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4권, 세종 1년 6월 29일 壬寅 3/3 기사 /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이로군의 접전에서 박실이 많은 군사를 잃었으나 마침내 적이 물러나 수호를 빌다
국역
이종무 등이 배를 두지포(豆知浦)에 머무르게 하고 날마다 편장(褊將)을 보내어 육지에 내려 수색하여 잡고, 다시 그 가옥 68호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도적 9급(級)을 베고, 중국인 남녀 15명과 본국인 8명을 얻었다. 적이 밤낮으로 우리 군사 막기를 생각하므로, 26일에 종무가 전진하여,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3군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육지에 내려, 한 번 싸우고자 좌우 군사들을 독려하여 먼저 하륙케 하니, 좌군 절제사 박실(朴實)이 적과 서로 만났다. 적이 험한 곳에 모여 복병하고 기다렸다가, 실이 군사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 싸우려 할 그 순간에, 졸지에 복병이 일어나 앞으로 돌격해 와서, 우리 군사가 패전하여, 편장 박홍신(朴弘信)·박무양(朴茂陽)·김해(金該)·김희(金熹)들이 전사하였으므로, 실이 군사를 거두어 다시 배에 오르니, 적이 추격하여 왔다. 우리 군사 중에 전사하거나 언덕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백 수십 인이나 되었다. 우군 절제사 이순몽(李順蒙)과 병마사 김효성(金孝誠)들이 또한 적을 만나 힘껏 싸워 막으니, 적이 그제야 물러갔고, 중군은 마침내 하륙하지 아니하였다. 도도웅와는 우리 군사가 오래 머물까 두려워서 글을 받들고 군사를 물려 수호(修好)하기를 빌면서 말하기를,
"7월 사이에는 항상 풍파의 변이 있으니, 오래 머무름이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4권, 세종 1년 6월 29일 壬寅 3/3 기사 /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이로군의 접전에서 박실이 많은 군사를 잃었으나 마침내 적이 물러나 수호를 빌다
국역
이종무 등이 배를 두지포(豆知浦)에 머무르게 하고 날마다 편장(褊將)을 보내어 육지에 내려 수색하여 잡고, 다시 그 가옥 68호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도적 9급(級)을 베고, 중국인 남녀 15명과 본국인 8명을 얻었다. 적이 밤낮으로 우리 군사 막기를 생각하므로, 26일에 종무가 전진하여,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3군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육지에 내려, 한 번 싸우고자 좌우 군사들을 독려하여 먼저 하륙케 하니, 좌군 절제사 박실(朴實)이 적과 서로 만났다. 적이 험한 곳에 모여 복병하고 기다렸다가, 실이 군사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 싸우려 할 그 순간에, 졸지에 복병이 일어나 앞으로 돌격해 와서, 우리 군사가 패전하여, 편장 박홍신(朴弘信)·박무양(朴茂陽)·김해(金該)·김희(金熹)들이 전사하였으므로, 실이 군사를 거두어 다시 배에 오르니, 적이 추격하여 왔다. 우리 군사 중에 전사하거나 언덕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백 수십 인이나 되었다. 우군 절제사 이순몽(李順蒙)과 병마사 김효성(金孝誠)들이 또한 적을 만나 힘껏 싸워 막으니, 적이 그제야 물러갔고, 중군은 마침내 하륙하지 아니하였다. 도도웅와는 우리 군사가 오래 머물까 두려워서 글을 받들고 군사를 물려 수호(修好)하기를 빌면서 말하기를,
"7월 사이에는 항상 풍파의 변이 있으니, 오래 머무름이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