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조실록 27권, 세조 8년 2월 16일 辛巳 2번째기사 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유구국 북쪽의 구미도에 표류하였다 돌아온 양성의 표류기

처음에 병자년093) 정월 25일에 선군(船軍) 양성(梁成) 등이 제주(濟州)에서 배를 출발하여 바람을 만나서 2월 초2일에 표류하다가 유구국(琉球國)의 북쪽 방면 구미도(仇彌島)에 이르렀었다. 섬 주위의 둘레는 2식(息) 가량이었고, 섬 안에 작은 석성(石城)이 있어서 도주(島主)가 혼자 거주하였고, 촌락(村落)은 모두 성밖에 있었다. 섬에서 그 유구국까지의 거리는 순풍(順風)의 뱃길로 2일 노정(路程)이었는데, 양성 등이 섬에 머무른 지 1개월 만에 공선(貢船)을 타고 그 나라에 이르러, 물가에 있는 공관(公館)에 거주하였다. 공관(公館)은 왕도(王都)에서의 거리가 5리 남짓하였고, 공관 옆 토성(土城)에는 1백여 가(家)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 나라와 중국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매 집으로 하여금 날마다 돌려가면서 양성 등을 공궤(供饋)하게 하였다. 1개월이 지난 뒤에 왕성(王城)에 갔는데, 왕성은 3겹으로 되어 외성(外城)에는 창고(倉庫)와 마구(馬廐)가 있었고, 중성(中城)에는 시위군(侍衛軍) 2백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고, 내성(內城)에는 2, 3층의 전각(殿閣)이 있었다. 대개 근정전(勤政殿)과 같았는데, 그 왕(王)이 길일(吉日)을 택하여 왕래하면서 그 전각(殿閣)에 거(居)하였으며, 판자(板子)로 지붕을 덮고 판자 위에는 납(鑞)을 진하게 칠하였다. 상층(上層)에는 진귀한 보물(寶物)을 간수하였고, 하층(下層)에는 주식(酒食)을 두고, 왕(王)은 중층(中層)에 거(居)하고 시녀(侍女) 1백여 인이 있었다. 그 나라의 지세(地勢)는 중앙이 협소(狹小)하여 혹은 1, 2식(息) 거리이나, 남북은 광활(廣闊)하여 그 끝을 볼 수 없었는데, 대개 장구[長鼓]의 모양과 같았다. 나라에는 큰 강[川]이 없고, 국도(國都)에서 동북쪽으로 5일 노정(路程)의 거리에 큰 산(山)이 있었으나, 산(山)에는 잡(雜)된 짐승이 없었고 다만 돼지[猪]만 있을 뿐이었다. 섬 안에는 군현(郡縣)을 설치하고 석성(石城)을 쌓아서 관(官)의 수령[守者]이 1인씩 있었는데, 도로의 서로 떨어진 거리가 혹은 1식(息), 혹은 2식(息), 혹은 반 식(息) 정도였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혹은 조밀(稠密)하기도 하고 혹은 드물기도 하였는데, 이(里)마다 각각 장(長)이 있었고, 공사(公私)의 집들이 크고 작은 것 없이 그 제도가 모두 한 일자(一字) 모양과 같았고 구부러진 곳이 없었으며, 띠풀[茅草]로 지붕을 덮었다. 그 나라는 항상 따뜻하여 서리와 눈이 없고 추운 겨울이 4월과 같아서 초목(草木)이 시들어져 떨어지지 아니하고, 옷에는 솜을 두지 않고, 말 먹이는 항상 푸른 풀을 사용하였고, 여름 해가 정북쪽에 있었다.

1. 절일(節日)·원일(元日)에는 짚으로써 왼쪽으로 꼰 새끼를 문(門)위에 걸쳐 놓고, 또 나무를 쪼개어 묶음[束]을 만들어서 쌓인 모래 위에 두고, 그 가운데 떡그릇[餠器]을 얹으며, 또 소나무를 가지고 묶은 나무[束木] 사이에 꽂는데, 5일이 지나서야 그만두었다. 그 풍속에 이를 기양(祈禳)한다고 이르며, 또 술을 두고 서로 즐기었다.

1. 7월 15일에 불사(佛寺)에 올라가 죽은 어버이의 성명(姓名)을 써서 안상(案床)위에 놓고 쌀을 상(床) 위에 올리고, 댓잎[竹葉]으로 땅에 물을 대는데, 중은 불경(佛經)을 읽고, 속인(俗人)은 예배(禮拜)하였다.

1. 노비(奴婢)는 일본인(日本人)이었는데, 비록 가까운 친족(親族)이라도 모두 사서 노비로 삼았고, 국왕(國王)의 친근(親近)한 사령(使令)들은 모두 사들인 자였고, 혹은 여국인(女國人)이 와서 노비로 바친 자들도 있었다.

1. 공장(工匠)은 단지 주장(鑄匠)과 목수(木手)만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보지 못하였다.

1. 포진(鋪陳)094) 은 완초(莞草)로써 짠 자리였는데, 본국(本國)과 같았고, 혹은 중국에서 사온 것이었다.

1. 의복과 음식은, 남자의 복장이 본국의 직령(直領)의 제도와 같았는데, 다만 소매가 넓을 뿐이었고, 빛깔은 흑색·백색을 좋아하였으며, 여자의 복장은 의상(衣裳)이 하나같이 우리 나라와 같았으며, 군신(君臣)과 상하(上下)의 남녀(男女)는 모두 관(冠)이나 두건(頭巾)을 쓰지 않았다. 걸을 때는 맨발로 다니고 화혜(靴鞋)095) 따위의 물건이 없었고, 모든 소와 말의 가죽은 모두 관(官)에 바쳐서 갑옷을 만들었으며, 그 음식을 먹을 때에는 숟갈과 젓가락이 없었고, 완초(薍草)096) 를 꺾어서 젓가락같이 만들어서 먹었다.

1. 남자는 말을 타는 것이 보통과 같았으나, 부인(婦人)들은 말을 탈 때에는 양다리를 함께 내리고 말 등에 걸터앉는데, 마치 교상(交床)에 앉아서 가는 것과 같았다.

1. 전화(錢貨)는 흥용(興用)하는 것이 전화(錢貨)이었으나, 그 주조(鑄造)하여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모두 중국에서 얻어다가 사용하였는데, 정축년097) 에 중국 사람들이 처음으로 와서 가르쳤으며 10문(文)이 쌀 1되[升]에 준(准)하였다.

1. 장사아치[商賈]들이 강(江) 연안에 배를 정박(碇泊)시키는 곳에 일본 여국(女國) 사람들도 또한 와서 교역하였다.

1. 두승(斗升)은 되[升]가 우리 나라와 같았고, 말[斗]이 혹은 5되를 담기도 하고, 혹은 10되를 담기도 하고, 혹은 30되를 담기도 하였다.

1. 경점(更點)은 대궐 남문(南門)에 나무로써 누기(漏器)를 만들었는데, 그릇의 몸체는 둥글고 그 가운데가 비어 있고, 그 배에다 구멍을 뚫어서 물을 정량(定量)하여 부어 넣은 다음 물이 다 없어지는 것을 헤아려서 이를 1경(更)이라고 하며, 드디어 북[鼓]를 쳐서 알렸다. 북치는 수는 그 경(更)의 수와 같았고, 인정(人定)·파루(罷漏)는 본국과 다름이 없었다.

1. 조회(朝會)는 먼 지방의 읍장(邑長)들이 길일(吉日)을 택하여 잔치상을 준비하여 대궐 뜰에 바치는데, 국왕(國王)은 층각(層閣)에 있으면서 내려오지 않으며, 여러 신하들이 뜰에 있으면서 음식을 먹었으나, 음악(音樂)이 없고 헌작(獻爵)098) 도 없었다.

1. 영조칙(迎詔勅)은 중국의 조칙(詔勅)과 우리 나라의 서계(書契)가 나라에 이르면 배가 정박하는 첫 지면(地面)에 기(旗)·둑(纛)099) ·개(蓋)100) 등의 물건으로 의장(儀仗)을 설치하고, 또 군사들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나가서 맞이하는데, 조칙(詔勅)이나 서계(書契)를 여교(轝轎)101) 에 봉안(奉安)하고, 그 곁을 따르면서 북과 징을 울리고 태평소(太平簫)를 불면서 왕실(王室)로 맞아들였다. 왕(王)이 강의(絳衣)를 입고 관(冠)을 쓰고 절을 한 다음 앉으면, 이를 개독(開讀)하였다. 국왕(國王)은 항상 층각(層閣)에 있으면서 내려오지 않고, 부인(婦人)을 시켜 왕명(王命)을 전(傳)하며, 속인(俗人)은 관복(冠服)이 없이 모두 막배(膜拜)102) 를 행하였다. 이때가 되면 뜰로 내려와 절하고 꿇어앉기를 대략 예법(禮法)과 같이 하였다.

1. 상장(喪葬)은 본래 국왕(國王)이 죽으면 일체 시위(侍衛)에 응(應)해야 하는데, 주민(住民)은 마관(麻冠)·마의(麻衣)를 입고 곡(哭)하여 슬픔을 다하고 14일[二七日]만에 끝내었다. 모든 백성들이 부모의 상(喪)을 당하면 족친(族親)들이 상가(喪家)에 모여서 조상(弔喪)하고 곡(哭)하며, 상(喪)을 당한 사람은 흰옷[白衣]을 입는데, 모두 3일 뒤에야 고기를 먹으며, 7일 안에는 살생(殺生)하지 않았다.

1. 국왕(國王)의 장례(葬禮)는 바위를 파서 광(壙)을 만드는데, 광(壙) 안의 사면(四面)에 판자(板子)를 짜서 세우고, 드디어 관(棺)을 내려 묻은 다음에 판자 문(門)을 만들어 자물쇠를 채우고, 묘(墓) 앞과 양쪽 옆에다 집을 짓도록 하여서 묘(墓)를 지키는 사람이 거주하며, 묘를 빙 둘러서 석성(石城)을 쌓는데 성(城)에는 하나의 문(門)이 있었다. 보통 사람의 장례(葬禮)는 광(壙)을 파서 관(棺)을 묻는 것은 같았으나 다만 집을 짓고 성(城)을 쌓는 따위의 일이 없을 뿐이었다.

1. 혼가(婚嫁)는 혼인(婚姻)할 때에 남자 집에서 먼저 중매(中媒)를 하여 혼인을 약정(約定)하고 날짜를 택하는데, 남자 집의 친족(親族) 여자가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 행례(行禮)하며, 그날 밤에 양쪽 집 족친(族親)이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헤어졌다.

1. 제사는 그 나라에 제향(祭享)이 없었다.

1. 조관(朝官)은 무릇 사람을 쓸 때에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의 천거(薦擧)를 들어주고 관(官)에서 노비(奴婢)·토전(土田)·집[家舍]과 군기(軍器) 등의 물건을 주며, 만약 유능하지 못하면 파출(罷黜)하고 아울러 그에게 주었던 물건을 회수하였다. 상시로 1백여 인이 대궐 안에 있으면서 정사를 다스리는데, 5일씩 서로 교체(交遞)하였고, 또 4, 5인의 장번(長番)103) 이 있어서 대궐을 나가지 않는데, 만약 자기 뜻대로 자주 출입(出入)하는 짓을 행하면 파출하기를 위와 같이 하였다. 그 입번(入番)할 때에는 모두 공름(公廩)에서 녹을 받고, 그 중에 1인이 우두머리가 되어 이들을 총괄하여 다스렸다.

1. 도적(盜賊)은 본국(本國)에서는 도적이 없고, 일본(日本)에서 팔려간 자들이 왕왕 남의 재물(財物)을 훔치는데, 체포하여 국문(鞫問)하고 죄가 크면 이를 주륙(誅戮)하고 작으면 다른 섬에 유배(流配)하였다. 그 추국(推鞫)하는 법은 태형(笞刑)·장형(杖刑)이 없고, 다만 땅에 두 개의 판자를 겹쳐 놓고 죄인의 다리를 그 사이에 끼워서 그 양쪽 끝을 묶고 사람으로 하여금 올라가서 휘어지게 하는데 한쪽 끝에 3인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1. 농상(農桑)은 여러 가지 곡식이 모두 있었으나 다만 팥[小豆]·보리[大麥]·녹두(菉豆)가 없었다.

1. 뽕나무·삼·목면(木綿)이 없었고, 다만 생저(生苧)104) 가 있었는데, 그 길이가 2장(丈)쯤 되었으며, 1년에 세 번 취(取)하였다.

1. 한전(旱田)과 수전(水田)은 쟁기[耒耜]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손으로써 매만졌고, 매 10월에 모종하였다가 다음해 정월에 모를 나누어 심어서, 5월이 되어 익으면 그 이삭을 베고 짚 줄기를 베지 않는데, 거기에서 곁가지 모가 또 번성하여 10월에 다시 거두었다. 전지를 매만지는 데 다만 삽(鍤)으로 할 뿐이었고, 쟁기를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1. 소산(所産)은 금(金)과 은(銀)이 나지 아니하여 남만(南蠻)·일본(日本)에서 사서 사용하였다.

1. 금수(禽獸)는 가축으로서 소·말·돼지·닭·개가 있었고, 날짐승으로서 까마귀·참새가 있었는데, 그 풍속이 앵무(鸚鵡)새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여 항상 중국에서 사왔었다.

1. 수륙(水陸)의 산물은 물에서 나는 것이 다만 어물(魚物)뿐이었고, 육지에서 나는 것은 유자(柚子)·귤(橘)·감(柑)뿐이었다.

1. 군사(軍士)는 군사 1백여 명을 정원으로 하여 날마다 바꾸어 숙직(宿直)을 교대하였으나, 그 원래의 수는 쉽게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군사 장비와 갑옷·투구는 본국과 다름이 없었다. 쇠로써 조각을 만들어 그 얇기가 종이짝 같은데 갑령(甲領)에 붙이니, 마치 목을 보호하는 문양(文樣)과 같았다. 또 쇠로써 인면(人面)을 만들어 얼굴 위에다 붙이는데, 그 모양이 마치 가면(假面)과 같았다. 환도(環刀)·방패·창(槍)은 본국과 다름이 없었으나, 다만 쇠로써 4가지가 난 날[刃]을 만들어 그 모양이 굴곡이 있고 2장(丈)쯤 되는 나무로써 자루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그 풍속에 이를 구(拘)라고 이르며, 먼 곳의 죄인을 참형(斬刑)하는 병기(兵器)였다.

1. 화통(火筒)은 그 크고 작은 것과 체제(體制)가 하나같이 본국의 제도와 같았다.

1. 궁시(弓矢)는 뽕나무로써 활을 만들고 저사(苧絲)로써 시위를 만드는데, 활은 본국의 마전(磨箭)105) 과 같았으며, 혹은 대나무로써 활촉을 만든 것도 있었다.

1. 교린(交隣)은 중국과 일본국(日本國)·여국(女國)과 서로 통호(通好)하였으나, 그러나 종종 하는 것이 아니었다.

1. 중국과의 정도(程途)는 동남풍(東南風)을 따라서 배가 7일 동안 가면 도착하고, 일본(日本)과의 정도(程途)는 서풍(西風)을 따라서 배가 18일 동안 가면 도착하였다.

1. 공전(攻戰)106) 은 나라의 동쪽에 두 섬이 있었는데 하나는 지소도(池蘇島)이고 하나는 오시마도(吾時麻島)였으니, 모두 항복 귀부(歸附)하지 않았다. 오시마도는 공격 토벌하여 귀순(歸順)한 지가 지금 이미 15여 년이나, 지소도는 매년 토벌하기에 이르지만 아직도 복종(服從)하지 않고 있었다.

초득성(肖得誠) 등 8인이 금년(今年)107) 정월 24일에 나주(羅州)에서 배를 출발하여 2월 초4일에 표류하다가 유구국(琉球國) 미아괴도(彌阿槐島)에 이르렀다. 섬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실어 와서 먹이고 인도하여 이 섬에 머물게 하고서 섬사람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음식을 준비하여 공급하였다. 섬의 길이가 2식(息) 가량, 너비가 1식(息) 정도 되었다. 2월에 보리를 이미 거두어 들였고 밀이 모두 익었으며, 참외와 가지도 또한 이미 열매가 맺혔다. 4월 16일에 이르러 유구국 상선(商船)에 쫓아가 부탁하여 그달 27일에 본국(本國)에 도착하였다. 국왕(國王)이 궁내(宮內)의 남쪽 행랑(行廊)에다 두고 접대하였는데, 날마다 불러 보고 후하게 공궤(供饋)하였다. 7월 6일에 출발하여 돌아왔다.

1. 성(城)은 3겹으로 되었고 모두 석성(石城)이었는데 성(城)의 높이는 우리 나라의 도성(都城)과 같았으나 약간 높았으며, 성문(城門)도 또한 우리 나라와 같았다. 그 성(城)은 구부러져서 마치 곡수(曲水)와 같았는데 두 성(城)의 서로의 거리가 마치 한 필(匹)의 베[布] 길이와 같았다.

1. 국왕(國王)은 2층(層)의 전각(殿閣)에 거(居)하였는데, 그 전각은 모두 단청[丹艧]을 입히고 지붕을 판자(板子)로 덮고 취두(鷲頭)108) 마다 납(鑞)으로써 진하게 칠하였다. 낭무(廊廡)109) 는 주위 둘레에 돌아가면서 연접(連接)하였는데, 그 칸수(間數)를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군사들이 머물러 숙위(宿衛)하였는데, 조회(朝會)와 죄수(罪囚)를 국문(鞫問)할 때에 군사들은 갑옷을 입고 시위(侍衛)하였으며, 또 면갑(面甲)110) 을 착용하였는데, 마치 가면(假面) 모양과 같았으니, 쇠로써 두 뿔을 만들어 모양이 마치 녹각(鹿角)과 같았고 금(金)·은(銀)으로 진하게 칠하였다. 쇠로써 행등(行滕)111) 을 만들어 그 두 다리를 묶었다.

1. 국왕(國王)은 나이가 33세였다.

1. 국왕(國王)은 아들 4인이 있었는데, 장자(長子)는 나이가 15세쯤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리었다. 장자(長子)가 출입(出入)할 때에는 군사 10여 인이 모시고 따랐었다. 왕자(王子)들은 국왕(國王)과 더불어 같은 곳에 살지 아니하고 따로 다른 곳에서 살았다.

1. 옛 궁궐은 살고 있는 궁성(宮城)의 남쪽에 있는데, 그 층각(層閣)과 성곽(城廓)의 제도가 항상 거처하는 궁궐과 같았다. 때때로 왕래하면서 혹은 2, 3일씩, 혹은 4, 5일씩 머물러 거처하였다. 국왕(國王)이 행차할 때에 시위(侍衛)하는 군사는 약 3백여 명이었는데, 모두 갑옷을 입고 말을 탔으며, 잡고 있는 병기(兵器)는 혹은 궁시(弓矢)이거나 혹은 창(槍)이거나 혹은 검(劍)이었고, 혹은 모양이 갈고리[鉤] 같은 것도 있었는데, 전후로 대열(隊列)에 섞여서 행진하였다. 국왕(國王)은 혹은 교자(轎子)를 타기도 하고 혹은 말을 타기도 하며, 시위하는 군사들은 노래를 부르는데, 그 곡절(曲節)이 마치 농부가(農夫歌)와 같았다. 국왕의 나이 어린 세 아들은 대열의 앞에 있고, 장자(長子)는 대열의 뒤에서 따랐다.

1. 국왕(國王)이 한가롭게 거(居)할 때에는 혹은 홍백초(紅白綃)를 사용하거나 혹은 흑초(黑綃)를 사용하여 머리를 싸매지만, 만약 출입(出入)할 때에는 왜립(倭笠) 착용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본국(本國) 여자들의 죽립(竹笠)과 같으며, 안은 붉고 바깥은 검었다. 복식(服飾)은 조관(朝官)과 별 다름이 없었다.

1. 5일마다 한 번씩 조회(朝會)하는데, 좌우에 각각 하나의 대기(大旗)를 세우고 다른 의장(儀仗)은 없었다. 조관(朝官)이 뜰에 들어가 합장(合掌)하여 세 번 절하였다. 그날 인민(人民)들이 술통을 가지고 와서 궁궐에 술을 바치고, 또 생저(生苧)도 바쳤다.

1. 백성들의 거주(居住)가 조밀(稠密)하여 집들이 가까와 담장이 붙었고, 길거리가 매우 좁은데, 인가(人家)에서는 소나무와 종려나무 두 그루를 심기를 좋아하였다.

1. 의복(衣服) 제도는 하나같이 왜복(倭服)과 같았는데, 다만 바지를 입지 않을 뿐이었다. 그 복장은 단자(段子)·사초(紗綃)와 저포(苧布)를 쓰는데, 남녀가 같은 복장이었다.

1. 그 풍속에 항상 크고 작은 칼 두 자루를 차고 다니는데, 음식을 먹고 기거(起居)할 때에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칼의 모양은 본국(本國)의 환도(環刀)와 같았다.

1. 상하(上下)의 남녀(男女)는 아울러 모두 맨발로 다니며 신발을 신지 않으나, 다만 성(城) 밖에서는 신을 신는데 왜혜(倭鞋)와 같았다. 궁성(宮城)에 들어오면 신지 않으며, 비록 성(城) 밖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존장자(尊長者)를 만나면 또한 벗어버렸다.

1. 남자는 상투를 땋아서 머리의 왼쪽으로 두고, 여자는 상투를 땋아서 머릿골 뒤에 두는데, 항상 관건(冠巾)을 쓰지 않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혹은 왜립(倭笠)을 쓰기도 하고, 혹은 종려 잎을 쓰기도 하고, 혹은 전삼(氈衫)을 쓰기도 하고, 혹은 도롱이[蓑衣]를 쓰기도 하였다.

1. 조관(朝官)의 녹봉(祿俸)은 5일마다 한 차례 반사(頒賜)하였다.

1. 외성(外城) 안에 창고(倉庫)와 내구(內廐)가 있는데, 항상 큰 말 6필(匹)을 길렀다.

1. 강(江)가에 성(城)을 쌓고, 그 가운데 주고방(酒庫房)을 설치하여 방 안에 큰 옹기(甕器)를 배열(排列)하고 술들을 가득 채워 놓고서, 1년치, 2년치, 3년치의 주고(酒庫)에 그 정액(定額)을 나누어 써 붙였다. 또 군기고(軍器庫)를 설치하여 철갑(鐵甲)·창(槍)·검(劍)·궁시(弓矢)를 그 가운데에 가득 채워 놓았다.

1. 여러 가지 곡류(穀類)가 모두 있었다.

1. 그 가축(家畜)은 소·말·닭·개가 있었고, 짐승은 노루·사슴이 있었고, 날짐승은 제비·꾀꼬리·까마귀·뻐꾸기·참새가 있었으나, 호랑이와 표범은 없었다.

1. 그 채소(菜蔬)는 파·부추·마늘·생강·무우·상치·파초(芭蕉)·양하(蘘荷)·토란·마[薯藇]가 있었다.

1. 선척(船隻)은 항상 벌레가 먹을까 염려하여 강(江) 가에 초사(草舍)를 지어서 들여놓았다.

1. 저자[市]는 강(江) 가에 있었는데, 남만(南蠻)·일본국(日本國)·중국의 상선(商船)이 와서 서로 교역하였다.

1. 남만(南蠻)은 나라의 정남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3개월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일본국(日本國)은 나라의 동남쪽에 있는데 5일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중국은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20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1. 다만 모든 도적(盜賊)은 다 주륙(誅戮)하였는데, 혹은 국왕(國王)이 친히 국문(鞫問)하고 군사들이 잡아가서 성(城) 밖에서 죽이었다. 혹은 관부(官府)에서 유사(有司)가 죄를 다스려서 죽이기도 하였다.

1. 수산(水産)은 오로지 어물(魚物)뿐이었고, 육지에 있는 것은 오로지 배나무·밤나무·복숭아·종려나무·소나무·상수리나무·왜귤(倭橘)나무 뿐이었다.

1. 처음에 미아괴도(彌阿槐島)에 이르렀더니, 본도(本島) 사람과 인근의 굴이마도(屈伊麻島)·일남포도(日南浦島)·시마자도(時麻子島)·우감도(于甘島)의 5섬 인민(人民) 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술을 마셨는데, 매양 서로 갈 때마다 반드시 초득성(肖得誠) 등을 청하여 후하게 위로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27권 【국편영인본】 7책 512면
  • 【분류】
    외교-유구(琉球)

  • [註 093]
    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094]
    포진(鋪陳) : 자리 깔개.
  • [註 095]
    화혜(靴鞋) : 신발.
  • [註 096]
    완초(薍草) : 억새풀.
  • [註 097]
    정축년 : 1457 세조 5년.
  • [註 098]
    헌작(獻爵) : 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것.
  • [註 099]
    둑(纛) : 대장기(大將旗).
  • [註 100]
    개(蓋) : 의장(儀仗)의 하나로 양산(陽繖) 모양임.
  • [註 101]
    여교(轝轎) : 수레.
  • [註 102]
    막배(膜拜) : 남방 사람들이 절을 말함.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
  • [註 103]
    장번(長番) : 교대하지 않고 계속 입번(立番)하거나, 교대하는 기간이 오래 되는 입번(立番).
  • [註 104]
    생저(生苧) : 생모시.
  • [註 105]
    마전(磨箭) : 전쟁에 쓰는 화살의 하나. 《세종실록》 오례의(五禮儀)에 보면, "화살의 깃이 좁고 철촉(鐵鏃)이 작은 것을 마전이라 한다." 하였음.
  • [註 106]
    공전(攻戰) : 공격하고 싸우는 것.
  • [註 107]
    금년(今年) : 1462 세조 8년.
  • [註 108]
    취두(鷲頭) : 망새.
  • [註 109]
    낭무(廊廡) : 정전(正殿)에 딸린 부속 건물.
  • [註 110]
    면갑(面甲) : 얼굴을 가리는 갑주(甲胄).
  • [註 111]
    행등(行滕) : 행전(行纏).

○初, 丙子年正月二十五日船軍梁成濟州發船逢風, 二月初二日漂到琉球國北面仇彌島。 島周回可二息, 島內有小石城, 島主獨居之, 村落皆在城外。 島距其國, 順風二日程, 梁成等留島一月, 載貢船到國, 住水邊公館。 館距王都五里餘, 館傍土城有百餘家, 皆我國及中原人居之, 令每家輪日餉等。 過一月歸王城, 王城凡三重, 外城有倉庫及廐, 中城侍衛軍二百餘居之, 內城有二三層閣。 大槪如勤政殿, 其王擇吉日往來居之。 其閣覆以板, 板上以鑞沃之。 上層藏珍寶, 下層置酒食, 王居中層, 侍女百餘人。 其國地勢中央狹小, 或一二息, 南北廣闊不見其際, 大槪如長鼓之形。 國無大川, 國都東北距五日程, 有大山, 山無雜獸, 只有猪耳。 島內置郡縣築石城, 有官守者一人, 道路相距, 或一息、或二息、或半息。 居民或稠或稀, 每里各有長, 公私家舍無大小, 其制皆如一字無回互, 覆以芧草。 其國常暖無霜雪, 冬寒如四月, 草木不彫落, 衣不綿絮, 喂馬常用靑草, 夏日在正北。 一, 節日、元日以藁左索懸於門上, 又剖木爲束, 置於積沙之上, 加餠器於其中, 又以松木揷於束木之間, 至五日乃止。 其俗謂之祈禳, 且置酒相娛。 一, 七月十五日上佛寺, 記亡親姓名, 置於案上, 奠米於床, 以竹葉灌水於地, 僧則讀經, 俗則禮拜。 一, 奴婢日本人, 雖切族皆賣爲奴婢, 國王親近使令, 皆所買也。 或有女國人來贈奴婢者。 一, 工匠, 只用鑄匠木手, 餘皆未見。 一, 鋪陳。 莞草織席如本朝, 或於中原買來。 一, 衣服、飮食, 男服則如本朝直領之制, 但袖廣闊, 色尙黑白, 女服則衣裳一如我國, 君臣上下男女, 皆不冠巾。 徒跣而行, 無靴鞋等物。 凡牛馬之皮, 皆納官造甲, 其食無匙筯, 折薍草如筯而食。 一, 男子騎馬如常, 婦人騎馬時竝垂兩脚踞坐馬背, 如坐交床而行。 一, 錢貨, 所興用者錢貨, 然不知鑄成之法, 皆得於中原而用之, 丁丑年中原人始來敎之, 十文準米一升。 一, 商賈在沿江船泊處, 日本女國之人亦且來市。 一, 斗升, 升則如我國, 斗則或容五升, 或容十升, 或容三十升。 一, 更點, 闕南門, 以木爲漏器, 器體圓虛其中, 穿穴其腹, 量水爲注, 以水盡爲度謂之一更, 遂擊鼓, 鼓數如其更數, 人定、罷漏無異本朝。 一, 朝會, 遠方邑長擇吉日辦宴供進闕庭, 國王在層閣不下, 群臣在庭而飮食, 無音樂, 無獻爵。 一, 迎詔勑, 中原詔勑及我國書契到國, 船泊初面以旗、纛、蓋等物爲儀仗。 又軍士具甲胄出迎, 安詔勑書契於轝轎, 從傍擊鼓, 錚吹太平簫, 迎入王宮。 王服絳衣着冠而拜之, 坐開讀。 國王常在層閣不下, 使婦人傳命, 俗無冠服, 皆行膜拜。 至此下庭拜跪, 略如禮焉。 一, 喪葬, 本國王死, 一應侍衛, 住民着麻冠、麻衣, 哭之盡哀, 二七日而除。 凡民遭父母喪, 族親聚喪家, 弔哭, 喪人着白衣, 皆三日後食肉, 七日內不殺生。 一, 國王葬禮, 鑿巖爲壙, 壙內四面編板立之, 遂定棺作板門以鑰鎖, 使之墓前及兩傍, 構屋守墓人居之。 環墓築石城, 城有一門。 凡人葬禮鑿壙定棺同, 但無構屋築城等事。 一, 婚嫁, 婚姻之時, 男家先媒約定擇日, 男家族女歸婦家, 率新婦還家行禮, 其日夜兩家族聚飮而散。 一, 祭, 其國無祭享。 一, 朝官, 凡用人聽在位人, 薦擧官給奴婢、土田、家舍及軍器等物。 如不能黜之, 幷收其所給之物。 常時百餘人在闕內治事, 五日相遞, 又有四五人長番不出, 若以己意數行出入, 則黜之如上。 其入番之時, 皆受公廩, 其中一人居首總理。 一, 盜賊, 本國無盜賊, 自日本見賣而往者, 往往竊人財物, 捕鞫之, 大則戮之, 小則流于他島。 其推鞫之法, 無笞杖, 但重置兩板於地, (浹)〔挾〕 罪人之脚, 結其兩端, 使人登而搖之, 一端不過三人。 一, 農桑, 諸穀皆有, 但無小豆、木麥、菉豆。 一, 無桑麻木綿, 但有生苧, 其長二丈, 許一年三取之。 一, 旱田、水田不用耒耟, 以手治之, 每於十月苗種, 翼年正月分苗種之, 及五月而熟, 刈其穗, 不取其藁, 其孼苗又盛, 十月再收之。 治田但以鍤, 不用耒耟。 一, 所産金銀不産, 買於南蠻日本用之。 一, 禽獸, 其畜則有牛、馬、猪、雞、犬, 其禽則有鴉ㆍ雀, 其俗好玩鸚鵡, 常於中原買來。 一, 水陸産, 産於水者, 但魚物耳, 産於陸者, 柚、橘、柑耳, 一, 軍士, 以軍士百餘爲額, 更日遞直, 然其原數則未易悉知。 但軍裝甲胄無異本朝。 以鐵作片, 其薄如紙, 附於甲領, 如護項之樣。 又以鐵作人面, 着於面上, 形如假面。 環刀、楯、槍無異本朝, 但以鐵爲四枝之刃, 其形屈曲, 以木二丈許作柄用之, 其俗謂之拘, 斬遠處罪人之兵。 一, 火筒, 其大小及體制一如本國之制。 一, 弓矢, 以桑木爲弓, 以苧爲絃, 矢則如本朝磨箭, 或有以竹爲鏃者。 一, 交隣中原及日本國女國相通, 然不數數。 一, 中原程途因東南風舟行七日乃到, 日本程途順西風舟行, 十八日乃到。 一, 攻戰, 國東有二島, 一曰池蘇, 一曰吾時麻, 皆不降附。 吾時麻則攻討歸順, 今已十五餘年, 池蘇則每年致討, 猶不服從。 肖得誠等八人, 今年正月二十四日, 羅州發船, 二月初四日, 漂到琉球國 彌阿槐島。 島人載酒肉來饋, 引留此島, 島人輪辦供給。 島長二息、廣一息許。 二月大麥已收刈, 小麥皆熟, 瓜茄已結實。 至四月十六日, 附趁琉球國商船, 本月二十七日, 到本國。 國王於宮內南行廊接置, 日日召見厚饋。 七月六日發還。 一, 城有三重, 皆石築, 城高如我國都城而稍高, 城門亦如我國。 其城回互如曲水, 兩城相距如一匹布長。 一, 國王居於二層閣, 其閣皆著丹艧, 覆以板, 每鷲頭以鑞沃之。 廊廡周回連接, 間數不能知悉。 軍士留宿焉, 朝會及罪囚鞫問時, 軍士着甲侍衛, 又着面甲如假面形, 以鐵作兩角, 狀如鹿角, 沃以金銀。 以鐵作行縢, 束其兩脚。 一, 國王年三十三歲。 一, 國王有子四人, 長子年十五許, 餘皆幼。 長子出入時, 軍士十餘人侍從之。 王子不與國王同處, 別在他所。

一, 舊宮在所居宮城南, 其層閣、城郭制度與常居宮同。 時時往來, 或二三日、或四五日留居焉。 國王行時, 侍衛軍士約三百餘, 皆着甲騎馬, 所執兵或弓矢、或槍、或劍、或有形如鉤者, 前後雜列而行。 國王或乘轎, 或乘馬, 侍衛軍士唱歌, 曲節如農歌。 年少三子在前, 長子於後從之。 一, 國王燕居, 或用紅白綃, 或用黑綃裹頭, 若出入則着笠, 狀如本國女竹笠, 內紅外黑。 服飾與朝官無別。 一, 每五日一朝會, 左右各立一大旗, 無他儀仗。 朝官入庭合掌三拜。 其日人民持酒桶來, 納於宮, 又納生苧。 一, 民居稠密, 比屋連墻, 街路甚狹, 人家好種植松棕二樹。 一, 衣服制度一如服, 但不着袴。 其服用段子、絲綃及苧布, 男女同服。

一, 其俗常佩大小二刀, 飮食起居, 不離於身。 刀形與本國環刀同。 一, 上下男女竝皆徒跣, 而無靴鞋, 但城外着鞋如鞋。 入宮城不着, 雖城外若見尊長, 則亦脫去。 一, 男子椎髻在頭左, 女子椎髻在腦後, (當)〔常〕 不冠巾, 雨日或着笠, 或着棕葉, 或着氈衫, 或着蓑衣。 一, 朝官祿俸, 每五日一頒。 一, 外城內有倉庫及內廐, 常養大馬六匹。 一, 於江邊築城, 中置酒庫房, 內排列大甕, 酒醪盈溢, 一二三年酒庫分書其額。 又置軍器庫, 鐵甲、槍、劍、弓矢充牣其中。 一, 諸穀皆有。 一, 其畜有牛、馬、雞、犬, 獸有獐、鹿, 禽有燕ㆍ鶯、鴉ㆍ鳩、黃雀, 無虎、豹。 一, 其菜, 有葱、韮、蒜、薑、蘿葍、萵苣、芭蕉、蘘荷、芋、薯藇。 一, 船隻常患蛆食, 於江邊作草舍入置焉。 一, 市在江邊, 南蠻日本國、中原商船來互市。 一, 南蠻在國正南, 順風則可三月乃到, 日本國在國東南, 順風則可五日乃到, 中原在國西, 順風則可二十日乃到云。 一, 但凡盜賊或戮之, 或國王親鞫, 軍士拿去城外殺之。 或於官府有司治而殺之。 一, 水産惟魚物, 在陸者惟梨、栗、桃、棕、松、橡、橘樹而已。 一, 初到(彌抄槐島)〔彌阿槐島〕 , 本島人與隣近屈伊麻島日南浦島時麻子島于甘島五島人民互相往來飮酒, 每相往時, 必請肖得誠等厚慰之。


  • 【태백산사고본】 10책 27권 【국편영인본】 7책 512면
  • 【분류】
    외교-유구(琉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