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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8월 30일 정묘 2번째기사 1890년 조선 개국(開國) 499년

대행 대왕대비의 지문

대행 대왕대비(大行大王大妃)의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아! 우리 대행 대왕대비께서는 태임(太姙)과 같은 성인(聖人)으로 발을 드리우고 정사를 할 때 공을 종묘 사직(宗廟社稷)에 남겼고, 덕이 온 나라에 미쳤으며, 위태하던 나라를 바꾸어 반석같이 다져놓으셨다. 장락궁(長樂宮)에 한가히 있으면서 부귀는 해와 달 같았고, 오래 장수한 것이나 훌륭한 덕과 업적은 거의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 전하의 지극한 정성이 바다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하늘이 순응하고 사람이 믿어서 자애로운 덕행은 더욱 훌륭해지고 효성은 더욱 빛나, 이 세상에 생을 누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억만년 무궁토록 길이 장수하기를 빌었다.

경인년(1890) 봄에 왕후께서 병으로 편찮으시다가 이튿날 나았으나 여름 4월에는 병환이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전하가 병을 간호하며 애태우다 신하들에게 직숙하며 약시중을 하도록 명했지만 의술의 효과가 없었으므로, 또 종묘 사직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빌었으나, 끝내 17일 병진일(丙辰日) 미시(未時)에 경복궁(景福宮) 흥복전(興福殿)에서 승하(昇遐)하였으니, 나이는 83세이었다.

아! 슬프다! 어찌 이른바 신령으로서도 참으로 밝히기 어렵고 이치로도 추측할 수 없단 말인가? 우리 전하는 슬피 울었으나 미치지 못하여 이에 여러 신하들에게 옛날 시호법(諡號法)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백성이 이름 할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하고, 큰 생각을 능히 성취한 것을 ‘정(貞)’이라 하니, 삼가 ‘신정(神貞)’이라는 존호(尊號)와 ‘경훈 철범(景勳哲範)’이라는 휘호(徽號), ‘효모(孝慕)’라는 전호(殿號)를 올렸으며, 산릉의 길지(吉地)를 수릉(綏陵)과 같은 언덕에 정하고 이해 8월 30일 정묘일(丁卯日)에 그 오른쪽에 합장하였다.

임금이 신에게 유궁(幽宮)의 지문을 지으라고 명했는데, 신이 혼미하여 감히 감당할 수 없어 상소를 올려서 사양했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면서 순서에 따라 이 글을 지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왕후의 성(姓)은 조씨(趙氏)이다. 고려(高麗)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문하시중(門下侍中)인 조맹(趙孟)이 처음으로 풍양(豐壤)에 본관(本貫)을 두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이조 참판(吏曹參判) 한평군(漢平君) 조익정(趙益貞)이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죽었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 받았고 시호(諡號)는 공숙공(恭肅公)이다. 5대를 내려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풍안군(豐安君) 조흡(趙潝)인조(仁祖)를 도와 정사 공신(靖社功臣)으로 책훈(策勳)되었는데, 좌참찬(左參贊)을 추증 받았고 시호는 경목공(景穆公)이다. 3대를 내려와서는 바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 을 추증 받은 경헌공(景獻公) 조상경(趙尙絅)영조 때의 이름 있는 신하였다. 신축년(1781)·임인년(1782)에 큰 의리를 확고히 견지하여, 금상(今上)이 특별히 명하여 대대로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왕후의 고조부(高祖父)가 된다. 증조부(曾祖父)의 이름은 조엄(趙曮)인데, 이조 판서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을 추증 받았으며 시호는 문익공(文翼公)이다. 조부(祖父)의 이름은 조진관(趙鎭寬)인데, 행실이 아주 착했고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효문공(孝文公)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조만영(趙萬永)인데, 일찍이 이조 판서를 지냈고 왕후가 정식 대비(大妃)로 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으로 봉하고 후에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경공(忠敬公)이고 순조(純祖)의 묘정(廟廷)에 배식(配食)하였다. 어머니는 덕안 부부인(德安府夫人)으로 추증된 은진(恩津) 송씨(宋氏)이다. 목사(牧使)로 찬성(贊成)을 추증 받은 송시연(宋時淵)의 딸이고 찬선(贊善) 문원공(文元公) 송명흠(宋明欽)의 손녀이며 판서(判書)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이다.

왕후는 순조 무진년(1808) 12월 6일 정유일(丁酉日)에 두포(荳浦) 쌍호정(雙湖亭)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이에 앞서 증조모(曾祖母) 홍부인(洪夫人)이 꿈에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서 이상한 호랑이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었는데, 출생하고 보니 과연 그 말이 맞아 상서로운 빛이 방을 둘러싸 새벽녘과 같이 밝으니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왕후의 효성과 형제애는 타고난 성품이어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부모보다 먼저 먹는 일이 없었으며, 형제간에도 쉬운 일은 사양하고 힘든 일은 자신이 하였다.

12세 때인 기묘년(1819)에 선발되어 겨울 10월에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고 이어 혼례를 거행하였다. 효의 왕후(孝懿王后)순조 대왕(純祖大王)순원 왕후(純元王后)를 섬겼는데 유순하고 화락하기 이를 데 없었고 언제나 삼가하고 조심했기에 두 전하가 효부(孝婦)라고 칭찬하였다.

정해년(1827)에 익종(翼宗)이 복잡한 정사를 대신 처리할 때 왕후는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돌아간 임금이 이룩한 너그럽고 인자하며 공손하고 검소한 정사를 안에서 도운 공이 지극하였다.

이해 가을 7월에 하늘이 준 복을 크게 받아 헌종(憲宗)이 탄생했으니 한 집안에 세 성인이 오래도록 복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좋지 못하여 경인년(1830) 5월에 익종이 훙서(薨逝)하니 왕후가 음식도 들지 않고 슬피 울어 곁에서 감히 볼 수가 없었다. 갑오년(1834) 11월에 순조(純祖)가 등하(登遐)하니 왕후는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피 곡하였다.

헌종(憲宗)이 왕위를 잇자 익종을 추존하여 왕으로 삼고 왕후를 높여서 왕대비(王大妃)로 삼았으며 정유년(1837)에 거상이 끝나자 ‘효유(孝裕)’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무신년(1848)에 ‘헌성(獻聖)’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기유년(1849) 6월에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哲宗) 신해년(1851)에 거상이 끝나자 ‘선경(宣敬)’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계축년(1853)에 ‘정인(正仁)’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정사년(1857)에 순원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大王大妃)라는 칭호를 올리고, 기미년(1859)에 자혜(慈惠), 계해년(1863)에 ‘홍덕(弘德)’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 귀신과 사람이 의탁할 데가 없으므로 나라의 위기가 경각에 처하였다. 왕후가 큰 계책을 정하고 금상(今上)을 잠저(潛邸)에서 맞아들여 익종의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끌어대어 대비에게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청하니, 왕후는 어린 왕이 임금 자리에 있으므로 정사가 어렵다는 것을 염려하고 마지못해서 윤허하였다. 을축년(1865)에 정아(正衙)를 다시 세우고, 병인년(1866) 2월에는 수렴청정을 거두도록 명하였다.

이 해에 거상이 끝나자 ‘순화(純化)’라는 존호를 올리고 ‘문광(文光)’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정묘년(1867)·무진년(1868)·기사년(1869)·계유년(1873) 연간(年間)에 ‘원성 숙열 명수 협천(元成肅烈明粹協天)’이라는 존호를 더 올리고, 을해년(1875)·정축년(1877)·무인년(1879)·기묘년(1880) 연간에 ‘융목 수녕 희강 현정(隆穆壽寧禧康顯定)’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계미년(1883)·병술년(1886)·정해년(1887) 연간(年間)에 ‘휘안 흠륜 홍경(徽安欽倫洪慶)’이라는 존호를 더 올리고, 무자년(1888)에 연이어 ‘태운 창복(泰運昌福)’이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경인년(1890)에 ‘희상(熙祥)’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왕후가 수렴청정 하던 초기에 임금에게 하교하기를,

"지금 망극한 가운데 500년 전해오는 종묘 사직이 다행히 의탁할 데가 있게 되었습니다. 주상은 곧 우리 인조(仁祖)의 혈통을 이은 후손이고 영조(英祖)의 방계 자손입니다. 조종(祖宗)의 왕통을 잇고 조종이 하던 일을 하는 만큼 마땅히 조종을 본받아야 하는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곧 조종이 전해준 심법(心法)이며 조심하고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는 것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입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비록 어린 나이에 슬프고 경황없는 때이지만 자주 신하들을 만나서 경서(經書)와 역사를 강론하여 다스리는 방법과 정사하는 계책을 밝게 익히며, 위로는 조종이 중히 여긴다는 것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비록 높다 하더라도 본래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는 법이 없으며, 더구나 대신들이 조종의 법을 받들어 돕고 인도하는 것도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예로 대하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하였다. 예조(禮曹)의 관리가 종묘(宗廟)에 축문(祝文)쓰는 격식을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니, 왕후가 중앙과 지방에 유시하기를,

"계책을 정하여 전교한 가운데 대통(大統)이라고 한 것은 큰 윤리를 말한 것이다. 만일 나라를 전한 계통을 논한다면 정조(正祖)·순조·익종·헌종의 계통이 전해져 대행 대왕에 이르고 주상께서 이어받았으니, 어찌 두 계통이라고 의심을 가지겠는가? 그러므로 익종은 황고(皇考)라 칭하고 헌종은 황형(皇兄)이라 칭하며, 대행 대왕은 황숙고(皇叔考)·효종자(孝從子)라고 칭하라."

하였다. 일찍이 임금을 연회에 모신 자리에서 하교하기를,

"지금 백성은 당요(唐堯)우순(虞舜)의 백성이므로 임금은 마땅히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 주상은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 백성은 임금의 백성이므로 부세(賦稅)를 줄이고 요역(徭役)을 덜어주며 사치를 제거하여 널리 미치게 한다면, 백성들은 자연히 늘어날 것이고 재정은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도둑질을 하는 사람도 우리의 백성인데 그들이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는가? 덕이 아래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인가, 수령이 적임자가 못 되어 그러는 것인가? 그들은 필시 일 년 내내 힘들여 노동하지만 한 오라기의 실, 반 알의 낟알까지도 모조리 삼세(三稅)와 탐관오리의 주머니에 들어가기 때문에 불쌍한 저 백성들 중에는 굶주림과 추위에 몰려 이렇게 기어 다니다가 우물에 빠지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원인을 찾는다면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상에게 거듭 강조하는 것은 다 백성과 나라에 절실한 문제이니,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당요의 흙섬돌〔土階〕과 떼이엉〔茅茨〕, 하우(夏禹)의 변변치 않은 음식과 궁실이 그들을 만고의 성군(聖君)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세에 와서 사치가 점점 성해져 진귀한 음식을 먹고 화려한 옷을 입으니 한정된 재정을 절제 없이 쓰게 되어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는 옛 성인의 교훈에 흠집을 남긴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비단 옷과 훌륭한 음식도 달갑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것은 바로 자모(慈母)의 책임이고 임금의 학문을 돕고 인도하는 것은 오직 경들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권강관(勸講官)을 두고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며, 산림(山林)의 유현(儒賢)을 자주 불러 한 가지 정사나 한 가지 일에 대한 명령에 이르기까지 순수하게 공명정대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백성을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더욱 충실하도록 하라."

하였다. 탄신일에 진상하는 물건들과 수렴청정 할 때에 응당 공급하기로 된 것도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것은 다 그만두게 하였다. 각 공물을 바치는 계〔貢契〕에서 그 전에 바치지 못한 것은 사실 오래 쌓인 부족량으로 되는데 바칠 물건에 대해서는 규례대로 값을 받고 있었다. 왕후는 이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하교하기를,

"나라에서 공물을 바치는 각계(各契)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도민(都民)들이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인데, 경비가 고갈되어 개혁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3분의 1을 감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사(有司)에서 주저하자, 하교하기를, ‘백성이 넉넉하면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가난하면 나라가 위태로운 것이다. 지금 어린 왕이 위에 있는데 어찌 그렇게 아까워할 수 있겠는가? 각 공계에서 바치지 못한 것을 모두 탕감하여 전례 없는 은덕을 보이도록 하라. 그리고 이제부터 나라의 재정이 넉넉하게 되고 부족하게 되는 것은 다 중앙과 지방의 해당 관리들에게 위임하겠다.’라고 하였는데, 탕감한 것은 쌀이 39만 9,200석(石), 돈〔錢〕이 4만 900냥(兩) 남짓이었다.

평안도(平安道)에 군량곡을 더 주어 낮은 이자로 준 돈을 여러 해 동안 물지 못하고 끌어오는데 대하여 감사(監司)를 시켜 조사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많이 축난 것을 독촉하여 받으면 가난한 백성에게 해가 미치어 모두 망하여 흩어지기 쉬우니, 마땅히 먼저 돌보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감면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각 궁방(宮房)에서 사사로이 도장(導掌)을 보내어 황해도(黃海道) 각 고을에서 남은 결세(結稅)를 모두 받아들이면서 함부로 잡아다가 포악하게 구는 바람에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내수사(內需司)에서는 행주(幸州)에서 명목이 없는 세를 만들어 내어 여러모로 백성들을 못살게 굴어 배가 통하지 못하게 되니, 그 폐단이 모두 극도에 달하였다. 하교하기를,

"궁방이나 내수사뿐만 아니라 심지어 재상의 집에서까지 함부로 사들여 보(洑)를 열고 제언(提堰)을 쌓으며 광석을 캐고 푸줏간을 만드는 등 폐단이 많으니, 서러운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하고, 의정부에 명하여 각도(各道)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궁차(宮差)를 일일이 쫓아버리게 하였다.

또한 재물을 가지고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거듭 금지하고, 도민(都民)들의 좌경법(坐更法)007) 을 폐지했으며, 거듭 화재를 당한 시전(市廛)에 돈 5만 냥과 무명 50동(同)을 특별히 내려주어 집을 짓게 하고, 이어 각 아문(衙門)에서 공금을 시전(市廛)에 꾸어준 것을 면제하는 등 무릇 백성들의 힘을 펴주기 위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었다.

영남(嶺南)호남(湖南)에 수재가 나자 특별히 본 도의 일을 맡아보는 가까운 신하를 파견하고 윤음(綸音)을 내려 이재민을 위로하였으며 구휼하는 것을 정상적인 규례보다 더 하였다.

제주도(濟州道)가 멀리 떨어진 바다 가운데 있기 때문에 특별히 염려하여 탕장(帑藏)의 재물을 내어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했으며, 해당 목사(牧使)의 임기를 연장하여 맞이하고 보내는 폐단을 덜게 하였다.

형옥(刑獄)을 신중히 처결하도록 하교하기를,

"종친의 가계에 속한 사람이 흉악한 무리들에게 걸려들어 가끔 불행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도 억울한 사정을 풀지 못하여 사건이 애매하고 명백하지 못한 것이 반드시 없지 않을 것이다. 의리에 관계되고 충성과 반역이 명백한 것 외에는 모두 놓아주는 것이 어찌 화목으로 이끌고 생명을 구하는 기본이 아니겠는가?"

하고, 대신과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에게 신칙하여 모여 앉아서 조사하게 하였다. 또 중앙과 지방의 옥안(獄案)에 대해 심리하라고 명하면서, 《상서(尙書)》 〈여형편(呂刑編)〉의 ‘불쌍히 여기며 조심하라.’는 글을 인용하여, 유사(有司)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이 백성에게 미치도록 판결하되, 죄 있는 사람은 한결같이 법대로 처리하고 스스로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유시하였다.

전 승지(前承旨) 남종삼(南鍾三) 등이 불순한 마음을 품고 몰래 외국과 내통하여 사학(邪學)을 배웠는데, 그것이 요원(燎原)의 불길같이 전파되니, 왕후는 크게 우려하여 속히 국문(鞠問)하고 아울러 주벌(誅罰)하도록 명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신칙하여 그 무리들을 모두 잡아들이게 하여서 온 나라를 깨끗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왕후가 유교를 지키고 이단을 물리친 큰 정사였다.

신하들에게 신칙하는 경우에는 명분과 지조를 숭상하며 청렴한 마음을 장려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학식이 많은 선비나 충성스러운 신하로 왕실에 복무한 사람에게는 혹은 벼슬을 주거나 시호(諡號)를 주고 혹은 제사를 지내주거나 후손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며, 인재를 쓰는 경우에는 앞길이 막혀 벼슬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되 소원하다고 해서 차이를 두지 않았고, 탐오하는 관리를 징계하는 경우에는 벼락 같은 위엄으로 처벌하고 귀양 보냈으며, 수령의 훌륭한 정사를 권면하는 경우에는 새서(璽書)를 내려주는 은전으로 총애를 베풀고 특별히 표창하였다. 수령으로 처음 벼슬자리에 들어온 사람을 인견(引見)하여 대면하고 거듭 유시하기를,

"너희들에게 관직을 제수한 것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잘하면 상을 줄 것이고 잘못하면 처벌하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언로(言路)를 열어 시무(時務)를 조목별로 진술하게 하면서, 하교하기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힘쓰면 무슨 일이든지 경계하고 살필 수 있는데, 어찌 보통 말이라고 해서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설사 간혹 왕후의 뜻에 맞지 않더라도 즉시 흘려보내었다. 과거 시험을 엄하게 하기 위해 주사(主司)를 골라서 임명하고 재예(才藝)를 시험하는 것을 세밀하고 명백하게 하였다.

임금이 왕후에게 한때의 즐거움을 드리고자, 조씨(趙氏)로서 해액인(解額人)을 특별히 사마방목(司馬榜目)의 명단 끝에 넣으라고 명했는데, 왕후가 이르기를,

"어찌 선파(璿派)의 일가친척과 같이 비교하여 똑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여러 번 하교하였으므로 마침내 임금의 명을 취소하였다. 이것으로 평소에 왕후가 외척에게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지 않도록 경계한 것과 성상이 그 뜻에 순종하는 효성으로 자성(慈聖)의 덕을 빛내고 크게 드러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렴청정을 그만둘 때 대신과 재상들을 불러 하교하기를,

"내가 미망인(未亡人)으로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맡은 지 어느덧 4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예로부터 왕비(王妃)가 조정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곧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불행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옛날의 현명한 왕후들과 비슷이나 하겠는가? 그런데 온 나라가 망극한 때를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역대 임금의 사적을 들어 눈물을 흘리며 요청했고, 나도 종묘 사직이 큰 근본이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윤허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주상의 나이가 이미 장성했고, 성상의 성품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으로서 슬기로운 지혜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중요한 공무를 밝게 익히고 학문이 독실하니, 모든 정사를 직접 맡아 처리할 수 있는데,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나라의 체모를 존중하고 큰 법을 바로 세우는 데 심히 어긋나는 일이다. 오늘부터 크고 작은 공무를 일체 주상이 총괄 처리하되,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대신을 예우하고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를 보전하며 우리 선대 임금의 가법(家法)을 지키도록 주상은 힘쓸 것입니다. 다 같이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인도하고 바로잡아 우리의 끝없는 국운을 견고하게 하도록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기대한다."

하고, 수렴청정을 그만두기로 한다고 명했으니, 아! 훌륭한 일이었다.

옛날 송(宋) 나라 사람들이 선인 고태후(宣仁高太后)를 칭송하여 여자 중의 당요이며 우순이라고 하였다. 그도 성인은 성인이지만 우리의 성모(聖母)가 용감하게 수렴청정을 그만둠으로써 그 끝을 바르게 한 것으로 말하면, 또한 선인 고태후도 능히 따르지 못할 것이다.

왕후는 성품이 단정하고 의지가 굳으며 인자하고 공경하며, 한평생 빠른 말을 하거나 당황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소학(小學)》을 마음에 두어 집안의 몸가짐에 도움이 많았으며, 즐겨 역대 임금들의 정사의 잘잘못과 옳고 그른 사적을 보고 재삼 교훈으로 삼았다.

순원 왕후가 병이 나자 밤낮으로 약시중을 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모를 받드는 정성이 끝이 없었다.

임신년(1872)에 태조(太祖)원종(元宗)의 어진(御眞)을 옮겨 모사(摹寫)할 때, 그림족자와 장막으로 쓸 것은 다 궐내에서 내려 보내고 어진을 모셔놓은 진전(眞殿)의 제물과 장막을 고치는 것은 반드시 성복(盛服)하여 직접 점검하였다. 장사지내는 절차는 더욱 근엄하여 모든 내외 전(殿)과 궁(宮)들의 상사(喪事)와 염(斂)하고 수의를 갖추는 것을 직접 스스로 점검하여 정성과 예를 극진히 하였으니, 수빈(綏嬪)의 상사 때 몸에 종기가 생겼으나 역시 몸소 점검하였다.

갑오년(1834) 순조(純祖)의 상례(喪禮)와 인릉(仁陵)을 옮기는 봉비구(奉庀具)는 순원 왕후가 반드시 왕후에게 물어서 처리하였다. 기제사 때에는 반드시 정숙하게 하여 비록 나이는 많지만 혹시라도 해이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제사에 쓰는 은그릇을 훔친 자가 있었는데 사실이 발각되어 궁중에서 떨고 있었다. 왕후는 죄 없는 사람이 잘못 걸릴까 염려하여 임금에게 묻지 말도록 청하고 이에 그 모양대로 고쳐서 만들게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인자한 마음을 베푼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왕후는 일찍이 수릉의 묘소가 적당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헌종 병오년(1846)과 철종 을묘년(1855)에 천장하는 예를 거행하였는데, 모두 왕후의 뜻을 받든 것이었다.

주상을 예로 높여, 나가서 만날 때마다 비록 80세의 노인으로 몸이 편치 않은 때라 하더라도 시녀를 시켜 반드시 부축하게 하고 일어나 앉았다. 음식과 행동하는 절차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못할까 늘 걱정하며 28년을 하루와 같이 하고, 매우 피곤하면서도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명온 공주(明溫公主)·복온 공주(福溫公主)·덕온 공주(德溫公主) 세 공주와는 정이 매우 두터워서, 그들이 죽자 자손들보다도 더 잘 돌보았다. 외척을 대하면 반드시 정색을 하고 만났으며, 사치한 것을 보면 옛일을 인용하며 깨우쳐주어서 스스로 반성하고 뉘우치게 하였다.

왕후는 자기 몸을 봉양하는 데에는 검소하게 절약하여 붓과 벼루 외에는 씻은 듯이 아무런 물건도 없었다. 옷은 대부분 빨아 입었으며 적의(翟衣) 이외에는 비단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더욱 겸손하여, 존호를 올리고 옥책문(玉冊文)을 드릴 때마다 더러 마지못해 받기는 했지만, 오히려 두려워하며 받지 못할 것처럼 하였다. 성대하게 벌이는 행사에 대해서 왕후가 이르기를,

"나라의 저축이 넉넉하지 못하고 백성의 힘이 또한 고달픈데, 어찌 경사를 화려하게 하겠습니까?"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수렴청정을 거두고 빛나는 교화를 그만둔 다음부터는 위에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 같았다. 임오년(1882)과 갑신년(1884)의 변란에 위기에서 회복하고 안정되게 된 것은 왕후의 위엄에 힘입은 것이니,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운을 내게 하며 생명을 사랑하고 보호하여 아픔이 자기에게 있는 것같이 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 성상이 유지를 받들어 장사지내는 모든 물품을 백성들과 시민(市民)에게 부담시키지 않았으므로, 깊은 산 두메산골에서도 애도의 정을 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이르기를,

"성모께서 우리를 돌보아주고 우리를 다시 살려주었는데, 지금은 그만 가셨으니, 우리는 어찌하겠는가?"

하였으니, 아! 슬프다! 신이 삼가 《시경(詩經)》의 관저장(關雎章)에 있는 후비(后妃)의 덕에 대하여 들었는데, 그 시에서는 비록 후비만 칭송한 것 같으나 문왕(文王)에게 근본을 두지 않는다면 시의 뜻에 크게 어긋난다고 주부자(朱夫子)가 일찍이 말하였다. 지금 우리 성모가 몸소 뛰어난 덕을 갖추고, 큰 복을 누리셨으니, 어찌 우리 성고(聖考)가 몸을 바르게 하고 집안을 바로잡은 덕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노래와 시로 형상하는 사람이 없어, 사람들에게 슬픈 마음으로 그 덕스러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안에서 보고 기록한 것은 형상화해 보면, 하늘에 비할 만한 덕은 정희 왕후(貞熹王后)와 같고, 성취한 일이 많기는 정순 왕후(貞純王后)와 같으며, 현인(賢人)을 흠모한 말은 순원 왕후와 같다. 그리고 생각건대,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며 넓고 큰 훌륭한 규범과 아름다운 법도는 중천에 있는 해나 별 같으며, 훌륭한 임금이 만대에 태평할 세상을 열어 놓은 것은 대개 훌륭한 우리 성모가 사랑하고 보호한 덕이 여기에서 더욱 빛나는 것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지극히 고요하면서도 반듯하다."

하고, 전(傳)에 이르기를,

"자신의 행실은 일반 백성을 통하여 징험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큰 덕을 지닌 이는 반드시 큰 녹(祿)을 얻고 반드시 명예를 얻으며 반드시 장수를 얻는다.

하였는데, 왕후는 이것을 모두 소유했으니, 경사스러운 일이다. 아들 한 분을 두었는데 헌종 대왕(憲宗大王)이고, 그 왕비인 효현 왕후(孝顯王后)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이다. 계비(繼妃)인 숙경 예인 정목 홍성 장순 장소 단희 수현 명헌 왕대비(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莊昭端禧粹顯明憲王大妃) 전하(殿下) 홍씨(洪氏)는 영돈녕부사 익풍 부원군(益豐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이다. 지금 우리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 주상 전하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아들로 들어와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아들로 되었다. 비(妃)인 효자 원성 정화(孝慈元聖正化) 중궁 전하(中宮殿下) 민씨(閔氏)는 첨정(僉正)으로 영의정을 추증한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왕세자 저하를 낳았는데, 좌찬성(左贊成)으로 영의정을 추증한 민태호(閔台鎬)의 딸을 빈(嬪)으로 삼았다.

아! 왕후의 덕과 공은 역사의 기록에는 다 서술할 수 없는데, 신의 천박한 재간으로 어찌 감히 만의 하나라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가 엄한 여차(廬次)에서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하늘에서 타고난 효성으로 행적에 대한 기록을 적어 내려 보냈으나, 서술이 미비한 점이 많고 궁중의 일을 실로 외부에서 다 알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이리하여 오늘날과 예전의 일을 굽어보고 우러르며 슬픔을 금할 수 없어 삼가 줄거리를 개괄하여 간결하고 엄숙한 글체로 나타내고 경연(經筵)에서 한 윤음과 교령(敎令)으로서 선포하여 책에 쓰여 있는 것과 듣고 본 것을 널리 모아 편집하였다. 그런데 글을 만들 때 화려하게 하고 사실에 맞지 않으면 후대 사람들이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겸손하고 빛나던 자덕(慈德)에 어긋날 듯하여, 조심하며 차마 감히 지나치게 하지 않았으니, 천년 후에 가서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봉조하(奉朝賀) 김상현(金尙鉉)이 지었다.】


  • 【원본】 31책 27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62면
  • 【분류】
    재정-역(役) /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사상-유학(儒學) / 재정-전세(田稅) / 사법-치안(治安) / 왕실-의식(儀式) / 구휼(救恤) / 금융-화폐(貨幣)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금화(禁火) / 상업-시장(市場) / 사법-재판(裁判) / 역사-고사(故事) / 사상-서학(西學) / 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 / 윤리-강상(綱常) / 재정-국용(國用) / 왕실-경연(經筵)

  • [註 007]
    좌경법(坐更法) : 경수소(警守所)를 설치하거나 순찰로를 정하여 야경(夜警)하는 법.

大行大王大妃誌文曰:

嗚呼! 惟我大行大王大妃, 以太任之聖, 當元祐之時, 功存宗祏, 澤洽寰瀛, 轉綴旒而措磐泰, 就聞長樂, 富有日月, 壽考德業之盛, 殆簡策所未有。 而寔由我殿下至誠準海, 天順人信, 慈德愈隆而聖孝彌光, 字內含生, 永蘄萬億年無疆矣。 庚寅春, 后有疾弗豫, 翼日乃瘳, 越夏四月, 惟幾彌留。 上侍疾焦遑, 命直宿嘗藥諸臣, 醫技罔效。 則又禱于廟社山川, 竟以十七日丙辰未時, 昇遐于景福宮興福殿。 春秋八十有三。 嗚呼! 慟矣。 豈所謂神者誠難明, 而理者不可推者歟? 我殿下攀號靡逮, 爰命群臣, 攷古諡法。 民無能名曰‘神’, 大慮克就曰‘貞’, 謹上尊號曰‘神貞’, 徽號曰‘景勳哲範’, 殿號曰‘孝慕’, 卜山陵之吉于綏寢同原, 以是年八月三十日丁卯, 祔奉于右。上命臣以幽宮之誌, 臣昏耗不敢當, 疏辭不獲。 乃拜手稽首而撰次焉。 謹按后姓趙氏。 高麗開國功臣門下侍中諱, 始籍豐壤。 入本朝, 吏曹參判漢平君益貞, 卒於戊午士禍, 贈吏曹判書諡恭肅。 五傳而漢城左尹豐安君, 佐仁廟策靖社勳, 贈左參贊諡景穆。 三傳而卽吏曹判書贈領議政景獻公尙絅, 英廟名臣。 秉執辛、壬大義, 今上特命世祀, 於后爲高祖也。 曾祖諱, 吏曹判書贈左贊成諡文翼。 祖諱鎭寬, 有至行, 吏曹判書諡孝文。 考諱萬永, 嘗官吏曹判書, 及后正位大妃, 封領敦寧府事豐恩府院君, 後贈領議政諡忠敬, 配食純祖廟庭。 母贈德安府夫人 恩津 宋氏。 牧使贈贊成時淵女, 贊善文元公 明欽孫, 判書文正公 浚吉之後也。后以純祖戊辰十二月初六日丁酉, 誕降于荳浦 雙湖亭私第。 先是曾祖母洪夫人, 夢神人有告以虎異者, 及誕果驗, 祥光繞室, 朗若天曙, 家人異之。 后孝友根天, 每飮食, 未嘗先父母, 處昆弟, 辭其逸而躬其勞。 十二歲己卯膺德選, 冬十月冊封王世子嬪, 仍行嘉禮。 事孝懿后 純祖大王 純元后, 婉媮備至, 嘗洞屬如也, 兩殿稱之曰: ‘孝婦’。丁亥, 翼宗代聽萬幾, 后小心儆畏, 夙夜靡怠, 其所以內資聖考寬仁恭儉之治者至矣。 是歲秋七月, 丕膺天慶, 憲宗誕生, 一堂三聖, 永綏弟茀祿。 國運中否, 庚寅五月, 翼考薨逝, 后却膳哀號。 左右不敢仰視。 甲午十一月, 純祖登遐, 后哭擗踰禮。 憲宗嗣服, 追尊翼考爲王, 尊后爲王大妃, 丁酉憂吉, 上尊號曰‘孝裕’, 戊申加上曰‘獻聖’。 己酉六月, 憲宗上賓, 哲宗辛亥憂吉, 上尊號曰‘宣敬’, 癸丑加上曰‘正仁’, 丁巳純元后禮陟, 進號大王大妃, 己未加上曰‘慈惠’, 癸亥加上曰‘弘德’。 哲宗賓天, 神人靡託, 宗國之危在呼吸矣。 后克定大策, 奉迎今上于潛邸, 入承翼宗大統。 於是群臣引國朝故事, 請后垂簾聽政, 后念沖王宅宗, 時事艱虞, 乃勉而許之。 乙丑重建正衙, 丙寅二月, 命撤簾。 是年憂吉, 上尊號曰‘純化’。 加上曰‘文光’。 丁卯、戊辰、己巳、癸酉, 加上曰‘元成肅烈明粹協天’, 乙亥、丁丑、戊寅、己卯, 加上曰‘隆穆壽寧禧康顯定’, 癸未、丙戌、丁亥, 加上曰‘徽安欽倫洪慶’, 戊子連上曰‘泰運昌福’, 庚寅加上曰‘熙祥’。后於垂簾之初, 敎于上曰: "今於罔極之中, 五百年宗社, 幸有託付。 主上卽我仁祖血孫, 英宗旁支。 繼祖宗之統, 行祖宗之事, 則當法祖宗。 而敬天愛民卽祖宗傳授之心法, 謹愼節儉, 敬天愛民之本也。" 又曰: "雖沖年哀遑之時, 頻接臣僚, 講論經史, 明習治法政謨, 上念祖宗之重, 下副民庶之望。 人主雖尊, 本無輕視朝臣之法, 況大臣奉祖宗之法輔導者, 亦不出敬天愛民之道, 必須禮待服膺。" 禮臣以太廟祝式, 請議大臣, 后諭中外曰: "定策傳敎中大統云者, 大倫之謂也。 若論傳國之統, 則之統, 傳至于大行大王而主上承之, 豈有二統之疑哉? 其於翼宗稱‘皇考’, 於憲宗稱‘皇兄’, 於大行大王稱‘皇叔考’、‘孝從子’。" 嘗於上之燕侍, 敎曰: "今之赤子卽之赤子也, 人主當以赤子之心爲心, 願主上以是爲心。" 又曰: "斯民, 主上之赤子也。 減賦稅、除徭役、去奢侈, 推以及之, 民自阜矣, 經用有裕矣。" 又曰: "竊盜之人, 亦我赤子也, 彼胡爲此? 德不下究而然乎? 牧民不得其人而然乎? 其必終歲勞苦, 一絲半粒, 傾入於三稅與貪吏之橐, 故哀彼赤子, 飢寒到骨, 有此匍匐入井者。 然反而求之, 咎實在予。 予之申申於主上者, 皆民國切至之事, 銘念焉。 之土階茅茨, 之菲飮食卑宮室, 爲萬古聖君也。 叔季之世, 奢侈漸盛, 珍其食華其衣, 以其有限, 用之無節, 有欠古聖節用愛民之訓。 每念及此, 不甘錦玉。" 諭諸臣曰: "保護聖躬乃慈母之責, 輔導聖學, 惟卿等是望。 置勸講官, 日開經筵, 山林儒賢, 屢勤延召, 以至一政一事號令, 粹然無不出於大公至正, 而尤惓惓於恤民安民。" 誕辰進上物種及垂簾時應供有害於民者, 皆置之。 各貢契舊遺在, 實爲積欠, 而進排物種, 依例受價。 后深軫此弊, 敎曰: "國家設置各貢, 專爲都民聊活, 而經用匱罄, 不可無更張, 特蠲三分一。" 及有司持難, 敎曰: "民裕則國富, 民瘠則國危。 今沖王在上, 何可惜此爲也? 各貢遺在, 一竝蠲蕩, 以示曠絶之恩。 自今國計臝絀, 一委於中外有司之臣,"米爲三十九萬九千二百石零, 錢爲四萬九百兩零也。 關西添餉穀輕殖錢, 積歲拕欠, 命道臣行査, 敎曰: "徵督巨逋, 害及殘民, 易致蕩析, 宜以懷保爲先。 亦蠲之。" 各宮房私遣導掌, 都捧結剩於海西各邑, 橫挐虐斂, 民不堪其苦。 內寺創設無名稅於幸州, 侵漁百端, 舟楫不通, 弊皆到極。 敎曰: "非但宮房內司, 至於卿宰家, 入於籍賣、開洑、築堰、採礦、設庖, 無弊不有, 哀我斯民, 何以聊生?" 命廟堂關諭各道, 一一竝革逐宮差。 又申禁執貨榷利者, 罷都民坐更法, 市廛洊罹回祿, 特下錢五萬兩、木五十同, 俾結構之, 仍蠲各衙門公貨之貸市者, 凡爲民紓力, 無所惜也。 嶺南湖南水災, 特遣邇臣之宰本道者, 發綸音慰諭災民, 撫恤加於恒典。 以耽羅處絶海, 憂軫特異, 揖帑藏賙窮濟乏, 加該牧瓜, 俾除迎送之弊。 矜愼刑獄, 敎曰: "天潢屬籍, 爲凶徒所援, 往往有不幸事, 幽鬱莫伸, 䵝昧不明者, 未必無之。 其關義理判忠逆者外, 竝爲疏蕩, 豈非導和祈命之本乎?" 飭大臣禁堂, 會坐審覈。 又命審理京外獄案, 引《呂刑》‘哀敬’之文, 申諭有司, 使之斷制, 好生之德, 洽于民心, 然有罪者一於法, 不自爲輕重也。 前承旨南鍾三等, 包藏禍心, 潛通異域, 傳習邪學, 熾若燎原。 后大憂之, 亟命鞫訊, 竝施誅鋤。 飭中外, 蒐捕其徒, 區宇廓靑, 乃后衛正闢異之大政也。 飭群臣, 則以尙名節礪廉恥爲本, 而碩儒藎臣服勤王室者, 或貤爵而賜諡, 或致侑而錄後; 用人材, 則振拔淹滯, 無間疎遠; 懲貪墨, 則嚴雷霆之威而譴竄之; 勸循良, 則寵璽書之典而褒異之。 引見守令初仕人, 申複面諭曰: "爾等授職, 非爲榮其身。 善斯賞, 不善斯罰, 斷不容貸。" 開言路, 則使之條陳時務曰: "上下交勉, 隨事警省, 豈可以常談而忽之?" 雖或不槪於后意, 旋卽轉圜如流。 嚴科試, 則擇差主司, 精白考藝。 上欲后一時供歡, 有趙氏解額人, 特付司馬榜末之命, 后曰: "何可與璿派敦宗, 比以同之?" 謙挹屢敎, 竟寢上旨。 此可見平日濯龍之戒, 有以絶蹊逕恩私, 而聖上順志之孝, 揚慈德於光大也。 及撤簾也, 召大臣宰執, 敎曰: "予未亡人, 當此至重至大之擔負, 居然爲四年之久矣。 從古后妃之臨聽朝政, 乃有國之大不幸。 顧予涼德, 何敢彷彿於古先哲后? 而當天地罔極之會, 諸臣以列朝古事, 涕泣而請之, 予亦以宗社大本, 黽勉而許之。 今則主上春秋, 旣鼎盛矣, 聖質天縱, 睿知日就, 機務之明習, 學問之篤實, 有可以管庶政親萬機。 以予所處, 一向蹲仍, 甚非所以尊國體而正大經。 自今日大小公事, 一聽主上總斷, 而敬天法祖, 勤學愛民, 禮遇大臣, 全保世臣, 守我先王家法, 主上其勉之。 同寅協恭, 遵迪匡輔, 鞏固我無疆歷服, 深有望於大臣諸臣。" 遂立命撤簾, 嗚呼! 其盛矣大矣。 昔人稱宣仁高太后曰: 女中。 聖則聖矣, 而至若我聖母之勇撤簾儀, 以正其終, 又非宣仁之所能及也。 后性端莊貞一, 克仁克敬, 平生無疾言遽色。 潛心《小學》, 有裨於內行者弘多, 喜覽歷代治亂得失, 三復存戒。 純元后寢患, 宵衣侍湯, 未嘗暫離, 奉先之誠, 靡不用極。 壬申太祖元宗御眞移摹時, 幀幮之用, 皆內下, 眞殿祭品及帳褥修改, 必盛服親檢。 尤謹於送終之節, 凡內外殿宮喪斂襚之備, 躬自檢攝, 盡誠盡禮。 綏嬪喪時, 有腫候, 亦躬攝。 甲午大喪及仁陵遷奉庀具, 純元后必詢后而處之。 遇忌辰, 必齊遬, 雖邵齡, 未嘗或弛。 有竊祭用銀器者事覺, 宮中悸慄, 后慮無辜橫罹, 請上勿問, 乃依樣改造。 仁愛之及人, 多類此。 后嘗憂綏陵宅兆不叶。 憲宗丙午、哲宗乙卯, 灤遷之禮, 皆奉有后旨也。 尊禮主上, 每進見, 雖大耋違豫時, 命女侍, 必扶而起坐。 以至飮食起居之節, 憧憧如不及, 二十八年如一日, 至勞瘁而不自恤。 友明溫福溫德溫三公主, 甚篤。 及沒, 撫視其子若孫, 有加焉。 對戚畹, 必正色臨之, 見有侈靡, 引古曉之, 俾自省而自悔焉。 后自奉儉約, 筆硯之外, 泊然無物。 衣裙多澣濯, 非翟褕, 未嘗御錦綺。 處盛逾謙, 每揚號進冊, 或勉而受之, 猶惕若不居。 至其豐豫之擧, 則后曰: "國儲不(瞻)〔贍〕 , 民力又困, 奚用飾慶爲哉?" 竟不許。 自撤簾帷, 收歛光化, 若上載之無聲臭。 壬午甲申之變, 回危奠安, 賴后威靈。 而惠鮮懷保之命, 若恫在已。 由是, 我聖上克體遺意, 終事凡具, 不煩民市, 深山窮谷, 莫不悲慕。 曰: "聖母之顧我復我, 今焉已矣。 吾其奈何?" 嗚呼! 慟矣。 臣竊伏聞《關睢》, 后妃之德也, 其詩雖若只頌后妃, 而不本於文王則大失詩旨, 朱夫子蓋嘗論之矣。 今我聖母, 身有聖德, 視履元吉, 豈非我聖考正身齊家之所推歟? 世無象成歌詩者, 不能使人愀然如復見盛德之容。 然以我家所覩記, 模象而蠡管之, 俔天之德, 若貞熹, 成之者遠, 若貞純, 思齊之音, 若純元。 而惟其中正博大之徽規懿則, 日星乎中天, 爲聖主開泰平萬世, 蓋我聖母慈覆之天, 於是乎益有光焉。 《易》曰: "至柔而剛, 至靜而方。" 傳曰: "本諸身徵諸庶民。" 又曰: "大德, 必得其祿, 必得其名, 必得其壽。" 后皆有焉, 於乎! 休哉。 誕一男, 憲宗大王, 妃孝顯王后金氏, 領敦寧府事永興府院君 祖根女。 繼妃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莊昭端禧粹顯王大妃殿下洪氏, 領敦寧府事益豐府院君 在龍女。 今我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主上殿下, 以興宣大院君第二子, 入爲翼宗大王子。 妃孝慈元聖正化中宮殿下閔氏, 僉正贈領議政驪城府院君 致祿女, 誕王世子邸下。 以左贊成贈領議政閔台鎬女爲嬪。 嗚呼! 后之德之功, 彤管之紀, 不能殫述, 顧臣膚淺, 何敢繪畫萬一? 而伏惟我殿下嚴廬皇瞿, 孝思根天, 書下行錄, 多述未備, 闇然之章, 實有外廷所未能盡知者。 俯仰今昔, 不勝愴涕, 謹撮大槪, 自附簡嚴之體, 旁採筵綸敎令之布方冊塗耳目者輯之。 而遣辭之際, 華而不實, 則不惟後世之無以徵信, 竊恐有違於平日謙光之慈德, 兢兢焉忍不敢溢, 千歲在後, 可以質之矣。

【奉朝賀金尙鉉製。 】


  • 【원본】 31책 27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62면
  • 【분류】
    재정-역(役) /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사상-유학(儒學) / 재정-전세(田稅) / 사법-치안(治安) / 왕실-의식(儀式) / 구휼(救恤) / 금융-화폐(貨幣)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금화(禁火) / 상업-시장(市場) / 사법-재판(裁判) / 역사-고사(故事) / 사상-서학(西學) / 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 / 윤리-강상(綱常) / 재정-국용(國用) / 왕실-경연(經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