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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1권, 순조 대왕 시장(諡狀)

순조 대왕 시장(諡狀)

시장(諡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왕(國王)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공(玜), 자(字)는 공보(公寶)공선왕(恭宣王)072) 의 아드님이요 각민왕(恪愍王)073) 의 손자이며, 장순왕(莊順王)074) 의 증손자이다. 처음 공선왕이 늦도록 저사(儲嗣)를 두지 못하자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075) 가 특별히 복(福)자의 신한(宸翰)을 내려 기대한다는 뜻을 보였었는데 경술년076) 6월 18일 빈(嬪) 박씨(朴氏)가 왕을 탄생하였다. 이날 상서로운 무지개가 내원(內苑)의 샘에서 뻗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길조로 여겼다. 왕비(王妃) 김씨(金氏)가 데리고 와서 자신의 아들로 삼고 장차 성장하기를 기다려 저부(儲副)로 세우기 위하여 먼저 대조(大朝)이고 주달하니 고종 순황제가 가상히 여겨 허락하였다.

왕은 총예(聰睿)가 아주 뛰어난 자질과 인효(仁孝)가 특출한 성품이어서 어려서 놀이를 하면서도 항상 부왕(父王)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드러운 안색에 깊은 사랑을 지녔던 것은 타고난 천성에 근본하였으므로 공선왕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또 올바른 도리로 잘 길러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몸소 이끌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덕기(德器)가 일찍 드러나고 학문이 점차 성취되기에 이르렀다. 인하여 빈료(賓僚)를 잘 선발하여 강학(講學)에 도움을 주게 하였는데 질의하고 문난(文難)하는 것이 보통사람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목을 길게 빼고 기대하게 되었다.

경신년077) 에 이르러 왕의 나이 11세였는데, 관례(冠禮)를 하고 종묘(宗廟)에 알현하였다. 그리고 전에 내린 성지(聖旨)의 내용에 의거 세자(世子)에 책봉해줄 것을 청하여 이미 인종 예황제(仁宗睿皇帝)078) 의 은혜로운 허락을 받았는데 책봉에 대한 칙사(勅使)가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공선왕이 갑자기 훙서(薨逝)하였으므로 증조모(曾祖母) 장순 왕비(莊順王妃) 김씨(金氏)가 왕에게 국사(國事)를 권서(權署)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주문(奏文)을 갖추어 왕위(王位)의 습봉(襲封)을 청하니, 대조(大朝)에서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그대가 대대로 충정(忠貞)을 독실히 하고 공순(恭順)이 일찍부터 드러났으며 번방(藩邦)의 법도를 잘 이루어 놓고 선유(先猷)를 힘써 계승한 것을 생각하여 이에 여정(輿情)을 굽어 따라서 청한 내용을 윤허함으로써 그대를 조선 국왕(朝鮮國王)으로 봉하여 계속해서 국정(國政)을 다스리게 한다. 아울러 채폐(彩幣) 등의 물품도 하사한다. 그대는 전상(典常)을 따라 큰 복을 더욱 빛나게 하여 은혜로운 용광(龍光)을 받도록 힘쓰고 밝은 연모(燕謨)를 더욱 잘 꾸며 아름다운 명예를 계승하도록 힘쓴다.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근면함으로써 종사(宗社)를 포상(苞桑)079) 처럼 더욱 공고하게 하고 그 덕을 잘 닦아서 본지(本支)080) 에게 반석(盤石) 같은 편안함을 물려주도록 하라. 근신하여 짐(朕)의 명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왕은 선부왕(先父王)에게 병환이 있을 처음부터 직접 약이(藥餌)를 받들면서 주야로 초조하게 애를 태웠으며, 대우(大憂)를 당하게 되자 슬피 곡읍(哭泣)하면서 상례(喪禮)를 거행하는 것이 성인(成人)보다도 나았으므로 근신(近臣)과 위졸(衛卒)들도 모두 오열하면서 실성(失聲)하여 차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대신(大臣)과 백관(百官)들이 복합(伏閤)하여 섭위(攝位)할 것을 청하자 왕이 굳이 허락하지 않다가 곧이어 증조비(曾祖妃)와 모비(母妃)의 간곡한 권유를 받들고서야 이에 마지 못하여 힘써 따랐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하였으므로 작위(作爲)할 것이 있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또한 편안히 지낼 겨를도 없었다. 안으로는 궁위(宮闈)를 높이 봉양하여 아침 저녁으로 공경하고 조심하였으므로 자효(慈孝)에 흠결이 없었으며, 밖으로는 전궤(奠饋)를 독실히 하여 아침 저녁으로 통곡함에 있어 애경(哀敬)을 다 함께 극진히 하였다. 그리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제사[祀]를 삼가고 군대를 다스리는 모든 정사에 대해서는 조선(祖先) 이래 서로 전수하여 온 범훈(範訓)과 선부왕(先父王)의 성헌(成憲)을 따르고 계승하여 혹시라도 실추시킨 것이 없었다. 날마다 강연(講筵)에 나아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옛 성인(聖人)이 정일(精一)하게 서로 전수하였던 심법(心法)과 역대(歷代) 임금의 치란과 득실의 자취를 구하고 국사(國事)를 분명히 익히고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소 신공(臣工)들이 조심하면서 서로 경계하였고 백성들이 크게 화합되어 흡연(翕然)히 성덕(盛德)을 칭송하게 되었다.

국제(國制)에 액서(掖署)의 노비들은 대대로 평민(平民)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그 수효가 거의 수만 명에 달하자 왕은 이를 불쌍히 여겨 제일 먼저 선부왕(先父王)의 유의(遺意)라는 것으로 그 문적(文籍)을 큰 거리에 내어다 태우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기 그들의 삶을 즐기게 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고무되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의 인애가 지극하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화기(和氣)를 도양(導揚)하고 휴명(休命)을 계속하여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마음을 미루어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여 백성의 산업을 후하게 하고 경비(經費)를 조절하여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정렴(征斂) 가운데 급하지 않은 것은 매양 감하여 줄일 것을 의논하고 포흠(逋欠) 가운데 너무 오래된 것은 자주 견감시키기에 이르렀다. 일체의 모든 일을 동요시키거나 번거롭게 하지 않고 휴양(休養) 함육(涵育)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대저 주진(賙賑)에 관계된 일은 미리 강구하여 혹 내탕(內帑)의 저축을 내어 놓기도 하고 혹 공세(公稅)를 정지시키기도 하는가 하면 궁부(宮府)의 상선(常膳)과 주현(州縣)의 정공(正供)도 또한 모두 재량해서 덜어줌으로써 백성이 넉넉하지 못한 것을 보충시켜주고, 돌보아 아끼는 것이 없게 하라는 것으로 항상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를 지닌 방백(方伯)과 수령(守令)들을 계칙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안렴사(按廉使)를 보내어 근만(勤慢)을 고찰하여 출척(黜陟)시켰기 때문에 비록 먼 지방 궁벽한 곳의 백성들일지라도 뜰앞에 있는 것처럼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아무리 혹심한 기근이 들어도 끝내 죽어서 구렁에 나뒨구는 걱정이 없게 되었다.

여역(癘疫)을 만난 경우에는 의약(醫藥)으로 널리 구제하여 주고 해골(骸骨)이 드러나 나뒹구는 경우에는 이를 수습하여 묻어주는 은혜를 널리 베풀었으며, 길에 버려진 어린아이는 요미(料米)를 지급하여 기르게 하고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다니면서 걸식하는 사람에게는 식량을 싸주어 돌아가게 하는 등 진실한 마음으로 실제의 정치를 행하여 한결같이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이 하면서 애연(藹然)히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그런 마음이 넘쳐 흘렀다.

항상 형옥(刑獄)이라는 것은 백성의 목숨과 관계가 되는 것이고 다스림을 보조하는 기구라는 것으로, 한추위와 한더위에는 번번이 소방(疏放)시키는 법을 행하여 상례로 삼았다. 대벽(大辟)081) 의 경우에는 반드시 삼복(三覆)하게 하여 한 사람이라도 원통함이 있게 되면 어쩌나 하고 염려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지극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열복(悅服)하였으며, 간혹 영어(囹圄)082) 가 텅 비기도 하였다.

신미년083) 관서(關西)에서 토구(土寇)가 발생하여 그 난리에 잘못 휩쓸려 들어간 사람이 많았는데 왕이 장차 장수에게 명하여 토평(討平)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왕이 주벌(誅罰)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나 관군(官軍)이 그 난을 평정하기에 이르러서는 또 빨리 명령을 내려 그들의 괴수는 섬멸하되 협박에 의하여 따른 사람은 모두 사면시키고 죄를 다스리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므로 관서의 난이 평정되자 모두 왕의 큰 도량에 감복하였다.

왕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매양 정학(正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는데, 당시 서양학(西洋學)에서 유파(流播)된 것을 일종의 간사하고 망령된 무리들이 은밀히 서로 전습(傳習)하여 이륜(彛倫)을 더럽히고 어지럽혔으므로 왕이 벌컥 성을 내어 말하기를, ‘이는 기강을 간범하고 정리(正理)를 어긋나게 하는 것이 극심한 것으로 반드시 남김없이 섬멸한 연후에야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고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철저히 조사하여 엄격히 다스린 다음 방금(邦禁)을 크게 게시(揭示)하여 다시는 더럽히는 일이 없게 하였다.

왕의 가법(家法)은 본디 선조(先祖)를 받드는 예절과 상하로 천신(天神)·지기(地祇)에 관한 예절에 있어서 의문(儀文)과 품식(品式)이 찬란하게 환히 갖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왕은 삼가 봉행하면서 감히 어기는 일이 없었다. 몸소 제향을 올릴 때를 당하여서는 치재(致齋)와 산재(散齋)에서부터 자성(粢盛)·생기(牲器)·예폐(禮幣)·공축(工祝)에 이르기까지 공경히 하고 삼가서 혹여 조금이라도 소홀이 한 적이 없었으며, 섭사(攝事)하게 시킬 경우에는 시신(侍臣)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해마다 봄·가을에는 반드시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두루 배알하여 조상을 그리워하는 슬픈 마음을 폈으며, 이대(異代)의 분묘(奔墓)·사묘(祠廟)를 금호(禁護)하는 방도 또한 수토(守土)하는 이에게 제칙(提飭)하여 무너뜨리지 말게 하였다.

왕은 평상시 한가히 지내는 가운데도 항상 계신(戒愼)하는 마음을 지녀 엄공(嚴恭)한 자세로 하늘을 공경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상제(上帝)를 대하여 흠숭(欽崇)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혹 상위(象緯)084) 가 경계를 고하거나 수재(水災)·한재(旱災)가 발생하게 되면 척연(惕然)히 두려워 하면서 허물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책(自責)하였으므로 천심(天心)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으며, 구조(救助)하는 정성이 사교(辭敎)에 넘쳐 흘렀다. 조정의 신하들이 진언(進言)하는 경우에는 흡연(翕然)히 받아들여 시행하면서도 오히려 청납(聽納)하는 것은 넓지 못한 것을 염려하였으며, 대성(臺省)이나 경악(經幄)의 아룀이 간혹 군덕(君德)의 궐실(闕失)에 언급되면 부드러운 얼굴로 칭선(稱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국가와 백성에게 관계되는 일은 마음 내키는 대로 독단(獨斷)한 적이 없었으며 반드시 재집 대신(宰執大臣)으로 하여금 가부를 참작하게 한 연후에야 조처하였다. 설령 말이 중도(中道)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또한 모두 너그러이 용납하여 언로(言路)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왕의 한평생 동안에는 범안(犯顔)하면서 직간(直諫)하는 것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이 있지 않았고 또한 하정(下情)이 막혀서 통하지 않은 적도 있지 않았다. 작은 과오나 세세한 잘못은 소관(小官)일지라도 거의 모두 덮어서 감싸줌으로써 스스로 고치게 하였고 위노(威怒)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간혹 명의(名義)나 기강(紀綱)에 죄를 얻어 사유(赦宥)할 수 없는 자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법에 의거 재결(裁決)하여 용서하는 것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군신(群臣)들은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였고 근습(近習)들은 감히 권세를 남용하지 못하였으며 액속(掖屬)들은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였다.

정사(政事)085) 에 임하여 사람을 임용함에 있어서는 기구신(耆舊臣)을 높여 그에게 맡겼고 대신(大臣)을 존경하고 예우하였으며, 재야의 독서하는 선비를 널리 찾아 구하여 정초(旌招)하는 반열에 두었다. 더욱 인재를 배양하고 원기(元氣)를 부식(扶植)시키는 것을 일부(一副)의 규모(規模)로 삼아서 염퇴(恬退)하는 것을 권장하고, 요행(僥倖)을 바라는 것을 억눌렀으며 침체된 관원을 살펴서 임용하고, 외롭고 한미한 인재를 발탁하였으므로 백관들을 감독하여 바로잡을 수 있었다. 만일 선유(先儒)·명현(名賢)·충신(忠臣)·절사(節士) 가운데 미처 포양(褒揚)되지 못한 사람은 여론을 널리 채집하여 관작을 추증(追增)하고 치제(致祭)함으로써 학자들을 진작 면려시켰으며, 효자(孝子)·열녀(烈女) 가운데 더욱 특이한 사람은 그것이 하찮은 일반 백성일지라도 정려(旌閭)하거나 복호(復戶)함으로써 드러내어 표창하였다.

즉위(卽位)한 이후로 항상 삼가는 마음가짐으로 임하였는데 더욱 사대(事大)에 근신하여 시절(時節)마다 조공(朝貢)·진하(進賀)할 때에는 사개(使价)를 반드시 엄선하고 방물(方物)은 반드시 검사하였으며, 조서(詔書)를 받든 황화(皇華)의 칙행(勅行)이 나오면 상경(上卿)에게 명하여 국계(國界)에 나아가 맞이하게 하였으며, 교관(郊館)에서의 영송(迎送)은 반드시 몸소 행하였고 연향(宴響)에서의 수접(酬接)은 반드시 몸소 배석하였다. 혹 본국에서 국경을 침범한 백성이 있거나 대조(大朝)에서 표류되어 온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삼가 제후(諸侯)의 법도를 따라서 흠정(欽定)한 약속(約束)을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이런 때문에 두 성조(聖朝)에게 돌보아 사랑을 받은 것이 보통의 정도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리하여 내복(內服)과 똑같이 대우하여 대경(大慶)·대전(大典)이 있을 때면 그때마다 조유(詔諭)를 반하하는 등 예우(禮遇)가 월등하였다. 총뢰(寵賚)가 성대하였으며, 간절히 청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주문(奏聞)하였고 주문하면 반드시 허락하였기 때문에 과거 서쪽 지방에서 토구(土寇)가 발생하였을 적에도 진걸(陳乞)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특별히 원병(援兵)을 출동시켜 국경에 주둔시켰다.

신사년086) 흠정(欽定)한 황조(皇朝)의 《문헌통고(文獻通考)》에 기재된 본국의 일이 잘못 기재되어 변정(卞正)해야 될 사항이 있자 사신을 보내어 사유를 갖추어 아뢰니 특별히 바로잡아 고치게 하고 신본(新本)을 반강(頒降)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모두 이전의 사첩(史牒)에는 있지 않았던 대덕(大德)이요 광은(曠恩)인 것으로, 온 나라의 많은 백성들이 모두 왕의 정성이 이런 일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여겼다.

왕은 본성이 검약(儉約)하여 사치스러운 것은 엄격히 제거하였으며 법복(法服)과 장복(章服) 이외에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의복은 여러 번 세탁하게 하였고 유장(帷帳)은 혹 기워 입기에 이르렀다. 선왕(先王)의 궁실(宮室)을 받듦에 있어서는 낡은 것만 고치고 이전의 것을 그대로 보존시킨 채 서까래 하나 주춧돌 하나도 중식(增飾)한 것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서는 사사로운 연유(宴遊)가 없었고 밖으로 나아가서는 반오(盤敖)087) 의 낙(樂)을 끊었으므로 원유(苑囿)·여마(輿馬)·성색(聲色)·기완(器玩) 등 일체의 사치스런 물품이 털끝만큼도 자신에게 누(累)가 되는 일이 없게 하였다. 마음이 담박하기가 선비와 다름이 없어서 남면(南面)하는 〈임금의〉 존위(尊位)에 처해 있고 천승(千乘)의 부귀를 누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으며, 매양 정무를 청단(聽斷)하는 여가에는 서적(書籍)을 탐독하고 연구하느라 어떤 때는 밤중이 되어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근원을 탐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분석하여 간혹 저술한 것이 있기도 하였는데 거의 모두가 경잠(警箴)의 뜻을 표현한 것으로 모두 반우(盤盂)의 준칙(準則)이 되고 전모(典謨)의 헌장(憲章)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런 마음을 바탕으로 선비를 높이고 사문(斯文)을 돕는 정치를 실행하였으므로 표적(標的)이 단정하면 그림자가 곧고, 근원이 맑으면 물줄기가 깨끗한 것과 같아서 사람마다 수사(洙泗)088) 의 가르침에 감복하고 집집마다 낙민(洛閩)089) 의 책을 읽게 되었다. 왕이 자신을 완성시키고 남을 완성시키는 방법은 집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라로 파급시켜 나가게 하였으니, 이렇게 군사(君師)의 도리를 극진히 하게 된 데에는 근본이 있는 것이다.

왕은 돈후(敦厚)하고 과묵하여 조정에 나아가서는 침착하게 조용하였으며, 잘 살피는 것을 총명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여러 사물을 환히 통찰하는 총명함이 있었고, 사납게 다스리는 것을 위엄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큰 강기(綱紀)를 총람(摠攬)하는 위엄이 있었으므로 온화한 임금으로서의 풍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비록 체후가 미령한 때일지라도 연복(燕服)으로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았다.

왕이 이미 면상(免喪)한 임술년090) 겨울에 비로소 가례(嘉禮)를 행하고 김씨(金氏)를 비(妃)로 책봉하였는데 대조(大朝)의 고명(誥命)을 받아 중궁(中宮)에 정위(正位)하니, 곧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증 의정부 영의정(贈議政府領議政)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화(㕦)이다. 임신년091) 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는데 경인년092) 에 졸서(卒逝)하였다. 적사(嫡嗣)가 있는데 왕세손(王世孫) 환(奐)이 바로 그이다. 갑오년093) 11월 13일에 왕의 체후가 미령하였는데 결국 경희궁(慶熙宮)의 정침(正寢)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재위(在位)는 34년이고, 춘추(春秋)는 45세이다. 임종(臨終)에 대신(大臣)과 근신(近臣)·예관(禮官)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임종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으로 왕궁(王宮)·국도(國都)로부터 심산(深山)·궁곡(窮谷)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달려가 통곡하기를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였다.

세손(世孫)은 이미 황제(皇帝)의 명령에 따라 종묘(宗廟)의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는데 훌륭한 의표(儀表)와 훌륭한 덕으로 온나라의 기대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중앙과 지방이 모두 평안하여 아슬아슬하게 위험한 상황이 없었다. 진실로 왕의 깊은 인애와 후한 은택이 쌓여 흡족히 젖어들어 민심(民心)을 굳게 결집시켜 종조(宗祧)가 끝없이 이어나갈 경사의 기반을 닦지 않았다면 어떻게 후손에게 좋은 모유(謨猷)를 남겨주어 편안함을 누리게 한 것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왕은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깨달은 것을 근본으로 하여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를 통달하였으며, 백행(百行)의 근원인 효도를 돈독히 하여 온나라 사람이 추대하여 본받는 표준을 세웠고 만화(萬化)의 근원을 밝혀서 일세(一世)를 탕탕 평평한 데로 인도하였기 때문에 백성이 번식(蕃殖)되었고 나라가 평안하게 되어 태평 성대를 보존하여 온 것이 이제까지 34년이 되었다.

이제 아! 불망(不忘)의 끝에 변변치 못한 문자(文字)로 만분의 일이나마 묘사하려 하나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덕행(德行)과 사공(事功)이 사람들의 눈과 귀에 드러나 있는 것으로 말하여 본다면, 예(禮)로 섬기고 예로 제사지낸 것은 왕이 효성을 극진히 한 것이요, 듣지않고서도 본받고 간(諫)하지 않아도 받아들인 것은 왕이 스스로 몸가짐을 검속(檢束)한 것이요, 아랫사람에게 대할 적에는 간략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릴 적에는 너그럽게 한 것은 왕이 다스림을 편 것이다. 하늘이 이미 순수한 자질, 공검(恭儉)한 덕, 광대(光大)한 교화, 경사를 누릴 운(運)을 주었는데 오래도록 장수를 누리게 하지 않고 중년(中年)의 나이로 인색하게 앗아갔으니, 이는 우리 나라 만백성들의 영원한 슬픔인 것이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도(道)는 자신의 덕에 근본하여 백성에게서 이를 증험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후왕(後王)은 그 친족을 친근히하고 현인을 대우하며 백성들은 그 즐거움을 즐기고 그 이익을 이롭게 하는 것이 연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성대하도다" 【행 대호군 조인영(遭寅永)이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1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22면
  • 【분류】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072]
    공선왕(恭宣王) : 정조.
  • [註 073]
    각민왕(恪愍王) : 영조의 장자, 문조(文祖).
  • [註 074]
    장순왕(莊順王) : 영조.
  • [註 075]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 : 청나라 건륭제.
  • [註 076]
    경술년 : 1790 정조 14년.
  • [註 077]
    경신년 : 1800 정조 24년.
  • [註 078]
    인종 예황제(仁宗睿皇帝) : 청나라 가경제.
  • [註 079]
    포상(苞桑) : 뽕나무와 뿌리, 곧 근본이 단단함을 이름.
  • [註 080]
    본지(本支) : 본손 지손.
  • [註 081]
    대벽(大辟) : 사죄(死罪).
  • [註 082]
    영어(囹圄) : 감옥.
  • [註 083]
    신미년 : 1811 순조 11년.
  • [註 084]
    상위(象緯) : 천문(天文).
  • [註 085]
    정사(政事) : 인사 행정.
  • [註 086]
    신사년 : 1821 순조 21년.
  • [註 087]
    반오(盤敖) : 여러 곳을 돌아 다니며 놂.
  • [註 088]
    수사(洙泗) : 공자(孔子).
  • [註 089]
    낙민(洛閩) : 정자(程子)·주자(朱子).
  • [註 090]
    임술년 : 1802 순조 2년.
  • [註 091]
    임신년 : 1812 순조 12년.
  • [註 092]
    경인년 : 1830 순조 30년.
  • [註 093]
    갑오년 : 1834 순조 34년.

○諡狀:

國王姓李氏, 諱, 字公寶, 恭宣王之子, 恪愍王之孫, 莊順王之曾孫也。 始恭宣王, 晩未有嗣, 高宗純皇帝, 特賜福字宸翰, 庸示企待之意, 庚戌六月十八日, 嬪朴氏, 生王。 是日有瑞虹, 起於內苑之井, 人謂異兆。 王妃金氏, 取而子之, 將待其稍長, 建爲儲副, 先奏于大朝, 高宗純皇帝嘉而許之。 王, 以聰睿絶異之姿, 仁孝特出之性, 孩提嬉戲, 恒不離父王左右, 婉愉有深愛, 根於天賦, 恭宣王甚奇之。 而又克養之以正, 一言一動, 罔不躬加提敎, 遂底于德器夙著, 問學漸就。 因竗選賓僚, 用資講習, 質疑問難, 逈出思表, 國人皆延頸焉。 至庚申, 王年十有一, 冠而見于廟。 據前降旨意, 請封世子, 已蒙仁宗睿皇帝恩許, 冊勅未及發, 而恭宣王遽薨, 曾祖母莊順王妃 金氏, 命王權署國事。 具奏請襲, 封王位大朝, 降勅曰, ‘念爾世篤忠貞, 夙昭恭順, 藩維濟美, 懋紹先猷, 是庸俯循輿情, 允玆籲請, 封爾爲朝鮮國王, 繼理國政。 幷賜彩幣等物。 爾其率由典常, 以介景福, 亹荷龍光之渥, 賁彌昭燕, 譽以繩承。 克勤於邦, 宗社篤苞桑之固, 聿修厥德, 本支詒盤石之安。 欽哉, 毋替朕命。’ 王自先父王違豫之初, 親奉藥餌, 日夜焦遑, 曁罹大憂, 哭泣之哀, 執禮踰成人, 近臣衛卒, 擧鳴咽失聲, 不忍仰視。 及大臣百官, 伏閤請攝位, 王固不許, 旋奉曾祖妃曁母妃敦勸, 乃勉循焉。 王沖年嗣服, 雖未有所作爲, 亦不遑暇逸。 內則隆養於宮闈, 晨昏洞屬, 慈孝無間, 外則篤誠於奠饋, 朝晡攀號, 哀敬備至。 而諸凡敬天恤民, 毖祀詰戎之政, 惟祖先以來相授之範訓, 與先父王成憲是遵是承, 罔或有墜, 日御講筵, 討論經史, 以求古聖人精一相傳之心法, 歷代人辟治亂得失之蹟, 比于明習國事, 勵精圖理。 於是大小臣工, 兢兢相戒, 民以大和, 翕然稱盛德。 國制, 凡掖署奴婢, 世世不得齒平民者, 殆累萬數, 王, 矜之, 首以先父王遺意, 命焚其, 籍於通衢, 使得自樂其生。 百姓爲之皷舞感泣曰, ‘吾君之仁至矣。’ 庶可以導揚和氣, 迓續休命, 推以及於勸課農桑, 以厚民産, 撙節經費, 以裕國用, 征斂之不急者, 每議省減。 欠逋之已久者, 頻賜蠲免, 一切以不擾不煩, 休養涵育, 爲先務。 凡係賙賑, 豫加講究, 或捐內帑, 或停公稅, 宮府常膳, 州縣正供, 亦皆裁損, 以補其不給, 無所顧惜, 恒飭方伯守宰之任芻牧者。 時遣按廉, 考其勤慢而黜陟之, 故雖遐澨窮陬之民, 莫不如在階前。 而荒年饑歲, 終無溝壑之憂焉。 其遘厲者, 普濟以醫藥, 露骸者廣施以掩瘞, 嬰兒之棄于道者, 給料以養之, 流丐之離于鄕者, 裹糧以還之, 以實心行實政, 一念如傷, 藹然有不忍人者。 常以刑獄者, 民命所關, 而爲輔治之具也, 大寒暑, 輒行疏放之典, 以爲例。 大辟則必三覆之, 恐一夫有冤, 哀矜惻怛之至, 民皆悅服, 或至囹圄盡空。 歲辛未, 關西有土寇發, 詿誤者多, 王, 命將討之曰, ‘是不可不致王誅’, 及官軍戡定厥亂, 又亟命殲其魁, 其脅從者, 悉赦不治, 關西平, 咸服王大度焉。 王於治國, 每以明正學斥異端, 爲本, 時有西洋學之流播者, 一種邪妄之徒, 陰相傳習, 瀆亂彝倫, 王, 赫然怒曰, ‘玆乃干紀悖理之甚者, 必殄滅之無遺, 然後國可爲國, 人可爲人’, 遂窮覈而痛鋤之。 大揭邦禁, 俾無得更汙焉。 王之家法, 素嚴於奉先之節, 上下神祗之禮儀文品, 式燦然明備。 王祗奉之不敢有越, 當躬享也, 自致齋散齋, 至于粢盛ㆍ牲器ㆍ禮幣ㆍ工祝, 克敬克愼, 未或少忽, 使之攝事, 則令侍臣監之。 每歲春秋, 必歷拜先寢, 克展霜露之慕, 以至異代墳墓祠廟禁護之方, 亦加提飭於守土者, 俾勿壞。 王於燕閒之中, 常加戒愼, 嚴恭寅畏, 潛心對越, 以盡欽崇之道。 或値象緯之告警, 水旱之爲災, 則惕然兢懼引咎責躬, 有足以孚格天心, 而求助之誠, 溢於辭敎。 凡廷臣進言者, 翕受敷施, 猶恐聽納不廣, 臺省經幄之間, 有及於君德闕失, 則未嘗不溫顔而稱善。 其關係民國事務者, 未嘗徑情獨斷, 必使宰執, 參酌其可否, 然後處之。 設有不槪于中者, 亦皆優容, 以開言路, 以是, 終王之世, 未有以犯顔直諫, 獲罪者, 亦未有下情壅閼而不通者。 若其微眚薄過, 雖小官, 率多庇覆, 使之自改, 不以威怒加焉。 而其或得罪於名義紀綱, 不得以赦宥者, 一裁以法, 無所假貸。 由是, 群下愛而畏之, 近習不敢招權, 掖屬不敢犯科。 其臨政用人也, 尊任耆舊, 敬禮大臣, 旁求林下讀書之士, 列於旌招。 而尤以培養人材, 扶植元氣, 爲一副規模, 奬恬退而抑僥倖, 甄淹滯而拔孤寒, 用能董正于百僚。 若先儒名賢忠臣節士之未及褒揚者, 博採輿論, 加以爵誄, 以風厲學者, 孝烈之尤異者, 雖編戶匹庶, 或旌其閭, 或復其家, 以表之。 嗣服以後, 小心翼翼, 尤謹於事大時節, 貢賀使价, 必選方物, 必檢皇華奉詔之行, 爰命上卿儐之國界, 郊館之迎送, 必躬將之, 宴饗之酬接, 必躬陪之。 或有本國犯境之民, 大朝漂海之人, 則必恪遵侯度, 罔敢少違於欽定約束。 是以, 蒙被兩聖朝字小之眷, 夐出尋常。 視以內服, 大慶大典, 輒頒詔諭, 禮遇殊絶。 寵賚便蕃, 而有懇必奏, 有奏必許, 以至曩年西寇時, 不待陳乞, 特發援師, 屯於境上。 而辛巳以欽定皇朝《文獻通考》中本國事, 有先誣卞正者, 專价具奏特賜釐改, 至以新本頒降者, 卽皆往牒所未有之大德曠恩也。 環域兆庶, 咸以爲王之忱誠, 有以致此。 王素性儉約, 痛袪奢靡, 法章之外, 不御錦綺殷着。 累加澣濯, 帷帳或至補綴。 奉先王宮室, 弊則改之, 仍舊而已, 不以一椽一礎, 有所增飾。 入而無宴遊之私, 出而絶盤敖之樂, 苑囿ㆍ輿馬ㆍ聲色ㆍ器玩, 一切芬華之物, 擧無纖毫自累。 澹泊與儒素無異, 若不知處南面之尊, 享千乘之富也, 每於聽斷之暇, 玩繹篇籍, 或至夜分, 不以爲勞。 探賾乎天人性命之原, 剖析乎王覇義利之分, 間有述作, 多寓箴警, 皆足以準則乎盤盂, 憲章乎典謨。 發以爲崇儒右文之治, 則標端而影直, 源淸而流潔, 人服洙泗之敎家, 誦之書。 王所以成己成物, 自家而國, 盡君師之道者, 蓋有本矣。 王, 敦厚寡言, 臨朝淵凝, 不以察爲明, 而明有以照臨庶物, 不以猛爲威, 而威有以摠攬宏綱, 穆然有君人之度。 而雖値有不安節, 不以燕服, 接臣隣也。 王, 旣免喪, 壬戌冬, 始行嘉禮, 冊金氏爲妃, 膺大朝誥命, 正位中宮, 卽永安府院君贈議政府領議政祖淳之女也。 生一子, 曰, 壬申冊封王世子, 庚寅卒。 有嫡嗣, 王世孫奐是也。 甲午十一月十三日甲戌, 王, 不豫, 薨于慶熙宮之正寢。 在位三十四年, 春秋四十有五。 臨終, 命大臣及近臣禮官入侍, 正其終也。 內自王宮國都, 至于深山窮谷男婦髫白, 莫不奔走號哭, 如喪父母。 而世孫, 已以皇命, 主鬯, 令儀令德, 一國係望, 故中外晏然, 無綴旒之危。 苟非王深仁厚澤, 積累淪浹, 固結乎民心, 以基宗祧無疆之休, 則曷能致貽燕而垂裕如此哉? 王, 本之以躬行心得, 達之以天德王道, 篤百行之源, 而準四境於推放, 澄萬化之本, 而導一世於平蕩, 民以蕃息, 國以靖謐, 保有太平, 三紀于玆。 則今於於乎! 不忘之餘, 雖欲以區區文字, 摸畫其萬一, 不可能也。 然而試言, 其德行事功之著人耳目, 則事之以禮, 祭之以禮, 王之所以致孝也, 不聞亦式, 不諫亦入, 王之所以檢身也, 臨下以簡, 御衆以寬, 王之所以出治也。 天旣畀之以純粹之質, 恭儉之德, 光大之化, 亨嘉之運, 而不使之壽考悠久, 嗇之以中身, 此東土含生沒世之悲也。 傳曰, ‘君子之道本諸身, 徵諸庶民’, 夫豈非親賢樂利之有由也歟? 噫! 其盛矣。" 【行大護軍趙寅永製。】


  • 【태백산사고본】 35책 1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22면
  • 【분류】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