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대왕 대비의 상사를 대왕의 상례에 의하도록 명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대행 대왕 대비(大行大王大妃)의 상사(喪事)를 일체 대왕의 상례(喪例)에 의하여 행하라." 【대왕 대비가 일찍이 섭정(攝政)하였기 때문이다.】
사신은 논한다.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나라에는 두 사람의 임금이 없으니, 만일 등급을 나누지 아니하고 예절을 허물어 버리면 이는 해가 두 개이고 임금이 두 사람인 것이다. 지금 비(妃)의 상에 대왕의 예를 따르는 것은 비록 효사(孝思)의 무궁함에서 나온 것이라 하나 그 예절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한(漢)나라의 마후(馬后)와 등후(鄧后)040) , 송(宋)나라의 고후(高后)와 조후(曹后)041) 는 공이 크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모두 후(后)의 예(禮)로 장례를 치렀지 천자의 예로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정해진 예법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니 예로써 장례지내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1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註 040]한(漢)나라의 마후(馬后)와 등후(鄧后) : 마후(馬后)는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황후(皇后)인 명덕 황후(明德皇后) 마씨(馬氏)로, 마원(馬援)의 딸. 후궁(後宮) 중에서 덕이 으뜸이었고 사가(私家)의 일을 조정에 요구하지 않았으며 황후가 된 뒤에도 검소한 복장을 착용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명덕 마황후비(明德馬皇后妃). 등후(鄧后)는 후한 화제(後漢和帝)의 황후(皇后)인 등씨(鄧氏). 우(禹)의 손녀, 훈(訓)의 딸. 화제가 승하한 뒤에 상제(殤帝)와 안제(安帝)를 차례로 세웠는데, 태후(太后)로서 20여 년 동안 임조(臨朝)하면서 덕정(德政)이 많았다. 《후한서(後漢書)》 권 10상(上).
- [註 041]
송(宋)나라의 고후(高后)와 조후(曹后) : 송 영종(宋英宗)의 후(后)인 선인성렬고후(宣仁聖烈高后).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태황 태후(太皇太后)로 존칭되었고, 황제가 어려서 섭정(攝政)하였다. 왕안석의 당을 물리치고 사마광(司馬光) 등을 등용하여 원우(元祐)의 치적을 이룩하였다. 당시 여중 요순(女中堯舜)이라 일컬었다. 《송사(宋史)》 권242. 조후(曹后)는 송 인종(宋仁宗)의 후(后)인 자성광헌조후(慈聖光獻曹后). 조빈(曹彬)의 손녀. 천성이 인자하고 검소하였다. 농사를 중히 여겨 항상 금원(禁苑)에서 곡물을 심고 친히 누에를 쳤다.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태황 태후(太皇太后)가 되었다. 왕안석이 국정을 담당하여 옛날 법을 변혁하자 조후가 제(帝)에게 간하였다. 《송사(宋史)》 권242. 송대(宋代)는 물론 역사적으로 현명한 황후로 일컬어진다. - [註 041]
○傳于政院曰: "大行大王大妃喪事, 一從大王喪例行之。" 【以大王大妃嘗攝政故也。】
【史臣曰: "天無二日, 國無二君。 若不分等夷殺禮節, 則是二其日也、二其君也。 今者妃喪, 從大王例, 雖曰出於孝思之無窮, 其於禮也何? 漢之馬·鄧、宋之高·曹, 功非不厚。 皆以后禮葬之, 而未聞以天子之禮爲之, 爲其有禮故也。 今而不然, 以禮之意安在?"】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1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