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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18권, 중종 8년 4월 15일 癸丑 3번째기사 1513년 명 정덕(正德) 8년

정광필·한형윤·한세환·이희맹·권홍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광필(鄭光弼)을 우의정(右議政)으로, 한형윤(韓亨允)을 좌윤(左尹)으로, 한세환(韓世桓)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이는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로, 이희맹(李希孟)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권홍(權弘)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정광필휴휴(休休)205) 하여 재상의 기국이 있는데, 성희안(成希顔)이 일찍이 말하기를 ‘광필 같은 이는 참으로 「형체가 없어도 보며, 소리가 없어도 듣고 공경하기를 신명이 있는 것처럼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삼공(三公)에게 복상(卜相)케 하니 송일(宋軼)김응기를 추천하였고, 유순(柳洵)도 의향이 응기에게 있었으나 희안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서 함께 광필을 추천하니, 희안이 공언(公言)하기를 ‘오늘날의 정승은 당연히 광필이 되어야하고 신용개가 다음이며, 응기는 정금미옥(精金美玉) 같기는 하나 국가가 유위(有爲)한 때를 당하면 능히 해내지 못할 것이며, 또한 지위가 중추부(中樞府)에 올라 국정에 참여하니, 다시 태사(台司)에 올릴 것 없다.’ 하였는데, 응기의 기력이 약하기 때문에 희안이 저지하였다. 후에 · 두 사람이 명상(名相)으로 불리어지자 사람들은 또 그의 선견(先見)에 감복하였다. 또 광필은 기질이 뛰어나고 지략이 원대한 데다가 재주와 국량이 있어 사람들은 모두 정승을 잘 골랐다고 하였으나, 응기가 정승 되지 못함을 개탄하는 자도 있었다. 또 당시 정승이 이어 죽으므로, 상은 다시 석보(碩輔)206) 가 없음을 걱정하여 광필을 뽑아 태보(台輔)207) 에 두었으나, 물론(物論)은 그리 흡족히 여기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8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655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 [註 205]
    휴휴(休休) : 도를 즐기고 마음이 너그러운 등 아름다운 모양.
  • [註 206]
    석보(碩輔) : 현량한 보좌.
  • [註 207]
    태보(台輔) : 재상.

○以鄭光弼爲右議政, 韓亨允爲左尹, 韓世桓咸鏡道觀察使。 【此則特授。】 李希孟爲吏曹參議, 權弘爲大司成。

【史臣曰: "光弼休休, 有宰相之器。 成希顔嘗謂, "如光弼可謂視於無形, 聽於無聲。" 敬之如神明。 上嘗卜相於三公, 宋軼金應箕, 柳洵意在應箕, 而重違希顔之旨, 竝薦光弼希顔颺言曰: "今日之相, 當以光弼爲得, 申用漑爲次。 如應箕, 雖如精金美玉, 當國家有爲之時, 無能爲也。 且已位極樞府, 與聞國政, 不必更登台司。" 以應箕寡氣力, 故希顔沮之, 後, 兩人, 號稱名相, 人亦服其先見。"】

又曰: "光弼氣岸魁偉, 謀猷遠大, 又有才局, 人皆以爲得相。 然或有嘆應箕之不相者。" 又曰: "時政丞繼逝, 上以時無碩輔爲憂。 雖以光弼, 擢置台輔, 物論猶未洽然偉之。"


  • 【태백산사고본】 9책 18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655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