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사신이 태조와 이색의 안부를 묻다. 왜구의 침략을 태조가 격퇴하다
9월, 명(明)나라 사신 장부(張溥)·주탁(周倬) 등이 국경에 이르러서 태조와 이색(李穡)의 안부를 물었다. 이때 태조와 최영은 위명(威名)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장부 등에게 이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모두 밖에 나가 있었는데, 최영은 교외(郊外)에 나가 둔치고 있었다. 이때 왜적의 배 1백 50척이 함주(咸州)·홍원(洪原)·북청(北靑)·합란북(哈闌北) 등처에 침구(侵寇)하여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아 거의 다 없어졌다. 원수(元帥) 찬성사(贊成事) 심덕부(沈德符)·지밀직(知密直) 홍징(洪徵)·밀직 부사(密直副使) 안주(安柱)·청주 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대호군(大護軍) 정승가(鄭承可) 등이 왜적과 홍원(洪原)의 대문령(大門嶺) 북쪽에서 싸웠는데, 여러 장수들은 모두 패하여 먼저 도망했으나, 다만 덕부(德符)만이 적진을 꿰뚫어 혼자 들어가서 창에 맞아 떨어졌다. 적군이 다시 찌르려고 하니, 휘하의 유가랑합(劉訶郞哈)이 달려 들어가서 적군을 쏘아 연달아 세 사람을 죽이고, 적군의 말을 빼앗아 덕부에게 주고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적진에서 빠져 나왔다. 이에 덕부의 군대도 또한 크게 패하였으므로 적의 세력은 더욱 성하였다. 태조가 가서 치기를 자청하여 함주(咸州) 관아에 이르렀다. 제장들의 영중(營中)에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70보(步) 거리에 있었다. 태조가 군사를 불러 이르기를,
"내가 소나무의 몇째 가지에 몇 개째 솔방울[松子]를 쏠 것이니, 너희들은 이를 보라."
하고는, 즉시 유엽전(柳葉箭)으로 이를 쏘아, 일곱 번 쏘아 일곱 번 다 맞혀 모두 말한 바와 같으니, 군중(軍中)이 모두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며 환호(歡呼)하였다. 이튿날 바로 적이 주둔한 토아동(兎兒洞)에 이르러서, 동(洞)의 좌우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 적의 무리가 먼저 동내(洞內)의 동산(東山)과 서산(西山)을 점거했는데, 멀리서 소라 소리[螺聲]를 듣고는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이성계의 차거(硨磲)045) 로 만든 소라 소리다."
하였다. 태조가 상호군(上護軍) 이두란·산원(散員) 고여(高呂),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조영규(趙英珪)·안종검(安宗儉)·한나해(韓那海)·김천(金天)·최경(崔景)·이현경(李玄景)·하석주(河石柱)·이유(李柔)·전세(全世)·한사우(韓思友)·이도경(李都景) 등 백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고삐를 당기면서 천천히 행군하여 그 사이를 지나가니, 적군은 우리 군사가 적고 행진이 느린 것을 보고는 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어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동쪽에 있던 적군이 서쪽에 있는 적군에게 나아가서 한 진을 만들었다. 태조가 동쪽의 적군이 둔친 곳에 올라가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군사들로 하여금 말안장을 벗겨서 말을 쉬게 하였다. 한참 있다가 말을 타려고 할 적에 백 보(步)가량 되는 곳에 마른 풀명자나무[枯槎]가 있는지라, 태조가 연달아 화살 세 개를 쏘아 모두 바로 맞히니, 적군이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고 탄복하였다. 태조가 왜말[倭語] 아는 사람을 시켜 큰소리로 이르기를,
"지금의 주장(主將)은 곧 이성계(李成桂) 만호(萬戶)이니 너희들은 속히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이다."
하니, 적의 추장(酋長)이 대답하기를,
"다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고는, 그 부하와 더불어 항복하기를 의논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마땅히 그들의 게으른 틈을 타서 공격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말에 올라 두란(豆蘭)·고여(高呂)·영규(英珪) 등을 시켜 그들을 유인해 오게 하니, 선봉(先鋒) 수백 명이 쫓아오는지라, 태조는 거짓으로 쫓기는 체하면서 스스로 맨 뒤에 서서 물러가 복병(伏兵) 속으로 들어갔다가, 드디어 군사를 돌이켜서 친히 적군 20여 명을 쏘니 시윗소리에 따라 모두 죽었다. 두란·종검(宗儉) 등과 함께 달려서 이를 공격하고, 복병(伏兵)이 또한 일어났다. 이에 태조는 몸소 사졸들의 선두에 서서 단기(單騎)로 적군의 후면을 충돌하니,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리었다.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것이 서너너덧 번 되는데, 손수 죽인 적군이 계산할 수 없으며, 쏜 화살이 중갑(重甲)을 꿰뚫어 혹은 화살 한 개에 사람과 말이 함께 꿰뚫린 것도 있었다. 적의 무리가 무너지므로 관군(官軍)이 이 기세를 이용하여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내를 막아, 한 사람도 빠져 도망한 자가 없었다. 이 싸움에 여진군(女眞軍)이 이긴 기세를 이용하여 함부로 죽이니, 태조가 영을 내리기를,
"적군이 궁지에 몰려 불쌍하니 죽이지 말고 생포하도록 하라."
하였다. 남은 적군은 천불산(千佛山)으로 들어가므로 또한 다 사로잡았다. 우왕이 태조에게 백금(白金) 50냥, 옷의 겉감과 안찝 5벌, 안장 갖춘 말[鞍馬]을 내리고, 또 정원 십자 공신(定遠十字功臣)의 칭호를 더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0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외교(外交) / 인사(人事)
- [註 045]차거(硨磲) : 조개의 일종. 껍질을 간 것은 칠보(七寶)의 하나로 장식에 쓰임.
○九月, 大明使張溥、周倬等, 至境上, 問太祖及李穡安否。 時太祖及崔瑩威名聞天下, 不欲使溥等見之, 皆出于外, 瑩出屯于郊。 是時, 倭賊百五十艘寇咸州、洪原、北靑、哈闌北等處, 殺虜人民殆盡。 元帥贊成事沈德符、知密直洪徵、密直副使安柱、靑州上萬戶黃希碩、大護軍鄭承可等, 與戰于洪原之大門嶺北。 諸將皆敗先遁, 唯德符突陣獨入, 中槊而墮, 賊欲復刺, 麾下劉訶郞哈, 馳入射之, 遂連斃三人, 奪賊馬以授德符, 轉戰出陣。 於是德符軍亦大敗, 賊勢益熾, 太祖請往擊之, 至咸州府署。 諸將營中有松在七十步許, 太祖召軍士謂曰: "我射第幾枝第幾箇松子, 汝等觀之。" 卽以柳葉箭射之, 七發七中, 皆如所命, 軍中皆蹈舞歡呼。 明日直至賊所屯兎兒洞, 伏兵於洞之左右。 賊衆先據洞內東西山, 遙聞螺聲, 大驚曰: "此李 【太祖舊諱。】 硨磲螺也。" 太祖率上護軍李豆蘭、散員高呂、判衛尉寺事趙英珪ㆍ安宗儉ㆍ韓那海ㆍ金天ㆍ崔景ㆍ李玄景ㆍ河石柱ㆍ李柔ㆍ全世ㆍ韓思友ㆍ李都景等百餘騎, 按轡徐行, 過其間, 賊見兵少行緩, 不測所爲, 不敢擊, 東賊就西賊爲一屯。 太祖登東賊所屯處, 據胡床, 令軍士解鞍息馬。 久之, 將上馬, 百許步有枯槎, 太祖連射三矢, 皆正中之, 賊相顧驚服。 太祖令解倭語者呼謂曰: "今主將, 卽李 【太祖舊諱。】 萬戶也。 汝其速降。 否則悔無及矣。" 賊酋對曰: "唯命是從。" 方與其下議降未定, 太祖曰: "當因其怠而擊之。" 遂上馬, 使豆蘭、呂、英珪等引致之, 先鋒數百追來。 太祖陽被逐, 自爲殿, 退入伏中, 遂回兵親射賊二十餘人, 莫不應弦而斃。 與豆蘭、宗儉等馳擊之, 伏兵且起。 於是太祖身先士卒, 單騎衝突賊後, 所向披靡, 出而復入者數四, 手斃之賊無算。 所射洞徹重甲, 或有一矢而人馬俱徹者。 賊徒分崩, 官軍乘之, 呼聲動天地, 僵尸蔽野塞川, 無一人得脫者。 是戰也, 女眞軍乘勝縱殺, 太祖令曰: "賊窮可哀, 勿殺生擒之。" 餘賊入千佛山, 亦盡擒之。 禑賜太祖白金五十兩、五表裏、鞍馬, 又加賜定遠十字功臣號。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0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외교(外交)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