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실록9권, 철종 8년 8월 9일 정사 8/8 기사 / 1857년 청 함풍(咸豊) 7년
순조의 공렬을 찬양하여 ‘조’로 일컬을 것을 청하는 지돈녕 이학수의 상소
국역
지돈녕(知敦寧) 이학수(李鶴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순조 대왕(純祖大王)께서는 중정(中正)하고 순수(純粹)한 자질로 정밀(精密)하고 전일(專一)한 법도(法度)를 이어받아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는 데에 근본을 두고,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로 도달(導達)시켰습니다. 건릉(健陵)069) 께서 병환으로 계실 때를 당하여는 보령(寶齡)이 아직 어렸었는데도 친히 약과 음식을 받들어 밤낮으로 초민(僬悶)하였으며, 승하(昇遐)하시기에 미쳐서는 소리내어 슬피 울며 애통해 하였으므로, 근신(近臣)과 위졸(衛卒)에 이르기까지도 흐느끼면서 차마 우러러보지 못하였으며, 대비전(大妃殿)에게는 융성하게 봉양함을 극진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삼가고 근신하였으므로 자애와 효도에 간격이 없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일은 어느 것이 큰일인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 제일 큰 일이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봄 가을의 향사(享祀)를 몸소 받들어 국가 대제(大祭)의 희생(犧牲)과 예폐(禮幣)에 대해서도 공경하고 신중히 하여 감히 혹시라도 과실이 없었습니다. 선조(先祖)의 능소(陵所)를 두루 참배하는 것은 춘추(春秋)로 애통한 감회를 펴기 위해 대략 한 해에 두 번씩 하였으며, 그 마음을 미루어 다른 세대(世代)의 능묘(陵墓)와 사묘(祠廟)에까지도 수신(守臣)을 신칙하여 시절따라 금호(禁護)하게 하였습니다.
을해년070)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훙서(薨逝)했을 때는 관각(館閣)에서 널리 의논한 것을 채택하고 정(程)·주(朱)가 정한 예론에 의거하여 절충해 만들어 9개월의 복제(服制)를 결정하였으며, 신사년071) 효의 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가 승하(昇遐)했을 때는 영돈녕(領敦寧) 김조순(金祖淳)의 의논을 따라 새로 건릉(健陵)을 가려 난천(灤遷)072) 의 예(禮)를 거행하고 노부(魯祔)의 의식을 행하였으며, 임오년073)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졸서(卒逝)했을 때는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의논에 따라 시마(緦麻) 석달의 복(服)을 입었으나 한가하게 있을 때에는 흰 상복을 입고서 3년을 마쳤으니, 혐의를 분별한 의논과 천성(天性)에서 우러난 정성이 여기에서 둘 다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사년에 《황청통고(皇淸通考)》를 연경(燕京)에서 구입해 왔었는데, 본조(本朝) 경종(景宗)의 신축년074) 일을 기재한 것이 그지없이 거짓되게 꾸며졌었으므로 급히 전대(專對)의 사신(使臣)을 시켜 변정(辨正)하여 잘못 주달된 구어(句語)를 삭제하게 하였는데, 사신이 개정본(改正本)을 가지고 돌아왔으므로 이에 종묘(宗廟)에 고유(告由)하였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약·사·증·상(禴祀烝嘗)075) 의 제사를 효성으로 올린다.’ 하였고,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상사(喪事)의 예절을 정중히 하고 먼 조상을 추모 공경하면 민덕(民德)이 돈후(敦厚)한 데로 돌아간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한가하게 지낼 때에도 항상 경계하고 삼가고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상제(上帝)를 대하여, 혹 일월 성신(日月星辰)이 경계를 알림과 수한(水旱)의 재해를 당해서는 척연(惕然)히 조심하고 두렵게 여겨 자신(自身)을 인책(引責)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정성이 하교에 넘쳤으며, 정신(廷臣)의 헌체(獻替)076) 를 옳게 여겨 가납(嘉納)하였으니, 천심(天心)을 족히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삼가 천도(天道)를 높이고 천명(天命)을 받든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셨고 경비를 절제하여 백성의 힘을 펴게 하였으며, 급하지 않는 징세(徵稅)를 줄이고 이미 묵은 흠포(欠逋)를 면제해 주었습니다. 무릇 진휼(賑恤)할 일이 있을 때는 미리 강구(講究)하여 내탕금(內帑金)으로 도와주고 나서 또 공세(公稅)를 정지시켰으며, 관부(官府)에서 올리는 상선(常膳)과 주현(州縣)의 정식 공물(供物)에 이르러서도 아울러 모두 절감하게 하여 넉넉하지 못함을 도와주었습니다. 항상 수령(守令)들을 신칙하고 때로는 안렴사(按廉使)를 보내어 궁벽한 지역과 멀리 떨어진 연해(沿海)에까지도 만리 밖을 섬돌 앞의 일과 같이 밝게 알아 병들어 죽게 된 자는 의약(醫藥)을 보내게 하고 죽어서 뼈가 드러난 자는 묻어 주게 하였으며, 길가에 버려진 어린아이들은 식료를 주어 기르게 하고,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거지들은 양식을 싸주어 돌려보내게 하였습니다. 모든 옥사(獄事)를 신중하게 처결한 것은 이것이 민명(民命)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인데, 매양 지독한 추위나 더위를 당해서는 그때마다 석방시키는 관전(寬典)을 행하였으므로 살리기 좋아하는 덕(德)에 백성들이 모두 열복하여 영어(囹圄)가 텅 비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경신년077) 처음 보위(寶位)에 올라서는 선왕(先王)의 유지(遺志)에 의거 맨 먼저 선두안(宣頭案)078) 을 큰 거리에서 태웠으므로, 수없이 많은 액정(掖庭)의 노비(奴婢)들을 화락한 데로 인도함으로써 상서로움을 맞이하여 대명(大命)을 계승하였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안한 것이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하전(廈氈) 위에서 날마다 유신(儒臣)을 접견하고 온갖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여가에도 서책(書冊)을 열람하여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에 대한 원리를 탐구하셨고 왕패(王霸)의 의리(義利)에 대한 구분(區分)을 밝히셨으며, 조서(詔書)의 말씀과 운한(雲漢)의 문장은 전모(典謨)079) 와 동등하였고 풍아(風雅)080) 와 짝할 수 있었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한결같이 생각을 늘 학문에 둔다면 덕(德)을 닦는 것이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바깥으로는 돌아다니며 멋대로 노는 즐거움이 없었고 안으로는 연회(宴會)하는 사사로움을 끊으셨으며, 의대(衣襨)는 여러 번 빨아 입었고 유장(帷帳)은 혹 깁고 꿰매기도 했으며, 선왕의 궁실(宮室)이 퇴락하면 개수하는 데 있어 서까래 하나와 주춧돌 하나도 더 늘려 꾸민 것이 없었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검소한 덕(德)을 삼가 지켜서 오직 먼 장래를 위한 계획을 생각하시오.’라고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무릇 어버이를 섬기고 선조를 받들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구휼하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검소함을 숭상한 덕(德)은 실로 열성조(列聖朝)에서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인데, 또한 우리 성고(聖考)께서는 힘쓰지 않으셔도 적중하셨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대로 되어, 백세(百世)를 경유하면서 백왕(百王)과 비교해 보아도 더 성대함이 있지 않았던 성덕(聖德)과 대업(大業)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아!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정조 대왕(正祖大王)께서 성덕(聖德)으로 나라를 다스린 지 25년 사이에 애쓴 마음과 정성스런 뜻은 일성(日星)보다 빛나고 부월(斧鉞)보다 엄하였는데, 한 종류의 엇나간 무리들이 있어 음흉하고 추악한 무리들이 마구 불어나 기필코 원수같이 보아 괴란(壞亂)시키려 할 때 우리 성고(聖考)께서 혁연(赫然)히 이에 노하시어 크게 천토(天討)를 행하였으니, 비유하건대 우정(禹鼎)이 밝게 비쳐 사악한 귀신이 도망할 수 없었던 것과 같아서 선(善)과 악(惡)이 가름되고 백성의 심지(心志)가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서양(西洋)의 사교(邪敎)가 인륜(人倫)을 더럽히고 어지럽게 하였으므로 왕법(王法)에 있어 반드시 주토(誅討)해야 할 것이었는데, 전습(傳習)이 이미 오래 되었고 유파(流播)가 또 넓어져 심지어 대대로 벼슬했던 집안과 지체 높은 학사(學士)들까지도 오염되어 기세가 장차 마치 불이 벌판에 번지고 하천(河川)이 터져 무너지는 것 같아 점점 오랑캐와 금수(禽獸)가 되어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리 성고께서 빨리 그 뿌리를 뽑아 그들을 죽이고 서적을 불태우게 하여 기필코 남김없이 없애버리니, 이에 치교(治敎)가 청명하고 정학(正學)이 더욱 빛났습니다. 관서(關西)의 토구(土寇)들이 으슥한 곳에서 도적질하고 날뛰다가 끝내는 걷잡을 수 없이 세력이 퍼져 긴 뱀[蛇]과 큰 돼지가 점차 먹어 들어오는 것같이 군현(郡縣)을 침범하고 수령(守令)을 살해하였으므로 도성(都城) 아래에 있는 천류(賤類)들에 이르러서도 속아서 미혹되는 자가 점차 많았습니다. 우리 성고(聖考)께서 장수(將帥)에게 명하여 또 가서 주토하고 화란(禍亂)을 평정하게 했는데, 그들의 괴수는 죽이고 위협당해 복종한 자는 석방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쪽 지방이 다 평정되어 성상의 은택(恩澤)을 호산(湖山) 천리 밖에서 노래로 읊게 되었으니, 아! 우리 순고(純考)의 위대하신 공적(功績)을 거룩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아! 전왕(前王)을 잊지 못한다.’ 하였으니 거룩하다 이를 만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 대비 전하께서는 도·신(塗莘)081) 과 같은 명문(名門)으로서 태임(太任)082) ·태사(太姒)083) 와 같은 지극한 덕이 있어 뒤에서 돕는 공과 부드러운 교화로 우리 성고께서 35년 동안 왕화(王化)가 고루 미쳐 태평스러운 정치를 크게 도우셨습니다. 갑오년084) 순조(純祖)께서 승하하신 때와 기유년085) 헌종(憲宗)께서 승하한 때를 당해서는 신린(臣隣)들의 요청을 애써 따라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준행하여 두 번이나 수렴 청정(垂簾聽政)의 교화를 베풀었고, 거듭 구면(裘冕)086) 의 의식을 거행하여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을 회복하였고 국세(國勢)를 태산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니, 이는 일찍이 사승(史乘)에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며 귀와 눈으로 보고 듣지 못했던 바입니다. 아! 어찌 그리도 거룩하십니까? 아! 혼례(婚禮)를 이룬 지 56년이었는데, 종사를 위해 부지런히 일했고 크나큰 걱정이 성지(聖智)를 열어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남겨주고 후대(後代)를 개도(開導)해서 동방(東方) 억만 년의 아름다운 운회(運會)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공덕(功德)이 이미 옥책(玉冊)087) 에 새겨졌고 동관(彤管)088) 이 기록했으니, 절대로 신이 찬술(讚述)하여 선양(宣揚)할 바가 아닙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아 도와서 성스러운 여사(女士)를 내려보내어 지존(至尊)의 배필이 되게 함으로써 태평스러운 정치를 돕게 했으며, 두 번이나 수렴 청정을 하여 몹시 곤란했던 사세를 크게 구제했습니다. 현비(賢妃)로서 도와준 것이 컸고 성모(聖母)로서 성취시킨 것이 장원(長遠)하였으니, 아! 어찌 거룩하지 않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우리 순고(純考)께서는 저승의 멀고 아득한 가운데에서 말없이 돕고 영명하게 돌아보아 받은 바 휴명(休命)을 완결짓고 끝마치지 못한 뜻을 완성시키게 되었습니다. 지금 순고의 뛰어난 공적과 광대한 사업은 오로지 성모께서 남몰래 보좌하고 유순하게 도운 결과인 것이요, 성모의 훌륭하신 모범과 큰 경사도 역시 순고께서 크고 어려운 일을 끼쳐 준 이유인 것입니다. 전(傳)에 이른바 ‘훌륭하게 여기고 친하게 여기고 이롭게 여기고 즐겁게 여겨 잊을 수 없다.’라고 한 것이 참으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외방(外方)에서 고생하시다가 태모(太母)의 명을 받들어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습니다. 왕위에 올라 예(禮)를 행한 다음 밤낮으로 조선(祖先)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하늘을 공경하고 조선을 본받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백성을 애휼하는 것[敬天法祖勤學愛民]은 곧 열성조(列聖祖)의 가법(家法)입니다. 전하께서 사복(嗣服)하신 처음에 태모께서는 전하에게 친히 전수(傳受)하였고 전하께서는 태모에게서 친히 받으셨으니, 이 도(道)가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곧 우리 순고께서 35년 동안 더 숭상할 수 없는 덕화(德化)를 이루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우리 태모를 섬기심에 있어 기쁘도록 모시고 가르침을 받들었던 것이 지금 9년인데, 태모께서 제시 유도하신 하교(下敎)와 고명(誥命)이 이 네 가지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삼가 형평(衡平)함을 맞아서 우리 순고의 성대하신 덕업(德業)을 계승하는 것도 역시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어버이를 드러내시는 효도는 사해(四海)에서 표준으로 삼을 만하니, 무릇 은덕을 갚고 빛남을 이루는 의전(儀典)에 있어서 극진한 방도를 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큰 덕행(德行)이 있는 자는 대명(大命)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순조 대왕의 묘호(廟號)를 의정(議定)함에 있어 마땅히 공렬(功烈)을 찬양함이 있어야 진실로 경례(經禮)에 합당할 것입니다.
《대대례(大戴禮)》에 이르기를, ‘시호(諡號)란 것은 행동에 대한 실적(實蹟)이다.’라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그의 시호를 듣고서 그의 정치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순고의 행적을 헤아려보고 순고의 정치를 상고해 보건대 조(祖)라 일컫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왕업(王業)을 창시한 임금을 조(祖)라 일컫고 계통(系統)을 이은 임금을 종(宗)이라 일컬었음은 고금(古今)의 떳떳한 법식이었습니다. 전한(前漢)·후한(後漢) 4백여 년 동안에는 오직 고조(高祖)와 세조(世祖)089) 뿐이었고 송(宋)나라 3백여 년에도 오직 태조(太祖)뿐이었으며, 송 고종(宋高宗)의 묘호를 의정할 때에도 더욱 오래도록 곤란해 하였습니다. 명(明)나라에는 오직 태조(太祖)와 성조(成祖)뿐이었고 우리 나라에는 오직 태조 대왕·세조 대왕·선조 대왕·인조 대왕뿐이었으니, 시호를 내리는 의전(儀典)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중하였습니다. 한 문제(漢文帝), 당(唐)나라의 태종(太宗)·현종(玄宗), 진 원제(晉元帝), 송 고종은 비록 백세토록 불천지묘(不遷之廟)는 되었으나 모두 조(祖)라고 일컫지는 못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 신도 역시 말하기를, ‘조(祖)는 공로(功勞)요 종(宗)은 덕화(德化)로서 두 가지가 모두 성대하고 아름다워서 조가 반드시 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고 종이 반드시 조보다 깎이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당면(當面)한 시기에 의하여 그 칭호를 달리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세조 대왕과 인조 대왕은 계통을 이은 임금으로 조(祖)라고 일컬었으며, 선조 대왕은 종계(宗系)를 바르게 밝혔고090) 왜란(倭亂)을 평정하였기 때문에 조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선군(先君)들께서 이미 시행했던 전례(典禮)이었고 우리 나라의 예제(禮制)에도 역시 마땅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고루하고 촌스러운 말을 정신(廷臣)들에게 널리 하문하여 만일 경대부(卿大夫)들의 생각이 같다면, 이것은 일국(一國)의 동일하고 공평한 견해이며 영구히 바꾸지 못할 의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우리 순고(純考)의 성스러운 덕과 지극하신 선에 대하여 경(卿)의 말이 오늘날 나왔으니, 더욱 미치지 못할 비통함이 간절하다. 일이 막중한 전례에 관계되니, 마땅히 수의(收議)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615면
- [註 069] 건릉(健陵) : 정조(正祖).
- [註 070] 을해년 : 1815 순조 15년.
- [註 071] 신사년 : 1821 순조 21년.
- [註 072] 난천(灤遷) : 이장(移葬).
- [註 073] 임오년 : 1822 순조 22년.
- [註 07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075] 약·사·증·상(禴祀烝嘗) : 봄·여름·가을·겨울의 제사.
- [註 076] 헌체(獻替) : 선을 권하고 악을 못하게 함.
- [註 077]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 [註 078] 선두안(宣頭案) : 내수사(內需司)에 속한 노비(奴婢)들을 20년마다 자세히 조사하여, 임금께 새로 만들어 바치는 원적부(原籍簿).
- [註 079] 전모(典謨) : 《서경(書經)》 우서(虞書)편의 요전(堯典)·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
- [註 080] 풍아(風雅) : 《시경(詩經)》 육의(六義)의 하나.
- [註 081] 도·신(塗莘) : 도는 우(禹)임금의 아내 도산씨(塗山氏)를 맞이한 곳이고, 신은 문왕(文王)의 아내 태사(太姒)의 출신지로, 모두 고대(古代) 후비(后妃)의 출생지임.
- [註 082] 태임(太任) : 주 문왕(周文王)의 어머니.
- [註 083] 태사(太姒) : 주 문왕의 비(妃).
- [註 084] 갑오년 : 1834 순조 34년.
- [註 085] 기유년 : 1849 헌종 15년.
- [註 086] 구면(裘冕) : 왕비(王妃)의 성복(盛服).
- [註 087] 옥책(玉冊) : 제왕(帝王)·후비(后妃)의 존호(尊號)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옥(玉)에 새겨 놓은 간책(簡冊).
- [註 088] 동관(彤管) : 붉은 붓으로써 공적과 허물을 기록하는 여사(女史).
- [註 089] 세조(世祖) : 광무제(光武帝).
- [註 090] 선조 대왕은 종계(宗系)를 바르게 밝혔고 : 조선 왕조(朝鮮王朝)의 조상이 명(明)나라 서적에 잘못 기재된 것을 고치고자 주청(奏請)하여 바로잡은 일. 개국(開國) 이후 선조(宣祖) 때까지 말썽이 되었던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왕조의 태조(太祖)가 고려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어 누차 정정(訂正)을 주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하다가 선조 17년(1584) 주청사(奏請使) 황정욱(黃廷彧) 등을 보내 수정하였음. 종계 변무(宗系辨誣).
원문
○知敦寧李鶴秀疏略曰:
伏惟我純宗大王, 以中正純粹之姿, 受惟精惟一之法, 本之以躬行心得, 而達之以天德王道。 當建陵違豫之時, 寶齡尙在沖藐, 而親奉藥餌, 日夜焦泣, 曁罹大憂, 哭泣致哀, 至於近臣衛卒, 嗚咽不忍仰視, 殿宮之間, 隆養備至, 晨昏洞屬, 慈孝無間。 《傳》曰 ‘事孰爲大, 事親爲大。’ 於戲! 其盛矣。 春秋享祀之躬將, 而至于粢盛牲器, 禮幣工祝, 克敬克愼, 罔敢或愆。 歷拜先寢, 庸展霜露之感, 率以歲再, 推以至于異代, 陵墓祠廟, 提飭守臣, 以時節禁護之。 乙亥惠慶宮薨逝, 采館閣之博議, 據程朱之定論, 裁作折衷, 定爲九月之制, 辛巳孝懿王后昇遐, 因領敦寧金祖淳議, 新卜健陵, 擧灤遷之禮, 行魯祔之儀, 壬午綏嬪卒逝, 用大臣諸臣議, 服緦麻三月, 燕居縞素, 以終三年, 別嫌之議, 根天之誠, 於是乎兩無憾焉。 辛巳《皇淸通考》之自燕購來也, 載本朝景宗辛丑事, 誣衊罔極, 亟命專价, 辨正刊去, 誣奏句語, 价還以改正齎來, 乃告于廟。 《詩》曰 ‘禴、祀、烝、嘗, 是用孝享。’ 《傳》曰 ‘愼終追遠, 民德歸厚。’ 於戲! 其盛矣。 燕間之中, 常加戒愼, 嚴恭寅畏, 對越上帝, 或値象緯之告警, 水旱之爲災, 惕然兢懼, 引咎責躬, 求助之誠, 溢於辭敎, 廷臣獻替, 翕受嘉納, 有足以孚格天心。 《書》曰 ‘欽崇天道, 奉若天命。’ 於戲! 其盛矣。 勸課農桑而厚民生, 撙節經費而紓民力, 省征歛之不急, 蠲欠逋之旣久。 凡有賙賑, 預加講究, 旣捐內帑, 又停公稅, 以至官府常饍, 州縣正供, 竝皆裁損, 以補不給。 恒飭守牧, 時遣按廉, 窮陬遐澨, 階前萬里, 厲扎者醫藥之, 胔骼者掩瘞之, 嬰孩之棄諸道者, 給料而養之, 流丐之離其鄕者, 裹糧而還之。 庶獄庶愼, 民命攸係, 每値祁寒盛暑, 輒行疏放之典, 好生之德, 民皆悅服, 以至囹圍之空虛。 庚申初登寶位, 以先王遺意, 首焚宣頭案於通衢, 掖庭奴婢厥數屢萬, 導和迎祥, 迓續景命。 《書》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於戲! 其盛矣。 廈氈之上, 日接儒臣, 萬機之暇, 玩索編籍, 探究乎天人成命之原, 剖柝乎王霸義利之分, 絲綸之言, 雲漢之章, 侔典謨而配風雅。 《書》曰 ‘念終始典于學, 厥德修罔覺。’ 於戲! 其盛矣。 外而無盤敖之樂, 內而絶宴遊之私, 衣襨屢加, 澣濯帷帳, 或至補綴先王宮室, 弊則改之, 一椽一礎, 無所增飾。 《書》曰 ‘愼乃儉德, 惟懷永圖。’ 於戲! 其盛矣。 凡此事親奉先, 敬天恤民, 勤學崇儉之德, 實有列聖朝相授心法, 亦惟我聖考, 不勉而中, 不思而得, 致有此由百世等百王未有盛之聖德大業, 於戲! 豈不休哉? 惟我正宗大王, 在宥二十五年之間, 其苦心精義, 炳日星嚴斧鍼, 有一種背馳之倫, 滔朋醜類, 寔繁其徒, 必欲讎視而壞亂之, 我聖考, 赫然斯怒, 大行天討, 譬若禹鼎照燭, 神姦莫逃, 淑慝以辨, 民志以靖。 西洋邪敎, 瀆亂彝倫, 王法之所必誅, 而傳習旣久, 流播且廣, 甚至於喬木世家, 薦紳學士, 亦有染汚, 勢將燎原而潰河, 浸浸至於夷狄禽哭之域, 我聖考亟令鋤治, 誅其人而火其書, 必殄滅之無遺, 於是殆敎淸明, 正學益光。 關西土寇, 盜弄潢池, 末乃猖獗, 若蛇豕之荐食, 侵掠郡縣, 戕殺長吏, 以至轂下羌戎, 詿誤滋多, 我聖考命將往討, 戡定禍亂, 殲其渠魁, 釋其脅從。 於是西地悉平, 歌詠聖澤於湖山千里之外, 於戲! 我純考嵬烈大勳, 可不謂之盛哉? 《詩》云 ‘於乎前王不忘。’ 其可謂盛矣。 伏惟大行大王大妃殿下, 以塗莘之名門, 有任姒之至德, 陰功柔化, 洪贊我聖考三十五年郅隆之治。 當甲午崩坼之時, 己酉蒼黃之際, 勉從臣隣之請克循國朝故事, 再宣簾帷之化, 重抗裘冕之儀, 回宗社之綴旒, 措國勢於磐泰, 此史乘所記載耳目所記睹之未嘗有也。 於戲! 何其盛也? 於戲! 舟梁五十六年, 而勤勞宗社, 殷憂啓聖, 燕謨翼子, 迪我後, 以基東方萬億之休之功之德。 已有琬琰之刻, 彤管之記, 萬萬非臣可能讃述而揚厲之。 竊伏念惟天惟祖宗, 眷棐我邦家, 降之以女士之聖, 儷極媲尊, 佑治太平, 再奠寰宇, 洪濟艱難。 爲賢妃而助之者, 深爲聖母而成之者遠, 於戲! 豈不盛哉? 由是我純考默隲, 英顧於雲鄕冥邈之中, 以畢其攸受休而庸成其未克卒之志。 今夫純考之嵬功蕩烈, 繄惟聖母之陰相柔贊也, 聖母之懿範宏休, 亦惟純考之遺大投艱也。 傳 所謂 ‘親賢樂利, 不能忘者,’ 不其然乎? 我殿下久勞于外, 承太母之命, 入承大統, 踐位行禮, 夙夜憧憧於繼志述事之道, 而敬天法祖, 勤學愛民, 卽列聖朝之家法。 殿下嗣服之初, 太母親傳之殿下, 殿下親受之太母, 此其道, 豈有他哉? 卽惟我純考, 用以致三十五年莫尙之化者也。 殿下之事我太母, 承歡而奉誨者, 于今九年, 而太母之所以提誘敎誥, 不出此四者之元符, 則繼自今, 穆穆迓衡, 克紹我純考盛德大業, 亦惟在是矣。 我殿下顯親之孝, 準諸四海, 凡在崇報象成之典, 靡不用極。 傳曰 ‘大行受大名。’ 純宗大王, 議定廟號, 宜有所揄揚功烈, 允合經禮者焉。 《大戴禮》曰, ‘諡者, 行之蹟。’ 《禮》曰 ‘聞其諡而知其政,’ 稽純考之行, 考純考之政, 稱之以祖, 不亦宜乎? 說者曰, ‘創業之君稱祖, 繼體之君稱宗, 古今常典也。 兩漢四百年, 惟高祖、世祖也, 有宋三百年, 惟太祖也, 宋 高宗之議廟號, 尤袤難之。 皇明則惟太祖、成祖也, 我東則惟太祖大王、世祖大王、宣祖大王、仁祖大王, 而易名之典, 至嚴且重。 漢 文帝、唐 太宗、玄宗, 晋 元帝、宋 高宗, 雖爲百世不遷之廟, 皆不得稱祖。’ 臣亦曰 ‘祖功宗德, 兩隆幷美, 祖未必優於宗, 宗未必貶於祖, 而特以所遭之會而異其稱耳。’ 我世祖大王、仁祖大王, 以繼體之君而稱祖, 宣祖大王以辨宗系戡倭亂而稱祖, 此誠吾先君已行之典, 而於我國家禮, 亦宜也。 伏願殿下, 以臣芻蕘之言, 博詢廷臣, 若卿士大, 同則斯可爲一國共公之見, 而萬世不易之議也。
批曰: "我純考聖德至善, 卿言出於今日, 益切靡逮之慟, 事係莫重典禮, 當令收議矣。"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615면
철종실록9권, 철종 8년 8월 9일 정사 8/8 기사 / 1857년 청 함풍(咸豊) 7년
순조의 공렬을 찬양하여 ‘조’로 일컬을 것을 청하는 지돈녕 이학수의 상소
국역
지돈녕(知敦寧) 이학수(李鶴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순조 대왕(純祖大王)께서는 중정(中正)하고 순수(純粹)한 자질로 정밀(精密)하고 전일(專一)한 법도(法度)를 이어받아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는 데에 근본을 두고,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로 도달(導達)시켰습니다. 건릉(健陵)069) 께서 병환으로 계실 때를 당하여는 보령(寶齡)이 아직 어렸었는데도 친히 약과 음식을 받들어 밤낮으로 초민(僬悶)하였으며, 승하(昇遐)하시기에 미쳐서는 소리내어 슬피 울며 애통해 하였으므로, 근신(近臣)과 위졸(衛卒)에 이르기까지도 흐느끼면서 차마 우러러보지 못하였으며, 대비전(大妃殿)에게는 융성하게 봉양함을 극진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삼가고 근신하였으므로 자애와 효도에 간격이 없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일은 어느 것이 큰일인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 제일 큰 일이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봄 가을의 향사(享祀)를 몸소 받들어 국가 대제(大祭)의 희생(犧牲)과 예폐(禮幣)에 대해서도 공경하고 신중히 하여 감히 혹시라도 과실이 없었습니다. 선조(先祖)의 능소(陵所)를 두루 참배하는 것은 춘추(春秋)로 애통한 감회를 펴기 위해 대략 한 해에 두 번씩 하였으며, 그 마음을 미루어 다른 세대(世代)의 능묘(陵墓)와 사묘(祠廟)에까지도 수신(守臣)을 신칙하여 시절따라 금호(禁護)하게 하였습니다.
을해년070)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훙서(薨逝)했을 때는 관각(館閣)에서 널리 의논한 것을 채택하고 정(程)·주(朱)가 정한 예론에 의거하여 절충해 만들어 9개월의 복제(服制)를 결정하였으며, 신사년071) 효의 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가 승하(昇遐)했을 때는 영돈녕(領敦寧) 김조순(金祖淳)의 의논을 따라 새로 건릉(健陵)을 가려 난천(灤遷)072) 의 예(禮)를 거행하고 노부(魯祔)의 의식을 행하였으며, 임오년073)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졸서(卒逝)했을 때는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의논에 따라 시마(緦麻) 석달의 복(服)을 입었으나 한가하게 있을 때에는 흰 상복을 입고서 3년을 마쳤으니, 혐의를 분별한 의논과 천성(天性)에서 우러난 정성이 여기에서 둘 다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사년에 《황청통고(皇淸通考)》를 연경(燕京)에서 구입해 왔었는데, 본조(本朝) 경종(景宗)의 신축년074) 일을 기재한 것이 그지없이 거짓되게 꾸며졌었으므로 급히 전대(專對)의 사신(使臣)을 시켜 변정(辨正)하여 잘못 주달된 구어(句語)를 삭제하게 하였는데, 사신이 개정본(改正本)을 가지고 돌아왔으므로 이에 종묘(宗廟)에 고유(告由)하였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약·사·증·상(禴祀烝嘗)075) 의 제사를 효성으로 올린다.’ 하였고,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상사(喪事)의 예절을 정중히 하고 먼 조상을 추모 공경하면 민덕(民德)이 돈후(敦厚)한 데로 돌아간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한가하게 지낼 때에도 항상 경계하고 삼가고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상제(上帝)를 대하여, 혹 일월 성신(日月星辰)이 경계를 알림과 수한(水旱)의 재해를 당해서는 척연(惕然)히 조심하고 두렵게 여겨 자신(自身)을 인책(引責)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정성이 하교에 넘쳤으며, 정신(廷臣)의 헌체(獻替)076) 를 옳게 여겨 가납(嘉納)하였으니, 천심(天心)을 족히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삼가 천도(天道)를 높이고 천명(天命)을 받든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셨고 경비를 절제하여 백성의 힘을 펴게 하였으며, 급하지 않는 징세(徵稅)를 줄이고 이미 묵은 흠포(欠逋)를 면제해 주었습니다. 무릇 진휼(賑恤)할 일이 있을 때는 미리 강구(講究)하여 내탕금(內帑金)으로 도와주고 나서 또 공세(公稅)를 정지시켰으며, 관부(官府)에서 올리는 상선(常膳)과 주현(州縣)의 정식 공물(供物)에 이르러서도 아울러 모두 절감하게 하여 넉넉하지 못함을 도와주었습니다. 항상 수령(守令)들을 신칙하고 때로는 안렴사(按廉使)를 보내어 궁벽한 지역과 멀리 떨어진 연해(沿海)에까지도 만리 밖을 섬돌 앞의 일과 같이 밝게 알아 병들어 죽게 된 자는 의약(醫藥)을 보내게 하고 죽어서 뼈가 드러난 자는 묻어 주게 하였으며, 길가에 버려진 어린아이들은 식료를 주어 기르게 하고,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거지들은 양식을 싸주어 돌려보내게 하였습니다. 모든 옥사(獄事)를 신중하게 처결한 것은 이것이 민명(民命)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인데, 매양 지독한 추위나 더위를 당해서는 그때마다 석방시키는 관전(寬典)을 행하였으므로 살리기 좋아하는 덕(德)에 백성들이 모두 열복하여 영어(囹圄)가 텅 비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경신년077) 처음 보위(寶位)에 올라서는 선왕(先王)의 유지(遺志)에 의거 맨 먼저 선두안(宣頭案)078) 을 큰 거리에서 태웠으므로, 수없이 많은 액정(掖庭)의 노비(奴婢)들을 화락한 데로 인도함으로써 상서로움을 맞이하여 대명(大命)을 계승하였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안한 것이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하전(廈氈) 위에서 날마다 유신(儒臣)을 접견하고 온갖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여가에도 서책(書冊)을 열람하여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에 대한 원리를 탐구하셨고 왕패(王霸)의 의리(義利)에 대한 구분(區分)을 밝히셨으며, 조서(詔書)의 말씀과 운한(雲漢)의 문장은 전모(典謨)079) 와 동등하였고 풍아(風雅)080) 와 짝할 수 있었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한결같이 생각을 늘 학문에 둔다면 덕(德)을 닦는 것이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바깥으로는 돌아다니며 멋대로 노는 즐거움이 없었고 안으로는 연회(宴會)하는 사사로움을 끊으셨으며, 의대(衣襨)는 여러 번 빨아 입었고 유장(帷帳)은 혹 깁고 꿰매기도 했으며, 선왕의 궁실(宮室)이 퇴락하면 개수하는 데 있어 서까래 하나와 주춧돌 하나도 더 늘려 꾸민 것이 없었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검소한 덕(德)을 삼가 지켜서 오직 먼 장래를 위한 계획을 생각하시오.’라고 하였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무릇 어버이를 섬기고 선조를 받들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구휼하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검소함을 숭상한 덕(德)은 실로 열성조(列聖朝)에서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인데, 또한 우리 성고(聖考)께서는 힘쓰지 않으셔도 적중하셨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대로 되어, 백세(百世)를 경유하면서 백왕(百王)과 비교해 보아도 더 성대함이 있지 않았던 성덕(聖德)과 대업(大業)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아!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정조 대왕(正祖大王)께서 성덕(聖德)으로 나라를 다스린 지 25년 사이에 애쓴 마음과 정성스런 뜻은 일성(日星)보다 빛나고 부월(斧鉞)보다 엄하였는데, 한 종류의 엇나간 무리들이 있어 음흉하고 추악한 무리들이 마구 불어나 기필코 원수같이 보아 괴란(壞亂)시키려 할 때 우리 성고(聖考)께서 혁연(赫然)히 이에 노하시어 크게 천토(天討)를 행하였으니, 비유하건대 우정(禹鼎)이 밝게 비쳐 사악한 귀신이 도망할 수 없었던 것과 같아서 선(善)과 악(惡)이 가름되고 백성의 심지(心志)가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서양(西洋)의 사교(邪敎)가 인륜(人倫)을 더럽히고 어지럽게 하였으므로 왕법(王法)에 있어 반드시 주토(誅討)해야 할 것이었는데, 전습(傳習)이 이미 오래 되었고 유파(流播)가 또 넓어져 심지어 대대로 벼슬했던 집안과 지체 높은 학사(學士)들까지도 오염되어 기세가 장차 마치 불이 벌판에 번지고 하천(河川)이 터져 무너지는 것 같아 점점 오랑캐와 금수(禽獸)가 되어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리 성고께서 빨리 그 뿌리를 뽑아 그들을 죽이고 서적을 불태우게 하여 기필코 남김없이 없애버리니, 이에 치교(治敎)가 청명하고 정학(正學)이 더욱 빛났습니다. 관서(關西)의 토구(土寇)들이 으슥한 곳에서 도적질하고 날뛰다가 끝내는 걷잡을 수 없이 세력이 퍼져 긴 뱀[蛇]과 큰 돼지가 점차 먹어 들어오는 것같이 군현(郡縣)을 침범하고 수령(守令)을 살해하였으므로 도성(都城) 아래에 있는 천류(賤類)들에 이르러서도 속아서 미혹되는 자가 점차 많았습니다. 우리 성고(聖考)께서 장수(將帥)에게 명하여 또 가서 주토하고 화란(禍亂)을 평정하게 했는데, 그들의 괴수는 죽이고 위협당해 복종한 자는 석방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쪽 지방이 다 평정되어 성상의 은택(恩澤)을 호산(湖山) 천리 밖에서 노래로 읊게 되었으니, 아! 우리 순고(純考)의 위대하신 공적(功績)을 거룩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아! 전왕(前王)을 잊지 못한다.’ 하였으니 거룩하다 이를 만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 대비 전하께서는 도·신(塗莘)081) 과 같은 명문(名門)으로서 태임(太任)082) ·태사(太姒)083) 와 같은 지극한 덕이 있어 뒤에서 돕는 공과 부드러운 교화로 우리 성고께서 35년 동안 왕화(王化)가 고루 미쳐 태평스러운 정치를 크게 도우셨습니다. 갑오년084) 순조(純祖)께서 승하하신 때와 기유년085) 헌종(憲宗)께서 승하한 때를 당해서는 신린(臣隣)들의 요청을 애써 따라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준행하여 두 번이나 수렴 청정(垂簾聽政)의 교화를 베풀었고, 거듭 구면(裘冕)086) 의 의식을 거행하여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을 회복하였고 국세(國勢)를 태산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니, 이는 일찍이 사승(史乘)에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며 귀와 눈으로 보고 듣지 못했던 바입니다. 아! 어찌 그리도 거룩하십니까? 아! 혼례(婚禮)를 이룬 지 56년이었는데, 종사를 위해 부지런히 일했고 크나큰 걱정이 성지(聖智)를 열어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남겨주고 후대(後代)를 개도(開導)해서 동방(東方) 억만 년의 아름다운 운회(運會)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공덕(功德)이 이미 옥책(玉冊)087) 에 새겨졌고 동관(彤管)088) 이 기록했으니, 절대로 신이 찬술(讚述)하여 선양(宣揚)할 바가 아닙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아 도와서 성스러운 여사(女士)를 내려보내어 지존(至尊)의 배필이 되게 함으로써 태평스러운 정치를 돕게 했으며, 두 번이나 수렴 청정을 하여 몹시 곤란했던 사세를 크게 구제했습니다. 현비(賢妃)로서 도와준 것이 컸고 성모(聖母)로서 성취시킨 것이 장원(長遠)하였으니, 아! 어찌 거룩하지 않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우리 순고(純考)께서는 저승의 멀고 아득한 가운데에서 말없이 돕고 영명하게 돌아보아 받은 바 휴명(休命)을 완결짓고 끝마치지 못한 뜻을 완성시키게 되었습니다. 지금 순고의 뛰어난 공적과 광대한 사업은 오로지 성모께서 남몰래 보좌하고 유순하게 도운 결과인 것이요, 성모의 훌륭하신 모범과 큰 경사도 역시 순고께서 크고 어려운 일을 끼쳐 준 이유인 것입니다. 전(傳)에 이른바 ‘훌륭하게 여기고 친하게 여기고 이롭게 여기고 즐겁게 여겨 잊을 수 없다.’라고 한 것이 참으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외방(外方)에서 고생하시다가 태모(太母)의 명을 받들어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습니다. 왕위에 올라 예(禮)를 행한 다음 밤낮으로 조선(祖先)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하늘을 공경하고 조선을 본받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백성을 애휼하는 것[敬天法祖勤學愛民]은 곧 열성조(列聖祖)의 가법(家法)입니다. 전하께서 사복(嗣服)하신 처음에 태모께서는 전하에게 친히 전수(傳受)하였고 전하께서는 태모에게서 친히 받으셨으니, 이 도(道)가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곧 우리 순고께서 35년 동안 더 숭상할 수 없는 덕화(德化)를 이루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우리 태모를 섬기심에 있어 기쁘도록 모시고 가르침을 받들었던 것이 지금 9년인데, 태모께서 제시 유도하신 하교(下敎)와 고명(誥命)이 이 네 가지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삼가 형평(衡平)함을 맞아서 우리 순고의 성대하신 덕업(德業)을 계승하는 것도 역시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어버이를 드러내시는 효도는 사해(四海)에서 표준으로 삼을 만하니, 무릇 은덕을 갚고 빛남을 이루는 의전(儀典)에 있어서 극진한 방도를 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큰 덕행(德行)이 있는 자는 대명(大命)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순조 대왕의 묘호(廟號)를 의정(議定)함에 있어 마땅히 공렬(功烈)을 찬양함이 있어야 진실로 경례(經禮)에 합당할 것입니다.
《대대례(大戴禮)》에 이르기를, ‘시호(諡號)란 것은 행동에 대한 실적(實蹟)이다.’라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그의 시호를 듣고서 그의 정치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순고의 행적을 헤아려보고 순고의 정치를 상고해 보건대 조(祖)라 일컫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왕업(王業)을 창시한 임금을 조(祖)라 일컫고 계통(系統)을 이은 임금을 종(宗)이라 일컬었음은 고금(古今)의 떳떳한 법식이었습니다. 전한(前漢)·후한(後漢) 4백여 년 동안에는 오직 고조(高祖)와 세조(世祖)089) 뿐이었고 송(宋)나라 3백여 년에도 오직 태조(太祖)뿐이었으며, 송 고종(宋高宗)의 묘호를 의정할 때에도 더욱 오래도록 곤란해 하였습니다. 명(明)나라에는 오직 태조(太祖)와 성조(成祖)뿐이었고 우리 나라에는 오직 태조 대왕·세조 대왕·선조 대왕·인조 대왕뿐이었으니, 시호를 내리는 의전(儀典)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중하였습니다. 한 문제(漢文帝), 당(唐)나라의 태종(太宗)·현종(玄宗), 진 원제(晉元帝), 송 고종은 비록 백세토록 불천지묘(不遷之廟)는 되었으나 모두 조(祖)라고 일컫지는 못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 신도 역시 말하기를, ‘조(祖)는 공로(功勞)요 종(宗)은 덕화(德化)로서 두 가지가 모두 성대하고 아름다워서 조가 반드시 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고 종이 반드시 조보다 깎이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당면(當面)한 시기에 의하여 그 칭호를 달리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세조 대왕과 인조 대왕은 계통을 이은 임금으로 조(祖)라고 일컬었으며, 선조 대왕은 종계(宗系)를 바르게 밝혔고090) 왜란(倭亂)을 평정하였기 때문에 조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선군(先君)들께서 이미 시행했던 전례(典禮)이었고 우리 나라의 예제(禮制)에도 역시 마땅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고루하고 촌스러운 말을 정신(廷臣)들에게 널리 하문하여 만일 경대부(卿大夫)들의 생각이 같다면, 이것은 일국(一國)의 동일하고 공평한 견해이며 영구히 바꾸지 못할 의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우리 순고(純考)의 성스러운 덕과 지극하신 선에 대하여 경(卿)의 말이 오늘날 나왔으니, 더욱 미치지 못할 비통함이 간절하다. 일이 막중한 전례에 관계되니, 마땅히 수의(收議)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615면
- [註 069] 건릉(健陵) : 정조(正祖).
- [註 070] 을해년 : 1815 순조 15년.
- [註 071] 신사년 : 1821 순조 21년.
- [註 072] 난천(灤遷) : 이장(移葬).
- [註 073] 임오년 : 1822 순조 22년.
- [註 07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075] 약·사·증·상(禴祀烝嘗) : 봄·여름·가을·겨울의 제사.
- [註 076] 헌체(獻替) : 선을 권하고 악을 못하게 함.
- [註 077]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 [註 078] 선두안(宣頭案) : 내수사(內需司)에 속한 노비(奴婢)들을 20년마다 자세히 조사하여, 임금께 새로 만들어 바치는 원적부(原籍簿).
- [註 079] 전모(典謨) : 《서경(書經)》 우서(虞書)편의 요전(堯典)·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
- [註 080] 풍아(風雅) : 《시경(詩經)》 육의(六義)의 하나.
- [註 081] 도·신(塗莘) : 도는 우(禹)임금의 아내 도산씨(塗山氏)를 맞이한 곳이고, 신은 문왕(文王)의 아내 태사(太姒)의 출신지로, 모두 고대(古代) 후비(后妃)의 출생지임.
- [註 082] 태임(太任) : 주 문왕(周文王)의 어머니.
- [註 083] 태사(太姒) : 주 문왕의 비(妃).
- [註 084] 갑오년 : 1834 순조 34년.
- [註 085] 기유년 : 1849 헌종 15년.
- [註 086] 구면(裘冕) : 왕비(王妃)의 성복(盛服).
- [註 087] 옥책(玉冊) : 제왕(帝王)·후비(后妃)의 존호(尊號)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옥(玉)에 새겨 놓은 간책(簡冊).
- [註 088] 동관(彤管) : 붉은 붓으로써 공적과 허물을 기록하는 여사(女史).
- [註 089] 세조(世祖) : 광무제(光武帝).
- [註 090] 선조 대왕은 종계(宗系)를 바르게 밝혔고 : 조선 왕조(朝鮮王朝)의 조상이 명(明)나라 서적에 잘못 기재된 것을 고치고자 주청(奏請)하여 바로잡은 일. 개국(開國) 이후 선조(宣祖) 때까지 말썽이 되었던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왕조의 태조(太祖)가 고려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어 누차 정정(訂正)을 주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하다가 선조 17년(1584) 주청사(奏請使) 황정욱(黃廷彧) 등을 보내 수정하였음. 종계 변무(宗系辨誣).
원문
○知敦寧李鶴秀疏略曰:
伏惟我純宗大王, 以中正純粹之姿, 受惟精惟一之法, 本之以躬行心得, 而達之以天德王道。 當建陵違豫之時, 寶齡尙在沖藐, 而親奉藥餌, 日夜焦泣, 曁罹大憂, 哭泣致哀, 至於近臣衛卒, 嗚咽不忍仰視, 殿宮之間, 隆養備至, 晨昏洞屬, 慈孝無間。 《傳》曰 ‘事孰爲大, 事親爲大。’ 於戲! 其盛矣。 春秋享祀之躬將, 而至于粢盛牲器, 禮幣工祝, 克敬克愼, 罔敢或愆。 歷拜先寢, 庸展霜露之感, 率以歲再, 推以至于異代, 陵墓祠廟, 提飭守臣, 以時節禁護之。 乙亥惠慶宮薨逝, 采館閣之博議, 據程朱之定論, 裁作折衷, 定爲九月之制, 辛巳孝懿王后昇遐, 因領敦寧金祖淳議, 新卜健陵, 擧灤遷之禮, 行魯祔之儀, 壬午綏嬪卒逝, 用大臣諸臣議, 服緦麻三月, 燕居縞素, 以終三年, 別嫌之議, 根天之誠, 於是乎兩無憾焉。 辛巳《皇淸通考》之自燕購來也, 載本朝景宗辛丑事, 誣衊罔極, 亟命專价, 辨正刊去, 誣奏句語, 价還以改正齎來, 乃告于廟。 《詩》曰 ‘禴、祀、烝、嘗, 是用孝享。’ 《傳》曰 ‘愼終追遠, 民德歸厚。’ 於戲! 其盛矣。 燕間之中, 常加戒愼, 嚴恭寅畏, 對越上帝, 或値象緯之告警, 水旱之爲災, 惕然兢懼, 引咎責躬, 求助之誠, 溢於辭敎, 廷臣獻替, 翕受嘉納, 有足以孚格天心。 《書》曰 ‘欽崇天道, 奉若天命。’ 於戲! 其盛矣。 勸課農桑而厚民生, 撙節經費而紓民力, 省征歛之不急, 蠲欠逋之旣久。 凡有賙賑, 預加講究, 旣捐內帑, 又停公稅, 以至官府常饍, 州縣正供, 竝皆裁損, 以補不給。 恒飭守牧, 時遣按廉, 窮陬遐澨, 階前萬里, 厲扎者醫藥之, 胔骼者掩瘞之, 嬰孩之棄諸道者, 給料而養之, 流丐之離其鄕者, 裹糧而還之。 庶獄庶愼, 民命攸係, 每値祁寒盛暑, 輒行疏放之典, 好生之德, 民皆悅服, 以至囹圍之空虛。 庚申初登寶位, 以先王遺意, 首焚宣頭案於通衢, 掖庭奴婢厥數屢萬, 導和迎祥, 迓續景命。 《書》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於戲! 其盛矣。 廈氈之上, 日接儒臣, 萬機之暇, 玩索編籍, 探究乎天人成命之原, 剖柝乎王霸義利之分, 絲綸之言, 雲漢之章, 侔典謨而配風雅。 《書》曰 ‘念終始典于學, 厥德修罔覺。’ 於戲! 其盛矣。 外而無盤敖之樂, 內而絶宴遊之私, 衣襨屢加, 澣濯帷帳, 或至補綴先王宮室, 弊則改之, 一椽一礎, 無所增飾。 《書》曰 ‘愼乃儉德, 惟懷永圖。’ 於戲! 其盛矣。 凡此事親奉先, 敬天恤民, 勤學崇儉之德, 實有列聖朝相授心法, 亦惟我聖考, 不勉而中, 不思而得, 致有此由百世等百王未有盛之聖德大業, 於戲! 豈不休哉? 惟我正宗大王, 在宥二十五年之間, 其苦心精義, 炳日星嚴斧鍼, 有一種背馳之倫, 滔朋醜類, 寔繁其徒, 必欲讎視而壞亂之, 我聖考, 赫然斯怒, 大行天討, 譬若禹鼎照燭, 神姦莫逃, 淑慝以辨, 民志以靖。 西洋邪敎, 瀆亂彝倫, 王法之所必誅, 而傳習旣久, 流播且廣, 甚至於喬木世家, 薦紳學士, 亦有染汚, 勢將燎原而潰河, 浸浸至於夷狄禽哭之域, 我聖考亟令鋤治, 誅其人而火其書, 必殄滅之無遺, 於是殆敎淸明, 正學益光。 關西土寇, 盜弄潢池, 末乃猖獗, 若蛇豕之荐食, 侵掠郡縣, 戕殺長吏, 以至轂下羌戎, 詿誤滋多, 我聖考命將往討, 戡定禍亂, 殲其渠魁, 釋其脅從。 於是西地悉平, 歌詠聖澤於湖山千里之外, 於戲! 我純考嵬烈大勳, 可不謂之盛哉? 《詩》云 ‘於乎前王不忘。’ 其可謂盛矣。 伏惟大行大王大妃殿下, 以塗莘之名門, 有任姒之至德, 陰功柔化, 洪贊我聖考三十五年郅隆之治。 當甲午崩坼之時, 己酉蒼黃之際, 勉從臣隣之請克循國朝故事, 再宣簾帷之化, 重抗裘冕之儀, 回宗社之綴旒, 措國勢於磐泰, 此史乘所記載耳目所記睹之未嘗有也。 於戲! 何其盛也? 於戲! 舟梁五十六年, 而勤勞宗社, 殷憂啓聖, 燕謨翼子, 迪我後, 以基東方萬億之休之功之德。 已有琬琰之刻, 彤管之記, 萬萬非臣可能讃述而揚厲之。 竊伏念惟天惟祖宗, 眷棐我邦家, 降之以女士之聖, 儷極媲尊, 佑治太平, 再奠寰宇, 洪濟艱難。 爲賢妃而助之者, 深爲聖母而成之者遠, 於戲! 豈不盛哉? 由是我純考默隲, 英顧於雲鄕冥邈之中, 以畢其攸受休而庸成其未克卒之志。 今夫純考之嵬功蕩烈, 繄惟聖母之陰相柔贊也, 聖母之懿範宏休, 亦惟純考之遺大投艱也。 傳 所謂 ‘親賢樂利, 不能忘者,’ 不其然乎? 我殿下久勞于外, 承太母之命, 入承大統, 踐位行禮, 夙夜憧憧於繼志述事之道, 而敬天法祖, 勤學愛民, 卽列聖朝之家法。 殿下嗣服之初, 太母親傳之殿下, 殿下親受之太母, 此其道, 豈有他哉? 卽惟我純考, 用以致三十五年莫尙之化者也。 殿下之事我太母, 承歡而奉誨者, 于今九年, 而太母之所以提誘敎誥, 不出此四者之元符, 則繼自今, 穆穆迓衡, 克紹我純考盛德大業, 亦惟在是矣。 我殿下顯親之孝, 準諸四海, 凡在崇報象成之典, 靡不用極。 傳曰 ‘大行受大名。’ 純宗大王, 議定廟號, 宜有所揄揚功烈, 允合經禮者焉。 《大戴禮》曰, ‘諡者, 行之蹟。’ 《禮》曰 ‘聞其諡而知其政,’ 稽純考之行, 考純考之政, 稱之以祖, 不亦宜乎? 說者曰, ‘創業之君稱祖, 繼體之君稱宗, 古今常典也。 兩漢四百年, 惟高祖、世祖也, 有宋三百年, 惟太祖也, 宋 高宗之議廟號, 尤袤難之。 皇明則惟太祖、成祖也, 我東則惟太祖大王、世祖大王、宣祖大王、仁祖大王, 而易名之典, 至嚴且重。 漢 文帝、唐 太宗、玄宗, 晋 元帝、宋 高宗, 雖爲百世不遷之廟, 皆不得稱祖。’ 臣亦曰 ‘祖功宗德, 兩隆幷美, 祖未必優於宗, 宗未必貶於祖, 而特以所遭之會而異其稱耳。’ 我世祖大王、仁祖大王, 以繼體之君而稱祖, 宣祖大王以辨宗系戡倭亂而稱祖, 此誠吾先君已行之典, 而於我國家禮, 亦宜也。 伏願殿下, 以臣芻蕘之言, 博詢廷臣, 若卿士大, 同則斯可爲一國共公之見, 而萬世不易之議也。
批曰: "我純考聖德至善, 卿言出於今日, 益切靡逮之慟, 事係莫重典禮, 當令收議矣。"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6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