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理志 / 京畿 / 鐵原都護府 / 朔寧郡
◎ 삭녕군(朔寧郡)
본래 고구려의 소읍두현(所邑豆縣)인데, 신라가 삭읍(朔邑)으로 고쳐서 토산군(兎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삭녕현(朔寧縣)으로 고쳤다. 승령현(僧嶺縣)은 본래 고구려의 승량현(僧梁縣)인데, 신라가 동량(㠉梁)으로 고쳐서 철성군(鐵城郡)107) 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승령현으로 고쳤다. 위의 2현(縣)을 현종(顯宗)무오108) 에 모두 동주(東州)109) 임내(任內)에 붙이었다가, 예종(睿宗) 원년 병술에 비로소 승령 감무(僧嶺監務)를 두어 삭녕(朔寧)을 겸임하게 하였는데, 본조(本朝) 태종(太宗) 3년 계미에, 삭녕이 황비(皇妣) 신의 왕후(神懿王后)110) 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켜 승령(僧嶺)을 이에 붙이고, 14년 갑오에 안협현(安峽縣)을 혁파하여 내속(來屬)시켜서 안삭군(安朔郡)으로 고쳤으며, 16년 병신에 다시 안협 현감(安峽縣監)을 두었다가, 도로 삭녕으로 일컬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철원(鐵原)에 이르기 37리, 서쪽으로 임강(臨江)에 이르기 15리, 남쪽으로 연천(漣川)에 이르기 10리, 북쪽으로 안협(安峽)에 이르기 35리이다.
호수가 2백 33호, 인구가 7백 22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61명, 선군(船軍)이 37명이다.
삭녕(朔寧)의 성(姓)이 2이니, 신(申)·김(金)이요, 망성(亡姓)이 3이니, 송(宋)·조(曺)·오(吳)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박(朴)이다. 승령(僧嶺)의 성(姓)이 1이니, 최(崔)요, 망성(亡姓)이 2이니, 오(吳)·이(李)이며, 차성(次姓)이 심(沈), 내성(來姓)이 송(宋)이다.【 인의(仁義)111) 에서 왔다. 】
땅이 메마르고 산이 높아서, 기후[風氣]가 일찍 추워지며, 간전(墾田)이 3천 8백 54결(結)이다. 【논은 다만 2백 86결이다. 】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팥·수수·메밀·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지초(芝草)·느타리[眞茸]·싸리버섯[鳥足茸]이요, 약재(藥材)는 오미자(五味子)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군(郡) 북쪽 내문리(乃文里)에 있다. 【하품이다. 】
삭녕도(朔寧渡)는 군(郡) 남쪽에 있고, 성탄도(成灘渡)는 군(郡) 서쪽에 있으며, 【모두 나룻배가 있다. 】 옛 화양도(和陽渡)는 군(郡) 서남쪽에 있다. 【물이 얕아서 봄·여름에는 발을 벗고 건넌다. 】
-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5책 621면
- [註 107]철성군(鐵城郡) : 철원.
- [註 108]
무오 : 9년.- [註 109]
◎ 朔寧郡: 本高句麗 所邑豆縣, 新羅改名朔邑, 爲兔山郡領縣, 高麗改爲朔寧縣。 僧嶺縣, 本高句麗 僧梁縣, 新羅改名㠉梁, 爲鐵城郡領縣, 高麗改爲僧嶺縣。 右二縣, 顯宗九年戊午, 皆屬東州任內。 睿宗元年丙戌, 始置(僧領)〔僧嶺〕 監務, 兼任朔寧。 本朝太宗三年癸未, 以朔寧皇妣神懿王后外鄕, 陞爲知郡事, 以(僧領)〔僧嶺〕 屬之。 十四年甲午, 革安峽縣來屬, 改爲安朔郡。 十六年丙申, 復置安峽縣監, 還稱朔寧。 四境, 東距鐵原三十七里, 西距臨江十五里, 南距漣川十里, 北距安峽三十五里。 戶二百三十三, 口七百二十二。 軍丁, 侍衛軍六十一, 船軍三十七。 朔寧姓二, 申、金; 亡姓三, 宋、曺、吳; 續姓一, 朴。 僧嶺姓一, 崔; 亡姓四, 吳、李、次姓沈; 來姓宋。 【仁義來。】 厥土塉, 山高風氣早寒。 墾田三千八百五十四結。 【水田只二百八十六結。】 土宜五穀, 粟、小豆、唐黍、蕎麥、桑、麻。 土貢, 蜂蜜、芝草、眞茸、鳥足茸。 藥材, 五味子。 陶器所一, 在郡北乃文里。 【下品】 朔寧渡在郡南, 成灘渡在郡西, 【皆有渡船】 古和陽渡在郡西南。 【水淺, 春夏徒涉。】
-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5책 621면
- [註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