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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12권, 연산 2년 1월 9일 戊子 5번째기사 1496년 명 홍치(弘治) 9년

윤필상 등이 묘제에 대하여 의논하다

윤필상·신승선이 의논드리기를,

"대저 선왕의 제도는 경솔히 고쳐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이는 대묘(大廟)의 제도인데 어찌 가감할 수 있으리까."

하고, 어세겸은 의논드리기를,

"전일의 종묘(宗廟) 천부(遷祔)에 대하여, 신은 예조(禮曹)의 의논을 옳다 하였으나 문소전(文昭殿)태종(太宗)을 위하여 따로 일실(一室)을 세운다는 일에 대하여 마땅하지 않게 여긴 것은 원묘(原廟)030) 는 근친(近親)을 위하여 설립한 것이기 때문에 조석 상식(上食)에 있어 모두 살아 계시던 때와 같이 하므로 태조는 종묘에 모시어 백세에 불천(不遷)하여야 하거니와, 어찌 원묘(原廟)에서 조차 대수(代數)를 헤아리지 않고 마찬가지로 불천(不遷)의 신주로 하겠습니까. 원묘에는 태조·태종·세종·세조를 차례로 옮겨 모시어, 다만 근친(近親)을 향사하여야 하며, 공덕(功德)이 있어 불천(不遷)하는 신주는 역시 길이 길이 태묘(太廟)에서 실향(失享)을 하지 않게 하면 두 가지 일이 다 온편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한치형·이극돈은 의논드리기를,

"신들이 본디 역대의 제실(祭室) 증설하는 제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사오나, 옛 사람이 이르기를 ‘신도(神道)는 고요함을 숭상한다.’하였고, 또 창조(創造)는 번거롭고 소요스러워 ‘신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하여, 신들이 전번 의논에서 문종(文宗)의 신주를 공정왕(恭靖王)의 예에 따라 익실(翼室)에 봉안할 것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예조가 은(殷)나라탕(湯)·태갑(太甲)당(唐)나라중종(中宗)고려(高麗)정종(定宗)·혜종(惠宗)·광종(光宗)의 예를 인거하여, 협실(夾室)이 비록 정실(正室)은 아니지만 한결같이 향사(享祀)하여 익실에 봉안하는 것은 부득이 한 데서 나온 것이다.’고 하니, 이는 정히 권(權)을 좇아 경(經)에 합치하는 의(義)이오니, 신들의 전번 의논에 의거하기를 청합니다. 다만 아조(我朝)에 본디 조묘(祧廟)031) 가 없사옵고 처음으로 천주(遷主)032) 가 있사옵는데, 만약 바로 능침(陵寢)에 묻으면 차츰차츰 먼데로 미쳐간다는[漸而之遠] 의가 없사오니, 정리로 차마 못할 바입니다. 만약 의자(議者)의 말에 따라 공정왕(恭靖王)의 신주를 왼편 익실에 봉안한다면 문묘(文廟)033) 을 봉안할 곳이 없을 뿐만 아니오라, 향사(享祀)를 당연히 종묘와 같이 한다면 춘추에만 제사하는 데 그치는[享嘗乃止] 뜻에 어긋나오니, 마땅히 노사신(盧思愼)의 의논에 따라 영녕전(永寧殿)의 익실을 조묘(祧廟)로 삼고서 공정왕 신주를 이안(移安)하여 향사(享祀)를 사조(四祖)와 한결같이 하여 점이지원(漸而之遠)하게 하면 정리와 예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세좌는 의논드리기를,

"지금 예조(禮曹)의 증실(增室)하자는 의논을 보오니, 정례에 합당할 것 같사오나, 지금 묵은 집에다 신옥(新屋)을 달아내게 되면, 그 중 혹시 묵고 헌 것이 있을 때는 부득불 개수해야 할 것이오니, 공사가 결코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끝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신어(神御)를 봉안(奉安)함에 있어, 그 처소를 얻지 못하게 되면 어찌하오리까. 선왕조에서 이미 권전(權典)034) 을 행하였사오니, 예조의 전번 의식대로 문종(文宗)의 신주를 익실에 봉안하고 공정왕의 신주를 영녕전 협실에 봉안하여, 그 춘추의 향사는 사조(四祖)의 예와 한결같이 하오면 역시 옛사람의 협실에 장(藏)하는 제도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고, 유순은 의논드리기를,

"종묘의 각실(各室)이 이미 차 있고 묘수(廟數)도 역시 찼으므로, 부득이 문종의 신주를 익실로 옮기고 공정왕의 신주를 능침에 묻자는 것이온데, 만약 예조가 아뢴 대로 다시 한 칸을 태묘(太廟)의 동쪽 머리에 달아내어 성종을 부(祔)하기로 하면 반드시 신위(神位)를 이안(移安)할 것이 없사오니, 갑자기 조종(祖宗)의 영(靈)을 옮기는 것은 불편할 것 같사옵니다."

하고, 허침·김수손은 의논드리기를,

"예조가 뒤에 의논드린 데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편의하옵니다. 다만 헐어버린 묘(廟)의 신주를 익실(翼室)에 장(藏)한다면 그 제사는 당연히 영녕전(永寧殿)과 같을 것이니, 공정왕(恭靖王)의 조천(祧遷)한 신주도 영녕전 익실에 장(藏)하는 것이 어떠 하오리까?"

하고, 안침은 의논드리기를,

"태종의 신주에 대하여 종묘에 모신 것은 세실(世室)에 별향(別享)하고, 문소전(文昭殿)에 모신 것은 능침(陵寢)에 묻을 것을, 신은 먼젓번 의논에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익실을 세실(世室)로 삼는 것이 불가하다 하여, 반드시 한 실(室)을 더 짓는다면, 당연히 바른 편 익실의 뒤에 따라 세실 4, 5칸을 지어서 무릇 공덕(功德)이 있는 신주는 차례로 옮겨 모셔 영세(永世)토록 향사하는 것이 편의할 듯합니다. 예조의 의논에 반드시 도궁(都宮)의 제도를 만들고서야 세실을 세우게 된다고 한 것은 합당한 말이 아닌 듯합니다. 주(周)나라는 좌우 소목(昭穆)의 제도가 있기 때문에 동서의 세실을 두었으나, 지금 한 당(堂)에 실(室)만 다르게 하는 제도를 취할 것이라면 4, 5칸을 연달아 지어서, 세실도 역시 당(堂)을 함께 하는 제도로 한들 무엇이 불가하오리까."

하고, 김경조·김심·이극규·성세명은 의논드리기를,

"원묘(原廟)의 제도는 예관(禮官)이 의논드린 바에 따라야 합니다. 대묘(大廟)에 실(室)을 더 마련하자는 의논에 있어서는 신이 감히 변론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이 삼가 상고하옵건대, 칠묘(七廟)·오묘(五廟)의 제도는 단연코 문란하게 하여서는 안 되옵니다. 지금 대묘(大廟)에는 실(室)의 수효가 이미 차 있으므로 예관이 당종(唐宗)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실 하나를 증설하려고 하옵는데, 신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조종(祖宗)께서 처음으로 묘제(廟制)를 정할 때 어찌 만세를 위하여 계획하지 아니하셨으리까마는 마침내 7칸을 지은 것은 뜻이 있어서 그러신 것입니다. 친진(親盡)이 되면 출주(出主)하는 것은 친(親)을 친애하는 차별이오며, 하물며 당종(唐宗)의 실(室)을 증설한 제도는 결국 말세의 잘못된 일이요, 진실로 성인(聖人)이 한 것이 아님에리까. 또 만약 증설하는 역사를 일으키기로 한다면 공역의 쉽고 어려운 것도 논할 나위는 없사옵니다만, 그러나 일은 중하고 역사는 거창해서 반드시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니, 열성(列聖)의 백 년 동안 봉안한 신주를 어느 곳으로 옮겨 모시겠습니까. 증실(增室)의 의논은 단연코 시행할 수 없사오니, 예관(禮官)의 먼젓번 의논에 따라 공정왕(恭靖王)의 신주를 원릉(園陵)에 묻고 차례로 승부(陞祔)하는 것이 인정과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3책 6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註 030]
    원묘(原廟) : 종묘(宗廟)외에 다시 세운 묘.
  • [註 031]
    조묘(祧廟) : 조천(祧遷)한 신주를 모시는 묘. 조선 왕조에서는 영령전(永寧殿).
  • [註 032]
    천주(遷主) : 조천하는 신주.
  • [註 033]
    문묘(文廟) : 문종(文宗).
  • [註 034]
    권전(權典) : 규정된 절차를 다 밟지 않은 의전(儀典).

弼商承善議: "大抵先王制度不可輕改, 況此大廟之制, 豈可增減?" 世謙議: "前日宗廟遷祔, 臣以禮曹議爲是, 而於文昭殿太宗別立一室事, 爲未當者。 原廟爲近親而設, 故朝夕上食, 皆象生時。 太祖當於宗廟, 百世不遷, 豈宜原廟不計代數, 亦爲不遷之主乎? 於原廟則太祖太宗世宗世祖, 當以次而遷, 只取近親而享之。 有功德不遷之主, 亦永永不失享於大廟, 不亦兩便乎? 致亨克墩議: "臣等初非不知歷代增室之制, 但古人云: ‘神道尙靜。’ 又云: ‘創造煩擾, 非所以寧神。’ 故臣等於前議請文宗主依恭靖王例, 安於翼室。 今禮曹引 太甲, 中宗, 高麗 光宗例以爲: ‘夾室雖非正室, 享祀一樣。 奉安翼室, 出於不得已也。’ 此正是從權合經之義也。 請依臣等前議。 但我朝固無祧廟, 而始有遷主。 若卽瘞於園寢, 無漸而之遠之義, 情所不忍。 若從議者之言, 恭靖王神主仍安於左翼室, 則非徒無(文廟)〔大廟〕 奉安之處, 享祀當如宗廟, 有違享嘗乃止之意, 宜從思愼之議, 以永寧殿翼室爲祧廟, 移安恭靖王神主, 享祀一如四祖, 漸而之遠, 則於情禮不悖。" 世佐議: "今觀禮曹增室之議, 似合情禮, 然今架新屋於舊宇, 則其或有舊弊者, 不得不改, 事功決非旬月間告訖。 且奉安神御, 如未得其所, 則如之何? 宜如先王朝已行權典, 依禮曹前(儀)〔議〕 , 奉安文宗神主于翼室, 恭靖神主移安永寧夾室, 其春秋享祀, 一如四祖之例, 則亦不戾於古人藏之夾室之制矣。" 柳洵議: "宗廟各室已盈, 廟數亦滿, 故不得已遷文宗于翼室, 出恭靖王之主, 瘞于園寢。 若依禮曹所啓, 更構一間于大廟東首, 以祔成宗, 則不必移安神位矣。 遽爾遷動祖宗之靈, 似未便。" 許琛金首孫議: "依禮曹後議, 施行爲便。 但毁廟之主, 藏於翼室, 則其祭祀, 當與永寧殿同。 恭靖王祧遷之主, 藏於永寧殿翼室何如?" 安琛議: "太宗之主於宗廟別享于世室, 於文昭殿奉瘞陵寢, 臣前議已盡。 若以翼室作世室爲不可, 而必增構一室, 則當於右翼室之後, 別構世室四、五間, 凡有功德之主以次遷安, 永世享之爲便。 禮曹議以謂: ‘必爲都宮之制, 然後可立世室。’ 似有不通。 有左右昭穆之制, 故有東西世室今爲同堂異室之制, 則連搆四、五間, 世室亦爲同堂之制, 有何不可?" 金敬祖金諶李克圭成世明議: "原廟之制, 當依禮官所議。 若大廟增室之議, 臣不敢不卞。 臣謹按, 七廟、五廟之制, 斷不可紊矣。 今大廟室數已盈, 而禮官據唐宗故事, 欲增一室, 臣不知其可也。 祖宗初定廟制, 豈不爲萬世計乎? 乃構七間, 意有在也。 親盡而出, 親親之殺也, 而況唐宗增室之制, 乃叔季所失, 固非聖人所爲。 且若擧增制之役, 則功役之難易, 不須論也。 然事重役巨, 必將經時矣。 列聖百年奉安之主, 不知移安於底所。 增室之議, 斷不可行也。 依禮官前議, 奉瘞恭靖神主於園陵, 以次陞祔, 似合情理。"


  •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3책 6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