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중추부사 정광필의 졸기
영중추부사 정광필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광필은 기량이 원대하여 아름답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하는 것이,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지만 나라의 큰 일을 당할 때에는 의젓한 기절이 있었다. 두 번이나 영상으로 있을 적에 바로잡아 보필한 공이 많았으니 조야가 의지하고 존경하였다. 기묘 사화에 연좌된 사람들이 장차 중죄를 입게 되었을 때에는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극간하였고, 밤중에 손수 촛불을 잡고 거듭 나아가서 힘껏 변호하면서 임금이 뜻을 돌리기를 바랐기에 사림의 화가 참혹에 이르지는 않았으며, 국가의 원기가 이를 힘입어 유지하게 되었다. 그 뒤에 삼흉(三兇)이 정권을 손에 쥐고 마음대로 하게 되어서는 삼경설(三逕說)240) 을 얽어 만들고, 천릉(遷陵)할 계략을 아뢰어 반드시 중죄에 빠뜨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고 마침내 외방으로 귀양갔다. 김안로가 정광필의 족인(族人)을 통하여 위협하기를 ‘조정이 마침내 반드시 대화(大禍)를 내릴 것이니 미리 자진(自盡)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정광필이 듣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있다. 어찌 사람의 말로써 스스로 생명을 끊겠는가. 조정이 비록 주륙을 내릴지라도 나는 애석해 하지 않는다. 다만 주상의 명을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김안로가 복죄되었을 때, 맨 먼저 불리어 들어오니 조야가 서로 경하하였다. 그가 서울에 들어오던 날에는 저자의 아이들과 말을 모는 졸병에 이르기까지 그가 오는 것을 바라보며, 정 정승이 돌아왔다고 하면서 기뻐 춤추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간혹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장차 다시 정승으로 의망하려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죽으니 시론(時論)이 애석해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89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233면
-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치안(治安)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240]삼경설(三逕說) : 조선 중종 때 간신(奸臣) 김안로(金安老) 등이 정광필(鄭光弼) 등을 죄에 빠뜨리기 위하여, 경빈(敬嬪) 박씨(朴氏)를 일경(一逕), 기묘년간의 조광조(趙光祖) 등 사류(士類)를 일경, 송순(宋純)의 무리를 일경이라고 날조하여 모함하던 설. 《중종실록(中宗實錄)》 32년 11월.
○乙巳/(領中府府事)〔領中樞府事〕 鄭光弼卒。
【史臣曰: "光弼宇量宏遠, 休休有容, 似若不露圭角, 至於當國大事, 澟然有氣節。 再爲首相, 多有匡輔之力, 朝野倚望焉。 己卯之人, 將被重典, 叩頭極陳, 至於夜深, 自手秉燭, 再進力救, 冀回天意, 士林之禍, 不至於慘酷, 國家元氣, 賴以維持。 厥後三兇用事, 構三逕之說, 啓遷陵之謀, 必欲置諸重典而不得, 竟竄于外。 金安老因光弼之族, 恐動之曰: ‘朝廷終必加大禍, 莫如自盡。’ 光弼聞之曰: ‘死生在天, 豈以人言, 自殞性命? 朝廷雖加誅戮, 余所不惜。 秪竢上命而已。’ 及安老伏罪, 首被徵還, 朝野相慶, 入京之日, 至於市童馬卒, 望見其來曰: ‘鄭相還矣’, 莫不忭舞, 間有泣下者。 將擬復相, 未幾而卒, 時論惜之。"】
- 【태백산사고본】 45책 89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233면
-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치안(治安)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