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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17권, 고종 17년 12월 28일 신유 3번째기사 1880년 조선 개국(開國) 489년

이찬식이 북방 환곡의 과중함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전적(典籍) 이찬식(李燦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북방은 바로 주(周) 나라빈기(豳岐)한(漢) 나라풍패(豐沛)처럼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왕업(王業)을 일으킨 곳입니다. 이에 나라를 세우고부터 열성조(列聖朝)에 이르기까지 앞날을 대비한 제도를 만들고 백성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큰 은혜가 다른 도(道)에 비해 갑절이나 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화살을 차고 말을 달리는 용사들은 모두 끓는 물이나 불 속에라도 뛰어들 만한 용맹이 있으며 경학(經學)에 힘쓴 지식계층들은 모두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경하는 의리가 있으니, 이는 진실로 나라에서 백성들을 보살피고 길러주어 어려울 때 서로 돕는 덕화가 미친 결과입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기근과 호표(虎豹) 같은 산짐승의 재변으로 인하여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었습니다. 남도(南道)의 경우는 양서(兩西)관동(關東) 지방으로 떠나가고 북쪽의 경우는 국경을 넘어 죄를 범하는 자까지 있으니 이것이 어찌된 까닭이겠습니까? 민호(民戶)는 전에 비해 완전히 줄어들었는데도 환곡(還穀)은 전에 비해 더욱 불어나 한 해 내내 애써 농사지어도 조세로 바치고 나면 그만입니다. 가을에 현창(縣倉)에 바치는 것은 알곡이었는데 봄이 되어 환곡을 받은 것은 쭉정이뿐이니, 이것이 참새나 쥐가 축낸 것이겠습니까? 기러기나 따오기가 채간 것이겠습니까?

신은 실로 알 수 없습니다만 육진(六鎭)으로 말하면, 접때 안무사(按撫使) 김유연(金有淵)이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본전(本錢)은 그대로 두고 모조(耗條)만 취해서 편의를 도모하였으므로 백성들의 부담이 조금 줄어들었고 아전들의 농간이 행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온 도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는 또한 육진의 전례에 따라 본전은 그대로 두고 모조만 취하는 것이 바로 북쪽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또 관방(關防)의 이해(利害)로 말하면 철령(鐵嶺)안변(安邊)의 초입에 끼어 있어서 육로의 요충지가 되기 때문에 남북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합니다. 성진(城津)길주(吉州)의 바다 어귀에 위치하여 수로의 요충지가 되기 때문에 사방의 선박들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합니다. 철령은 한 사람이 관문(關文)을 지키면 만 명이 뚫을 수 없는 지역이므로 진장(鎭將)을 두어서 방어하고 기찰하는 방도를 견고히 해야 하고, 성진은 바로 산을 등지고 바다를 면해 있어 천연요새의 형세를 이루었으니 군부(郡府)로 승격시켜 변연(邊沿)을 방비하는 계책을 중히 해야 합니다. 지략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 합사(合辭)하여 모두 옳다고 하니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재결(裁決)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은 성진의 폐단이 일어나는 근원에 대하여 대략 진달하겠습니다. 길주목(吉州牧)에서 진(鎭)까지의 거리는 90리로, 평지에 군영을 설치하였다가 갑자기 바다에서 변고가 있게 되면 땅도 없고 백성도 없는 진장이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니, 어느 겨를에 절제(節制)를 받아서 위급한 상황에 대응하겠습니까? 이것이 몹시 우려되는 점입니다.

진(鎭)의 백성들에게는 또 뼈에 사무치는 폐단이 있습니다. 주(州)와 진에서 부역하며 명목 없는 세(稅)와 전례도 없는 부역이 해마다 더해가고 달마다 증가되어, 몇 년 못 가서 성진 한 지역은 백성이 하나도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어찌 이 같은 국방의 요충지를 버려두어 텅 비게 한단 말입니까?

대체로 나라에 관방이 있는 것은 장차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평상시 이해에 무관한 널찍하게 비어 있는 곳에 오히려 이처럼 관문을 설치하여 방어하는데, 하물며 온 도의 요충지이고 큰 바다의 중심에 해당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성진은 뒤쪽으로 세 고개와 아홉 구비의 험고함을 등지고 있으며 앞쪽으로는 망망한 대해를 대하고 있으니, 이 요충지에 의거해서 군부를 설치하면 한 도 안의 산과 바다의 요충지로서 이보다 나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만력(萬曆) 갑인년(1614)에 관찰사(觀察使) 최관(崔瓘)이 건의하여 본진(本鎭)에 방영(防營)을 설치하였는데 그 후 5년 만에 폐지되었습니다. 숙종(肅宗) 신사년(1701)에 와서 또 도신의 계청(啓請)으로 인하여 다시 방영을 설치하였다가 갑오년(1714)에 이르러 길주로 군영을 옮겼는데, 당시에 묘당에서 따져보아 응당 살펴볼 만한 이해(利害)가 있어서 한 것입니다.

방영을 옮겨 설치하는 문제는 지금 갑자기 의논해서는 안 되지만, 본진의 경계를 나누어 읍으로 승격시키고 수령을 두는 것은 나름대로 방도가 있습니다. 길주의 9사(社) 마을 안에 서이사(西二社), 서초사(西初社), 다초사(多初社)가 진에서 가장 가까우니, 그 3사를 나누어 붙이고 또 단천(端川)이하사(利下社)를 본진에 붙이면 본진의 지방은 합해서 4사가 되고 전결(田結)은 1,700여 결이며 환호(還戶)는 3,200여 호이니, 읍이 비록 작더라도 변경은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향교(鄕校)와 객사(客舍)를 설치하는 등의 일은 백성들이 자원하여 기꺼이 부역(賦役)을 하여 공화(公貨)를 쓰지 않고도 빠른 시일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즉시 철령에 진을 설치하여 산도적을 방비하게 하고 성진을 읍으로 승격시켜서 해구(海寇)를 방어하게 하며, 환곡의 수봉(收捧)을 보류해서 백성들을 쉬게 하여 국경을 넘어간 자들이 스스로 돌아오게 한다면 관북(關北) 온 도의 억조창생이 죽어가는 속에서 구제될 것입니다.

덕정(德政)이 역마(驛馬)보다 빨리 퍼지고 양춘(陽春)이 추운 골짜기에 되돌아오면, 끓는 물이나 불 속에라도 뛰어들 만한 용기 있는 자들은 그 용기가 스스로 배가될 것이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경하는 선비들은 그 의리가 더욱 진작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억만년토록 무궁한 복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조금 굽어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 【원본】 21책 17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30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구휼(救恤) / 윤리-강상(綱常) / 향촌-취락(聚落) / 재정-역(役) / 교통-육운(陸運)

典籍李燦植疏。略:

北方卽我家岐周、豐沛也。 粤自立國以來, 式至列朝, 經遠之制置、字恤之洪造, 比他省, 倍有加焉。 故帶箭靺韋者, 皆有赴湯蹈火之勇, 劬經衿紳者, 皆有忠君悌長之義, 寔賴國家休養生息呴濡德化之所及。 而挽近以來, 饑饉虎豹之災, 十室九空。 南道則轉而之兩西關東, 深北則至有越境犯科者, 此曷故焉? 民戶則比前全減, 而糶糴比前滋夥, 終歲力作, 輸租而止。 秋納縣倉, 頗有實粒, 及春分糶, 只是空殼。 此乃雀鼠之壯耗耶? 雁鶩之舞弄耶? 臣實不知。 而至於六鎭, 則曩因安撫使臣金有淵所達, 臥本取耗, 以圖便宜, 民肩少息, 吏奸莫售。 目下一省救瘼之道, 亦依六鎭例, 臥本取耗, 乃是北民之大惠也。 且以關防利害言之, 鐵嶺介於安邊初境, 爲陸路吭扼, 故南北之人, 必由於此。 城津處於吉州海口, 爲水路要衝, 故四方之船, 必過乎此。 鐵嶺是‘一夫當關, 萬夫莫開’之地, 宜置鎭將, 以壯捍禦譏詗之方; 城津乃‘背山面海, 天設金湯’之勢, 宜陞郡府, 以重邊沿保障之略。 智者之見, 合辭皆是, 伏惟聖裁之如何? 臣請以城津弊源略陳之。 吉牧距鎭九十里, 平地設營, 猝有海警, 無土無民之鎭將, 措手不得, 何暇受其節制而應其緩急乎? 是其可憂之甚者。 而鎭民又有切骨之瘼者, 役於州, 役於鎭, 無名之稅、無例之役, 歲加月增。 不幾年所, 城津一域, 無人乃已, 豈以如彼保障重地棄而空虛乎? 大抵國之有關防, 將以備不虞也。 平常閒曠之地, 無關於利害, 猶此設關而防禦, 況全省之咽喉、大海之腹心乎? 城津背負三嶺九阨之險固, 前對滄波萬頃之漭瀁。 據此要衝而設置郡府, 則一省中山海要衝, 莫過於此。 是故萬曆甲寅, 觀察使臣崔瓘建白, 設防營於本鎭, 其後五年而廢。 至肅廟辛巳, 又因道臣啓請, 復設防營。 逮甲午, 移營吉州。 當時廟筭, 應有利害之可審而然也。 防營之移設, 今不可遽議, 而但以本鎭分界陞邑, 置以守令, 則自有道理。 吉州九社之內, 西二西初多初三社, 最近於鎭矣。 分其三社付之, 且以端川利下社付本鎭, 則本鎭地方合爲四社。 田結一千七百餘結, 還戶三千二百餘戶, 邑雖少, 邊境增固。 而凡設置校宮、客舍等節, 民願樂赴, 不費公貨, 不日可成。 臣豈敢一毫誣罔也? 卽使鐵嶺設鎭而備山盜, 城津陞邑而防海寇, 臥還息民, 犯越自返, 則關北全省之億萬生靈, 拯濟於魚喁之中矣。 德政速於置郵, 陽春回於寒谷, 赴湯蹈火之人, 其勇自倍, 忠君悌長之士, 其義益勵。 我東方億萬年無疆之休, 亶在於斯。 伏願殿下少垂察焉。

批曰: "疏辭, 令廟堂稟處。"


  • 【원본】 21책 17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30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구휼(救恤) / 윤리-강상(綱常) / 향촌-취락(聚落) / 재정-역(役) / 교통-육운(陸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