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조가 장헌 세자를 왕으로 추숭하고 정조 대왕의 존호를 올리는 예식을 거행할 것을 청하다
특진관(特進官) 서상조(徐相祖)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우리 장헌 세자(莊獻世子)는 슬기로운 자태가 탁월하고 좋은 이름이 일찍이 드러났습니다. 영조(英祖)를 효성스럽게 섬겨서 순(舜) 임금이 섭정(攝政)했던 것과 같이 큰 공을 세워 도왔고 정조(正祖)를 낳아 계(啓)처럼 어진 아들로 천명을 잇게 하여 명을 받고 정사를 대리한 지 자그마치 14년이나 됩니다.
정조는 하늘이 낸 성인으로서 바다와 같은 효성을 지녔으며 어렵고 큰 왕업을 이어 빛내는 일에 힘을 썼으니, 온 세상을 경륜하는 학문으로 문화를 발전시켰고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들을 사랑하여 만물이 다 함께 혜택을 입었습니다. 임금 자리에 있던 25년 동안 지극한 인과 두터운 은택이 온 세상에 차고 넘쳐서 사람들이 오늘까지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매번 비궁(閟宮)에 묘악(廟樂)이 연주되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가슴 아파하여 심지어는 거처하고 식사하는 것도 화려하고 맛있는 것으로 하지 않았으며 임금 노릇을 해도 즐거움이 없다고 하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존호(尊號)도 받지 않으면서 마치 궁한 사람이 갈 곳이 없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그러니 정조의 뜻이 어떠하였던가를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때 신하된 사람들의 답답하고 원통하고 억울함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아, 추숭하는 예식을 아직까지 빠뜨린 것은 국가에서 미처 하지 못한 전례이고 바로 백성들의 끝없는 한입니다. 예나 지금을 상고하고 인정과 예법을 참작해 볼 때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삼가 혜경궁(惠慶宮)께서 지어 내린 책을 살펴보건대, 정조가 이르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하여 갑자년(1804)이 되면 15살이니 전위(傳位)할 수 있을 것이다. 전위한 후에 나는 자궁(慈宮)을 모시고 화성(華城)으로 옮겨간다면 경모궁(景慕宮)께서 미처 행하지 못하고 있는 전례(典禮)를 펼 방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영조의 하교를 직접 받았으므로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지극히 원통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의리이다. 오늘 여러 신하들이 나의 의리를 따라서 감히 거론하지 못하는 것도 의리이며, 다른 날 여러 신하들이 새 임금의 의리를 따라 받들어 행하는 것도 역시 의리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친히 지은 현융원(顯隆園)의 지문(誌文)에는, ‘맏아들을 기다려서 중대한 일을 맡기셨으니, 크게 보답하고자 하는 지극한 바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슬픕니다. 경신년(1800)에 정조께서 붕어(崩御)한 뒤로 매우 중요한 전례이나 세상일이 다단하여 신중히 하고 망설이다가 오늘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의 한결같은 심정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이 의리는 천지간에 내놓아도 어긋나지 않고 백대를 기다려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 누가 감히 여기에 이의를 달겠습니까? 논의하는 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전날에 하지 못한 것을 지금에서야 청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숙종(肅宗) 때 단종(端宗)의 위호(位號)를 회복한 것도 수백 년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임금의 종통(宗統)에 구애되는 것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성종(成宗) 때 덕종(德宗)을 추숭한 전례가 있으니, 같은 소목(昭穆)이 일세(一世)가 된다는 것은 근거로 삼을만한 예법이 많습니다.
신의 증조부인 문헌공(文獻公) 서유린(徐有隣)은 옛날 정조 때에 오랫동안 임금 가까이에 있어서 임금의 속마음을 잘 알았으며, 신의 할아버지인 문정공(文貞公) 서준보(徐俊輔)는 벼슬하지 않았을 때부터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셨기에 벌써 보고들은 것이 많았습니다. 철종(哲宗) 을묘년(1855)에 이르러 나이가 86세였는데 정조의 옛 신하로서 상소하여 정조 대왕에게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한평생 고심하고 정성을 기울인 일이라 차마 침묵을 지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비록 윤허를 받지 못하였지만 고령에 의로운 발기를 한 뜻이 어찌 공연한 것이겠습니까?
신은 지위가 높지 못하고 학식도 부족하니, 어떻게 감히 주제넘게 의견을 제기하겠습니까만, 이 전례에 대해서는 신이 참람됨을 생각하지 않고 감히 이렇게 목욕재계하고 호소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소장을 내려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하문하여 빨리 장헌 세자를 왕으로 추숭하는 예를 거행하고 계속해서 정조 대왕에게 존호를 추상하는 전례를 거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는 우리 정묘(正廟)께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했던 문제이다. 짐이 일찍이 영묘(英廟)의 어서(御書)인 《금등명간편(金縢銘肝篇)》을 삼가 읽었는데, 거기에, ‘누가 금(金)으로 장식한 별장에서 천만 년 살려고 하는가? 나는 망사대(望思臺)를 지은 것도 후회한다.’는 내용이 있었으니, 아, 참으로 성인의 절절한 마음은 백대가 지나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구나. 경은 경의 집안사람이 대대로 의리를 지켰다는 이유로 이를 근거로 이런 청을 제시하였으니, 실로 우연치 않은 일이고 짐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이 마치 오늘을 기다린 듯하다. 이것은 더없이 중요하고 신중해야 할 전례인 만큼 지금 수의(收議)할 것이다."
하였다.
- 【원본】 43책 39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0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特進官徐相祖疏略:
猗我莊獻世子, 睿姿卓越, 令聞夙彰。 孝事英考, 贊弘功於舜攝, 篤生正宗, 綿寶籙於啓賢, 受命代理, 至于十四年之久矣。 正廟以天縱之聖, 有準海之孝, 承艱大之業、懋緝熙之功, 經天緯地之學, 奎運載屆, 君國子民之德, 庶品咸囿。 在宥二十五年之間, 至仁厚澤, 洋溢區宇, 到于今於戲不忘矣。 嗚呼! 每以閟宮之廟樂未稱, 至痛在心, 至於起居飮食, 不御華美, 南面無樂爲敎, 所以不受徽號, 若窮無歸。 聖意所在, 可以仰揣, 而爲當日臣子者, 抑塞痛冤, 當何如哉? 噫! 追崇之尙闕, 乃國家未遑之典也, 卽臣民無窮之恨也。 稽之古今, 參以情禮, 焉有是理乎? 謹按惠慶宮撰下冊子, 有曰: "正廟曰‘元子誕生, 若至甲子年, 當十五, 可以傳位, 而傳位後子奉慈宮, 移御華城, 則景慕宮未行之典, 當有獲伸之道矣。 子則親承英廟下敎, 不敢不遵。 雖極痛冤, 亦一義理也。 今日諸臣, 從予義理, 不敢擧議, 亦義理也。 他日諸臣, 從新王義理奉承行之, 亦義理也。’" 且親製顯隆園誌文, 有曰: "有待於錫胤而托重, 得遂誕報之大願至祝。" 嗚呼! 痛矣。 庚申天崩之後, 典禮至重, 世故多端, 鄭重趑趄, 式至于今, 擧國大同之情, 無由洩矣。 此義理, 建天地而不悖、竢百世而不惑, 敦敢異議於其間哉? 議者或以爲前日所未行者, 今乃陳請爲說, 則有不然者。 肅廟朝復端宗位號也, 在於數百年之後。 又或以爲有礙宗統爲說, 則有不然者。 成廟朝, 有追崇德宗之例。 同昭穆爲一世, 禮多可據矣。 臣之曾祖文獻公臣有隣, 昔在正廟, 久被密邇, 稔承精微之聖意, 臣之祖文貞公臣俊輔, 自布衣, 昵侍左右, 已多見聞矣。 至哲宗乙卯年八十有六, 以正廟之舊臣, 陳疏請正宗大王追上尊號, 此乃平生苦心血誠, 不忍泯默者也。 伊時雖未蒙允, 耄年義起, 意豈徒然哉? 臣位未崇顯識且譾劣, 何敢出位建白, 而至於此典禮, 臣不揆僭越, 敢此齋沐呼籲。 伏乞下臣此章, 詢議于在廷諸僚, 亟擧莊獻世子追王之禮, 繼行正宗大王尊號之典。 云云。
批曰: "此我正廟不忍言不敢言之事也。 朕小子嘗伏讀英廟御書《金縢銘肝篇》, 有曰: ‘孰是金莊干秋? 予悔望思之臺。’ 嗚呼! 聖意之惻怛, 百世興感。 而卿以卿家人, 世守義理。 爰有稽徵, 有此建請, 事固不偶, 而惟朕平日之志, 若有待於今日矣。 此係莫重莫愼之典禮也, 今當收議矣。"
- 【원본】 43책 39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0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