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평 홍찬섭 등이 서자에게 벼슬길을 열어줄 것을 청하다
전 지평(持平) 홍찬섭(洪贊燮) 등이 연명(聯名)으로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다같이 훌륭한 시대의 사람들로서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의 사람입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이 처음으로 왕조를 세우고 각종 제도와 법을 만들었는데 또한 서자(庶子)에 대한 구별이 없었습니다. 태종(太宗) 13년에 이르러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언제인가 정도전(鄭道傳)의 남자 종에게 모욕을 당하고서 그 원한을 보복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바로 사비(私婢)였습니다. 정도전이 죄를 지어 죽자 품었던 감정을 풀기 위하여 서자는 좋은 벼슬에 등용할 수 없다는 의논을 제창하였으나 전부 벼슬길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성종(成宗) 때에 와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반포할 때에도 서자의 자손은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증손자는 역시 벼슬길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경국대전》에 대한 주해(註解)를 달 때 강희맹(姜希孟)이 ‘자자손손’이라는 말을 첨가하여 이때부터 영원히 벼슬길이 막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사한 사람이 유감을 품고 사사로움을 부린 계책이 나와 나라의 법전(法典)에 실려 훌륭한 시대의 못쓸 물건이 되어 의지할 곳이 없는 무리처럼 될 줄 누가 생각인들 했겠습니까?
그러나 대대로 있지 아니한 은택을 지나치게 입어 여러 선대 임금들의 명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선조(宣祖)께서는, ‘미자(微子)는 상왕(商王)의 서자였는데 공자(孔子)가 어진 사람이라고 칭찬하였고, 자사(子思)는 공자의 서손이었지만 도통(道統)을 스스로 전하였다. 해바라기가 해를 향할 때 곁가지라고 해서 가리지 않듯이 신하로서 충성을 원하는 사람이 어찌 꼭 본처의 아들뿐이겠는가?’고 하셨습니다. 현종(顯宗)께서는, ‘서얼을 금고한 옛날 제도가 편협한 것이다.’는 하교가 있었고, 숙종(肅宗)께서는, ‘가문을 보고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폐단이다.’라는 하교하고서 반드시 바로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조(英祖)는 먼저 임금들의 유언대로 문관(文官)에 대해서는 지평과 정언에, 무관(武官)에 대해서는 선전관(宣傳官)에 임명하라고 여러 번 엄한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은혜로운 명령을 내리기를, ‘임금이 명을 내렸으면 설사 내가 처음 실시하는 정사라고 하더라도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해와 달은 거칠거나 정밀한 것을 가리지 않고 비쳐주는데,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면 어찌 거기에 차이를 두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기를, ‘이후부터는 절대로 구애되지 말고 나라를 세우던 초기의 기풍을 살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조(正祖)가 말하기를, ‘몇 해 전에 대각의 길을 열어준 것은 사실 먼저 임금의 고심에서 나온 것인데 유명무실하다. 아! 보통사람이 원한을 품어도 화기를 손상시키는데, 더구나 수많은 서자는 그 숫자가 수억뿐만이 아닌데 더 말할 게 있겠는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라에 쓰임이 될 만한 대상이 왜 없겠는가? 그런데 가난에 쪼들려 제집에서 모두 죽고 만다. 아! 저 서자들도 나의 신하들인데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하고 역시 자기의 포부(抱負)를 펴지 못하게 하니, 이것도 나의 잘못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기를, ‘참하(參下)에 순서대로 승급시키는 데서는 원래 구별이 없었는데 어째서 참상(參上)의 자리에 통융(通融)하여 비의(備擬)할 수 없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기를, ‘같은 당파의 사람들로 비의하는 것은 도리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이 버릇을 고치지 않고서는 하루에 열백 가지 벼슬에 임명해도 실속 없기는 매한가지다. 이에 대하여 엄하게 신칙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기를, ‘삼조(三曹)의 낭청과 판관(判官)의 빈 자리에 의망(擬望)하여 들여 배망(排望)하는 즈음에는 혹시라도 적서를 따지지 말고 다같이 배의(排疑)하도록 모두 신칙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기를, ‘전적으로 남의 벼슬길을 막아버리는 데 매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내가 들었는데, 반드시 재앙을 받을 것이다.’ 하시고, 심지어 소통(疏通)으로써 친히 시제(試題)를 내려 선비를 뽑고, 빈대(賓對)할 때마다 신하들에게 물어보기까지 하셨습니다.
순종(純宗) 계미년(1823)에 신들이 억울하다고 함께 호소한 데 대하여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불쌍하다는 것을 나도 깊이 알고 있다. 상소한 내용에 대하여 묘당(廟堂)에서 좋은 편에 따라 품처(稟處)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들이 권당(捲堂)함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서자들이 원한을 하소연한 것은 선대 임금들 시기에도 항상 있은 일이지만 그때 권당하여 말썽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래 옛날 유생들이 지금 유생보다 못해서 그랬겠는가? 비록 나의 소회(所懷)로 말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더없이 원통한 것이라고 말하였고, 또한 하늘의 이치나 사람의 인정에 떳떳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유생들도 이를 알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를 가장 명백하게 밝히는 성균관에 있으면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고 말해야 하며, 또한 하늘과 사람의 이치로 돌아가자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이 모순 되는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격분만 토하고 있어야 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익종(翼宗)이 정사를 대신할 때 신칙하는 명령을 내리기를, ‘서류 허통(庶類許通)은 내가 섭정하면서 만물을 일일이 이루어주려는 성대한 덕이자 큰 은혜이다. 그런데 허통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아직도 보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의 명령을 펴나가는 도리이며, 또 믿음을 보여주는 정이겠는가? 이번 대정(大政)부터 시작하여 지방에서는 수령(守令)과 중앙에서는 통청(通淸)과 낭서(郎署)에 의망하여 들여옴으로써 억울하다는 한탄이 없게 하라고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명을 분부하라.’고 하셨으니, 임금이 의도한 바를 우러러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하와 백성들에게 복이 없어 갑자기 경인년(1830)의 지극한 슬픔을 당하여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 슬픈 생각만 간절합니다.
헌종(憲宗) 무신년(1848)의 비답에서는, ‘이것이 어찌 그저 너희들의 억울함 일뿐이겠는가? 사실은 임금이 현명한 사람을 구분 없이 쓰는 의리에 결함이 있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여러 선대 임금들의 전후의 성스러운 하유가 또 이렇게까지 진지한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철종(哲宗)이 이르기를, ‘이미 여러 선대 임금들의 수교(受敎)가 있는데 아래에서 거행하지 못하였다. 오늘 대신들의 주달이 또 이러한 만큼 모든 벼슬자리에 각별히 등용함으로써 이전처럼 억울하다는 한탄이 없게 하라. 문관(文官)으로는 승문원(承文院)에, 무관(武官)으로는 선전관(宣傳官)에 일체 허통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들의 감격이 온몸에 사무쳐 모두 잠시라도 죽지 않기를 원하였는데 너무도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부모를 잃은 듯한 슬픔이 신들의 몸에 두루 있었습니다.
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가 처음으로 서자들을 발탁하여 등용할 의논을 내놓았다가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무리에게 저지를 당하였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계속하여 서자들을 소통시키는 논의를 제창하였다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저지당하였습니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법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서자들을 금고(禁錮)시켜 벼슬길을 막아버린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이 상소하기를, ‘서자들을 금고시킨 것은 온 천하에서 있지 않은 일입니다.’라고 하였고,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은 상소하기를, ‘나라를 도모하는 대신들은 다만 제 자손들을 위한 계책만을 세우지 만대를 두고 인재를 잃는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상소하기를, ‘서자들의 벼슬길을 막은 것은 원래 조종(朝宗)들이 정한 제도가 아닙니다. 왕조를 세운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의 어머니는 사실 시비였으나 그는 대제학(大提學)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인재가 드물어 늘 부족한 것을 근심하는 판에 저 서자들 가운데 쓸만한 사람을 버리고 있으니 아깝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는 아뢰기를, ‘옛 기록을 상고하여 보니 서자도 등용하였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고 상신(故相臣) 이항복(李恒福), 이원익(李元翼), 유성룡(柳成龍), 윤방(尹昉), 오윤겸(吳允謙), 이경여(李敬輿), 김상용(金尙容),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심지원(沈之源), 김수항(金壽恒), 최석정(崔錫鼎), 조현명(趙顯命), 김상복(金相福), 김상철(金尙喆), 이사관(李思觀), 및 여러 재상들인 원경하(元景夏), 이주진(李周鎭), 이무(李袤), 이수득(李秀得), 김남중(金南重), 이성신(李省身), 이경용(李景容), 이동직(李東稷)이 상소와 계사로써 간절한 뜻을 진술하였습니다. 「비록 재간과 덕은 있지만 거의 다 벼슬길이 막혀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고 기가 죽어 마치 큰 죄를 지은 것 같다.」고 하였고, 「하늘이 인재를 낳을 때 원래 본 처와 첩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서자를 미천하다고 박대하는 것은 임금이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데서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원칙에 아주 어긋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서자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시켜주는 뜻을 손상시키는 것이다.」고 하였고, 또 「《경국대전》에 주해를 달 때 자자손손이라는 말을 첨가하여 마침내 금고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하로서 임금을 가까이하지 못하면 임금과 신하간의 의리에 틈이 생기고 아들로서 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면 아버지와 아들간의 친분이 삐뚤어질 것이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버리고 길거리에서 만난 같은 성을 가진 사람에게 대를 잇게 하면 사람의 도리를 훼손하고 하늘의 이치를 극도로 배반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법을 세워 한계를 정하여 한 나라의 인재를 금고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종종 걸출(傑出)한 인재가 있는데 이대순(李大純), 박지화(朴枝華), 어숙권(魚叔權), 어무적(魚無迹), 조신(曺伸), 이달(李達), 정화(鄭和), 임기(林芑), 양대박(梁大樸), 경우(慶遇), 권응인(權應仁), 이중호(李仲虎), 김근공(金謹恭), 송익필(宋翼弼), 송한필(宋翰弼), 이전인(李全仁), 신희계(辛喜季), 유우(柳藕), 유조인(柳祖訒), 최명룡(崔命龍), 유식(柳栻), 양사언(楊士彦), 양만고(楊萬古), 우경석(禹敬錫), 유시번(柳時蕃), 유흥룡(柳興龍), 송상민(宋尙敏), 송병조(宋炳朝), 심일운(沈日運), 이지백(李知白), 신무(愼懋), 신유한(申維翰) 같은 사람들은 혹은 도학(道學)으로, 혹은 의로운 행실로 혹은 문장으로, 혹은 지모(智謀)로 혹은 재능으로써 이름을 날렸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무관(武官)으로서 일컬을 만한 사람은 임진년(1598) 난리 때의 이산겸(李山謙), 홍계남(洪季男), 유극량(劉克良) 같은 사람들인데 의군(義軍)을 규합하여 왜병(倭兵)을 팔도(八道)에서 패망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자년(1636)의 위급하던 날에 성 밑에 나아가 싸운 사람은 유독 권정길(權井吉) 한 사람뿐이며, 무신년 싸움에서 패할 때 막부(幕府)에서 절개(節槪)를 지켜 죽은 사람은 오직 홍림(洪霖)뿐이었습니다. 대체로 이번에 말하여 올린 것은 많은 가운데서 그저 한두 가지만 들었을 뿐입니다.
신들은 원래 죄가 없지만 대대로 태어나기만 하면 영원히 버림받은 물건이 되었기에 이토록 억울해 하는 것이니 살아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어찌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겠습니까? 만약 아들이 있는 것을 없다고 하면서 공공연히 예사(禮斜)를 내준 그 아들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자신을 있다고 하면 그것은 아버지가 임금을 속인 것을 밝히는 것이고, 자신을 없다고 하면 처신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정을 천지의 부모 앞에 하소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온 나라에 공공연히 퍼져 마침내 풍속으로 되어버렸습니다. 한 번 변화시키는 데 저희들이 애달파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논할 것이 못 되지만, 풍속이 변해버리는 데 대해서 옛 법을 강조하는 것은 교화(敎化)의 이치(理致)에 맞는 일입니다. 신들은 가문(家門)에서 버림 받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벼슬길을 열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가문의 버림을 받는 것은 벼슬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니, 벼슬길이 열리면 자연히 가문의 버림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괴롭고 말하자니 슬픕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선대 임금들 시기의 옛 법을 갑자기 고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말이 참으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법을 만들어 인재 등용을 막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 애초에 성인들이 만든 제도가 아니며 또한 대대로 내려온 법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불쌍하다는 선대 임금들의 명을 받았고 옛날의 성인들도 서자를 등용하도록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선대 임금들의 뜻을 본받기 위하여 이것을 말하여 올리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옛사람들의 이른바 ‘고쳐야 할 것을 고치는 것은 역시 계지술사(繼志述事)이다.’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여러 선대 임금들이 민망하게 여긴 것이 대단히 간절하였지만 아직도 길이 트이지 못한 것은 필경 까닭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까닭이란 것은 제 딴의 생각이며 단정하지 않은 말입니다. 어떻게 단정하지 않은 말과 제 딴의 생각으로 그 가운데 정말 그렇게 할 수 없는 근거가 있어서 짐짓하지 않는 점이 있는 것처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선대 임금이 정해 놓은 제도에 변경한 것도 많습니다. 오위(五衛)는 절제(節制)로, 공안(貢案)은 대동법(大同法)으로 변경되었는데, 어찌 유독 인재를 등용하는 데서만 옛 제도를 고칠 수 없다고 하면서 변통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둑을 쌓았던 것이 터지면 쉽게 아래로 흘러내려 마구 난탕을 치게 되고, 오랫동안 막혔던 것이 터지면 반드시 후에 많은 폐를 끼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들이 바라는 것이 얼마만한 은전입니까? 그 선배들은 원한을 품고 죽었지만 반드시 저승에서도 춤출 것이며, 그 후배들은 사람들 축에 끼어 살아가면서 또한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축복할 것이니, 이것은 백대 이상의 사람들이 받아보지 못했던 특별한 은혜를 편벽되게 받는 것으로 보답하려는 마음이 태어날 자식과 더불어 서로 시종일관할 것이니, 뒷날의 근심 같은 것은 끼칠 수 있는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명분(名分)의 파괴를 쉽게 초래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명(名)이란 정해진 지위의 명으로써 아버지가 아버지 구실을 하고 아들이 아들 구실을 하고 형이 형의 구실을 하고 동생이 동생 구실을 하는 것이 ‘명’입니다. 분(分)이란 등급을 나눈 것으로써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관계, 동생이 형에 대한 관계가 분입니다. 이를 미루어나가면 명분은 각각 정해져 있으므로 혼란이 원래 시행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신들은 재간이 보잘것없고 학식도 거칠어 아예 관원의 숫자를 채우기에도 부족하지만 간혹 식견과 재간이 경세의 계책에 참여해 들을 만한 사람도 시험해 볼 길이 없어서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한을 품은 채 초야에서 모두 죽고마니, 이것은 동시대의 선비들이 모두 이름을 지적하면서 한탄하는 바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외부로 드러나고 속에서 꿈틀거리는 허다한 사물들은 다 하늘의 이치와 인정 안에 있는 것이니, 일단 여기서 벗어나면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은 도리어 화기애애한 인정이 그들의 가문에서조차 믿음을 받아 전달되지 못하며, 순수한 하늘의 이치가 이 세상에 유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대로 태어날 때마다 명색은 사람이지만 사실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없는 어릴 때에는 보통사람이나 다름이 없다고 여기지만 갑자기 이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하루 사이에 대뜸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지극한 원한을 품으면서 대번에 하는 말이 ‘그래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무엇하러 태어났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서자는 계속 태어나기 때문에 갈수록 더욱 많아져 거의 온 나라의 절반을 넘고 있는데 모두 다 영원한 원망을 품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공정한 하늘의 이치이며, 안정된 사람의 심정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옛날의 명현(名賢)들이 말을 올릴 때마다 언제나 서자들이 화기를 손상시킨다고 하였는데, 화기를 손상시키는 것은 원래 훌륭한 세상의 일이 아니거늘 신들이 번번이 이를 초래한 원인으로 지목을 받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된 것인지 속으로 부끄럽게 여깁니다.
신들은 이미 가문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조정에까지 끼이지 못하며, 또 시골에서도 행세하지 못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도 계승하지 못합니다. 다만 같은 인간인데 집안에서 이렇게 전하여 마침내 서자의 혈통을 잇게 되었으니, 경전에서 찾아보아도 성인들의 가르침에 보이지 않는 바요, 역대에서 찾아보아도 법으로 시행되지 아니한 바입니다.
이번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문제는 벼슬하는 문제와 관계되기 때문에 은혜를 요구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사실 신들의 말이 아니라 바로 여러 이름 있는 사람들이 아뢴 의견이며, 여러 이름 있는 사람들이 아뢴 의견뿐만이 아니라 선대의 여러 임금들의 은혜로운 명령입니다. 옛날의 훌륭한 신하들이 조상 임금들의 훈계를 글로 써서 바쳐 그것이 계승되기를 기대한 일이 있었고 옛날 어진 신하들의 건의를 조목조목 진술하여 그것이 채납되기를 기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들이 감히 옛날 이름난 신하들이 당시 임금에게서 바라던 것을 왜 오늘 전하에게서 기대하지 못하겠습니까? 신들은 죽어야 할 목숨들이지만 크게 정사를 하려는 때를 당하여 아무리 미세한 곳도 밝게 비춰보시니 억울할 것이 있으면 틀림없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만약 임금의 혜택이 미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서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세상에 나서 육성(育成)되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는데 급하였고 원통을 호소하느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바라건대, 특별히 불쌍하게 여기고 빨리 처분을 내려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한 신들로 하여금 죽더라도 산 것 같은 때가 있게 하여 준다면 어찌 은혜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흡족하여 나라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마음을 품을 뿐이겠습니까? 또한 은택이 죽은 해골에까지 미침으로써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문의 내용을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 【원본】 15책 11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44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가족-가족(家族) / 신분-중인(中人)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十五日。 前持平洪贊燮等聯疏略。
臣等均是昭代之人、世族之家, 而我太祖康獻大王, 肇創大業, 昭揭典章, 亦未嘗區別庶類。 逮至太宗十三年, 右代言徐選, 嘗爲鄭道傳奴所侵辱, 思所以報其怨。 道傳之母, 卽私婢也。 故及其罪死也, 乃乘其逞憾, 倡爲庶孽勿敍顯職之議, 未嘗全然禁錮。 及成宗朝, 頒降《大典》時, 又有庶孽子孫勿許, 而曾孫亦無禁焉。 其後《大典》註解時, 姜希孟添‘子子孫孫’之語, 自此爲永世禁錮之人, 孰料憸人挾憾逞私之計出? 而載之爲國典, 仍爲聖世僇廢之物, 以若無所歸之類, 過蒙不世有之澤。 列聖朝恩綸, 炳烺如日星。 宣廟有‘微子, 商王之庶子, 而孔子稱仁; 子思, 孔子之庶孫, 而道統自傳, 葵藿向陽, 不擇旁枝, 人臣願忠, 豈必正嫡’之敎? 顯廟有舊制狹隘之敎, 肅廟有門閥用人, 爲我國痼弊之敎, 而必欲矯救。 故英廟以先朝遺意, 文而持正, 武而宣傳官, 屢下嚴敎。 繼以恩旨, 若曰: "人君造命, 雖予創行, 孰敢不從? 日月所照, 不擇精粗, 王者用人, 豈有聞於其中?" 又若曰: "此後切勿拘礙, 以存國初之風。" 正廟若曰: "年前臺閣疏通, 實出於先王苦心, 而有名無實。 噫! 匹夫含冤, 足傷太和, 況許多庶類, 其麗不啻幾億, 則其間豈無才俊之士可以爲國需用? 而槁項黃馘, 其將駢死於牖下。 嗟! 彼庶類, 亦我臣子, 使不能得其所, 亦無以展其抱, 是亦寡人之過也。" 又若曰: "參下序陞, 初無區別, 獨不可通融備擬於參上窠乎?" 又若曰: "以類備擬, 反不如不爲, 此習不革, 則日除十職百銜, 假則一而已, 以此嚴飭。" 又若曰: "三曹郞及判官, 作窠擬入, 排望之際, 毋或較量, 通同排擬事, 一體申飭。" 又若曰: "予聞專主枳塞者, 必有殃禍。 至以疏通, 親題策士, 每於賓對, 下詢諸臣。" 純廟癸未, 臣等相與呼籲, 批旨若曰: "爾等之可矜, 予亦深知之。 疏辭令廟堂從長稟處。" 伊時因泮儒捲堂, 下敎若曰: "庶類之訴冤, 卽列朝常有之事, 未聞其時有捲堂起鬧之事。 古之儒生, 豈不及今人而然乎? 雖以所懷言之, 旣曰天地間至冤之事, 又曰: ‘亦非天理人情之常’云爾, 則諸生亦知之矣。 然則在首善明倫之地, 宜曰訴冤之無怪, 亦宜以反天人之常爲言。 今乃不顧其言之矛盾, 惟事噴薄可乎?" 翼廟代理時, 下飭敎若曰: "庶類許通, 卽我大朝曲遂萬物之盛德大惠。 而許通多年, 尙無實效, 是豈對揚之道? 又豈示信之政乎? 自今大政爲始, 外之守令, 內之通淸與郞署, 擬望以入, 俾無抑鬱之歎事, 分付兩銓。" 聖意所在, 庶可仰揣。 而臣民無祿, 遽當庚寅之至痛, 遂成未卒之志, 徒切於戲之思。 憲廟戊申批旨若曰: "此豈徒爲爾等之冤鬱而已? 實有欠於王者立賢無方之義。 況有列聖朝前後聖諭, 又如是勤摰者乎?" 哲廟若曰: "旣有列聖朝受敎, 而自下不能對揚。 今大臣所奏又如是, 凡於仕宦, 各別收用, 俾無如前抑鬱之歎。 而文之槐院、武之宣薦, 一竝許通。" 臣等感浹肌膚, 咸願少須臾無死, 仙馭遽昇, 如喪之痛, 若偏在臣等之身也。 先正文正公 趙光祖, 首建擢用之議, 爲袞、貞輩所沮; 文成公 李珥, 繼倡疏通之論, 爲不悅者所格。 文元公 李彦迪以爲: "我國立法, 有不可曉者, 禁錮庶孽也。" 文簡公 成渾疏曰: "庶孽禁錮, 通天下所未有也。" 文烈公 趙憲疏曰: "謀國大臣, 只爲私其子孫之計, 不及乎萬世失人之憂。" 文正公 宋時烈疏曰: "庶孽防限, 初非祖宗定制。 國初鄭道傳之母, 實私婢, 而乃爲大提學, 況今人才眇然, 常患不足, 彼庶孽中可用者, 抛置可惜。" 文純公 朴世采啓曰: "稽古錄, 有通用庶類條。 故相臣李恒福、李元翼、柳成龍、尹昉、吳允謙、李敬輿、金尙容、崔鳴吉、張維、沈之源、金壽恒、崔錫鼎、趙顯命、金相福、金尙喆、李思觀及諸宰臣元景夏、李周鎭、李袤、李秀得、金南重、李省身、李景容、李東稷, 以疏、以啓, 陳情懇勤。" 有曰: "雖有才德, 率皆抑塞, 不揚於世, 垂頭喪氣, 如負大罪。" 有曰: "天之生才, 固無間於嫡庶。" 有曰: "卑薄庶孽, 殊非王者立賢無方之道。" 有曰: "禁錮庶孽, 足以傷天地生遂之意。" 有曰: "《大典》註解, 添子子孫孫之語, 遂爲禁錮之人。" 有曰: "爲臣而不得親近耿光, 君臣之義疎隔; 爲子而不敢呼其父, 則父子之親乖謬, 甚至於舍己之子, 取繼於旣成行路之同姓, 傷人紀、逆天理, 極矣。" 有曰: "設法定限, 以錮域內之人才。" 有曰: "往往有傑出之才, 如李大純、朴枝華、魚叔權、魚無迹、曺伸、李達、鄭和、林芑、梁大樸、慶遇、權應仁、李仲虎、金謹恭、宋翼弼、宋翰弼、李全仁、辛喜季、柳藕、柳祖訒、崔命龍、柳栻、楊士彦、楊萬古、禹敬錫、柳時蕃、柳興龍、宋尙敏、宋炳朝、沈日運、李知白、愼懋、申維翰, 或以道學, 或以行義, 或以文章, 或以智謀, 或以才能。 至於武弁之可稱者, 壬辰之亂, 李山謙、洪季男、劉克良, 糾合義旅, 摧倭兵於八路陷敗之餘。 丙子危急之日, 進戰於城下者, 獨有權井吉一人; 戊申陷戰之時, 殉節於幕府者, 惟洪霖而已。 蓋此所奏, 特擧十百之一二耳。 臣等本無罪戾, 而世世生生, 永爲棄物, 冤鬱到此, 視生猶死。 是何以不當有而有之? 若其以有謂無, 公出禮斜, 則其子將何以處其身乎? 以身爲有, 明其父欺君也, 以身爲無, 不知所以處之也。 安得不以此情私, 號籲天地父母之前也? 今也公行一國, 遂成風俗。 私懇一變, 有非可議, 至於易風易俗, 申明舊典, 自是化理中事也。 臣等冀其無見棄於家門, 所以爲求通於仕路, 家門之見棄, 由於仕路之不得通也, 仕路之得通, 自然家門之不見棄也。 情則苦矣, 言則慼矣。" 又或言: "祖宗舊制, 猝難變改", 其言誠或然矣。 至於爲法, 而防塞用人, 則初非聖人之制, 亦非歷代之法。 而屢伏承列朝憫恤之敎, 故先賢亦有通用庶孽, 所以法祖宗盛意之奏。 此卽古人所謂當更張而更張, 亦紹述者也。 又或言: "列朝憫恤, 非不懇至, 尙未疏滯, 必有所由", 所由者, 自度之意也, 未定之辭也。 是何以未定之辭? 自意度之, 有若其中, 眞有不可爲之端, 而故不爲之者然矣。 祖宗定制, 變改亦多。 五衛以節制, 貢案以大同, 何獨於用人, 謂‘舊制之不可改’, 而不爲其通變之道乎? 又或言: "積防之決, 易致下流橫潰, 久塞之通, 必多後來遺患,"今臣等所望, 是何等恩數也? 其先飮恨而歸矣, 必將蹈舞於冥冥之中; 其後齒人而行矣, 亦將頌祝於生生之日, 此百世以上人所未受, 而偏受之, 曠絶殊恩也。 圖報之心, 將與有生而相終始, 至如後來之患, 似無可遺之地矣。 又或言: "易致名分之壞亂,"夫名者, 定位之名, 如父父、子子、兄兄、弟弟之名也。 分者等威之分, 如子之於父, 弟之於兄之分也。 推此以往, 名分各定, 壞亂元無可施之處矣。 臣等才蔑學蕪, 固不足備數, 而藉或有文識才具之足以與聞於經世猷者, 無路出試, 棲遲林樊, 齎志茹恨, 屛死巖穴。 此同世之士, 所共指名而興歎也。 人生世間, 許多物事之形於外、發於中者, 皆在天理人情之內, 纔離於此, 便不是人。 今反以藹然之人情, 不得孚達於其家, 渾然之天理, 無以流行於斯世, 生生世世, 名爲人而實非人也。 童穉無知, 自同平人, 忽然覺得之一日, 遽含此無生至恨, 輒曰: "猶可謂人歟? 胡然而生哉?" 然且生之不已, 愈久愈多, 殆過一國之半, 而擧懷百世之冤, 此豈天理之所公、人情之所安也哉? 是以從古名賢之進言, 每稱庶類之干和, 干和初非聖世之事。 臣等輒被指擬之目, 何以致此? 心竊羞之。 臣等旣不容於家、廁於朝, 又不能行於鄕, 不有奕世之業。 祇爲一類之人, 家以是傳之, 而遂爲承宗之庶孽, 求之經傳, 而聖訓之所未見也; 求之歷代, 而典常之所未行也。 今此陳達, 事係於從宦, 有似干恩, 此實非臣等之言也, 卽諸名碩奏議也, 非獨諸名碩奏議, 是列聖朝恩旨也。 古之賢臣, 有書進祖宗謨訓, 以冀其繼述; 有條陳先臣奏對, 以冀其採納。 臣等敢不以古賢臣所期望於其君者, 望之於今日聰聽之下哉? 臣等以必無生之倫, 値大有爲之時, 無微不燭, 有冤必伸。 今若自阻於覆盆之照, 則此生此世, 更待何日? 生成之望, 情急瀝血, 疾病之呼, 勢難緩聲。 伏乞特賜矜諒, 亟降處分, 使臣等生不如死之踪, 得有雖死如生之日, 則奚止恩浹含齒? 擧懷隕首之忱, 亦將澤及枯骨, 必有結草之報矣。
批曰: "疏辭令廟堂稟處。"
- 【원본】 15책 11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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