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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 7월 21일 을축 5번째기사 1832년 청 도광(道光) 12년

영길리국 선박의 교역 요청에 대해서 자문을 보내오다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도광(道光) 12년 7월 초4일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 등의 첩정(牒呈)을 첨부한 공충도 관찰사(公忠道觀察使) 홍희근(洪羲瑾), 수사(水使) 이재형(李載亨)이 인차(鱗次)로 치계(馳啓)한 바에 의하면, 본년 6월 26일 유시(酉時) 경에 이양선(異樣船) 1척이 본주(本州) 고대도(古代島)의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는데,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서 역학(譯學) 오계순(吳繼淳)을 차송하고 본 지방관 홍주 목사 이민회와 수군 우후 김형수로 하여금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달려가서 합동으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언어가 통하지 않아 문자를 대신 사용하여 이곳에 오게 된 동기를 상세히 힐문하였는 바, 그들 대답에 ‘우리들은 모두 영길리국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 땅에 사는 사람들로서 선주(船主)는 호하미(胡夏米)인데, 서양포(西洋布)·기자포(碁子布)·대니(大呢)·우단초(羽緞綃)·뉴자(紐子)·도자(刀子)·전도(剪刀)·요도(腰刀)·납촉(蠟燭)·등대(燈臺)·등롱(燈籠)·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천리경(千里鏡) 등의 물품을 가지고 귀국의 소산물을 사려고 본년 2월 20일 배에 올라 본월 26일에 이곳에 왔으니, 귀국의 대왕에게 전계(轉啓)하여 우호(友好)를 맺어 교역하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동선(同船)의 선원(船員)은 총 67인으로 4품(四品) 자작(子爵)이라고 칭하는 선주(船主) 호하미(胡夏米)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로서 과계(夥計)와 초공(梢工)052) ·수수(水手)의 복장은 혹은 양포(洋布), 혹은 전자(氈子), 혹은 삼사포(三梭布), 혹은 단자(緞子)이고, 옷의 양식은 혹은 포자(袍子)로, 혹은 괘자(褂子)로, 혹은 단삼(單衫)으로 하였으며, 모자(帽子)는 양식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그 빛깔이 혹은 붉고 혹은 검고 혹은 푸르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풀로 엮은 것도 있었습니다. 배는 공선(公船)인데 표호(票號)는 안리(安利)이고, 넓이는 6파(把), 길이는 30파였으며, 의간(桅竿)에는 층범(層帆)이 3개 달리고 또 물을 긷는 작은 배 4척이 있었습니다. 배 안의 집물(什物)을 일일이 점검하려고 하니 저들 말이 교역하기 전에 멀리서 온 사람의 물건을 보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며 여러 차례 설왕 설래(說往說來)하였으나 끝내 보여 주지 않았는데, 이 배는 왕래하면서 행상을 하는 배로서 풍랑을 만나 표착(漂着)한 것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사세가 강박할 수 없어 상세히 검열하지 못하였습니다.

개유하기를, ‘번방(藩邦)의 사체(事體)로는 다른 나라와 사사로이 교린(交隣)할 수 없고, 더구나 우리 나라는 자래로 전복(甸服)053) 과 가까이 있어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아뢰고 알려야 하므로 임의로 할 수 없는데, 너희들이 상국(上國)의 근거할 만한 문빙(文憑)도 없이 지금까지 없었던 교역을 강청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니, 요구에 응할 수 없다. 지방관이 어떻게 경사(京司)에 고할 것이며 경사에서는 또 어떻게 감히 위에 전달(轉達)할 것인가?’ 하니, 저들이 개유하는 말을 듣지 않고 줄곧 간청하여 전후로 10여 일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본년 7월 17일 유시(酉時) 경에 조수(潮水)를 타고 서남쪽을 향하여 갔다는 등인(等因)으로 구계(具啓)하니, 이에 의거하여 조량(照諒)하기 바랍니다. 주거(舟車)가 통하는 곳에서 유무(有無)를 교역하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일이나, 번신(藩臣)은 외교(外交)가 없고 관시(關市)에서 이언(異言)을 살피는 것이 더욱 수방(守邦)의 이전(彛典)에 속하는데, 소방(小邦)은 대충 분의(分義)를 아는 만큼 각별히 후(侯)의 법도를 지켜 비록 해마다 의례히 열리는 개시(開市)054) 에 있어서도 오히려 반드시 칙자(勅咨)의 지휘를 기다려서 행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영길리국은 지리상으로 동떨어지게 멀어 소방과는 수로(水路)의 거리가 몇 만여 리가 되는지 모르는 처지에 망령되이 교린을 핑계하고 교역을 억지로 요구하였으니, 사리에 타당한 바가 전혀 아니고 실로 생각 밖의 일이었습니다. 경법(經法)에 의거하여 시종 굳이 방색(防塞)하였더니, 저들도 더 어쩌지 못함을 알고 바로 돌아갔습니다. 교역에 관한 한 조항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겠으나, 변경(邊境)의 정세에 관한 일인만큼 의당 상세히 보고해야 하겠기에 이렇게 이자(移咨)하는 바이니, 귀부(貴部)에서 자문 내의 사리(事理)를 조량하여 전주(轉奏) 시행하기를 바라고 이에 자문을 보내는 바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80면
  • 【분류】
    외교-구미(歐美)

  • [註 052]
    초공(梢工) : 사공(沙工).
  • [註 053]
    전복(甸服) : 오복(五服)의 하나. 기내(畿內)를 말함. 왕성(王城)에서 5백 리 이내를 전복이라 함.
  • [註 054]
    개시(開市) : 우리 나라와 청(淸)나라 사이에 교역을 위하여 봄·가을로 열었던 시장을 말하는데, 서쪽은 중강(中江)에서 열렸고 북쪽은 회령(會寧)에서 열렸음.

○咨文:

道光十二年七月初四日, 據公忠道觀察使洪羲瑾, 水使李載亨, 鱗次馳啓, 備水軍虞候金瑩綬, 洪州牧使李敏會呈稱, 本年六月二十六日酉時量, 異樣船一隻, 到泊於本州古代島安港, 聞甚驚駭, 就差譯學吳繼淳, 該地方官洪州牧使李敏會, 水軍虞候金瑩綬, 馳詣船泊處, 眼同問情, 語言不通, 替用文字, 詳詰來由, 則回稱 ‘俺們俱是英吉利國蘭墩忻都斯担地人, 船主 夏米, 要以西洋布、碁子布、大呢、羽緞綃、鈕子、刀子、剪刀、腰刀、蠟燭、燈臺、燈籠、琉璃器、時辰表、千里鏡等貨, 和買貴國所産物件, 本年二月二十日騎船, 本月二十六日到此, 乞轉啓貴國大王, 設誼交易’ 云云。 同船騎乘總計六十七人, 除船主胡夏米, 稱四品子爵外, 俱係行商, 夥計與梢工水手服着, 則或洋布, 或氈子, 或三梭布, 或緞子, 衣制則或袍子, 或褂子, 或單衫, 帽子則制樣不一, 而其色或紅或黑或靑或織, 草船則稱以公船, 票號安利, 闊六把, 長三十把, 桅竿層帆三箇, 又有汲水小船四隻。 船中什物, 欲爲一一點驗, 則彼人謂以未許交易之前, 遠客之物, 不當要見, 屢回往復, 終不開示, 此是往來行商之船, 與因風漂到者有異, 勢難强迫, 不得詳閱。 諭之 ‘以藩邦事體, 固不當與他國私交, 況我本國, 密邇甸服, 事無巨細, 悉經奏知, 不敢擅便, 偁們旣無上國可據之文憑, 强要前代未有之市易, 事涉乖當, 理難曲從。 地方官何敢告京司, 京司亦何敢轉達?’ 云爾, 則彼人不聽開諭, 一向懇要, 前後相持, 旬有餘日, 至本年七月十七日酉時量, 乘潮向西南而去等因, 具啓據此竊照。 舟車所通, 懋遷有無, 雖云有國之常事, 藩臣無外交, 關市譏異言, 尤係守邦之彝典, 小邦粗知義分, 恪遵侯度。 雖逐年互市之在例應行者, 猶必待勑咨指揮。 今此英吉利國地勢夐絶, 與小邦, 水路相距, 不知爲幾萬餘里, 而妄托交隣, 强求市易, 大非事理所宜, 實出圖慮之表。 援據經法, 終始牢塞, 彼亦自知無辭, 旋卽回還。 交易一款, 今固無容更言, 而事係邊情, 理宜具報, 爲此合行移咨, 煩乞貴部照詳咨內事理, 轉奏施行, 須至咨者。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80면
  • 【분류】
    외교-구미(歐美)