人)으로서 국가의 막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전에 병조에 있을 때 국사에 전심하였다. 경의 힘을 힘입어 적을 토멸하게 된다면 어찌 경을 임용한 실효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신이 성상께서 주야로 걱정하시는 마음를 본받아서 날마다 병마(兵馬)를 조련하고 기계를 수치(修治)하는 것으로 일삼아 장려하고 교훈하기에 태만하지 않았더니 몇달 동안에 꽤 성과가 있었으므로 신은 이대로 하여 마지 않는다면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반년 동안 밖에 있다가 지금 소명을 받고 와서 옛 소임을 살폈더니, 인심은 해이해지고 백사는 와해되었습니다. 비록 법도를 경장하고 인재를 수습하려 해도 조소가 날로 집중되고 훼방하는 말이 홍수처럼 흘러 나오며, 혹자는 말하기를 ‘검술은 우리 나라의 장기가 아니니 무익한 짓을 할 필요가 없고, 군사의 교련은 적을 막는 근본이 아니니 무용한 군졸을 훈련할 필요가 없다.’ 합니다. 뭇 사람의 말이 이와 같으니, 신이 강변할 수 없습니다."

하니, 【이덕형이 자신을 칭찬하는 듯한 발언을 하니, 참으로 가소롭다. 】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어리석은 말이다. 비유하자면 평범한 사람이 자제를 가르치되, 반드시 그 자제가 효제(孝悌)·충신(忠信)을 하게 하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비록 효제·충신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사람마다 효제·충신을 않는다 해서 자제를 가르치는 도리를 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정탁이 아뢰기를,

"상교가 이렇게까지 자상하시니, 감격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덕형에게 이르기를,

"경 한 사람을 임용하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경을 믿을 것이니, 더욱 힘쓰라."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비망기(備忘記)에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당해서는 마땅히 천도를 본받아야 한다.’라는 하교를 삼가 보고 감격함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제왕(帝王)의 학문은 한 글귀, 한 마디 말을 마땅히 한 몸에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옥중에 있는 죄수를 마땅히 너그럽게 놓아주어야 합니다. 한 부인의 원한이 3년의 가뭄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축년의 일로 말하면, 국가가 불행하여 조정의 의논이 각각 갈라져 역적이 진신(縉紳)의 사이에서 일어났으니, 당시의 사대부가 어찌 그 역모를 다 알았겠습니까. 오직 성명께서 통촉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일망 타진할 계책을 행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명제(漢明帝)초왕(楚王) 영(英)의 옥사에서 한랑(寒朗)은 생사를 돌보지 않고 끝내 명제로 하여금 깨닫게 하였으므로 이 비록 반역은 하였으나 결국 파급된 원한은 없었던 것입니다. 전번에 비록 대간이 설원하자는 차자를 올린 적이 있으나 대신이 병고가 있어서 회계하지 못하였으니, 그 역모조차 알지 못하고 죽은 자를 추후로 신원시키소서."

하고, 정탁은 아뢰기를,

"말이 이왕 나왔으니, 감히 주달하겠습니다. 위에서 이미 정상을 통촉하셨는데, 어찌 감히 사정(私情)으로 위를 번거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선왕조에 있었던 원왕(冤枉)의 일을 변혁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변혁해야 할 것입니다. 노수신(盧守愼)은 본래 청망(淸望)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처럼 뜻이 잘 맞기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라고 생각하였는데, 역적의 변이 갑자기 진신들 사이에서 나오리라는 것을 헤아렸겠습니까. 이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데 밝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가하거니와, 어찌 역모에 대한 실정을 알았을 리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수신은 그때 죄적(罪籍)에 들지 않았다."

하였다. 정탁이 아뢰기를,

"비록 죄는 입지 않았으나 위에서 지금까지 미처 통촉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감히 주달하는 것입니다."

하고, 【기축년의 변에는 원왕(冤枉)이 매우 많았으니, 통탄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노수신이 견책을 당한 것으로 말하면, 위에서 그가 전일에 정여립(鄭汝立)을 추천한 것을 노여워한 것이지 역모의 정상을 알았다고 해서는 아니었다. 】 또 아뢰기를,

"정언신(鄭彦信)은 스스로 순수한 마음으로 순국하리라 다짐했었으니, 그때에는 비록 미진한 일이 있었지만 만일 이때를 당하게 되었다면 반드시 국사에 마음을 다할 것입니다. 【정언신은 비록 추솔하고 무식하나 과연 국사에는 마음을 다하였다. 그가 정승으로 뽑혀 입시하여서는 맨 먼저 궁중에 폐총(嬖寵)이 많은 것을 지적하였으니, 이는 당시에 유식자도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고 알려졌었다. 역변이 일어나던 초기에는 역모의 자취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무고임을 의심하였고, 정언신은 동성(同姓)의 친후한 사람으로서 그의 생각에는 정여립이 역모를 했으리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망발을 하기도 하고 혹은 겁을 먹기도 하여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가 끝내는 형벌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또한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 당초에 역적을 추천한 것은 바로 이이(李珥)정철(鄭澈)이 한 짓이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임진년의 변이 일어나던 초기에 적봉(賊鋒)이 창궐하여 하늘을 능가할 듯한 기세가 있었으므로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국도(國都)를 옮겨서 보존을 도모하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 일을 가지고 이산해(李山海)에게 죄를 돌림으로써 이산해도 지금 해곡(海曲)에 귀양가 있는데, 병이 들어 장차 회생하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만일 사면을 입게 된다면 천은이 망극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진년의 변란 당시에는 피차를 막론하고 모두 이산해에게 죄를 돌렸다. 그것은 이산해가 서행(西幸)을 수창(首唱)한 일뿐만 아니라, 그가 감히 국도를 옮겨 보존을 도모하자는 것으로 상을 현혹시켰기 때문이다. 통탄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


  • 【태백산사고본】 35책 5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41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癸未/上御別殿晝講, 講《易》乾卦。 講畢, 李德馨進曰: "臣本庸劣, 在平時不堪當大事。 今爲罪人, 荷國家莫大之任, 不知所出。" 上曰: "卿前在兵曹, 盡心國事。 荷卿之力, 若得討賊, 則豈非任卿之實效乎?" 德馨曰: "臣體聖上夙夜之念, 日以操鍊兵馬, 修治器械爲事, 崇奬敎訓, 罔有懈怠, 數月之間, 頗有成效。 臣以爲若此不已, 其庶有爲, 半年在外, 今始赴召, 察其舊任, 則人心解弛, 百事瓦裂, 雖欲更張法度, 收拾人才, 嘲笑日集, 毁言橫流, 或者曰: ‘劍術, 非我國之長技, 不必爲無益之擧; 敎師, 非禦敵之根本, 不必訓無用之卒。’ 衆言若此, 臣不强辨。" 【德馨有若自譽者, 誠爲可笑。】 上曰: "此言愚矣。 比如凡人之敎子弟, 必欲其孝悌忠信, 而敎之人人, 雖不能爲孝悌忠信, 豈可以人人不能孝悌忠信, 廢敎子弟之道乎?" 曰: "上敎至此, 不勝感激。" 上謂德馨曰: "任卿一人足矣。 予恃卿矣, 更加勉礪。" 經世曰: "臣伏見備忘記, 當春發生, 宜體天道之敎, 不勝感激。 帝王學問, 一句一語, 當體驗於一身矣。 時在獄中者, 固宜疏放。 一婦之冤, 致三年之旱。 以己丑事言之, 國家不幸, 朝廷議論各立, 逆賊起於縉紳之間, 一時士夫, 豈盡知其逆謀乎? 聖明洞燭, 故渠等未得售一網打盡之計矣。 明帝時, 楚王 之獄, 寒朗不顧死生, 終使明帝開悟, 雖反逆, 終無波及之冤。 頃日雖有臺諫伸雪之箚, 大臣有病, 未能回啓, 請追伸其不知逆謀而死者。" 曰: "言端已出, 故敢達。 自上洞燭情狀, 何敢以私情上瀆乎? 先王朝冤枉之事, 可變革則尙變之矣。 盧守愼, 本以淸望之人, 自以爲君臣際會, 千載一時, 豈料逆賊之變, 遽出縉紳之間? 若以此人, 知人不明則可也? 豈有逆謀知情之理乎?" 上曰: "守愼, 其時不在罪(藉)〔籍〕 中矣。" 曰: "雖不被罪, 自上至今, 未及洞燭, 故敢達。" 【己丑之變, 冤枉甚多, 可勝痛哉? 若夫守愼之獲譴, 則自上怒其前日之推薦, 非謂其知情也。】 又曰: "鄭彦信, 自以爲一心(絢)〔徇〕 國。 其時雖有未盡之事, 若當此時, 則必盡心國事矣。 【彦信, 雖麤率無識, 果盡心國事。 及其擢相入侍, 首言宮中多嬖寵。 此當時號爲有識者所難也。 至於逆變之初, 事迹未彰, 人皆疑其誣告, 彦信以同姓親厚之人, 其意不以爲然, 故其時或妄發, 或畏怯, 不以實對, 終至於受刑, 不亦冤乎?】 當初推薦逆賊者, 皆是李珥鄭澈之所爲也。" 又曰: "壬辰變初, 賊鋒猖獗, 有滔天之勢, 雖有智者, 末如之何。 遷國圖存, 古亦有之。 其時以此事, 歸罪於李山海, 山海今者謫在海曲, 病將不起云。 未死之前, 若得蒙赦, 則天恩罔極。" 【壬辰之變, 勿論彼此, 皆歸罪山海者,非但首唱西幸一事也。 渠敢以遷國圖存, 熒惑上聽。 可勝痛哉!】


    • 【태백산사고본】 35책 5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41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