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 및 왕의 호칭 문제에 대한 표문을 정안군과 지중추원사 조반이 명나라에 가지고 가다
태조께서 정안군과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에게 분부하여 표문을 올리게 하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재(南在)로 하여금 전문(箋文)을 올리게 하였는데, 그 표문에 이러하였다.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 등이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에서 준청(准請)한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사온데, 삼가 성지를 받자오니 이르기를, ‘붙잡아 온 적인(賊人) 호덕(胡德) 등의 공초에 나오는 사람들의 성명을 등본해 가지고 가서 조선 국왕 아무개로 하여금 장남이나, 또는 차남을 보내서 친히 잡아 오게 하라.’ 하였으니, 천명보다 엄한 이 명령을 받고 신하의 직분으로 자식을 보내지 아니할 수 없어, 이제 신의 간곡한 마음을 기록하여 성총(聖聰)을 번거롭게 하나이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신이 성상의 지극한 은혜를 입사와 오늘의 지위에 이르렀고, 삼가 번신(蕃臣)의 직책을 닦아 해마다 사신의 왕래를 이루었습니다. 즉 홍무(洪武) 26년에 배신(陪臣)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어 표전(表箋)을 가지고 가서 말값[馬價]을 하사한 데 대하여 사례하게 하고, 배신 윤사덕(尹思德)은 표문을 가지고 성절(聖節)을 진하(進賀)하게 하였더니, 모두 다 요동 도사(遼東都司)로부터 황제의 분부라 하고 가지 못하게 하므로 돌아왔습니니다. 이번에도 삼가 배신 이지(李至)를 보내서 도로의 내왕을 주청케 하였으며, 또 배신 박영충(朴永忠)을 보내서 천추절(千秋節)을 진하하게 하고, 배신 경의(慶儀)로는 27년 정조(正朝)를 진하하게 하였더니, 모두 요동까지 가서 도사(都司)로부터 전날과 같은 저지를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삼가 이로써 일국 신민들이 전전긍긍 황공하던 차에, 금년 12월 초8일에 칙사로 보낸 내사(內史) 김인보(金仁甫) 등이 도착하여 좌군 도독부의 자문을 받아 보니, 성상의 분부하신 일관(一款) 가운데, ‘조선은 이미 자주권을 허락하였으니 곧 정당한 조선 국왕(朝鮮國王)이란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국호는 조선으로 고치고 표문에는 아직도 권지 국사(權知國事)라 하였으니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였으니, 이것을 받자와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국호는 명확히 내리신 바 있으므로 고쳤거니와 조선왕의 작호(爵號)는 아직 내리신 처분이 없으므로 감히 왕이라고 일컫지 못한 것입니다. 이번에 〈조선 국왕의〉 칭호를 바루라는 성지를 받잡고, 또 좌군 도독부 자문 속에, ‘이상을 조선 국왕에게 자문하니 이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으므로, 표전을 수찬(修撰)하여 배신 안종원(安宗源) 등을 경사(京師)056) 에 보내서 은총을 사례하게 했더니, 요동에 이르러 또한 전과 같이 길을 막으므로 가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신은 온 나라 백성들과 함께 더욱 간장이 떨어지는 듯하여 황천을 우러러 호소도 하고 성상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바랐으나, 여태껏 길이 막혀서 성청(聖聽)에 사무치지 못할까 염려하였더니, 어찌 뜻하였으리오, 홀연히 성은을 입사와 미천한 자식이 들어가 뵙게 될 줄이야! 마치 곤궁한 자식이 어미의 품안에 안긴 것 같고 길가던 사람이 집에 당도한 것과 같아서, 감격과 기쁨이 겹쳐 말을 하려니 눈물이 흐릅니다. 말씀하신 바 유두아(劉肚兒) 등은 저의 나라 백성들 가운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러한 성명을 가진 사람은 없고, 오직 임갈용의(任葛龍義)를 임거륜(林擧輪)이라 하고 여균피력(藜均皮力)을 이군필(李君必)이라 한 것은, 혹은 직역(職役)이 비슷하고, 혹은 음(音)이 비슷하므로 추리하여 잡아 보내는 것이니, 어찌 유두아 등만 아껴서 강제로 유치(留置)시키겠습니까? 신은 또 호덕 등이 공초한 소식을 정탐하기 위하여 왔다는 것은 더욱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월(日月)이 중천에 밝아 있고 이목(耳目)이 있는 자로서 보고 듣지 않을 사람이 없으며, 성상이 지존에 계시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어버이로 높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의 작은 나라가 성대(聖代)를 섬기어 오래 전부터 인민과 군병의 수가 많은 것을 알고, 예악과 형정(刑政)이 잘 되어가는 것도 깊이 알고 있는 터에, 어찌 제 자식을 보내고 나서야 중국의 일을 알았겠습니까. 하물며 본시 두 마음을 품은 적도 없었으니 또한 어찌 엿보는 모의가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사정은 이미 표문에 갖추어서 주달하였사오니, 바라옵건대, 황제께서는 어린 것을 사랑하는 인자한 마음으로 미루고 하늘과 땅을 감싸는 도량을 넓히시와, 신의 원통함을 하소할 곳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으로 하여금 충성을 다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해 주시면, 영원히 변방의 한 나라가 되어 언제나 〈폐하의〉 만수 강령(萬壽康寧)하기를 빌겠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책 64면
- 【분류】외교-명(明)
- [註 056]경사(京師) : 금릉(金陵).
○乙亥/上遂命我殿下及知中樞院事趙胖進表, 參贊門下府事南在進箋。 表曰:
欽差內史黃永奇等至,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節該: "將解到賊人胡德等供, 出來的人姓名開寫去, 敎某知道, 長男或次男親自解來。" 欽此。 誡命有嚴於自天, 述職莫親於遣子。 玆將卑懇, 庸瀆聰聞。 切念臣蒙上至恩, 致身今日。 謹修蕃宣之職貢, 每通行李之往來。 於洪武二十六年, 節次遣陪臣金立堅, 齎擎表箋, 謝賜馬價; 陪臣尹思德齎擎表文, 進賀聖節, 俱蒙遼東都司稱有聖旨, 阻當回還。 欽此, 卽遣陪臣李至, 請通道路, 又遣陪臣朴永忠進賀千秋, 陪臣慶儀進賀二十七年正朝, 俱到遼東, 仍蒙都司如前阻當回還。 欽此, 一國臣民兢惶無奈間, 當年十二月初八日, 欽差內史金仁甫等來至,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 內一款, "朝鮮已許自爲, 卽合正名。 今更號朝鮮, 表文仍稱權知國事, 未審何謀?" 欽此。 臣愚以爲國號, 則旣已欽依明降, 更號朝鮮, 王爵則未蒙頒降, 國王名爵, 不敢稱王。 今來欽奉聖旨, "卽合正名。" 欽此。 又承準左軍都督府咨內, "右咨朝鮮國王。" 準此, 欽遵施行, 修撰表箋, 遣陪臣安宗源等赴京謝恩, 到遼東, 如前蒙都司阻當回還。 臣與國人, 尤增隕越, 仰皇天而永號, 冀聖心之克灼, 尙慮路阻, 未達旒聰。 何圖睿恩之忽霑, 許令賤息以入覲! 如窮子之投母, 若行者之赴家, 感與喜幷, 涕從言出。 所據劉肚兒等, 究求本邦之人氏, 竝無此等之姓名。 唯任葛龍義之爲林擧輪與藜均皮力之爲李君必, 或因職役之相似, 或因聲韻之偶同, 推類以求, 發解已去, 豈於劉肚兒等, 獨自占吝, 故令勒留! 臣又以爲胡德等所供打聽消息, 尤爲誣妄。 日月中天, 凡有耳目者, 莫不知見; 聖神御極, 凡有血氣者, 莫不尊親。 顧我小邦, 臣事聖代, 久諳人民甲兵之富, 深服禮樂刑政之修。 何至待小兒之行, 然後知中國之事! 況本無疑貳之心, 又安有覘窺之謀? 如此事情, 已曾具本奏達去訖。 伏望皇帝陛下, 推字小之仁, 擴包荒之量, 憐臣抱屈而無訴, 許臣効忠而自新。 臣謹當永爲蕃翰於一邦, 恒祝康寧於萬世。
-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책 6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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