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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145권, 성종 13년 윤8월 19일 乙酉 2번째기사 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서평군 한계희의 졸기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가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한계희청주(淸州)사람으로, 관찰사(觀察使) 한혜(韓惠)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기가 보통 사람과 달랐고, 취학(就學)하기에 이르자, 부지런히 공부하여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침식(寢息)을 잊기까지 하여서, 마침내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게 되었다. 정통(正統)826) 신유년827) 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정묘년828) 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하여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때에 세조(世祖)께서 잠저(潛邸)에 있었는데, 그의 어짊을 알고서, 문종(文宗)에게 아뢰기를,

"한계희(韓繼禧)는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行實)이 독실(篤實)하여, 당세(當世)에 견줄 만한 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덕종(德宗)이 세자(世子)가 되었는데, 세조께서 한계희에게 명하여 경학(經學)을 교수(敎授)하게 하고, 승진시켜 교리(校理)·겸문학(兼文學)을 삼았다가 좌필선(左弼善)으로 옮기었고, 〈뒤에 다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옮기었으며, 천순(天順)정축년829) 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세자 우보덕(世子右輔德)에 전임(轉任)되었다. 예종(睿宗)이 세자(世子)가 되자, 세조가 또 다시 한계희에게 명하여 내전(內殿)에 나아가 글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무인년830) 에 승진하여 좌보덕(左輔德)이 되었다가, 병조 지사(兵曹知事)로 옮기었는데 얼마 안되어 참의(參議)로 올랐다. 〈이해〉 9월에 친상(親喪)을 당하고, 경진년831)기복(起復)832) 하여 우승지(右承旨)를 제수하므로, 굳이 사양[固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다시 좌승지(左承旨)로 옮기었다가 곧 가선 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승진하고, 임오년833) 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가(加)하였으며, 성화(成化)을유년834) 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진하고, 여러 번 관계(官階)가 더해져서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무자년835)세조(世祖)의 병(病)이 위급(危急)하자, 급히 불러 침실[臥內]에 들어가니, 이때 예종(睿宗)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세조한계희를 시켜 예종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내가 평일(平日)에 글을 지어서 조훈 조장(祖訓條章)836) 과 같이 너에게 내려 주려고 하였는데, 지금은 이미 할 수가 없으니, 그 대강(大綱)만 간략히 말하겠다. 너는 마땅히 마음을 가다듬고 똑똑히 들어서, 공경히 받들고 게을리하지 말라. 첫째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섬길 것[敬天事神]이며, 둘째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기를 생각할 것[奉先思孝]이며, 세째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할 것[節用愛民]이니, 나의 말은 이것뿐이다."

하고, 이어서 한계희에게 내선(內禪)837) 할 뜻을 말하였다. 한계희가 아뢰기를,

"이것은 대사(大事)이니, 성상의 생각을 신중히 하시고, 원컨대 안정(安靜)을 하시며 조리(調理)하소서."

하니, 임금이 재차 소리를 지르며 재촉하였다. 한계희가 임금의 뜻이 이미 정하여지고, 병세(病勢) 또한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을 알고, 즉시 아뢰기를,

"매우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대보(大寶)를 가져오게 하여, 한계희가 보(寶)를 받들고 꿇어앉자, 임금이 친히 예종에게 전하고, 또 명하여 곤복(袞服)과 면류관(冕旒冠)을 가져오게 하여, 한계희가 또 받들어 올리니, 임금이 한계희에게 명하여 입히게 하였다. 한계희예종에게 배례(拜禮)를 드리도록 청하고, 곧 인도하여 나와 수강궁(壽康宮)의 문(門)에 나아가 군신(群臣)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이튿날 세조께서 승하(昇遐)하시니, 한계희가 통곡하여 물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것이 10여 일이었다. 처음에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도총관(都摠管)이 되고, 남이(南怡)가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니, 한계희가 비밀히 아뢰기를,

"귀성군(龜城君) 이준은 종실(宗室)이므로 금병(禁兵)을 맡는 것이 옳지 아니하고, 남이는 〈성격이〉 거칠고 사나와서 병권(兵權)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하여, 세조가납(嘉納)838) 하여 즉일(卽日)로 모두 파(罷)하였다. 예종(睿宗)조(朝) 때에 남이가 과연 역적질을 꾀하여서 복주(伏誅)되고, 논공(論功)하기에 이르자,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고, 서평군(西平君)에 봉(封)하였다. 뒤에 귀성군(龜城君) 이준이 폐출(廢黜)되어 죽으니, 사람들이 ‘선견(先見)이 있다.’고 말하였다. 기축년839) 에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금상(今上)840) 이 왕위를 잇자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고, 무술년841) 에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제수되고, 이때에 이르러 병(病)이 위독하니 서평군(西平君)에 봉하였다. 졸년(卒年)이 60세이고, 시호(諡號)가 문정(文靖)이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몸을 삼가서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하였다. 임종(臨終)할 때에 자손(子孫)들에게 타일러서 후장(厚葬)하지 말게 하였다. 한계희는 천품(天稟)이 정수(精粹)하며, 겉으로는 온화(穩和)하고 속으로는 꿋꿋하였다. 비록 처자(妻子)를 대할 적에도 게으른 용모[惰容]를 보이지 않았고, 일을 당하여 창졸(倉卒)한 경우라도 말을 빨리 하고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누조(累朝)를 거치면서 총우(寵遇)842) 를 받았어도 삼가고 조심하여 과실(過失)이 없었고, 매양 임금의 물음이 있을 때마다 경서(經書)를 인용하고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구차하게 〈임금의 뜻에〉 맞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가 집현전(集賢殿)에 있을 적에 동료(同僚)들이 서로 말하기를,

"성인(聖人)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으나, 한공(韓公)과 같은 이가 거의 가깝지 않겠는가?"

하였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군신(群臣)을 평(評)하여 말하기를,

"한 아무개[韓某]가 정미(精微)함이 제일(第一)이다."

하고, 그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친닐(親昵)843) 하더라도, 항상 벼슬을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그가 천거(薦擧)한 자가 서로 이어서, 삼공(三公)844) 에 이르기까지 하였는데, 반드시 말하기를,

"서평(西平)이 있는데 우리가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였다. 한계희는 성격이 또한 청렴하고 검소[淸素]하여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았으며, 일찍이 아내를 여의고 홀로 살아서, 자녀(子女)가 수인(數人)이 있는데도 혼가(婚嫁)가 판비(辦備)845) 되지 못하여서, 세조(世祖)가 훙서(薨逝)하기에 임박하여 정희 왕후(貞熹王后)에게 부탁해서 자부(子婦)의 장구(粧具)를 갖추어 내려 주었느니, 그가 〈임금의〉 대우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계희는 천품(天稟)이 검소[沖素]하고 간결(簡潔)하며, 분잡하고 화려[紛華]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온 집안이 초라했으며, 좌우(左右)에는 도서(圖書)뿐이었다. 소시(少時)에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갔을 적에도 동료(同僚)들이 매우 경외(敬畏)하여, 온 좌중(座中)이 웃으며 농지거리를 한창 하다가도 공(公)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면, 곧 조용히 하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세조(世祖)가 등용(登用)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삼으니, 인물(人物)을 전형(銓衡)하는 것이 한결같이 지공(至公)한 데에서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이간하는 말[間言]이 없었으며, 평생(平生)에 병(病)이 많아서, 휴가(休暇)를 내려 준 것이 반(半)을 차지하였으므로, 마침내 태석(台席)846) 에 오르지 못하여, 물론(物論)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그러나 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의 무리와 더불어 불씨(佛氏)의 껍데기[糟粕]를 도둑질하여 세조(世祖)에게 아첨하였으니, 대신(大臣)이 된자가 비록 임금에게 간(諫)하여 말리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차마 순종하고 아첨하여 뜻을 맞출 수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14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386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註 826]
    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 [註 827]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 [註 828]
    정묘년 : 1447 세종 29년.
  • [註 829]
    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830]
    무인년 : 1458 세조 4년.
  • [註 831]
    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832]
    기복(起復) : 어버이의 상중에 벼슬에 나오게 하는 일.
  • [註 833]
    임오년 : 1462 세조 8년.
  • [註 834]
    을유년 : 1465 세조 11년.
  • [註 835]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836]
    조훈 조장(祖訓條章) : 조상이 훈계한 조장.
  • [註 837]
    내선(內禪) : 대내(大內)에서 선위(禪位)하는 일.
  • [註 838]
    가납(嘉納) : 간하거나 권하는 말을 옳게 여기어 받아들임.
  • [註 839]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 [註 840]
    금상(今上) : 성종.
  • [註 841]
    무술년 : 1478 성종 9년.
  • [註 842]
    총우(寵遇) : 은총의 대우.
  • [註 843]
    친닐(親昵) : 친하고 가까움.
  • [註 844]
    삼공(三公) :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말함.
  • [註 845]
    판비(辦備) : 마련하여 준비함.
  • [註 846]
    태석(台席) : 정승의 자리.

西平君 韓繼禧卒。 輟朝、弔祭、禮葬如例。 繼禧 淸州人, 觀察使之子也。 幼聰悟異常, 及就學孶孶不倦, 至忘寢食, 遂博通經史。 正統辛酉, 中進士, 丁卯, 登第, 選入集賢殿爲正字, 累陞修撰。 時世祖在潛邸, 知其賢, 啓文宗曰: "繼禧經明行篤, 當世無雙。" 及世祖卽位, 德宗爲世子, 世祖繼禧, 授以經學, 陞爲校理兼文學, 轉左弼善, 遷司憲執義。 天順丁丑, 轉藝文館直提學世子右輔德。 及睿宗爲世子, 世祖又命繼禧, 就內殿授書。 戊寅, 陞左輔德, 轉兵曹知事, 未幾陞參議。 九月丁憂, 庚辰起復, 拜右承旨, 固辭不獲, 又轉左承旨, 俄陞嘉善工曹參判, 壬午, 加嘉靖吏曹參判兼世子右副賓客。 成化乙酉, 陞資憲吏曹判書, 累加至崇政。 戊子, 世祖疾革, 急召入臥內, 時睿宗在側。 世祖繼禧傳語睿宗曰: "予平日欲作書如祖訓條章賜汝, 今旣不能, 略言大槪。 汝可明心諦聽, 敬奉勿墮。 一, 敬天事神, 二, 奉先思孝, 三, 節用愛民, 予語止此。" 仍諭繼禧以內禪之意。 繼禧曰: "此大事, 恐勞聖慮, 願安靜調理。" 上再厲聲促之。 繼禧知上意已定, 疾勢又不可爲, 卽啓曰: "甚善。" 上命取大寶來, 繼禧奉寶而跪, 上親傳于睿宗, 又命取袞、冕來, 繼禧又奉以進, 上命繼禧被之。 繼禧睿宗拜, 因導出御壽康宮門, 受群臣賀。 翌日世祖升遐, 繼禧慟哭, 水飮不入口者十餘日。 初龜城君 爲都摠管, 南怡爲兵曹判書, (繼禱)〔繼禧〕 密啓曰: "宗室, 不宜典禁兵, 南怡麤悍, 不可授兵柄。" 世祖嘉納, 卽日皆罷之。 睿宗朝, 南怡果謀逆伏誅, 及論功, 賜推忠定難翊戴功臣號, 封西平君。 後廢死, 人謂有先見。 己丑, 陞崇祿, 上嗣位, 賜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號。 戊戌, 拜議政府左贊成, 及是病篤, 封西平君。 卒年六十, 諡文靖, 學勤

好問: ‘文;’ 恭己鮮言: ‘靖’。 臨終, 戒子孫勿厚葬。 繼禧天資精粹, 外溫內貞。 雖對妻子, 未見有惰容, 遇事倉卒, 無疾言遽色, 被累朝寵遇, 謹愼無過, 每上有所問, 引經據古, 勿希苟合。 其在集賢, 同列相謂曰: "聖人吾未得見, 如韓公其殆庶乎?" 世祖嘗評論群臣曰: "韓某精微第一。" 待之雖甚親昵, 常呼官而不名, 其所薦, 相繼至三公, 必曰: "西平在, 而吾輩竊位, 得無愧乎?" 繼禧性又淸素, 不事産業, 早鰥居, 有子女數人, 婚嫁未辦, 世祖臨薨, 囑貞熹王后, 備賜子婦粧具, 其見遇如此。

【史臣曰: "繼禧天資沖素簡潔, 不喜紛華, 一室蕭然, 左右圖書。 少時選入集賢殿, 同僚甚敬畏, 四座笑謔方殷(望)〔盛〕 , 公自外來, 則輒悄然無聲。 世祖用爲吏曹判書, 銓衡人物, 一出至公, 人無間言。 平生多病, 賜告居半, 竟未登台席, 物論惜之。 但與盧思愼姜希孟輩, 竊佛氏糟粕, 以媚世祖, 爲大臣者, 縱不能諫止其君, 忍從諛以中之耶?"】


  • 【태백산사고본】 22책 14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386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