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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실록 1권, 헌종 대왕 시장(諡狀)

헌종 대왕 시장(諡狀)

시장(諡狀)에 이르기를,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환(烉)이요 자(字)는 문응(文應)이며, 선각왕(宣恪王)의 손자이고 강목왕(康穆王)의 아드님인데, 정해년082) 7월 18일에 탄생하셨다. 강목왕께서는 세자(世子)로서 일찍 훙서(薨逝)하셨으므로 선각왕께서 왕을 세손(世孫)으로 삼아 대조(大朝)에 책봉을 청하니, 칙서(勅書)를 내려 ‘짐(朕)이 생각하건대, 왕의 종묘(宗廟)가 길이 이어가는 것은 국본(國本)이 관계되는 바이므로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청한 것을 허락하고 전위(專委)하여 대신(大臣)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가지고 가서 조선 국왕의 세손을 책봉하고 아울러 채폐(彩幣) 등 물건을 내리니, 왕과 세손은 조칙(詔勅)을 공손히 받아 본지(本支)의 경사를 도타이 하고 번병(蕃屛)을 길이 굳혀 종사의 복을 길게 하라. 공경하여 짐의 명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갑오년083) 에 이르러 왕이 비로소 8세가 되셨는데 선각왕께서 병환으로 누우시니, 왕이 밤낮으로 초조하고 황급하여 친히 약시중을 들었고 위독하시게 되어서는 대신(大臣)을 보내어 묘사(廟社)·산천(山川)에 기도하게 하셨다. 대우(大憂)를 당하여서는 안색(顔色)이 초췌하고 곡읍(哭泣)이 슬프며 집례(執禮)가 상제(常制)보다 더하시므로, 근신(近臣)·위졸(衛卒)이 모두 목메어 울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차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선각왕의 비(妃) 김씨(金氏)께서 연유를 갖추어 아뢰어 대조에 승습(承襲)을 청하시니,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왕비 김씨가 아뢰기를, 「너는 천성이 총명하고 어려서부터 인효(仁孝)를 도타이 하며 일찍부터 남의 어른이 될 덕을 지녀서 백성이 추대하기를 바라므로 승습을 책봉하기를 청한다」 하였다. 짐이 여정(輿情)에 따라 특별히 청을 허락하고 이에 관원을 보내어 조칙을 가지고 가서 너희 나라에 고하여 너를 조선 국왕으로 책봉하여 국정(國政)을 이어 다스리게 하고 아울러 너에게 고명·채폐 등 물건을 내리니, 너는 직무에 충실할 것을 서약하여 후복(候服)을 잇기를 힘쓰고 충순(忠順)을 선양하여 천가(天家)의 번병(藩屛)이 되어야 한다. 너는 공경하라. 짐의 명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대신(大臣)·백관(百官)이 전정(殿庭)에서 호소하여 사복(嗣服)을 청하였으나 왕이 소리내어 울며 윤허하지 않다가 여러 날이 지나서야 비로소 애써 따르셨다. 왕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을 지녀 기량이 우뚝하고 총예(聰睿)가 뛰어나시므로 선각왕께서 매우 특별히 사랑하셨다.

저위(儲位)에 책봉되고 나서 사부(師傅)·빈료(賓僚)를 두어 보도(輔導)하게 하였는데, 강연(講筵)에서 접할 때마다 왕이 읍양(揖讓)하고 배궤(拜跪)하는 것이 으레 의절(儀節)에 맞았고 강독(講讀)하고 논변(論辨)하는 것이 근본에 투철하셨다. 즉위하시게 되서는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정령(政令)·시조(施措)와 사위(事爲)·제치(制置)는 선대(先代)의 의훈(懿訓)을 공경히 받들고 선왕의 성헌(成憲)을 능히 살펴서 옳은 것은 본받아 어기지 않고 잊지 않으시니, 조정이 함께 삼가고 공경하며 백성이 안정하여 모두들 명주(明主)가 나셨다 하였다. 왕이 위로 조왕비(祖王妃)와 부왕부(父王妃)를 받들되 성실하고 전일(專一)하여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시니, 궁위(宮闈) 안에 화기(和氣)가 융화(融化)하였다. 생신·세시(歲時)가 되면 혹 잔을 올려 헌수(獻壽)하기도 하고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進賀)하기도 하셨으며, 미루어 뭇 신하들에게 상사(賞賜)가 두루 미치고, 조사(朝士)·서인(庶人)의 나이 많은 늙은이에게 자급(資級)을 가하였으며, 미백(米帛)을 내려 주시어 은택이 널리 미친 것을 백성이 보고 느꼈으니, 이것은 다 왕의 천성(天性)에 우러난 효성 때문에 전국에서 효도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조상을 받드는 일에 공경과 효성을 다하여 종묘의 향에는 몸소 행하되 삼가는 마음이 뚜렷하고 생뢰(牲牢)·전작(奠爵)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살피며 밤을 지새워 가면서 그 일을 행하되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경건하시니, 지위에 있는 관원들도 모두 분주히 추장하여 집사(執事)가 예(禮)에 맞고 어김이 없었다. 혹 의례(儀禮)를 섭행(攝行)하면 반드시 손수 향축(香祝)을 전하시고 또 근시(近侍)를 보내어 예의(禮儀)를 공경히 살피게 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으셨다. 선세(先世)의 원침(園寢)에는 길이 추모하여 해마다 봄·가을로 번갈아 성알(省謁)하여 선세를 추모하는 슬픈 느낌을 펴셨다. 강목왕의 원침(園寢)은 풍수(風水)가 좋지 않으므로 왕이 늘 근심하고 송구하게 여겨 길조(吉兆)084) 를 다시 잡아 옮겨 모시는 예(禮)를 빨리 거행하셨는데, 스스로 터를 보고 자리를 정하며 일을 갖추고 공역(工役)을 감독한 일까지도 몸소 검칙(檢飭)하여 반드시 성신(誠信)하게 하시니, 백관(百官)·만민(萬民)이 다 그지없는 효사(孝思)를 우러렀다. 국사(國社)와 산천(山川)의 온갖 신(神)에게도 모두 경례(敬禮)하고 회유(懷柔)하여 공경히 생각하고 삼가 제사하되, 혹 가뭄의 재앙이 있으면 규벽(圭璧)085) 을 두루 쓰고 정성스러운 뜻으로서 제향을 올렸으며 깊은 밤에 궁중에서 향을 피우고 한데에서 기도하기까지 하여 명응(冥應)이 메아리 치듯한 일도 있었다.

사대(事大)하는 일로 말하면 더욱이 정성을 극진히 하여 공경하고 삼가서 제후(諸侯)가 지킬 법도를 닦으셨다. 시절(時節)과 연례(年例)의 공헌(貢獻)과 특별히 진주(陳奏)·사은(謝恩)이 있으면 사신(史臣)은 반드시 삼가 기리고 방물(方物)은 반드시 몸소 점검(點檢)하였다. 중국에서 조칙을 선포하려 오는 행차에는 특별히 상경(上卿)을 보내어 국경에서 영접하게 하고 원우(院宇) 등 영접하는 곳과 음식 등 공급하는 데에 드는 것은 조금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게 하셨다. 왕성(王城)에 이르게 되면 몸소 교관(郊館)에서 맞이하고 궁정(宮庭)에서 조칙(詔勅)을 받았으며, 연향(宴響)과 응접에 있어서는 공경과 예절을 다하셨다. 혹 본국(本國)의 백성이 국경을 범하는 일이 있으면 벌주는 것이 반드시 준엄하였고 중국 사람이 바다에서 표류하여 오는 일이 있으면 자장(資裝)하여 보내는 것이 반드시 후하여, 흠정(欽定)한 약속을 공경히 준수하고 감히 조금도 어기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특별히 대조(大朝)에서 돌보는 은택을 입어 내복(內服)과 같이 여겨 총애하여 내리는 것이 많았고 융숭한 사은(私恩)이 도타워서 상격(常格)보다 훨씬 더하였다. 대조에서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덕을 힘입었으나, 대개 또한 왕의 정성이 미덥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늘 학문에 힘쓰는 공부에 일념(一念)이 부지런하시어 이미 강연(講筵)에 늘 참여하고도 혹 소대(召對)를 내려 유신(儒臣)을 인접(引接)하셨다. 토론하고 강구하는 것이 위로는 요(堯) 순(舜)이 심법(心法)을 전수한 것에 거슬러 올라가고 아래로는 송대(宋代) 유현(儒賢)의 성리설(性理說)에 미쳐서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경험하여 관통하고 투철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가할 때에는 늘 경적(經籍)을 대하여 밤이 깊어져도 피로한 줄 모르고 묘계(妙契)·오지(奧旨)에 참된 공부를 깊이 진취하셨다. 동정(動靜)·어묵(語默)이 규구(規矩)를 어기지 않고 짧은 글이나 짧은 말씀도 다 전훈(轉訓)에 맞아서 문장에 나타나는 것이 운한(雲漢)이 비추어 돌듯이 빛나고 뚜렷한 것을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었다. 행사(行事)를 보면 누대(累代)의 문(文)을 숭상하는 정치를 이어받아 유술(儒術)을 존상(尊尙)하고 도학(道學)을 표장(表章)하셨다. 선현(先賢)을 제사하는 곳에는 늘 뇌유(酹侑)086) 를 보내고 은거(隱居)하는 절도가 있는 선비에게는 여러 번 초연(招延)을 부지런히 하여 일세(一世)의 추향(趨向)을 바루고 일왕(一王)의 표준을 세우셨다. 윤상(倫常)·명의(名義)에 대해서는 더욱 더 천명하였고 충절(忠節)을 포장(褒奬)하는 일은 더욱이 남김이 없이 관작(官爵)과 시호(諡號)를 추증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여항(閭巷)의 서인(庶人)에 대해서도 한 가지 선행(善行)과 한 가지 뛰어난 절조가 있으면 또한 다 가상(嘉尙)하고 특이한 것을 표창하여 여문(閭門)에 정표(旌表)하고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풍성(風聲)을 세워 전국이 흥기(興起)하고 권장되게 하셨다. 소박한 것을 도타이 숭상하고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배척하여 법복(法服)087) 이 아니면 비단 종류를 가까이 하신 적이 없었고 한가히 계실 때에는 세탁한 옷을 입으시고 상선(常膳)은 풍성한 물건을 거절하셨다. 안에서는 안일(安逸)한 사심(私心)이 없었고 밖에서는 즐겨 노는 낙(樂)이 없으시어 몸소 앞장서서 이끌어 세상이 사치를 버리고 검소한 풍속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것은 다 왕이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끝에 참된 마음으로 참된 정치를 행하여 스스로 안일하지 않으신 것이다. 안으로는 각사(各司)로부터 밖으로는 제도(諸道)에서 장소(章疎)·문독(文牘)088) 이 구름처럼 쌓이고 몰려오는 것을 펴 보고 재결하되 게을리하지 않고 조금도 지체하는 것이 없으셨다.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모두 받아들여 시행하시고 비록 언론이 극단에 달하여 혹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배척하여 멀리하신 적이 없고 다 포용하여 너그러이 용서하여 숨기지 않는 풍습을 기르고 때때로 영을 내려 구언(求言)하셨다. 재변을 당하면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선(饌膳)을 줄여 두렵게 여기고 삼가며 더욱이 간언(諫言)을 받아들여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일을 돕기에 바쁘셨다. 늘 소민(小民)을 화합시키고 양리(良吏)를 선택하는 것을 정치하는 근본으로 삼으시어, 무릇 감사(監司)·수령(守令)을 차출하여 보낼 때에는 문득 인견(引見)하여 거듭거듭 면계(勉戒)하셨다. 다스림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말[馬]을 내려 총애하고 품계(品階)를 올려서 영예롭게 하셨다. 때때로 수의직지(繡衣直指)089) 를 보내어 남몰래 시골을 다니며 백성의 고통을 알아보고 장리(長吏)를 안렴(按廉)하여 법을 어긴 것을 잡아내게 하셨다. 또 재상(宰相)의 반열에 있는 신하들을 시켜 청백(淸白)한 관리를 뽑아 아뢰고 장오(贓汚)에 범한 율(律)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으며 순리(循吏)·양리(良吏)를 특별히 천거하게 하여 채용하셨다. 이 때문에 관리가 다 자수(自修)하고 백성이 실혜(實惠)를 입어 회유하고 보전하는 은택이 가난한 집에까지 미쳤다. 늘 백성을 보전하는 요체는 농사를 권과(勸課)하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 하시고, 번번이 새해를 당하면 특별히 교령(敎令)을 내려 목수(牧守)를 면칙(勉飭)하여 열 줄의 하교가 곡진하셨다. 종량(種糧)을 도와 주어 경작이 제 때에 미치게 하고 흉년을 당하면 창고를 열어서 진휼(賑恤)하고 곡식을 옮겨서 구제하며 내탕(內帑)의 재물까지 덜어내어 그 부족한 것을 보태시니, 가까이는 서울로부터 멀리는 변방에 이르기까지 은혜가 널리 베풀어져서 버려지고 여위는 자가 없었다. 제도(諸道)에서 불탄 집과 물에 빠져 죽은 백성을 아뢴 것은 반드시 항전(恒典) 이외에 더 돌보고 심지어는 특별히 근신(近臣)을 보내어 위무(慰撫)하게 하셨다. 전후에 견감(蠲減)한 정사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해민(海民)이 봉납(封納)하는 전복을 멈추고 영남(嶺南)의 인삼을 임시로 감면하여 주신 것은 다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오래 체납된 환곡(還穀)을 영구히 면제하고 공납(貢納)할 것이 축났으나 문서에 남아 있는 것을 거두지 말게 하신 것도 특별한 은혜에 관계되는 것이다. 재황(災荒)이 눈에 가득하여 근심이 매우 크더라도 환성(歡聲)이 사방에 미치니, 백성이 다 편안히 살며 생업을 즐겼다. 또 형전(刑典)을 흠휼(欽恤)하는 것을 정치의 선무(先務)로 삼아 경계하고 삼가며 마음에 새겨 생각하여 크게 결단하시어 경중(輕重)에 상도(常道)가 있고 정법(情法)이 곡당(曲當)하되 반드시 살릴 방도를 찾아서 애경(哀敬)하는 뜻을 다하셨다. 재변을 당하면 죄를 재심하여 소방(疎放)하신 것이 많았고 한추위·한더위에는 늘 근시를 보내어 옥에 갇힌 자를 소방하시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백성의 마음에 두루 미쳤다.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을 임용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삼가시어 오로지 그릇에 따라 쓰고 재능에 맞게 하되 선택은 반드시 정하게 하고 진용(進用)에는 한정된 방도가 없게 하며 소원(疏遠)한 자에게 차이를 두지 않았고 친압(親押)한 자에게 기리우는 것이 없으셨다. 그래서 한 가지 기예(技藝)와 한 가지 재능이 있는 자도 각각 그 장점을 발휘하게 하니 초야의 한미한 자도 모두 다투어 나아가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매양 대정(大政)090) 때에는 유은(幽隱)을 찾고 엄체(淹滯)한 자를 뽑으라고 분부를 내리시고 공신(功臣)·염리(廉吏)의 자손과 용맹을 세우고 절조를 나타낸 자의 후예를 특별히 수록(收錄)하여 후선(候選)091) 하게 하신 것은 왕이 어질고 재능 있는 자를 임용하고 충성한 자에게 보답하여 세상을 경려하기 위한 정사이다. 모든 신하들에게 예우(禮遇)하지 않음이 없었고 대신에게는 더욱 경대(敬待)를 더하여 위임을 도타이 하였으며, 백성과 나라에 관한 큰일은 다 물어서 익히 의논하고 참작하여 검토해서 정당하게 되도록 힘쓰셨다. 매양 인견(引見) 때에는 혹 편찮고 피곤하시더라도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고서는 만나지 않으셨으니, 왕이 조의(朝儀)를 삼가고 정사를 힘쓰신 덕의(德意)가 지극하다 하겠다.

향국(享國)은 겨우 1기(紀)092) 남짓 하였으나 정치가 성취되고 시국이 안정되었으며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바야흐로 성대한 세상을 기대하였는데 불행히 기유년 6월 6일 대점(大漸)하여 창덕궁(昌德宮)중희당(重熙堂)에서 훙서(薨逝)하시니, 춘추는 23세이시다. 임종에 대신·근신·예관(禮官)이 모두 입시(入侍)한 것은 마지막을 바루는 예(禮)이거니와, 왕궁(王宮)·국도(國都)로부터 궁산(窮山)·절해(絶海)의 심항(深巷)·유곡(幽谷)에 이르기까지 모두 분주하여 슬피 우는 것이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으니, 인성(仁聲)·인문(仁聞)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왕비 김씨(金氏)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따님이고 정유년093) 에 가례(嘉禮)를 행하였으나 일찍 훙서하셨고, 계비(繼妃) 홍씨(洪氏)익풍 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따님이고 갑진년094) 에 가례를 행하셨는데, 모두 대조(大朝)의 책봉과 고명(誥命)을 받으셨다. 왕은 총명하고 영달(英達)한 자질로서 강건(剛健)하고 순수한 덕을 지니셨다. 강학(講學)이 부지런한 것은 끝내 달라지지 않았고 율신(律身)의 엄한 것은 널리 미치고 깊은 인애(仁愛)가 마음에 간직되시어 은택이 백성에게 입혀지며,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시어 근습(近習)이 억제되고 조정(朝廷)을 바루시어 공도(公道)가 확장되며, 대중(大中)을 세워 인기(人紀)를 닦고 정학(正學)을 숭상하여 선비의 추향(趨向)을 바루어, 현능(賢能)을 진용(進用)하되 널리 유일(遺逸)를 찾고 백성이 편안하되 아녀자에게까지 미쳤으니, 다 옛 임금에게서도 드물게 들리는 것이다. 바야흐로 선세(先世)의 광명을 거듭하고 은덕이 널리 입혀지는 운회를 이어받아 일대(一代)의 태화(太和)하고 대동(大同)하는 정치를 행할 때를 당하여 동토(東土) 수천 리가 모두 광휘(光輝)를 입고 고택(膏澤)에 젖었는데,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마침내 장수(長壽)를 아껴서 미처 성인(聖人)이 그 도(道)를 항구하게 하여 천하가 화성(化成)되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니, 신민의 아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오직 그 넓고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니, 신민의 아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오직 그 넓고 아름다운 규범이 간책(簡策)에 실려 있고 성덕(盛德)·대업(大業)이 조야(朝野)에 크게 나타난 것은 천지에 세워서 백세(百世)를 기다릴 수 있으니, 선왕께서 끼치신 것은 어진이를 가까이 하고 이로움을 즐겁게 여겨 영세토록 잊지 않을 뿐이 아닐 것이다. 아아! 거룩하시며 아아! 애통하도다."

하였다. 【이조 판서 이약우(李若愚)가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541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82]
    정해년 : 1827 순조 27년.
  • [註 083]
    갑오년 : 1834 순조 34년.
  • [註 084]
    길조(吉兆) : 좋은 묘역.
  • [註 085]
    규벽(圭璧) : 신을 제사할 때에 쓰는 옥.
  • [註 086]
    뇌유(酹侑) : 제수(祭需).
  • [註 087]
    법복(法服) : 곤룡포.
  • [註 088]
    문독(文牘) : 문서(文書).
  • [註 089]
    수의직지(繡衣直指) : 암행 어사.
  • [註 090]
    대정(大政) : 해마다 음력 6월과 12월에 관원의 치적(治績)을 종합 심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영전·좌천 또는 파면시키는데, 12월의 것이 규모가 커서 대정(大政)이라 하였음.
  • [註 091]
    후선(候選) : 자격을 주어 두고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뽑아 씀.
  • [註 092]
    1기(紀) : 12년.
  • [註 093]
    정유년 : 1837 헌종 3년.
  • [註 094]
    갑진년 : 1844 헌종 10년.

○諡狀:

國王姓李氏, 諱, 字文應, 宣恪王之孫, 康穆王之子也, 以丁亥七月十八日, 生。 康穆王, 以世子早薨, 宣恪王以王爲世孫, 請冊封于大朝, 降勑曰, ‘朕念王宗祧遠紹, 國本攸關, 特沛恩施, 允玆陳請, 專遣大臣, 齎捧誥命, 封爲朝鮮國王, 世孫竝賜彩幣等物, 惟王曁世孫, 綸綍寵承, 益篤本支之慶, 屛藩永固, 用延宗社之休, 欽哉無替朕命。’ 至甲午, 王, 始八齡, 而宣恪王寢疾, 王日夜焦遑, 親奉藥餌, 旣革, 遣大臣禱于廟社山川。 及遭大憂, 顔色之戚, 哭泣之哀, 執禮踰常制, 近臣衛卒, 莫不嗚咽失聲, 不忍仰視。 宣恪王妃 金氏, 具奏請承襲大朝, 降勑曰, ‘王妃金氏奏稱, 「爾賦性聰明, 幼敦仁孝, 夙有長人之德, 爲國人所願戴, 請冊承襲, 朕俯循輿情, 特允所請。」 玆遣官齎詔, 誕告爾國封爾爲朝鮮國王, 繼理國政, 竝賜爾誥命彩幣等物, 爾宜永矢靖共, 懋纉承於侯服, 迪宣忠順, 作屛翰於天家。 爾其欽哉, 毋替朕命。’ 大臣百官, 庭籲請嗣服, 王, 號哭不許, 至屢日, 然後始勉從之。 王, 幼有異質, 器度岐嶷, 聰睿絶倫, 宣恪王甚奇愛之。 旣冊儲, 設師傅賓僚以輔導之, 每筵接, 王揖讓拜跪, 動中儀節, 講讀論辨, 洞徹本原。 逮其踐阼, 尙在沖齡, 而政令施措事爲制置, 恭奉先代之懿訓, 克監先王之成憲, 是則是傚, 不愆不忘, 朝著寅協, 民物靖謐, 翕然稱明主出焉。 王, 上奉祖王妃曁父王妃, 晨昏洞屬, 愛敬備至, 宮闈之內, 和氣融洽。 及夫生辰歲時, 或稱觴而獻壽, 或拜箋而進賀, 推以鍚類, 遍逮群下朝士庶人之高年耆老, 加以資級, 賜以米帛, 恩渥普覃, 百姓觀感, 皆由王根天之性, 有以致一國之興孝。 奉先之節, 克敬克孝, 宗廟祀享, 輒皆躬行, 齊心著存, 至于牲牢樽爵, 一一省眂, 徹宵將事, 不懈益虔, 在位諸官, 亦莫不駿奔, 執事率禮無愆。 或攝儀則必手傳香祝, 又遣近侍, 儆察禮儀, 恒以爲式。 先世園寢, 永言追慕, 每歲春秋, 輪行省謁, 以展霜露之感。 康穆王園寢風水, 未克允臧, 王, 常懷憂懼, 改卜吉兆, 亟行遷奉之禮, 自相基定位至庀事董工, 躬親檢飭, 必誠必信, 百官萬民, 咸仰孝思之無窮。 以至國社山川百神, 莫不敬禮, 莫不懷柔, 寅念毖祀, 而或有亢旱之災, 圭璧徧擧, 精意以享, 至於深夜宮中, 焚香露禱, 以致冥應之如響。 若夫事大之節, 尤極盡誠, 小心翼翼, 謹修侯度時節。 年貢與別有陳奏謝恩行人, 必愼揀, 方物必親檢, 而皇華宣詔之行, 特遣上卿儐于境上, 院宇延接之所, 饔餼供億之需, 無一不整飭。 及到王城, 躬迎于郊館, 祗受于宮庭, 宴饗酬接, 致敬盡禮。 或有本國民之犯境, 糾罰必嚴, 大朝人之漂海, 資送必厚, 恪遵於欽定約束, 罔敢或違。 以是而特被大朝眷恤之澤, 視同內服, 寵賫便蕃, 隆私厚渥, 逈出常格。 雖緣於大朝字小之德, 而蓋亦王之忱誠, 有以孚格而然也。 其於典學之工, 一念孜孜, 旣常參講筵, 或宣賜召對, 引接儒臣。 討論講究, 上溯心法傳授, 下及賢性理之說, 無不心悟體驗, 貫通透徹。 而燕閑之暇, 常對經籍, 至于夜深, 不知爲疲, 而竗契奧旨, 深造眞工。 動靜語默, 不違規矩, 隻字片言, 皆合典訓, 而發爲文章, 雲漢昭回, 光華所著, 人皆可得而見。 其見諸行事, 則承累代右文之治, 尊尙儒術, 表章道學, 先賢俎豆之所, 常致酹侑, 邱園經行之士, 屢勤招延, 以正一世之趨向, 以立一王之章程。 至於倫常名義, 益加闡明, 褒忠奬節, 尤無餘蘊, 贈以爵諡官其子孫。 雖在閭巷匹庶, 苟有一行之善, 一節之卓, 亦皆嘉尙表異, 旌閭給復, 樹之風聲, 匝域興勸。 敦尙樸素, 斥去靡麗, 如非法章, 未嘗近錦綺之屬, 燕居進澣濯之衣, 常膳絶豐盛之品。 內而無宴安之私,外而無盤遊之樂, 身先而導率之, 俾斯世歸於棄奢入儉之俗。 此皆王躬行心得之推餘, 而以實心行實政, 不自暇逸。 內而各司, 外而諸路章疏文牘, 雲委坌集, 披覽裁決, 不以爲倦, 無少滯留。 廣開言路, 翕受敷施, 雖有極言竭論, 亦或不槪, 而未嘗斥絶屛遠, 皆爲包容寬假, 以長其不諱之風, 而時或下令求言。 若遇災沴, 避殿減膳, 恐懼惕厲, 尤急於納言, 以助修省。 常以諴小民選良吏, 爲出治之本。 凡監司守令之差送也, 輒賜引見, 申申勉戒。 其有治理優異者, 錫馬而寵之, 增階而榮之。 時遣繡衣, 直指潛行鄕曲, 訪求民隱, 按廉長吏, 剌擧非法。 又令宰列諸臣, 抄淸白之吏, 議贓汚之律, 別薦循良, 採用施行。 因玆而吏皆自修, 民蒙實惠, 懷保之澤, 達於蔀屋, 常謂保民之要, 莫切於勸課農功, 每當歲首, 特下敎令, 勉飭牧守, 十行諄諄。 資助種糧, 耕耘及時, 若値荒年饑歲, 發倉而賑之, 移粟而救之, 至捐內帑, 補其不給, 近自城闉, 遠及陬澨, 子惠普施, 罔有捐瘠。 諸道以燒戶渰民聞者, 必加恤於恒典之外, 甚則別遣近臣慰撫之。 前後蠲減之政, 不一二數, 而海鰒之停封, 嶺蔘之權減, 皆出特恩。 宿糴之許以永停, 貢逋之勿徵遺在, 亦係異渥。 雖災荒溢目, 憂虞孔殷, 而歡聲四達, 民皆安生而樂業。 又以謂欽恤刑典, 爲爲治之先務, 而兢兢致愼, 服念丕蔽, 輕重有倫, 情法曲當, 而必求傅生之路, 以盡哀敬之義。 遇災審讞, 多所決放, 祁寒盛暑, 恒遣近侍, 疏釋囚繫, 好生之德, 洽于民心。 知人任人, 其難其愼, 專以器使, 惟才是適, 而揀選必精, 進用無方, 無間於疏遠, 無蔽於昵近。 於是一藝一能, 各效其長, 草野寒畯, 莫不競進。 每於大政, 輒下蒐訪幽隱, 振拔淹滯之敎, 功臣廉吏之子孫, 立慬效節之後裔, 別爲收錄而候選, 卽王所以任賢使能, 酬忠勵世之政。 而凡百臣隣, 無不禮遇, 至於大臣, 尤加敬待, 尤篤委任民國大事, 輒皆延訪熟議, 參酌商確, 務歸正當。 每引見, 雖或疾㞃, 不衣冠不見, 王之愼朝儀, 懋政事之德意, 可謂至矣。 享國僅一紀有餘, 而政成治定, 化行俗美, 方期郅隆之盛, 不幸於己酉六月初六日壬申, 大漸, 薨于昌德宮重熙堂, 春秋二十有三。 臨終, 大臣近臣禮官, 竝入侍, 正終之禮也, 自王宮國都, 至于窮山絶海深巷幽谷, 莫不奔走哀號, 如喪父母, 可見仁聲仁聞, 入人之深也。 王妃 金氏, 永興府院君 祖根之女, 丁酉行嘉禮, 早薨, 繼妃 洪氏, 益豐府院君 在龍之女, 甲辰行嘉禮, 竝膺大朝冊封誥命。 王, 以聰明英達之資, 有剛健純粹之德。 講學之勤, 罔間終始, 律身之嚴, 一循禮法, 至孝根性而化孚於家國, 深仁存心而澤被於生靈, 嚴宮禁而近習裁抑, 正朝廷而公道恢張, 建大中而修人紀, 崇正學而端士趨, 賢能進而旁求遺逸, 民庶綏而至及婦孺, 皆古昔后王之所罕聞也。 方當承先世重熙累洽之運, 做一代太和大同之治, 環東土數千里, 無不衣被乎光輝, 涵濡乎膏澤, 而天降大割, 竟靳遐齡, 未及見久道化成之休, 臣民之痛, 曷有其極? 惟其宏規懿範, 布在於簡策, 盛德大業, 丕顯於朝野, 可以建天地而俟百世, 非特親賢樂利, 沒世不能忘而已。 嗚呼! 盛矣, 嗚呼! 痛哉。 【吏曹判書李若愚製。】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541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