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 변계량이 왕을 공정왕의 손자로 칭할 것을 아뢰었으나 중의가 논박하다
이보다 앞서 대제학 변계량이 의논을 올려 말하기를,
"후사(後嗣)가 된 자는 그의 자식이 된다 함은 옛법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태종이 공정왕(恭靖王)의 후사가 되었은즉, 태종은 곧 공정왕의 아들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공정왕에게 마땅히 손자라고 칭호하시고 익조(翼祖)를 영녕전으로 조천(祧遷)하시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신이 전에 면전에서 아뢰어 유음(兪音)을 받들었사온데, 일은 시행되지 아니하오니 신은 의심하나이다. 삼가 《춘추(春秋)》를 상고하여 보니, ‘문공(文公) 2년에 태묘에 희공(僖公)을 올려 모셨다. ’라고 썼는데, 춘추를 설하는 전(傳)에서 말하기를, ‘희(僖)를 민(閔)의 위[上]에 올려 모신 것을 비방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무릇 민공(閔公)은 나이가 열 살도 되지 아니하여 임금이 되었고, 또 수년이 되지 못하여 죽었으므로, 백성이 그의 덕을 보지 못하였고, 희공이 들어와 대통을 계승하였으니, 친히 주고받은 것은 아니고 임금의 위에 있은 지 30여 년이니, 대개 노(魯)나라의 어진 임금이며, 또 희공은 형이요, 민공은 아우인지라, 장문중(臧文仲)이 주장하여 희를 민의 위에 올렸으니 인정에 그럴 듯하나, 공자는 말하기를, ‘제사를 거꾸로 하였다.’ 하고, 또 특별히 《춘추》에 쓰기를, ‘희공을 올렸다. ’고 비방하였으니, 아아, 성인이 아니면 능히 밝히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은 유입니다. 무릇 삼전(三傳)042) 과 〈송나라의〉 호씨(胡氏)043) 가 모두 희공이 민공을 아버지로 대우하여야 의리에 맞는다 하였으니, 대개 성인의 특별한 《춘추》의 필법에 따른 것입니다. 주(周)나라의 종묘 제도를 살펴보면, 효왕(孝王)은 곧 공왕(共王)의 아우이나, 효왕이 부묘하면서 공왕은 무세실(武世室)로 옮겼으니, 형제가 서로 계승한 자는 부자가 되어서 소목(昭穆)을 달리 하는 것은 주나라 제도가 그러한 것입니다. 송나라의 제도는 태조·태종 아무아무가 모두 형이 목(穆)이 되고, 아우가 소(昭)가 되었는데,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남의 후사가 된 자는 그 후사된 분을 부모라 하고, 그 소행한 분을 백부(伯父)라 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인간의 대륜(大倫)이요, 천지의 대의(大義)이므로 변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위(魏)·진(晉) 이래로 형제가 한 실(室)을 같이 하고 소목을 같이 한 자가 있었으나, 주나라의 제도가 아니요, 성인의 교훈이 아니었으므로, 한유(韓愈)가 이르기를, ‘위(魏)·진(晉) 이래의 일은 정당하다고 의거할 것이 못되므로 시행할 것이 못된다.’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역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실행하고자 함입니다. 상고(上古)를 살펴보면 주(周)나라의 제도가 그러하고, 근대를 살펴보면 송나라의 제도도 그와 같고, 성경(聖經)에 질정(質正)하면 공자의 특필(特筆)이요, 현전(賢傳)에 참고하면 정씨(程氏)의 격언(格言)입니다. 익조(翼祖)를 마땅히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길 것과 전하가 마땅히 공정왕(恭靖王)에게 손자라고 칭호할 것은 이른바 삼왕(三王)044) 에 상고하여 틀림이 없고, 천지에 내세워 어그러짐이 없고, 귀신(鬼神)에 질정(質正)하여 의심이 없고, 백대(百代)를 두고 성인(聖人)을 기다려도 의혹될 것이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하늘 같으신 마음으로 결단하시어 특히 공정왕께 손자라고 칭호하실 것을 명하시고, 인하여 익조를 영녕전으로 옮기시면 주나라·송나라 제도에 합치될 것이요, 성현의 교훈에도 합당할 것입니다.
또 공정왕과 태종과는 전처럼 범연(泛然)히 형제로서 견줄 것이 아닙니다. 경진년에 공정왕이 후사(後嗣)가 없으시므로 태종을 봉하여 세자를 삼으시려 하시니, 그 때에 대신으로서 헌의(獻議)하는 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왕태제(王太弟)로 봉하여야 한다.’ 하니, 공정이 불가하다 하시며 말씀하기를, ‘곧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 하시고, 그대로 책봉하시어 왕세자를 삼으시고 중외에 포고하셨습니다.
신이 일찍이 《송감속편(宋鑑續編)》을 보니, 영종(英宗) 2년 4월에 조서(詔書)를 내려 복안의왕(濮安懿王)을 높여 받드는 전례(典禮)를 의논하라 하니, 사마광(司馬光)이 붓을 들어 쓰기를, ‘남의 후사가 된 자는 그의 아들이 되는 것이요, 하물며 전대(前代)에 들어와 대통을 계승한 자가 많이는 황제가 승하하신 뒤에 끌어들여 세우는 계책이 혹 신하들에게서 나왔으나, 폐하와 같이 친히 선제(先帝)의 생전에 아들이 되었고, 그런 뒤에 세대를 계승하여 종묘를 받들고 천하를 차지한 것과는 같지 아니합니다.’ 하였으니, 정히 우리 나라의 일과 서로 같습니다. 그 때에 광(光)의 의견에 옳다고 한 자는 왕규(王珪)·범진(范鎭)·여회(呂誨)·범순인(范純仁)·조첨(趙瞻)·여대방(呂大防)·부요유(傅堯兪) 등이므로, 한기(韓琦)를 불충하다고 탄핵하고, 또 구양수(歐陽修)가 먼저 간사한 의견을 개시하여 폐하를 잘못하시는 데에 빠지게 하였다고 탄핵한 것이 역사에 기재되어 뒷세상에 분명하게 전하니, 전하가 공정에게 마땅히 손자라고 칭호하실 것은 송나라의 고사(故事)가 있사오며, 또 정안 왕후(定安王后)가 공정보다 먼저 승하하시어, 태종은 아버지가 살았으면 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期年服)을 입는 예제에 의거하여 자최(齋衰) 13일로 복을 벗었고, 공정왕이 승하하심에는 참최(斬衰)로 27일간 복입으셨고, 전하께서는 그 때에 손자가 할아버지 복입는 것으로 13일에 복을 벗으셨은즉, 전하께서 마땅히 손자라고 칭호하심은 오늘에 와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에 태종께서 신 등에게 명하시어 아들이라고 칭호할까, 아우라고 칭호할까를 의논하게 하시므로, 신이 말씀 드리기를, ‘당연히 아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으나, 의견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실록(實錄)》에 상고하면 그런 기록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태종과 우리 전하께서 참최를 입으시고 자최를 입으신 복제는 김돈(金墩)의 사필(史筆)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은연 중 우리 조선을 보우(保佑)하시어 천지의 대의(大義)와 인간의 대륜(大倫)을 바르게 하시려 하여, 혹시는 그 잘못될 뻔한 일을 저해하고, 혹시는 그 바로 한 일을 기록에 오래도록 전하게 함이 아니겠나이까. 오직 전하께서 결단하시어 그것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중의(衆議)가 이를 논박하여 끝내 시행되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25권 7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13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註 042]삼전(三傳) :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를 해설한 좌씨전(左氏傳)·곡량전(穀梁傳)·공양전(公羊傳)을 말함.
- [註 043]
호씨(胡氏) : 호안국(胡安國).- [註 044]
삼왕(三王) : 하나라의 우왕(禹王)·은나라의 탕왕(湯王)·주나라의 문왕(文王).○前此, 大提學卞季良上議曰:
爲之後者, 爲之子, 古也。 恭惟太宗爲恭靖王之後, 則太宗乃恭靖王之子也。 今殿下於恭靖, 當稱孫, 而遷翼祖於永寧也無疑矣。 臣嘗面啓, 獲蒙兪音, 而事未施行, 臣竊疑焉。 謹按《春秋》, 文公二年, 書有事于太廟, 躋僖公, 傳之者曰: "躋僖於閔之上也。" 夫閔公年未十歲卽位, 又不數年而薨, 民不見德。 僖公入繼大統, 非親授受, 在位三十餘年, 蓋魯之賢君也。 且僖公兄也, 閔公弟也。 臧文仲之升僖於閔, 於人情似矣, 孔子乃謂縱逆祀, 又特書簡冊曰: "躋僖公。" 嗚呼! 非聖人, 莫能修之, 其爲此類也。 夫三傳及胡氏皆以僖公父視閔公爲義, 蓋從聖人之特筆也。 考之成周廟制, 則孝王乃共王之弟也。 孝王祔而某遷于武世室, 則兄弟之相繼者爲父子, 而異昭穆者, 周制然也。 大宋之制, 太祖、太宗某某皆兄爲穆, 而弟爲昭矣。 程子謂: "爲人後者, 謂所後者爲父母, 謂其所生者爲伯父。" 此生人之大倫, 天地之大義, 不可得而變易者也。 但魏、晋以來, 兄弟同一室而同昭穆者有之, 然非周制也, 非聖訓也。 韓愈: "謂魏、晋以來事, 非經據, 不可施行。" 者, 此亦可見。
臣竊謂, 幼而學之, 壯而欲行之也。 稽之上古則成周之制如彼, 證諸近代則大宋之制如此, 質諸聖經, 則孔子之特筆也, 參之賢傳, 則程氏之格言也。 翼祖之當遷永寧, 殿下之當稱孫於恭靖, 所謂考三王而不謬; 建天地而不悖, 質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者也。 伏惟殿下斷自宸衷, 特命稱孫於恭靖, 仍遷翼祖於永寧, 則合於周、宋之制, 孚於聖賢之訓矣。 且恭靖與太宗, 又非若前世泛然爲兄弟者之比也。 歲庚辰, 恭靖以無嗣, 欲封太宗爲世子, 其時大臣獻議者以爲, 宜封王太弟, 恭靖不可曰: "直以此弟爲子。" 遂冊封爲世子, 布告中外。
臣嘗觀《宋鑑續編》, 英宗二年四月, 詔議崇奉濮安懿王典禮, 司馬光奮筆曰: "爲人後者爲之子, 況前代入繼者多, 宮車晏駕之後, 援立之策, 或出臣下, 非如陛下親爲先帝之子, 然後繼體承祧, 光有天下。" 政與我朝之事相類。 其時右光之議者, 王珪、范鎭、呂誨、范純仁、趙瞻、呂大防、傅堯兪等也。 遂劾韓琦爲不忠, 又劾(歐陽脩)〔歐陽修〕 以首開邪議, 陷陛下於過擧, 載在簡策, 昭晣後世, 則殿下之當稱孫, 自有大宋故事。
且定安王后先恭靖薨, 太宗以父在爲母期服齊衰, 十三日而釋服。 恭靖薨, 太宗服斬衰二十七日而釋服, 殿下則以孫爲祖服, 服衰十三日而釋之, 則殿下之當稱孫, 非自今日而始也。 其時太宗命臣等議稱子稱弟, 臣以爲當稱子, 議竟不行, 然考之史策, 未見其有紀焉。 唯太宗及我殿下斬衰、齊衰之制, 則見於金墩之史筆, 章章明甚, 豈天陰佑朝鮮, 欲正天地之大義、生人之大倫, 故或泥其事, 或壽其傳歟? 惟殿下斷而行之。
衆議駁之, 竟不行。
- 【태백산사고본】 8책 25권 7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13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註 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