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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실록부록17권, 순종 19년 6월 11일 양력 6번째기사 1926년 일본 대정(大正) 15년

순종 황제의 행장

행장(行狀)에,

"아, 슬프도다. 우리 대행 황제(大行皇帝)께서 병인년(1926) 3월 14일 묘시(卯時)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다음달 상순(上旬)에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원로 재신(宰臣)과 종척(宗戚)을 불러들여 의논하여 묘호(廟號)를 ‘순종(純宗)’, 제호(帝號)는 ‘효황제(孝皇帝)’, 시호(諡號)는 ‘문온 무녕 돈인 성경(文溫武寧敦仁誠敬)’라고 올렸습니다. 신(臣) 윤덕영(尹德榮)이 탁룡(濯龍)의 자취에 의탁하고 특별히 지우(知遇)를 입었기 때문에 대행 황제의 덕을 묘사하는 행장을 찬하라고 명하였으나 저의 재주가 모자라고 또한 애통하여 문장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리상 감히 고사할 수 없어 울음을 삼키고 눈물을 닦으며 말씀을 올립니다.

황제(皇帝)의 성(姓)은 이씨(李氏)고, 휘(諱)는 척(坧)이며, 자(字)는 군방(君邦)이고 호(號)는 정헌(正軒)이니 태황제(太皇帝)가 지은 것이다. 제(帝)는 고종 태황제(高宗太皇帝)의 적사(適嗣)이며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의 손자(孫子)이다. 태황제헌의 대원왕(獻懿大院王)의 아들인데 문조(文祖)를 계승하여 대통(大統)을 하였으니 헌의왕(獻懿王)은 제에게 본래 친할아버지였다. 어머니는 명성 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이니, 영의정(領議政)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이며 순간공(純簡公)으로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이시다. 갑술년(1874) 2월 8일 신사(辛巳)일 묘시(卯時)에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에서 탄생하셨는데 실로 태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11년이 되던 해였다. 이보다 먼저 원자(元子)가 태어났으나 일찍 돌아가시니 나이 든 궁인들이 근심되어 영변(寧邊)에 있는 묘향산(妙香山)과 연안(延安)에 있는 남대지(南大池)에서 두루 기원을 드렸다. 기원을 드리는 곳마다 모두 기이한 길조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징험되었다. 제는 천성이 빼어나고, 성스러운 자질을 가졌다. 영특함에, 순수함에 태황제가 아껴주고 또한 중히 여겼다. 일찍부터 가르칠 것을 생각하여 치사(致仕)한 이돈우(李敦宇), 재보(宰輔) 송근수(宋近洙)를 보양관(輔養官)으로 임명하였으며, 명망있는 공경(公卿)을 가려 민영목(閔泳穆), 유현(儒賢)인 임헌회(任憲晦)를 유선(諭善)으로 삼았다. 다음해 을해년(1875)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인재를 골라 궁관(宮官)으로 임명했는데, 한 시대의 인재를 잘 가려서 백관(百官)들 중에서 가장 잘 예우하였다. 제는 어릴 때부터 빼어나다는 칭송이 날로 안팎으로 전파되어 청(淸)의 사신이 와서 알현(謁見)할 때에 그 뛰어난 자태를 뵙고 크게 경탄하기를, ‘매우 풍채도 좋고 매우 준수하다.’라고 하였다. 대개 풍채가 좋으면 준수하기 어렵고 준수하면 풍채가 좋기가 어려운데 풍채가 좋으면서도 준수하니 이는 보통사람보다 훌륭한 용모인 것이다. 한(狠)하다는 것은 심하다는 뜻을 가진 청 나라의 방언이었다. 3, 4세에 이르러 이미 효(孝)가 인도(人道)의 가장 큰 근본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날마다 태황제를 뵈옵고 자전(慈殿)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종묘(宗廟)를 정성으로 받들었는데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말과 행동 섬김과 행위 하나하나를 조금도 마음대로 행하지 않았다. 태황제가 바른 도리를 몸으로 보여주셨으며 돈독하게 아낀다고 해서 가르침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제의 천품(天品)은 본래 도(道)에 가까웠는데 정훈(庭訓)이 이와 같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성인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임오년(1882)에 황제가 9세가 되었을 때, 아름다운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 태황제께서 문선왕묘(文宣王廟)에 거느리고 나아가 성인을 배알하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고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다. 반교(泮橋)의 문(門)에 둘러서서 성대한 의식(儀式)을 보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사람이 수만 명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어 관례(冠禮)를 행하였는데 덕기(德器)가 노성한 것 같았다. 얼마후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가 기이(期頤)의 팔순의 나이에 올라 강녕(康寧)의 복(福)을 누리고 계시므로 태황제는 기뻐하며 뜻을 받들어 해마다 풍정(豐呈)을 올렸다. 한 궁궐에 3대가 같이 있어서 경사가 날로 이르니 백성들이 태평성대에 들었다. 무자년(1888)에 제가 여러 신료들을 거느리고 소청하니 삼전(三殿)의 휘호를 가상하였고, 경인년(1890)에 또한 가상하였으니 무자년(1888)의 의례와 같이 하였다. 이 해에 익황후(翼皇后)가 돌아가셔서 태황제는 천성에서 나온 효를 지극히 하고 거동에 가법(家法)을 따르고 장사와 제사의 의절(儀節)을 반드시 마음에 지극히 하였다. 그러나 애통한 가운데서 혹 미비한 점이 있다면, 제가 문득 대신 수고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때 제는 나이가 아직 약관이 되지 않았지만 절문(節文)에 익숙함이 이와 같았다. 임진년(1892)에 또한 양전에 존호를 올렸다. 양전은 상복을 벗은 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제가 여러 차례 소(疏)를 올려 굳이 힘써 청하여 마침내 윤허를 받았다. 갑오년(1894)때까지 팔도(八道)가 승평(昇平)한 시기가 오래되니 사방의 이웃이 날로 수교를 도모하였다. 이에 이르러 풍운(風雲)이 날로 변하여 화란의 조짐이 틈을 타고 일어나며 열강(列强)이 밖에서 틈을 엿보고 비도(匪徒)가 안에서 선동하였다. 태황제는 그것을 진정시킬 것을 도모하여 확고하게 결단을 내려서 온갖 제도를 경장(更張)하였으며 신진 인사와 재주가 뛰어난 신하를 많이 등용하였다. 이는 아직 성지(聖智)에 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오직 제만이 비밀리에 도와준 일이 많았다. 을미년(1895) 8월 궁위(宮闈)의 계엄(戒嚴)이 소홀하여 명성 태황후(明成太皇后)가 돌아가셨다. 제는 갑자기 참혹한 재화(災禍)를 만났는데 지극한 한(恨)을 풀 길이 없었고 온 천지에 돌아갈 바가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부황(父皇)의 마음을 이해하여 괴롭고 비통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항상 부황의 근심을 위로해 드렸다. 그러나 한가하게 조용히 있을 때에는 매번 말과 웃음으로 즐기지 아니하였다. 오직 공손히 제사에 정성을 다하기를 태황제익황후(翼皇后)의 상을 치를 때처럼 하였다. 정유년(1897)에 태황제의 위덕(威德)이 날로 성하여 만백성(萬百姓)이 추대하고 열국이 감복하니 원보(元輔) 심순택(沈舜澤)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대호(大號), 즉 황제위(皇帝位)에 오르기를 청하여 황제에 오르시고 제는 황태자가 되었다. 천하(天下)에 대사면(大赦免)이 있었으며 중흥(中興)의 업(業)을 넓히고 만세에 큰 기반을 세우시니 유성(維城)의 굳셈과 계조(繼照)의 밝음이 전보다 더욱 융성(隆盛)하였다. 이어 경자년와 임인년(1902)에 계속해서 존호를 올려 공덕을 드러냈다. 임인년에 태황제의 보령이 51세가 되니, 영조(英祖)의 고사(故事)를 따라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사첩(社帖)에 제명(題名)을 붙이고 기신(耆臣)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때에 삼상신(三相臣)은 심순택, 조병세(趙秉世), 윤용선(尹容善)이었는데, 모두 기사(耆社)에 이미 들어갔다. 태황제는 기이한 일로 여겨 궤장(几杖) 및 시(詩)를 내려 축하하였다. 제도 또한 시를 지어 주니 일시의 지극한 영화였다. 갑진년(1904)에 순명후(純明后)가 돌아가시고 병오년(1906)에 상을 마친 후에 비(妃)를 맞이하여 왕후의 지위를 바르게 하였다. 다음해 정미년(1907)에 태황제의 춘추가 높아지고 세자의 명망이 점점 드러나니, 비로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하고 선양의 명을 내렸다. 제는 놀라고 두려워 진실로 사양했으나 한정(漢庭)의 우익(羽翼)이 이루어지고 하민(夏民)이 노래로 찬양하며 귀의하듯이 하니 하늘의 명에 응하고 사람의 여론을 부득이 따라서 조종(祖宗)이 맡겨주신 무거운 책무를 받들었지만 시사(時事)가 지극히 어려움을 만났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일 구분하지 않고, 위로는 대조(大朝)의 품재(稟裁)를 받고 아래로는 내각(內閣)에 위임하고서 팔짱을 끼고 앉아서 다스리니 온갖 일이 모두 이루어졌다. 제는 국조(國朝)의 단서(丹書)와 고적(錮籍)에 깊은 원망이 섞여 있음을 깊이 염려하고 모두 죄를 씻어줄 것을 명하여 당화(黨禍)를 없애게 하였다. 그리하여 먼 지방으로 유배를 간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어 화기(和氣)를 이끌었다. 측은해 하는 조서(詔書)를 널리 반포하여 깨우쳐서 오래 젖어든 습속을 새롭게 하도록 일깨우고 산업을 일으켜 생을 즐겁게 하기를 권유하니, 백성(百姓)이 모두 잠시나마 죽지 않으려는 소원을 갖게 되었으며 밝은 덕화(德化)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제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정종(定宗)에게 왕위(王位)를 전하고 정종(定宗)이 아우인 태종(太宗)을 세자로 책봉(冊封)한 것이 우리의 왕가의 옛 법이라고 여겨서 드디어 아우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백성의 여망(輿望)에 부응하고 국가(國家)의 근본(根本)을 두텁게 하였다. 이 분이 지금의 우리 사왕 전하이시다. 무신년(1908)에 문학 유신(文學儒臣) 김윤식(金允植), 이용원(李容元) 등에게 명하여 헌종(憲宗), 철종(哲宗) 양조(兩朝)의 보감(寶鑑)을 찬수(纂修)하게 하였다. 또한 삼종(三宗)을 아직 추존(追尊)하지 못한 것을 법도에 흠이라고 여겨서 의식을 거행하여 진종(眞宗)을 높여 ‘소황제(昭皇帝)’라고 하고 헌종(憲宗)을 ‘성황제(成皇帝)’, 철종(哲宗)을 ‘장황제(章皇帝)’라고 하였다. 이 해 겨울에 남도(南道)를 순수(巡狩)하여 부산(釜山)에 이르렀고 보름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 또한 서방(西方)에 순력(巡歷)하여 의주(義州)에 이르니 모두 수십일 안에 2,000리의 먼 거리를 돌아다녔다. 강역의 연혁(沿革)과 토속(土俗)의 장단을 변별(辨別)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민생(民生)의 질고(疾苦)와 농사의 고통도 또한 살피지 않음이 없었다. 조사(朝士)들이 알현(謁見)에 참여하면, 오랫동안 소식이 막혀서 만나기를 원했다는 뜻으로 위로했으며, 유림(儒林)이 공경스럽게 맞으면, 학업(學業)을 부지런히 닦기를 권면하였다. 행차가 지나가는 곳에도 안의 유현(儒賢), 명상(名相), 충의(忠義), 공열(功烈)의 가묘(家廟)와 묘소(墓所)를 살펴보고 관리(官吏)를 보내 제를 베풀어주었다. 이때 누추한 집에서 어렵게 살면서 독서하는 선비들과 여항(閭巷)의 필부(匹夫)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기술과 재능이 있는 사람을 흥기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남녀 노소가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절을 하고 도로에 늘어섰으며 벽지에서도 기뻐하며 환호하였으니 이는 옛날 성왕(聖王)의 시대에도 없었던 성대한 거조였다. 경술년(1910)에 이르기까지 시사가 또한 크게 변하여 제는 하늘의 명에 순종하는 것이 천하를 보존하는 뜻이라고 생각하여 윤음을 내렸다. 그리고 오직 만기(萬幾)의 번다한 업무에서 벗어나 오직 종묘를 받들어 생령(生靈)을 편하게 하는 것만을 생각하니, 아래에서 존경하고 추대하는 바가 더욱 깊어졌다. 정사년(1917) 봄에 북도(北道) 팔릉(八陵)에 나아가 알현했는데 수레는 이미 출발하였는데 큰 비가 내리리, 북도의 백성들은 다투어 지붕이 있는 띠와 울타리에 꽂힌 나무를 뽑아다가 진흙길에 깔고 승여(乘輿)를 인도하고 기뻐하면서 서로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오시는데, 어찌 아끼겠는가? 비록 풍찬노숙(風餐路宿)을 겪더라도 유감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인정(人情)을 크게 가히 볼 수 있었다. 함흥(咸興)에 머물러 친히 본궁(本宮)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으며, 사관(祠官)을 나누어 보내어 각군(各郡)의 능침(陵寢)에 제사를 드렸다. 준원전(濬源殿)의 제사를 끝내고 나서 신사(紳士), 부로(父老)의 어가를 맞은 사람들을 모아 노고를 위로하였다. 또한 선파인(璿派人)을 모아 별도로 연회(燕會)를 베풀어 돈독하게 하였다. 사왕(四王) 별자(別子)와 공주의 가묘(家廟)에 제수(祭需)를 후히 내렸다. 북도의 선비들이 서로 말하기를, ‘옛날에 한 번 유람하고 한 번 즐거워함이 제후(諸侯)의 법도가 되었는데, 지금 우리 임금에게서 이를 보고 있다.’라고 하였다. 돌아올 때에 이르러 태조 황제(太祖皇帝)의 이모인 최씨(崔氏) 및 그 지아비인 석씨(石氏)의 묘가 정평군(定平郡)의 외딴 곳에 있었는데, 사자(使者)를 보내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에 있는 승려는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또한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하였다. 이 모두는 좌우(左右)에서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나 제가 이미 소상하게 헤어려 정성을 다해 시행하였다. 겨울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화재의 재앙이 있어서 선정전(宣政殿)의 동쪽 전부가 잿더미가 되자 재빨리 중건(重建)의 역사(役事)를 시행하였다. 무오년(1918) 여름 태황제가 종기의 질환으로 불편하여 여러 달 동안 심히 중하였는데, 날마다 분부하여 말하기를, ‘옛날 순묘조(純廟朝)에 대조전의 화재 이후에 종기의 질환이 계속되다가 필경 승하(昇遐)에 이르게 되었다. 조손(祖孫)의 사이는 소목(昭穆)과도 같은데 이제 화재 및 종기의 질환이 서로 부합되어 맞으니 내 병도 장차 일어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제는 아침 저녁으로 탕제를 달여 드리고 친히 부축을 하며 애태우니 하늘과 사람을 감동시켜서 가을 후에 병을 낫는 경사가 있었으니 모두 성효(聖孝)가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칭송하였다. 이로부터 태황제의 종증(腫症)이 차도가 있었으나 원기가 오래도록 상해서 임금의 기후가 정양(靜養)을 크게 필요로 하였다. 황제가 이 때 창덕궁에 있었는데 걱정으로 날을 보내면서 항상 옆에서 모시지 못함을 한으로 여겼다. 12월에 이르러 태황제가 덕수궁에서 붕어(崩御)하셨다. 전날 저녁에 풍환(風患)이 갑자기 일어나 병의 증세가 급해지자 황제가 이를 듣고 즉시 달려가서 탕제를 올렸으나 잠시 때를 놓쳐서 이미 미치지 못하였다. 황제는 을미년(1895) 이래 세상에 대한 즐거움이 없고 오직 태황제를 믿고 의지하는 것을 운명으로 여겼다. 정미년(1907)에 이르러 각기 다른 궁으로 나뉘어졌으나 수레로 친히 찾아뵈오는 것이 열흘에 한 번은 벗어나지 않았으며, 시종(侍從) 및 여사(女使)가 문안(問安)을 드리는 것이 하루에도 십수 번에 이르렀다. 경술년(1910)이후에 친히 정무를 총괄하는 번거로움이 없으니 태황제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것에 전심하였고 애태우는 일념(一念)으로 경각(頃刻)이라도 해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하늘이 무너지는 재앙을 겪었는데 의약(醫藥)에 힘쓸 겨를도 없었으니, 하늘을 우러르고 땅에 조아리고 통한이 뼈에 사무쳐서 황황하게 원통하게 부르짖었다. 매매(梅梅)하게 근심하는 모습으로 반열에서도 차마 고개를 들어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종척과 원로(元老) 구신(舊臣)들이 한결같이 위로를 받드는 말을 하여, 지나치게 정성을 다하여 효도를 훼상하지 말도록 요청하니, 제는 비로소 강하게 억제하여, 상을 마치는 절차를 의논하여, 하교하기를, ‘이제 왕실(王室)의 전장(典章)은 모두 전일(前日)과 달라졌으나 오직 상장(喪葬)의 제도에는 우리 가법(家法)이 있으니 어길 수 없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어려서 예를 익혔고 명물(名物), 도수(度數)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파헤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여러 하집사(下執事)가 오직 명을 따를 뿐 습렴(襲斂)과 최질(縗絰)의 제도로부터 축고(祝告)와 변두의 차례, 의장(儀仗)의 사용, 상설(象設)의 도구도 필히 모두 때에 앞서서 마련했으며 기일에 맞추어 행하였다. 세록가(世祿家)의 자손으로 조금이라도 예에 견해가 있는 사람에게는 사첩(仕牒)을 주어 공축(工祝)의 일을 맡겨서 제사의 의례에 허물이 없도록 하였다. 이는 또한 세신(世臣)을 기억하는 뜻이었다. 5개월간 여막에 거처하고 사시(四時)에 곡읍(哭泣)을 했고 3년 제전(祭典)에 몸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몸소 제사를 행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조석(朝夕)으로 상식(上食)을 올릴 때 번번이 평소에 즐겨 잡수시던 시물(時物)을 생각하여 이를 바쳤으며, 미세하고 작은 일도 반드시 축문(祝文) 중에 넣어 고하였다. 효덕전의 상사(祥事)가 끝나자 종묘에 올려 부묘하였다. 종향(從享)하는 신하를 의논함에 중의(衆議)가 모두 훈척(勳戚)과 평소의 근신(近臣)으로 일을 맡았던 사람에게 귀결되었는데, 제가 말하기를, ‘고 정승(故政丞) 박규수(朴珪壽)의 충려(忠慮)와 신응조(申應朝)의 학문(學問)에 선제(先帝)께서 일찍이 공경하여 접대하였으며, 이돈우(李敦宇)는 일강(日講)에 노고가 있었으며 민영환(閔泳煥)은 충절(忠節)이 뛰어나서 모두 선제(先帝)가 예우한 사람이다. 이 네 사람을 배향(配享)하라.’라고 하였다. 조야(朝野)에서 만족하여 다른 이견이 없었다. 제는 상이 끝난 후에 항상 근심하여 마치 거상(居喪)중에 있는 것 같았다.

갑자년(1924)에 제(帝)의 나이가 51세가 되자, 좌우(左右)에서 청하기를 영조(英祖)태황제(太皇帝)의 고사(故事)에 따라 기사(耆社)에 들어가라고 청(請)하였다. 황제(皇帝)는 오늘날은 옛 시절과 같지 않다며 사양하고 어명(御名)을 날인하지 않았다. 다만 영수각첩(靈壽閣帖)에 짧은 시(詩)를 써서 기념하고 여러 구신에게 화운을 명하였다. 이어서 연회를 베풀고 즐기게 하였으니 또한 임인년(1902)에 행한 성대한 행사를 따른 것이었다. 제는 용모와 원만하고 명석하였으며 성품이 맑고 부드러웠다. 양궁(兩宮)이 돌보아주고 키워주신 은혜를 생각하여 자신의 몸을 보호하여 일어나고 거하며 자고 먹을 때 위생(衛生)에 방해되는 것이 있으면 일체 경계하고 신중히 하였다. 이 때에 몇 번 아픈 적은 있었지만 자리에 누울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다. 또한 근년에 한가하게 몸을 조섭하고 때로는 원유(苑囿)를 거닐었고 날마다 행각(行閣)을 돌아 걸어서 다녔다. 옛날에 증축하여 세운 건물을 보고, 몸이 따라 크게 편안하니 장수할 것이라고 여겼다. 우연히 지난해에 다리 부분에 부종이 나서 병이 생겼다가 나았다가 하는 것이 무상하고 올 봄에 이르러 창(脹) 이외에도 비증(痞𤺌)이 생겨서 먹어도 소화시키지 못하였다. 종척(宗戚) 중에 약을 의논할 수 있는 사람 십 여인을 친히 정하여 매일 밤에 온실(溫室)에 들어와 보호하게 했으며 널리 한의와 양의를 널리 초빙하여 증상에 따라 시술하게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향당(鄕黨) 사회, 여염(閭閻)의 부녀자(婦女子)도 각자 산천의 신에게 정성스런 기도를 올렸으나 응답이 없었다. 옥궤(玉几)의 유언이 곡진했으나 호천(昊天)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 너무 급하였다. 향년 53세였으니, 중년에 그쳤다. 아, 슬프도다. 사왕 전하(嗣王殿下)가 하교하기를, ‘무오년(1918) 태황제의 상(喪)에는 대행 황제(大行皇帝)가 우리 왕가의 옛날 예(禮)를 썼으니 이제 대행 황제의 상에도 또한 이 예를 따라서 써서 많은 유사(有司)는 감히 소홀함이 없게 하라.’ 하니, 유사로서 일을 맡은 사람들은 분주히 직무를 수행하며 대소 의절(大小儀節)을 하나같이 무오년의 전례(典禮)를 따랐다. 5월 2일에 홍릉(洪陵)의 좌강(左岡) 부묘(負卯)의 언덕에 장례를 치르려고 한다. 이보다 앞서 4월 25일 순명 후릉(純明后陵)을 합부(合祔)할 땅으로 옮겨 그대로 유릉(裕陵)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모두 병이 나기 전에 내린 명령이었다. 배우자인 순명 황후(純明皇后)는 추증(追贈)된 영의정(領議政) 여은 부원군(麗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따님이시다. 자라면서 집안을 본받았으며 세자빈에 뽑혀 양전(兩殿)을 효로 섬겼으며 덕행(德行)이 극히 갖추어졌으나 불행히도 33세에 돌아가셨다. 후에 황후(皇后)로 추존(追尊)되었으며 황제(皇帝)는 후(后)를 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여 행록(行錄) 천여언(千餘言)을 조술하여 《정헌집(正軒集)》 중에 싣게 하였다. 계비(繼妃)인 지금의 황태후(皇太后)는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해풍 부원군(海豐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따님이시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자태(姿態)가 있었고 점차 자라면서 여사(女士)로서 행실이 있었다. 동궁(東宮)의 비(妃)가 되고, 그 다음해에 황후의 지위에 올랐다. 지위가 높다고 해서 분노의 기색을 아랫사람에게 드러내지 않으니, 황제(皇帝)가 이를 심히 중히 여겼다. 대궐에 들어온 지 21년동안 궁정(宮庭)에서 나쁘게 평가하는 말이 없었으며 6궁(宮)이 칭송(稱誦)하였다. 지금 졸지에 큰 슬픔을 당해서 상선(常膳)을 들지 못하고 임금을 뵙지 못한 지, 이미 30일이 지났다. 아, 슬프도다. 황제가 후사(後嗣)가 없어, 왕 전하(王殿下)가 왕(王)으로서 왕통(王統)을 이었다. 제에 효를 다하는 것을 태황제께 효를 다하는 것처럼 했으며 황태후를 모시기를 또한 어머니를 섬기는 것처럼 하였다. 황제의 상(喪)을 다스리는 데에 세밀함과 간소함을 모두 지극하게 하고 대소 제사의 예를 모두 몸소 행하였다. 공손하고 묵묵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안색(顔色)과 곡읍(哭泣)을 본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것이 옛날에 끊임없이 그치지 않는 효였다. 아, 제가 총명하고 예지로워서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역대 제왕가(帝王家)에 어진 법과 아름다운 규칙을 깨닫지 않음이 없었다. 마치 우리 전례(典禮)에 정통하고 잘 기억하여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명신의 고사(故事) 백가의 보계(譜系),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의 관력 정주(政注)의 격식을 환히 아는 것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 같았다. 더욱 성현을 높이고 정도(正道)를 지키고 이단을 배척하였다. 태황제가 예전에 천하(天下)에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짐(朕)과 동궁(東宮)은 유교(儒敎)를 종주(宗主)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대개 황제의 학문(學問)은 부모님의 교훈에서 터득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옛날의 유현으로 불려지는 사람에 대해서도 반드시 별호(別號)를 부르고, 그 성명(姓名)을 직접적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성현의 후손으로 먼 지방에 있는 한미한 후손이라 조금이라도, 재주가 있다고 소문이 들리는 사람을 곧바로 수용하여 쓸 것을 오래도록 생각하여 더욱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이것이 제의 호학(好學)이었다. 화순(和順)을 마음에 품고, 화려함을 밖에 드러내어 평소에 빠른 말과 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사람을 대할 때도 교만하거나 나태한 모습을 취하지 않는 것에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됨됨이를 한 번 보면 구분해 내고 입으로 비평하지 않으며, 사람의 과실을 보고도 크게 형법(刑法)과 관련되지 않으면 반드시 덮어주고 감추어주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 사이에 알력이 생기면 반드시 두 사람을 화해시켜주고 화평(和平)하게 하였다. 근시관(近侍官) 중에 향곡(鄕曲)에서 온 자는 반드시 그 고을의 일을 묻고, 신료를 대하면 반드시 그의 장점과 맡고 있는 일에 따라 물었다. 그러므로 제와 대답하는 사람을 서로 대화가 어긋나고 막힐 염려가 없이 진심을 각자 다 말하였다. 간혹 상주(上奏)한 내용이 임금의 뜻과 맞지 않더라도 즉시 다른 말을 끌어다가 중지시키고 그 말에서 그 단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랫사람은 관대하게 부리되 몸가짐을 엄하게 하였으므로 성내지 않아도 위엄이 갖추어졌고 정사가 가혹하게 다스리지 않았지만 움직임에 반드시 신의로 했으므로, 명령(命令)을 내리지 않아도 거행되었다. 이것이 제의 몸가짐이었다. 평상시에도 누워 하늘을 보지 않았다. 기거하는 정당(正堂)에 태황제의 어진(御眞)을 걸어 놓았는데 두터운 휘장으로 가려놓기는 했지만 그 아래에서 비스듬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이 황제가 조심하는 것이었다. 관리로서 근무하는 사람이 조그만 잘못이 있다고 해서 쫓아내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쫓아내더라도 그 죄명을 가볍게 하여 행실을 고치도록 했으며, 혹은 후하게 돈을 주어 생활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세신(世臣)의 부음(訃音)을 들으면 안색에 슬픈 기색을 띠었으며, 대가 후예(大家後裔)로 재산을 탕진하여 남은 재산도 없는 자들에게 월름(月廩)을 주어 구제하였다. 한 겨울과 한 여름 홍수와 가뭄에는 백성들이 혹 굶주려 죽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자신이 아픈 것처럼 하였다. 근년에 한강 연안에 수해가 심히 참혹하니 한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우며 계속해서 전보로 탐지하고 조금 안정되었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비로소 수라를 들었다. 정사에서 있어서 사궁(四窮)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우선시하고 은혜가 미세한 생물에게도 미치니 어려서부터 곤충과 벌레 등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이 제의 인자한 마음이었다. 종묘(宗廟)에 제사를 지낼 때 매번 친히 제사를 올렸으며, 혹 일이 생겨서 섭행(攝行)하게 될 때는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처럼 탄식하였다. 사관(祠官)이 들어와 일을 고(告)할 때, 옥후(玉候)가 좋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보고를 받았다. 서권(書卷)에 열성(列聖)의 묘호(廟號)가 있으면 반드시 손을 씻고 단정하게 앉아서 펼쳐보았다. 북행(北幸)할 때 문천(文川) 지방에 있는 숙릉(淑陵)의 산록이 멀리 보이니 급히 의자에서 기립하였다가 거쳐간 후에 다시 앉았다. 태묘(太廟) 및 진전(眞殿)에 전알할 때마다 각 실위(室位)를 지날 때마다 국궁(鞠躬)하고 구주(口奏)하였는데, 가까이 모시는 사람도 자세히 듣지 못하였다. 능에 오르실 때에 혼유석(魂遊石) 앞에 나아가서도 또한 그처럼 하였으니 생각건대, 출입(出入)하는데 항상 고(告)하는 의리였을 것이다. 이는 제가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에 양궁이 병이 있으니, 안색에 근심스런 모습을 띠고 의대도 풀지 않고 양궁께서 잠자리와 음식이 회복된 연후에야 황제도 또한 처음과 같이 하였다. 심상한 음식물도 반드시 먼저 올리고 어른이 드신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 창덕궁(昌德宮) 북원(北苑)에 곡식을 심어 익으니 근시(近侍)를 거느리고 원(苑)에 가 곡식을 베어 거두었다. 곡식이 매우 굵고 윤택하여 근시들이 내려주기를 바랬다. 며칠이 지나서 모두 덕수궁에다 바쳤다는 말을 듣고서 서로 감탄하였다. 임금이 상중에 있었을 때, 인정전(仁政殿) 뜰에 모란꽃이 무성히 피었으므로, 명령을 내려 휘장을 넓게 펴서 꽃이 보이는 것을 가리게 하였다. 시절마다 홍릉에 가서 성묘하고 이미 사능례(辭陵禮)를 행하고 또다시 능에 올랐다. 하루는 비가 갑자기 퍼부었는데 따라 나온 여러 신하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피하지 않고 비를 무릅쓰고 갔다. 의대가 모두 젖어도 개의하지 않았다. 홍릉을 감수(監守)하는 사람이 능 앞에 전에 심어진 버드나무의 윗가지를 쳤는데, 황제가 이를 듣고 저녁 음식을 물리치고 들지 않았다. 대개 감수하는 사람은 그 나무를 잘 자라게 하려고 윗가지가 뻗어난 것을 자른 것이며 고의로 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 역시 이 사실을 알고는 벌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능의 나무에 도끼질을 한 것이 마음에 편하지 않았으므로 음식을 물리친 것이었다. 나이든 궁인으로 근무하는 사람이 우연히 선조(先朝) 때의 국사(國事)가 어떻다고 말하니, 즉시 엄하게 꾸짖어 물러가라 명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감히 선황제(先皇帝)의 일을 논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궁녀배(宮女輩)들이 감히 선조(先朝)에 대해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선조때에 일을 맡은 신하들을 반드시 예우하고 혹은 과실이 있더라도 곧바로 위벌(威罰)을 가하지 않았다. 낮은 자도 또한 높게 접대하고 후히 베풀어주었다. 옛 사람이 삼년 동안 아버지의 신하를 바꾸지 않고 함께 정사를 하는 것은 성인도 오히려 효로 인정하였는데, 제는 종신토록 고치지 않았다. 칠정(七情)이 일어남과 만선(萬善)이 생겨나는 것에서 일용(日用)에서 상행(常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성효(誠孝)에 기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효심(孝心)을 확대하여 우애에 돈독하니 현재의 사왕 전하가 멀리 유학할 때 전보(電報)와 엽서가 빈 때가 거의 없었고, 방학 때에 귀근(歸覲)할 때면 선보(先報)를 듣고 기쁜 안색을 띠었으며 책상에 마주하여 밤새 정담이 계속되었다. 매번 이별할 때면 슬퍼하며 차마 이별하지 못하는 뜻을 보이니 좌우가 감동하였다. 덕혜 옹주(德惠翁主)는 부황(父皇)의 만년에 태어나니 특별히 귀여워하여 길렀다. 처음 어렸을 때 모사(姆師)를 초빙하여 궁 안에서 교육하고 조금 자라자 유학을 보냈는데, 가까이로부터 멀리까지 늘 염려하였다. 대개 인륜(人倫)에 돈독한 것은 지성(至性)에서 나온 것이니 억지로 힘써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제가 효우(孝友)에 지극한 것이다. 재백(財帛)과 주옥(珠玉)과 성색(聲色), 기호품에 대해서는 담백하여 욕심이 없었고, 성부(城府)의 법식(法式)이나 일체의 기관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교만하고 과장된 기색이 없었으며 상스러운 말과 편협한 말은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한 가지 일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한마디도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성현의 자품(姿稟)이고 인군(人君)의 도량(度量)인데 제가 실제로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정(庶政)을 총람(總攬)한 기간이 4년을 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행실과 높은 덕을 역사에 이루 다 쓸 수가 없고 깊고 두터운 혜택이 백성에게 두루 미쳤다. 돌아가신 날에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돈화문(敦化門) 밖에 모여 곡(哭)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고 공상(工商)의 무리와 학교의 아이들은 학업을 폐하고 마치 부모(父母)의 상처럼 달려왔으며 나무하는 아이와 밥 짓고 물을 긷는 비(婢)들로 평생 황제의 힘이 어떠한지 모르는 자들도, 모두 달려와서 통곡하였다. 7일에 성복(成服)한 이후 황량한 벽지와 먼 해변지역, 시골과 산골 사이에서 모두 그러하였다. 외국인들도 모두 보고 탄식하기를, ‘성인이 상을 당했도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역대(歷代) 제왕(帝王)의 상에도 없었던 일이다. 아, 슬프도다. 제가 불세출(不世出)의 성인으로 태황제가 이룬 중흥(中興)의 왕업을 계승하여 통치하신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다스림과 교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이와 같았다. 하늘이 오랜 수명을 주시어 그 뜻하는 일을 끝마치게 했더라면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융성한 시대에 이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하지를 못하니, 아, 애석하도다. 그러나 제가 말세의 운(運)을 만나서 어려운 대업(大業)을 맡아서 전왕(前王)이 이루지 못한 일을 행하였다.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넓은 도량으로 묵묵히 움직여서 정도와 권도를 참작하여 변화에 대처하기를 평상시와 같이하고, 천하를 사사로이 여기지 않았다. 지극한 덕을 능히 이름할 수가 없는데 예전에 천명(天命)을 즐기고 천하를 보전한도고 하는 것이 바로 황제의 경우에 해당된다. 이는 4년 동안의 정사(政事)로 백성들이 백세(百世)가 지나도록 잊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제가 유민(遺民)에게 이를 얻은 것은 다른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피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성경(誠敬)과 인효(仁孝)가 그 가운데 있으니 이는 후왕(後王)에게 감계(鑑戒)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윤덕영(尹德榮)이 제술(製述)하였다.】


  • 【원본】 8책 1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40면
  • 【분류】
    어문학-문학(文學) / 인물(人物)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行狀曰: 嗚呼痛哉! 惟我大行皇帝, 以丙寅三月十四日卯時, 禮陟于昌德宮大造殿。 越翼月上旬, 嗣王殿下召耆舊宰臣、宗戚, 議上廟號曰‘純宗’, 帝號曰‘孝皇帝’, 諡號曰‘文溫武寧敦仁誠敬’。 以德榮託跡濯龍, 受知偏深, 命撰狀德之文。 德榮才力薄又慟迫, 無以爲文。 然義有不敢固辭, 嗚咽抆淚而獻言。 帝姓李, 諱, 字君邦, 號正軒, 太皇帝所命也。 帝, 高宗太皇帝之適嗣, 文祖翼皇帝之孫。 太皇帝以獻懿大院王之子。 入承文祖大統獻懿王於帝, 爲本生祖。 妣, 明成太皇后閔氏, 贈領議政驪城府院君 純簡公 致祿女。 以甲戌二月八日辛巳之卯時, 誕降于昌德宮觀物軒, 實太皇帝御極之第十一年也。 先是, 元子生而早薨, 老宮人爲之憂, 徧禱于寧邊妙香山延安南大池, 所禱皆有奇兆異夢, 至是果驗。 帝天挺聖姿, 英偉和粹。 太皇帝愛而且重之, 思所以早敎之, 卽起致仕李敦宇、宰輔宋近洙爲輔養官, 揀名卿閔泳穆、儒賢任憲晦爲諭善。 翌年乙亥, 冊封爲王世子, 置宮官掄選, 極一時之峻, 而禮遇出百僚之表。 帝岐嶷之譽, 日播中外。 適淸國使者來謁, 仰瞻龍姿, 驚歎曰: "狠胖狠秀。" 蓋胖則難秀, 秀則難胖, 旣胖且秀, 則是超等絶倫之容貌。 狠訓爲甚, 卽之方言也。 至三四歲, 已知孝爲人道之大本, 日見太皇帝, 事慈殿盡孝, 奉宗廟盡誠。 習而化之, 一言動、一事爲、一跬步, 未嘗有惟意自行, 而太皇帝身敎之以正, 而不爲篤愛所弛。 帝之天稟自近道, 而庭訓又如此, 世皆以聖人期之。 壬午, 帝九歲, 令聞益彰。 太皇帝率詣文宣王廟, 謁聖, 行釋菜禮, 遂行入學禮。 圜泮橋之門, 觀盛儀而歡抃者, 不趐億萬計。 仍行冠禮, 德器若老成人。 未幾, 行嘉禮時, 神貞翼皇后躋期頣之壽, 享康寧之福。 太皇帝怡愉承奉, 歲歲豐呈, 一堂三世, 吉慶日湊, 而囿斯民於仁壽之域。 戊子, 帝率百寮, 疏請加上三殿徽號。 庚寅, 又加上如戊子儀。 是歲, 翼皇后崩。 太皇帝至孝根天, 動遵家法, 愼終儀節, 必恔於心。 而哀恫之中, 或有未及備者, 帝輒爲之代勞, 未有少缺。 是時, 帝年未勝冠, 而嫺於節文已如此。 壬辰, 又上號於兩殿, 兩殿以祥禫之過不久, 不欲受, 帝屢疏固請盡其力, 而竟承允許。 洎甲午, 八域久狃於昇平, 四隣日修其輯睦, 迨玆風雲時變, 孼芽間生, 列强窺伺於外, 匪徒煽動於內。 太皇帝圖所以鎭之, 確乎乾斷, 百度更張, 新進之士、才猷之臣, 濟濟登庸, 而未有及聖智之萬一者, 惟帝密贊者爲多。 乙未八月, 宮闈之戒嚴忽疎, 而明成太皇后崩。 帝遽遭酷禍, 莫洩至恨, 窮天極地, 若無所歸。 而以承順父皇之心爲心, 勉抑悲苦之衷。 常以愉容婉色, 仰慰惟憂之念。 然每於燕居靜處之日, 不以言笑爲樂。 惟循循謹祭奠, 殫誠信, 一如太皇帝喪翼皇后時也。 丁酉, 太皇帝威德日盛, 萬姓之所推, 列國之所服。 於是元輔沈舜澤率百辟, 請進大號, 卽皇帝位, 帝爲皇太子。 大赦天下, 恢中興之業, 建丕基於萬世, 維城之固, 繼照之明, 比前愈隆。 乃於庚子、壬寅, 連上尊號以揄揚之。 壬寅卽太皇帝寶齡五十一歲, 遵英祖故事, 入耆老所, 題名社帖, 賜讌耆臣。 時, 三相臣沈舜澤趙秉世尹容善, 皆已入社, 太皇帝以爲奇事, 賜几杖及詩以寵之。 帝亦賡韻以贈之, 一時爲之至榮。 甲辰, 純明后崩。 丙午, 終喪後, 擇配德以正壼位。 其翼年丁未, 太皇帝春秋漸邵, 而震邸之譽望漸彰, 始以代聽命之, 旋命以內禪。 帝震惕固讓, 而廷之羽翼已成, 民之謳歌已歸, 不得已應天順人, 勉承祖宗付畀之重。 値時事艱憂之極, 事無大小, 上而稟裁於大朝, 下而委任於內閣, 垂拱坐治, 庶績皆凝。 帝深軫國朝丹書錮籍, 不無幽冤之參錯, 竝命蕩滌。 俾黨禍消融, 而淹嶺海、滯囹圄者, 一皆疏釋, 以導和氣。 廣布惻怛之詔, 曉之以舊染咸新, 勸之以興業樂生, 民皆有少須臾無死之願, 而庶見熙熙德化之成也。 帝以太祖高皇帝傳位於定宗, 定宗冊弟太宗爲世子, 爲我家舊法, 遂封弟英親王爲皇太子, 爲之係民望而重國本, 卽今我嗣王殿下也。 戊申, 命文學儒臣金允植李容元等, 纂修憲宗哲宗兩朝寶鑑。 又以三宗之未及追尊爲闕典, 卽擧縟儀, 尊眞宗昭皇帝, 憲宗成皇帝, 哲宗章皇帝。 是歲冬, 巡狩南道至釜山, 旬日而還。 又巡于西方至義州, 總計數十日之內, 歷二千里之遠。 而疆場之沿革, 土俗之美惡, 靡有不辨; 民生之疾苦, 稼穡之艱難, 亦無不軫。 朝士參謁, 則慰以久阻戀戀之意; 儒林祗迎, 則勉以學業之勤修。 車駕所過, 省內儒賢、名相、忠義、功烈之家廟墓所在, 輒遣官賜祭。 於是蓬茨圭竇、守牖讀書之士, 以至閭巷匹夫有寸技尺能者, 莫不奮然興起。 男女旄倪, 携手加額, 絡繹於道路, 鼓舞驩呼於桑郊雪蔀之間, 此古昔聖王所未有之晠擧也。 洎庚戌, 時事又丕變, 帝思樂天者保天下之義, 下十行之詔, 釋萬機之煩, 惟以奉宗廟、安生靈爲念。 是以下之所以愛戴者益深。 丁巳春, 展謁于北道八陵, 駕已發而天大雨。 北之民爭撤其蓋屋之茅與揷籬之木, 鋪泥路而導乘輿, 欣欣相告曰: "吾君至矣, 何惜之有?" 雖露宿而風餐無憾, 人情大可見也。 駐御于咸興, 親行酌獻禮于本宮, 分遣祠官, 祭各郡陵寢及濬原殿。 祭畢, 集紳士父老之迎鑾者而勞之。 又集璿派人, 別賜燕而睦之。 四王別子與公主家廟, 優賜祭需, 北之士相與語曰: "古之‘一遊一豫, 爲諸侯度’者, 今始於吾君見之矣。 及還, 太祖皇帝姨母崔氏及其夫石氏之墓, 在定平郡絶僻處, 命伻往祭之。 安邊 釋王寺僧, 有功於國者, 亦命祭之。 此皆左右之未及記憶, 而帝已詳燭而曲施也。 冬, 昌德宮 大造殿有回祿之災, 宣政殿以東全部灰燼, 亟設重建之役。 戊午夏, 太皇帝以腫患違豫, 屢朔沈重。" 日有敎曰: "昔純廟朝, 自大造殿火災之後, 腫候彌留, 竟至昇遐。 祖孫之間, 昭穆同焉, 而今火災及腫祟, 適有相符, 予病將不起矣。" 帝日夕侍湯, 親自扶將, 洞屬憂煎, 感動天人, 秋後翼瘳之慶, 咸稱聖孝攸格也。 自是太皇帝腫症雖差, 眞元積敗, 聖候多在靜攝。 帝時在昌德宮, 憂慮度日, 以未克常時侍側爲恨。 至十二月, 太皇帝崩于德壽宮。 前夕, 因風患猝發, 症候遽㞃, 帝聞卽趨往, 進湯劑, 纔踰時而已無及。 帝自乙未以來, 無人世之樂, 而惟太皇帝是怙, 依以爲命。 至丁未, 分御異宮, 覲車未嘗有一旬之曠, 而侍從及女使問安, 一日十數度。 及庚戌後, 無親總酬應之惱, 專心於志體之養, 憧憧一念, 未有頃刻之弛。 一朝天崩之禍, 醫藥無暇乎盡力, 叫天叩地, 慟恨徹髓。 皇皇冤呼, 梅梅戚容, 在列不忍仰視。 宗英戚畹、元老舊臣, 一辭奉慰, 乞無以過毁傷聖孝。 帝始强加抑制, 議愼終之節, 敎曰: "現今王室典章, 皆異前日。 而惟喪葬祭, 有我家法在, 不可違也。" 帝雅習於禮, 名物度數, 至微細者, 無不明核, 群下之執事者, 惟命是聽。 自襲斂縗絰之制, 祝告籩豆之序, 儀仗之用, 象設之具, 必皆先時而備、趁期而行。 世祿家子若孫之稍有見於禮者, 授之仕牒, 以供工祝之事, 爲祀儀之無愆, 而亦寓記念世臣之意也。 五月居廬, 四時哭泣, 三年祭典, 或微有不寧節, 不廢躬行。 朝夕上食時, 輒思時物之平日所耆者而供之; 有微事細故, 必於祝文中, 措其語而告之。 孝德殿祥事闋, 而陞祔于太室也, 議從享之臣, 衆議皆歸於勳戚平日密邇任事之人。 而帝曰: "故政丞朴珪壽之忠慮, 申應朝之學問, 先帝之所嘗敬待者; 李敦宇有日講之勞, 閔泳煥忠節特異, 亦皆先帝禮遇者。 以此四人配之。" 朝野翕然無異論。 帝自孤露後, 常惸惸如在疚日也。 甲子, 寶算躋望六。 左右仰請依英祖太皇帝故事入耆社, 帝辭以今日非與舊時同, 不署御名, 只題小詩于《靈壽閣帖》以紀之, 命諸舊臣和之。 仍賜宴以娛之, 亦遵壬寅盛擧也。 帝容儀豐晳, 而品質淸脆, 念兩宮顧復拊育之恩, 節宣自護, 起居寢膳之際, 苟有妨於衛生, 一切戒愼。 是以時有諐度, 未嘗至於淹臥。 又年來頣神養閒, 時涉苑囿, 日巡行閣, 步履視昔增健, 體宇從而泰寧, 以謂享岡阜之壽。 偶往歲, 足部有浮脹, 作歇無常, 至今春, 脹外而痞內, 飮啖不善化。 親定宗戚中議藥者十餘人, 令日夜入溫室保護, 廣延東西醫學者, 隨症試術, 而不見效。 鄕黨社會閭閻婦女, 各自效誠, 禱于山川神祗, 而亦不應。 玉几之末命諄諄, 而昊天之降割太遽, 享年五十三, 僅止於中身。 嗚呼痛哉! 嗣王殿下敎曰: "戊午太皇帝之喪, 大行皇帝用我家舊禮。 今者大行皇帝之喪, 亦宜遵用是禮。 凡百有司, 無敢怠忽。" 於是, 有司執事者, 奔走率職, 大小儀節, 一從戊午典例。 將以五月二日, 葬于洪陵左岡負卯之原, 先以四月二十五日, 遷純明后陵爲合祔地, 仍裕陵號, 皆治命也。 配純明皇后, 贈領議政驪恩府院君 忠文公 閔台鎬女。 生長法家, 膺選儲宮, 孝事兩殿, 德行克備。 而不幸以三十三歲崩, 追尊爲皇后。 帝以后之未及覩爲歎, 述行錄千餘言, 載正軒集中。 繼配今皇太后, 領敦寧司事海豐府院君 尹澤榮女。 生而有異姿, 稍長而有女士行。 始作妃, 東宮纔逾年而陞皇后位。 不以位極尊貴加諸辭色, 帝甚重之。 入閤二十一年, 庭無間言, 六宮誦之。 今焉猝當巨創, 不御常膳, 不見天日, 已三旬餘矣。 嗚呼痛哉! 帝無嗣, 王殿下以王統嗣, 致孝於帝, 如孝於太皇帝, 而事皇太后, 亦如事母。 庀帝喪, 戚易俱至, 大小祀禮皆親行, 恭默不言, 而事無不擧, 顔色哭泣, 觀者大悅, 是古所稱源源不竭之孝也。 於戲! 帝聰明睿知超邁凡倫, 歷代帝王家良法美規, 靡不領會, 若我國典禮, 貫通强記, 一字不錯。 至名臣故實、百家譜系、簪纓官歷、政注格式, 如燭照而掌指。 尤尊聖慕賢、衛正排異, 太皇帝嘗以詔布天下曰: "朕與東宮, 以儒敎爲宗。" 蓋帝之學, 得諸庭闈之內者然也。 古之以儒賢稱者, 必擧其別號, 不斥呼其姓名, 雖遐方疎逖後生, 眇少有以才名入聞者, 輒思收用之久, 愈不忘其名: 此帝之好學也。 和順積中而華采著外, 平居無疾言遽色, 對人無驕惰之容。 人之爲君子小人, 一見輒卞, 而口絶雌黃; 見人過失, 非大關刑法, 必思掩鞱。 人有相軋, 則必兩解之, 俾底于和平。 近侍官自鄕曲來者, 必詢其鄕之事。 對臣隣, 必隨其所長與所掌而下詢, 故仰對者, 無齟齬杆格之患, 而各得盡其情。 或所奏不稱上意, 則卽引他語而止, 其辭俾不畢露其短。 御下以寬而操之以莊, 故不怒而威; 政不尙苛而動必以信, 故不令而行: 此帝之持身也。 居常不偃臥而見天, 所居正堂, 奉揭太皇帝御眞, 雖覆以重帕, 而不跛倚其下: 此帝之小心也。 服官者, 不以微眚而黜之, 不可不黜, 則輕其罪名, 俾有自新之路, 或厚與之錢, 以資其生。 聞世臣之訃, 愀然于色; 大家後裔, 蕩敗無餘産者, 給月廩以救之。 祁寒盛暑, 積澇亢旱, 憂民生之或無餓莩, 宸心如傷。 頃年沿江被水禍甚慘, 丙枕不寐, 徹宵至朝, 連以電探, 得其稍奠之報, 始進御膳。 政先四窮, 惠及肖蝡, 自幼不殺蟲豸之屬: 此帝之仁慈也。 廟享每親祼, 而或因事故攝行, 輒有如不祭之歎。 祠官以事入告, 雖玉候違和之中, 必整衣跪坐而受之; 書卷有列聖廟號者, 必盥手端坐而閱之。 北幸時, 過文川地, 淑陵山麓入遙望, 急卸椅子起立, 過後還坐。 每於太廟及眞殿展謁時, 過各室位, 輒鞠躬, 有口奏, 而近侍者無以詳聆。 上陵時, 詣魂遊石前, 亦如之, 想是出入必告之義: 此帝之敬祖也。 在幼時, 兩宮有疾, 憂形于色, 衣不解帶, 待兩宮寢膳復常, 然後帝亦復初。 尋常膳品必先獻, 待其餕而自御。 昌德宮之北苑種栗新熟, 率近侍, 至苑剝收, 栗甚肥潤, 近侍希有頒賜, 經日始聞, 已盡獻于德壽宮, 於是乎相顧感歎。 亮陰中, 仁政殿庭牧丹花盛開, 命爲廣布幃以障其所照處。 以時節展省洪陵, 旣行辭陵禮, 又復上陵。 一日雨急注, 從邁諸臣交諫, 終不回避, 冒雨而行, 衣襨盡霑而不顧焉。 洪陵有監守者, 芟去陵前所種柳之上枝, 帝聞之, 却夕膳而不進。 蓋監守者, 欲其樹之善長, 伐其上枝之揚者, 非故意也。 帝亦燭之, 故不之罪, 而以陵樹之入斤斧爲不安于心, 至于却膳也。 老宮人服勞者, 偶語及先朝時國事如何, 卽下嚴責命退曰: "汝輩何敢論先皇帝事乎?" 自是宮女輩不敢復言。 先朝任事之臣, 必加禮待, 或有過失, 未嘗遽加威罰, 賤者亦必優接而厚施之。 古人三年不改父之臣與政, 聖人猶許以爲孝, 而帝終身不改焉。 七情之發, 萬善之作, 以至日用常行, 莫不以誠孝爲準。 推之孝心而篤於友愛, 今嗣王殿下之在遠學也, 電報葉札, 殆無曠時。 因學暇而歸覲, 自聞先報, 喜動顔色, 對案聯燈, 情話娓娓。 而每臨別悵惘, 不忍捨之意, 感動左右。 德惠翁主以父皇晩生, 偏加撫育。 始幼也, 招聘姆師, 授敎宮中, 稍長遊學, 自近而遠, 動費宸慮, 皆由篤於人倫、出乎至性, 非勉强而爲者: 此帝之孝友之至也。 至如財帛珠玉, 聲色翫好, 泊然無欲; 城府畦畛, 一切機關, 不設於心。 褻昵矜訑, 不作於色; 俚說詖辭, 不近於口。 無一事自欺, 無一語欺人: 此皆聖賢之姿稟, 人君之度量, 而帝實有之。 故總攬庶政, 不過四載, 懿行崚德, 史不勝書, 深恩厚澤, 浹洽于民。 奉諱之日, 都人士女, 輳集于敦化門外, 哭聲震天地。 工商之伍, 庠塾之童, 無不撤業廢工, 如赴父母之喪。 以至樵牧之竪、爨汲之婢, 平生不知帝力之何有者, 竝皆奔走呼號, 七日成服以後, 去荒陬絶澨之外, 隴畝巖谷之間, 在在皆然。 殊域異俗之人, 亦皆觀感嗟歎曰: "聖人喪矣", 此歷代帝王之喪之所未有者也。 嗚呼痛哉! 帝以不世出之聖, 纘太皇帝中興之緖, 光御不多年, 而治化之成已若是。 使天假之永命, 終其志事, 三五之隆, 不難致矣。 而不可得, 嗚呼惜哉! 然帝遭叔季之運, 撫艱大之業, 行前王所未行之事。 而淵衷深思, 雅度默運, 參之經權, 處變如常, 爲天下不私一己, 而至德有不能名者。 嚮所稱‘樂天而保天下’者, 惟帝是已。 此所以四載之政, 使斯民於乎不忘於百世也。 帝之得此於遺民者, 無他術焉。 只從洞洞屬屬, 戰戰兢兢, 誠敬仁孝中來, 是足爲後王鑑也。 【前弘文館學士尹德榮製】


    • 【원본】 8책 1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4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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