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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31권, 명종 20년 5월 30일 乙丑 2번째기사 1565년 명 가정(嘉靖) 44년

총호사 심통원이 신릉의 점혈에 관하여 아뢰다

총호사(摠護使) 심통원이 아뢰기를,

"신릉(新陵) 점혈(點穴)한 곳에 풀을 베고 땅을 파보니, 정혈(正穴) 하단에 돌뿌리가 평퍼짐하게 서려 있어 형세가 다 뽑아낼 수 없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총호사의 소임은 극히 중대하니, 산릉을 잘못 정한 것을 상지관(相地官)에게만 미룰 수 없다. 예부터 총호사는 다 대신이었는데도 혹 미진한 일이 있었으니, 정릉(靖陵) 총호사 【처음에 안현(安玹)을 임명하였는데, 안현이 죽자 이준경(李浚慶)을 임명하였다.】 는 내 생각으로는 미편하게 여긴다. 산역(山役)을 정지하는 일은 속히 산릉 도감에게 이르라. 또 군장리(軍場里) 【지명이다.】 동쪽 언덕에 만일 좋은 곳이 있거든 정혈을 옮겨 정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영의정 윤원형과 총호사 심통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전교를 받드니 두려운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산릉을 정하는 것은 중대한 일인데 어찌 감히 경홀히 하겠습니까. 정혈에 돌이 있으니 신들도 답답하게 여깁니다. 동쪽 언덕에는 산체(山體)가 잔약합니다. 지금 바야흐로 택정(擇定)하고 있는 때에 지엽의 언덕에 쓸 수 없습니다. 전일 살펴본 장단(長湍)대방동(大方洞) 【지명인데, 도성 동쪽 10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다 좋습니다. 다만 장단은 너무 멀고, 대방동은 아주 가까우니 위에서 헤아려 정하심이 어떠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인자(人子)의 마음에 황비(皇妣)의 능침(陵寢)을 어찌 가까운 지역에 정하려 하지 않겠는가. 다만 천릉(遷陵)한 뒤에 나라에 좋은 일이 없었다. 지금 신릉(新陵)을 정함에 있어서 원근을 따지지 말고 아주 좋은 자리를 골라 써야 할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중묘조(中廟朝)에 ‘대방동을 무후(無後)의 자리’라고 한 듯하다. 경들은 상지관(相地官)과 자세히 질정(質正)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윤원형 등이 아뢰기를,

"지금 이 산릉에 있어 좋은 자리를 얻으려 하는 것은 상하의 마음이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다만 지리설(地理說)은 아득하여 알기 어렵고 길흉의 이치도 헤아려 알기 어렵습니다. ‘무후의 설’을 술관(術官)에게 물었더니, 모두 ‘자세하지 않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보건대 김사청(金士淸) 【장지(葬地)가 대방에 있었다.】 의 자손이 매우 많아서, 김영렬(金英烈) 【장지가 장단(長湍)에 있었다.】 의 자손에 비교하면 아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무후의 설은 취신(取信)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이 설에 의심을 두시므로 신들이 감히 강청할 수 없으니, 위에서 헤아려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경들의 의사를 알겠다. 김사청의 자손이 번성한 것을 보니 무후설은 믿을 수 없다. 대방동이 해로울 것이 없으니, 정혈을 속히 살펴서 정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풍수설(風水說)은 곧 후세 술가(術家)의 상도(常道)에 벗어난 말이다. 예부터 제왕이 어찌 그 능침을 잘 가려서 후사(後嗣)가 번성하도록 하였겠으며, 그 후사가 번성하지 않은 것도 어찌 길지(吉地)를 가리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도록 하였겠는가. 주상이 세자를 잃은 뒤로부터 춘궁(春宮)이 오래도록 비어 있어 밤낮으로 후사 두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말하는 사이에 풍수의 설이 요탄(妖誕)함을 깨닫지 못하고 곧 ‘좋은 자리를 가리라.’는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비록 정념(情念)의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나 또한 임금으로서는 마땅히 말할 바가 아니다.

사신은 논한다. 사람을 매장하기 위하여 남의 무덤을 파내는 것은 사람의 도리로서 차마 못할 일이다. 아조(我朝)에서 풍수설에 미혹하여 이러한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행하였다. 만일 성군(聖君)과 현상(賢相)이 있어서 사설(邪說)을 능히 배격하고 별도로 묘소를 잡거나 혹은 선릉(先陵)082) 의 곁에 부장(附葬)한다면 또한 어찌 국맥(國脈)이 장수하고 자손이 번창하는 데에 일조가 되지 않겠는가. 명(明)나라의 모든 황릉(皇陵)이 다 한 산 안에 자리잡았으니, 고황제(高皇帝)083) 의 세상에 뛰어난 견식과 자손에게 끼친 좋은 계책은 참으로 후세의 법이 될 만하다. 문정 왕후가 정릉(靖陵)을 옮긴 것은 실로 자신이 죽은 뒤에 같은 묘역(墓域)에 묻히려는 계책을 한 것이었는데 그 뒤에 화환(禍患)이 잇달으니, 사람들이 모두 천릉(遷陵)한 보응이라 하였고 주상도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때 와서 다시 신릉(新陵)을 가려 정하여 같은 묘역에 묻히려는 계책은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통탄스러운 일은 20년 동안 편안히 모셔진 정릉(靖陵)의 혼을 까닭없이 천동(遷動)하여, 어버이 곁에 장사지내기를 원한 효릉(孝陵)084) 의 뜻이 마침내 허사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양성(兩聖)085) 이 구천(九泉) 아래에서 몰래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것이니, 문정 왕후의 죄가 이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하겠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19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사학(史學)

  • [註 082]
    선릉(先陵) : 중종의 능.
  • [註 083]
    고황제(高皇帝) : 명 태조(明太祖).
  • [註 084]
    효릉(孝陵) : 인종(仁宗)의 능호. 중종의 능인 구 정릉(舊靖陵)이 중종 비(中宗妃)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능인 희릉(禧陵)과 함께 고양(高陽)에 있었으며, 인종의 능인 효릉 또한 고양의 희릉 서쪽 언덕에 있었다. 구 정릉과 효릉은 이웃하고 있었다. 문정 왕후가 정릉(靖陵)이 장경 왕후의 능인 희릉과 동원(同原)인 것을 시기하여 명종 17년(1562)에 광주(廣州)의 선릉(宣陵) 곁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그래서 정릉과 효릉이 멀어지게 되었다.
  • [註 085]
    양성(兩聖) : 중종과 인종.

○摠護使沈通源啓曰: "新陵點穴處, 斬草破土, 則正穴下端, 石根盤礴, 勢難盡拔, 故敢啓。" 答曰: "摠護使之任, 極爲關重, 誤定山陵, 則不可徒諉於相地官也。 自古摠護使, 皆是大臣, 而或有未盡之事。 靖陵摠護使 【初以安玹爲之, 玹卒, 以李浚慶爲之。】 予意以爲未便也。 停役事, 速諭于山陵都監。 且軍塲里 【地名。】 東岡, 若有好處, 移定正穴何如?" 領議政尹元衡、摠護使沈通源啓曰: "臣等伏承傳敎, 不勝戰慄之至。 定山重事, 豈敢輕忽。 正穴有石, 臣等亦爲憫慮, 東岡則山體殘弱, 今方擇定之時, 不可用此枝葉之隴也。 前日所審長湍大方洞 【地名, 在都城東十里。】 皆好。 但長湍極遠, 大方洞便近, 自上量定何如?" 答曰: "人子之心, 皇妣陵寢, 豈不欲定於近地? 但遷陵而後, 國無吉事, 今定新陵, 當不計遠近, 只擇極吉之地, 而用之。 予似聞中廟朝, 以大方洞爲無後之地云。 卿等與相地官, 詳悉質正, 俾無後悔。" 尹元衡等啓曰: "今此山陵, 欲得吉地, 上下之情, 豈有異哉? 但地理之說, 渺茫難知, 吉凶之理, 亦難測識。 無後之說, 問于術官, 皆曰: ‘未詳。’ 臣等伏見, 金士淸 【葬在大方洞。】 子孫甚多, 比於金英烈, 【葬在長湍。】 子孫則大有逕庭。 以此觀之, 無後之說, 似難取信。 然自上致疑於此說, 臣等不敢强請。 請自上量定。" 答曰: "予識卿等之意, 因見金士淸子孫之蕃盛, 其說不可信也。 大方洞無妨, 正穴斯速審定。"

【史臣曰: "風水之說, 乃後世術家不經之言也。 自古帝王, 豈擇其陵寢, 而使後嗣蕃盛也? 其所以後嗣之不蕃, 亦豈不擇吉地, 而使之然哉? 上自喪儲副以後, 春宮久虛, 日夜以後嗣爲念, 故言語之間, 不覺風水之爲妖誕, 乃有擇吉之敎, 是雖出於情念之切迫, 亦非人主之所當言也。"】

【史臣曰: "爲葬人而拔人塚, 人理之所不忍。 我朝惑於風水, 爲此不祥之擧。 如有聖君賢相, 克排邪說, 別卜宅兆, 或附葬先陵之側, 亦豈非壽國脈延子姓之一助也? 大明諸皇陵, 皆卜一山之內, 高皇高世之見, 貽謀之良, 誠可爲後世法也。 文定之遷靖陵, 實爲身後同塋之計, 而厥後禍患重仍, 人皆以爲遷陵之報。 上亦以爲然。 至是更卜新陵同塋之計, 終未得遂, 豈非天乎? 所可痛者, 靖陵二十年安厝之魂, 無故遷動, 孝陵願葬親側之志, 竟歸於虛。 伏想, 兩聖潛悲暗淚於九泉之下, 文定之罪, 至此極矣。"】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19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