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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51권, 선조 27년 5월 26일 癸卯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별전에서 신하들을 인견하고 주청·봉공, 이정암의 처리 문제, 덕빈의 초혼장 문제 등을 논하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흥원(崔興源),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정곤수(鄭崑壽), 우찬성 최황(崔滉), 호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이조 판서 김응남(金應南), 좌참찬 성혼(成渾), 형조 판서 신점(申點),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 대사간 이기(李墍), 대사헌 김우옹(金宇顒)을 인견하였는데, 동부승지(同副承旨) 강찬(姜燦), 수찬(修撰) 정엽(鄭曄), 가주서(假注書) 최천건(崔天健), 검열(檢閱) 성진선(成晉善)·장만(張晩)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사(時事)가 어떠한가?"

하니, 최흥원이 아뢰기를,

"호 참장(胡參將)의 문서(文書)에는 마땅히 답해 보내야 하지만 저번에 비로소 분부(分付)가 계셨으므로 부득이 계하(啓下)한 뒤에 그 초고(草稿)를 가지고 가서 보여야겠습니다. 변보(邊報)에 따라 적정(賊情)에 관한 내용이 동일하지 않으나 대체로 요즈음에는 별로 노략질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수(金睟)의 장계와 중국 조정의 통보(通報)를 가져다 보니, 우리 나라에서는 애당초 일을 그르친 혐의가 없었는데 동정(東征) 나온 중국 장수들의 대다수가 과도관(科道官)의 논박을 받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모두 우리 나라가 중상(中傷)했기 때문이라고 여겨, 어떤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음험하고도 야박하다고도 하는데 그 말이 참으로 미안하고 그 일도 안타깝습니다. 이 일을 미루어 볼 때 군사와 군량을 청한다 해도 반드시 얻지 못할 것이고 석 상서(石尙書) 【중국의 병부 상서인데 이름은 성(星)이다. 】 뜻도 그러하니 제청(題請)한다 하더라도 필시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가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적을 초멸하지는 못하더라도 믿음직하기는 할 것입니다만 철군한다면 우리에겐 모든 일에 있어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니 민망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주청의 조사(措辭)와 결미(結尾)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여러 재신들도 모두 조사에 대하여 어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황은(皇恩)을 입어서 감격하다는 뜻과 근일의 적세를 실상대로 솔직하게 아뢸 따름입니다. 봉공(封貢)하는 일에 대해서는 중국 조정의 처치에 달려 있는 것이니 우리 나라가 어떻게 감히 이에 참여하겠는가라는 내용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조정의 통보(通報)를 보건대, 정론(正論)이 끊겼다. 우리 나라가 전후의 말을 다르게 한다면 반드시 반복한다고 지목할 것이고 과도관(科道官)도 그르게 여기는 뜻이 없지 않을 것이어서 그 조사가 매우 곤란하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김수의 장계를 보건대, 송응창(宋應昌)이여송(李如松)의 무리가 우리 나라 사람을 제일 깊이 원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전일 힘을 다하여 왜적을 초멸했다는 것을 진달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최황은 아뢰기를,

"와전(訛傳)된 말이어서 분명한 것 같지 않고 또 구전(口傳)된 말은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송응창·이여송의 무리가 우리 나라의 일로 왔다가 우리 나라의 일로 죄를 입었으니, 참으로 미안합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정암의 장계에 ‘인심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도 혹 이런 의논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나에게 알렸어야 옳다."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왜적은 속임수가 심해서 봉공을 허락한다 해도 우리 나라를 겁박하여 억제하는 말이 아마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아직은 말한 자가 없었는데 정암이 먼저 말했으니 매우 괴이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암을 체직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각자 소견을 개진하라."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장계로 보면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세가 매우 급박한데 체직시켰다가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그대로 유임시키는 것만 못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장계의 내용이 너무 잘못되었으니 반드시 체직시켜야 합니다. 이 말을 왜적들이 듣게 된다면 반드시 깊은 우환이 있게 될 것입니다. 변몽룡(邊夢龍)의 일도 이와 같은 것이니, 요즈음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우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하고, 곤수는 아뢰기를,

"장계의 사연이 놀라우니 중죄(重罪)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세가 매우 위급한 데다 호남 지방이 더욱 심합니다. 정암이 오랫동안 호남을 맡고 있었으니 반드시 대비책이 있을 터인데 하루아침에 체직시켰다가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나갈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말을 시행하지 않으면 그만이니 준엄하게 나무라고 그대로 유임(留任)시키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고, 최황은 아뢰기를,

"소신은 재식(才識)이 없으므로 알 수가 없습니다만 일국의 시비 가운데 이것이 바로 큰 것이라고 봅니다. 만일 조정이 이 의논을 징계하지 않았다가 왜적이 이 말을 듣게 되면 반드시 더욱 업신여길 것입니다. 인신(人臣)의 입에서 이런 무상(無狀)한 말이 나오게 되면 국가가 끝내 국가답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명원(命元)은 아뢰기를,

"최황의 말이 직절(直截)하여 가상히 여길 만합니다. 그러나 정암은 단지 민망하고 절박한 소견을 계달한 것뿐이니, 조정에서는 그의 잘못만 나무라고 그 직에 잉임시키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고, 응남(應南)은 아뢰기를,

"이정암의 일은 장계의 내용으로 보면 매우 놀랄 만한 일이나 시세로 본다면 우리 나라는 지탱할 만한 형세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정에 인재가 매우 모자라고 있습니다. 정암은 인품이 단정하고 중후하여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니 그 잘못을 나무라고 그대로 쓰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고, 성혼은 아뢰기를,

"정암의 일은 큰 망발이라서 보고 듣기에 놀라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에서 듣는다면 또한 대의(大義)가 없어졌다고 할 것입니다. 구구히 일맥(一脈)으로 지켜온 의(義)가 지금에 와서 모두 없어지게 되었으니 체직시켜야 합니다. 다만 그의 정사(情事)로 보면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코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말을 하면 죄가 뒤따를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절의(節義)에 죽는 자처럼 자신을 허여하였으니 중죄로 다스려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를 대신할 자는 작질(爵秩)을 논하지 마소서. 위급할 때를 당해서는 옛날에는 도적으로 장수를 삼은 사례도 있었으니 반드시 덕망이 무거운 사람을 얻어서 제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암의 일을 어찌 절의에 죽는 것이라고 하는가? 입언(立言)이 이러하니 말할 수가 없다."

하자, 성혼이 아뢰기를,

"소신이 실언(失言)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자기 몸을 잊는 것이 되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걱정하여 몸을 잊고 절의에 죽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라 일이 어찌 크게 잘못되지 않겠는가."

하면서, 상의 사기(辭氣)가 매우 엄해지자, 성혼이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소신의 말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탓입니다. 신의 뜻은, 이것은 매우 해괴하고도 경악스런 말로 그가 장계할 때에 죄책(罪責)이 있을 것을 알았을 터인데도 오히려 결연하게 말을 하여 절의에 죽을 사람으로 자처함으로써 스스로 불의의 경지에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의(語意)가 어긋나서 위의 분부가 계시게 하였으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비를 살피지 못하고 자기 뜻만을 말하였는데,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걱정하여 몸을 잊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에게 어찌 내가 중죄를 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말이 큰 변고의 말이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신점(申點)이 아뢰기를,

"정암을 체직시키지 않으려는 것이 그를 대신할 만한 자를 얻기가 어려워서라고 하는 말은 고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체직하지 않고 그대로 변방에 둔다면 훈련(訓練)하는 일에도 어찌 마음을 다 기울이겠습니까. 듣고 보는 자들도 해괴하게 여길 것이니 체직시켜야 합니다."

하고, 이기는 아뢰기를,

"인심(人心)을 따르라는 말 때문에 상께서 조정에서도 이 의논이 있었느냐고 하문하셨는데 조정에서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향리 사이에서도 식견이 있는 자라면 어찌 이런 말이 있겠습니까. 세력이 약하고 힘이 없어 한 말이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이런 불의(不義)의 말을 한단 말입니까. 군중(軍中)에서 이 말을 듣는다면 반드시 조정에서도 일종의 의논이 있었던 것으로 여길 것이니, 파직시켜 견책(遣責)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고, 김우옹은 아뢰기를,

"그의 뜻이 나라를 걱정하는 데서 나온 것일지라도 그 말이 대의(大義)에 관계되니 체직만으로 징계할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이 한결같지 않으니 절충하는 일은 대신에게 달려 있다.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심충겸(沈忠謙)이 아뢰기를,

"소신의 의견은 여러 재신(宰臣)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정암의 의사에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대의에 관계되는 말을 하였는데도 정암을 용서한다면, 인심이 안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체직에만 그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송(宋)나라로 말하면 강남(江南) 한 구석에서 천운을 보존하기가 어려웠으니, 병력의 쇠잔함과 시세(時勢)의 급박함을 미루어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강화(講和)의 말이 한번 일어나자 만세까지도 이를 갈았습니다. 대의가 있는 일을 어찌 위박(危迫)하다고 하여 지키던 바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힘을 다하여 스스로 힘써 가는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왜적이 국경에 주둔하고 있는데 강화의 의논을 이미 창도(唱導)하였으니, 정암으로 하여금 그 직에 있게 한다면 삼군(三軍)이 반드시 해체(解體)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타의 시비와 대의(大義)는 우선 제쳐놓고 모책(謀策)에 대해서만 말한다 하더라도 저 왜적이 삼포(三浦)의 길을 열지 못해서 이렇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세견선(歲遣船)을 보내지 못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 삼포의 길을 열어주고 세견선을 받아준다 해도 반드시 침략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바로 천하를 모두 삼키려고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다. 삼포의 길을 열어주고 세견선을 받아주자는 말에 대해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하였다. 신점이 아뢰기를,

"왜적은 오히려 그것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정암이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잘못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뜻은 없다고 하더라도 이 말이 매우 해괴하다. 체직시키지 않는다면 장사(將士)들은 반드시 싸우지 않으면서 ‘감사가 강화할 것을 마음 먹고 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애써 싸운단 말인가.’고 할 것인데, 이러한 마음이 한번 싹트게 되면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이 사람을 죄준 다음에야 대의가 바로 서게 되고 국시(國是)가 정해질 것입니다."

하고, 정엽은 아뢰기를,

"송나라에서 화의(和議)를 제기했던 사람은 지금까지도 소인이라 일컬어짐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이는 양제(兩帝)가 화란을 입었는데도 원수를 갚지 못하고 기꺼이 오랑캐에게 신복(臣僕)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을 몰라 대의가 완전히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능원(陵園)의 변고를 당한 것도 이와 다를 것이 없는 일이니, 상하의 인심이 오히려 피를 뿌리고 울음을 삼키면서 날마다 그 원수를 갚을 일을 생각하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호남(湖南)은 본시 의기(義氣)가 있는 지방인데 조정이 이 사람을 치죄하지 않는다면 한 지방의 인민(人民)들이 크게 실망할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상께서 대의를 굳게 지키고 계시니 이는 신민(臣民)들의 복이라 하겠습니다. 요즈음 인심이 훼상(毁傷)되고 언로(言路)가 막혀 이처럼 큰 이해(利害)가 달린 일을 당해서도 직언(直言)과 과격한 의논을 하지 않으니, 신은 성상의 포용하시는 도량에 미진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번 백성들을 진휼할 적에 성상께서 심지어 옥식(玉食)까지도 나누어 주셨는데 예로부터 임금의 일을 헤아려봐도 어찌 이같은 성대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아래에서 받들어 시행하지 않으면 그 은택이 백성들에게 내려가지 않는 법이니, 수령까지도 모름지기 극선(極選)한 다음에야 민심이 화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신과 같은 자는 매우 노둔하고 용렬하지만 잔패(殘敗)한 고을을 주신다면 어찌 감히 성상을 위하여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성상께서 대의를 지키시더라도 의를 지키는 실상을 독실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의를 지킴이 독실하지 않으면 필경에는 헛된 데로 돌아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정암의 체직 여부에 대한 일은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오직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어찌 모르겠는가. 잘 헤아려서 결정하라."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심수경(沈守慶)유성룡(柳成龍)이 모두 병으로 오지 않았으니 신이 그 가부를 독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 체직시켰다가 그 후임이 적격자가 아니면 차질(差跌)이 생길 우려가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공론(公論)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어떻게 조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혹 체직시킨다면 누가 대신할 만한가?"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호남은 매우 중요한 지방이므로 반드시 깊은 모책과 원대한 계려를 가지고 있는 자라야 합니다. 그러니 다른 대신과 의논한 다음에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기가 아뢰기를,

"익성도정(益城都正) 이향령(李享齡)을 파직시키는 일과 색승지를 파직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망설이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미 추고하였으니 파직시켜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든 재상들이 자리에 있으니, 정암을 체직시킨다면 누가 그의 후임에 합당한가를 말하라."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전에 서로(西路)에 있을 적에 윤승길(尹承吉)구성(龜城)을 잘 다스린 것을 익히 알았으니 그에게 방면(方面)의 직임을 맡긴다면 주밀하게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윤승길은 이때 강원 감사였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잘 다스리고 자상(慈詳)한가? 재간과 책략(策略)도 있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고 상의 명령도 잘 봉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곤수가 아뢰기를,

"위에서 신하를 접견하실 때 홀로 예복(禮服)을 입으시고 신료(臣僚)들은 모두 군복을 입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그러나 이같이 와신 상담(臥薪嘗膽)해야 할 때를 당하여 어떻게 예복을 갖추겠습니까. 고양겸(顧養謙)의 자문(咨文)에도 ‘옷은 채복(彩服)을 입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적을 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변례(變禮)로 말한 것입니다. 위 문공(衛文公)이 위(衛)나라에 있을 적에 대포의(大布衣)와 대백관(大帛冠)으로 거처하였으니, 원래 임금은 검덕(儉德)으로 신하를 통솔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중외(中外)가 판탕된 때라서 더욱 검덕을 숭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위 문공처럼 대포의와 대백관을 착용하실 마음을 가지시면 신하들도 반드시 본받을 것이니, 중흥(中興)할 때에는 비용을 줄이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백성들만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들도 죽고 있어서 보기에 참혹합니다. 더구나 능원(陵園)의 변마저 있지 않았습니까. 온갖 일을 모두 줄여야 합니다. 전에 서방(西方)에 있을 적에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로 있었는데 면주(綿紬)가 마침 떨어져서 금채(錦彩)로 지어 올렸더니 상께서 ‘이런 때에 어찌 이런 물건으로 지어올렸는가.’고 분부하셨으니 그 전교야말로 참으로 지당한 것이었으며 그 일은 소신의 죄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저 융의(戎衣)를 입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 주된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니, 곤수가 아뢰기를,

"어가(御駕)가 서로(西路)에 머물러 계실 때에는 융복을 입으셨고 또 복색(服色)에 문채가 있었으므로 감히 아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뜻은 훌륭하다. 그러나 이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므로 임금은 관복(冠服)을 입고 신료들은 융복을 입어도 된다."

하니, 곤수가 아뢰기를,

"금의(錦衣)와 호구(狐裘)가 복식이지만 대백(大帛)·대포(大布)를 입는 것은 변고에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용이하게 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좌우의 신료들도 소견이 있으면 말하라."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관복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될 듯합니다."

하고, 신점이 아뢰기를,

"입시한 제신들은 갖추어 입을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간략하게 하는 것인데, 신하들이 이와 같이 한다고 하여 성상께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근수에게 묻기를,

"관복에 대한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곤수의 뜻은 여러 신하들이 모두 융복을 입고 있는데 주상께서 홀로 관복을 입으시는 것이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곤수는 아뢰기를,

"경기전(慶基殿)·집경전(集慶殿)에 봉안된 수용(睟容)105) 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겼으니 위안제를 거행하는 것이 옳을 듯한데 조정에서 미처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일은 예관(禮官)이 해야 한다."

하니, 곤수가 아뢰기를,

"양전(兩殿)이 피란하실 때에 참봉(參奉) 두 사람이 함께 모시고 갔는데 한 사람은 상(賞)을 받고 한 사람은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함께 똑같이 모시고 간 공로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상을 받고 어떤 사람은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알지 못하니 해사(該司)에서 살펴서 하게 하라."

하였다. 근수가 아뢰기를,

"권율(權慄)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에는 호령이 시행되었으나 도원수(都元帥)가 되면서부터는 각 고을 수령들이 감사를 중하게 여기고 원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관찰사를 겸하게 하면 명령이 행해질 수 있고, 또 내려간 어사(御使)를 종사관(從事官)으로 호칭하게 한다면 일이 편리하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식을 운반하는 일에 있어서는 전혀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수가 어떻게 감사를 겸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원수가 명령을 행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내가 일찍이 비변사에 일렀는데 감사가 어찌 봉행(奉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봉행하지 않는다면 원수가 스스로 치죄(治罪)하거나 아니면 계달(啓達)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치죄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덕빈(德嬪)106) 의 변고에 대해서는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옛사람 중에는 혹 초혼(招魂)하여 장사지낸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사(有司)가 아직도 조처하지 못하였고 나도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대로 버려두어야 하는가, 초혼하여 장사를 지내야 하는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하기로 한다면 왜적이 물러갈 것을 기필할 수 없고 또 세월이 오래되면 미안하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초혼하여 장사지내는 일은 미안할 것 같습니다."

하고, 충겸(忠謙)도 미안한 일이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참판이 미안하다고 하는 말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혼(魂)은 양(陽)인데 양은 지하(地下)에 장사지낼 수 없다는 말인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세속에서 모두 그렇게들 하고 있습니다. 소신의 집안 일로만 말하더라도 신의 고조(高祖) 심원(沈湲)이시애(李施愛)의 난(亂)에 죽었는데 죽은 곳을 알 수가 없어서 현재 파주(坡州) 땅에다가 초혼하여 장사지냈는데, 그렇게 하니 자손들에게 의지할 만한 것이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김여물(金汝岉) 【신립(申砬)과 함께 충주(忠州)에서 전사하였다. 】 허장(虛葬)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해도 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초혼장(招魂葬)이란 말은 어세(語勢)가 합당하지 못한 듯하니 유의장(遺衣葬)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방언(方言)에서 이르는 허장(虛葬)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니, 최황이 아뢰기를,

"요즈음은 이와 같은 일이 매우 많습니다."

하고, 성혼이 아뢰기를,

"선유(先儒)들의 의논에 ‘장사를 지낸다는 것은 바로 시체를 매장하는 것인데 시체가 없는 장사는 허장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은 《강목(綱目)》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허장은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 왔었습니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덕빈의 서오라비[孽娚]인 윤백상(尹百祥)의 두 딸이 아사(餓死)하였는데, 진휼장(賑恤場)에 있다가 아사하였으니 매우 불쌍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서사(筮仕)를 명하였는데 이조(吏曹)가 아직도 거행하지 않았는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죽지 않은 것으로 대우했다가 상구(喪柩)를 얻은 다음 호상(護喪)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내(大內)에서 연달아 식물(食物)을 지급했으나 그 사람이 하는 일도 없이 받아먹는 것을 미안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사양하고 진휼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처도 아사하였는가?"

하자, 충겸이 아뢰기를,

"두 딸이 아사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전라 감사의 일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다른 당상들과도 의논해야 한다. 고쳐야 한다면 내가 한 말에 따라 양계(兩界) 감사의 유영(留營)의 예에 의하여 도사(都事)를 더 두어야 하고, 그대로 잉임시킨다면 이를 의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정암의 일은 다른 의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관계가 중대한 오언(誤言)을 하였는데도 방백의 자리에 앉아 있게 한다면 한 도의 사람들이 모두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국시(國是)가 달려 있는 일입니다. 상께서 이미 이것이 대의와 유관함을 알고 계신다면 의논이 어찌 이와 같이 애매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리를 논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저 왜적이 바다를 건너가겠는가?"

하였다. 근수곤수가 모두 아뢰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해(利害)로 보아도 이익될 것이 없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하는지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어제 이미 수경에게 의논하였는데 오늘 경연 석상에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긴 하나 대신들과 의논하지 않고 처리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니 다시 물어서 조처하라."

하였다. 상이 근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허장(虛葬)하는 데 대해서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세자(世子)의 묘(墓) 하나만 있으면 보기에 미안하기는 합니다만 창졸간에 결정할 수 없으니, 마땅히 강론을 거쳐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백상으로 하여금 힘을 다하여 알아보도록 하였고 또 그 궁인(宮人)들로 하여금 널리 찾아보게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으니, 혹 찾을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찾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이 사이에는 반드시 조처하는 데 합당한 절목(節目)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래에는 상기(喪紀)가 없어져 자식이 부모의 상에 복을 입지 않는 자도 있으며, 하인(下人)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부모의 병환이나 부모의 상(喪)은 염두에 두지도 않으니, 이것은 내가 목격한 일이다. 나라가 탕패(蕩敗)되었을지라도 윤기(倫紀)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윤기가 없어진다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당사자만이 아니고 보는 자도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곧 죽을 사람이어서 부득이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있는데, 굶어 죽을지라도 어찌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이를 괴이하게 여긴다."

하였다. 상이 성혼에게 이르기를,

"지금 주문(奏聞)하는 일에 대해 경의 뜻은 어떠한가? 이 왜적이 공손히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되겠는가?"

하니, 성혼이 아뢰기를,

"저 왜적은 불공 대천의 원수인데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그 누가 통분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강화한다는 한 마디를 어떻게 차마 입에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중국 장수가 처음 강화에 대한 말을 꺼냈는데 처음 그 말을 듣고는 모두 심유경(沈惟敬)의 고기를 먹고 싶어하였습니다.

지금의 사세를 보건대, 저 왜적들은 흉칙 교활하여 중국군이 머물러 있으면 돌아갈 것이고 돌아가면 다시 올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 나라에는 양식이 없어서 접제(接濟)할 일이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적이 속히 물러간 다음에야 조처할 수 있고 모든 일도 수습될 수 있는 것인데 저들의 둔취(屯聚)가 여전하면 우리는 저절로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총독(總督)의 뜻이 주편(周徧)한 듯합니다. 처음에는 수상하게 보였는데 지금 보니 그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봉공(封貢)해 주기를 직접 청하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김수(金睟)의 사행이 돌아오자 마자 또 봉공을 청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김수가 갔을 때 중국의 장사와 대신들이 모두 화를 냈으니 김수의 사행을 조금 정지시켰더라면 반드시 중국과 우리 나라가 어긋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 재신들이 ‘이 주본(奏本)에는 다만 고 총독(顧總督)요양(遼陽)으로 나온 이후로는 왜노가 순종하는 것처럼 말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주된 뜻이 빠지게 되는 것이니,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고 총독이 저들에게 봉공을 허락해주어 저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가게 하려는 것을 ‘이는 모두가 그대 나라를 위하여 주선하는 일이다. …….’라고 한다면, 우리 나라는 의를 잃음이 없게 되는 한편, 김수의 사행으로 인해 빚어진 일에 대해서도 아마 조금은 풀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생각건대 입언(立言)을 이와 같이 몽롱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데 모두들 어세(語勢)가 극히 어렵다고 하여 민망해 합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를 시켜 충겸을 불려 앞으로 나오게 하고 이르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경이 유사 당상(有司堂上)이므로 묻는 것이다. 나의 뜻은 그렇지 않다."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소신의 뜻도 그렇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전번 빈청(賓廳)에서 헌의(獻議)할 때에 서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은 주문(奏聞)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절박한 일이 있은 다음에 상주(上奏)해야 하는데 단지 적정(賊情)만을 몽롱하게 주문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봉공을 허락해 줄 것을 명백하게 진달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신의 뜻은 그것이 합당한 일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군친(君親)의 앞에서는 마땅히 속마음을 토로해야 하는 것인데 급고(急告)도 아니고 봉공을 청하는 것도 아닌 주된 뜻이 없는 상주를 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고, 성혼은 아뢰기를,

"서로 미루면서 속히 짓지 않고 있으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충겸은 아뢰기를,

"동정(東征) 나온 장관(將官)들은 모두 우리 나라를 구제한 사람들인데, 지금 죄책을 당하고 있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이것을 주의(主意)로 삼아 주본(奏本)을 짓는다면 중국 사람들이 보더라도 이것은 차라리 후(厚)한 데서 잘못되는 뜻이 됩니다. 이것으로 주의를 삼고 적의 정세는 주본 말단에 진달하는 것이 아마도 옳을 듯합니다."

하고, 성혼은 아뢰기를,

"호택(胡澤)이 온 것은 오로지 봉공하는 일을 위해서인데 회자(回咨)에 봉공에 대해서 한마디의 언급도 없으면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따라서 대의(大義)에도 해롭지 않고 권도(權道)도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충겸은 아뢰기를,

"유성룡(柳成龍)의 의견도 성혼의 말과 같았는데 봉공하는 일을 드러내어 청하는 것은 미안하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봉공을 주청하는 것은 안 된다. 의리상으로 미안할 뿐만 아니라 급사중(給事中)이 우리 나라도 함께 탄핵할 수도 있다. 급사중의 말이 매우 과격하여 말이 나올수록 더욱 엄준해 가는데 그의 말에 ‘조선은 두려움 속에서 조석을 보장할 길이 없지만 화(和)라는 한 글자를 입밖에 낸 적이 없으니, 당당하게 정벌하는 사마(司馬)가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만도 못하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그가 우리 나라를 의리(義理)있는 나라로 추허(推許)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성패(成敗)라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지만 봉공을 청한다면 성사(成事) 여부를 막론하고 급사중의 참론(參論)을 반드시 면치 못할 것이다."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중국 조정에서 반복(反覆)한다고 지목하여 전일의 행위도 단지 이익만을 위해 한 것이라고 하게 되면 손실이 가볍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그러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당초 정원에 하문하니, 중국이 매우 엄하여 사정(私情)을 상주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적정(賊情)을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는데 여러 의논이 이와 같기에 부득이하여 그랬던 것이다. 급사중의 탄핵하는 논의가 준엄한데 총독도 탄핵에 들어 있다. 그 논의의 내용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를 의리를 지키는 나라로 자못 추허하고 있는 터인데 지금 봉공을 청하는 주청을 한다면 반드시 우리를 비하(卑下)할 것이고 아울러 반복한다고 참론(參論)할 것이다. 중국 조정에서 힘써 구제하는 것은 의를 지키는 것을 귀중하게 여겨서인데 지금 이 일을 한다면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를 어떻게 보겠는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고 총독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을 따라 주청한다면 뒷날 도리어 비하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성혼은 아뢰기를,

"봉공(封貢)은 진실로 청할 수 없습니다. 시랑(侍郞)이 한 말이 우리 나라의 사정에 잘 맞는다고 말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로 하여금 봉공을 청하게 하는 것은 매우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이 논의는 따를 수가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주본(奏本)은 어떤 사람이 지을 것인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이호민(李好閔)이 지을 것입니다만 한 주본에 두 가지 뜻을 쓰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노의 표문(表文)을 보고 급사중이 ‘중국 조정의 문사(文士)가 지은 것이다.’고 했다니, 매우 경악스런 일이다. 그 허실(虛實)을 논할 것 없이 장주(章奏)에 이 말이 나왔으니 놀랄 만한 일이다. 중국 사람의 문법(文法)인가, 아니면 우리 나라 사람의 문법인가? 왜서(倭書)는 결코 아니다."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문세의 수단이 우활한 듯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저들의 실정이 아님을 더욱 알 수 있다."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행장(行長)의 문서(文書)는 심유경(沈惟敬)이 지었다고 하는데, 이는 차비 통사(差備通事) 이유(李愈)가 한 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7건의 일에 대해 중국 사람들이 ‘유 총병(劉摠兵)의 군중(軍中)에서 지어냈다.’ 하는데, 그 중에서 구혼(求婚)에 대한 문제는 청정(淸正)의 군중에서 유정(惟政)이 듣고 온 것이 분명한 듯하니 중국 장수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유정의 말이 사실인 듯하다. 구혼설이 사실이라면 봉공만을 허락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가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봉공을 허락한 뒤에도 왜노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찌하는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요행을 바랄 뿐입니다. 틀림없이 꼭 돌아가리라는 것을 신의 의사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중국의 일도 매우 곤란하고 만리 밖에서 군량을 실어오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 나라를 위한 계책이니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51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77면
  • 【분류】
    의생활-관복(官服) / 재정-공물(貢物) / 재정-전세(田稅)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비빈(妃嬪) /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註 105]
    수용(睟容) : 어진.
  • [註 106]
    덕빈(德嬪) :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 세자(順懷世子)의 빈(嬪) 윤씨(尹氏)로 본관은 무송(茂松).

○癸卯/上御別殿, 引見判中樞府事崔興源海平府院君 尹根壽、判敦寧府事鄭崑壽、右贊成崔滉、戶曹判書金命元、吏曹判書金應南、左參贊成渾、刑曹判書申點、兵曹參判沈忠謙、大司諫李墍、大司憲金宇顒, 同副承旨姜燦、修撰鄭曄、假注書崔天健、檢閱成晋善張晩入侍。 上曰: "時事如何?" 興源曰: "胡參將文書, 所當答送, 而頃日始爲分付, 不得已啓下後, 往示其草矣。 邊報賊情, 不一其言, 而大槪近日, 別無搶掠之事矣。 取見金睟狀啓朝通報, 則在我初無誤事之嫌, 而東來天將, 多被科道官參論, 諸將皆以爲我國中傷之故, 或云不直, 或云險薄。 其言誠未安, 而其事亦可悶。 以此見之, 雖請兵、糧, 必不可得。 石尙書 【中朝兵部尙書, 名星。】 之意亦然, 則雖或題請, 必不可得矣。 留兵在此, 雖不能勦賊, 若撤去, 而在我凡事, 亦無一可恃, 不其可悶乎?" 上曰: "今此奏請措辭決尾, 何以爲之乎?"興源曰: "諸宰皆以措辭爲難。 但以自初蒙被皇恩, 感激之意及近日賊勢, 從實直奏而已。 封貢事, 在天朝處置, 我國何敢與焉?" 上曰: "見朝通報, 正論橫截。 我國, 若前後異言, 則必以反覆目之; 科道亦不無非之之意, 措辭極難。" 興源曰: "頃者金睟狀啓見之, 、李輩怨我國之人最深。 前日戮力勦賊, 似不可不陳。" 曰: "訛傳之語, 似非的然, 口傳之言, 尤不可信。 輩, 以我國事來, 以我國事被罪, 誠爲未安。 然在我國, 無可爲之事矣。" 上曰: "廷馣啓中, 有以從人心云者, 朝廷之上, 無乃亦有此論乎? 萬一有之, 使我知之可也。" 根壽曰: "賊甚詐, 雖許封貢, 刦制我國之言, 恐或有之矣。 此則人未有言者, 而廷馣先言之, 甚可怪也。" 上曰: "廷馣遞乎? 否乎? 各陳所見。" 興源曰: "以狀啓見之, 則誤入矣。 但目今事勢甚急, 若遞之而未得其人, 恐不如仍在之爲愈也。" 根壽曰: "狀啓之言太誤。 必遞可也。 若使此言, 聞於倭賊, 必有所深患。 邊夢龍事, 亦如此。 未知近日, 將有何事而然乎? 甚可憂悶也。" 崑壽曰: "狀啓可駭, 可重罪, 而目今事勢, 十分危迫, 而湖南爲甚。 廷馣任久, 必有籌度, 一朝遞之, 未得其人, 不可爲也。 不行其言而已, 峻責仍留無妨。" 曰: "小臣無才識, 不可知, 一國是非之中, 此是大段。 萬一朝廷不懲此論, 而倭賊聞之, 必增侮矣。 人臣之口, 出此無狀之言, 國家終不爲國家矣。" 命元曰: "崔滉之言, 直截可嘉。 但廷馣只以悶迫之見, 啓達矣。 朝廷責其非, 而仍存無妨。" 應南曰: "廷馣事, 以狀啓見之, 則極可駭也, 以時觀之, 則我國無支撑之勢, 朝廷全乏人才, 廷馣爲人端重, 不可易得。 責其非, 而用之無妨。" 曰: "廷馣事, 大是妄發, 見聞可駭。 朝聞之, 亦以爲大義滅矣。 區區一脈所守之義, 至此淪喪, 可以遞之矣。 但渠之情事, 則亦出於盡忠輔國之意, 亦自知言出而罪隨, 其心自許, 如伏節死義者然矣。 似不可重罪。 其代, 勿論爵秩。 當危急之時, 古有以賊爲帥者。 必得重望之人, 授之可也。" 上曰: "廷馣事, 何以伏節死義云乎? 立言如是, 不可說也。" 曰: "小臣失言。" 上曰: "此豈忘身? 若以此爲憂國忘身、伏節死義, 則國事豈不大誤乎?" 上辭氣甚嚴, 起拜而言曰: "小臣言不達意。 臣意, 以爲此甚可駭、可愕之言, 方其狀啓時, 亦自知罪責之來, 而猶必言之, 自許若伏節死義者然, 而不自覺其陷於不義之地也云, 而語意相乖, 致有上敎, 不勝惶恐。" 上曰: "不亮是非, 惟己意是言, 以此爲憂國忘身, 可乎? 此人予豈重罪之乎? 但此言, 大變之言也。 不可饒也。" 曰: "不欲遞廷馣者, 難其代也, 此言, 涉於姑息。 此而不遞, 因在邊地, 則訓鍊之事, 亦豈盡心? 聞見亦駭, 可遞也。" 曰: "從人心之言, 自上下問, 朝廷亦有此議乎? 非但朝廷無之, 鄕里間有識者, 亦豈有此言乎? 雖以勢窮力迫而言之, 豈敢爲此不義之言乎? 軍中聞之, 必以爲朝廷, 亦有一種議論而然也。 可爲罷職, 以示譴責也。"宇顒曰: "渠意雖出於憂國, 其言, 有關大義。 只遞, 不可以懲, 罷職爲當。" 上曰: "議論不一, 折衷在大臣。 何以處之?" 忠謙曰: "小臣之意, 與諸宰臣有異。 廷馣之意, 雖非有他, 做此大義所關之言。 若容廷馣, 人心不定。 不可只遞而已。 以宋朝言之, 江南一隅, 天步艱難, 兵力之殘薄, 時勢之悶迫, 槪可想矣, 而和說一作, 萬世切齒。 大義所在, 豈可以危迫, 而易其所守哉? 在勠力自强而已。 賊在境上, 和議已倡, 若使廷馣在職, 三軍必解體矣。" 上曰: "其他是非、大義, 姑除之, 雖以謀策言之, 伊賊不得開三浦而爲此乎? 不得歲遣船而爲此事乎? 雖給三浦、歲遣, 必不已也。 伊乃虎視天下者也。 三浦、歲遣之言, 予未知其意也。" 曰: "賊猶未言, 而廷馣言之, 甚可駭也。" 上曰: "予言誤入者是也。 雖無他意, 此言甚駭。 若不遞, 則將士必不戰曰: ‘監司以和爲心, 吾何苦戰?’ 此心一(萠)〔萌〕 , 不可收拾。" 忠謙曰: "必罪此人, 然後大義可正, 國是可定矣。" 曰: "宋朝和議, 至今未免爲小人者。 兩帝被禍, 而不能報; 甘心臣虜, 而不知恥, 大義都喪故也。 當今園陵之變, 與此無間。 上下人心, 猶當沫血飮泣, 日思報讎。 湖南本是有義氣之邦。 朝廷若不罪此人, 則非徒一邦人民, 大失其望, 後世亦可羞也。 自上堅守大義, 此臣民之福也。 方今人心糜爛, 言路閉塞, 當此利害, 不爲危言激論。 臣恐自上包容之量, 有所未盡而然也。 頃者賑民, 自上至分玉食。 自古人君, 豈有如此盛事乎? 但下不奉行, 澤不究民。 至於守令, 亦須極擇, 然後民心可合。 如小臣者, 雖甚駑劣, 若授殘敗一邑, 敢不爲聖上盡力乎? 且自上雖守大義, 守義之實, 不可不篤。 守義若無實, 則畢竟未免歸虛也。" 上顧左右曰: "廷馣遞否事, 何以爲之?" 興源曰: "唯在聖斷。" 上曰: "大臣豈不知之? 揣摩而定之。" 興源曰: "守慶成龍, 俱以病不來。 臣不能獨斷其可否。 但今若遞之, 代不稱人, 則恐有差跌之患, 而不可因存之言, 亦公論矣。" 上曰: "予未知何以處之可也。 設或遞之, 誰可代者?" 興源曰: "湖南甚重。 必有深謀遠慮者當之。 方與他大臣相議, 然後可定矣。" 曰: "益城都正 享齡罷職事、色承旨罷職事, 請勿留難。" 上曰: "已爲推考, 不可罷職。" 上曰: "諸宰在坐, 若遞廷馣, 誰當其代? 各言之。" 根壽曰: "前在西路, 熟知尹承吉善治龜城。 若爲方面, 可以周(編)〔遍〕 。" 【承吉, 時爲江原監司。】 上曰: "此人善治慈祥乎? 有才略乎?" 根壽曰: "能使百姓安居, 奉行上令矣。" 崑壽曰: "自上接臣隣時, 獨御禮服, 臣僚咸以軍服, 甚爲未安。 當此臥薪嘗膽之時, 禮服何如? 顧養謙咨文中亦曰: ‘衣不彩服。’ 此不能討賊, 以變禮言。 衛文公, 大布衣、大帛冠而處之。 元是人君, 儉德率下。 今則中外板蕩, 尤不可不崇儉德。 自上有大布、大帛之心, 則下必效之。 中興之日, 省費最急。 目今非徒百姓餓死, 士大夫亦死, 所見慘酷。 況有園陵之變哉? 百事皆可減省矣。 曾在西方, 忝居尙衣提調, 綿紬適乏, 以錦彩製進, 自上敎以此時, 何以此物製進乎? 此傳敎極當。 此小臣之罪也。" 上曰: "大槪宜着戎服云乎? 主意何在耶?" 崑壽曰: "如駐駕西路時, 御戎服。 且服色有彩, 故敢啓。" 上曰: "意則好矣。 此則無他。 人君冠服, 且雖使戎服, 亦可也。"崑壽曰: "錦衣狐裘, 諸(候)〔侯〕 之服, 而大帛大布, 處變之道也" 上曰: "此言如是, 何以爲之?" 興源曰: "不可容易定之。" 上曰: "諸左右, 有所見則言之。" 應南曰: "冠服, 似不可不爲。" 曰: "入侍諸臣, 不得備服, 故如是從簡。 若以臣下之如此, 而自上亦然, 則似爲未安。" 上問于根壽曰: "冠服事如何。" 根壽曰: "崑壽之意, 以群臣皆戎服, 而自上獨爲冠服, 爲未安云矣。" 崑壽曰: " 慶基集慶 睟容, 皆移他處。 慰安似可施行, 而朝廷未遑矣。" 上曰: "如此事, 禮官當爲之。" 崑壽曰: " 兩殿避亂時, 參奉二員, 一體陪行, 而一員蒙賞, 一員未蒙。 同是一體功勞, 或受、或否, 似爲未安。" 上曰: "予不知之。 令該司察爲。" 根壽曰: "權慄全羅監司時, 號令得行, 而一自爲都元帥, 各官以監司爲重, 不從元帥命令云。 或者以爲: ‘兼觀察使, 則命令可行。 且以下去御使, 稱從事官, 則事可便宜’ 云矣。 運糧事, 專不聽從云矣。" 上曰: "元帥何可兼監司乎? 此則不可爲也。 元帥之不行命令, 予曾言於備邊矣。 監司安得不爲奉行? 若不奉行, 元帥自當治罪, 或啓達, 使朝廷治之可也。" 上曰: "德嬪之變, 不忍言也。 古人或有招魂而葬者。 有司時未處之, 予亦有意, 而未知何以爲之。 可置之乎? 招魂而葬之乎? 萬一賊退爲期, 則賊之去不可期, 久則未安" 應南曰: "招魂葬似爲未安。" 忠謙亦曰未安上曰: "參判未安之說, 何以言之乎? 魂則陽也, 陽不可葬於地下云乎?" 忠謙曰: "世俗皆爲之矣。 以小臣一家事言之, 高祖沈湲, 李施愛亂死之, 不知其所。 今於坡州地, 招魂而葬之, 子孫似有所憑。 頃日金汝岉, 【與申砬, 戰死忠州者。】 亦虛葬云。 此若不至大乖於禮, 則猶可爲也。" 上曰: "招魂葬言勢似未恰當。 若以遺衣葬則可耳。 若方言所謂虛葬云則何如?" 曰: "近日, 如此事甚多。" 曰: "先儒議曰: ‘葬是葬體。 無體而葬, 不亦虛乎?" 此《綱目》有之。 前古以爲虛葬不可爲也。" 忠謙曰: "德嬪孽娚尹百祥, 其女二人餓死, 渠亦在賑場餓死, 則甚可矜憐。" 上曰: "予已命筮仕矣, 吏曹不爲之乎?" 忠謙曰: "待以不死, 當待得喪柩, 以爲護喪可也。 自內連給食物, 而渠以爲無事而食未安, 故辭而受賑云矣。" 上曰: "其妻亦餓死乎?" 忠謙曰: "二女餓死云矣。" 興源曰: "全羅監司事, 何以爲之?" 上曰: "議論不定, 須議於他堂上。 若改之, 依予所言, 依兩界監司留營, 加設都事矣。 若仍之, 不須論此也。" 忠謙曰: "廷馣不在他議。 有此機關甚重之誤言, 而坐於方伯之位, 則一道人心, 皆不戰矣。 此國是所在也。 自上已知其有關大義, 則議論何可如是(矇曨)〔朦朧〕 乎? 上曰: "不論義理, 如是, 則此賊可渡乎?" 根壽崑壽皆曰: "豈有是理?" 上曰: "然則, 以利害亦無所益, 何以如是? 予未知其意也。" 興源曰: "昨已議于守慶。 今日當決於筵上。" 上曰: "雖然不與大臣議處未穩, 更問而處之。" 上顧根壽曰: "虛葬事, 卿意如何?" 根壽曰: "世子只有一墓, 所見未安。 然不可倉卒而定, 當講議以定矣。" 上曰: "自初令百祥盡力聞見, 且使其宮人, 廣求之, 而終莫得。 或有可得之路, 而未得耶? 此間必有所當處之節目矣。 且近來喪紀廢隳, 子不服父母之喪者有之, 至於下人輩, 親病、親喪, 不以爲念。 此予所目見。 國雖淪蕩, 倫紀不可無。 若無倫紀, 國非其國。 非但當身, 見者亦不以爲怪, 乃曰: ‘朝夕將死之人, 不得已如是。’ 雖餓死, 豈可滅禮? 予甚怪之。" 上謂曰: "今者奏聞事, 卿意如何? 以是賊謂之恭竢處置云者可乎?" 曰: "此賊, 不共戴天之讎。 小有人心, 孰不痛憤? 和之一字, 豈忍出於人口哉? 唐將始言和, 初聞欲食惟敬之肉。 今見事勢, 此賊兇狡, 大兵住則歸之, 去則復來。 如是, 則我無糧而接濟, 事至於無奈何。 賊必速退, 然後可以措置, 諸事庶有收拾, 而屯聚如前, 我自坐困。 總督之意, 似爲周(偏)〔徧〕 , 初見殊常, 今而見之, 其言有理。 若封貢直請, 則不可也, 金睟之行纔廻, 又請封貢, 大不可也。 大槪金睟之行, 朝將士、大臣皆發怒。 金睟之行小止, 則中國與我國, 必無乖暌之事矣。 今之諸宰臣云: ‘此奏本, 只以顧總督出來遼陽以後, 若順從者然, 爲製。’ 此欠主意, 大可怪也。 以總督許伊封貢, 使之渡海, 此皆爲我國, 周旋之事云云, 則小邦無失義之事。 金睟行生(事)〔光〕 之事, 或可以小紓矣。 臣以爲立言如是(矇曨)〔朦朧〕 不可云, 則皆以語勢極難, 爲悶矣。" 上令承旨, 宣召忠謙來前曰: "卿意如何? 卿爲有司堂上, 故問之。 予意則不然矣。" 忠謙曰: "小臣之意, 亦以爲不然。 故頃日賓廳獻議時, 不爲着名矣。 臣不知奏聞之合當也。 必有切迫之事, 然後上奏。 只以賊情, (矇曨)〔朦朧〕 奏聞, 似爲不可。 或者以爲: ‘明陳許封貢之爲可’ 云, 而臣意未知恰當, 故不爲着名。 君親之前, 宜露情悃。 非急告、非請封貢, 而中無主意之奏, 甚非穩當。" 曰: "相爲推調, 不爲速製, 不可說也。" 忠謙曰: "東征將官, 皆是拯濟小邦之人。 今得罪責, 似爲未安。 以此爲主意, 唐人雖見, 乃是寧失於厚之意也。 以此爲主意, 賊情陳於末端, 似或可矣。"曰: "胡澤之來, 專爲封貢事也, 而回咨無一段封貢事, 似爲未安。 若無害於大義, 而有可以權時之道, 則恐或無妨。" 忠謙曰: "柳成龍之意, 亦與成渾之言同, 而封貢之事, 顯然請之, 以爲未安云矣。" 上曰: "請封貢, 不可爲也。 於義非徒未安, 給事中不無竝參我國之理。 給事之言, 甚爲崢嶸, 愈出愈峻, 其中有曰: ‘惴惴朝鮮, 朝夕莫保, 和之一字, 曾不出口。 堂堂專征之司馬, 不如亡國之大夫。’ 以此見之, 其許我國以義可知。 至於成敗, 天也。 若請以封貢, 則毋論事之成不成, 而給事之參論, 必不得免矣。" 忠謙曰: "恐朝以反覆目之, 以爲前日之所爲, 徒以利爲也云, 則其爲所損非輕。" 上曰: "子意亦然。" 上曰: "予當初問于政院矣, 中國極嚴, 不可以私情上奏。 予意以爲, 賊情移咨禮部可也, 而諸議如此, 不得已矣。 給事(殫)〔彈〕 論崢嶸, 總督亦在(殫)〔彈〕 中。 觀其意, 以我國守義頗許。 今若此, 必卑下我也, 而竝參以反覆也。 天朝之所以力救者, 只以守義爲貴。 今爲此擧, 朝謂我國何如也?" 忠謙曰: "言不信。 若從其所言而爲奏, 後日或反以爲卑下也。" 曰: "封貢固不可請, 以侍郞所言, 深得我 國事情爲言則如何?" 上曰: "使我請封貢, 甚悖理, 不可從此議也" 上曰: " 奏本, 何人製之乎?" 忠謙曰: "李好閔製之, 而一本二意, 甚以爲難。" 上曰: "表, 給事云朝文士製之云, 甚可驚愕。 毋論虛實, 而出於章奏, 可愕也。 中國人文法乎? 我國人文法乎? 書決非矣。" 忠謙曰: "文勢手段似闊。" 上曰: "然則伊之非實情, 尤可知矣。" 忠謙曰: "行長文書, 沈惟敬製之云。 差備通事李愈言之。" 上曰: "七件事, 唐人以爲劉揔兵軍中做出云。 其中求婚一段, 淸正(軍)〔言〕 , 惟正聽得而來, 似爲分明, 非將做出, 惟正之言似實矣。 求婚若然, 則只許封貢, 其能成乎?" 上曰: "許封貢之後, 若不歸, 奈何?" 忠謙曰: "特僥倖耳。 萬全必歸, 臣之意, 未能思耳。 中原事, 亦甚難矣。 萬里輸糧極難, 故如是爲之。 是皆爲我國計, 感恩事也。"


  • 【태백산사고본】 30책 51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77면
  • 【분류】
    의생활-관복(官服) / 재정-공물(貢物) / 재정-전세(田稅)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비빈(妃嬪) /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